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 7일 수요일

한국의 진보 [ㅉ2ㅉ]

한국 진보의 반일 반미는
정신병이지

한국 진보가 조장하는 반일은
이슬람의

반시아파 반수니파 적대
반서방, 반미 정서
그리고 그에서부터
이어지는 테러와
구조적으로 다를 바 없음.

1. 과거를 빌미로 계속해서 사회적 분노를 조장함.
내부의 적인 종파 간이건
외부의 적인 국가 간 종교 간이건
계속해서 분노와 적대감을 유발함

종교 지도자네 뭐네 하는
젊은 층이 따르는 정신적 ‘리더’들이
더 이러한 분노를 조장하며
그러한 분노가 옳다라고 면죄부를 줌

2. 그 적대감에 상대도 적대감을 표시하고
종파 간 국가 간 사이는 극악으로 치달음.

3. 결국, 나중엔 그 분노를 표시하는 것이
수단의 정당함 과정의 올바름
다른 애꿎은 피해자보다 더 중요해짐.

4. 집단광기로 치달음.
테러 폭력 그 과정에서 ‘개인’이란
가치는 사라지고 ‘집단’만 남음.

이 비유로 욕먹을 것 같으니까
뜬금없지만 갑자기
조던 피터슨 예를 들겠음.
아이러니한 건 여기서
글 보는 대깨문들중
페미는 하나도 없더라고
그러니까 조던 피터슨
말은 좀 설득력이 있겠지.

조던 피터슨은
급진적 페미니스트를
마오주의랑 비교했음.
그랬더니 인터뷰를
진행하던 여자 앵커가
마오주의는 문화대혁명 등등의
사건을 통해
수백만 아니 수천만의
희생자를 냈는데
그런 사상과
페미니즘을 비교하냐고
난리를 쳤음.

그랬더니 조던 피터슨이
그랬지

마오이즘과 급진적 페미들의 사상 구조가 같고
추구하는 결과의 모습이 동일하다는 것이었음.
그리고 그 결과를 위해
타인의 개인적 가치 및 사상을
존중하지 않으며 올바른 과정을
생략한 폭력적인 방법으로
이루려고 한다는 것이었음

( 물론 홍위병은 실제 폭력이었고,
페미들은 본인의 사상과 반대되는
사람을 시위 및 데모를 통해
사회적으로 매장하려고 하는 것 )

따라서 비교할 수 있다는 것임

그렇게 보자면
물론 우리나라 반일이
이슬람처럼 극단적으로 테러하고
이런 것은 아니지만
그 구조나 그를 조장하는 집단의
행위가 비슷하니 비교할 수 있다고
생각함.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나라 진보가 심각하게
교조주의화 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함.


교조주의를 구글 해보면
이렇게 정의되어 있음

“특정한 사상이나
종교 경전을 역사적 배경을
생각하지 않고 비판 없이
해석하고

역사적,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배경을 생각하지
않고 그대로 해석한다….

따라 사상과 종교를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는 것이므로,
학문적 곧 논리적 비평에 대해
대화와 토론으로 극복하기보다는
무조건 거부하거나 탄압하는
전체주의적인 모습을 보임”


지금 우리나라 진보가 딱 이럼
몇몇 개의 가치를 교리화 해서
다른 해석 및 이견을 받아들이지 않음.

따라서 본인들의 의견이 교리가 되니
본인들이 절대적인 선이 되지.
이를 통해
내부 결속을 다지고 세상을
이분법적인 가치로 나눔.

내부에선 보수를
동아시아에선 일본
세계적으론 궁극적으로 미국을

자신들의 절대가치
‘민족 자생’과 모두가 잘사는
‘유토피아’를 이루기 위한 목적의
적으로 규정.

반일 민주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당시의 몇몇 사건을
마치 종교적 사건처럼
불가침영역으로 만들어
건드릴 수 없게 함.

이런 교조주의 극단적 민족주의가
중심 이념인 나라 중 현대적 국가는 하나도 없음.
사회계약론이네 뭐네 말할 필요도 없이
현대적 국가라면 개인의 가치가 인권이
가장 위에 존재해야 함.

현재 지금 문재인 정부는
이러한 현대적 정부라고 볼 수 없음

따라서 경제가 외교가 안 좋아 지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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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댓
원댓글은 읽지 않았다. 다만 딱 한가지만 봤어. 원댓글이 박근혜를 지지했는가 아닌가. 원댓글은 박근혜를 입에 담은 적이 없다.

형은 굉장한 착각을 하고 있는데, 문재인은 문재인으로 평가를 해야 한다.
박근혜가 희대의 병신정권인건 틀림없는 사실이고 국민이 끌어내릴 정도로. 문재인이 그 반사이익을 받은 것도 사실이고.
그렇다고 해서 문재인이 박근혜보단 낫다는게 논지의 핵심이어서 되겠냐.
니가 유영철보단 인격자니깐 넌 괜찮은거야?
오원춘보다 사람 덜 죽여봤으니 인권해결사 할 자격이 생겨?
희대의 병신정권보단 좀 나으니 그게 괜찮은거야?
박근혜랑 비교당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문재인에겐 굉장한 모욕이고, 자성이 필요할 때라는 의미밖에 안돼. 자한당이 더 교조주의에 가깝다고 해서 문재인은 교조주의가 아니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는거다.
그리고 분탕치길 좋아하거나 주말 교회 대신 태극기드는 병신들 빼고 자한당을 지지하는 정상인들은, 자한당과 직접 이익관계가 물려있거나, 다른 대안 보수가 없기 때문에 지지하는거다. 깜빵간 년 아무리 까 봐야 전혀 쓸모없는 뻘소리일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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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2일 일요일

◆ 마르크스의 이윤율 하락경향에 대해서 [by. 물파스 +질답]

[◆ 마르크스의 이윤율 하락경향에 대해서 ]

( @ 오래전 이슈인에 한 번 올렸던 글입니다.
'노동'이라는 테제앞에 '기계(로봇)'라는 안티테제가 나타나, 이후 초래 될 변증법적 세계를
마르크스는 과연 어떻게 바라보았을까를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 물론 제 수준에서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논한다는것 자체가 무리인줄 잘 알고있습니다. 다만 많은 분들과 함께 공부한다는 의미에서
조심스럽게 짧은(?) 얘기를 해보려 합니다 ... "왜 하필 시계를 거꾸로 돌려 마르크스냐!" 고
반문하시는 분들도 계실겁니다. ~ 하지만, 산업혁명 시기에 인류가 기계의 도입으로
숙련공들을 해체시켰듯이 ... 지금 이 게시물에서 보여주는 이미 현실로 다가온 로봇혁명이
150년전의 마르크스가 보여준 통찰을 살펴봄으로써 충분히 의미있는 시간이 되리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 어려운 이야기임은 분명하지만 최대한 쉽게 풀어서 설명드릴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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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노동" 에 대한 정의를 해야할것 같습니다.

[◆ 어떤 상품의 소비에서 가치를 끌어내려면 화폐를 소유한 자는 유통권 내부, 즉
시장에서 그것의 사용가치가 가치의 원천이 되는 독특한 성질을 지닌 상품을 발견해야 한다.
그 상품은 현실적으로 그것을 소비하는 것 자체가 노동의 대상화, 즉 가치창조가 되는
상품이어야만 한다. 그리고 사실상 화폐 소유자는 시장에서 이런 특수한 상품을 발견한다.
노동능력, 즉 노동력이 바로 그것이다. - (자본론 中) ]

어렵네여 ~ ~ ;;
문장에서 화폐 소유자는 자본가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가치를 끌어낸다는 의미는 돈을 번다는 뜻이고
유통권 내부는 우리가 상품을 사고파는 보통의 시장 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정리해보면, 돈 많은 자본가가 어떤 특이한 상품을 샀는데, 그 상품을 사용해보니 ... 결과적으로
아주 큰(가치가 증가) 가치가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 여기서 특이한 상품이 바로 <노동력>입니다.
예를 들어, 김철수라는 자본가가 빵을 만들어 팔려고 하는데, 이때 노동자(노동력)에게 월 100만원을
주기로하고 고용해서 빵을 만들게 했는데 ... 생산된 빵을 팔았더니 250만원의 돈을 벌었다는 것입니다.

즉, 자본가(김철수)는 100만원을 주고 특이한 상품(노동력)을 샀는데, 이걸(노동력) 사용해보니
결과적으로 250만원(아주 큰 가치)의 상품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 결국 자본가는 여기서 이윤을
얻게 되는것입니다.

자! ~ 그럼 이야기를 조금더 확장해 보겠습니다.
김철수(자본가)가 빵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사람(노동력)만 필요한것이 아닙니다.
공장과, 오븐같은 기계와 밀가루(원자재) 등도 함께 있어야만 빵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공장, 기계, 밀가루 등은 모두 김철수 자신의 돈으로 사야합니다. 더불어 근로자(노동력)도 있어야만
기계를 다루고, 빵도 포장하고, 신상품 개발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이렇게 자본가 김철수는 자신의 돈을 공장과 기계와 원자재 및 노동력에 투자해서 빵을 생산하게 되면,
생산된 빵을 팔아서 자신이 투자한 돈보다 더 많은 돈을 회수하게 되는 것입니다. ... 참고로 빵을 포장하는
비닐포장지는 자체생산이 아니라 다른 전문 비닐생산자 에게서 사오는 하나의 부품이라 할수 있는데,
이것(부품, 비닐포장지) 또한 자본가 김철수가 투자한 돈에 포함됩니다. ... 그런제 여기서 중요한 점은
최종 완제품(마트에 진열된 빵)의 가치가 빵을 생산하기 위해 투자된 모든 것보다 더 큰 가치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기하게도! ~
어떻게 완제품(빵)의 가치가 김철수가 투자한 모든 가치[@ 공장, 기계, 밀가루, 부품(비닐포장지)] 보다
더 커질수가 있는지 궁금해 집니다.

그것은 바로 <노동력>때문인 것입니다 ... 앞서 자본론 문장 시작부분에서
<"어떤 상품의 소비에서 가치를 끌어내려면"> ... 이라는 문장의 의미를 차분히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자본가 김철수는 빵을 생산하게 위해서 공장을 사고, 기계와 밀가루를 샀는데 ... 결국 이것은
김철수 입장에서는 하나의 상품을 <소비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 다시말해 공장과 기계나
밀가루 등은 모두 빵(생산)을 위해 <소비>되는 것들입니다. ~ 그것들도 일종의 <"상품">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앞의 자본론 문장에서 <"어떤 상품의 소비에서 가치를 끌어내려면"> ... 이라는 의미는
자본가 김철수는 어떤 상품(공장, 기계, 밀가루)을 활용(소비)해서 가치(빵)를 끌어낸다(생산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것입니다.

그리고 노동력도 마찬가지입니다 ...
김철수는 노동력을 상품처럼 사서(고용) 소비합니다(일을 시킨다)
그럼 앞의 자본론 문장을 다시한번 살펴보면,

<"그것의 사용가치가 가치의 원천이 되는 독특한 성질을 지닌 상품"> 이라는 문장이 나옵니다.

여기서 그것의 사용가치는 "노동력의 사용가치"를 말합니다 ... 위 예에서 김철수가 빵공장 노동자에게
월급 100만원을 주기로 하고 일을 시켰는데(노동력을 사용해보니) 250만원어치의 빵을 만들어냈습니다.
이것은 결국 "노동력" 이라는 독특한 놈이 새로운 가치(새로 창출된 150만원)를 만들어 내는
<"진짜배기(가치창출의 원천)"> 였다는 것입니다.

자본가 김철수 입장에서는 150만원이라는 가치가 늘어났습니다 ... 즉, 월급 100만원짜리 노동력은
새로운 150만원의 가치를 창출하는 <"가치창출의 원천"> 이라는 것입니다!
(@ 자본론이 어려운 이유중 하나가 바로 이러한 철학적 의미가 많기 때문입니다.)

자본가(김철수)는 노동자를 고용해서 일을 시킵니다. 그리고 이러한 노동자의 노동력은
새로운 가치를 창출합니다 ... 즉, 이전보다 가치가 늘어나는데 ... 이것을 흔히 <"잉여가치">라고 합니다.
또한 이러한 잉여가치는 모두 노동자의 노동력이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할수 있습니다. 바로 <노동력의 사용가치>와 <노동력의 교환가치>에 차이가 발생한다는 점입니다.

자본가 김철수는 적당한 수준에서 노동자에게 월급 100만원을 지급했지만
(@ 100만원과 노동력이 교환됨, 즉 화폐와 노동력이 교환된 것임!) ... 그 노동력이 만들어내는 가치는
더 크다는(250만원) 사실입니다 ... 즉, 100만원 주고 일을 시켰더니(사용했더니) 250만원의 가치를
창출한 것입니다 ... 따라서 우리는 증가된 가치 150만원을 잉여가치라 부를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본가 김철수가 지급한 월급 100만원 이라는 기준은 어떻게 결정 되는지도 궁금해 집니다.
다시말해, 노동력의 <"교환가치">는 과연 어떻게 산정되고, 또 산정근거가 무엇인지를 살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우리는 김철수 사장의 제빵 회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리고 노동자의 월급이
100만원 이라는 점과 시장에서 판매되는 빵의 가치가 250만원 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빵은 포만감과 부드러운 식감을 느낄수있는 충분한 가치가 있습니다 ... 그렇다면 그러한 빵의 가치는
어떻게 결정해야 될까요? ... 맞습니다! ~ 바로 <빵을 만드는 시간입니다> ... 엄밀히 말한다면
빵을 만드는데 소요된 <"노동시간"> 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궁금했던 월급 100만원을 정하는 기준도
생각보다 쉽게 결정할수 있습니다 ... 노동력의 가격인 100만원은, 결국 그 <"노동력을 만들어내는 시간">에
따라서 결정할수 있는 것입니다 ... (-_-;)

보통 노동자가 아침에 출근했다가 저녁에 퇴근하면 상당히 피곤합니다.
빵의 (총)가치를 250만원으로 만들기 위해 오늘 하루도 열심히 일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중 하루분 만큼의 사용가치를 모두 소비했기 때문입니다 ... 그리고 내일 또 다시 출근해서
하루분 만큼의 사용가치를 소비하려면(일을 하려면), 퇴근후 아주 편안하게 푹 쉬면서 충전을 해야 합니다.
밥도 먹어야 하고, 잠도 자야하고, 영화도 한편 감상하면서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다시 내일 출근해서 일할수 있는 힘이 생길겁니다.

이것은 결국 내일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기 위해서는, 퇴근후 그 힘을 만들어 충전 시켜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 다시말해, 내일 사용할 노동력을 퇴근해서 재생산 해놓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어찌보면 퇴근해서 약이 모두 다 떨어진 휴대폰 배터리를 내일 다시 사용하기 위해서 출근전까지 충전해놓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편할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노동력의 재생산>을 위해서는 돈이 필요합니다.
휴대폰 배터리를 충전하기 위해서는 전기(전기료)가 필요하듯이, 노동자가 퇴근하면 저녁을 먹어야 하는데
당연히 먹거리 비용이 필요합니다. 편안하게 잠을 자려면 집도 필요하고, 자녀가 있다면 교육비용도 필요합니다.
퇴근하고 집에 왔을때 토끼같은 애들이 "아빠!" 하며 달려오면 그것만큼 행복을 주는것도 없습니다.
힘이 많이 나겠죠 ! ~ ~ 취미가 영화감상 이라면 그것 또한 돈이 필요합니다 ... 이렇듯 많은 비용들이 모두 더해져서
바로 노동자의 노동력 가격이 됩니다 ... 빵공장 노동자가 받는 월급 100만원은 바로 이러한 노동력을
재생산(배터리 충전 전기료) 하기위한 비용인 것입니다. 자본가 김철수가 노동자에게 지급하는 100만원은
오직 <노동력의 재생산>을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이제 막 회사생활을 시작한 젊은 사람들의 월급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러한 젊은 사회초년생들은 퇴근해서 집에서 쉬고 다시 내일 출근하는데 많은 돈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작은 집에(원룸)서 잠을 자고, 밥을 먹는 비용도 많이 들지 않습니다. 자녀도 없기 때문에
아이들 교육비용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회사의 장기간 근무한 부장님은 다릅니다.

부양할 가족(아내, 자녀)이 있기 때문에 넓은 집도 필요하며, 식사비용도 많이 듭니다. 자녀들의
학원비도 필요하고, 나이 때문에 젊은 부하직원보다 병원비도 더 많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장기간
근무한 부장의 월급은 신입사원보다는 많습니다 ... 부장의 노동력 재생산 비용이 신입사원의 노동력
재생산 비용보다는 많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이러한 노동력 재생산 비용은 나라마다 다르고 직업에
따라서도 다릅니다. 후진국에서의 노동력 재생산 비용은 선진국 보다는 쌉니다. 후진국의 밥값과 옷값과,
집값은 선진국 보다는 쌉니다. 그래서 자본가들은 후진국의 노동력 재생산 비용을 싸게 책정합니다.

또한 직업에 따라서도 노동력 재생산 비용은 다릅니다. 단순히 벽돌을 나르는일 보다는
통역사들의 월급이 많습니다. 통역을 하기위해 2개국어 이상의 언어를 배우기까지 돈이 많이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다만 여기서 자본가는 '노동자' 자체를 사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 만약 노동자를 살수 있다면
이것은 노동자가 노예가 된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 자본가는 노동자가 아닌 바로 "노동력"을 사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럼 마르크스가 생각했던 진정한 노동력의 실체에 대해서 좀더 따져봐야 할 것 같습니다.
빵공장의 노동자는 아침 8시에 출근해서 저녁 5시에 퇴근하기로 자본가 김철수와 계약하고
월급 100만원을 받기로 했다고 가정하겠습니다.(@ 점심시간 1시간 제외하면 실질 노동시간은 8시간)

그런데 사실 노동자는 오전근무 4시간(8시~12시)만 일해도 자본가 김철수가 노동자에게 지급하는
100만원 가치의 빵을 만들어 낼수 있습니다 ... 다시말해, 김철수가 지급하는 월급 100만원은
노동자의 4시간 만큼의 노동력 재생산 비용 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노동자는 자본가 김철수와
하루 8시간을 일하기로 계약한 상황입니다 ... 결국 노동자는 자신이 받는 월급 100만원의 가치를
4시간동안 모두 만들어 놓고도 ... 추가로 4시간을 더 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전근무 4시간을 <"필요노동"> 이라고 하며, 오후에 추가로 해야하는 노동을 <"잉여노동">
이라고 합니다 ... 이제 답은 나왔습니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보다 더 큰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은
바로 <"잉여노동">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본가(김철수)는 <잉여가치>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노동자의 잉여노동이 창출한 가치는 모두 자본가의 차지가 됩니다 ... 그리고 마르크스는
이것을 <"착취"> 라고 불렀습니다 ... 그러나 이것은 자본주의가 절대로 법을 어긴 것이 아닙니다.

