2019년 4월 4일 목요일

◆ 등본 ‘낯설게 하기’로 바라보다 - 우리동네 주민센터 방문기 [by 물파스]

[◆ 등본 ‘낯설게 하기’로 바라보다 - 우리동네 주민센터 방문기]


등본이 필요해 집에서 20분 거리에 있는 우리 동네 주민 센터를 방문했습니다.
인터넷으로도 발급이 가능하다고 하던데, 집에서 멀지 않으니 그냥 직접 방문해보기로 합니다.

< 우. 리. 동. 네. 주. 민. 센. 터 >

주민 센터는 건물 2층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반드시 1층을 지나쳐야 했습니다.
“꺄르르 ~깔! 깔!” ... 1층에 자리한 구립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형형색색의 놀이동산
풍선처럼 너무나 다채롭게 흘러나와 고막이 마치 단맛을 느낀 듯합니다. ... 그렇게 귀에서 단맛이
느껴질 때쯤 시선은 건물 오른편 귀퉁이로 향했는데, 그곳에 폐형광등 수거함이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또 건물 왼편으로는 '유용미생물(EM) 배양액'을 약숫물처럼 무료로 받아갈 수 있는 거대한
탱크(공급기)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유용미생물(EM) 배양액은 물에 희석해 사용하면 친환경
주방세제로 쓸 수도 있고, 악취 및 곰팡이 제거에도 꽤나 쓰임이 좋다고 합니다.

건물 입구 앞 알림판에는 통장 모집공고와 함께 동네소식을 알리는 몇 가지 공고사항이 적혀 있었고,
그 옆으로 나란히 대형마트 전단지처럼 생긴 윤기 나는 컬러풀한 종이에는 얼굴과 죄명, 신체특징, 주소,
나이 등이 상세하게 적혀있는 지명수배자 명단이 게시되어 있었습니다. 참고로 수배자의 70% 정도는
모두 사기범죄자였습니다.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가다 층계참 대형거울 앞에 서서 얼굴근육을 격하게 풀어봅니다.
거울 속 나는 여전히 청춘이지만 그 청춘이 바라보는 거울 밖의 나는 오늘따라 왠지 더 쓸쓸하고
늙어 보입니다. ... 나이를 먹는다는 것, 아니 좀 더 잔인하게 <“누가 늙은 사람인가?”> 라고 물어본다면
모두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명쾌한 답이 있을 수 있을까? ~ 노년 및 노인의 복지정책을 연구하는
팻 테인 교수(Pat Thane. 런던대학 킹스 칼리지. 역사학)는 이렇게 답합니다.

<‘늙었다’는 소리를 들어도 항의하지 않는 사람>

아무리 현대의학이 발전했다고 해도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노년의 신체적 특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 남자는 머리카락이 빠지고 여자는 젊을 때보다 얼굴에 털이 더 많이 자라나는 경향이
나타납니다. 청력은 쇠퇴하기 시작하고 칼슘 부족으로 시력이 저하됩니다. 또한 몸은 나빠진 시력을 위해
부족해진 칼슘을 다시 눈에 축적하게 만드는데, 이 때문에 신체 다른 부분에서 칼슘부족으로 뼈가
물러지고 자주 부러지는 일들이 발생합니다. 피부는 건조해지고 탄력이 줄어들어 주름이 늘어나고
살은 힘없이 처지게 됩니다. 코는 커지고 입은 쪼그라듭니다. ... 그리고 이러한 노화의 과정은 전반적으로
노인의 신체를 젊었을 때보다 약간은 줄어들게 만듭니다.[@참고: 노년의 역사/ 팻 테인/ 글 항아리 출판]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 역시 “늙었다“라는 소리에 적극적으로 항의하지 않는 날이 찾아올 것이며,
그때쯤이면 주민 센터 알림판의 수배자 전단지 크기도 현재보다는 조금은 더 작아지게 될 것입니다. 물론
내가 ‘늙음’에 대해 항의하지 않는 순간까지 그들이 검거되지 않는다면 말이죠.

거울 앞에서 잠시 사색에 잠겼다가 밑에서 들려오는 한 무리의 걸음 소리에 다시 2층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약간의 온기와 함께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이곳저곳을 서성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의도하지 않았지만, 나 또한 (고개를 약간 치켜든 상태에서)주민들과 섞여
주민 센터 이곳저곳을 서성거립니다.

책장에 꽂혀있는 몇 권의 책들을 훑어보다가 책장 옆으로 공구 대여함이 보입니다.
살면서 일 년에 꼭 한두 번은 특수공구가 필요할 때가 생기는데 ... 해머드릴, 목재용 전기톱, 렌치세트 등
년에 한두 번 사용하려고 구매하기에는 조금은 부담스러운 가격의 특수공구들을 주민들을 위해 센터에서
무료로 대여해 준다고 합니다(3일)

공구 대여함 뒤쪽으로 돌아 나오니 자동혈압측정기가 보입니다. 본인의 혈압을 측정하던 할아버지를
구경하던(혹은 다음 순서를 기다리던) 몇몇의 어르신들을 구경합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자동혈압측정기
옆에는 체성분분석기(인바디)까지 설치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본인의 몸 상태를 점검하던
어떤 아주머니는 나에게도 한 번 해보라며 권유합니다. 괜찮다고 말하자 아주머니는 계속 말을 이어갑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칼 가는 사람이 와서 공짜로 칼도 갈아주고 가끔은 자전거 수리하는 분도 오셔서
재능기부를 하신다고 ~ 요새 주민 센터가 좋은 행사를 참 많이 한다며 칭찬 일색이었습니다. 그때 복지과
담당 직원이 지나가면서 한마디 거듭니다. 원래는 동네에서 열쇠집하는 아저씬데 칼 가는 솜씨가 좋아
자발적으로 봉사하시는 거라며, 사거리 복권방 옆에 있는 열쇠집이라며 위치까지 알려줍니다. ... 그러자
아주머니는 큰 깨달음을 얻은 듯 그 즉시 나를 보며 얘기합니다.

"원래는 사거리 복권방 옆에 있는 열쇠집 아저씬데, 칼을 아주 잘 간데요 ~ "

분명 동시에 같이 들었는데, 아주머니는 반복하여 내게 칼 가는 아저씨의 정체를 재확인 시켜줍니다.
흥이 났는지 복지담당 직원이 또 다른 정보를 전해줍니다. 오늘 저녁 3층 강당에서 요가와 체형교정
운동 강습이 있다며 참석하면 도움이 많이 될 거라 얘기합니다. 체형교정 운동이 요가와 어떻게 다른지,
또 어떤 운동인지 너무 궁금해서 물어보려다 그만 둡니다. 평소 주민 센터를 방문할 일이 거의 없었던
터라 나름 볼거리와 다양한 행사가 많다는 사실에 생각보다 많이 놀랐지만, 세련되지 못한 주민처럼
보일까봐 일부러 티를 내지는 않았습니다.

번호표를 뽑고 자리에 앉아 기다리면서 주위를 계속해서 찬찬히 둘러봅니다.
각종 민원서류를 발급하는 창구 직원 뒤쪽으로는 열일하는 복사기와 프린터가 수많은 서류들을 계속해서
쏟아내고 있었는데, 그 광경이 마치 동네 목욕탕에 가면 목구녁 깊숙이 칫솔을 넣고 ‘우~웩!’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흔한 아저씨와 닮아 있고, 또 만취한 중소기업 과장의 구토하는 모습과도 많이 닮아 있었습니다.

얼마의 비용을 지불한 사람들은 건네받은 서류를 한동안(누가 생각해도 짧은 시간이지만, 꼭 ‘한동안’
이라고 표현하고 싶게 만드는 참 미묘하게 짧은 시간)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서 들여다봅니다. 자세히
들여다봐도 가족관계나 집 주소 등을 빼놓고는 분명 새로울 것이 없어보였는데 본인들은 큰 깨달음을 얻은 듯,
입을 야무지게 악다물고 주민 센터를 나갑니다. 그러는 동안에도 센터에는 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들고나가며
분주합니다.

우리 동네에는 생각보다 많은 주민이 사는 것 같았습니다. 지역별(구별) 인구통계를 살펴본 적이 없으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 동네에 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에도 몇 명의
주민들이 센터를 방문합니다. 내 차례가 되어 신분증을 제시하고 등본을 발급받습니다. ... 비용을 지불하고,
그리고 나 또한 한동안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서 서류를 뚫어져라 쳐다봅니다. 낯설지 않은 가족들 이름과
집 주소를 확인하고, 무언가 큰 깨달음을 얻은 듯한 얼굴표정과 동시에 악다문 입모양을, 나보다 순서가 늦은
다른 주민들에게 선보입니다.(원래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 그리고 등본에 계급이 표시되지 않았다는 걸
다행이라 생각할 때쯤 서글픈 상상하나 떠오릅니다. ~ 시나브로 등본이 낯설어 집니다.

(◆ 등본에서 내 이름 하나만 남게 되거나, 등본에서 내 이름 하나만 사라지거나 ... )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는 원래 러시아 형식주의의 대표적 이론가인
‘빅토르 시클롭스키(victor Shklovsky)’가 정의한 예술기법이론입니다. 특히 문화예술 영역이
자기정체성을 공고히 유지하기 위해서는 창조나 창의, 즉 기존에 없던 것을 새롭게 만들어 내거나
원래 있던 것을 재구성하여 전혀 다른 새로운 시선을 끊임없이 제공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시선이나 사유들은 보편적으로 우리의 반복되는 일상에서보다는 새로운 경험,
이를테면 여행(탐험)이나 봉사활동, 삶의 위기(사고, 질병, 사별 ... ) 등을 경험할 때 얻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마디로 지루하고 반복적인 일상보다는 그런 일상에서 과감히 탈출했을 때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새로운 사유를
얻을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 더불어 일상의 탈출은 곧 <낯선 경험>이 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낯선 경험>을 일상처럼 자주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낯선 경험은 말 그대로
삶에서 어쩌다 한 번씩 나를 찾아오는 ‘(낯선)손님’과 같습니다. 결국 <일상의 탈출 = 낯선 경험> 이므로,
새로운 시선과 창의적 아이디어를 (많이)얻으려면 자신의 일상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러나 일상을 포기하면
그 순간부터 ‘일상포기의 삶’ 자체가 또 다른 일상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아주 많이(자주)
<낯선 경험>을 만들어(생산) 낼 수 있을 것인가? ~ 이러한 고민 끝에 나온 발상이 바로 시클롭스키의
<낯설게 하기>인 것입니다.

시클롭스키의 <낯설게 하기> 이론은, 낯선 경험을 일상처럼 자주 할 수 없다면 차라리 반복되는 일상 자체를
낯설게 바라보자는 의미입니다. 매일같이 마주하는 상황이나 풍경 등을 마치 처음 보는 아주 낯선 일처럼
바라보는 것인데, 이는 <의심과 반성>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즉 평소에 너무나 당연시하던 일들을 한번쯤 가볍게
의심해 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인데 ... 예를 들면, 신호등에 파란불이 켜지면 건너고, 빨간불 상태면
왜 정지해야만 하는지, 그런 규칙은 누가 정했으며 또 어떻게 시작됐는지 같은 의심과 반성 말입니다.
좀 더 알기 쉽게 설명해본다면, 수십 년을 신호등 체계아래서 생활해온 어른에게는 신호등 체계는 아무런 의심 없이
그냥 당연하게(수동적으로) 받아들여야할 공동체의 암묵적 약속입니다. 그러나 이제 막 말을 배우고 주변의 사물을
인식하기 시작한 아기에게는 신호등의 (교통)체계를 논하기 이전에 아예 <신호등> 이라는 그 둔탁한 ‘사물’ 자체만으로도
매우 신기한(낯설다) 경험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아이의 시선이 <낯설게 하기>인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건
수신자가 정보를 보낸 송신자의 의도대로 정보를 일방적으로(수동적으로)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
바로 <낯설게 하기>의 핵심인 것입니다. 그래서 신호등을 교통 시스템의 부속이 아닌 거리의 <조형물>로 바라보는
시선도 <낯설게 하기>의 좋은 예라 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낯설게 하기>는 평범한 일상을 너무 당연하게만 받아들이지 말고 한 두 걸음 뒤로 물러나
일정한 거리를 두고 지켜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일상을 <낯설게 하기>로 만들면 평소에는 잘 보이지
않던 것들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거기서 우리는 새로운 시선과 참신한 아이디어를 얻게 될 것입니다.
[@ ‘낯설게 하기’는 생각(사유)과 사물, 현상 등 다양한 분야로 확장해서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낯설게 하기>를 직관적으로 느껴보기 위해 하나의 사례를 참고해 봅니다.

[◆ 띵동! ~ 띵동! ... 쿵! 쿵! 쿵!
적막이 흐르던 새벽 3시 무렵, 누군가 철수의 오피스텔에 찾아와
벨을 누르고, 문 또한 급하게 두드립니다. 문을 열어보니 철수의 20년 지기
동건 이가 서있었습니다. ~ “지금 회사에서 물건 찾아오기 게임을 하고 있는데,
대략 가로 1미터, 세로 약 2미터 정도 되는 철판을 찾고 있어! ~ 가장 먼저
찾아오는 사람에게 상금이 자그마치 1억이다! 철수 니가 도와주면 상금 절반인
5천만 원을 줄께! ~ 도와주라!“ ~ 취업에 성공해 이제 입사 1개월 된 동건은
자신을 포함한 신입사원 전원에게 회사에서 과제를 주었다고 합니다.
철수는 5천만 원이라는 거액에 잠시 흔들렸지만, 새벽 3시인 지금 동건을 도와줄
마땅한 방법이 없었습니다.

“미안하다 동건아! ~ 아무리 생각해도 당장은 방법이 없는 것 같다!”

그렇게 말하곤 철수는 가로 1미터, 세로 2미터짜리 오피스텔 철문을 닫았습니다.]

우리는 보편적으로 자신이 사는 집의 문을 <큰 철판>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멍청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반복적인 일상이 본인의 삶과 관계된 주변의 모든 사물과 사유와 현상들을 그냥 당연하게
받아들이도록(수동적, 자동적) 만들면서 그 어떤 새로움이나 신선한 아이디어를 발견할 수 없도록 하나의
익숙한 패턴(일상)을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패턴이 형성됐다는 것은 결국 <‘일상’이라는 정보 송신자>의
의도대로 우리의 삶이 무기력하게 그냥 그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 그래서 창의적인
생각이나 새로운 시선을 얻으려면 일상 자체를 <낯설게 하기>로 만듦으로써 가능성을 높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낯설게 하기>는 이후 독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1898~1956)'가 연극이론에
도입하면서 중요한 결실을 맺습니다. 연극은 무대와 객석의 경계가 분명합니다. 따라서 본인이 관객이라면
<"나는 지금 연극을 거리를 두고 보고 있다(낯설게 보다)">라는 감정이 브레히트 연극이론의 핵심입니다.

무대 위, 배우의 연기가 압도적으로 뛰어나다면 관객은 자신도 모르게 그 배우의 연기에 <동화>되어 버립니다.
<동화 되었다>는 것은 결국 관객이 연극에 푹 빠져버렸다는(몰입) 뜻인데 이는 연극을 낯설게 바라보지 못했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브레히트의 <낯설게 하기>는 관객들의 동화를 가장 꺼려해야할 행동이라 주장합니다.

관객이 무대장치와 배우의 연기에 너무 강하게 몰입하고 동화된다면(감정이입), 어느 순간부터는 무대와
객석의 경계가 흐려지면서 연극을 "보고있다"가 아니라 "연극을 주입당하고 있다(송신자의 의도대로)"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극의 각종 무대장치와 배우의 훌륭한 연기에 관객이 감정적으로
동화된다면 관객은 연극의 배후에서 펼쳐지는 여러 복합적인 관계들을 통합적 시선에서 바라볼 수 없게
됩니다. 한마디로 연극이 연극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진짜 현실처럼 받아들여지는 매우 위험한 순간이
찾아올 수도 있다는 것이죠. ~ 이쯤 되면 관객의 상태는 수많은 등장인물들의 각각의 성격과 플롯 및
장치(데우스 엑스 마키나. deusexmachina)의 배치문제 등이 어떻게 절묘하게 섞여서 한 편의 연극으로
흘러가는지를 전혀 파악할 수 없게 됩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 쓰인
무대 기법의 하나. 초자연적인 힘을 이용하여 극의 긴박한 국면을 타개하고 결말로 이끌어 가는 기법이다.
에우리피데스가 즐겨 쓴 수법으로, 기중기와 같은 기계를 이용해서 갑자기 신이 공중에서 나타나
위급하고 복잡한 사건을 해결하는 데서 나온 말이다.(다음백과 참조)]

그래서 브레히트는 연기자에게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는 사항이 <"주인공이 고통 받는 장면이 나오면
함께 아파하지 말고, 아 이것은 한 편의 연극이구나.">라고 관객 스스로가 느낄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했으며, 그것의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낯설게 하기>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가끔씩 우리의 (막장)드라마
시청자 게시판을 들여다보면, 배역(특히 악역)에 대해 너무 과몰입한(동화) 사람들 상당수가 캐릭터의 특징과
(상징적)소품 등이 드라마의 플롯상에서 어떤 인과성이나 상관성을 가지고 있는지 파악하기보다는 무조건적,
일방적 비난만을 쏟아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럴 경우 드라마 전체(종합)가 아닌 부분만 남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제발 현실과 드라마를 구분 좀 하라'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 결론적으로 브레히트의
<낯설게 하기> 이론은 동화되는 감정을 의도적으로 파괴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연극을 수시로 모니터링
하게하고(‘거리를 두고 낯설게 보라!’) 연극의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할 수 있게끔 하라는 것입니다.