그럼 지금부터는 사람의 노동력과 그것이 산출하는 잉여가치 시스템에 <"기계">를 추가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방금 잉여가치의 개념에 대해서 살펴보았지만, ... 결국 잉여가치에 의해 자본가는 더 많은것을
가질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잉여가치를 좀 더 늘릴수 있는 방법에는 어떤것이 있겠습니까?

잉여가치를 늘릴수 있는 방법중 하나는 바로 전체 노동시간을 늘이는 것입니다.
자본가 김철수가 빵공장의 하루 8시간 근무 조건을 10시간으로 늘리게 된다면, 필요노동 시간은 여전히
4시간이면 충분하기 때문에, 나머지 6시간은 모두 잉여노동이 됩니다 ... 이렇게 잉여노동 시간이 늘어나
얻게되는 잉여가치를 <"절대적 잉여가치"> 라고 합니다.

또다른 방법은 일의 효율을 높이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생산성을 높이는 것인데 ...
빵공장에 컨베이어(conveyor)를 도입한다고 가정하면, 예전에는 사람이 일일이 상자를 운반하고,
상자에서 빵을 가져와 포장했지만, 컨베이어가 도입 되므로써 이동하지 않고 한자리에 가만히 서서
빵을 포장할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하루에 생산하는 빵의 양이 엄청나게 늘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빵공장 사장 김철수는 이렇게 기계(컨베이어)를 도입해서 늘어난 빵의 가격을 다른 공장의 빵보다
절대로 더 싸게 내놓지 않습니다.

다른 빵공장은 아직 컨베이어를 도입하지 않고 옛날방식으로 생산하기 때문에 시장에 내놓는 가격도
예전과 같은 가격입니다 ... 이때에 업계에서 가장먼저 컨베이어를 도입했던 김철수 사장은 그냥
예전처럼 시장에서 통용되던 가격에 빵을 판매합니다. 그리고 김철수 사장은 아주 큰 이윤을 얻을수
있을 겁니다. 이러한 이윤을 <"특별잉여가치">라고 합니다 ... 그렇지만 다른 빵공장에서 이러한 사실을
알고 시간이 지나면서 모두 컨베이어를 도입하게 된다면 특별잉여가치도 서서히 사라지게 됩니다.

더불어 공장의 노동자들이 컨베이어 시스템에 조금씩 익숙해 지면서 이러한 생산방식이 일반화 되면
자본가(김철수)는 컨베이어 속도를 높이게 됩니다. 그러면 노동자의 손동작도 빨라진 컨베이어 속도에
맞추어 빨라져야 합니다. 즉, <"노동강도">가 높아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노동자는 더욱 더 피곤해집니다.
또한 자본가 김철수의 잉여가치는 더욱 증가하게 됩니다 ...

마르크스는 자본을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으로 나누었습니다.
빵 하나가 생산되었다면 ... 그 빵을 생산하기 위해 많은 자본이 투입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투입된 자본중에는 공장, 오븐, 컨베이어, 밀가루 및 노동력이 있습니다. 다시말해 빵 하나가
만들어지는데 공장과 오븐, 컨베이어, 밀가루, 노동자의 노동력 등이 모두 기여를 했다는 것입니다.

포만감과 부드러운 식감을 느낄수있는 빵의 가치에는 이 모든 자본들이 투입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빵의 가치에 투입된 자본중에 공장과 밀가루, 오븐, 컨베이어 같은 기계들의 가치는
그 가치의 양이 변하지 않고 그대로 빵으로 이전 된 것입니다 ... 쉽게 말해, 빵이 빵으로서의
가치(포만감, 맛, 부드러운 식감 등)를 가지며 생산되는데 기여한 공장, 오븐, 컨베이어, 밀가루 등의 역할은
노동력으로 얘기하자면 ~ <딱! 자신의 가치 만큼인 4시간(오전근무, 필요노동)> 만큼의 역할만 했다는 것입니다.
즉 이러한 공장, 오븐, 컨베이어 같은 기계들은 사람의 노동력처럼 잉여가치(오후근무시간, 4시간)를 창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치가 변하지 않는 <"불변자본"> 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사람의 노동력은 잉여가치를 만들어
내기 때문에 노동력 그 자체의 가치! 그 이상을 창출합니다. 가치가 변하는 것이죠! ... 그래서 노동자의 노동력을
<"가변자본"> 이라고 합니다.

기계같은 불변자본이 도입되면 힘든 일들이 줄어듭니다. 그러면 과연 노동자는 좋아질까요?
힘든일을 사람대신 할 수 있는 기계들이 많아진다면 불량률이 줄어들고 좀 더 정밀한 작업을 사람 대신
할수 있으므로 노동의 생산성이 높아지고, 때문에 자본가 입장에서는 기계를 더 많이 도입하려 할것입니다.
불변자본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 그리고 <"가변자본인 노동자는 줄어들게"> 됩니다.

< "기계가 일을 너무 잘한다! ... 그러니 이제 우리공장에서는
사람들이 많이 필요하지 않다! ... 만약 일하고 싶다면 월급 100만원이 아닌
70만원밖에 줄수 없는데 ... 조건이 마음에 안든다면 관둬라 ! - (자본가 김철수) >

여기서 마르크스 자본론의 또 다른 대목을 살펴보겠습니다.

[◆ 기계는 노동자 가족의 전체 구성원들을 노동시장에 내 던짐으로써
가장의 노동력의 가치를 그의 전체 가족구성원들에게로 분할한다.
그러므로 기계는 가장의 노동력의 가치를 저하 시킨다 - (자본론 中) ]

많은 힘이 필요한 일들은 성인들만 할 수 있겠지만 ... 기계가 도입되면, 특히 빵공장의 컨베이어 같은
경우에는 빵상자를 일일이 나르지 않고 자기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빵을 포장하면 됩니다.
다시말해 이런 일들은 여자나 어린아이도 그리 어렵지 않게 할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본가 김철수의 빵공장 노동자는 현재 월급 100만원을 받으며 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공장에 컨베이어가 도입되고 나서부터 공장사장 김철수는 여자와 어린이들 까지도 채용하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노동자의 아내와 자녀들(2명)도 빵공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빵공장 사장 김철수는
아내에게는 월급을 50만원을 주기로 했고, 자녀 2명에게는 각각 25만원씩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빵공장 노동자 가족은 이제 총수입이 100만원에서 200만원으로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 가장 100만원, 아내 50만원, 자녀2명 50만원]

노동자 가족의 수입이 예전보다 2배로 증가했는데 ... 그럼 이들 가족은 기뻐해야 할까요?
먼저 빵공장에서 집안의 가장이였던 노동자 한사람이 일했을때는 자본가 김철수 사장이 한사람에게
100만원을 지급하게 됩니다. 하지만, 노동자와 아내와 자녀 2명을 포함한 4명이 일할때는
자본가는 한사람에게 50만원을 지급해주게 되는것과 같습니다.(200/4) ... 이것은 한사람의 노동력이
100만원에서 50만원으로 줄어든 것입니다 ... 기계(컨베이어)를 도입하니 자본가에게 상당히 유리한
조건으로 변하게 된것입니다.

우리가 앞서 살펴본 노동자의 노동력 재생산 비용은 나이가 많을수록 더 많은 비용이 든다는걸
알수 있었습니다. 20대 신입사원 보다는 50대 부장의 월급이 더 높다는 것입니다.
20대는 해고되도 재취업의 기회가 많습니다. 우선 회사입장에서 급여부담이 적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50대는 해고되도 다시 재취업 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회사입장에서 고용비용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마르크스의 얘기를 들어보겠습니다.

[◆ 종전에는 노동자는 자기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한 것이며
이것을 그는 형식상 자유로운 인격으로 처분한 것이다. 이제 그는
처와 자식을 판매한다. 그는 노예상인(奴隸商人)이 된 것이다. - (자본론 中)]

예전에 노동자들은 자유롭게 자신의 노동력을 팔았습니다 ... 그러나 기계가 도입되고 나서부터는
노동자들이 더 힘들어 졌습니다. 그래서 여자나 어린아이 까지 빵공장에서 일하게 해야 합니다.
혼자 벌어서 가족을 부양하기가 힘들어졌기 때문입니다 ... 예전 같았으면 노동자 혼자서 감당했던 것을
이제는 아내와 자녀들까지 공장으로 내보내야 한다는 것인데 ... 이것에 대해 마르크스는 가족을 모두
일터에 팔았다는 의미에서 "노예상인(奴隸商人)" 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입니다.
[@ 오늘날 우리사회에 맞벌이 부부가 늘어난 현실을 생각해보면, 마르크스의 통찰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노예상인 이라는 표현이 문학적인 면에서는 참 탁월한 표현이라 생각됩니다.]

지금까지 글을 차분히 읽어보신 분들은 이제 자본론에서 얘기하는 가변자본과 불변자본, 그리고
잉여가치와 착취 등이 무엇을 뜻하는지, 또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 대충은 감을 잡았을거라 생각합니다
(@ 아직 이해하기 힘드시다면 저의 능력부족입니다. ~)

이제부터는 수식을 조금 사용해서 얘기를 진행해 보겠습니다. 수식이라도 어려운 내용은 아니고
앞에서 지금까지 얘기했던 것을 단지 기호화 한 것에 불과하니까 크게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사실 지금부터 수식을 곁들여 풀어가야할 얘기 때문에, 앞의 내용들을 설명드린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부터 풀어가는 얘기가 어렵다고 느끼신다면, 앞의 글을 처음부터 차분히 다시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빵 하나가 생산되기 위해서는 공장, 오븐, 컨베이어, 밀가루 같은 불변자본과 노동자의 노동력인
가변자본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 그리고 이제부터 불변자본은 영문자 C로 표시하겠습니다.
또한 가변자본(노동력)은 영문자 V로 표시합니다.. 마지막으로 잉여가치를 S로 표시하겠습니다.

@ 불변자본[C]
@ 가변자본[V]
@ 잉여가치[S]

[◆ C + V + S = 총가치(빵) ]

생산된 빵은 불변자본 C와 가변자본(필요노동력) V와 노동자가 잉여노동시간(오후 4시간)에 만들어낸
잉여가치 S를 모두 더한것과 같습니다. 이 공식은 마르크스 자본론에서 상당히 중요하게 강조되는 공식입니다!

다음은 잉여가치율을 구해야하는데 ... 우리가 앞서 살펴본 빵공장의 노동자는 하루 8시간의 노동력을
투입합니다. 즉 가변자본인 필요노동력(오전) 4시간과 잉여노동력(오후) 4시간을 투입하는데 ...
잉여가치율은 잉여노동시간을 필요노동시간으로 나눈 값을 말합니다. 더불어 마르크스는
잉여가치율을 "착취율" 이라고도 했는데, 노동자가 착취를 당하는 정도를 따져볼때 사용할수 있습니다.

[◆ 잉여가치율(S') = S/V ] ........ ex. [ (2시간의 잉여노동시간) / (4시간의 필요노동시간) = 50% ]

만약 빵공장 노동자의 하루 총 근로시간이 6시간 이라면,
노동자의 필요노동 시간은 4시간으로 그대로인데 반해, 잉여노동시간은 2시간이 됩니다.
이것은 노동자가 4시간만 일하면 자신이 받는 월급 100만원의 값어치는 모두 하게되는데,
추가로 2시간을 더 일하게 되는 잉여노동에 의해서... 결국 50만원의 가치를 자본가에게 갖다 바치는 것과
다를바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자본가에게 50만원을 착취 당한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 100만원에 대한 50만원은 결국 착취율 50% 와 같음!)

다음에 알아볼 것은 자본가가 빵을 생산하기 위해서 투입하는 총자본 중에서
불변자본은 과연 얼마의 비율을 차지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비율에 대해서는 영문자 큐(q)를 사용하는데
여기서 비율 큐(q)를 <"자본의 유기적 구성"> 이라고 합니다.

[◆ 자본의 유기적 구성(q) = (C/C+V) ]

그럼 자본의 유기적 구성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도 살펴봐야 합니다.
앞서 빵공장의 노동자는 빵을 포장하기 위해서는 일일이 빵상자를 들고 와서 빵을 꺼내
하나씩 포장해야 했습니다. ... 하지만, 이후에 컨베이어를 도입하고 나서는 빵상자를 운반할 필요도 없어졌고,
단지 자기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편하게 빵을 포장만하면 끝이었습니다 ... 결국 "자본의 유기적구성(q)" 은
빵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노동자가 기계나 도구 같은 불변자본을 얼마만큼 제공 받는지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불변자본은 단순한 기계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생산성">과도 관계가 깊은
기술수준과 노동자의 실질임금과도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음은 자본가에게 가장 중요한 비율인 <"이윤율">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윤율은 자본가가 투자한 총지출에서 얼만큼의 잉여가치를 얻을수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 이윤율(P) = (S/C+V) ]

빵공장 사장 김철수가 빵을 만들기 위해서 지출하는 것은, 공장과 기계 같은 불변자본(C)과
가변자본인(V) 노동자를 고용하는 것이 총지출 입니다. 이렇게 투자된 총지출은 노동자의 잉여노동에
의해서 잉여가치(S)가 만들어 지게 됩니다 ... 그런데 여기서 몇가지 짚고넘어가야할 것이 있습니다.
마르크스는 잉여가치에서 지주에게 지급되는 지대(토지사용료)는 없다고 가정하고 있습니다.
[@ 지대 부분은 자본론 3권부터 도입함]

또한 지출되는 자본, 특히 불변자본 중에는 내용연수가 모두 다릅니다 ... 예를들어, 공장은 한번 지으면
30년을 사용할수 있고(한번 지출하면 30년은 지출 없음), 오븐이나 컨베이어 같은 기계들은 10년을
사용할수 있다고 하면(한번 지출하면 10년은 지출 안해도 됨), 자본가의 실질적인 지출을 파악하기가
어려울수 있습니다 ... 또한 노동자 에게는 매달 월급을 줘야 합니다 ... 이것을 따져보는 것은
위의 공식이 바로 실제 사용되는 자본을 계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해 자본가가 처음 빵공장을
짓는다고 한다면, 첫해에는 공장건물에 투자된 돈과 기계들을 구입하는데 사용된 돈을 모두 공식의
불변자본에 포함해야 할것입니다. 하지만 공장은 한번 지으면 30년은 투자 하지 않아도 되고, 기계들은
한번 구입하면 10년을 쓸수 있기 때문에 ... 그 다음해 부터는 자본가가 투자하는 불변자본은 밀가루
같은 원재료 빼놓고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 그래서 마르크스는 이윤율 공식을 단순화하고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통상적인 기준으로 <"연간 이윤율">을 사용합니다 ... 다시말해 자본가가 투자하는 모든 자본의
회전기간을 1년으로 가정한다는 것입니다. ... 즉! ~ 1년동안에 공장과 기계와 밀가루, 노동력 등은
모두 소진되며, 생산된 빵도 1년 안에 모두 판매가 되어 ... 잉여가치를 포함한 모든 돈이 회수된다는 것입니다.

< 그럼 위 공식을 모두 모아 볼까요? >

(1) - [◆ C + V + S = 총가치(빵) ]
(2) - [◆ 잉여가치율(S') = S/V ]
(3) - [◆ 자본의 유기적 구성(q) = (C/C+V) ]
(4) - [◆ 이윤율(P) = (S/C+V) ]

지금까지 살펴본 여러 수식 입니다 ... 그리고
우리는 이제 마지막으로, 위의 여러 수식에서 매우 중요한 한 가지 공식을 도출할수 있습니다.

[◆ P = S'(1-q) ] ....... (@ 식의 도출 과정은 글 마지막에 따로 정리해 두었습니다. )


도출된 위의 식을 살펴보면 ... P가 "이윤율" 이라는 것은 이미 살펴보았고,
큐(q)는 기계(불변자본) 도입이 어느정도 인가를 따져보는 "자본의 유기적구성" 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자본의 유기적구성"은 빵공장에 기계를 얼마만큼 도입했는지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만약 잉여가치율(S') 이 고정되어 있다면, 이윤율 P와 자본의 유기적구성 큐(q)는 <역의 상관관계>가 있다는걸
공식을 통해 확인할수 있습니다.

따라서 큐(q)의 비율이 높을수록, 즉! ~ 빵공장에 기계같은 불변자본이 많이 투입되면 될 수록
빵공장 사장인 자본가(김철수)의 이윤이 줄어든다는 것입니다 ...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언급했던
그 유명한 <"이윤율 하락 경향의 법칙"> 이라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이러한 이윤율 하락 경향에 대해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적 생산이 스스로 증식되어
무한히 커져가는데 있어서 내재적(內在的)으로 어떤 장애물이 있다는 것을 증명한 것입니다 ... 결국
"자본의 유기적구성"이 높아지면, ~ 즉! 빵공장에 사람의 노동력보다 기계가 더 많이 투입될수록
노동생산성은 늘어나지만(더 많은 빵을 생산함) ...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가의 이윤율이 하락해서
자본주의가 앞으로 나아가려는 추진동력의 힘을 떨어뜨린다는 것입니다. 또한 앞에서도 이미 언급했듯이
자본가(기업)의 이윤은 노동자의 잉여노동에서 나옵니다 ... 따라서 기계의 도입이 늘어난다는건
잉여가치를 만드는 노동자의 수가 줄어드는 것이므로 자본가(기업)의 이윤은 줄어들 수 밖에 없습니다.

사회가 고도화되고 경제의 규모가 커지면서 기업들은 기계(로봇) 같은 불변자본의 도입비율을 점점 더
늘리게 됩니다 ... 자본의 유기적 구성비율이 높아진다는 것이죠! ~ 그렇다면 지금까지 살펴본
마르크스의 "이윤율 하락 경향법칙"에 따라 불변자본(기계)의 도입비율이 높아지면 정말로 기업들의
이윤율은 하락하게 되는 것일까요? ... 물론 도출된 공식에 의하면 당연히 이윤율은 하락하게 됩니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이윤율 하락 법칙을 방해하는 몇가지 요소들 때문에, "이윤율 하락 경향의 법칙"은
하나의 <"경향적 성격", 혹은 "경향성"> 으로만 남을수 도 있다고 했습니다.

쉽게말해서 기업들이 기계를 도입하면 할수록, 공식에 의해 이윤율이 하락해야 하는데,
이러한 법칙이 성립되지 않게 방해하는(상쇄시키는) 요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기계를 많이 도입해도
기업들의 이윤율은 계속 증가할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 그래서 이윤율 하락을 상쇄시키는 그 몇가지 요소들을
살펴보는 것으로 마무리를 해야겠습니다.

[◆ 상쇄요소(1) - 불변자본 요소의 저렴화 ]

예를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
빵공장에서 시가 100만원짜리 컨베이어 1대를 도입해 빵을 생산하려 합니다 ... 컨베이어가 도입되면
공장 노동자 일부는 컨베이어에 배치되고 나머지 노동자는 옛날방식 그대로 빵상자를 직접 운반하고
일일이 빵을 꺼내 빵을 포장해야 합니다 ... 드디어 컨베이어를 도입해서 빵을 생산해 보니 ...
옛날방식과 컨베이어 방식이 혼합되어 총 100개의 빵이 생산되었습니다.(컨베이어가 도입되기 전에는
빵생산이 50개 였습니다) ... 더불어 빵의 개당 판매가격이 1만원 이라면, 생산된 100 개의 빵을 모두
팔아 컨베이어 가격을 모두 회수할수 있습니다 ... 이후에 빵공장 사장 김철수는 컨베이어를 도입해서
빵생산이 월등히 많아진다는 것을 눈으로 직접 확인했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2번째 컨베이어를 도입하기로
하면서 공장 노동자 몇 명을 해고했습니다 ... 그리고 컨베이어 2대를 가동시켜 빵을 생산해보니,
총 250개의 빵이 생산되었습니다. 옛날방식의 빵 생산이 점차 컨베이어로 이동하면서
컨베이어가 1대 일때보다, 2대 일때의 생산량이 더 많이 증가한 것입니다. 또한 250개의 빵을 모두 판매하면
2대의 컨베이어 도입가격을(200만원) 모두 회수하고도 50만원이 남습니다. ... 이것은 컨베이어 2대를
150만원에(대당 75만원) 구입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 2대를 구입하려면 200만원이 필요함, 그런데 2대를 구입하고 50만원이 남았으므로)

컨베이어가 1대 일때는 대당 구입가격이 100만원 이었지만, 컨베이어 도입대수가 늘어날수록
대당 구입가격은 줄어들고 있습니다 ..... 이렇게 컨베이어 같은 불변자본의 양이 1대, 2대, 3대 ... 처럼 계속 증가한다면,
노동의 생산성(빵 생산량)이 증가하는 동시에 불변자본의 단위당 가치(컨베이어 대당 구입가격)는 떨어집니다.
이렇게 기계(불변자본)의 도입이 증가하면 불변자본의 가치(컨베이어 대당 구입가격)가 떨어지므로
자본가의 이윤율 하락을 어느정도는 상쇄시킬수 있다는 것입니다. (@ 불변자본 요소의 저렴화)

[◆ 상쇄요소(2) - 착취강도의 상승 ]

우리는 앞에서 빵공장 노동자의 필요노동 시간이 4시간(오전근무) 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나머지 4시간(오후근무)은 노동자가 자본가를 위해 일하는 잉여노동시간 이라는 것도 살펴보았습니다.
더불어 노동자는 하루 4시간(오전근무)만 일해도 자신이 받는 월급 100만원 가치를 충분히 창출한다고 알고있습니다.

앞에서 마르크스의 "이윤율 하락 경향의 법칙"의 공식을 설명할 때,
잉여가치율(S') 은 고정시켜 놓고 얘기를 진행했습니다 ... 하지만 잉여가치율(S')이 변할수 있다면 ...
공식 [P = S'(1 - q)] 에서 잉여가치율(s')을 증가시키면 ... 자본의 유기적구성(q) 비율이
높아진다고 해도(기계의 도입이 많아진다고 해도) 이윤율 하락 경향을 상쇄 시킬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자본가가 잉여가치율(S')을 상승시키는 방법에는 <"착취강도">를 높이는 방법이 있다고 했습니다.

예를들면 ... 빵공장 노동자는 자본가와 하루 8시간을 일하기로 계약했습니다. 만약 이때에
자본가가 노동시간을 추가로 2시간 더 늘이게 된다면, 노동자의 필요노동 시간인 4시간(오전근무)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늘어난 잉여노동 2시간은 모두 자본가에게 귀속됩니다 ... 따라서
자본가의 잉여가치율(S')은 상승하게 됩니다. (@ 노동시간 증가!)

또 다른 예는 .... 전체 노동시간 8시간은 변함이 없는 상태에서,
노동자의 필요노동 시간인 4시간(오전근무)을 압축시켜서 <"필요노동시간을 2시간">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줄어든 필요노동 2시간은 잉여노동 시간으로 흡수되어, 총 잉여노동시간은 6시간으로 늘어나게 되고
잉여가치율이 상승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노동자는 예전같으면 4시간에 해야할 일을 2시간에 끝내야 하므로,
'노동의 강도'는 상당히 높아질 것이 분명합니다 ... (@ 노동강도 증가! )
컨베이어 속도가 빨라지고, 화장실도 30분간격에서 1시간 간격으로 바뀌겠지요 ... 결국 이와같은
자본가의 착취강도 상승은, 잉여가치율 상승을 이끌면서 "이윤율 하락 경향"을 상쇄시킨다는 것입니다.

[◆ 상쇄요소(3) - 상대적 과잉인구 ]

자본의 유기적 구성비율이 높아지면, 즉! ~ 자본가(기업)가 기계를 더 많이 사용하면 할수록
직장에서 해고되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됩니다 ~ 실업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마르크스는 실업의 존재가 자본의 유기적구성이 상대적으로 낮은 산업이 수립되는데
도움을 된다고 합니다 ... 다시말해, 기계가 많이 필요하지 않는 산업에 도움이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처음에 열심히 살펴보았던 "잉여가치"에 대해서 가만히 생각해 보면,
자본가(기업)에게 이윤을 가져다 주는것은 결국 노동자의 "노동력"입니다 ... 다시말해 노동력은
"잉여가치"를 창출하는 유일한 가치창출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계보다는
사람(노동자)이 많이 필요한 산업에서는 많은 이윤(잉여가치)이 창출될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창출된 이윤이
자본의 유기적 구성비율이 높은, 즉! ~ 기계를 많이 사용하는 기업들(산업)의 이윤과 합해져서
최종적으로 평균을 내보면 산업 전체적인 이윤율이 상승한다는 것입니다 ... 그러나 여기에는 실업의 과잉으로 인한
현업 노동자와의 임금경쟁으로 임금인상률이 자연스럽게 억제되는 효과 때문에 자본가(기업)의 잉여가치율이
상승하는 영향도 있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나오는 "이윤율 하락 경향의 법칙" 에 대해서
주제넘지만 조심스럽게 한번 살펴보았습니다. ... 최대한 쉽게 설명하려고 했는데,
이해하시기 어려웠다면 모두 저의 능력부족입니다. ... 그렇더라도 차분히 두세번 읽어보신다면
나름의 의미를 충분히 찾을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미국에서 주주혁명이 시작되던 1980년대, 수많은 제조업이 쇠락하면서 대략 3백만개의 (제조업)일자리가 사라졌습니다.
더불어 1990년대 후반부터 2008년 세계금융위기(서브프라임사태) 기간동안은 일자리가 줄어드는 속도가 더 빨라져
(미국에서만)5백만개의 일자리가 사라졌습니다. 이렇게 미국에서 제조업이 무너지는 동안 미국시민들이 소비할 공산품은
모두 월마트가 도맡았다고 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월마트 진열대의 상품들은 모두 중국을 비롯한 개도국 국가들의 상품들로
채워졌습니다. .... 결론적으로 미국에서 주주같은 자본가 계급의 이익을 중시하는 분위기가 확산되는 동안
(미국)노동자들의 임금은 거의 정체되었다고 할수 있습니다. ... 이것은 1980년대 초반 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거의 20여년동안 월마트의 주가가 대략적으로 50,000%(500배) 오른것이 잘 증명해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중 하나가 바로 월마트의 저렴한 공산품 가격이 바로 노동자의 "노동력 재생산 비용"을
낮게 책정해주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일본과 한국에는 다이소(DAISO)가 있습니다.
언제라도 노동자의 <"노동력 재생산 비용">을 낮게 유지시켜줄 무언가가 등장한다면
노동자들의 임금은 하락하거나 최소 정체된 수준에서 더이상 앞으로 나아가기가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이것은 마르크스의 견해에 따른 추론입니다. 하지만, 미국 월마트가 보여준 실증사례를 보면
100년도 넘은 마르크스의 통찰을 그냥 지나치기가 두렵기까지 합니다.

이제는 진정으로 로봇혁명을 체감하는 시대가 된 것 같습니다.
과연 마르크스가 주장한 <"자본의 유기적 구성(기계, 로봇 도입)">의 증가가
오늘날 최첨단 로봇혁명의 시대에는 정말로 자본가의 이윤율을 하락시키게 될 것인지
저 또한 미래가 많이 궁금합니다. ... 마르크스의 생각처럼 이윤율 하락을 상쇄시키는 요소가
지금의 다품종 소량생산이 주를 이루는 로봇혁명의 시대에는 어쩌면 쉽게 적용되기가 어렵지 않을까도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 한마디로 마르크스가 예견했던 자본주의의 내재적 불안 요인이
어쩌면 지금의 (첨단)로봇혁명으로부터 출발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 아주 조심스럽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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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윤율 하락 경향 공식 도출 >>

P = S/C+V = SV/V(C+V) = SC+SV-SC/V(C+V) = S(C+V)-SC/V(C+V)
= [S(C+V)/V(C+V)] - [SC/V(C+V)] = S/V - [(S/V) × C/(C+V)] = [◆ P = S'(1-q) ]




[@ '계획'이라는것이 기지개펴듯 쉽게 된다면 정말 좋을텐데 ~
얼마전 얘기했던 채권지표 이야기는 며칠 더 미뤄야 할 것 같습니다.
기초적인 내용부터 실전에서 활용할수 있는 부분까지 ... 단계적으로 매끄럽게
이야기를 이어가려다 내용이 많아졌습니다. 더불어 어려운 내용을 최대한
쉽게 풀어보기 위해 많은 고민을 하고 있는데 ~ 아무튼 잘 마무리 될 듯 싶습니다.
편안한 주말 되십시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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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지차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좋은 글에는 질문이 따라오는 법이라 제 궁금점들을 남깁니다.

- 이윤율에 대한 공식에서 (P = S'(1-q)) q가 증가할때 S' 가 함께 증가하는 경우에 대한 질문입니다. C가 증가하여 (기계가 도입되면) 노동강도가 감소하고 재충전 비용이 감소하는 경우 (V가 감소)가 있습니다. 예를들면, 좀 더 쉬운 일을 하면서 조금 부족한 생활을 하는 노동자의 증가. (본문에 '착취강도의 상승'에서 설명하시지 않을까 기대했습니다).
- 로봇을 도입하면서 노동시간과 V을 함께 감소시키면 이윤율을 유지할 수 있지 않을까. 이는 물론 노동재생산 비용을 함께 감소시켜야 가능하겠지요. 노동자 임급 정체가 노동재생산비용이 감소해왔다는 (인플레이션 대비) 증거로 받아들여지는가.
- 노동재생산 비용 감소에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어떠한 역할을 하는가.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노동재생산 비용을 줄여주는 역할을 하는가. 데이트를 하고 가족을 꾸리는 대신 독신으로 지내면서 취미생활에 만족하는 삶을 사람이 증가하는 경향이 노동재생산 비용 감소 압력에 결과 중 하나인가. 노동재생산 비용 감소 압력은 인구 증가율감소에 영향을 미치는가.
- 이윤율하락이 자본주의의 내재적 장애물인가? 만약 이윤율이 모든 시장에서 전체적으로 하락한다면 자본가는 여전히 상대적으로 이윤율이 높은 사업에 투자하며 자본주의를 증식시킬 수 있지 않은가. 이윤율이 P > 0 로 수렴하는 것으로 자본주의는 계속 증식할 수 있는 것은 아닌가. 기술혁신이 가끔 P를 수직상승시키면 자본주의는 사이클을 유지하며 (수직상승 -> 완만한 감소) 영속할 수 있지 않은가.
- 인간의 생존에 대한 집착과 자본주의 시스템의 착취(이윤)가 균형을 이루며 발전해 온 것처럼 보이는데, 과연 자본주의의 착취가 인간의 생존에 대한 집착을 이겨내고 마르크스가 주장한 자본주의 종말이 올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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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파스
 
도라지차//


정성을 쏟은 질문글 주셔서 고맙습니다. ~ 부족하지만 최대한 짧게 답을 올려보겠습니다.

<이윤율 하락경향>은 이미 본문에서 밝혔듯이 마르크스조차도 이윤율 하락 법칙을 방해하는
몇가지 요소들 때문에 하나의 <"경향적 성격", 혹은 "경향성"> 으로만 남을수 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의 개인적 생각으로는 '이윤율 하락법칙을 방해하는 요소' 라는 표현 대신에
현대 자본주의는 <이윤율 하락 법칙을 흡수하고 통일하여 새로운 이윤율을 생성하는 체제!>라고
다시 재정의 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 이에대해서는 잠시뒤 자세히 설명해 보겠습니다.

아무튼 ~ 마르크스 이후, 인류가 의지해온 자본주의 체제의 궤적을 살펴보면
현대 자본주의 체제는 아예 다른 대안이 필요없을 정도로 상당히 효율적이며, 정교하고,
또 거대한(국제화, 세계화) 하나의 유기체로서 ... 현재도 지속적인 증식의 과정을 거치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도라지차님의 마지막 질문인 '자본주의 종말은 올 것인가?'에 대한 저의 견해는
상당시간은 "절대 아님!"으로 우선 답을 하려합니다.

더불어 나머지 질문과 담론에 대한 답변은 <새로운 노동>이라는 하나의 주제로 대신할까 합니다.
현대 자본주의 체제는 지금 대단히 중요한 변곡점, 즉 로봇, 빅데이터, 네트워크 등으로 정의되는
제 4차산업혁명과 맞물려 있습니다. ... 마르크스가 생존했던 시대와는 전혀다른 시대(생산체제)에
인류는 희망과 불안을 동시에 품고 있다는 것이지요 ~ 그래서 현재시점에서 미래 노동사회의 변화상에 대해
몇가지 자료를 가지고 저의 주관적 견해를 얘기해 볼 것입니다. ... 물론 이런 저의 견해는
'마르크스의 부정'이 아니며, 과거가 된 마르크스를 재흡수하고 통일하여 새롭게 생성된 향후 인류의
<미래노동>을 말해보고자 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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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의 예전글을 참고했습다.)

접속의 시대입니다! ~ 인류가 쏟아내는 무한대의 데이터 홍수 속에서
빅데이터(Bigdata) 열풍을 만들어낸 기업 중 가장 대표적인 기업이 바로 구글(Google)입니다.

[◆ 매주 전 세계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건강 정보를 온라인으로 검색하는데,
특히 독감이 유행하는 계절에는 독감 관련 검색어가 많아진다. 구글은 독감과 관련된 주제를 검색하는
사람의 수와 실제로 독감 증상이 있는 사람 수 간에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발견했다. 물론 독감에 대해
검색하는 사람이 전부 아픈 것은 아니지만, 독감 관련 검색어를 모두 합산해보면 일정한 패턴이 나타난다.
(중략) ~ 구글의 독감 관련 검색어로 예상한 수치와 기존의 독감 유행 수준 지표가 매우 근접하게 일치했다.
이러한 예측을 가능하게 하는 모델은 바로 ‘구글 상관관계’ 소프트웨어가 독감을 예측할 수 있는
검색어(변수)들을 발견해 만들어 진다. 구글은 정부기관 통계 등 공식 데이터에서 독감 환자들이
병원을 방문한 빈도를 기록한 자료와, 동일한 시기에 사람들이 구글로 찾아보는 검색어들 사이의
상관관계를 밝혀냈다. 이렇게 발견한 검색어 중 관련도가 높은 상위 5개는 ~
인플루엔자 합병증(influenza complication), 감기/독감 치료제(Cold/Flu Remedy),
일반적인 인플루엔자 증상(General influenza Symptoms), 인플루엔자 기간(Term for influenza),
특정 인플루엔자증상(Specific influenza Symptom)이다. ... 바로 이와 같은 변수들이 검색어로 등장하는
비율이 높아진다면 실제 독감이 유행할 확률도 커진다는 것이 구글의 예측모델이 말하는 내용이다.
(@ 빅데이터, 경영을 바꾸다(153~154쪽)/ 함유근, 채승병/ 삼성경제연구소 ]

독감이 걱정된 사람들이 인터넷에 접속해 독감 치료제와 예방법, 감기증상 등 독감관련 검색행위를 하게 되면,
이제 그들의 정보욕구는 하나, 둘 쌓이면서 빅데이터(Bigdata) 라는 엄청난 가치로 변환됩니다.

더불어 이러한 정보 관계망 속에서는 독감에 대한 정보수요와 독감을 경험한 자들의 정보공급 등
자발적 피드백이 수없이 일어나면서 <새로운 생산관계>를 만들어 냅니다 ... 이제 정부와 제약기업들은
독감이 유행할 시기와 백신의 수요를 정확히 예측해 생산효율을 종전보다 더 높일 수 있게 되며,
무엇보다 사람들의 이러한 검색행위(정보욕구)는 정보를 소비함과 동시에, 가치 생산에 본인도 모르게
관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이렇게 새롭게 관계되어지는 사람들의 활동(노동) 자체를 <'엑스(X) 노동'> 이라고
정의내리고 싶습니다. 또한 이러한 정보관계에 의한 암묵적 생산네트워크는 자본가들이 ‘접속효과’를 매우 활발히
활용하면서 <'모럴(moral)이 제거된 착취'> 가 가능해졌다고 생각됩니다 ... 누군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우리는 열심히 인터넷뱅킹과 ATM기기의 현금인출방법 및 계좌이체 방법을 배우고 은행원의 도움 없이
기본적 은행 업무를 수행합니다.

또한 금융회사의 설문란에 자신의 개인정보와 몇 개의 질문에 마우스 클릭 몇 번으로 답을 하면
상품권을 비롯한 여러 혜택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금융)시장에는 이처럼 설문에 응한 사람들 덕분에
최신의 보험 상품과 각종 펀드상품이 쏟아져 출시됩니다. 여기서 금융회사는 설문에 소요됐던 비용(상품권)보다
훨씬 더 큰 가치를 얻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자본가는 은행원을 고용하지 않고서도, 마케팅 직원들이 없어도
지속적인 가치증식이 가능해진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 것입니다.