보통의 시각에서 연극이나 영화, 드라마 속 배우들이 연기를 압도적으로 잘 한다면 그것만큼 보는 이를
즐겁게 하는 것은 없을 겁니다. ... 그런데 이렇게 너무나 당연시되는 사실들에서 한 발짝 물러나 사태나
상황을 <낯설게 바라본다면(낯설게 하기)> 극을 보는 새로운 시선이 생겨날 것입니다. 흔한 일상(적)이라
생각했던 것에 대하여 한 번쯤 낯설게 바라봄으로써 새로움 ~ 예를 들면, 그 일상의 이면에서 조용히
흐르고 있는 숨은 역사성이나 변증법적으로 발화되는 창발적 모습 등을 발견하라는 거죠. ... 그래서 저도
더 이상 등본을 사무적(일상적)으로만 보지 않고, 약간의 거리를 두어 낯설게 바라보려 합니다. 너무나
당연해서 그동안 “공문서!” 그 이상의 의미부여를 하지 않았던 등본을 예전 보다 낯설게 바라보며 좀 더
새로운 시선을 찾아내고 싶다는 뜻입니다. (@소모적 의미부여가 아닌 창조적 발견)

(◆ 등본에서 내 이름 하나만 남게 되거나, 등본에서 내 이름 하나만 사라지거나 ... )

거지같은 서글픈 상상에 심장 밑 어딘가에 숨어있던 울컥한 마음이 목젖 언저리까지 꾸역꾸역
기어 올라와 쓸쓸히 머물다 사라지기를 여러 번, 그러다 생뚱맞게 작년 말 친구들과 맥주잔을 기울이던
상황 하나가 추가됩니다.

"나는 연합뉴스TV 기상캐스터! ~ 걔 누구더라 걔 있잖아! ~ OO가 참 좋더라!"
"나는 MBC가 제일 좋던데 ~ “
“기상캐스터보다는 스포츠 아나운서가 더 낫지”
"소심한 놈들 ~ 원래 (모든)기상캐스터와 스포츠 아나운서는 그냥 다 좋은 거야!"

"4시 44분! ~ 그 뭐냐 시간 보면 항상 444에 걸려! ~ 그거랑 똑같아!
기상캐스터 나올 때면 항상 와이프가 옆에 있어! ~ 아니 없다가도 그냥 생겨나!
막 생겨! ... 그러면 나도 모르게 채널 딴 데로 돌리는데, 처음엔 별 신경 안 쓰다가
몇 번 반복되니까 와이프가 한마디 하더라고 ‘둘이 연애 하냐? ~ 뭐가 찔려서 채널 돌리는데?’ 라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 거야 ‘어 그냥 뉴스 끝나서’ 라고 대충 얼버무리는데, 이게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어느 순간부터 나 스스로 자기검열을 하고 있는 거야 ~ 그래서 슬퍼!“

“슬프긴 뭐가 슬프냐? ~ 그래도 와이프랑 애들이랑 함께 살 때가 좋은 거야.”

캘리포니아 대학의 세계적인 사회학자 아네트 로손(Annette Lawson)은 간통을 바라보는
남녀의 시각이 어떻게 다른지 본인의 책 <애인을 꿈꾸는 이유>에서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여성들은 일반적으로 결혼생활에서 누리지 못하는 감정적인 원인을 간통의 이유로 내세우는
경향이 강하다고 합니다. 설문에 참여했던 대부분의 여성들은 하나같이 간통을 통해 자기 자신을
재발견 하는 기회가 됐으며, 더 나아가 이전보다 더 발전된 자신을 경험했다며 본인의 간통을
<미화>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 반면 남성들은 간통을 결정하면 가장 우선적, 실질적으로 고려하는
사항이 바로 <간통으로 유발될 수 있는 위험>이었다고 합니다.

결론적으로(아네트 로손의 연구를 전적으로 신뢰한다면) ... 여자에게는 간통이 자기 자신이
새롭게 태어나고 현재보다 더 나은 미래로의 전진을 뜻하는 일종의 진보적 출구의 의미가 될 것이며,
반면 남자에게는 본격적으로 위험부담이 시작되는 입구의 압박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흔해빠진 지하철 손잡이처럼 질기게도 참 질기게도 버텼지만 결국 가족 순위권 끄트머리로 밀려나
등본에 위태롭게 박혀있는,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낭만적 사랑을 기대할 수 없는 그런 몇 놈의 유부남들이
만나서 하는 대화란 것들이 대게는 거기서 거기이듯, 그때 우리들은 꽤나 큰 입구의 위험부담(?)을 안고서
각자의 이상형을 TV기상캐스터와 스포츠 아나운서에 투영해 사뭇 진지한 대결을 벌였습니다. ... 잠시 후,
'한동안' 이라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감지하고 마무리 짓듯 등본에서 눈을 뗍니다. 그리고 나 스스로에게
질문해 봅니다.

< '나는 지금 이상형과 함께 살고 있는가?' >

등본이라는 공문서에 결박되어 문서 끄트머리에 어거지로 구겨 넣어진 신세지만 그나마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만으로도 감지덕진데, 지금 여기서 ‘첫사랑’이나 ‘이상형’ 따위를 따져 묻는 것은 가족에
대한 배신이자 한심스런 사치라 싶다가도 ~ 기러기 아빠로서 이미 등본에 덩그러니 자기 이름 혼자만
남게 된(그리고 조만간 혼자 남게 될) 몇 놈의 친구들 처지를 생각한다면 ~

"그래! ~ 이상형이든, 기상캐스터든, 스포츠 아나운서든
나는 그냥 니들 장단에 맞춰 모든 여자들을 사랑하리라"고 다짐합니다.

<밥 먹고 청소하자 vs 청소하고 밥 먹자>
<잘 때 TV는 끄고 자라 vs 알아서 끈다>
<셔츠 좀 바꿔 입어라 vs 오늘 하루만 더 입을 거다>

따지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 갈등이 깊어져 같이 사는 사람이 미워지면 말과 행동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체취와 소유한 물건까지 모든 것이 미워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위안이 되어야 할 등본 공유의
삶이 때로는 지옥의 조건으로 변할 때가 많습니다. ... 그래서인지 영국의 천재극작가 셰익스피어는
129번 소네트(詩)에서 이성을 향한 욕망에 대해 이렇게 얘기합니다.

<“넋을 잃고 쫓아다니지만, 막상 얻고 나면 원수가 따로 없네.”>

사실 이 말은 인간의 육체적 욕망에 대한 표현입니다. 셰익스피어는 인간의 육욕(肉慾)을 지옥과 천국의
울타리에 모호하게 걸쳐있는 양가적 감정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이 양가적 감정이 육욕을
포함한 전체 삶을 공유하는 것으로까지 충분히 확대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프로이트는
“모순이 공존할 수 없는 것은 오직 논리학뿐이며, 사람의 마음은 사랑과 증오의 감정이 수시로 오고가는
대립의 연속이며, 언제나 모순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리고 슬프지만 오늘날 가족의
의미는 그렇게 정의될 수 있습니다. ~ 아니 굳이 프로이트의 충고가 아니더라도 개인들(부모, 자녀) 각자가
지니고 있던 고유한 모순은 ‘가족’이라는 단일공간으로 모여든 순간부터 카오스적 충돌을 일으킵니다.

가족 안에는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 or 부모, 자녀>와 같이 가족 성원(成員)으로 대표되는, 즉
사회가 만든 보편적 사유(정신구조)가 존재하며, 동시에 한 개별주체(개인)로서의 사유 또한 존재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처음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개별집단(가족)> 이라는 새로운 사유가 만들어져 추가됩니다.
이후 지구적으로 통용되는 사회보편의 정신구조와 개별주체(개인)의 정신구조, 그리고 개별집단(가족)의 정신구조는
생물의 이종교배, 아니 ‘다종교배’라는 이종교배 그 이상의 의미로 정의될 수 있는 혼돈의 결합과정을
거치면서 각각 별개의 독립된 공간으로 분리되는데 ... 이때 이 분리된 공간 안에서 <사회보편의 모순>,
<개인(개별주체)의 모순>, <집단(가족)의 모순>이라는 층위가 서로 다른 모순들이 새롭게 생성됩니다.
따라서 가족의 슬픔은 항상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크기로 다가오게 됩니다. 더불어 우리는 이러한
복잡한 모순관계를 위계적 시선이 아닌, 상대적 또는 대칭적 시선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 모순의 양적 확대와 질적 변화]

[◆ “진즉에 갈라서야 했는데 지금까지 버틴 건 모두 자식들 때문입니다.” ... 부부 갈등이 심한 가정에서는
간혹 자신들의 갈등 문제에 자녀나 타인을 끌어들이려고 합니다. 가족심리학자 보웬은 이런 유형을
<삼각관계>라고 말했는데, 삼각관계가 꼭 연인들 세계에서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또한
삼각관계에 (어쩔 수없이)개입하게 된 자녀는 성인이 된 후에 자신의 부모를 지긋지긋하게 생각하고 결국
부모를 떠나려는(해방)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 지금 본인의 가족(부모)이 매우 큰 짐으로
느껴진다면 아마도 현재 본인이 <삼각관계>에 심하게 끼어있는 건 아닌지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합니다.]

[◆ “피곤해 보이네! ~ 영화 지루해?” ... 부부 갈등에서 자주 쓰이는 방어기제 중 하나가 바로 자신의
심리상태를 상대방에게 투사하는 것입니다. 투사는 내가 상대에게서 느끼는 감정을 상대도 똑같이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내(남편)를 미워하면 아내(남편)도 나를 미워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따라서 현재 지루함과 피곤함을 느끼는 건 정작 본인이지만 이런 감정을 상대에게 전가시키면서 투사가
일어납니다. 피곤함이나 지루함 같은 단순 감정을 전가시키며 일어나는 투사는 그나마 다행입니다. 나름
견딜만하다는 것이죠. 하지만 투사에 쓰일 감정적 재료가 상대에 대한 원망과 분노, 혐오 같은 극단적
감정이라면 부부의 갈등은 극으로 치닫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투사는 부부사이 뿐만 아니라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도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낸 아이는 성인이 되어서도 불행한 삶을 살아갈 가능성 또한 매우 높습니다.
보통 <삶의 부메랑>이라고 하는데, 이 현상에 처음으로 천착한 사람이 바로 프로이트입니다. 프로이트는
우리가 자신도 모르게 어린 시절의 (고통스러웠던)패턴을 반복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 술과 마약 및
도박 중독, 자학과 폭력의 일상성 등은 자기 파괴적 행동 중에서도 상위 목록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극단적 자기파괴는 불행한 인간관계로 이어지며, 불행한 인간관계는 다시 가족 내부로 침투하여 가족
구성원(특히 자녀)의 무의식에 <반복강박>이라는 바이러스를 주입하게 된다고 프로이트는 말합니다. 그래서
반복강박을 가진 사람들은 어린 시절의 고통스런 경험을 성인이 되어서 본인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반복하게 된다고 합니다. ]

가족의 화목의 크기보다 가족의 상처가 더 크다면 이는 <잉여상처>가 됩니다.(내가 만든 말임.) ~ 따라서
아무리 가족의 화목의 크기를 늘려가려고 해도 <잉여상처>를 가진 가족은, 가족내부에 ‘반복강박’이라는
바이러스가 계속해서 자리하고 있다면 가족의 상처의 크기와 깊이(농도)가 화목이 커지는 속도보다 훨씬 더
빠르기 때문에 그 가족은 항상 <잉여상처 가족>으로 남게 됩니다. ... 결국 이 악순환적 고리, 즉 고통스런
삶의 부메랑은 가족구성원 중 누군가 하나는 반드시 죽어야만 바뀔 가능성이 높아지게 됩니다.

한번 굳어진 가족의 패턴은 대개는 <경로의존성>을 가집니다. 그래서 현재 본인의 가족이 분명 어딘가
잘못되었음을 인지하고 있어도 그 경로를 벗어나기가 좀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고통을 겪고
있는 상당수의 사람들은 (가족의)변화를 꿈꾸는데, 그 꿈이라는 것이 보통은 <평범한 가족>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평범한 가족’만큼 모순된 것은 없을 것입니다.

[◆ 예를 들어보자. 만일 내가 자갈밭의 돌들을 하나씩 주워 일일이 무게를 달고
그 평균이 145g 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이 수치는 그 자갈들의 본질에 대해서
나에게 거의 아무것도 말해주지 못한다. 이 발견을 근거로 누군가가 첫 번째 시도에서
145g짜리 자갈을 집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크게 실망하고 말 것이다.
정말이지, 그 사람이 아무리 오랜 시간을 찾아 헤맨다 해도 정확히 145g 나가는
자갈을 발견하지 못할 가능성은 여전히 계속해서 남아있게 될 것이다.
- (무엇이 개인을 이렇게 만드는가?. 22페이지 / 칼 구스타프 융/ 부글북스) ]

융은 이 책에서 “통계적 방법은 이상적인 평균이라는 측면에선 사실들을 보여주지만, 경험적 현실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아무런 그림도 제시하지 못한다.“고 얘기합니다. 결국 통계에서의 평균의 의미는 경험적
현실세계로 넘어오면 <평범함>으로 치환될 수 있습니다. 앞서도 얘기했지만 한 개인의 가정사 안에는
오직 그 가족만이 알 수 있는 다양한 모순들(사회보편, 개별주체, 개별집단)로 가득 차있습니다. 따라서
“평범한 가정에서 성장했다”라는 말은 최소한 (경험적)인간사회에서만큼은 허구에 가깝다고 할 수 있으며
이는 드넓은 자갈밭에서 (0.00 ~ 00001g)의 오차도 없는 정확히 145g짜리 자갈을 줍는 행위와 같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수천만 명이 사는 국가에 등본체계가 제도화 되어있지 않다면 원활한 행정은 불가능할 겁니다. 그러나
등본은 국민 개개인들이 힘겹고도 소중하게 살아온 수많은 날들과 붉은 상처들과 하얀 사연들을 절대로
대변해줄 수는 없습니다. 다시 말해 등본을 아무리 자세히 들여다보아도 그 행위가 사무적(일상적) 행위에서
그치고 만다면 결국 등본은 행정 권력에 의해 일정한 양식으로 규정된 <제도적 가족> 이라는 답답한
한계에 묶일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 따라서 평생을 살을 부대끼며 함께해온 <실체적 가족>이라는
공간[@ 개별 가족사(家族史)]을 이해하려면 지금부터라도 ‘등본’처럼 가족을 상징하는 것들에 대하여
한 번쯤 <낯설게 하기>로 바라보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한마디로 등본을 <낯설게> 바라보며 등본 아래로
조용히 침전해 들어가다 보면 (등본의)형식 이면에서 조용히 흐르고 있던 가족의 역사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 더불어 아무리 갈등이 많은 관계라 하더라도 한 개인에게 가족의 의미는 역시나
가장 중요한 위안의 공급처입니다. 그래서 등본을 공유할 가족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큰 모순이며 처절한 슬픔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 등본에서 내 이름 하나만 남게 되거나, 등본에서 내 이름 하나만 사라지거나 ... )

<우리 동네 주민 센터>에는 공공 어린이집과 폐형광등 수거함이 있습니다.
친환경 세제인 유용미생물(EM) 배양액을 무료로 나눠주기도 하며, 지명수배자 명단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덤으로 본인이 공동체적 사명감이 넘치는 주민이라면 통장에 지원해 볼 수도 있습니다.
주민 센터를 들어가기 전, 층계참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며 잠시 노년에 대한 사색에 빠져볼 수도
있습니다. ... 혈압과 체성분을 분석해 볼 수 있으며, 년 중 한두 번 쓸까 말까한 특수공구도 빌려 쓸 수
있습니다. 요가와 체형교정 운동이라는 것도 배울 수 있습니다. 계절이 바뀌면 동네 열쇠집 아저씨가
공짜로 칼을 갈아주러 오시고, 고장난 자전거를 무료로 수리해 주는 아저씨도 오십니다. 사람이 많아
기다리기 지루하면 비치된 인문서적을 보며 교양을 쌓을 수도 있습니다. 주민들 대화에 끼어들어 몇 마디
거들어주는 친절한 공무원도 만나볼 수 있으며, 발급받은 서류를 확인하다보면 등본에 의해 위태롭게
구원받은 자신의 삶을 <낯설게 하기>로 바라보는 기회가 생기기도 할 것입니다.



[@게시물에 어울리지 않는 긴 글입니다. 죄송합니다. ~ 희망찬 한 주 되시길 바랍니다.]

2019년 2월 18일 월요일

◆ 한국형 페미니즘이여 지네를 거부하고 칸(Cannes Film Festival)에서 박수를 받아라 [by. 물파스]

[◆ 한국형 페미니즘이여 지네를 거부하고 칸(Cannes Film Festival)에서 박수를 받아라]

(성은 상품화 하면 안 되는가? - 한국형 페미니즘과 여성가족부, 수많은 여성단체에서 도출되는
상식밖의 여러 문제들의 근본 원인은 바로 경직된 우리의 성문화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따라서
이야기는 그 부분을 중점적으로 다루게 될 것입니다. 물론 모두 저의 주관적 견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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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한국형 페미니즘 운동을 보면 지네가 보입니다.
지네는 절지동물에 속하고, 몸이 가늘고 길며 여러 마디로 이루어져있는데 ... 그 마디마다
한 쌍의 걷는 다리가 있어서 많은 발을 가진 동물로 유명합니다. 그러나 지네의 이동(방향성)은
선두가 결정합니다. 선두가 가자고 하면, 아니 선두가 가는대로 나머지 발들은 따라갈 수밖에
없죠.(맹목적 추종) ... 선택권이 배제된 채 가치 없는 노동을 나머지 발들은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이어가야 합니다. 심지어 꼬리부분에 달린 발은 보행에 쓰이지도 않습니다. 보행과 같은 이동욕구마저
거세된 발은 더 이상 발로서의 의미를 상실하고 오직 존재(소속)감 하나만으로 만족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정말 만족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 ) ~ 그리고 더 중요한건 지네의 눈입니다.
홑눈, 즉 밝거나 어두운 정도만 감지할 수 있는 원시적 형태의 눈만을 지네는 소유하고 있는 것인데,
이렇게 ‘밝다와 어둡다’라는 이분법적 시선이 지네가 세상을 바라보는 한계인 것처럼 한국형 페미니즘
또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지네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그들에게 세상은 오직
“한국형 페미니즘에 좋은(동조) 것과 나쁜 것”으로 이분되어 이해됩니다.

이분법은 사태를 간단명료하게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을 제공합니다. 하지만 독단과 독선에 빠질 위험이
상시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다양한 사고체계가 요구되는 공동체 사회에서는 수시로 경계해야할 위험한
사고방식입니다. 또한 이러한 이분법적 이해, 즉 “좋은 것과 나쁜 것”이라는 시선에는 암묵적 순결강박의
의미도 내포하게 되는데, 한마디로 한국형 페미니즘은 전제부터 무결점상태이므로 누구라도 문제(오류)를
지적하면 그것은 곧 한국형 페미니즘에 “나쁜 것”이 되어버립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태어남은 신의
특혜를 받아 이미 ‘원죄(Original Sin)’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무결점의
순결강박은 선두의 방향성을 합리적 의심이나 논리적 검증 따위가 전혀 필요치 않는 ‘절대선(善)’으로
인식하게 만듭니다. 때문에 선두는(선두의 방향) 항상 옳습니다. 그래서인지 의미 없는 노동을 반복하는
수많은 지네의 발처럼 한국형 페미니즘에 합류한 상당수의 여성들을 마주할 때면 그녀들에게서 알 수 없는
슬픔과 마음의 가난이 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 왜 자꾸만 ‘한국형!’, ‘한국형!’ ... ”한국형 페미니즘“이라고 하는지
궁금해 하실까봐 먼저 해명을 한 후에 계속 이야기를 이어가 보겠습니다.