이것은 과거처럼 노동자를 통한 직접적 착취가 아닌, <‘노동자 없는 노동 착취’> 라는
<새로운 형태의 자본축적 방식>인 것입니다.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노동자의 자리는 그 사회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이
대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21세기의 생산과 착취는 사회화’>되었다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 구글의 수석경제학자 핼 배리언(Hal Varian)은
구글 검색을 통해 절약되는 시간을 살펴보았다. 그의 연구진은
“쿠키를 만들 때, 버터나 마가린을 넣으면 쿠키의 크기가 얼마나 달라질까?” 등
구글에 하는 질문들을 무작위로 표본 조사했다. 그런 뒤 구글을 사용하지
않고서(이를테면, 도서관에서 답을 찾는 식으로) 질문에 답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구글 없이 질문에 답하는 데에는 평균 약 22분이 걸린(도서관까지 가는 시간 빼고!) 반면,
같은 답을 구글에서 얻는 데에는 7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구글은 질문 하나당 평균 15분을
절약해주었다. 평균적인 미국인이 미국인의 평균시급[22달러($)]을 써서 하는 모든 질문에
그 시간 차이를 곱하면, 성인 노동자 1인당 연간 약 500달러($)가 된다. ~ (중략) ~ 사람들이
페이스북 같은 소셜미디어 사이트에 사진을 올리고, 태그를 붙이고, 댓글을 달면서 보내는
수십억 시간이 그들의 친구, 가족, 심지어 낯선 이들에게 유용한 가치를 생산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 시간은 보상을 받는 것이 아니므로, 이 ‘일’ 을 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자신의 시간을 그 다음으로 가장 잘 활용하는 것보다 내적으로 큰 보상을 준다고 여기는 듯하다.
이 노력이 어느 정도의 규모로 이루어지는지 감을 잡기 위해, 2013년 인터넷 이용자들이
페이스북에서만 하루에 총 약 2억 시간을 소비했으며, 그 시간의 대부분을 다른 이용자들이 소비할
콘텐츠를 만드는데 썼다는 점을 생각해보라. 이는 파나마 운하를 건설하는데 든 인시(Person Hour)보다
열 배나 더 많은 시간이다. @ 제2의 기계시대(151~152쪽)/ 에릭 브린욜프슨(Erik Brynjolfsson)/ 청림출판 ]

앞서 저는 <‘21세기의 생산과 착취는 사회화’>되었다고 얘기했습니다.
‘제2의 기계시대’ 저자 에릭 브린욜프슨(MIT 슬론경영대학원 교수)은 사람들이 구글과 페이스북 같은
<정보와 관계(접속)>에서 보내는 시간의 대부분을 다른 이용자들이 소비할 콘텐츠를 만드는데
사용한다고 말합니다 ... 이것은 결국 정보 사용자들의 <엑스(X) 노동>이 기업이 할 일을 대신해주고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 이제는 고객이 웹상에서 직접 주문, 결제하고 배송정보를 입력해 기업이 하던 일을 떠맡으면서
생산성이 크게 향상되었다. 빅데이터 시대에는 컴퓨터나 기계가 사람을 대신하는 차원을 넘어
재고와 상품이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를 센서 기술로 파악하는 일이
보편화되고 있다. 심지어 고객 행동이나 수요의 변화와 같이 예전에는 파악하기 어려웠던
변화에 대해서도 센서 기술로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하여 고객이 원치 않는 상품이나 일을
없애거나 피하는 방법으로 비용을 절감한다. 즉 센서로 파악한 데이터를 통해 불필요한 작업과
프로세스를 제거하거나 최적화하는 방향으로 생산성 향상이 이루어지고 있다.

월마트의 뒤를 쫓으며 1,000개가 넘는 매장을 운영하는 미국의 2위 기업이 바로 타깃(Target)이다.
어느 날 미네소타에 위치한 타깃 매장에 한 남자가 매우 화가 난 채로 들어섰다.
"여기 책임자 누구야? 책임자 나오라고 해!" ~ 직원들이 그를 달래는 사이 점장이 달려왔다.
남자는 점장에게 광고 메일을 인쇄한 종이를 들이밀며 따져 물었다.

"우리 딸이 당신네들에게 이런 메일을 받았다고! 그 아이는 이제 겨우 고등학생이야,
그런데 어떻게 아기 옷이랑 아기침대 할인쿠폰 같은 걸 보낼 수가 있냐 말이야!
지금 우리 아이더러 임신하라는 거야 뭐야?" ~ 점장은 마케팅 부서의 실수 같다며, 죄송하다고
사과하고 남자를 간신히 돌려보냈다. ~ (중략) ~ "그 일이 있고 나서 딸아이랑 이야기를 나눴지요.
아 그런데 우리 애가 일을 저질렀지 뭡니까. 전 그런 줄도 모르고 ... 실은 8월이 출산 예정이랍니다.
점장님께는 죄송합니다." ... 가족조차 모르는 임신 사실을 타깃은 어떻게 알았을까? ~ (중략) ~

타깃은 수많은 고객들의 구매이력에 관한 빅데이터를 분석해 임산부들이 보이는 특이 패턴을
찾아내는 예측 모형을 가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건은 예측 모형에 의해 빚어진 실제 사례이다.
[@ 빅데이터, 경영을 바꾸다(105쪽, 278, 279쪽)/ 함유근, 채승병/ 삼성경제연구소 ]

정보 사용자의 호기심과 정보욕구에 의한 관계망(인터넷) 접속은
이제 기업들에게(자본가) "어떤 상품이 잘 팔릴 것인가?"... 라는 고민보다는
"이런 상품이 팔리게 될 것이다!" ... 라는 예지적 풍요를 선물하게 될 것입니다.

마르크스는 자본가의 이윤이 노동자의 착취로부터 발생한다고 주장했지만,
21세기 엑스(X) 노동 시대에서는 착취의 대상이 노동자가 아닌, 바로 <"정보와 관계(접속)">이라는
전무후무한 <디지털 추상성>에서 발생하게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 따라서 생산성은 증가하면서도
실질임금은 점점 더 줄어드는 구조가 고착화 될 것이며, 한마디로 우리는 지금 ... <노동의 새로운 기준>이
재정립되는 시대의 한 복판에 서있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 답글에 만족하실지 모르겠지만 ~ 저의 답은 여기까지 입니다.
더불어 답 글에서 언급한 "엑스(X)노동" 이라는 용어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제가 개인적으로 만들어낸 조어입니다. 그러니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편하게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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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지차  
 
정성들인 답변 감사합니다.
"현대자본주의는 <이윤율 하락 법칙을 흡수하고 통일하여 새로운 이윤율을 생성하는 체제!>" 가 제 질문에 답을 했습니다. 경제체제에 대한 잘 알지 못하는 저도 쉽게 공감할 수 있는 통찰력있는 설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마르크스가 현대 자본주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본다면 어떤 생각을 할지 궁금하네요)

"엑스(X) 노동"과 구글에 관한 예 들도 공감합니다. 그리고 과연 엑스 노동으로 창출되는 잉여가치가 노동자들에게 합당하게 분배되어지고 있는가라는 의문이 생기네요. 실리콘벨리 상황을 보면 "엑스 노동"을 통해 가치를 창출하는 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상대적으로 좋은 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일반인들은 점점 "엑스 노동"을 강요받고 있지 않은가 라는 생각을 합니다. 말씀하신대로 "엑스 노동"이 근본적으로 '인간의 사회성'을 '착취'하는 것이라는 설명에 공감합니다.

"따라서 생산성은 증가하면서도
실질임금은 점점 더 줄어드는 구조가 고착화 될 것이며, 한마디로 우리는 지금 ... <노동의 새로운 기준>이
재정립되는 시대의 한 복판에 서있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
-> '실질임금'에 대한 정의를 찾아보았는데, '실질임금'이 줄어들어들다는 것이 노동자들이 느끼는 '만족'과 어떻게 관련될까라는 생각이 드네요. 결국에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삶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가? 행복하다고 느끼는가?가 현대자본주의를 평가하는 중요한 지표인거 같습니다.
문제는 현대자본주의는 이미 인간의 '행복'이라는 감정도 '착취'의 대상을 여기고 있고 노동자들은 더 많은 '착취'를 당함해도 불구하고 예전보다 '행복'하다고 '느끼게' 되는 시대라는 생각이 듭니다. (매트릭스는 역시 명작이었습니다.)
 
 

2019년 5월 25일 토요일

◆ 누런 황(?)소에 대한 슬픈 단상(斷想) [by. 물파스]

[◆ 누런 황(?)소에 대한 슬픈 단상(斷想) ]


국어사전에서 ‘황소’를 찾아보면 <몸집이 큰 수소>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오랫동안 한자 문화권에서 살아온 탓에 우리는, 아니 저는 지금까지 ‘황소’를 말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지레짐작으로 누런색의 큰 소를 떠올리곤 했습니다. ... 황소의 ‘황’을 한자 ‘황(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사전적 의미에서 보셨다시피 황소는 ‘누렇다’는 뜻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크다>라는 뜻을 가진 순우리말 이라고 합니다.

‘하다’는 크다는 뜻의 우리 옛말인데 ... ‘하다’의 어간인 ‘하’에 형용사를 만드는 어미 ‘ㄴ’을
붙인 뒤 명사와 결합해 새로운 단어를 만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 예를 들어, 크게 내쉬는 숨을
뜻하는 ‘한숨’과 자동차나 사람이 많이 다니는 큰 길을 뜻하는 ‘한길’, 장마나 큰 비를 뜻하는
‘한비’, 큰물을 뜻하는 ‘한물’, 그리고 대전(大田)의 옛 이름인 ‘한밭’ 등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여기에 그동안 우리가 한자어로 알고 있던 <한강(漢江)> 또한 원래는 ‘큰 강’이라는 뜻 이었는데
한글이 만들어지기 전에 한자 소리를 빌려와 크다는 의미의 ‘한’을 대신 표기한 것입니다.

<황소>는 크다는 의미의 순우리말인 ‘한’이 변한 것입니다. ... 우리는 간혹 ‘역할’을 ‘역활’로
소리 내어 읽는 경우가 많은데, 마찬가지로 ‘한’이 ‘황’으로 소리가 바뀐 원리라고 합니다. ... 이는
우리의 문헌기록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싸호 한쇼를 두소 자바시며(方鬪巨牛)>라는
‘용비어천가’ 대목에서는 큰 소를 뜻하는 한자 ‘거우(巨牛)’에 우리말 한쇼가 대응합니다.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에도 <한쇼>가 나옵니다. ... 이렇듯 우리의 ‘황소’라는
이름은 “한쇼>항쇼>황소” 라는 변천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니 나는 지금까지 황소를 왜 <누런 소>라고 알고 있었을까?
세계 여러 나라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소들이 사육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가축 소 대부분은
<오록스(Aurochs)> 라는 하나의 종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유라시아 전역과 아프리카 북부에
넓게 분포되어 살던 오록스는 선사시대 동굴벽화에도 자주 등장할 만큼 중요한 수렵 대상이었지만
1627년 폴란드에서 마지막으로 잡힌 것을 끝으로 야생에서 완전히 멸종됐다고 합니다. ... 그런데
오록스의 후예들이 자신의 조상을 멸종시킨 인간의 손에서 다시 살아남아 지구위에서 번성하고
있다는 사실이 참 씁쓸한 모순입니다.

우리의 한우는 오록스(Aurochs)의 피를 물려받은 후예입니다. ... 오랜 시간동안 우리 조상들의
손에서 길러지며 한우 고유의 특성을 지니게 되었고, 더불어 우리 전통 한우는 원래 검은색부터
누런색까지 색도 다양했으며 여기에 무늬도 다양한 소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칡소>라고 불리는
소는 온몸에 마치 칡덩굴 같은 짙은 줄무늬가 얼기설기 감겨있는 것 같아 이름 붙여진 소입니다.

이렇게 다양한 색과 무늬를 자랑하던 우리의 전통 한우는 1920년대 말부터 일본이 본격적으로
우리소를 누런색으로 통일하려는 계획을 세우면서 누런 소를 제외한, 다양한 색과 무늬의 소들이
대부분 사라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 이후 1969년 한우의 품질을 일정하게 유지해 <상품가치>를
높이려는 정부의 한우개량사업이 펼쳐지면서 우리의 전통한우는 <누런 소> 하나로 굳어지게
된 것입니다. ... 1927년 정지용의 시 <향수>에는 “얼룩백이 황소” 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황소가
누런 소라면 ‘얼룩백이’라는 표현은 영 어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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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축장서 소가 정육업자 등 공격…1명 사망·1명 부상(종합) - 연합뉴스 (2018-03-27)
h ttp://news.nate.com/view/20180327n09858

(서산=연합뉴스) 김소연 기자 = 27일 오전 4시 54분께 충남 서산시 팔봉면 한 도축장에서
소 한 마리가 A(77) 씨와 B(67) 씨를 들이받고 달아났다. 이 사고로 A씨가 숨지고 B씨가 다쳤다.
당시 정육업자인 A씨가 소를 도축장에 옮기는 과정에서 소가 갑자기 이들을 공격한 것으로 전해졌다.
~~~

소는 인간을 위해 턱밑에 워낭을 달고 평생 노동만 합니다.
노동이 힘든 어떤 소는 평생 젖을 짜도록 강요당하기도 하지요
시비(是非)는 옳고 그름을 말하는데 인간의 시비를 가리기위해
또 어떤 소는 싸움판에 뛰어들어 날카롭게 간 뿔을 동료에게 들이댑니다.

젖이 마르고 노동이 끝나고, 뿔마저 ... 썩은 나무 동강처럼 무뎌져서
소용이 다할 무렵이면 소는 머리부터 꼬리, 간, 창자까지 자신의 전부를
인간에게 내어줍니다. ... 이때다 싶어 인간들은 안심살, 마구리, 홍두깨,
제비추리 등 ... 소의 몸을 총 40여개로 분할하여 멋들어진 이름을 붙여줍니다.
사태가 여기까지 왔다면 한번쯤은 비명을 지르고 울분도 토할만한데
소에게는 그 비명과 울분조차 ‘우설(牛舌)’ 이라는 미식(美食)을 논하는
대상으로 치환되어 소리 없이 사라집니다.

푸근했던 ‘누렁이’라는 하나의 주체는 이제 40여개의 세련된 이름으로
분류되면서 객관화된 상품으로 격상됩니다. 사르트르는 인간에게 있어서만은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고 말했지만 ~ 이 심오한 철학을 소에게 대입하면
실존과 본질의 관계는 전복됩니다.

소의 본질은 인간을 위해 소멸되는 것입니다.
소의 실존은 소멸이 목적이기 때문에
소는 “본질이 실존에 앞섭니다.”



[@ 5월이 가기전에 채권(채권지표)에 관련된 긴 글 하나를 올려 볼 생각입니다.
기초적인 내용부터 실전에서 활용할 수 있는 지표해석에 관한 내용이 주가 될 것 같습니다.
꽤 긴 글이 될텐데 ~ 미리 양해를 부탁드리며, 오늘은 짧은 감상 글 하나로 인사를 드립니다.]

2019년 4월 4일 목요일

◆ 등본 ‘낯설게 하기’로 바라보다 - 우리동네 주민센터 방문기 [by 물파스]

[◆ 등본 ‘낯설게 하기’로 바라보다 - 우리동네 주민센터 방문기]


등본이 필요해 집에서 20분 거리에 있는 우리 동네 주민 센터를 방문했습니다.
인터넷으로도 발급이 가능하다고 하던데, 집에서 멀지 않으니 그냥 직접 방문해보기로 합니다.

< 우. 리. 동. 네. 주. 민. 센. 터 >

주민 센터는 건물 2층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반드시 1층을 지나쳐야 했습니다.
“꺄르르 ~깔! 깔!” ... 1층에 자리한 구립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형형색색의 놀이동산
풍선처럼 너무나 다채롭게 흘러나와 고막이 마치 단맛을 느낀 듯합니다. ... 그렇게 귀에서 단맛이
느껴질 때쯤 시선은 건물 오른편 귀퉁이로 향했는데, 그곳에 폐형광등 수거함이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또 건물 왼편으로는 '유용미생물(EM) 배양액'을 약숫물처럼 무료로 받아갈 수 있는 거대한
탱크(공급기)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유용미생물(EM) 배양액은 물에 희석해 사용하면 친환경
주방세제로 쓸 수도 있고, 악취 및 곰팡이 제거에도 꽤나 쓰임이 좋다고 합니다.

건물 입구 앞 알림판에는 통장 모집공고와 함께 동네소식을 알리는 몇 가지 공고사항이 적혀 있었고,
그 옆으로 나란히 대형마트 전단지처럼 생긴 윤기 나는 컬러풀한 종이에는 얼굴과 죄명, 신체특징, 주소,
나이 등이 상세하게 적혀있는 지명수배자 명단이 게시되어 있었습니다. 참고로 수배자의 70% 정도는
모두 사기범죄자였습니다.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가다 층계참 대형거울 앞에 서서 얼굴근육을 격하게 풀어봅니다.
거울 속 나는 여전히 청춘이지만 그 청춘이 바라보는 거울 밖의 나는 오늘따라 왠지 더 쓸쓸하고
늙어 보입니다. ... 나이를 먹는다는 것, 아니 좀 더 잔인하게 <“누가 늙은 사람인가?”> 라고 물어본다면
모두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명쾌한 답이 있을 수 있을까? ~ 노년 및 노인의 복지정책을 연구하는
팻 테인 교수(Pat Thane. 런던대학 킹스 칼리지. 역사학)는 이렇게 답합니다.

<‘늙었다’는 소리를 들어도 항의하지 않는 사람>

아무리 현대의학이 발전했다고 해도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노년의 신체적 특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 남자는 머리카락이 빠지고 여자는 젊을 때보다 얼굴에 털이 더 많이 자라나는 경향이
나타납니다. 청력은 쇠퇴하기 시작하고 칼슘 부족으로 시력이 저하됩니다. 또한 몸은 나빠진 시력을 위해
부족해진 칼슘을 다시 눈에 축적하게 만드는데, 이 때문에 신체 다른 부분에서 칼슘부족으로 뼈가
물러지고 자주 부러지는 일들이 발생합니다. 피부는 건조해지고 탄력이 줄어들어 주름이 늘어나고
살은 힘없이 처지게 됩니다. 코는 커지고 입은 쪼그라듭니다. ... 그리고 이러한 노화의 과정은 전반적으로
노인의 신체를 젊었을 때보다 약간은 줄어들게 만듭니다.[@참고: 노년의 역사/ 팻 테인/ 글 항아리 출판]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 역시 “늙었다“라는 소리에 적극적으로 항의하지 않는 날이 찾아올 것이며,
그때쯤이면 주민 센터 알림판의 수배자 전단지 크기도 현재보다는 조금은 더 작아지게 될 것입니다. 물론
내가 ‘늙음’에 대해 항의하지 않는 순간까지 그들이 검거되지 않는다면 말이죠.

거울 앞에서 잠시 사색에 잠겼다가 밑에서 들려오는 한 무리의 걸음 소리에 다시 2층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약간의 온기와 함께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이곳저곳을 서성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의도하지 않았지만, 나 또한 (고개를 약간 치켜든 상태에서)주민들과 섞여
주민 센터 이곳저곳을 서성거립니다.

책장에 꽂혀있는 몇 권의 책들을 훑어보다가 책장 옆으로 공구 대여함이 보입니다.
살면서 일 년에 꼭 한두 번은 특수공구가 필요할 때가 생기는데 ... 해머드릴, 목재용 전기톱, 렌치세트 등
년에 한두 번 사용하려고 구매하기에는 조금은 부담스러운 가격의 특수공구들을 주민들을 위해 센터에서
무료로 대여해 준다고 합니다(3일)

공구 대여함 뒤쪽으로 돌아 나오니 자동혈압측정기가 보입니다. 본인의 혈압을 측정하던 할아버지를
구경하던(혹은 다음 순서를 기다리던) 몇몇의 어르신들을 구경합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자동혈압측정기
옆에는 체성분분석기(인바디)까지 설치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본인의 몸 상태를 점검하던
어떤 아주머니는 나에게도 한 번 해보라며 권유합니다. 괜찮다고 말하자 아주머니는 계속 말을 이어갑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칼 가는 사람이 와서 공짜로 칼도 갈아주고 가끔은 자전거 수리하는 분도 오셔서
재능기부를 하신다고 ~ 요새 주민 센터가 좋은 행사를 참 많이 한다며 칭찬 일색이었습니다. 그때 복지과
담당 직원이 지나가면서 한마디 거듭니다. 원래는 동네에서 열쇠집하는 아저씬데 칼 가는 솜씨가 좋아
자발적으로 봉사하시는 거라며, 사거리 복권방 옆에 있는 열쇠집이라며 위치까지 알려줍니다. ... 그러자
아주머니는 큰 깨달음을 얻은 듯 그 즉시 나를 보며 얘기합니다.

"원래는 사거리 복권방 옆에 있는 열쇠집 아저씬데, 칼을 아주 잘 간데요 ~ "

분명 동시에 같이 들었는데, 아주머니는 반복하여 내게 칼 가는 아저씨의 정체를 재확인 시켜줍니다.
흥이 났는지 복지담당 직원이 또 다른 정보를 전해줍니다. 오늘 저녁 3층 강당에서 요가와 체형교정
운동 강습이 있다며 참석하면 도움이 많이 될 거라 얘기합니다. 체형교정 운동이 요가와 어떻게 다른지,
또 어떤 운동인지 너무 궁금해서 물어보려다 그만 둡니다. 평소 주민 센터를 방문할 일이 거의 없었던
터라 나름 볼거리와 다양한 행사가 많다는 사실에 생각보다 많이 놀랐지만, 세련되지 못한 주민처럼
보일까봐 일부러 티를 내지는 않았습니다.

번호표를 뽑고 자리에 앉아 기다리면서 주위를 계속해서 찬찬히 둘러봅니다.
각종 민원서류를 발급하는 창구 직원 뒤쪽으로는 열일하는 복사기와 프린터가 수많은 서류들을 계속해서
쏟아내고 있었는데, 그 광경이 마치 동네 목욕탕에 가면 목구녁 깊숙이 칫솔을 넣고 ‘우~웩!’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흔한 아저씨와 닮아 있고, 또 만취한 중소기업 과장의 구토하는 모습과도 많이 닮아 있었습니다.

얼마의 비용을 지불한 사람들은 건네받은 서류를 한동안(누가 생각해도 짧은 시간이지만, 꼭 ‘한동안’
이라고 표현하고 싶게 만드는 참 미묘하게 짧은 시간)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서 들여다봅니다. 자세히
들여다봐도 가족관계나 집 주소 등을 빼놓고는 분명 새로울 것이 없어보였는데 본인들은 큰 깨달음을 얻은 듯,
입을 야무지게 악다물고 주민 센터를 나갑니다. 그러는 동안에도 센터에는 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들고나가며
분주합니다.

우리 동네에는 생각보다 많은 주민이 사는 것 같았습니다. 지역별(구별) 인구통계를 살펴본 적이 없으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 동네에 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에도 몇 명의
주민들이 센터를 방문합니다. 내 차례가 되어 신분증을 제시하고 등본을 발급받습니다. ... 비용을 지불하고,
그리고 나 또한 한동안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서 서류를 뚫어져라 쳐다봅니다. 낯설지 않은 가족들 이름과
집 주소를 확인하고, 무언가 큰 깨달음을 얻은 듯한 얼굴표정과 동시에 악다문 입모양을, 나보다 순서가 늦은
다른 주민들에게 선보입니다.(원래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 그리고 등본에 계급이 표시되지 않았다는 걸
다행이라 생각할 때쯤 서글픈 상상하나 떠오릅니다. ~ 시나브로 등본이 낯설어 집니다.

(◆ 등본에서 내 이름 하나만 남게 되거나, 등본에서 내 이름 하나만 사라지거나 ... )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는 원래 러시아 형식주의의 대표적 이론가인
‘빅토르 시클롭스키(victor Shklovsky)’가 정의한 예술기법이론입니다. 특히 문화예술 영역이
자기정체성을 공고히 유지하기 위해서는 창조나 창의, 즉 기존에 없던 것을 새롭게 만들어 내거나
원래 있던 것을 재구성하여 전혀 다른 새로운 시선을 끊임없이 제공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시선이나 사유들은 보편적으로 우리의 반복되는 일상에서보다는 새로운 경험,
이를테면 여행(탐험)이나 봉사활동, 삶의 위기(사고, 질병, 사별 ... ) 등을 경험할 때 얻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마디로 지루하고 반복적인 일상보다는 그런 일상에서 과감히 탈출했을 때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새로운 사유를
얻을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 더불어 일상의 탈출은 곧 <낯선 경험>이 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낯선 경험>을 일상처럼 자주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낯선 경험은 말 그대로
삶에서 어쩌다 한 번씩 나를 찾아오는 ‘(낯선)손님’과 같습니다. 결국 <일상의 탈출 = 낯선 경험> 이므로,
새로운 시선과 창의적 아이디어를 (많이)얻으려면 자신의 일상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러나 일상을 포기하면
그 순간부터 ‘일상포기의 삶’ 자체가 또 다른 일상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아주 많이(자주)
<낯선 경험>을 만들어(생산) 낼 수 있을 것인가? ~ 이러한 고민 끝에 나온 발상이 바로 시클롭스키의
<낯설게 하기>인 것입니다.

시클롭스키의 <낯설게 하기> 이론은, 낯선 경험을 일상처럼 자주 할 수 없다면 차라리 반복되는 일상 자체를
낯설게 바라보자는 의미입니다. 매일같이 마주하는 상황이나 풍경 등을 마치 처음 보는 아주 낯선 일처럼
바라보는 것인데, 이는 <의심과 반성>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즉 평소에 너무나 당연시하던 일들을 한번쯤 가볍게
의심해 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인데 ... 예를 들면, 신호등에 파란불이 켜지면 건너고, 빨간불 상태면
왜 정지해야만 하는지, 그런 규칙은 누가 정했으며 또 어떻게 시작됐는지 같은 의심과 반성 말입니다.
좀 더 알기 쉽게 설명해본다면, 수십 년을 신호등 체계아래서 생활해온 어른에게는 신호등 체계는 아무런 의심 없이
그냥 당연하게(수동적으로) 받아들여야할 공동체의 암묵적 약속입니다. 그러나 이제 막 말을 배우고 주변의 사물을
인식하기 시작한 아기에게는 신호등의 (교통)체계를 논하기 이전에 아예 <신호등> 이라는 그 둔탁한 ‘사물’ 자체만으로도
매우 신기한(낯설다) 경험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아이의 시선이 <낯설게 하기>인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건
수신자가 정보를 보낸 송신자의 의도대로 정보를 일방적으로(수동적으로)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
바로 <낯설게 하기>의 핵심인 것입니다. 그래서 신호등을 교통 시스템의 부속이 아닌 거리의 <조형물>로 바라보는
시선도 <낯설게 하기>의 좋은 예라 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낯설게 하기>는 평범한 일상을 너무 당연하게만 받아들이지 말고 한 두 걸음 뒤로 물러나
일정한 거리를 두고 지켜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일상을 <낯설게 하기>로 만들면 평소에는 잘 보이지
않던 것들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거기서 우리는 새로운 시선과 참신한 아이디어를 얻게 될 것입니다.
[@ ‘낯설게 하기’는 생각(사유)과 사물, 현상 등 다양한 분야로 확장해서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낯설게 하기>를 직관적으로 느껴보기 위해 하나의 사례를 참고해 봅니다.

[◆ 띵동! ~ 띵동! ... 쿵! 쿵! 쿵!
적막이 흐르던 새벽 3시 무렵, 누군가 철수의 오피스텔에 찾아와
벨을 누르고, 문 또한 급하게 두드립니다. 문을 열어보니 철수의 20년 지기
동건 이가 서있었습니다. ~ “지금 회사에서 물건 찾아오기 게임을 하고 있는데,
대략 가로 1미터, 세로 약 2미터 정도 되는 철판을 찾고 있어! ~ 가장 먼저
찾아오는 사람에게 상금이 자그마치 1억이다! 철수 니가 도와주면 상금 절반인
5천만 원을 줄께! ~ 도와주라!“ ~ 취업에 성공해 이제 입사 1개월 된 동건은
자신을 포함한 신입사원 전원에게 회사에서 과제를 주었다고 합니다.
철수는 5천만 원이라는 거액에 잠시 흔들렸지만, 새벽 3시인 지금 동건을 도와줄
마땅한 방법이 없었습니다.

“미안하다 동건아! ~ 아무리 생각해도 당장은 방법이 없는 것 같다!”

그렇게 말하곤 철수는 가로 1미터, 세로 2미터짜리 오피스텔 철문을 닫았습니다.]

우리는 보편적으로 자신이 사는 집의 문을 <큰 철판>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멍청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반복적인 일상이 본인의 삶과 관계된 주변의 모든 사물과 사유와 현상들을 그냥 당연하게
받아들이도록(수동적, 자동적) 만들면서 그 어떤 새로움이나 신선한 아이디어를 발견할 수 없도록 하나의
익숙한 패턴(일상)을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패턴이 형성됐다는 것은 결국 <‘일상’이라는 정보 송신자>의
의도대로 우리의 삶이 무기력하게 그냥 그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 그래서 창의적인
생각이나 새로운 시선을 얻으려면 일상 자체를 <낯설게 하기>로 만듦으로써 가능성을 높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낯설게 하기>는 이후 독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1898~1956)'가 연극이론에
도입하면서 중요한 결실을 맺습니다. 연극은 무대와 객석의 경계가 분명합니다. 따라서 본인이 관객이라면
<"나는 지금 연극을 거리를 두고 보고 있다(낯설게 보다)">라는 감정이 브레히트 연극이론의 핵심입니다.

무대 위, 배우의 연기가 압도적으로 뛰어나다면 관객은 자신도 모르게 그 배우의 연기에 <동화>되어 버립니다.
<동화 되었다>는 것은 결국 관객이 연극에 푹 빠져버렸다는(몰입) 뜻인데 이는 연극을 낯설게 바라보지 못했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브레히트의 <낯설게 하기>는 관객들의 동화를 가장 꺼려해야할 행동이라 주장합니다.

관객이 무대장치와 배우의 연기에 너무 강하게 몰입하고 동화된다면(감정이입), 어느 순간부터는 무대와
객석의 경계가 흐려지면서 연극을 "보고있다"가 아니라 "연극을 주입당하고 있다(송신자의 의도대로)"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극의 각종 무대장치와 배우의 훌륭한 연기에 관객이 감정적으로
동화된다면 관객은 연극의 배후에서 펼쳐지는 여러 복합적인 관계들을 통합적 시선에서 바라볼 수 없게
됩니다. 한마디로 연극이 연극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진짜 현실처럼 받아들여지는 매우 위험한 순간이
찾아올 수도 있다는 것이죠. ~ 이쯤 되면 관객의 상태는 수많은 등장인물들의 각각의 성격과 플롯 및
장치(데우스 엑스 마키나. deusexmachina)의 배치문제 등이 어떻게 절묘하게 섞여서 한 편의 연극으로
흘러가는지를 전혀 파악할 수 없게 됩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 쓰인
무대 기법의 하나. 초자연적인 힘을 이용하여 극의 긴박한 국면을 타개하고 결말로 이끌어 가는 기법이다.
에우리피데스가 즐겨 쓴 수법으로, 기중기와 같은 기계를 이용해서 갑자기 신이 공중에서 나타나
위급하고 복잡한 사건을 해결하는 데서 나온 말이다.(다음백과 참조)]

그래서 브레히트는 연기자에게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는 사항이 <"주인공이 고통 받는 장면이 나오면
함께 아파하지 말고, 아 이것은 한 편의 연극이구나.">라고 관객 스스로가 느낄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했으며, 그것의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낯설게 하기>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가끔씩 우리의 (막장)드라마
시청자 게시판을 들여다보면, 배역(특히 악역)에 대해 너무 과몰입한(동화) 사람들 상당수가 캐릭터의 특징과
(상징적)소품 등이 드라마의 플롯상에서 어떤 인과성이나 상관성을 가지고 있는지 파악하기보다는 무조건적,
일방적 비난만을 쏟아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럴 경우 드라마 전체(종합)가 아닌 부분만 남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제발 현실과 드라마를 구분 좀 하라'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 결론적으로 브레히트의
<낯설게 하기> 이론은 동화되는 감정을 의도적으로 파괴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연극을 수시로 모니터링
하게하고(‘거리를 두고 낯설게 보라!’) 연극의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할 수 있게끔 하라는 것입니다.

보통의 시각에서 연극이나 영화, 드라마 속 배우들이 연기를 압도적으로 잘 한다면 그것만큼 보는 이를