학계는 오늘날의 페미니즘(Feminism) 운동이 대략적으로 50여 분야로(혹은 그 이상) 그 유형이
상당히 복잡하고 다양화되고 있다면서 그 외연이 현재도 계속해서 확장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소극적 형태의 페미니즘 운동에서부터 상당한 급진적 운동으로까지 그 범주가 넓어지고 다양화되고 있다는 것인데,
예를 들면 ... 정치경제적 평등, 사회적 평등, 남성거부(분리주의), ‘남성과 여성’이라는 시선 자체를 거부하는
퀴어(queer)운동, 페미니즘의 이론적 관심과 실천(행동주의),심지어 사랑하는 연인들 사이의 뜨거운 섹.스(S.ex) 까지도
거침없이 간섭하며 <"삽.입이 이루어지는 모든 섹.스는 강간이다!(앤드리아 드워킨.Andrea Dworkin)"> 라는
주장을 펴는 급진을 넘어 극단에 가까운 페미니즘 운동도 존재합니다. 이처럼 오늘날 페미니즘의 운동 변화는
그 종류와 다양성(복잡성), 급진성 등에서 오랫동안 페미니즘을 연구해온 학자들조차 뭐라 딱히 정의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이것은 페미니즘(Feminism)이다!"라는 선언적 구호만 외치면 페미니즘으로 통용되는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가 우리사회 페미니즘 운동에 굳이 <“한국형”>이라는 수식어를 갖다 붙인 이유는
현재 지구에서 진행 중인 페미니즘의 복잡성과 확장성을 고려했을 때, 그 안에서 한국만의 고유한 속성과 차별성을
구별해내기 위해서입니다.

최근의 (한국형)페미니즘 운동들의 과격한 양상들을 지켜보면서 혁명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지네의 발’ 같았던 그녀들의 수고(?)에 어울리는, 그래서 그녀들이 자칭 ‘여성혁명’이라
스스로 칭송해 마지않는 이 과격한 퍼포먼스를 상징할 만한 적당한 이름을 생각해보았습니다.
바로 <원숭이 정치학!>입니다.

인간에게 무리 짓는 본능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정치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를 도입한 국가에서 정당이 존재하는 이유인데 ... <정당>이라는 의미의 직관적 이해는
생각을 공유하지만 그 저변에는 각자의 이해관계가 끈적하게 결부되어 있는 매우 이기적인 무리들의
집합이 바로 정당이며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그 이해관계로 인하여 정당은
또 다시 <계파, 정파>로 세분화되기도 합니다. 아무튼 정치는 각각의 집단들의 싸움입니다. 수많은
개개인의 생각들이 특정 집단(정당)이라는 한 곳에서 공통된 하나의 정신적 수원(水源)을 생성하고,
그렇게 생성된 집단의 공통정신이 다른 집단의 정신과 치열하게 싸우는 곳이 바로 정치적 공간입니다.
때문에 정치는 필연적으로 <권력투쟁의 공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한국형 페미니즘에
부여한 <원숭이 정치학>은 어떤 의미인가?

정치가 권력투쟁의 공간이라면, 투쟁은 당연히 싸움이며, 싸움은 승리를 목표로 합니다. 더불어
승리를 위해 정치를 극단까지 밀고 올라가다보면 물리적 힘과 만나는데, 그것이 바로 전쟁이며
대개 전쟁은 정치의 최후의 수단이 됩니다. 그래서 정치는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또 사태가 극단적
상황까지(전쟁)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선은 상대를 설득하는 작업을 시도하며 설득은 명분과 논리를
필요로 합니다. 때문에 정치는 치밀하고 정교한 두뇌싸움의 일종이며, 이러한 정치 놀음이 자국 내에서
벌어지면 그것은 정당간의 싸움이고, 자국을 벗어난 국가 간의 싸움이라면 우리는 이것을 <외교(전)>라고
합니다. 그런데 현재 한국형 페미니즘에는 이러한 요건들이 전무합니다. 쉽게 말해 승리를 위한(권력쟁취)
나름의 투쟁은 존재하지만 상대를 설득하기 위한 최소한의 명분과 기본적 논리는 이미 실종된 상태이며,
설사 있다손 치더라도 치밀하고 정교한 부분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으며 그저 억지스럽고 어설픈,
그리고 설득력 없는 굉음만 들릴 뿐입니다. 때문에 정상적, 아니 상식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은 그녀들의
굉음에 이질감을 느끼며 동조나 응원을 해야 할 그 어떤 매력적 조건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녀들의 투쟁은 ‘정치의 부재’, 혹은 ‘정치흉내내기’속에서 벌어지는 흥미로운 일회성 이벤트, 그 이상을
넘어설 수 없는 어떤 한계점에 맞닿아 있다고 생각됩니다.

"아이고! ~ 원통하고, 원통하다! ~ 아이고! ~ 아이고 ~ "

억겁(億劫)의 시간동안 땅을 치고 울분을 토하고 서럽게 노래해야만 딱딱하게 굳어있던 가슴속
시커먼 멍울이 비로소 슬픈 꽃으로 피어난다는 우리 조상들의 한(恨), 특히 <여자의 한(恨)> 입니다.
한(恨)의 깊이가 얼마나 깊었으면 억겁의 세월을 오직 구슬프게 울부짖는 데에만 힘을 쏟아야 하는지,
그래서 우리 선조들의 <열녀관>을 통하여 그동안 무심하게 잊혀지고 파묻혔던 그 처절한 한(恨)을
슬픈 꽃으로 승화시키고 <여자의 한(恨)>의 깊이 또한 미루어 짐작해보기로 합니다.

[◆ 용동 길가에 정각이 하나 있다. 처녀가 목화를 따고 있는데
왜놈들이 올라가면서 유방을 한 번 만지자 처녀가 바로 집으로 달려가서
부엌칼로 유방을 잘라버리고 죽었다. 임금이 친히 사액을 내린 것이
그 열효각이다. - (칠곡면 용동 열부각), 한국구비문학대계(8-10, 59면)]

[◆ 한 남자가 함께 공부하던 친구 여섯 명에게 각자의 집안에는
열녀가 많이 난다는데 그게 사실인지 각각 자신의 집에 가서 시험해보고자
하였다. 이들은 각자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자기 집 담을 넘어 자신들 부인과
동침하고 왔다. 다음날 친구들 부인 모두가 자결했다는 부고가 날아왔다.
- (남편과 자고도 죽은 헛 열녀), 한국구비문학대계(7-17, 323~325면)]

[참고: 강등학 / 한국구비문학의이해. 156페이지/ 월인 출판]

위 두 사례는 극단적 정절관념을 보여줍니다. 특히 ‘열효각’ 사례는 완전무결한 신체적 정결성을
고집하는 열녀관을 보여줌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을 신체의 일부로 치환시키는 가치전도적 양상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 열녀전설은 외적의 침입에 의한 전란이나 국가적 혼란기에 특히 많이 나타났는데
고려후기에 나타났던 신유학자들에 의해 기술된 본격적인 열녀전은 주로 고려말 왜구의 잦은 침입과
몽고란을 배경으로 이루어진 것들이며, 신유학적 이념을 기반으로 세워진 조선은 국초부터 열녀의식의
정착을 위해 꾸준히 시행했던 각종 포상정책의 결과 열관념이 광범위하게 자리잡아감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열녀이야기가 양산되었고 조선후기에는 전 계층에 걸쳐 수많은 열녀들이 배출되었다고 합니다.

[◆ 옛날에 한 아가씨가 흰가마를 타고 시집을 갔다.
흰가마는 신랑이 죽고 없을 때 타는 가마다. 과부살이를 하러
새 처녀가 시집에 간 것이다. 이 처녀과부는 시집에서 열녀(烈女)가
되기를 강요받는다. 왜냐하면 열녀로 소문나 정문(旌門)이 서면
그 집안에 관역(부역)이 면제되고 조세가 면제되며 병역이 면제되기
때문에 어느 가문이건 어떤 열녀가 될 조건만 구비되면 그것을 강요하게
마련이었다. 이 처녀는 태어나 한 번도 보지 못한 남편의 무덤에 가서
주야로 통곡하게 되어있다. 그렇게 하면 남편이 살아난다고 꾄 것이다.
처녀가 통곡하고 있는 밤중에 무덤이 갈라지고 이 처녀가 그 무덤으로
끌려들어가는 것을 친정에서 처녀를 따라 함께 온 하녀가 보았다.
달려가 저고리섶을 잡고 늘어졌다. 옷섶이 세모꼴로 찢어지더니
찢긴 옷섶은 나비가 되어 하늘로 날아갔다. 이것이 한국의 나비 생성에
관한 설화 가운데 전형적인 하나다.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젖꼭지를
가렸던 세모꼴의 올리브 나무껍질이 나비가 되었다는 희랍의 그것에
비하면 한국의 나비는 슬픈 나비다. <정문(旌門) - 충신, 효자, 열녀 등을
표창하기 위하여 그 사는 집 앞이나 마을 입구에 세우던 붉은 문>
... (한국인의 기속 - 성과 미신. 91페이지/ 이규태/ 기린원)]

<춘향전>을 비롯한 선조들의 열녀관은 비록 이야기에서 그치지만, 당시 우리 여성들에게 가해졌던
억압과 극단적 정조관념의 무게는 이야기의 내용만 들여다봐도 어떠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렇듯 당시의 열녀관은 현대인에게 <여자의 한(恨)>의 깊이를 어느 정도는 가늠케 해줍니다. 더불어
우리 어머니들의, 어머니들의, 어머니들의 ... 어머니들에게 강요된 당시의 시대적, 묵시적 <열녀관>은
<여자의 한(恨)>과 서로 호환 가능한 용어로써 세대를 관통하는 여성억압의 대표적 상징으로 인정해도
큰 무리가 아니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한국형 페미니즘은 자신들의 ‘원숭이 정치학’을 위해서 그리고 자신들의 확장성을 위해서
우리 선조들의 처절한 <열녀관>을 모두의 동정과 연민을 흡수하는 강렬한 페이소스(pathos) 용도로
활용함으로써 시대의 멍울마저 자신들것으로 둔갑시킨 뻔뻔한 절도행각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작태는 결국 진정성을 담아낼 수 없기 때문에 아무리 대중을 향해 처절한 호소를 한다고 해도 그녀들
바깥의 정신들을 더 이상 그녀들 안으로 끌어올 수도 없으며, 끌려들어가지도 않을 것입니다. 결국
외부로의 확장성을 원하는 그녀들의 운동은 그 강도가 강하면 강할수록 실질은 안으로만 점점 더
쪼그라드는, 즉 현실과의 괴리만 더 커지는 모순이 발생하고 한국형 페미니즘 운동을 통한 정치로의
연장은 단순한 염원에서 그치게 될 것입니다. 때문에 현재 진행되고 있는 소란스런 한국형 페미니즘은
한계를 드러낸 하나의 ‘정치흉내내기’이며, 오직 <무리지음> 자체에서 착란적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저는 한국형 페미니즘을 <원숭이 정치학>이라 명명하려 하는 것입니다.

이쯤에서 저는 한국형 페미니즘을 한다는 분들에게 좀 더 솔직해져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특히 <섹스(S.ex)>는 한국사회에서 여전히 무기수에 가깝습니다. ... 최근 들어 "성인지 감수성"이
우리사회 주요 화두가 되고 있습니다. 이 정체불명의 외계어는 유명인들의 미투 운동과 맞물리면서
성폭력,성희롱(추행) 사건에서 상당한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 한마디로 법이 성(性)과 연계된
사건을 바라볼 때는 여성이 피해자인 경우가 많다는 통계적 근거를 들어 여성의 입장을 좀 더 많이
고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때문에 여자는 일관된 진술과 눈물만 준비하면 그 즉시 피해자로
인정받을 수 있는 일종의 법률적 인센티브를 얻게 된 상황입니다. 철저히 합리적이고, 또 형평성에
근거하여 법 적용이 이루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결국 사태가 이 지경까지 된 것은 우리 사회가
아직도 섹스(s.ex)를 무기수로 가둬놓고 자유로운 성(性)담론을 허용하지 않는 경직된 문화를 지속하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우리사회는 너무나 모순입니다. 요정 정치, 룸살롱 공화국이라는
조어가 만들어질 정도로 ... 현실적, 실질적으로 대한민국 사회는 전 세계 그 어느 국가보다 더 화려한
밤문화가 존재하는 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만 뜨면 한국 사회는 소녀 앨리스가 빠졌던
구멍 속의 ‘이상한나라’가 됩니다. 어느 국가보다 엄숙한 성(性)도덕이 강조되며, 과도한 성욕의 표출은
저급하고, 성(性) 상품화에는 극도의 히스테리 반응을 보입니다.

이제는 우리도 서서히 섹스(s.ex)를 가석방 시켜야할 시기가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GDP 1조 6천억 달러($), 세계 경제규모 10위권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성(性)담론이 이렇게
경직되어 유통되고 있는 나라는 아마도 OECD 국가 중 대한민국이 유일할 것입니다. 더불어 이러한
경제적, 문화적인 불편불일치(mismatch)로 인하여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희귀어가 탄생했다고 생각됩니다.

2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안희정 지사의 판결에 대해 김지은씨 측 변호인과 많은 여성단체는 법원이
<성인지 감수성>을 반영한 균형 있는 판결을 내렸다는 소감을 밝혔습니다. ~ 만약 여기서 '안희정'을
익명으로 전환하고 사건(판결)을 바라본다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가장 논리적, 합리적이어야만 하는 법질서에 <감수성(感受性)>이라는 상당한 비논리를 개입시켜
유죄판결을 유도한 작금의 사태에 대해 2019년 한국사회 상당수가 환호하고 있습니다. 양심과 도덕이
살아있는 사회는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바라는 가장 이상적인 사회일 것입니다. 하지만 <도덕재판>이
난립하는 사회는 질서가 붕괴되고 공포가 만연되는 사회로 귀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법치주의가
제대로 작동되는 대부분의 국가가 비논리의 대표적 상징인 도덕재판을 금지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성인지 감수성 재판>은 <도덕 재판>과 등치관계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 저는 안희정 지사를 옹호하거나 비난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 제 의견은 그냥 무관심입니다.)

[◆ 격렬한 섹스(S.ex)가 시작됩니다.
비명 같은 신음과 질펀하게 흘러내린 땀, 살덩어리들의 파도 같은 출렁거림을 오직 시선으로
받아들이지만, 차원을 뛰어 넘는 원시적 물성(物性)이 느껴집니다. 그러는 동안에도 상대의 입속에서
자신의 혀는 미친 듯이 녹아내립니다. 상기된 얼굴과 붉게 물든 귓불은 몽환적 눈빛과 잘 어울립니다.
아직 덜 녹은 혀가 잠시 바깥으로 흘러나와 얼굴과 귓불에 묻은 붉음을 닦아냅니다. 기형적 체위는
사마귀의 교접모습과 닮아있고 신기하다 생각할 때쯤 극한에 다다른 사정은 찰나(刹那)가 됩니다.
평온한 마무리 키스, 침대 위 ... 호흡이 먼지처럼 가라앉습니다. 정적속 전라의 남녀는 죽은 뱀처럼
말없이 똬리를 틀고 엉켜있어 미혹의 살덩어리들은 누가 누구의 것인지 주인을 분간하기
어렵습니다. ... 그렇게 황홀했던 섹스가 끝나자 수많은 사람들이 기립하여 환호와 박수갈채를
보냅니다. - 칸 영화제(Cannes Film Festival) ]

여자가 다리 아래로 많은 걸 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현대사회는 충분히 그렇게 정의될 수 있습니다.
또한 그것이 터부시될 이유도 없습니다. 여자의 몸이 반드시 ‘영화’같은 문화예술 장르에 편입될 때에만
긍정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강제규정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미 실제 현실에서는 여성 본인의 몸을
출세와 욕망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그렇게 드문 일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한국형 페미니즘은 이러한 현실을 애써 외면하며, 설사 그것이 만연된 사회현상이라고 해도 그것은 여성의
자의가 아닌,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남성이 만든)사회 구조적 현실이라며 모든 원인을 여성 외부에서,
특히 남성에게서 찾으려고 합니다.

“내 몸은 내 것이다!”

(한국형)페미니즘이 외칩니다. ... 그녀들은 여성의 몸의 권한을 강력하게 주장하면서도 정작 그 몸의
사용권한이 개인적 출세와 욕망 같은 조금은 속물적 근성과 결탁하여 민낯이 드러날 때면 마치 본인 몸에
다른 피가 섞여 들어오는 것을 완강히 거부하는 순혈주의나 인종주의적 히스테리 반응을 보이는 것이
현재 한국형 페미니즘의 비린내 나는 날것 그대로의 실체입니다. 그래서 그녀들에게 페미니즘의 성공을 위한
더 나은, 더 효율적인 진보된 페미니즘을 소개해주고 싶습니다.

<“차라리 모든 패를 까고 솔직해져라!”> ... 한마디로 실천적 진실성입니다.
지금까지 보여준 이중적 태도의 페미니즘 정신이 아니라 여성들 그대들 몸을 마음대로, 그리고
주변 시선을 의식하지 말고 당당하게 사용하라는 “여성들 몸은 진짜 여성들 것이다!” 라는 실천적 강령이며,
보다 현실적 메시지의 전달이고, 동시에 메시지의 정당화 노력입니다. 바로 사회(현실)를 칸(Cannes Film)으로
만들라는, 즉 현실과 영화(예술)의 합일인 것입니다.