즐겁게 하는 것은 없을 겁니다. ... 그런데 이렇게 너무나 당연시되는 사실들에서 한 발짝 물러나 사태나
상황을 <낯설게 바라본다면(낯설게 하기)> 극을 보는 새로운 시선이 생겨날 것입니다. 흔한 일상(적)이라
생각했던 것에 대하여 한 번쯤 낯설게 바라봄으로써 새로움 ~ 예를 들면, 그 일상의 이면에서 조용히
흐르고 있는 숨은 역사성이나 변증법적으로 발화되는 창발적 모습 등을 발견하라는 거죠. ... 그래서 저도
더 이상 등본을 사무적(일상적)으로만 보지 않고, 약간의 거리를 두어 낯설게 바라보려 합니다. 너무나
당연해서 그동안 “공문서!” 그 이상의 의미부여를 하지 않았던 등본을 예전 보다 낯설게 바라보며 좀 더
새로운 시선을 찾아내고 싶다는 뜻입니다. (@소모적 의미부여가 아닌 창조적 발견)

(◆ 등본에서 내 이름 하나만 남게 되거나, 등본에서 내 이름 하나만 사라지거나 ... )

거지같은 서글픈 상상에 심장 밑 어딘가에 숨어있던 울컥한 마음이 목젖 언저리까지 꾸역꾸역
기어 올라와 쓸쓸히 머물다 사라지기를 여러 번, 그러다 생뚱맞게 작년 말 친구들과 맥주잔을 기울이던
상황 하나가 추가됩니다.

"나는 연합뉴스TV 기상캐스터! ~ 걔 누구더라 걔 있잖아! ~ OO가 참 좋더라!"
"나는 MBC가 제일 좋던데 ~ “
“기상캐스터보다는 스포츠 아나운서가 더 낫지”
"소심한 놈들 ~ 원래 (모든)기상캐스터와 스포츠 아나운서는 그냥 다 좋은 거야!"

"4시 44분! ~ 그 뭐냐 시간 보면 항상 444에 걸려! ~ 그거랑 똑같아!
기상캐스터 나올 때면 항상 와이프가 옆에 있어! ~ 아니 없다가도 그냥 생겨나!
막 생겨! ... 그러면 나도 모르게 채널 딴 데로 돌리는데, 처음엔 별 신경 안 쓰다가
몇 번 반복되니까 와이프가 한마디 하더라고 ‘둘이 연애 하냐? ~ 뭐가 찔려서 채널 돌리는데?’ 라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 거야 ‘어 그냥 뉴스 끝나서’ 라고 대충 얼버무리는데, 이게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어느 순간부터 나 스스로 자기검열을 하고 있는 거야 ~ 그래서 슬퍼!“

“슬프긴 뭐가 슬프냐? ~ 그래도 와이프랑 애들이랑 함께 살 때가 좋은 거야.”

캘리포니아 대학의 세계적인 사회학자 아네트 로손(Annette Lawson)은 간통을 바라보는
남녀의 시각이 어떻게 다른지 본인의 책 <애인을 꿈꾸는 이유>에서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여성들은 일반적으로 결혼생활에서 누리지 못하는 감정적인 원인을 간통의 이유로 내세우는
경향이 강하다고 합니다. 설문에 참여했던 대부분의 여성들은 하나같이 간통을 통해 자기 자신을
재발견 하는 기회가 됐으며, 더 나아가 이전보다 더 발전된 자신을 경험했다며 본인의 간통을
<미화>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 반면 남성들은 간통을 결정하면 가장 우선적, 실질적으로 고려하는
사항이 바로 <간통으로 유발될 수 있는 위험>이었다고 합니다.

결론적으로(아네트 로손의 연구를 전적으로 신뢰한다면) ... 여자에게는 간통이 자기 자신이
새롭게 태어나고 현재보다 더 나은 미래로의 전진을 뜻하는 일종의 진보적 출구의 의미가 될 것이며,
반면 남자에게는 본격적으로 위험부담이 시작되는 입구의 압박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흔해빠진 지하철 손잡이처럼 질기게도 참 질기게도 버텼지만 결국 가족 순위권 끄트머리로 밀려나
등본에 위태롭게 박혀있는,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낭만적 사랑을 기대할 수 없는 그런 몇 놈의 유부남들이
만나서 하는 대화란 것들이 대게는 거기서 거기이듯, 그때 우리들은 꽤나 큰 입구의 위험부담(?)을 안고서
각자의 이상형을 TV기상캐스터와 스포츠 아나운서에 투영해 사뭇 진지한 대결을 벌였습니다. ... 잠시 후,
'한동안' 이라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감지하고 마무리 짓듯 등본에서 눈을 뗍니다. 그리고 나 스스로에게
질문해 봅니다.

< '나는 지금 이상형과 함께 살고 있는가?' >

등본이라는 공문서에 결박되어 문서 끄트머리에 어거지로 구겨 넣어진 신세지만 그나마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만으로도 감지덕진데, 지금 여기서 ‘첫사랑’이나 ‘이상형’ 따위를 따져 묻는 것은 가족에
대한 배신이자 한심스런 사치라 싶다가도 ~ 기러기 아빠로서 이미 등본에 덩그러니 자기 이름 혼자만
남게 된(그리고 조만간 혼자 남게 될) 몇 놈의 친구들 처지를 생각한다면 ~

"그래! ~ 이상형이든, 기상캐스터든, 스포츠 아나운서든
나는 그냥 니들 장단에 맞춰 모든 여자들을 사랑하리라"고 다짐합니다.

<밥 먹고 청소하자 vs 청소하고 밥 먹자>
<잘 때 TV는 끄고 자라 vs 알아서 끈다>
<셔츠 좀 바꿔 입어라 vs 오늘 하루만 더 입을 거다>

따지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 갈등이 깊어져 같이 사는 사람이 미워지면 말과 행동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체취와 소유한 물건까지 모든 것이 미워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위안이 되어야 할 등본 공유의
삶이 때로는 지옥의 조건으로 변할 때가 많습니다. ... 그래서인지 영국의 천재극작가 셰익스피어는
129번 소네트(詩)에서 이성을 향한 욕망에 대해 이렇게 얘기합니다.

<“넋을 잃고 쫓아다니지만, 막상 얻고 나면 원수가 따로 없네.”>

사실 이 말은 인간의 육체적 욕망에 대한 표현입니다. 셰익스피어는 인간의 육욕(肉慾)을 지옥과 천국의
울타리에 모호하게 걸쳐있는 양가적 감정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이 양가적 감정이 육욕을
포함한 전체 삶을 공유하는 것으로까지 충분히 확대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프로이트는
“모순이 공존할 수 없는 것은 오직 논리학뿐이며, 사람의 마음은 사랑과 증오의 감정이 수시로 오고가는
대립의 연속이며, 언제나 모순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리고 슬프지만 오늘날 가족의
의미는 그렇게 정의될 수 있습니다. ~ 아니 굳이 프로이트의 충고가 아니더라도 개인들(부모, 자녀) 각자가
지니고 있던 고유한 모순은 ‘가족’이라는 단일공간으로 모여든 순간부터 카오스적 충돌을 일으킵니다.

가족 안에는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 or 부모, 자녀>와 같이 가족 성원(成員)으로 대표되는, 즉
사회가 만든 보편적 사유(정신구조)가 존재하며, 동시에 한 개별주체(개인)로서의 사유 또한 존재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처음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개별집단(가족)> 이라는 새로운 사유가 만들어져 추가됩니다.
이후 지구적으로 통용되는 사회보편의 정신구조와 개별주체(개인)의 정신구조, 그리고 개별집단(가족)의 정신구조는
생물의 이종교배, 아니 ‘다종교배’라는 이종교배 그 이상의 의미로 정의될 수 있는 혼돈의 결합과정을
거치면서 각각 별개의 독립된 공간으로 분리되는데 ... 이때 이 분리된 공간 안에서 <사회보편의 모순>,
<개인(개별주체)의 모순>, <집단(가족)의 모순>이라는 층위가 서로 다른 모순들이 새롭게 생성됩니다.
따라서 가족의 슬픔은 항상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크기로 다가오게 됩니다. 더불어 우리는 이러한
복잡한 모순관계를 위계적 시선이 아닌, 상대적 또는 대칭적 시선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 모순의 양적 확대와 질적 변화]

[◆ “진즉에 갈라서야 했는데 지금까지 버틴 건 모두 자식들 때문입니다.” ... 부부 갈등이 심한 가정에서는
간혹 자신들의 갈등 문제에 자녀나 타인을 끌어들이려고 합니다. 가족심리학자 보웬은 이런 유형을
<삼각관계>라고 말했는데, 삼각관계가 꼭 연인들 세계에서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또한
삼각관계에 (어쩔 수없이)개입하게 된 자녀는 성인이 된 후에 자신의 부모를 지긋지긋하게 생각하고 결국
부모를 떠나려는(해방)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 지금 본인의 가족(부모)이 매우 큰 짐으로
느껴진다면 아마도 현재 본인이 <삼각관계>에 심하게 끼어있는 건 아닌지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합니다.]

[◆ “피곤해 보이네! ~ 영화 지루해?” ... 부부 갈등에서 자주 쓰이는 방어기제 중 하나가 바로 자신의
심리상태를 상대방에게 투사하는 것입니다. 투사는 내가 상대에게서 느끼는 감정을 상대도 똑같이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내(남편)를 미워하면 아내(남편)도 나를 미워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따라서 현재 지루함과 피곤함을 느끼는 건 정작 본인이지만 이런 감정을 상대에게 전가시키면서 투사가
일어납니다. 피곤함이나 지루함 같은 단순 감정을 전가시키며 일어나는 투사는 그나마 다행입니다. 나름
견딜만하다는 것이죠. 하지만 투사에 쓰일 감정적 재료가 상대에 대한 원망과 분노, 혐오 같은 극단적
감정이라면 부부의 갈등은 극으로 치닫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투사는 부부사이 뿐만 아니라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도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낸 아이는 성인이 되어서도 불행한 삶을 살아갈 가능성 또한 매우 높습니다.
보통 <삶의 부메랑>이라고 하는데, 이 현상에 처음으로 천착한 사람이 바로 프로이트입니다. 프로이트는
우리가 자신도 모르게 어린 시절의 (고통스러웠던)패턴을 반복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 술과 마약 및
도박 중독, 자학과 폭력의 일상성 등은 자기 파괴적 행동 중에서도 상위 목록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극단적 자기파괴는 불행한 인간관계로 이어지며, 불행한 인간관계는 다시 가족 내부로 침투하여 가족
구성원(특히 자녀)의 무의식에 <반복강박>이라는 바이러스를 주입하게 된다고 프로이트는 말합니다. 그래서
반복강박을 가진 사람들은 어린 시절의 고통스런 경험을 성인이 되어서 본인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반복하게 된다고 합니다. ]

가족의 화목의 크기보다 가족의 상처가 더 크다면 이는 <잉여상처>가 됩니다.(내가 만든 말임.) ~ 따라서
아무리 가족의 화목의 크기를 늘려가려고 해도 <잉여상처>를 가진 가족은, 가족내부에 ‘반복강박’이라는
바이러스가 계속해서 자리하고 있다면 가족의 상처의 크기와 깊이(농도)가 화목이 커지는 속도보다 훨씬 더
빠르기 때문에 그 가족은 항상 <잉여상처 가족>으로 남게 됩니다. ... 결국 이 악순환적 고리, 즉 고통스런
삶의 부메랑은 가족구성원 중 누군가 하나는 반드시 죽어야만 바뀔 가능성이 높아지게 됩니다.

한번 굳어진 가족의 패턴은 대개는 <경로의존성>을 가집니다. 그래서 현재 본인의 가족이 분명 어딘가
잘못되었음을 인지하고 있어도 그 경로를 벗어나기가 좀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고통을 겪고
있는 상당수의 사람들은 (가족의)변화를 꿈꾸는데, 그 꿈이라는 것이 보통은 <평범한 가족>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평범한 가족’만큼 모순된 것은 없을 것입니다.

[◆ 예를 들어보자. 만일 내가 자갈밭의 돌들을 하나씩 주워 일일이 무게를 달고
그 평균이 145g 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이 수치는 그 자갈들의 본질에 대해서
나에게 거의 아무것도 말해주지 못한다. 이 발견을 근거로 누군가가 첫 번째 시도에서
145g짜리 자갈을 집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크게 실망하고 말 것이다.
정말이지, 그 사람이 아무리 오랜 시간을 찾아 헤맨다 해도 정확히 145g 나가는
자갈을 발견하지 못할 가능성은 여전히 계속해서 남아있게 될 것이다.
- (무엇이 개인을 이렇게 만드는가?. 22페이지 / 칼 구스타프 융/ 부글북스) ]

융은 이 책에서 “통계적 방법은 이상적인 평균이라는 측면에선 사실들을 보여주지만, 경험적 현실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아무런 그림도 제시하지 못한다.“고 얘기합니다. 결국 통계에서의 평균의 의미는 경험적
현실세계로 넘어오면 <평범함>으로 치환될 수 있습니다. 앞서도 얘기했지만 한 개인의 가정사 안에는
오직 그 가족만이 알 수 있는 다양한 모순들(사회보편, 개별주체, 개별집단)로 가득 차있습니다. 따라서
“평범한 가정에서 성장했다”라는 말은 최소한 (경험적)인간사회에서만큼은 허구에 가깝다고 할 수 있으며
이는 드넓은 자갈밭에서 (0.00 ~ 00001g)의 오차도 없는 정확히 145g짜리 자갈을 줍는 행위와 같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수천만 명이 사는 국가에 등본체계가 제도화 되어있지 않다면 원활한 행정은 불가능할 겁니다. 그러나
등본은 국민 개개인들이 힘겹고도 소중하게 살아온 수많은 날들과 붉은 상처들과 하얀 사연들을 절대로
대변해줄 수는 없습니다. 다시 말해 등본을 아무리 자세히 들여다보아도 그 행위가 사무적(일상적) 행위에서
그치고 만다면 결국 등본은 행정 권력에 의해 일정한 양식으로 규정된 <제도적 가족> 이라는 답답한
한계에 묶일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 따라서 평생을 살을 부대끼며 함께해온 <실체적 가족>이라는
공간[@ 개별 가족사(家族史)]을 이해하려면 지금부터라도 ‘등본’처럼 가족을 상징하는 것들에 대하여
한 번쯤 <낯설게 하기>로 바라보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한마디로 등본을 <낯설게> 바라보며 등본 아래로
조용히 침전해 들어가다 보면 (등본의)형식 이면에서 조용히 흐르고 있던 가족의 역사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 더불어 아무리 갈등이 많은 관계라 하더라도 한 개인에게 가족의 의미는 역시나
가장 중요한 위안의 공급처입니다. 그래서 등본을 공유할 가족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큰 모순이며 처절한 슬픔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 등본에서 내 이름 하나만 남게 되거나, 등본에서 내 이름 하나만 사라지거나 ... )

<우리 동네 주민 센터>에는 공공 어린이집과 폐형광등 수거함이 있습니다.
친환경 세제인 유용미생물(EM) 배양액을 무료로 나눠주기도 하며, 지명수배자 명단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덤으로 본인이 공동체적 사명감이 넘치는 주민이라면 통장에 지원해 볼 수도 있습니다.
주민 센터를 들어가기 전, 층계참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며 잠시 노년에 대한 사색에 빠져볼 수도
있습니다. ... 혈압과 체성분을 분석해 볼 수 있으며, 년 중 한두 번 쓸까 말까한 특수공구도 빌려 쓸 수
있습니다. 요가와 체형교정 운동이라는 것도 배울 수 있습니다. 계절이 바뀌면 동네 열쇠집 아저씨가
공짜로 칼을 갈아주러 오시고, 고장난 자전거를 무료로 수리해 주는 아저씨도 오십니다. 사람이 많아
기다리기 지루하면 비치된 인문서적을 보며 교양을 쌓을 수도 있습니다. 주민들 대화에 끼어들어 몇 마디
거들어주는 친절한 공무원도 만나볼 수 있으며, 발급받은 서류를 확인하다보면 등본에 의해 위태롭게
구원받은 자신의 삶을 <낯설게 하기>로 바라보는 기회가 생기기도 할 것입니다.



[@게시물에 어울리지 않는 긴 글입니다. 죄송합니다. ~ 희망찬 한 주 되시길 바랍니다.]

2019년 2월 18일 월요일

◆ 한국형 페미니즘이여 지네를 거부하고 칸(Cannes Film Festival)에서 박수를 받아라 [by. 물파스]

[◆ 한국형 페미니즘이여 지네를 거부하고 칸(Cannes Film Festival)에서 박수를 받아라]

(성은 상품화 하면 안 되는가? - 한국형 페미니즘과 여성가족부, 수많은 여성단체에서 도출되는
상식밖의 여러 문제들의 근본 원인은 바로 경직된 우리의 성문화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따라서
이야기는 그 부분을 중점적으로 다루게 될 것입니다. 물론 모두 저의 주관적 견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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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한국형 페미니즘 운동을 보면 지네가 보입니다.
지네는 절지동물에 속하고, 몸이 가늘고 길며 여러 마디로 이루어져있는데 ... 그 마디마다
한 쌍의 걷는 다리가 있어서 많은 발을 가진 동물로 유명합니다. 그러나 지네의 이동(방향성)은
선두가 결정합니다. 선두가 가자고 하면, 아니 선두가 가는대로 나머지 발들은 따라갈 수밖에
없죠.(맹목적 추종) ... 선택권이 배제된 채 가치 없는 노동을 나머지 발들은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이어가야 합니다. 심지어 꼬리부분에 달린 발은 보행에 쓰이지도 않습니다. 보행과 같은 이동욕구마저
거세된 발은 더 이상 발로서의 의미를 상실하고 오직 존재(소속)감 하나만으로 만족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정말 만족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 ) ~ 그리고 더 중요한건 지네의 눈입니다.
홑눈, 즉 밝거나 어두운 정도만 감지할 수 있는 원시적 형태의 눈만을 지네는 소유하고 있는 것인데,
이렇게 ‘밝다와 어둡다’라는 이분법적 시선이 지네가 세상을 바라보는 한계인 것처럼 한국형 페미니즘
또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지네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그들에게 세상은 오직
“한국형 페미니즘에 좋은(동조) 것과 나쁜 것”으로 이분되어 이해됩니다.

이분법은 사태를 간단명료하게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을 제공합니다. 하지만 독단과 독선에 빠질 위험이
상시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다양한 사고체계가 요구되는 공동체 사회에서는 수시로 경계해야할 위험한
사고방식입니다. 또한 이러한 이분법적 이해, 즉 “좋은 것과 나쁜 것”이라는 시선에는 암묵적 순결강박의
의미도 내포하게 되는데, 한마디로 한국형 페미니즘은 전제부터 무결점상태이므로 누구라도 문제(오류)를
지적하면 그것은 곧 한국형 페미니즘에 “나쁜 것”이 되어버립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태어남은 신의
특혜를 받아 이미 ‘원죄(Original Sin)’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무결점의
순결강박은 선두의 방향성을 합리적 의심이나 논리적 검증 따위가 전혀 필요치 않는 ‘절대선(善)’으로
인식하게 만듭니다. 때문에 선두는(선두의 방향) 항상 옳습니다. 그래서인지 의미 없는 노동을 반복하는
수많은 지네의 발처럼 한국형 페미니즘에 합류한 상당수의 여성들을 마주할 때면 그녀들에게서 알 수 없는
슬픔과 마음의 가난이 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 왜 자꾸만 ‘한국형!’, ‘한국형!’ ... ”한국형 페미니즘“이라고 하는지
궁금해 하실까봐 먼저 해명을 한 후에 계속 이야기를 이어가 보겠습니다.

학계는 오늘날의 페미니즘(Feminism) 운동이 대략적으로 50여 분야로(혹은 그 이상) 그 유형이
상당히 복잡하고 다양화되고 있다면서 그 외연이 현재도 계속해서 확장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소극적 형태의 페미니즘 운동에서부터 상당한 급진적 운동으로까지 그 범주가 넓어지고 다양화되고 있다는 것인데,
예를 들면 ... 정치경제적 평등, 사회적 평등, 남성거부(분리주의), ‘남성과 여성’이라는 시선 자체를 거부하는
퀴어(queer)운동, 페미니즘의 이론적 관심과 실천(행동주의),심지어 사랑하는 연인들 사이의 뜨거운 섹.스(S.ex) 까지도
거침없이 간섭하며 <"삽.입이 이루어지는 모든 섹.스는 강간이다!(앤드리아 드워킨.Andrea Dworkin)"> 라는
주장을 펴는 급진을 넘어 극단에 가까운 페미니즘 운동도 존재합니다. 이처럼 오늘날 페미니즘의 운동 변화는
그 종류와 다양성(복잡성), 급진성 등에서 오랫동안 페미니즘을 연구해온 학자들조차 뭐라 딱히 정의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이것은 페미니즘(Feminism)이다!"라는 선언적 구호만 외치면 페미니즘으로 통용되는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가 우리사회 페미니즘 운동에 굳이 <“한국형”>이라는 수식어를 갖다 붙인 이유는
현재 지구에서 진행 중인 페미니즘의 복잡성과 확장성을 고려했을 때, 그 안에서 한국만의 고유한 속성과 차별성을
구별해내기 위해서입니다.

최근의 (한국형)페미니즘 운동들의 과격한 양상들을 지켜보면서 혁명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지네의 발’ 같았던 그녀들의 수고(?)에 어울리는, 그래서 그녀들이 자칭 ‘여성혁명’이라
스스로 칭송해 마지않는 이 과격한 퍼포먼스를 상징할 만한 적당한 이름을 생각해보았습니다.
바로 <원숭이 정치학!>입니다.

인간에게 무리 짓는 본능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정치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를 도입한 국가에서 정당이 존재하는 이유인데 ... <정당>이라는 의미의 직관적 이해는
생각을 공유하지만 그 저변에는 각자의 이해관계가 끈적하게 결부되어 있는 매우 이기적인 무리들의
집합이 바로 정당이며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그 이해관계로 인하여 정당은
또 다시 <계파, 정파>로 세분화되기도 합니다. 아무튼 정치는 각각의 집단들의 싸움입니다. 수많은
개개인의 생각들이 특정 집단(정당)이라는 한 곳에서 공통된 하나의 정신적 수원(水源)을 생성하고,
그렇게 생성된 집단의 공통정신이 다른 집단의 정신과 치열하게 싸우는 곳이 바로 정치적 공간입니다.
때문에 정치는 필연적으로 <권력투쟁의 공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한국형 페미니즘에
부여한 <원숭이 정치학>은 어떤 의미인가?

정치가 권력투쟁의 공간이라면, 투쟁은 당연히 싸움이며, 싸움은 승리를 목표로 합니다. 더불어
승리를 위해 정치를 극단까지 밀고 올라가다보면 물리적 힘과 만나는데, 그것이 바로 전쟁이며
대개 전쟁은 정치의 최후의 수단이 됩니다. 그래서 정치는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또 사태가 극단적
상황까지(전쟁)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선은 상대를 설득하는 작업을 시도하며 설득은 명분과 논리를
필요로 합니다. 때문에 정치는 치밀하고 정교한 두뇌싸움의 일종이며, 이러한 정치 놀음이 자국 내에서
벌어지면 그것은 정당간의 싸움이고, 자국을 벗어난 국가 간의 싸움이라면 우리는 이것을 <외교(전)>라고
합니다. 그런데 현재 한국형 페미니즘에는 이러한 요건들이 전무합니다. 쉽게 말해 승리를 위한(권력쟁취)
나름의 투쟁은 존재하지만 상대를 설득하기 위한 최소한의 명분과 기본적 논리는 이미 실종된 상태이며,
설사 있다손 치더라도 치밀하고 정교한 부분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으며 그저 억지스럽고 어설픈,
그리고 설득력 없는 굉음만 들릴 뿐입니다. 때문에 정상적, 아니 상식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은 그녀들의
굉음에 이질감을 느끼며 동조나 응원을 해야 할 그 어떤 매력적 조건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녀들의 투쟁은 ‘정치의 부재’, 혹은 ‘정치흉내내기’속에서 벌어지는 흥미로운 일회성 이벤트, 그 이상을
넘어설 수 없는 어떤 한계점에 맞닿아 있다고 생각됩니다.

"아이고! ~ 원통하고, 원통하다! ~ 아이고! ~ 아이고 ~ "

억겁(億劫)의 시간동안 땅을 치고 울분을 토하고 서럽게 노래해야만 딱딱하게 굳어있던 가슴속
시커먼 멍울이 비로소 슬픈 꽃으로 피어난다는 우리 조상들의 한(恨), 특히 <여자의 한(恨)> 입니다.
한(恨)의 깊이가 얼마나 깊었으면 억겁의 세월을 오직 구슬프게 울부짖는 데에만 힘을 쏟아야 하는지,
그래서 우리 선조들의 <열녀관>을 통하여 그동안 무심하게 잊혀지고 파묻혔던 그 처절한 한(恨)을
슬픈 꽃으로 승화시키고 <여자의 한(恨)>의 깊이 또한 미루어 짐작해보기로 합니다.

[◆ 용동 길가에 정각이 하나 있다. 처녀가 목화를 따고 있는데
왜놈들이 올라가면서 유방을 한 번 만지자 처녀가 바로 집으로 달려가서
부엌칼로 유방을 잘라버리고 죽었다. 임금이 친히 사액을 내린 것이
그 열효각이다. - (칠곡면 용동 열부각), 한국구비문학대계(8-10, 59면)]

[◆ 한 남자가 함께 공부하던 친구 여섯 명에게 각자의 집안에는
열녀가 많이 난다는데 그게 사실인지 각각 자신의 집에 가서 시험해보고자
하였다. 이들은 각자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자기 집 담을 넘어 자신들 부인과
동침하고 왔다. 다음날 친구들 부인 모두가 자결했다는 부고가 날아왔다.
- (남편과 자고도 죽은 헛 열녀), 한국구비문학대계(7-17, 323~325면)]

[참고: 강등학 / 한국구비문학의이해. 156페이지/ 월인 출판]

위 두 사례는 극단적 정절관념을 보여줍니다. 특히 ‘열효각’ 사례는 완전무결한 신체적 정결성을
고집하는 열녀관을 보여줌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을 신체의 일부로 치환시키는 가치전도적 양상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 열녀전설은 외적의 침입에 의한 전란이나 국가적 혼란기에 특히 많이 나타났는데
고려후기에 나타났던 신유학자들에 의해 기술된 본격적인 열녀전은 주로 고려말 왜구의 잦은 침입과
몽고란을 배경으로 이루어진 것들이며, 신유학적 이념을 기반으로 세워진 조선은 국초부터 열녀의식의
정착을 위해 꾸준히 시행했던 각종 포상정책의 결과 열관념이 광범위하게 자리잡아감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열녀이야기가 양산되었고 조선후기에는 전 계층에 걸쳐 수많은 열녀들이 배출되었다고 합니다.

[◆ 옛날에 한 아가씨가 흰가마를 타고 시집을 갔다.
흰가마는 신랑이 죽고 없을 때 타는 가마다. 과부살이를 하러
새 처녀가 시집에 간 것이다. 이 처녀과부는 시집에서 열녀(烈女)가
되기를 강요받는다. 왜냐하면 열녀로 소문나 정문(旌門)이 서면
그 집안에 관역(부역)이 면제되고 조세가 면제되며 병역이 면제되기
때문에 어느 가문이건 어떤 열녀가 될 조건만 구비되면 그것을 강요하게
마련이었다. 이 처녀는 태어나 한 번도 보지 못한 남편의 무덤에 가서
주야로 통곡하게 되어있다. 그렇게 하면 남편이 살아난다고 꾄 것이다.
처녀가 통곡하고 있는 밤중에 무덤이 갈라지고 이 처녀가 그 무덤으로
끌려들어가는 것을 친정에서 처녀를 따라 함께 온 하녀가 보았다.
달려가 저고리섶을 잡고 늘어졌다. 옷섶이 세모꼴로 찢어지더니
찢긴 옷섶은 나비가 되어 하늘로 날아갔다. 이것이 한국의 나비 생성에
관한 설화 가운데 전형적인 하나다.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젖꼭지를
가렸던 세모꼴의 올리브 나무껍질이 나비가 되었다는 희랍의 그것에
비하면 한국의 나비는 슬픈 나비다. <정문(旌門) - 충신, 효자, 열녀 등을
표창하기 위하여 그 사는 집 앞이나 마을 입구에 세우던 붉은 문>
... (한국인의 기속 - 성과 미신. 91페이지/ 이규태/ 기린원)]

<춘향전>을 비롯한 선조들의 열녀관은 비록 이야기에서 그치지만, 당시 우리 여성들에게 가해졌던
억압과 극단적 정조관념의 무게는 이야기의 내용만 들여다봐도 어떠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렇듯 당시의 열녀관은 현대인에게 <여자의 한(恨)>의 깊이를 어느 정도는 가늠케 해줍니다. 더불어
우리 어머니들의, 어머니들의, 어머니들의 ... 어머니들에게 강요된 당시의 시대적, 묵시적 <열녀관>은
<여자의 한(恨)>과 서로 호환 가능한 용어로써 세대를 관통하는 여성억압의 대표적 상징으로 인정해도
큰 무리가 아니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한국형 페미니즘은 자신들의 ‘원숭이 정치학’을 위해서 그리고 자신들의 확장성을 위해서
우리 선조들의 처절한 <열녀관>을 모두의 동정과 연민을 흡수하는 강렬한 페이소스(pathos) 용도로
활용함으로써 시대의 멍울마저 자신들것으로 둔갑시킨 뻔뻔한 절도행각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작태는 결국 진정성을 담아낼 수 없기 때문에 아무리 대중을 향해 처절한 호소를 한다고 해도 그녀들
바깥의 정신들을 더 이상 그녀들 안으로 끌어올 수도 없으며, 끌려들어가지도 않을 것입니다. 결국
외부로의 확장성을 원하는 그녀들의 운동은 그 강도가 강하면 강할수록 실질은 안으로만 점점 더
쪼그라드는, 즉 현실과의 괴리만 더 커지는 모순이 발생하고 한국형 페미니즘 운동을 통한 정치로의
연장은 단순한 염원에서 그치게 될 것입니다. 때문에 현재 진행되고 있는 소란스런 한국형 페미니즘은
한계를 드러낸 하나의 ‘정치흉내내기’이며, 오직 <무리지음> 자체에서 착란적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저는 한국형 페미니즘을 <원숭이 정치학>이라 명명하려 하는 것입니다.

이쯤에서 저는 한국형 페미니즘을 한다는 분들에게 좀 더 솔직해져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특히 <섹스(S.ex)>는 한국사회에서 여전히 무기수에 가깝습니다. ... 최근 들어 "성인지 감수성"이
우리사회 주요 화두가 되고 있습니다. 이 정체불명의 외계어는 유명인들의 미투 운동과 맞물리면서
성폭력,성희롱(추행) 사건에서 상당한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 한마디로 법이 성(性)과 연계된
사건을 바라볼 때는 여성이 피해자인 경우가 많다는 통계적 근거를 들어 여성의 입장을 좀 더 많이
고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때문에 여자는 일관된 진술과 눈물만 준비하면 그 즉시 피해자로
인정받을 수 있는 일종의 법률적 인센티브를 얻게 된 상황입니다. 철저히 합리적이고, 또 형평성에
근거하여 법 적용이 이루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결국 사태가 이 지경까지 된 것은 우리 사회가
아직도 섹스(s.ex)를 무기수로 가둬놓고 자유로운 성(性)담론을 허용하지 않는 경직된 문화를 지속하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우리사회는 너무나 모순입니다. 요정 정치, 룸살롱 공화국이라는
조어가 만들어질 정도로 ... 현실적, 실질적으로 대한민국 사회는 전 세계 그 어느 국가보다 더 화려한
밤문화가 존재하는 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만 뜨면 한국 사회는 소녀 앨리스가 빠졌던
구멍 속의 ‘이상한나라’가 됩니다. 어느 국가보다 엄숙한 성(性)도덕이 강조되며, 과도한 성욕의 표출은
저급하고, 성(性) 상품화에는 극도의 히스테리 반응을 보입니다.

이제는 우리도 서서히 섹스(s.ex)를 가석방 시켜야할 시기가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GDP 1조 6천억 달러($), 세계 경제규모 10위권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성(性)담론이 이렇게
경직되어 유통되고 있는 나라는 아마도 OECD 국가 중 대한민국이 유일할 것입니다. 더불어 이러한
경제적, 문화적인 불편불일치(mismatch)로 인하여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희귀어가 탄생했다고 생각됩니다.

2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안희정 지사의 판결에 대해 김지은씨 측 변호인과 많은 여성단체는 법원이
<성인지 감수성>을 반영한 균형 있는 판결을 내렸다는 소감을 밝혔습니다. ~ 만약 여기서 '안희정'을
익명으로 전환하고 사건(판결)을 바라본다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가장 논리적, 합리적이어야만 하는 법질서에 <감수성(感受性)>이라는 상당한 비논리를 개입시켜
유죄판결을 유도한 작금의 사태에 대해 2019년 한국사회 상당수가 환호하고 있습니다. 양심과 도덕이
살아있는 사회는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바라는 가장 이상적인 사회일 것입니다. 하지만 <도덕재판>이
난립하는 사회는 질서가 붕괴되고 공포가 만연되는 사회로 귀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법치주의가
제대로 작동되는 대부분의 국가가 비논리의 대표적 상징인 도덕재판을 금지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성인지 감수성 재판>은 <도덕 재판>과 등치관계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 저는 안희정 지사를 옹호하거나 비난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 제 의견은 그냥 무관심입니다.)

[◆ 격렬한 섹스(S.ex)가 시작됩니다.
비명 같은 신음과 질펀하게 흘러내린 땀, 살덩어리들의 파도 같은 출렁거림을 오직 시선으로
받아들이지만, 차원을 뛰어 넘는 원시적 물성(物性)이 느껴집니다. 그러는 동안에도 상대의 입속에서
자신의 혀는 미친 듯이 녹아내립니다. 상기된 얼굴과 붉게 물든 귓불은 몽환적 눈빛과 잘 어울립니다.
아직 덜 녹은 혀가 잠시 바깥으로 흘러나와 얼굴과 귓불에 묻은 붉음을 닦아냅니다. 기형적 체위는
사마귀의 교접모습과 닮아있고 신기하다 생각할 때쯤 극한에 다다른 사정은 찰나(刹那)가 됩니다.
평온한 마무리 키스, 침대 위 ... 호흡이 먼지처럼 가라앉습니다. 정적속 전라의 남녀는 죽은 뱀처럼
말없이 똬리를 틀고 엉켜있어 미혹의 살덩어리들은 누가 누구의 것인지 주인을 분간하기
어렵습니다. ... 그렇게 황홀했던 섹스가 끝나자 수많은 사람들이 기립하여 환호와 박수갈채를
보냅니다. - 칸 영화제(Cannes Film Festival) ]

여자가 다리 아래로 많은 걸 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현대사회는 충분히 그렇게 정의될 수 있습니다.
또한 그것이 터부시될 이유도 없습니다. 여자의 몸이 반드시 ‘영화’같은 문화예술 장르에 편입될 때에만
긍정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강제규정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미 실제 현실에서는 여성 본인의 몸을
출세와 욕망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그렇게 드문 일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한국형 페미니즘은 이러한 현실을 애써 외면하며, 설사 그것이 만연된 사회현상이라고 해도 그것은 여성의
자의가 아닌,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남성이 만든)사회 구조적 현실이라며 모든 원인을 여성 외부에서,
특히 남성에게서 찾으려고 합니다.

“내 몸은 내 것이다!”

(한국형)페미니즘이 외칩니다. ... 그녀들은 여성의 몸의 권한을 강력하게 주장하면서도 정작 그 몸의
사용권한이 개인적 출세와 욕망 같은 조금은 속물적 근성과 결탁하여 민낯이 드러날 때면 마치 본인 몸에
다른 피가 섞여 들어오는 것을 완강히 거부하는 순혈주의나 인종주의적 히스테리 반응을 보이는 것이
현재 한국형 페미니즘의 비린내 나는 날것 그대로의 실체입니다. 그래서 그녀들에게 페미니즘의 성공을 위한
더 나은, 더 효율적인 진보된 페미니즘을 소개해주고 싶습니다.

<“차라리 모든 패를 까고 솔직해져라!”> ... 한마디로 실천적 진실성입니다.
지금까지 보여준 이중적 태도의 페미니즘 정신이 아니라 여성들 그대들 몸을 마음대로, 그리고
주변 시선을 의식하지 말고 당당하게 사용하라는 “여성들 몸은 진짜 여성들 것이다!” 라는 실천적 강령이며,
보다 현실적 메시지의 전달이고, 동시에 메시지의 정당화 노력입니다. 바로 사회(현실)를 칸(Cannes Film)으로
만들라는, 즉 현실과 영화(예술)의 합일인 것입니다.

사회가 칸이 될 수 있도록(칸의 사회화) 여성들 스스로가 각자의 심연에 숨겨진 출세와 욕망에
좀 더 솔직해짐으로써, 그리고 진실성을 담아 온전히 그 모습 그대로를 사회에 노출시켜 마음껏 박수를
받으라는 뜻입니다. ...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한국형 페미니즘은 한국사회 오래된 관습적
성 고정관념(gender stereotype) 및 일반 대중과의 충돌이 발생합니다. 그것은 페미니즘을 외치는
자칭 한국형 페미니스트들이 ‘여성(성)의 순결’ 자체를 바로 한국형 페미니즘의 <도덕적 자산>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페미니즘 입장에서는 한국 여성들은 최소한 도덕적으로 흠결 없는
순수한 처녀성의 결정체로 계속해서 남아있어야 하며, 혹시라도 그녀들의 ‘몸의 사용’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그것은 절대로 한국형 페미니즘이 수용해서도 안 되는 것이며, 설사 수용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오직 남성(남성이 만든 제도나 사회구조)에 의한 결과로 귀결되어야 한다는 조건이
전제될 때에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한국형 페미니즘은 성매매 여성들을 구원의 대상으로 인식합니다.

그럼 이쯤에서 이런 물음이 필요해 보입니다. ... 진정 <성(性)은 상품화하면 안 되는 것인가?>
강제성이 배제된 성(性)은 현대사회에서 이미 많은 국가들에게 하나의 상품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첫 눈에 반해 말을 걸어봅니다.
연락처를 받고, 손을 잡고, 낙엽 길을 걸어보고, 팝콘을 먹으며 영화를 보기도 합니다.
제법 쌀쌀해진 날씨 탓에 차분히 서로를 감싸며 체온을 느껴보기도 합니다. ... 키스(kiss)를 하고,
섹스(S.ex)를 합니다. 상대의 슬픔에 함께 울어주고 기쁜 일엔 함께 행복해 합니다. <사랑>입니다.
여기서 중요한건 이 모든 사랑의 과정은 그 어떤 누구도 대신할 수 없으며 간섭할 수도 없다는 점입니다.
오직 사랑하는 연인들 당사자들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따라서 국가가 한 개인의 <사랑의 과정>까지
책임져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성 상품화>는 설렘과 두근거림, 기쁨과 슬픔의 과정이 모두 생략되고, 오직 쾌락(성욕)만이
화폐 가치로 전환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사랑의 과정>은 개인에게는 일종의 판타지이자
동시에 실존입니다. 평생에 한번(혹은 그 이상) 있을까 말까 한 가장 큰 이벤트이며 ... 더불어 어느
누군가에게는 사랑의 과정이 1년이 되기도 하고, 또 다른 이에게는 그 절반의 시간이면 충분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평생을 서두르지 않고 아껴가며 천천히 과정을 쌓아가는 연인들이 존재할 수도 있을 겁니다.
<사랑의 과정>은 이처럼 개개인마다 허락된 타임라인(timeline)이 모두 다 다릅니다. 때문에 규격화, 표준화가
불가능하며, 이것은 곧 <사랑은 상품화가 불가능하다!>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 그러나 (일회성)쾌락은
다릅니다. ‘과정’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요구되지만, 원초적 쾌락(S.ex)은 돈과 10~30여분 남짓한 시간이면
충분합니다. 화폐는 <가격 기능>의 작동으로 대상, 즉 성(性)을 객관화 하는데 상당히 뛰어난 지표역할을 합니다.
더불어 시간은 언제든지 가격으로 <전환>될 수 있는 참 독특한 개념입니다. 그래서 쾌락은 상품성을 갖습니다.

[◆ 일본은 17세기부터 공창제가 시작됐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남성에 비해 여성의 수가 모자라 은근슬쩍 사창도 생겨나기도 했는데
당시 꽤나 성업 중이던 상황에서 문제는 일시에 많은 사람(이용자)들이 몰려들었을