사회가 칸이 될 수 있도록(칸의 사회화) 여성들 스스로가 각자의 심연에 숨겨진 출세와 욕망에
좀 더 솔직해짐으로써, 그리고 진실성을 담아 온전히 그 모습 그대로를 사회에 노출시켜 마음껏 박수를
받으라는 뜻입니다. ...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한국형 페미니즘은 한국사회 오래된 관습적
성 고정관념(gender stereotype) 및 일반 대중과의 충돌이 발생합니다. 그것은 페미니즘을 외치는
자칭 한국형 페미니스트들이 ‘여성(성)의 순결’ 자체를 바로 한국형 페미니즘의 <도덕적 자산>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페미니즘 입장에서는 한국 여성들은 최소한 도덕적으로 흠결 없는
순수한 처녀성의 결정체로 계속해서 남아있어야 하며, 혹시라도 그녀들의 ‘몸의 사용’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그것은 절대로 한국형 페미니즘이 수용해서도 안 되는 것이며, 설사 수용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오직 남성(남성이 만든 제도나 사회구조)에 의한 결과로 귀결되어야 한다는 조건이
전제될 때에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한국형 페미니즘은 성매매 여성들을 구원의 대상으로 인식합니다.

그럼 이쯤에서 이런 물음이 필요해 보입니다. ... 진정 <성(性)은 상품화하면 안 되는 것인가?>
강제성이 배제된 성(性)은 현대사회에서 이미 많은 국가들에게 하나의 상품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첫 눈에 반해 말을 걸어봅니다.
연락처를 받고, 손을 잡고, 낙엽 길을 걸어보고, 팝콘을 먹으며 영화를 보기도 합니다.
제법 쌀쌀해진 날씨 탓에 차분히 서로를 감싸며 체온을 느껴보기도 합니다. ... 키스(kiss)를 하고,
섹스(S.ex)를 합니다. 상대의 슬픔에 함께 울어주고 기쁜 일엔 함께 행복해 합니다. <사랑>입니다.
여기서 중요한건 이 모든 사랑의 과정은 그 어떤 누구도 대신할 수 없으며 간섭할 수도 없다는 점입니다.
오직 사랑하는 연인들 당사자들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따라서 국가가 한 개인의 <사랑의 과정>까지
책임져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성 상품화>는 설렘과 두근거림, 기쁨과 슬픔의 과정이 모두 생략되고, 오직 쾌락(성욕)만이
화폐 가치로 전환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사랑의 과정>은 개인에게는 일종의 판타지이자
동시에 실존입니다. 평생에 한번(혹은 그 이상) 있을까 말까 한 가장 큰 이벤트이며 ... 더불어 어느
누군가에게는 사랑의 과정이 1년이 되기도 하고, 또 다른 이에게는 그 절반의 시간이면 충분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평생을 서두르지 않고 아껴가며 천천히 과정을 쌓아가는 연인들이 존재할 수도 있을 겁니다.
<사랑의 과정>은 이처럼 개개인마다 허락된 타임라인(timeline)이 모두 다 다릅니다. 때문에 규격화, 표준화가
불가능하며, 이것은 곧 <사랑은 상품화가 불가능하다!>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 그러나 (일회성)쾌락은
다릅니다. ‘과정’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요구되지만, 원초적 쾌락(S.ex)은 돈과 10~30여분 남짓한 시간이면
충분합니다. 화폐는 <가격 기능>의 작동으로 대상, 즉 성(性)을 객관화 하는데 상당히 뛰어난 지표역할을 합니다.
더불어 시간은 언제든지 가격으로 <전환>될 수 있는 참 독특한 개념입니다. 그래서 쾌락은 상품성을 갖습니다.

[◆ 일본은 17세기부터 공창제가 시작됐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남성에 비해 여성의 수가 모자라 은근슬쩍 사창도 생겨나기도 했는데
당시 꽤나 성업 중이던 상황에서 문제는 일시에 많은 사람(이용자)들이 몰려들었을
때였습니다.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면 그들을 받아줄 여성들의 수가 부족하게
됩니다. 시계가 있었다면 정확한 (이용)시간을 다투어 문제를 해결 했었겠지만,
시계도 없었던 상황에서 잠시 짧은 시간을 내서 여자를 사야했기 때문에 그 시간(이용시간)을
측정하는 것이 상당한 고민이 됐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때 일본 사람들이 생각한 방법이
바로 향(香)입니다. 절에서도 향을 피우고 제사를 지낼 때도 향을 피웠던 것이 생각났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향시계>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향은 한번 불을 피우면 다 타는데 보통 15분~20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됐기 때문에, 손님들은 1시간정도를 놀고 싶으면 향 3개를 구입하고, 손님들이
한꺼번에 너무 많이 찾아오면 1인당 향 1개만 판매하는 방법을 써서 시간을 조절했다고 합니다.
성(性)이 가격과 시간(향)에 의해 규격화 및 표준화가 가능해지다보니 성(性)은 말 그대로
<상품>이 되었던 것입니다.

많은 전문가들은 일본의 철저한 시간관념이 이때부터 형성되었고, 이러한 시간 관념이 산업사회로
넘어오면서 일본사회에서 꽃을 피웠다고 합니다. (참고: 일본인과 에로스(18~22쪽). 서현섭) ]

한국형 페미니즘은 여성의 성(性)은 상품화 하면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이 말은 즉, <처녀성(virginity)>은 그 무엇보다 고귀한 가치를 지닌 (여성의)몸과 정신의 결정체인
것입니다. 따라서 처녀성이 훼손되면 고귀한 <가치>가 떨어지는 것입니다. ... 그런데 여기서 역설적으로
그녀들의 주장은 <처녀성(virginity)>은 가장 비싼 값이 매겨져야 하는 또 다른 상품이다! ~ 라고 외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 한마디로 사회가 <처녀성(virginity)>에게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하라는 일종의 강령이며
암묵적, 상업적 가격협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2002년 성매매특별법이 제정되고, 그 즈음에 서울 종암경찰서 김강자 서장이 서울의 대표적 집창촌인
<청량리588>과 <미아리 텍사스>를 집중 단속하면서 ... 이후로 서울의 사실상의 공창은 사라졌습니다.
[@ 당시 청량리588과 미아리 텍사스는 경찰과 구청의 공공연한 관리(?)아래 영업을 지속했었기 때문에
공창에 가까운 사창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 그러나 성매매특별법과 집창촌 단속은 오히려 더 큰
풍선효과만 낳았습니다. 어설픈 도덕의 잣대가 정책의 실효성은 말할 것도 없고, 국가권력이 개인들의
배꼽아래를 무리하게 통제하는 소위 <경찰국가화>를 초래했다는 비난으로 이어졌으며 ... 더불어 훗날
김강자 서장은 집창촌 폐쇄 정책에 대한 실패를 인정하면서 한국사회에 “제한적 공창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성매매와 집창촌 얘기만 나오면 여성단체가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성매매 여성들의
착취의 문제입니다. 선진국 사례를 살펴보면 ... 영국과 프랑스는 집창촌 비즈니스를 금지하는 대신
개인적 매춘은 불법화하지 않습니다. 독일과 네덜란드는 집창촌을 합법화해 성매매 여성들의 노동권을
인정함과 동시에 그들의 인권보호에 정책적 노력을 보탭니다. 심지어 성매매 여성들의 <노조 결성권>
까지 허용하며, 이들에게 의료보험, 연금, 실업수당 등 일반 노동자가 받는 사회보장혜택을 국가가
최대한 보장하려 노력합니다. ... 참고로 성매매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이들이 느끼는
가장 위협적인 인권침해 요소는 다름 아닌 <사회적 시선>이었다고 합니다. 성을 판매한다는 주변의
차가운 시선이 이들을 가장 크게 괴롭힌 요인이었으며, 이로 인한 소외감과 외로움의 감정을 견디는게
가장 힘들었다고 합니다.

사랑이 배제된 쾌락(s.ex)은 비도덕적인가요?
오로지 성적 쾌락만 추구하는 행태는 저급한 겁니까? ... 질문을 바꿔 이렇게 다시 물어봅니다.

<도덕과 비도덕, 저급과 고급의 기준은 과연 누가 정하는 겁니까?>

앞서도 언급했지만,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제 성(s.ex)은 터부시될 하등의 이유가 없으며, 더구나
성인은 주체적 개인으로서 자신의 성적 취향에 관해 국가권력의 간섭과 통제를 받아야할 그 어떤 의무도
없습니다.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은 자신의 저서 <결혼과 도덕>에서 혼전 섹스를
적극적으로 권장했습니다. 한 개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이벤트인 결혼을 육체관계 없이 결정한다는 것은
미래 결혼생활에 불확실성만 높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러셀 또한 사랑이 배제된 쾌락을 완전히 지지하지는
못했습니다. ... 다시 말해, 섹스에 도덕성이 부여되려면 결혼이라는 제도가 아니라 <사랑>이 교감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죠. 결론적으로 러셀은 섹스(sex)가 도덕적이며 고급스런 하나의 완전체가 되려면 사랑이 필요하다
생각했었던 것입니다.

사랑은 현대사회에서도 여전히 섹스(s.ex)에 도덕성을 부여하고 정당화 시켜주는 매우 강력한 조건입니다.
사랑이 포함된 섹스는 성욕에만 집착하는 섹스보다 사회적으로 더 유리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따라서
사랑이 수반된 섹스는 결혼 및 출산과 무관하더라도 나름의 가치를 인정받습니다. ...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사랑이 <쾌락(s.ex)의 가치>를 평가하고 <도덕적 위상>을 부여하는 유일한 척도라 말하기에는 여전히 무언가
근거가 부족합니다.

이탈리아 작가 <조반니 보카치오(Giovani Boccaccio 1313~1375 )>는 근대소설의 선구자로 불리며
단테와 함께 르네상스 시대를 이끌던 대표적 문인입니다.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이 바로
<데카메론(Decameron)>인데, 이 소설집은 당시 가장 많은 국가에서 가장 오랜 시간동안 금서(禁書)로
지정된 소설이었습니다. ... 다만 인간의 심리가 거의 대부분 그렇듯이 ‘금기(taboo)’는 그 강도가
강하면 강할수록 금기를 깨려는 욕망 또한 비례적으로 강해지는 속성을 지닙니다. 그래서 ‘데카메론’은
역설적으로 당시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읽힌 작품이기도 했습니다.

데카메론의 시대적 배경은 기독교와 남성이 지배하던 전형적인 가부장적 세계를 반영합니다.
작품은 10일 동안 100건의 이야기가 전개되고, 작품 속 10명의 화자 중에서 7명이 여자입니다.
사회 여러 계층을 비유적으로 풍자하며 이야기의 대부분은 남녀 간의 사랑과 욕망(치정), 성(s.ex)의
문제가 작품 전체를 관통하며 채워져 있습니다. 또한 여성이 주도적으로 일으킨 섹스(s.ex) 문제는
대부분 여성에게 유리하게 결론지어집니다. ... 대표적으로는 6일째 일어났던 필리파 부인의 이야기가
압권인데, 절세미인 필리파 부인은 간통의 현장을 남편에게 들킵니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당시의
성(s.ex) 개념은 ‘사회적 제도’에 묶여있어, 특히 여성에게는 매춘뿐만 아니라, 남편 이외에 다른 남자에게
(돈을 받지 않고)몸을 허락하는 행위, 즉 간통을 저지른 행위도 사형에 처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법정에서 판사는 부인의 미모에 반해 그녀를 살려주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그녀가 자백하지 않기를
바랐지만 필리파 부인은 당당히 자신의 간통 사실을 인정하며 다음처럼 항변합니다.

[◆ "이 법은 여성을 속박하는 법입니다. 또한 이 법은 남성세계가 자의적 해석에 의해
만든 법이므로 일종의 악법이며, 사건 당사자인 여성의 동의가 배제되었기 때문에 원천적으로
무효입니다. ... 만약 아내가 남편의 성적 욕구를 충족시켜야할 법적 의무가 존재한다면
나는 단 한 순간도 의무를 소홀히 한 적이 없으며 거절한 적도 없습니다. 다만 나는 보통의
아내들 보다 성적 욕구가 강했기 때문에 남편의 욕구가 다 채워지면, 여전히 식지 않고 뜨겁게
남아있던 나의 욕구를 위해 애인과 이용한 것뿐입니다. 다시 말해 나는 애인에게 몸을 준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 애인을 일종의 쾌락의 도구쯤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쾌락의 도구로 삼는다면 아내들 또한 마찬가지로 자신의 필요에 의해 남자를 쾌락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남편이 나를 (계속해서)충족시켜주지 못한다면,
남아 있는 나의 성(性)에너지를 차라리 개에게 주는 것보다 다른 사내를 선택하는 것이
개인(아내)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전체의 효용이라는 측면에서도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
될 것입니다. - (필리파 부인의 항변)]

신(기독교)과 남성이 지배하던 시대에서 놀랍게도 필리파 부인의 이러한 과감한 주장은 판사에게
받아들여졌고 부인은 석방되며 이야기는 마무리 됩니다. 돈을 받고 파는 사랑은(매춘) 형벌의 대상이
되지만, 개인의 만족을 위해 자유롭게 베푸는 사랑(s.ex)은 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 작품은
여성이 성행위의 객체가 아닌, 주체로서 당당히 전면에 나설 때 진정한 <여성해방>을 이룰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집니다.

한국형 페미니즘과 여성단체는 낙태죄를 폐지하라고 주장합니다.
낙태죄 폐지 주장은 '여성 자기결정권'과 '태아 생명권' 중 무엇이 더 중요한가의 문제입니다.
여기서 대다수의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더 우선되어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여성의 <자.기.결.정.권.> ... 여성의 몸은 여성 자신들 것이니, 국가 권력이 간섭하지 말라는 것이죠.
그런데 참 웃깁니다. 국가 권력의 간섭을 운운하며 개인의 (자기)결정권이 헌법상의 권리라 그렇게 강조하던
집단들이 성(性)을 파는 경우에만 몸에 대한 자기결정권에 예외를 둔다는 것입니다. 낙태에 대해 여성단체가
찬성하는 자기결정권이 왜 <성적 자기결정권(性的自己決定權)>만 만나면 히스테리 반응을 보이는지
저는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개인의 성생활(s.ex) 역시 자기책임하에 이루어지는 명백한
개인의 권리(자기결정권)입니다. ... 이쯤되면 무려 600여 전에 발표된 데카메론의 내용과 2019년 광장에 모여
탈코르셋과 낙태죄폐지를 외치는 한국형 페미니즘이 서로 자리가 뒤 바뀐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한국형 페미니즘이 이제는 <발전적 해체>의 과정을 거쳐 변질되고 난립한 기존의 많은
기형적 페미니즘이 아닌, 한국형 페미니즘에 대한 새로운 개념 정립이 우선되어야 하며, 이후에는
진정한 여성해방을 위한 <실천적 통합모델>이 필요하다 생각됩니다. 더불어 사회(남성)를 향한 그녀들의
반복적 스트레스테스트(stress test)는 대중의 지지와 호응 보다는 불신만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앞서도 언급했었지만 오늘날의 페미니즘(Feminism) 운동은 그 유형이 상당히 복잡하고 다양화되고
있으며, 현재도 계속해서 외연이 확장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한국형 페미니즘 또한
자신들의 좌표를 벡터공간 어딘가에 숨겨놓고 이것, 저것 잡다한 사유들을 주인의 허락도 없이 마구 훔쳐다
쓰고 있습니다. ... 세계에 대한 치열한 고뇌와 사유 없이, 단지 머리를 자르고, 남근 사진을 갈기갈기 찢어버리며,
브래지어를 벗어던지는 불꽃 페미쇼를 그녀들은 저항이라 부르고 스스로를 (한국형)페미니즘의 용기 있는 투사로
내면화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운동이 아니며, 그동안 소심했던 본인을 바꿔보고자 집단최면 속에서
즉흥적으로 발흥하는 일종의 담력테스트일 뿐입니다.

‘불편한 용기’는 어느 페미니즘 단체의 이름이라고 합니다.
용기는 무모함과 겁먹음의 중간입니다. 균형을 중요시했던 그리스 철학은 용기를 그렇게 정의했습니다.
그런데 ‘불편한 용기’측은 이 고귀한 가치를 지닌 ‘용기’를 본인들 마음대로 가져다 난도질하려 합니다.
그녀들이 말하는 용기는 무모함과 겁먹음의 경계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녀들의 말하는 용기는
처절한 외로움과 공포에 가까운 소외감속에서 생산된 일종의 바이러스입니다. 아주 치명적인 바이러스 말이죠.
그리고 저는 현재 한국사회에서 진행되고 있는 <페미니즘>이라는 운동이 훗날 이들에게 <향수>가 되는 것이
두렵습니다. 지금 활발히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세대들이 이후 후세대들에게 운동의 바톤을 넘겨주고
기성세대가 되었을 때, 그녀들이 과거를 추억하며 지금의 운동을 아름다운 <향수>로 기억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마치 독재(박정희) 권력이 어떤 세대들에게는 찬양받는 <향수>가 되듯이 말입니다.

어떤 이념이든, 그 이념의 농도가 깊어지면 그것을 따르는 구성원들의 자발적 징집화는 가속화됩니다.
하지만 그 어떤 의문이나 질문을 거부하는 이러한 자발적 징집을 그들은 ‘연대’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현대 한국형 페미니즘은 본인들 할머니, 어머니 세대의 억압을 원래부터 자신들것인양 스스로의 내면에
단단히 착근시켜 자기자본화 시켰습니다. 그렇게 자본화된 ‘(그녀들의)억압’은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투쟁과 운동의 에너지로 전환되고, 그 힘은 증식과 증폭을 반복하며 <여성혐오 없는 세상 만들기>를
꿈꿉니다. ... 그런데 이러한 그녀들의 노력으로 여성혐오가 하나둘씩 사라질 때마다 그녀들은 역설적인
불안을 드러냅니다. 다시 말해 머리로는 ‘여성혐오 부재’를 외치면서도 그녀들의 심장은 ‘여성혐오 존재’에서
오히려 더 많은 안정과 평안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여성혐오의 지속>이 어느 순간부터 격렬한 갈망으로서 그녀들을 전복적(역설적) 인간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회 안에 진정으로 여성혐오가 사라진다면 한국형 페미니즘의 존재이유 또한 함께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도 언급했었지만 한국형 페미니즘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여성에 대한 억압과 혐오가 사라지고 파괴되는것이
아니라, <여성에 대한 억압과 혐오의 지속> 그 자체입니다. 따라서 사회 안에서 여성혐오가 하나둘씩 사라질 때마다
사라진 혐오의 빈 자리를 채워줄 새로운 대체제가 필요하며, 때문에 공동체 그 누구라도 혐오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에
대하여 한국형 페미니즘은 <혐오가 아닌 것을 혐오로 둔갑시키려는 작업>에 더욱 더 매진할 수밖에 없는 사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 결론적으로 이제 그녀들의 핵심적 목표는 여성혐오 반대가 아니라 기업들의 신상품 개발처럼
<새로운 여성혐오 개발 및 생산>을 목표로, 하나둘씩 사라져 가는 여성혐오의 대체제 만들기작업인 것입니다.
그래야만 자신들의 권력이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보다도 여성혐오 반대를 강하게 외치지만,
그 누구보다도 여성혐오가 지속되기를 바라는 것 또한 그녀들입니다. 즉 사회 안에 계속해서 여성혐오가 존재해야만
그녀들은 더 큰 목소리를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순상태가 곧 그녀들이 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이가
기술적 방편이 되는 것입니다.

@ 공동체가 말합니다.
<“알겠습니다! ~ 반드시 여성혐오 없는 세상을 만들겠습니다.”>

@ 그녀들이 말합니다.
<“아니오! ~ 100년, 200년 후에도 여성혐오는 계속 살아있어야 합니다. 그러니 제발 여성혐오를 멈추지 말아주세요!”>

우리 사회 '여성혐오의 존재'는 그 자체로서 한국형 페미니즘 운동의 존립근거가 됩니다.
열정을 쏟아야할 적(敵)이 사라지면 이후에 찾아오는 것은 치명적 무력감뿐이며, 이것은 늙은 퇴직자의
소외감과 같고, 주인에게 버려진 개의 심정과 동일하며, 대중에게 잊혀지는 것이 두려운 스타의 절망감과 동일합니다.
그래서 나는 그녀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대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여성혐오가 사라진 세상인가? ~ 아니면
여성혐오가 사라진 세계에서 더 이상 싸울 상대가 없다는 무력감이 두려운 것인가? ~ 아니면
세상에서 서서히 잊혀지는 것이 두려운 것인가?

[◆ 남자아이는 여성이 자신과 같은 페니스를 소유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이를 쉽게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절대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만약 여성이
거세를 당해 버린 것이라면 자신의 페니스도 위험이 처할지 모른다는 공포감과 불안감이
들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발로서, 혹은 일종의 경계 표시로서 자신의 페니스를
들여다보는 나르시시즘이 생겨나기도 한다. 나중에 성장해서 성인이 되었을 때도 거세 불안을
느낄만한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면, 공포감을 경험하고 비슷한 논리적 결과가 생긴다.
내가 잘못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아마 라포르그(Laforgue) 같은 학자는 이 경우
남자아이가, 여성이 자기처럼 페니스가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을 암소화(暗所化) 하려
한다고 설명할 것이다. 즉, 지각작용 자체를 마치 망막 암점증에 걸린 상태처럼 눈에 보이지
않게 지워버리려 한다고 설명할 것이다. (@ 암소화 - 환자가 자기의 자아와 상충되는 모든 것의
존재를 부정하려고 하는 정신적 암점(暗點)의 발달을 말한다. / 암점(暗點) - 빛깔이나 색을
느끼지 못하는 망막 시신경의 희고 둥근 부분) - (성욕에 관한 세편의 에세이. 29페이지/ 프로이트/ 열린책들) ]
=======

프로이트의 견해에 저 개인의 전복적 생각을 더하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 합니다.

< 생각의 전복 >
[◆ 여자아이는 남성이 자신과는 다르게 페니스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이를 쉽게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절대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만약 남성이
페니스라는 축복을 선물 받은 것이라면 (여성)자신의 페니스 부재에 대한 허탈감과 질투의
감정이 동시적으로 발생한다. 그래서 이에 대한 반발로서, 혹은 일종의 소유욕으로서 페니스를
절도하거나 파괴하여 자신과 동등한 수준으로 남성을 끌어내리려는데 욕망을 내면화 한다. - 물파스 생각 ]




[@ 간혹 므흣한 게시물을 볼 때면 나도 한번쯤은 그 유명한 ‘대인’을 불러보고 싶었지만
그래도 물파스는 진지함과 긴 글로 승부하는 사람인데 ‘내가 어떻게 대인을 부르겠는가?’ ... 라며
어느 샌가 또 어느새 다른 내면에선 ... 잠시 뒤 전문적으로 대인을 외치는 분들이 등장할 것이니
물파스 너는 가만히 앉아 ‘품위를 지키라’며 비겁함과 소심함이 참 꼴값스럽게 교체되곤 했었습니다.
어쩌면 이 또한 경직된 우리 성문화에 대한 영향이 아닐까를 생각해 봅니다. ~ 편안한 주말 보내십시오.]

2019년 2월 6일 수요일

페미니즘의 난립 / 결국 그것도 돈, 정치, 권력

지금 페미니즘이 난립하는 이유를 이해하려면
운동권과 시민단체, 진보의 역사를 먼저 알아야해
여기 있는 나이 많으신 형님들은 아시겠지만
혹시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오랜만에 한번 길게 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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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진보가 내세우는 캐치프레이즈는 단순했어
1.민주화
2.반독재
3.대통령 직선제

이 세가지 기치 아래 모든 진보세력이 다 모여들었고
이것만으로도 시민들의 환호를 받을수 있었지
근데 문제는 90년대에 들어오면서 시작된다

90년대에 대통령 직선제도 결국 받아들여지고
군사정권이 물러나고 YS 로 정권교체도 되면서
그토록 원하던 민주화도 결국 이루어지게돼지

근데 정작 민주화를 외치던 진보세력은 더이상 할게 없어진거야
더이상 욕할 독재자도 없고
더이상 요구할 목표도 없어진거지
한순간에 백수 실업자가 돼버린거야

그나마 정계에 연줄이 있던 운동권 유명 인사나
재야 거물들은 국회의원 보좌관 자리라도 하나 얻어 먹으면서
우르르 정계로 진출할수 있었지만
밑바닥에서 활동하던 다수의 <시다바리>들은
갈곳도 없고 할것도 없는 잉여 인력으로 사회에 내팽개쳐 진거야
아직도 80년대 운동권에서 활동하던 많은 사람들이
가난 속에서 궁핍한 인생을 연명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고
운동권의 변절과 내부 이권 싸움이 지속되는 근본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어
돌 던지면서 투쟁한건 다 똑같은데
나중에 국회의원이나 관료직같은 좋은 자리를 얻어간 인간들은
잘나가는 유명인 몇명 뿐이었기에 내부에 불만이 쌓일수 밖에 없었던거지

이렇듯 민주화 이후에 다수의 진보 세력이 갈 곳을 잃은 백수가 됐고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헤매다가
발견한게 바로 <시민단체> 였어

더이상 민주화같은 관념적인 정치 이념으로는
시민들의 관심을 받을수도 없고
그런 방식의 정치 행위가 필요치도 않은 사회에서
일반인들의 생활에 직접 연결되는 문제를 테마로 삼는 시민단체는
낙오한 운동권에게는 좋은 일자리였던 거지
전국에 온갖 시민단체들이 난립하게 된게 이때부터였고
정치, 경제, 노동 같은 전통적인 분야뿐만 아니라
환경, 문화, 예술, 심지어 아이들 교육 분야까지 시민단체들의 밥그릇으로
비화되기 시작한것도 이때부터였어
지금도 동네에 듣도 보도 못한
XX연대, XX모임, XX연구회, 라면서 허름한 간판 하나 걸어놓고
시민단체 행세하는 애들이 넘처나는 이유를 이제 알수 있을거야

우리나라 시민단체의 가장 큰 문제는
시민단체가 <시민단체의 일>에 관심이 없다는거야
몰락한 운동권과 진보세력이 차린 신사업이 시민단체이다 보니
이 사람들의 궁국적인 목표는 권력을 획득하는 것이지
시민단체의 임무가 아니거든

시민단체가 먹고 사는 방법을 알려줄께
1.사람들이 관심있어 하는 테마를 잡는다
(환경오염, 도시개발, 학원교육, 남녀차별 등등등)
2.사람들의 공포감과 분노감을 극대화시킨다
3.회원을 끌어모으고 조직을 확대한다
4.비대해진 조직과 회원들을 기반으로 정치인에게 접근한다
5.선거기간동안 특정후보를 지지하거나 낙선운동을 펼쳐 정치력을 과시한다
6.정계에 만들어진 연줄을 기반으로 정부사업을 따내거나 수익사업을 획득한다
7.전국 조직이 갖춰지면 이를 기반으로 정당에 공천을 요구하거나 장관직을 요구한다

대형 사건이 터지면
광화문에 평소에 알지도 못했던 온갖 시민단체들이
깃발을 들고 나온다
이 세력이 궁극적으로 원하는건
자신의 정치력을 과시해서 진보 내에 지분을 넓히고
유명세를 이용해 회원들을 끌어모으려는 것이다
광화문이 시민단체의 거대한 영업장소가 돼버리는거지
진보 정치인들은 이 세력들을 이용해 선거에서 이기려하고
권력을 쟁취해야 하기 때문에 절대 시민단체 세력을 무시하지 못한다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이다

이제
권력이 바뀐후로 시민단체들이 유난히 활개치는 이유
그리고
페미 정책이 엄청난 반발을 일으키는 줄 알면서도
끊임없이 반복하는 이유를 조금이나마 이해할수 있을거야

이번 시장에서 돈이 되고, 표가 되고, 권력이 되는
가장 유망한 테마 주식이 바로 "페미니즘" 이기에
정치인과 시민단체 온갖 잡다한 진보세력이
한탕 크게 해먹으려고 분위기를 뛰우고 있는거지
물론 이 한탕주의는 지금까지 진보세력이 늘 그래왔듯이
"민주주의" "정의" "평등"으로 포장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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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가 부패한 만큼
진보 내부에 꽤 추악한 모습이 감춰져 있는걸
멍청한 애들이 잘 모르는것 같아서 한번 써봤습니다

◆ 칸트의 정언명령 [by. 물파스]

[◆ 칸트의 정언명령]

(@ 오래전 박근혜와 최순실 관계에 대해 상당히 긴 글을 올렸었는데, 그때 글의 일부내용입니다.)

모두가 그 어떤 배려나 양보 없이 오로지 각자의 이익을 위해서만 행동한다면
세계는 그야말로 하루가 멀다고 온통 대립과 분쟁에 휩싸여 혼란스런 세상의 연속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분쟁의 해결을 위해서는 흔히 “이성적으로 판단하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감정에 휘둘려
사리를 분별하지 못해 편향된 사고나 성급한 판단을 내리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서는 이성을 힘을
빌려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인간들의 이기적이고 비양심적인 본성이 수시로 나타난다면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즉
혼란을 막을 수 있는일에는 무엇이 있을까를 생각해보면, 공동체의 이성으로 만든 <법과 제도>라는
합의된 강제성을 활용한다면 문제가 비교적 쉽게 해결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이성적인 결과인 거죠.
하지만 인간 사회라는 것이 그렇게 간단치만은 않다는 걸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너무나 많이 배워 왔고,
또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혼란스러운 사회 상태에 대해서 법과 제도로도 어찌해볼 수 없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교통사고를 당해 피를 흘리며 도로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고도 그냥 지나친다거나,
하루종일 굶었다며 거리에서 배고픔을 호소하며 돈이나 빵을 구걸하는 걸인을 보고도 그냥 모른 채 하며
지나가는 사람이 있다 해도, 그들은(무관심한 사람들) 사회가 만든 법과 제도로 제재를 가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닌 것입니다. ... 그래서 이러한 이기심과 무관심이 공동체 내에 만연하게 된다면 이성으로 만든, 아무리 훌륭한
법이 존재한다고 해도 사회는 그야말로 극단적인 삭막함 속에 놓이게 되어 공동체라는 말이 무색해 질 정도의
말 그대로 껍데기만 공동체인 사회가 될 가능성이 매우 커질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아무리 공동체의 선과 평화를 위한다 해도 인간의 <도덕적 양심>까지
우리 공동체가 강제할 수단은 없다는 것입니다. ... 한마디로 인간의 "도덕"은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는
이성적 사고만으로는 어찌해볼 방법이 없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좀 더 근원적인 해결 방법은
없는 것인가? ~ 하는 물음이 생길 것입니다. 그래서 300년 전에 태어난 독일의 대철학자 칸트(Immanuel Kant)의
견해를 들어볼까 합니다.

등산객이 비탈진 등산로에서 아래로 굴러 떨어져서 다쳤다 해도 우리는 산(山) 에게 책임을 물을 수가 없습니다.
이는 단지 중력이라는 과학적 <인과법칙>에 따라 그러한 사고가 발생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윤리적, 도덕적 양심은 어떨까?

과학(법칙)같은 지식적 측면의 이성은 우리 인간이 얼마든지 사유가 가능한 영역입니다.(이론적 접근 가능)
한마디로 과학은 충분히 이성으로 사유가 가능한 대상인 것입니다. ... 하지만 신, 영혼, 자유, 도덕 같은 영역은
유의미 하지만 이성으로 사유(검증)하기에는 불완전, 혹은 불가능 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각자의 양심에 따른
도덕적 행동을 왜 해야만 하는지는 과학적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며, 대신 신과 종교가 과학적 질문을 허용하지 않듯이,
인간의 도덕적 행동에도 그 어떤 질문이나 이유를 묻지 않아야 한다고 칸트는 주장했습니다. ... 한마디로
인간의 도덕적 행동은 그 어떤 이유나 이해 없이 무조건 양심이 시키는 명령에 따라 <"의무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칸트의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칸트는, 과학은 이론적인 이성으로는 접근이 가능했지만 ... 신과 영혼, 도덕 등은
이론적으로는 접근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러한 형이상학적 개념들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이성의 지식적 측면이 아닌,
다른 측면의 이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으며, 인간의 도덕적 행동은 직접적인 <"실천(행동)">으로, 즉
아무 조건을 달지 말고 그냥 <의무적>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리고 칸트는 이렇게 우리 내면에
우리를 도덕적으로 행동(실천)하게 만드는 "의무적인 의식"이 존재한다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실천이성">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까지만 살펴보면, 칸트가 규정한 "도덕"은 너무나 막연한 것 같습니다. ... 또한
<"의무적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부분도 조금은 억지스럽고 이해하기도 힘듭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좀 더 확실히 이해하려면 너무나 유명한 칸트의 발언을 살펴봐야 합니다.

◆ "너의 의지의 준칙이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 타당하도록 행동하라." - 칸트(Immanuel Kant)

인간의 도덕은 지식적인(이론적인) 이성으로는 사유가 불가능 합니다. 그런데 칸트는 이러한
형이상학적(신, 영혼, 도덕 등) 영역을 과감히 이성의 영역 안으로 끌고 들어옵니다. ... 그리고
인간의 도덕(도덕적 행동)에도 과연 과학법칙(중력) 같은 "보편적인 원리"가 있을 수 있겠는가? ~ 를
끊임없이 사유하며 고뇌한 끝에 내 놓은 결론이 바로 위의 원칙입니다.

등산객이 넘어져 산 아래로 굴러 떨어지거나 밤나무에서 밤송이가 떨어지거나 ... 그리고
타자가 친 홈런 볼이 하늘을 향해 힘차게 날아가다가 결국은 외야 관중석으로 떨어지는 것은
모두가 '중력법칙' 이라는 보편적인 과학 원리에 따른 결과인 것입니다. ... 그렇다면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인류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보편적인 도덕의 원리가 있을 수 있을까? ... 여기에 칸트는
<"보편적 도덕법칙(원리)">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칸트의 주장처럼 모든 인간에게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도덕법칙(원리)을
찾아보는 것은 너무나 어렵습니다. ... 예를 들어, 거리에서 구걸하는 걸인에게 천 원짜리 한 장을 건넨 행위를
어떤 이는 매우 도덕적인 행동이라 생각하고 있는 반면, 이와는 반대로 그러한 행위(적선)는 오히려 걸인의 자활의지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별로 좋은 행동이 아니라는 의견도 많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실제 인간사회의 현실에서는
"도덕적 행동"에 대한 기준이 개개인 마다 주관적이며 편차가 있기 때문에 칸트의 주장은 쉽게 받아들이기가
어렵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칸트가 주장한 것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가? ... 그래서 칸트를(칸트의 발언)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기서 한 발짝 더 깊게 들어가서 ... 먼저 법(法)과 선(善)에 대한 그동안의 인식을 전환시켜야 합니다.

꾸준히 사회적 이슈로 많이 거론되고 있는 보복운전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대부분의 구성원(국민)들이 보기에는 보복운전은 분명히
잘못된 행동이라고 얘기할 것입니다. 한마디로 보복운전은 "선(善)한 행동이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공동체는 보복운전을 하게 될 경우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공동체의 보편성이 담긴 법(法)을 만들어
적용하게 됩니다. ... 한마디로 우리는 보복운전을 하지 않는 것이 선(善) 이라는 보편적 시선을 갖기 때문에
이후에 법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선한 판단이 먼저 존재한 후에, 그 뒤를
법이 따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입법원리(법이 만들어지는 과정)는 선한 판단 뒤에 법을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칸트는 우리에게 익숙한 이러한 입법의 원리를 전복시킵니다.

근대철학 이전까지만 해도 신(God)은 그 자체로서 진리였습니다.
때문에 신의 계율(말씀, 명령) 또한 묻고 따지지 말아야 할 엄격한 법(法) 이라고 할 수 있었으며,
그러한 신의 말씀(명령)을 따르는 것은 당연한 선이라 생각했습니다. ... 한마디로 법(신의 계율)이 먼저 존재한 후에,
그것을 따르는 것이(신의 말씀을 따르는 삶) 바로 선(善) 이라는 것입니다. ... 그리고 칸트는 여기서 힌트를 얻어,
인간의 <보편적 도덕법칙>또한 신의 계율처럼 그 자체로서 하나의 법(法)이며, 그것을 지키는 것이 선(善)이라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선한 판단 같은 건 따지지 말자는 거죠. 그냥 (보편적)도덕법칙대로 행동하는 것! ~ 이 자체가
바로 선한 행동(도덕적 행동) 이라는 뜻입니다. 결론적으로 칸트가 주장한 <보편적 도덕법칙>이란
아무 조건도 따지지 말고 <“의무적”>으로 행동해야 하는( ~ 해야만 한다!) 규칙(원칙)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원칙(규칙)에 따라 사는 것이 바로 진정한 선이며, 도덕적 행동 이라고 했습니다.[◆ 의무에 따르는 삶!]

결국 앞의 사례에서 걸인에게 천원을 건넨 행위는 잘했다는 칭찬을 받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칸트의 도덕법칙에 따르면 도덕적 행동은 아닌 것입니다. ... 우리가 그동안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도덕적 행동과 칸트가 생각하는 도덕적 행동과는 괴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 아무튼 마음속 깊은 곳에서
타인을 불쌍하게 생각하는, 즉 동정심이 마구마구 샘솟아 자선을 베풀었다고 해도 칸트는 그것이 아무조건 없이
<“의무적(해야만 한다)”>으로 행동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진정한 도덕적 행동이 아니라고 했던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칸트의 도덕적 행동은 <“천원을 주고 싶다!”>가 아니라 <“천원을 줘야 한다!”>가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 "너의 의지의 준칙이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 타당하도록 행동하라." 라는 칸트(Kant)의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 당신이 하려는 어떤 도덕적인 행동이(의지가) 모든 사람이 보기에
법으로 만들어져도 전혀 이상할 것 없을 정도로 보편성을 내포하고 있다면, 그렇게 행동하라!> ~ 라는 뜻입니다.
좀 더 쉽게 풀어보면, 당신이 지금 하는 행동에 대해서,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똑같이 본인을 따라 해도 괜찮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 행동은 보편성(일반원칙)을 가진 도덕적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거리에서 구걸하는 걸인을 볼 때 마다 나는 그에게 의지박약한 놈이라며 주먹질을 할 것이다!"

이러한 행동을 과연 다른 모든 사람에게 따라하도록 얘기할 수 있을까? ~ 당연히 이것은 칸트가 얘기한
도덕적 행동이 아닐 것입니다. ... 칸트에게 도덕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자 의무>였습니다.
이미 앞에서도 언급했었지만, 모든 인간이 개인의 이기심과 비양심적인 행동만을 추구하게 된다면
종국에는 모두의 자유가 박탈당하게 되는 상황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결국 참된 도덕은 이성에서 나오며,
도덕은 의무적인 법칙으로 규정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럼 정리하는 의미에서 윤리학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조지아 주립대학 로버트 L. 애링턴 교수의
얘기를 들어보겠습니다.

[◆ 동정심이라는 동기는 "도덕적 내용이 부족하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동정심이라는
동기로부터 행위하는 사람은 진정으로 옳은 것을 행하는데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단지 동정심이라는 경향성을 만족시키는데 관심을 쏟을 뿐이다. 그리고 자신이 행하는 바의
도덕성에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는 사람은 분명히 “도덕적 가치”를 갖는 방식으로 행위 하는데
실패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칸트는 오직 의무라는 동기만이 행위에 도덕적 가치를
부여한다고 주장한다. ~ (중략) ~ 칸트는 도덕적 가치가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어떤 사람이
자신의 의무를 행하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무에 따라
행위하는 경우라고(@ 이러한 경우에는 행위의 동기가 오직 의무감뿐이기 때문에) 주장한다.
- 서양 윤리학사. (414~415 페이지)/ 로버트 L. 애링턴/ 서광사 ]

칸트는 개인의 동정심의 성취욕구나 타인을 도와줌으로써 칭찬받고 싶다는 마음 같은 것을
“경향성” 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도덕적 행동은 이러한 경향성이 도덕적 행동의 동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으며, 인간에게 의무적으로 도덕적 행동을 유발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실천하는 능력”>밖에는 없으며 인간의 이성은 이러한 실천 능력에 쉬지 말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앞서 이미 언급했듯이 이러한 이성을 바로 칸트의 <"실천 이성">이라고 합니다.

더불어 도덕(도덕적 행동)이 “의무”라면 그것은 곳 명령이 됩니다.(@ 신의 말씀이 곧 명령인 것처럼)
그래서 칸트의 보편적 도덕원리(법칙)를 <"정언명령(定言命令)">이라고 부르며, 정언 명령은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상관하지 말고 행위 자체가 선이기 때문에 무조건적으로 따라야할
도덕적 명령을 말합니다. ... 이와는 반대로 조건을 달고 행동하는 것을 <"가언명령(假言命令)"> 이라고 하는데,
예를 들면 "칭찬받고 싶다면 거지에게 천원을 주어라!" ... 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동은 결국 목적이 칭찬받는 것이기 때문에 가짜 도덕인 것입니다. 따라서 가언명령이 됩니다.

그래서 ... <"너의 의지의 준칙이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 타당하도록 행동하라."> ~ 라는 명령은
칸트의 대표적인 정언 명령이 되는 것이며, 인간(타인)을 위해 행하는 도덕에는 그 어떤 조건도 달지 말고,
그냥 의무감으로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 그 자체로서 대하라 뜻입니다.
[@ 의무감에서 남을 돕는 행위가 동정심보다는 더 도덕적인 것입니다!]

2019년 1월 22일 화요일

◆ 제도(구조)가 권력적으로 작동한다는 의미에 대하여 [by. 물파스]

[◆ 제도(구조)가 권력적으로 작동한다는 의미에 대하여]


(@ 오래전 이슈인에서 한 번 얘기했던 내용입니다. 여기에 몇가지 내용을 추가합니다.)

기독교가 지배하던 중세 서양에서는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하면
극형에 처해져 목숨을 잃어야 했습니다.성경이 쉬워지고 누구나 이해할수 있게 되면,
신부등 목회자의 권위가 사라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당시 사제들은 대중에 대해서는
일종의 특권을 가진 권력층 이었고, 이는 오늘날 소수 지배권력층과 다를바 없는 것이었습니다.

중세의 죄수들은 고문에 의해서 몸의 힘을 빼앗겼지만, 근대에 와서는
노동을 함으로써 몸의 힘을 생산하는 효율로 전환하게 됩니다. 즉, 몸에 가해지는 권력이
"고통과 억압의 권력"에서 "생산하는 권력"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프랑스의 세계적인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 이러한 권력 관계를 단순히
수직적으로만 이해하지 않고 더 나아가 현대사회의 <제도(구조)>안에서 횡적으로 분화된
"담론구조"를 밝혀냅니다.

우리는 몸이 아플때 병원을 방문해 의사와 상담을 합니다.
더불어 대부분의 환자들은 의학지식이 부족한 상태입니다. 따라서 의사의 말을 대부분 수용하면서
의사의 지시대로 약도 먹고 음식도 조절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특이한 현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의사는 우리에게 그 어떤 물리적 폭력이나 협박도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행동은 거절할수 없는 어떤 <"권력">에 의해 움직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날 현대 사회에서는 제도가 만들어낸 '권력관계'가 너무나 많이 생산되고 있습니다.
즉, 사법적 권력관계를 넘어서서 사회제도(병원, 금융, 군대, 언론, NGO 등)가 생산한 권력관계는
사회 곳곳에 다양하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 푸코는 이러한 제도영역 안에서 생산되는
전문적 언어양식을 <담론>이라 정의했습니다.

의사가 환자에게 전달하는 의학용어, 경제(금융)전문가의 경제용어, 그리고 법률용어 ... 그래서
의사와 환자와의 관계에서는 <의학담론>이 생성되고, 이 과정에서 의사는 담론(의학담론)의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 ~ ~ 더불어 담론의 주체는 "권력관계"에서 우위에 서게 되고, 이것은 과거 중세시대의
사제들이 소유한 성경해석 능력과 같은 하나의 특권과 같은 의미인 것입니다.

하지만 전문적 지식인으로서의 "담론주체" 들이 위협을 받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전문지식이 보편화 되고 대중화 될때인데, 푸코는 이것을 바로 "권력의 해체"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담론이 생성 됩니다. 담론이 권력을 만들어내고, 권력은 다시 담론을 재생산함으로서
권력관계는 지속성을 갖습니다. ... 이렇게 담론과 권력의 연대는 사라지지 않는 필연의 관계에 있습니다.
문제는 현대 사회에 있어서 담론이 미시화 되는 부분인데 ...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거대 담론이 사라지고
확인할 수 없을 만큼 작아져서 평범한 일상처럼 작동되는 방식입니다. 다시 말해, 담론 자체가
아주 당연시 되어 시민들이 이러한 은폐된 권력관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
오늘날의 권력이 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권력이 은폐되었다>라는 의미는 '권력' 자체가 하나의
사회제도가 되고, 구조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원형 모양의 감옥이 하나 있습니다. ... 중앙에 높은 감시탑이 하나 있는데, 이 감시탑은 늘 어둡습니다.
그리고 죄수의 방은 밝게 해놓았는데, 이러한 구조는 감시탑 안에서는 감방안의 죄수들이 항상 보이므로
언제나 감시가 가능하지만, 감방안의 죄수들은 중앙 감시탑의 교도관이 어두워서 전혀 보이질 않습니다. 따라서
죄수는 교도관이 지금 잠시 자리를 비우거나 잠시 졸더라도 항상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탈옥 같은건 절대로 꿈꾸지 못합니다 ... 이 감옥이 바로 1791년 공리주의자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이
제안한 원형감옥 <판옵티콘(Panopticon)>의 모습입니다.

인간에게 쾌락을 가져다주는 행위가 바로 선이며 옳은 것이라는 윤리관이 "공리주의"입니다.
원형감옥 판옵티콘을 설계한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의 주장인데, 공리주의에서는
사회의 행복은 그 사회의 포함된 개인들 각각의 행복(쾌락)을 모두 합한 것입니다.
많이 들어보셨죠? ... "최대 다수의 최대행복" 입니다. 따라서 공리주의 주장대로라면,
사회의 이익(행복)을 최대화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증진시켜야 합니다.
이를 '자본주의적 의미'로 해석해보면 이렇게 표현할수 있습니다. ~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한마디로 <생산성의 극대화>입니다. ... 그런데 판옵티콘은 이러한 자본주의적 의미에 가장 부합하는
구조를 가진 감옥입니다. 수많은 감방을 감시하는데 있어서 중앙의 감시탑 하나만(교도관 1명) 있으면
모든게 해결이 가능하므로, 이것은 감옥의 구조, 즉 <감시체제(제도)> 자체가 최대의 효과(성과)를
올릴수 있는 가장 자본주의적인 산물에 가깝다 할수 있는 것입니다.

(사회)제도나 구조가 권력적으로 작동하는 사례는 사람의 <신체>에도 녹아들어 있습니다.
푸코(Foucault)는 근대사회에서 지식과 권력의 목적이 바로 인간을 "표준화" 하려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표준화 중에서는 인간의 <"신체">에 대한 표준화가 가장 대표적인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신체는 고대나 현대, 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 기능이나 (신체)기관은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습니다.
한마디로 수백년전 사람의 몸이나 오늘날 사람의 몸은 차이가 없다는 것이죠! ... 눈, 코, 입, 손, 발, 내장기관 등
인간의 물리적 "몸" 자체로서는 과거나 현대나 그대로인 것입니다. 하지만 푸코(Foucault)는
<"신체도 하나의 사회제도다!"> 라는 ... 그야말로 푸코(Foucault)식의 정의를 내렸습니다. 무슨말인가 하면,
사람의 신체에는 권력이 주입한 어마어마한 비밀이 일종의 사회제도처럼 어떤 "의미에 엮여 있다" 라는 것입니다.

[@ 18세기 후반에 와서 병사는 만들어질수 있는 어떤 것으로 변했다.
형태가 갖추어지지 않은 진흙, 곧 부적격한 신체가, ...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있는
기계로(인간 기계) 변했다. 자세는 조금씩 교정될수 있는 것이었고, 계획적인 구속이 서서히
신체의 각 부분을 통하여 영위되었고 그것들을 자유롭게 지배하고 신체 전체를 복종시켜
항구적으로 취급 가능하게 만들고, 그리고 자동적인 습관이 되어 암묵리에 남게 되었다.
요컨대 "농민의 요소를 추방하고" ~ 그 대신 "병사의 태도"를 주입시킨 것이다.
- 푸코(Foucault). 감시와 처벌 中 ]

"신체도 하나의 사회제도다!" ... 라는 푸코의 정의는 가까운 일본의 사례를 통해
우리가 좀 더 쉽게 이해할수 있습니다.

1873년 일본에서는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천황의 이름으로 징병제를 도입했는데, 이것은 천황이 직접 지휘하는
군대를 조직화 하는 것으로 ... 농민, 상인, 평민에 관계 없이 만 20세의 남자는 모두 징병 대상이 되어
신체 검사에 합격하면 2년간의 국방 의무를 부담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근대 일본의 군대 제도가 정비되기
시작했고, 군대는 메이지 정부의 근간 무력으로서 국내외의 위기 상황에 상당히 중요한 물리력으로 자리잡게
되었던 것입니다. [@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근대 일본의 군대 창설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고,
수상과 원로로서 정치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때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머릿속에는 <통제(권력)>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두가지 의미가 있는데 ... 하나는 메이지 정부에 반항적이었던 각 번(藩.지역 행정단위)의
사족 병사를 통제하기 위함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까지 무장(武裝)과는 거리가 멀었던 농민이나 상인 같은
평민들의 신체를 <표준화> 하는 것이었습니다. 더불어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는 신체에 권력을 주입하는 일,
즉 <"신체의 정치기술(신체의 제도화)">을 아마도 근대 일본사회에서 가장 푸코(Foucault)적으로
잘 이해했던 인물일 것입니다.

단지 몇 개월의 훈련이면 인간의 신체는 재조립 될 수 있고, 어떻게 하면 공포를 느끼는지, 또 어떻게 하면
죽음도 불사하는 강력한 병사가 되는지 등의 신체조작 기술은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강렬한 전쟁(전투) 경험속에서
몸으로 얻어진 것이며 ... 이것은 야마가타의 고유의 기술이자 하나의 강력한 신념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신체의 정치기술"은 ... 이후 일본에서 <체조>의 도입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메이지 19년(1886년) 문부대신이었던 모리 아리노리는 <군대식 체조>를 학교 교육현장에 도입하는데,
당시 학생들의 신체를 통제하는 것이 "도덕의 향상"과 "근대적인 국가체제 완성" 이라는 과업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 국가주도의 체조 보급은 국민의 건강증진 같은
단순한 목적에 있지 않았습니다. 바로 <"조작가능한 신체"> 혹은 <"순종적인 신체">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 체조는 큰 힘을 기대할수 없는 군대의 신참들을 ... 호령과 함께 일제히 질서정연하게
행동하도록 만드는 훈련입니다. 근대적 군대에서는 병사들이 개인적인 판단이나 능력 및 임기웅변으로
싸우는게 아니고, 집단속에서 사전에 정해진 작은 역할을 부여받고 신호에 따라 그것을 되풀이해서
반복하는 것입니다. ~ (중략) ~ 체조가 집단 질서를 높여주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것은
이 전술상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평범한 능력의 개인들을 기대이상으로
유효하게 활용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 (건강한 일본사 中) ]

근대 국가에서는 예외없이 국민의 신체를 통제하고 표준화하는 작업이 이루어졌습니다.
즉 ... 관리하기 쉽고, 순종적인 신체를 만드는 것이 정치적으로 가장 우선시 되었다고 할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체의 정치기술"은 처음에는 병사들의 신체를 표준화 하였고 ... 이후, 일본에서 모리 아리노리의
군대식 체조가 학교에 보급된 것처럼, 근대 국가에서는 반드시 통제가 필요한 계층과 집단들이 존재 했었는데,
다시말해, <감시와 훈련 및 교정>이 필요한 계층들이었습니다. ... 그들은 바로 광인들과 학교 아이들,
식민지 원주민 등이었고, 나중에는 "생산수단에 구속된 사람들", 즉! ~ <산업사회 노동자들> 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신체를 표준화 하는 작업의 궁극적 목적은 신체의 지배를 통한 정신의 지배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정말로 중요한 점은, 이러한 신체 지배가 강제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통제를 받고있는 대상들은 자신들이 "통제를 받고있다" 라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앞서 의사와 환자와의 담론구조에서 보셨던 것처럼) ~ 이것은 오직 자신의 의지와 자발적 선택에 의한
결과인 것입니다.(@ 최소한 그들의 의식 속에서는) ... 결론적으로 신체의 표준화(신체의 정치기술)는
아무런 의심없이 대상들 스스로가 권력속으로 걸어 들어가도록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정치권력은 인간의 "정신"과 마주하게 됩니다. "장수를 쏘지 말고, 말을 쏘라!" 라는 뜻은
결국 정신의 통제 이전에 신체의 통제를 중요시 하라는 얘기입니다.

1960년대부터 일본의 초.중등 학교에서는 소위 <삼각앉기>, <체육앉기>라는 신체통제가
전국적으로 이루어 졌습니다.[◆ 삼각앉기는 쭈그려 앉은상태에서 두손으로 무릎을 감싸고
머리(고개)를 무릅에 파묻는 모습입니다] ... 물론 "앉기놀이" 라는 건전한 명칭으로 보급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앉기는 ... 우선 두 손으로 무릎을 감싸고 있기 때문에 손장난을 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머리를 숙이고 있기 때문에 고개를 좌우로 돌릴수 없어 주의가 산만해지는 것을 자연스럽게
막을수 있으며, 무릎이 가슴부위를 압박해서 깊은 호흡이 어려워져 큰소리를 낼수 없을뿐만 아니라
친구들과의 대화의 단절이 일어납니다 ... 1958년 일본 문부성(교육부서)은 학생들을 따로 집합시키거나
통제가 필요한 상황에서 이러한 자세를 교육시키라고 공지하였습니다 ... 그런데 당시 학생들에게
주입했던 "삼각앉기"는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들에게는 너무나 편안하고 익숙한 몸의 사용법이 되었던 것입니다.
스스로의 몸(팔, 다리)을 수갑처럼 사용하여 자신을 구속하던 갑갑한 자세가 어느순간 부터는 아이들에게
일상의 편안한 상태가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 이렇게 권력(사회제도)은 우리의 몸과 정신에 매우 자연스럽게
착근(着根)되고 있었습니다.

"삼각앉기"는 아이들의 몸이 자신들도 모르게 권력(신체의 정치기술)에 예속화 된 것과 같습니다.
몸의 기억은 생각보다 강렬합니다 ... 시간이 지나 <일상처럼> 편안한 상태가 되고, 이제 아이들은 선생님의
"집합!" 이라는 명령이 없어도 언제 어디서나 앉아야할 상황이 되면, 하나의 자발적 주체(주체화)로서
자유롭게 스스로 "편안한상태(삼각앉기)"를 선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 또한 이렇게 편안한 상태의 삼각앉기가
스스로 느끼고 선택한 하나의 주체적인 행위로 고착화되면, 그들의 자녀들, 즉 다음 세대들부터는 아무런 의심없이
편한상태(삼각앉기)를 기계적이고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삼각앉기를 사회적 상식처럼 받아들인다!)
다시말해 이 모든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며, 모두가 본인의 자유의지에 따라 선택한 일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작년(2018년) 10월부터 시작된 프랑스 사회의 <노란조끼 시위(Yellow Jackets movement)>가
현재도 우리 언론에 종종 보도되고 있습니다. 시위 역사가 풍부(?)한 프랑스 답게 시위의 '과격성'과 '폭력성'에 대한
지적이 많습니다. ... 더구나 광장에 수백만이 모였음에도 단 한건의 폭력시위도 없이 평화롭게 국가 최고권력까지
무너뜨렸던 경험을 가진 자랑스런 대한민국 국민의 시선으로 보면, 프랑스 국민들의 시위행태는 어쩌면
대단히 미개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 그런데 이 지점에서 푸코의 시선을 대입해보면 전혀 다른 양상이 보입니다.

권력이 시위주체에게 행사하는 (시)공간적 규제는 일본의 삼각앉기 및 푸코의 신체에 가하는 폭력(통제)과
궤를 같이 합니다. 권력은 그러한 공간적 규제를 소위 < 평화적 질서유지>라는 좀더 순화된 표현으로
총괄지어 버립니다. 또한 시위 주체가 아닌, 보편의 시선에서 바라보면 행정권력이 시민들의 불편을 최소화 하려는
노력으로 비춰져 <평화 시위>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시민권리'라는 상위 범주의 보편성을
일종의 도구로 사용하여 공간과 시간을 규제하게 된다면, 그리고 국가(권력) 내에서 일어날 수 있는 ... 이후
모든 시위에 대해 이러한 규제(질서유지)가 반복되어 나타나게 된다면, 두려운 것은 지속적으로 규제의 익숙함만을
요구받게 되면서 시위 주체의 <분노의 이유>가 잊혀지고, 어느 순간부터는 <시위 본질>을 망각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분노의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시위는 질서를 유지하는 평화로운 외침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결국 권력에 대한 저항 의지에 무기력함을 주입하고, 동시에 사회 안에서 시위의 내용(본질) 보다는
<시위의 기준(질서유지의 평화적 외침)>이 더 많이 강조되어 자리잡게 된다는 것입니다. 시청 광장에 버스산성으로
공간을 배분하여 한쪽은 시위주체를, 다른 한쪽은 일반적인 시민들로 분리하게 되면, 즉 시민들의 불편을 최소화 하고
질서유지를 위해 공간을 나누게 된다면 ... 결국 시위주체가 아닌 일반적인 시민들은 광장을 지날때마다
버스가 시위주체들과 자신을 철저히 구분지어 놓았기 때문에 ... 같은 지하철을 타고, 같은 병원을 이용하고,
같은 공공요금을 내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철저히 나와는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버스가 이들을 구분짓지 않았다면 시위자들이 거리로 나오고 일반시민들은 그들과 물리적으로
좀더 근접한 관계안에서 서로 섞이게 되면서 불편과 불만을 하소연 할수도 있습니다.(무질서 양산) ... 하지만 이것은
확실히 "침묵" 보다는 나은 상황이라 생각됩니다. 버스(산성)는 두 개의 세계를 만들었지만, 버스가 없어지면
일반시민들의 불만의 목소리가 나올수는 있어도, 그보다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 시위 주체들과 일반시민들이
같은 공간속에 존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시위 주체들과 시민들이 공간을 공동으로 점유하게 되면
권력에게는 하나의 공간속에 무질서하게 섞여있는 시위자들과 시민들을 솎아내야 하는 골아픈 문제도 발생하겠지만,
그보다는 시민들의 불만과 불편이 <"관심(시위의 본질, 저항하는 이유)">으로 전이될 가능성을 더 크게 염려해야
할 것입니다. 권력은 그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행정을 비롯한 통제 가능한 일부의 영역(ex 언론)은 분명히 존재하겠지만,
광장에 섞여있는 수많은 독립적 의식 덩어리들은 웬만해선 통제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버스산성 같은 공간의 통제는
결국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의식(정신)의 통제와 그 의미가 유사하다고 할 수 있으며 ... 이것은 앞서 살펴본
일본의 삼각앉기와 푸코의 신체 통제 처럼, 통제에 관한 한 모두가 유사한 프로그램이 사용됐다고 말할수 있을것입니다.
또한 '질서(시위규제)'가 보이지 않는 하나의 '폭력'으로 작용한다고도 말할수 있으며, 이러한 공간의 규제가 반복되고
사회안에서 표준적 시위 방식이 합의된다면 ... 이제부터 시위 주체들은
<"시민들의 보행권을 침해하지 않도록(정해진 공간을 벗어나지 않도록)"> 무의식적으로 스스로를 통제하게 될 뿐만 아니라
이러한 권력의 규제 요구에 익숙해 지면서, 배후의 숨은 제도가 권력적으로 작동하는 방식의 실체는 파악하지 못하고,
이 모든 것이 자신들의 자유의지로 결정되어진 것이라며 조금씩 내면화 시키게 된다는 것입니다.
[◆ 평화시위 반대를 주장하는게 아닙니다. ... 우리가 그동안 너무나 당연시해왔던 일들에 대해
한번쯤 고민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다시말해 "사회제도가 암묵적 권력으로 기능하는 방식"에 대해
생각해 보자는 의미라고 봐주시면 되겠습니다.]


담론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권력관계"에서 영원히 자유롭지 못하게 됩니다.
설령 담론의 주체가 어렵다면 최소한 담론의 구조라도 스스로 알아보려는 노력이 필요하고 ... 그래서
국민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담론질서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무식(無識)과 무지(無知)는 언뜻 비슷한 의미로 생각되지만, 둘은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무식은 지식과 정보의 빈곤입니다. ...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사는 사회는 정보 과잉의 사회입니다.
때문에 무식은 언제든지 극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지는 <알고 싶지 않다> 라는 마음이 지속되는 상태입니다.

푸코의 말대로 (주류)담론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단순한 용어의 정의를 안다고 뽑내기 보다는
그러한 용어가 그 사회안에서 어떠한 맥락으로 사용되고 있는지, 더불어 그런 용어가 생산한 담론이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권력적으로 기능하는지를 파악하는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 급하게 쓰다보니 맞춤법이 틀린 단어가 있을수 있습니다.
혹시라도 있다면 너그럽게 양해 바랍니다. ... 맞춤법을 염려하는 지금 제 모습 또한
어쩌면 제도가 암묵적 권력으로 기능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입니다. ~ 힘찬 한 주 되십시오.]

◆재미로 배워보는 금리(단리)와 은행의 시장성수신 이야기 [by. 물파스]

[ 재미로 배워보는 금리(단리)와 은행의 시장성수신 이야기 ]


이자를 계산하는 방법은 재무계산기나 엑셀을 활용하면 간단히 구할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술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기본원리도 알아두신다면, 이자에 대한 자신감이
지금보다는 더 나아질거라 생각합니다. ... 그래서 먼저 단리이자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 단리 적금이자 공식 = < P(월 납입금) × [n(n+1)/2] × (R/12) >
@ n=개월수, R=연이율

위 공식은 단리 적금의 "이자금액"을 구하는 공식입니다.
그전에 적금과 예금을 먼저 구분하셔야 하는데 ... 적금은 적립저금(積立貯金)의 줄임말입니다.
일정한 기간동안(1년,2년,3년 등) 매월 일정금액을 은행 상품에 불입하는 것입니다.
ex) “철수는 급여일(25일)에 맞춰, 매월25일에 국민은행에 30만원씩 1년동안 돈을 넣기로 했다“

또한 예금은 넓은 의미에서는 은행에 돈을 그냥 넣어두는 것입니다. 여기에 일정 기간동안(1,2,3년 등)
돈을 찾지 않겠다고 계약한다면, 이것을 보통 ‘정기예금(定期預金)’ 이라고 합니다.
ex) "철수는 적금으로 모은 목돈 1,000만원을 국민은행의 정기예금 상품에 1년동안 넣어두기로 했다“

자! ~ 그럼 단리이자공식에 대해서 계속 얘기해 보겠습니다.
은행의 적금상품은 보편적으로 단리이자를 많이 적용합니다. 하지만 가끔은 자금유치를 위해
특판형태로 (월)복리상품을 판매하기도 합니다.

그럼 위 공식대로 한 번 단리이자를 계산해 봐야겠습니다.
위에서 철수는 급여일 25일에 맞춰, 매월 30만원씩 1년(12개월)동안 불입하기로 했습니다.
철수가 가입한 적금상품의 이율은 연5% 라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 <P(월불입금 30만원) × [(12×13)/2] × (0.05/12)> = 97,500원(세전 이자금액임!)
따라서 매월 30만원씩 12개월동안 불입한 원금은 360만원이며, 여기에 이자금액 97,500원을 합하면
1년뒤 원리금(원금+이자)은 3,697,500원이 됩니다. ... 이것은 철수가 국민은행의 5%, 1년 단리적금에
월 30만원을 불입한 결과인 것입니다.

그럼 왜 저런 공식이 도출되었는지 한번 차분하게 살펴봐야 겠습니다.

[◆ 매월1일에, 1만원을 연이율12%, 1년 단리적금상품에 가입 했을때]

@ (1월1일): 은행에 1만원을 납입합니다. 상품의 가입기간이 1년이기 때문에,
1만원은 1월부터 12월까지 12개월동안 통장에 묶여있는것과 같습니다. 즉 1월1일 납입한 1만원은
1년짜리 정기예금상품에 가입한 것과 마찬가지란 뜻입니다. 그래서 연이율이 12% 이므로
이자는 1,200원이 발생합니다.

@ (2월1일): 은행에 1만원을 납입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11개월동안 통장에 머물러 있습니다.
연이율이 12%이므로, 월 1%의 이자금액 100원이 11번 발생해서, 총 이자금액은 1,100원이 발생합니다.

@ 3월1일에 납입하는 1만원에 대한 이자도 동일한 개념으로 총 발생하는 이자는 1,000원입니다.

@ 11월1일과 12월1일에 납입하는 1만원은 각각 통장에 2달과 1달동안 머물러 있습니다.
따라서 이자금액도 각각 200원과 100원 입니다.

자! ~ 그럼 매월1일에 납입했던 1만원이 통장에 머물러 있는 기간만큼 이자가 발생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1월부터 12월까지의 이자금액은 1,200원부터 시작해서 1100, 1000, 900, ...100원이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을 모두 더해보면 7,800원 인데,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법칙을 발견할수
있습니다. 바로 가우스가 발견한 법칙입니다.

이자금액이 1,200원으로 시작해서 100원씩 줄어든다는 것입니다. 그럼 여기에 거꾸로 100원으로
시작해서 개월수가 늘어날 때마다 100원씩 증가하는 모습을 덧붙여 더해 본다면, 1,300원이 12개가 됩니다.
그리고 각각의 이자를 두 번 계산했기 때문에 2로 나눠주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식에서 N은 개월수 이므로, 적금이 1년8개월(20개월), 2년3개월(27개월) 처럼,
굳이 1년,2년 등의 단위가 아니라도 계산이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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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의 시장성수신 이야기]

금융기관중 특히 은행의 자금운영 측면을 살펴본다면, 다를 잘 아시겠지만,
국내은행들에게는 아직도 예금과 대출이율의 차이인 예대율 마진이 가장 중요한 수익원중 하나입니다.
고객들이 은행에 예금을 하면, 그것은 은행입장에서 보면 부채가 됩니다. 또한 당연한 얘기지만,
고객이 돈을 돌려달라고 하면(예금해지) 은행은 지체없이 돈을 돌려줘야 합니다. 더불어
감독당국도 은행의 자금운용(대출)을 수시로 점검해야 합니다. 다시말해 고객의 예금기간과
은행의 대출기간의 조화가 잘 이루어지는지 세심하게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객이 1년짜리 예금에 가입했다면, 은행도 그 돈을 1년짜리 대출에 이용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자금운용 방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보편적으로 은행의 건전성(안정성)을 평가할 때
유동성비율과 예대율을 대표적인 평가지표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 유동성비율 = (유동자산/유동부채)
@ 예대율 = (대출/예금)

먼저 유동자산이 100원이고, 유동부채가 100원 이라면 유동성비율은 100%가 됩니다.
이것은 은행이 자기의 보유자산 만으로도 빚을 모두 상환할수 있다는 뜻입니다.
만약 비율이 50% 라면 자산을 모두 처분해도 빚은 절반 밖에 갚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예대율은 말그대로 고객의 예금으로 대출을 얼마나 했는지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A고객이 100원을 예금했는데, 은행이 그 돈을 전부 B고객에게 대출했다면 예대율은 100%가 됩니다.

부동산 광풍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부동산 시장이 뜨거웠던 2006년 당시
국내 시중은행들의 예대율은 약 125% 수준 이었습니다. ... 고객이 은행에 100원을 맡겼다면
은행은 그 돈으로 약 125원을 대출했다는 것이죠!

2008년 세계금융위기(서브프라임 위기) 이후 미국과 유럽및 한국 등도 어느정도 부동산경기의
과열이 진정되기도 했는데, 그 당시(2011년) 기준으로는 예대율이 약 108% 수준으로 낮아졌습니다.
그리고 금융위원회는 가계부채 연착륙 종합대책의 일환으로 2012년 7월부터 예대율을 100% 이하로
유지하도록 예대율 규제를 공시했습니다.

객관적 수치를 통해 당시 국내 시중은행들의 예대율 수준을 알아보았는데,
여기서 거론하지 않을수 없는 상당히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 은행들은 보편적으로
자금조달구조가 단기인 반면에 자금운용(대출)은 장기로 하는것이 일반적입니다.
즉 고객들은 1년, 3년, 5년 등의 기간으로 은행에 돈을 맡기지만(수시입출금식 통장 포함)
(@사실 5년은 은행에게는 장기에 속합니다)은행의 주택대출 같은 경우만 보아도
보통은 10년이 넘어갑니다. 따라서 은행은 구조적으로 유동성 리스크에 상당히 취약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 고객의 예금이 만기가 다 되었다던지, 아니면 해지를 했을때 바로바로 돈을 돌려줘야 하는데
만약 은행이, 보유하고 있는 자산을 현금화 하기도 쉽지않고, 대출 회수율도 낮아져서 당장 돌려줄 돈이 없는
상황에 처할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통 자산 및 부채의 유동성불일치(mismatch) 라고 하는데 ... 이렇게
은행에게 심각할 정도의 유동성 불일치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면, 은행도 빠른 시간안에 돈을 마련해야 할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은행에게 돈을 빌리기도 하고(@ 여기서 적용되는 이율을 우리는 보통 콜금리라고 합니다)
스왑(swap)을 이용하기도 합니다. ... 아니면 은행 자체의 채권을 발행한다던지, 정말 긴급한 상황에서는
우리가 뉴스에서 자주들었던 CD라는 양도성예금증서를(보통 90일 ~180일짜리) 발행해서 자금을 조달 하게 됩니다.
참고로 은행이 이렇게 고객이 맡긴돈이 아닌 방법으로 조달하는 자금을 흔히 <시장성수신> 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부동산 경기의 활황국면에서 대출수요는 늘어나는데 빌려줄 돈이 부족하게 된다면 보편적으로 가장먼저
<시장성 수신>이 증가하게 됩니다.

2008년 금융위기 이전까지만 해도 국내 감독당국의 유동성비율(원화유동성) 기준은
잔존만기 3개월의 원화유동성 이었습니다. 다시말해 원화로 예금한 고객돈을 돌려주기 위해서
은행이 과연 원화자산을 어느정도 보유하고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었는데. 기준은 100%(원화유동성비율) 이상을
유지하도록 한것입니다. 하지만 금융위기이후인 2008년 10월부터는 잔존만기 기준이 1개월로 바뀌게 됩니다.

예대율은 2008년 금융위기때 정점에 올랐다가, 정부의 예대율 규제와 유동성비율을 잔존만기
1개월로 변경하면서 낮아지기 시작해, 그 이후로는 100% 미만수준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대율을 살펴보면
고객예금의 예금특성(단기,중기,수시,정기 등)이 적절히 반영되지 못해서 위기때 각각의 예금들이 어느정도 속도로
유출될 것인지 파악하기 힘들다는 문제가 남아있었습니다. ... 더불어 유동성비율도 잔존만기를 1개월로 변경하긴 했지만,
은행들이 비율 보고시점인 월말 즈음에 CD(양도성예금증서)나 채권을 새로 발행해서 마련한 자금으로
유동성이 높은 유가증권을 매입 함으로써 유동성 규제인 100% 수준을 편법적으로 충족하는 행태가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감독기관은 좀더 정확한 은행의 유동성리스크를 평가하기 위해
LMI(liquidity mismatch index) 라는, 소위 "유동성불일치 지표"를 평가기준으로 활용하기 시작했습니다.
[@ 자세한 LMI 지표산출은 얘기가 길어지므로 생략하고, LMI 산출에 있어서 보다 중요한 내용인
자산과 부채의 항목별 가중치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언급하겠습니다.]

[◆ LMI 유동성 가중치 비교]

<자산항목 - 가중치>
(1.00) - 현금, 지급준비금, CD, CP, 콜론
(0.95) - 국채, 통안채, 정부보증회사채 등
(0.50) - 회사채(정부보증 아닌것), 금융채, 주식
(0.35) - 주택담보대출 등
(0.15) - 잔존만기 1년 이내 대출(주택담보대출 제외)
(0.00) - 기타자산

<부채항목 - 가중치>
(1.00) - 잔존만기 1년 이내 시장성수신 및 차입금
(0.50) - 기업예금, 정부 예금
(0.15) - 가계예금
(0.00) - 자본, 잔존만기 1년 초과하는 은행채 및 차입금

======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 고객이 은행에 맡긴돈, 즉 예.적금 등은 은행의 입장에서 보면 부채가 됩니다.
따라서 은행의 유동성 측면에서는(은행경영 측면에서는) 고객에게 빨리 돌려줘야 하는 돈(단기예.적금 등)은
안정성이 떨어집니다. 더불어 예.적금 같은 고객이 맡긴돈이 아닌 은행 자체에서 조달한 자금인
CD(양도성예금증서), 은행채, 콜머니(다른은행에게 빌린돈) 같은 시장성수신 항목 중에서도
잔존만기가 짧은 것은(1년 이내) 안정성이 떨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 한마디로 은행 입장에서는
빨리 돌려줘야(갚아야) 하는 상품일수록 안정성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동성을 평가할 때, 은행이 보유한 많은 자산항목 중에서는 무엇보다도 빚을 갚기위해
자산을 당장 현금으로 만들기 쉬운 자산들이 우수한 자산이라고 할수 있을 것입니다. 즉
"현금화 가능성이 높은 자산"일수록 좋은 평가를 받을수 있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LMI 자료에서 가중치가 가장 높은 자산항목 중에서 콜론이 보입니다. 이것은 예를들면,
우리은행이 국민은행에게 오늘(2019년 1월16일) 하루동안 1억원을 빌려주었다면,
우리은행 입장에서는 국민은행에게 내일(1월17일) 받을 돈인 대출채권, 즉 자산인 것입니다.
하지만 국민은행 입장에서는 내일(1월17일) 우리은행에게 반드시 갚아야할 돈(부채)인 것입니다.
이렇게 금융기관끼리의 자금거래를 콜거래 라고 하는데, 보통은 1일물(하루) 거래가 대부분입니다.
참고로 돈을 빌려주는 우리은행을 콜론[call loan] 이라고 하고, 돈을 빌리게 되는 국민은행을
콜머니[call money] 라고 합니다. ... 그리고 콜거래에 적용하는 금리를 바로 "콜금리"라고 합니다.
콜거래는 대부분 1일물(하루짜리거래) 거래이기 때문에 위 자료에서도 자산항목(콜론)에서는
거의 현금과 같은 가중치를 부여하고 있고, 부채항목(콜머니)에서도 당장 갚아야할 돈이기 때문에
가장높은 가중치가 부여되고 있습니다.

상식적으로도 빚(부채)은 적으면 적을수록 좋은 것이고, 자산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겁니다.
그래서 부채항목 중에서는 안정성이 떨어지는 항목들에게 좀더 많은 가중치를 부여하고,
자산은 현금화 가능성이 높은 항목들에게 높은 가중치를 부여해서 기존의 단순했던
유동성비율(유동자산/유동부채)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LMI(유동성불일치 지표)를 활용하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은행들의 자산과 부채항목에서 개별 항목들이 어떤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만
잘 살펴보아도 현재의 금융시장 상황(특히 돈의 장단기 흐름)의 감을 잡을수 있습니다. 예를들면,
2008년 금융위기 이전까지는 부동산 시장의 활황으로 CD나 은행채, 1년미만의 RP(환매조건부채권) 등의
시장성수신 등은 꾸준히 증가했으나 위기이후 증가세(비중)는 둔화되었습니다. ...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은행들이 시장성수신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위기상황에서는 대응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진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 따라서 은행들의 시장성수신 규모(비중)가 증가세를 나타낸다면
가계는 되도록이면 현금 보유 비중을 늘리는 것이 좋습니다. ~ 왜냐하면 은행들의 시장성수신에는
위기시 은행의 유동성 위기를 가속화시키는 내부적 요인이 숨어있기 때문입니다.

일반 국민들의 저축과는 달리 시장성수신에는 금리 외에 "유동성프리미엄"이 포함됩니다.
2008년 금융위기때 이 '유동성 프리미엄'이 급격히 상승하는 모습을 보여줬는데 ... 예를들면 이런 것입니다.

@ 은행(은행채 발행): "우리가 지금 돈이 조금 필요한데, 이자 5% 줄테니 1억원만 빌려줘라!"
@ 투자자: "야! ~니들은 고객이 맡긴 돈으로 이자놀이 하면 되지, 뭔 돈이 또 필요하냐?"
@ 은행: "고객돈 말고, 따로 돈이 조금더 필요해서 그래! ~ 우리 채권좀 매입해줘라!"
@ 투자자: "니들 소문이 안좋던데 ... 그럼 이자 5% 이외에 추가로 2% 더 줘라(유동성프리미엄)"

이렇게 시장성수신에는 금리 이외에 유동성 프리미엄이 포함되기 때문에, 위기 상황이 발생한다면
유동성 프리미엄은 점점 높아지게 됩니다. 이것은 은행의 자금 재조달위험(refinancing risk)이 수반되어
위기대응 능력이 떨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위 사례에서 투자자는 금리5%와 유동성프리미엄 2%를
추가로 요구하면서 총 7%의 금리를 원하고 있는데, 만약 채권만기가 도래할 즈음에 서브프라임같은 갑작스런
위기상황이 발생하게 된다면, 은행은 투자자에게 7%이자를 포함해 투자원금을 돌려줘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이때 은행자금사정이 어려워 채권을 신규발행해서 상환하려 한다면, 이때에는 위기상황 이므로
금리도 5% 수준에서 조금더 올라가겠지만, 무엇보다도 유동성 프리미엄이 더 급격하게 상승해 기존 2% 수준이 아닌,
4%, 5%가 될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 이것은 결국 은행의 자금 재조달위험(refinancing risk)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위기의 징후가 보인다면, 은행 입장에서는 디레버리징(Deleveraging 부채축소)이나
자금 재조달리스크를 낮추기 위해 가장 먼저 LMI 지표 조정에 들어갑니다. 쉽게 말해 현금화 하기 어려운,
즉 LMI 자산항목 지표상에서 가중치가 낮은 항목 위주로 정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국채, 콜론 등은 금융시장에서
거의 현금과 동등한 대우를 받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지만(@ 손해 안보고 원금 회수 가능),
주식이나 주택담보대출 같은 경우는 주가하락, 고객의 연체나 담보가치 하락 등의 리스크가 존재하기 떄문에
은행 입장에서는 하루라도 빨리 현금화 시도를 하기 때문입니다. ... 흔히 "은행이 시중의 돈 줄을 죈다!"는 의미에는
바로 이런 메커니즘이 숨어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 그리고 만약 은행 자체적으로 해결이 어렵다면
정부가 나서는데 ... 이때에 가장 고전적이고 대표적인 수법(유인정책)이 바로 가계부문의 돈을
은행에 장기로 예치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 기술적으로는 특정 상품에 비과세 혜택을 주는 대신
의무예치기간 설정 하는 제약을 두고(@ 은행에 장기로 돈 예금하면 비과세 혜택줄께!),
은행에게는 그 특정상품에 대한 지준율을 낮춰주는 것입니다. ... 그러면 시장에 돈이 풀리면서
조금은 숨통이 트입니다!




[@ 통계와 자료는 한국은행을 참조했습니다.
짧게 얘기하려 했는데 또 길어졌습니다. 죄송합니다.
오늘도 미세먼지가 많다고 하는데 ~ 다들 건강 잘 챙기십시오]

2019년 1월 8일 화요일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다는 것에 관하여 [by 물파스]

[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다는 것에 관하여 ]


최초의 순간 ~ '나의 삶' 이라는 발주처로부터 부여받은 첫 번째 임무는
다름 아닌 고독입니다. 그래서 고독은 '본인 삶'이라는 원청이 스스로에게 부여한 영원의 책무입니다.

[◆ 한 번도 젖을 먹어 본 적이 없는 아기를 상상해 보라
배가 고프게 되고 그 아기는 무엇인가를 마음에 그리려 하고 있다.
그 아기는 욕구로부터 만족의 근원을 창조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그 아기가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그 이전의
경험이 없다. 그 순간에 엄마가, 아기가 무엇인가를 기대하려고
하는 곳에 젖가슴을 갖다 놓는다면, 그리고 유아가 오랫동안
입과 손으로 또한 후각으로 볼록한 젖가슴을 느낄 수 있다면,
그 아기는 거기서 발견된 것을 바로 자기가 "창조"한 것으로 경험한다.
- (울타리와 공간. 59페이지 / 마델레인 데이비스/ 한국심리치료연구소) ]

'울타리와 공간'은 세계적인 정신분석학자 도널드 위니캇(Donald W. Winnicott, 1896-1971)의
이론을 설명한 책입니다. 프로이트 이후 가장 사랑받는 정신분석학자라는 위니캇은 한 개인의
삶의 타임라인에서 특히 유아기의 중요성을 많이 강조한 정신분석학자였습니다.

아기는 자신의 욕구와 탐욕이 엄마의 젖가슴이라는 실재와 만나면 냄새와 맛, 촉감 등을
어딘가에 기록함과 동시에 그 욕구와 탐욕의 충족을 아기 자신이 창조한 것이라는 환상을 갖게 됩니다.
이후 아기는 엄마에게서 젖을 떼기 전까지 수천 번 외적 실재에 대한 소개를 받습니다.(젖과 젖가슴의 경험)
이 과정에서 아기는 수천 번 자신이 원하던 것을 창조하고, 그렇게 새로운 창조 때마다
실재(엄마의 젖가슴)가 그곳에 항상 존재한다는 걸 느끼게 됩니다. 한마디로 세상(실제 세계)은
아기 자신이 원하고 필요로 하는 것이 언제나 존재하는 공간임을 자각하게 되는 것이죠. 그 결과 아기는
내적 실재(욕구, 탐욕)와 외적 실재(엄마의 젖가슴) 사이에, 그리고 타고난 근원적 창조성과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는 일반적 세상 사이에는 소위 '살아있는 관계'가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세상(현실)은 여백 없이 타인과의 소통과 교감으로만 가득 채워져 있는 숨 막히는 공간인 것입니다.
이쯤 되면 아기가 인식하는 세상에는 '고독'의 의미가 부여될 수 없습니다. ... 다만 아기가 최초로
엄마의 젖가슴을 경험하기 바로 이전의 상황이 아기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경험하는 고독의 원초적
의미인 것입니다.

성인이 되기 전, 우리는 많은 종류의 어른과 제도로부터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며
배려와 양보라는 긍정의 메시지를 삶의 심연에 단단히 내면화하기를 끊임없이 강요받습니다.
성인이 된 이후로 ... 우리는 다시 수많은 사회로부터 원만한 대인관계와 융통성 같은 처세의 달관을
요구당하며 '정치적 인간되기'를 부지런히 ~ 참으로 부지런히 시도합니다.

'정치적 인간되기'는 사실은 '수직형 인간' 또는 '체제 순응형 인간'의 다른 이름입니다.
그리고 사회는 우리에게 그런 인간형이 바로 어른의 전범(典範)이라 반복하여 강조합니다.
결국 고독을 부여한 최초 삶의 원청은 '현실'이라는 군락에서 우리 모두가 고독을 잊고
체제 순응적으로 아름답게 꽃피우기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에, 그래서 고독은 타인과의 교감과
소통에 의해 시나브로 파괴되어야 할 하청(현실적 삶)의 거친 책무로 재정의 됩니다.

사르트르의 말처럼 우리가 관계 맺기를 시도하는 모든 타인은 언제든 지옥의 조건으로
변할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보편적으로 사람이 무서워지면 관계는 지옥으로 향합니다. 때문에
타인과의 소통과 교감이라는 하청의 책무는 지옥 속에서 차갑게 녹아 흐르는 고독의 증발을
목격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운 좋게 만나는 '고독'이라는 상태는 지옥을 벗어나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를 선물하기도 합니다.

타인을 향해 허리를 90도로 굽혀야 합니다.
타인의 멱살을 잡고 욕설을 퍼붓기도 합니다.
타인의 만족을 위해 노래 부르며 역겨운 춤을 춰야 할 때도 있습니다.
타인의 성공담과 무용담에 기계적 감탄사를 연발하기도 합니다.
타인의 가족이 나의 가족보다 중요할 때가 있습니다.
타인은 소통과 교감의 대상이 아니라 형식과 절차의 대상이 된지 오래입니다.

타인과의 소통과 교감이라는 것들의 정체는 대개는 바로 이런 지옥의 조건 속에서 성립됩니다.
이곳에서 타인들은 구체적 신화를 만듭니다. ... '성공의 신화', '부자의 신화', '정치의 신화',
'아파트 신화', '창업의 신화' ... 이렇게 생산된 군락의 신화들은 지옥의 조건을 강화하고, 그래서
소통과 교감의 장막 아래는 시기와 질투, 증오와 혐오로 점철된 뜨거운 분열이 조용하고 위태롭게 흐릅니다.
이러한 이유로 현실은 우리에게 굴복을 요구하고, 저항을 부추기며, 자신을 위선으로 포장하라
유혹적으로 속삭입니다. 그것만이 현실의 군락에서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가장 합리적 방법이며,
그래야만 소통과 교감에 나름의 명분과 정당성이 확보되기 때문입니다. ... 더불어 마르크스는
<"의식이 존재를 결정하는 게 아니라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 라는 섬뜩한 통찰로 이를 증명합니다.

고독은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혼자 있는 것'과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독방에 갇힌 죄수는 혼자가 되지만, 어쩌면 그는 홀로 있는 걸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즉
'홀수 있을 수 있는 능력'이 부재한 죄수일지도 모릅니다. 이때에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
다시 말해 <고독을 즐길 수 있는 능력>이 힘을 발휘합니다.

체제 순응형 인간은 군락에서의 추방이 두려운 자들입니다. 추방이 두려운 자들은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한 자들입니다. 결국 고독을 즐길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한 자들의 최선은 본인 삶의
대부분을 지옥의 조건 속에서 부지런히 ~ 참으로 부지런히 원만한 대인관계와 처세의 달관을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탐구하는 일 만큼이나 섹스(S.ex)가 중요하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타인과의 소통과 교감만큼이나 <고독을 즐기는 것>이 삶에서 꽤나 의미가 있고, 또한
한번은 본인 인생에서 반드시 필요한 책무라는 사실에는 관심이 덜합니다. ... 우리에게 고독이
필요한 이유는 현실의 군락에서 의무적으로 체제 순응적 꽃을 피우려 노력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 === ===

[◆ 폐암으로 죽은 내 주인 여자는 유언 대신 침을 뱉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싶을 때마다 나는 노랗고 끈적끈적한
그 타액을 떠올린다. ~ (중략) ~ 침은 야성으로 빛나며 자유라고 외쳐댔다.
- 박판식. <서광> (시작, 2005년 여름호) ]

=== === ===

죽어가는 이들은 모두가 외롭습니다. ... 평론가들은 박판식의 시에서 몽환과 허무를 보았지만,
나는 진정한 자유를 품고 있는 고독의 극단을 봅니다. 고독하게 태어나서 고독하게 죽어갈 때
유언이라는 마지막 소통의 창구를 초월하며 여자는 침을 뱉습니다. ... 그리고 시의 마지막 구절
'침은 야성으로 빛나며 자유라고 외쳐댔다'

고독이 ... 그리고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이 극단에 이르면, 단 한 방울의 침으로도 자유를
만끽할 수 있습니다. 침은 날카롭게 이미지화되어 자기를 가둔 세계를 꿰뚫고 앞으로 전진 하려는
역동적 욕망을 그려냅니다. 그리고 이 역동성은 <사유의 전진>으로 이어집니다. ... 이는 마치
헤세의 데미안에서 자신의 세계를 뚫고 나오려는 알속의 새의 몸부림과 유사합니다. 진정한 자유를
얻으려면 알 속의 새는 자신의 껍질(기존의 인식 틀)을 뚫고 나와 새로운 세계와 조우해야 합니다.
설령 그것이 죽어가는 순간일지라도 말이죠. 그래서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다는 건,
군락에서 꽃을 피우는 것보다 더 가치 있고 빛나고 또 의미 있는 일입니다.

[◆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 – (데미안. 123페이지/ 헤르만 헤세/ 민음사) ]

타인과의 소통과 교감의 풍요는 간혹 잘 된 민주주의를 평가하는 잣대로 사용됩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민주주의의 끄트머리에서 고독은 자신의 농도를 더해갑니다. 때문에 한편으로
잘 된 민주주의는 고독이라는 소외된 공신에게 큰 빚을 졌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군락에서 체제 순응적으로 꽃을 피우기 위해 ... 그리고 잘 된 민주주의를 위해
2018년 마지막 공간에서 나는 소용이 없는 몇 개의 전화번호를 지우고 있습니다.
이렇게 세밑이 바뀔 때마다 계속해서 몇 개의 번호를 지우다보면, 어떤 세밑 즈음에 다다르면
더 이상 지울 번호가 없는 순간이 찾아올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 그럼 그때엔 나는 진정으로
완벽히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 인간이 되어있을까 참으로 궁금합니다. ... 물론 이러한
물리적이며 자발적인 망각의 행위가 '자유'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나를 포함, 모두는 서툴게 지쳐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말하고 싶습니다.

< 타인이 곧 지옥이다 – 사르트르(Jean-Paul Sartre) >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건, 그래서 고독을 즐길 수 있다는 건
타인과의 소통과 교감 능력이 부족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당연히 소통과 교감을 부정하지도 않습니다.
소통과 교감 능력이 부족한 자는 단순히 공감의 수치가 낮은 자들일 뿐입니다. ... 때문에
사르트르의 말이 진리라면 ~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 즉 고독을 소유할 수 있다는 건
한 개인에게는 아주 큰 축복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독은 타인과의 소통과 교감을 진즉이 초월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고독은 상시적으로 지옥을 견디는 힘이 내재된 상태인 것입니다.
위니캇의 설명처럼 한 번도 엄마 젖을 경험한 적이 없는 아기는 <원초적 고독상태>에 놓여있는 것입니다.
아기의 고독상태는 모든 외적 실재(타인)와의 관계를 새롭게 창조할 수 있습니다. 교감과 소통을 넘고,
타인을 초월해 이 모든 것을 아기 자신의 주관대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것입니다.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은 바로 이러한 아기의 <원초적 고독상태>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어느새 나는 2018년 마지막 공간에 서있는 신세입니다. ... 또한 <원초적 고독상태>를 추구할 만한
처지가 안 되다보니, 그래서 죽는 순간 유언 대신 야성으로 침 뱉기를 통해 자유를 갈구하는 꿈을 꿔 봅니다.
삶에서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다는 것이 비록 쉬운 일은 아니지만, 소통과 교감능력을 배양하는
현실의 삶(군락의 삶)이 수고스럽고 또 꾸준하게 우리 내면을 통해 삶의 민낯을 지옥의 메시지로 바꿔 전해주는
사려 깊은 친절함을 외면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체제 순응형 인간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2018년 한 해 동안, <원초적 고독상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삶의 공백을
이슈인이라는 풍요로운 군락에서 놀다가는 것도 하청의 큰 복이라 생각됩니다. ~ 아무튼 잘 놀다 갑니다!

2019년 기해년(己亥年)은 ~ 이 곳을 스쳐가는 모든 인연들에게
주체할수 없는 행복이 넘치는 한 해가 되기를 간절히 기원해 봅니다. 더불어
모두가 '홀로 있을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는 한 해가 되기를 추가로 기원해 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부동산과 경제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