때였습니다.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면 그들을 받아줄 여성들의 수가 부족하게
됩니다. 시계가 있었다면 정확한 (이용)시간을 다투어 문제를 해결 했었겠지만,
시계도 없었던 상황에서 잠시 짧은 시간을 내서 여자를 사야했기 때문에 그 시간(이용시간)을
측정하는 것이 상당한 고민이 됐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때 일본 사람들이 생각한 방법이
바로 향(香)입니다. 절에서도 향을 피우고 제사를 지낼 때도 향을 피웠던 것이 생각났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향시계>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향은 한번 불을 피우면 다 타는데 보통 15분~20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됐기 때문에, 손님들은 1시간정도를 놀고 싶으면 향 3개를 구입하고, 손님들이
한꺼번에 너무 많이 찾아오면 1인당 향 1개만 판매하는 방법을 써서 시간을 조절했다고 합니다.
성(性)이 가격과 시간(향)에 의해 규격화 및 표준화가 가능해지다보니 성(性)은 말 그대로
<상품>이 되었던 것입니다.

많은 전문가들은 일본의 철저한 시간관념이 이때부터 형성되었고, 이러한 시간 관념이 산업사회로
넘어오면서 일본사회에서 꽃을 피웠다고 합니다. (참고: 일본인과 에로스(18~22쪽). 서현섭) ]

한국형 페미니즘은 여성의 성(性)은 상품화 하면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이 말은 즉, <처녀성(virginity)>은 그 무엇보다 고귀한 가치를 지닌 (여성의)몸과 정신의 결정체인
것입니다. 따라서 처녀성이 훼손되면 고귀한 <가치>가 떨어지는 것입니다. ... 그런데 여기서 역설적으로
그녀들의 주장은 <처녀성(virginity)>은 가장 비싼 값이 매겨져야 하는 또 다른 상품이다! ~ 라고 외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 한마디로 사회가 <처녀성(virginity)>에게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하라는 일종의 강령이며
암묵적, 상업적 가격협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2002년 성매매특별법이 제정되고, 그 즈음에 서울 종암경찰서 김강자 서장이 서울의 대표적 집창촌인
<청량리588>과 <미아리 텍사스>를 집중 단속하면서 ... 이후로 서울의 사실상의 공창은 사라졌습니다.
[@ 당시 청량리588과 미아리 텍사스는 경찰과 구청의 공공연한 관리(?)아래 영업을 지속했었기 때문에
공창에 가까운 사창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 그러나 성매매특별법과 집창촌 단속은 오히려 더 큰
풍선효과만 낳았습니다. 어설픈 도덕의 잣대가 정책의 실효성은 말할 것도 없고, 국가권력이 개인들의
배꼽아래를 무리하게 통제하는 소위 <경찰국가화>를 초래했다는 비난으로 이어졌으며 ... 더불어 훗날
김강자 서장은 집창촌 폐쇄 정책에 대한 실패를 인정하면서 한국사회에 “제한적 공창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성매매와 집창촌 얘기만 나오면 여성단체가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성매매 여성들의
착취의 문제입니다. 선진국 사례를 살펴보면 ... 영국과 프랑스는 집창촌 비즈니스를 금지하는 대신
개인적 매춘은 불법화하지 않습니다. 독일과 네덜란드는 집창촌을 합법화해 성매매 여성들의 노동권을
인정함과 동시에 그들의 인권보호에 정책적 노력을 보탭니다. 심지어 성매매 여성들의 <노조 결성권>
까지 허용하며, 이들에게 의료보험, 연금, 실업수당 등 일반 노동자가 받는 사회보장혜택을 국가가
최대한 보장하려 노력합니다. ... 참고로 성매매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이들이 느끼는
가장 위협적인 인권침해 요소는 다름 아닌 <사회적 시선>이었다고 합니다. 성을 판매한다는 주변의
차가운 시선이 이들을 가장 크게 괴롭힌 요인이었으며, 이로 인한 소외감과 외로움의 감정을 견디는게
가장 힘들었다고 합니다.

사랑이 배제된 쾌락(s.ex)은 비도덕적인가요?
오로지 성적 쾌락만 추구하는 행태는 저급한 겁니까? ... 질문을 바꿔 이렇게 다시 물어봅니다.

<도덕과 비도덕, 저급과 고급의 기준은 과연 누가 정하는 겁니까?>

앞서도 언급했지만,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제 성(s.ex)은 터부시될 하등의 이유가 없으며, 더구나
성인은 주체적 개인으로서 자신의 성적 취향에 관해 국가권력의 간섭과 통제를 받아야할 그 어떤 의무도
없습니다.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은 자신의 저서 <결혼과 도덕>에서 혼전 섹스를
적극적으로 권장했습니다. 한 개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이벤트인 결혼을 육체관계 없이 결정한다는 것은
미래 결혼생활에 불확실성만 높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러셀 또한 사랑이 배제된 쾌락을 완전히 지지하지는
못했습니다. ... 다시 말해, 섹스에 도덕성이 부여되려면 결혼이라는 제도가 아니라 <사랑>이 교감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죠. 결론적으로 러셀은 섹스(sex)가 도덕적이며 고급스런 하나의 완전체가 되려면 사랑이 필요하다
생각했었던 것입니다.

사랑은 현대사회에서도 여전히 섹스(s.ex)에 도덕성을 부여하고 정당화 시켜주는 매우 강력한 조건입니다.
사랑이 포함된 섹스는 성욕에만 집착하는 섹스보다 사회적으로 더 유리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따라서
사랑이 수반된 섹스는 결혼 및 출산과 무관하더라도 나름의 가치를 인정받습니다. ...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사랑이 <쾌락(s.ex)의 가치>를 평가하고 <도덕적 위상>을 부여하는 유일한 척도라 말하기에는 여전히 무언가
근거가 부족합니다.

이탈리아 작가 <조반니 보카치오(Giovani Boccaccio 1313~1375 )>는 근대소설의 선구자로 불리며
단테와 함께 르네상스 시대를 이끌던 대표적 문인입니다.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이 바로
<데카메론(Decameron)>인데, 이 소설집은 당시 가장 많은 국가에서 가장 오랜 시간동안 금서(禁書)로
지정된 소설이었습니다. ... 다만 인간의 심리가 거의 대부분 그렇듯이 ‘금기(taboo)’는 그 강도가
강하면 강할수록 금기를 깨려는 욕망 또한 비례적으로 강해지는 속성을 지닙니다. 그래서 ‘데카메론’은
역설적으로 당시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읽힌 작품이기도 했습니다.

데카메론의 시대적 배경은 기독교와 남성이 지배하던 전형적인 가부장적 세계를 반영합니다.
작품은 10일 동안 100건의 이야기가 전개되고, 작품 속 10명의 화자 중에서 7명이 여자입니다.
사회 여러 계층을 비유적으로 풍자하며 이야기의 대부분은 남녀 간의 사랑과 욕망(치정), 성(s.ex)의
문제가 작품 전체를 관통하며 채워져 있습니다. 또한 여성이 주도적으로 일으킨 섹스(s.ex) 문제는
대부분 여성에게 유리하게 결론지어집니다. ... 대표적으로는 6일째 일어났던 필리파 부인의 이야기가
압권인데, 절세미인 필리파 부인은 간통의 현장을 남편에게 들킵니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당시의
성(s.ex) 개념은 ‘사회적 제도’에 묶여있어, 특히 여성에게는 매춘뿐만 아니라, 남편 이외에 다른 남자에게
(돈을 받지 않고)몸을 허락하는 행위, 즉 간통을 저지른 행위도 사형에 처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법정에서 판사는 부인의 미모에 반해 그녀를 살려주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그녀가 자백하지 않기를
바랐지만 필리파 부인은 당당히 자신의 간통 사실을 인정하며 다음처럼 항변합니다.

[◆ "이 법은 여성을 속박하는 법입니다. 또한 이 법은 남성세계가 자의적 해석에 의해
만든 법이므로 일종의 악법이며, 사건 당사자인 여성의 동의가 배제되었기 때문에 원천적으로
무효입니다. ... 만약 아내가 남편의 성적 욕구를 충족시켜야할 법적 의무가 존재한다면
나는 단 한 순간도 의무를 소홀히 한 적이 없으며 거절한 적도 없습니다. 다만 나는 보통의
아내들 보다 성적 욕구가 강했기 때문에 남편의 욕구가 다 채워지면, 여전히 식지 않고 뜨겁게
남아있던 나의 욕구를 위해 애인과 이용한 것뿐입니다. 다시 말해 나는 애인에게 몸을 준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 애인을 일종의 쾌락의 도구쯤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쾌락의 도구로 삼는다면 아내들 또한 마찬가지로 자신의 필요에 의해 남자를 쾌락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남편이 나를 (계속해서)충족시켜주지 못한다면,
남아 있는 나의 성(性)에너지를 차라리 개에게 주는 것보다 다른 사내를 선택하는 것이
개인(아내)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전체의 효용이라는 측면에서도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
될 것입니다. - (필리파 부인의 항변)]

신(기독교)과 남성이 지배하던 시대에서 놀랍게도 필리파 부인의 이러한 과감한 주장은 판사에게
받아들여졌고 부인은 석방되며 이야기는 마무리 됩니다. 돈을 받고 파는 사랑은(매춘) 형벌의 대상이
되지만, 개인의 만족을 위해 자유롭게 베푸는 사랑(s.ex)은 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 작품은
여성이 성행위의 객체가 아닌, 주체로서 당당히 전면에 나설 때 진정한 <여성해방>을 이룰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집니다.

한국형 페미니즘과 여성단체는 낙태죄를 폐지하라고 주장합니다.
낙태죄 폐지 주장은 '여성 자기결정권'과 '태아 생명권' 중 무엇이 더 중요한가의 문제입니다.
여기서 대다수의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더 우선되어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여성의 <자.기.결.정.권.> ... 여성의 몸은 여성 자신들 것이니, 국가 권력이 간섭하지 말라는 것이죠.
그런데 참 웃깁니다. 국가 권력의 간섭을 운운하며 개인의 (자기)결정권이 헌법상의 권리라 그렇게 강조하던
집단들이 성(性)을 파는 경우에만 몸에 대한 자기결정권에 예외를 둔다는 것입니다. 낙태에 대해 여성단체가
찬성하는 자기결정권이 왜 <성적 자기결정권(性的自己決定權)>만 만나면 히스테리 반응을 보이는지
저는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개인의 성생활(s.ex) 역시 자기책임하에 이루어지는 명백한
개인의 권리(자기결정권)입니다. ... 이쯤되면 무려 600여 전에 발표된 데카메론의 내용과 2019년 광장에 모여
탈코르셋과 낙태죄폐지를 외치는 한국형 페미니즘이 서로 자리가 뒤 바뀐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한국형 페미니즘이 이제는 <발전적 해체>의 과정을 거쳐 변질되고 난립한 기존의 많은
기형적 페미니즘이 아닌, 한국형 페미니즘에 대한 새로운 개념 정립이 우선되어야 하며, 이후에는
진정한 여성해방을 위한 <실천적 통합모델>이 필요하다 생각됩니다. 더불어 사회(남성)를 향한 그녀들의
반복적 스트레스테스트(stress test)는 대중의 지지와 호응 보다는 불신만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앞서도 언급했었지만 오늘날의 페미니즘(Feminism) 운동은 그 유형이 상당히 복잡하고 다양화되고
있으며, 현재도 계속해서 외연이 확장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한국형 페미니즘 또한
자신들의 좌표를 벡터공간 어딘가에 숨겨놓고 이것, 저것 잡다한 사유들을 주인의 허락도 없이 마구 훔쳐다
쓰고 있습니다. ... 세계에 대한 치열한 고뇌와 사유 없이, 단지 머리를 자르고, 남근 사진을 갈기갈기 찢어버리며,
브래지어를 벗어던지는 불꽃 페미쇼를 그녀들은 저항이라 부르고 스스로를 (한국형)페미니즘의 용기 있는 투사로
내면화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운동이 아니며, 그동안 소심했던 본인을 바꿔보고자 집단최면 속에서
즉흥적으로 발흥하는 일종의 담력테스트일 뿐입니다.

‘불편한 용기’는 어느 페미니즘 단체의 이름이라고 합니다.
용기는 무모함과 겁먹음의 중간입니다. 균형을 중요시했던 그리스 철학은 용기를 그렇게 정의했습니다.
그런데 ‘불편한 용기’측은 이 고귀한 가치를 지닌 ‘용기’를 본인들 마음대로 가져다 난도질하려 합니다.
그녀들이 말하는 용기는 무모함과 겁먹음의 경계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녀들의 말하는 용기는
처절한 외로움과 공포에 가까운 소외감속에서 생산된 일종의 바이러스입니다. 아주 치명적인 바이러스 말이죠.
그리고 저는 현재 한국사회에서 진행되고 있는 <페미니즘>이라는 운동이 훗날 이들에게 <향수>가 되는 것이
두렵습니다. 지금 활발히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세대들이 이후 후세대들에게 운동의 바톤을 넘겨주고
기성세대가 되었을 때, 그녀들이 과거를 추억하며 지금의 운동을 아름다운 <향수>로 기억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마치 독재(박정희) 권력이 어떤 세대들에게는 찬양받는 <향수>가 되듯이 말입니다.

어떤 이념이든, 그 이념의 농도가 깊어지면 그것을 따르는 구성원들의 자발적 징집화는 가속화됩니다.
하지만 그 어떤 의문이나 질문을 거부하는 이러한 자발적 징집을 그들은 ‘연대’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현대 한국형 페미니즘은 본인들 할머니, 어머니 세대의 억압을 원래부터 자신들것인양 스스로의 내면에
단단히 착근시켜 자기자본화 시켰습니다. 그렇게 자본화된 ‘(그녀들의)억압’은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투쟁과 운동의 에너지로 전환되고, 그 힘은 증식과 증폭을 반복하며 <여성혐오 없는 세상 만들기>를
꿈꿉니다. ... 그런데 이러한 그녀들의 노력으로 여성혐오가 하나둘씩 사라질 때마다 그녀들은 역설적인
불안을 드러냅니다. 다시 말해 머리로는 ‘여성혐오 부재’를 외치면서도 그녀들의 심장은 ‘여성혐오 존재’에서
오히려 더 많은 안정과 평안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여성혐오의 지속>이 어느 순간부터 격렬한 갈망으로서 그녀들을 전복적(역설적) 인간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회 안에 진정으로 여성혐오가 사라진다면 한국형 페미니즘의 존재이유 또한 함께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도 언급했었지만 한국형 페미니즘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여성에 대한 억압과 혐오가 사라지고 파괴되는것이
아니라, <여성에 대한 억압과 혐오의 지속> 그 자체입니다. 따라서 사회 안에서 여성혐오가 하나둘씩 사라질 때마다
사라진 혐오의 빈 자리를 채워줄 새로운 대체제가 필요하며, 때문에 공동체 그 누구라도 혐오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에
대하여 한국형 페미니즘은 <혐오가 아닌 것을 혐오로 둔갑시키려는 작업>에 더욱 더 매진할 수밖에 없는 사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 결론적으로 이제 그녀들의 핵심적 목표는 여성혐오 반대가 아니라 기업들의 신상품 개발처럼
<새로운 여성혐오 개발 및 생산>을 목표로, 하나둘씩 사라져 가는 여성혐오의 대체제 만들기작업인 것입니다.
그래야만 자신들의 권력이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보다도 여성혐오 반대를 강하게 외치지만,
그 누구보다도 여성혐오가 지속되기를 바라는 것 또한 그녀들입니다. 즉 사회 안에 계속해서 여성혐오가 존재해야만
그녀들은 더 큰 목소리를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순상태가 곧 그녀들이 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이가
기술적 방편이 되는 것입니다.

@ 공동체가 말합니다.
<“알겠습니다! ~ 반드시 여성혐오 없는 세상을 만들겠습니다.”>

@ 그녀들이 말합니다.
<“아니오! ~ 100년, 200년 후에도 여성혐오는 계속 살아있어야 합니다. 그러니 제발 여성혐오를 멈추지 말아주세요!”>

우리 사회 '여성혐오의 존재'는 그 자체로서 한국형 페미니즘 운동의 존립근거가 됩니다.
열정을 쏟아야할 적(敵)이 사라지면 이후에 찾아오는 것은 치명적 무력감뿐이며, 이것은 늙은 퇴직자의
소외감과 같고, 주인에게 버려진 개의 심정과 동일하며, 대중에게 잊혀지는 것이 두려운 스타의 절망감과 동일합니다.
그래서 나는 그녀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대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여성혐오가 사라진 세상인가? ~ 아니면
여성혐오가 사라진 세계에서 더 이상 싸울 상대가 없다는 무력감이 두려운 것인가? ~ 아니면
세상에서 서서히 잊혀지는 것이 두려운 것인가?

[◆ 남자아이는 여성이 자신과 같은 페니스를 소유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이를 쉽게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절대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만약 여성이
거세를 당해 버린 것이라면 자신의 페니스도 위험이 처할지 모른다는 공포감과 불안감이
들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발로서, 혹은 일종의 경계 표시로서 자신의 페니스를
들여다보는 나르시시즘이 생겨나기도 한다. 나중에 성장해서 성인이 되었을 때도 거세 불안을
느낄만한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면, 공포감을 경험하고 비슷한 논리적 결과가 생긴다.
내가 잘못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아마 라포르그(Laforgue) 같은 학자는 이 경우
남자아이가, 여성이 자기처럼 페니스가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을 암소화(暗所化) 하려
한다고 설명할 것이다. 즉, 지각작용 자체를 마치 망막 암점증에 걸린 상태처럼 눈에 보이지
않게 지워버리려 한다고 설명할 것이다. (@ 암소화 - 환자가 자기의 자아와 상충되는 모든 것의
존재를 부정하려고 하는 정신적 암점(暗點)의 발달을 말한다. / 암점(暗點) - 빛깔이나 색을
느끼지 못하는 망막 시신경의 희고 둥근 부분) - (성욕에 관한 세편의 에세이. 29페이지/ 프로이트/ 열린책들) ]
=======

프로이트의 견해에 저 개인의 전복적 생각을 더하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 합니다.

< 생각의 전복 >
[◆ 여자아이는 남성이 자신과는 다르게 페니스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이를 쉽게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절대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만약 남성이
페니스라는 축복을 선물 받은 것이라면 (여성)자신의 페니스 부재에 대한 허탈감과 질투의
감정이 동시적으로 발생한다. 그래서 이에 대한 반발로서, 혹은 일종의 소유욕으로서 페니스를
절도하거나 파괴하여 자신과 동등한 수준으로 남성을 끌어내리려는데 욕망을 내면화 한다. - 물파스 생각 ]




[@ 간혹 므흣한 게시물을 볼 때면 나도 한번쯤은 그 유명한 ‘대인’을 불러보고 싶었지만
그래도 물파스는 진지함과 긴 글로 승부하는 사람인데 ‘내가 어떻게 대인을 부르겠는가?’ ... 라며
어느 샌가 또 어느새 다른 내면에선 ... 잠시 뒤 전문적으로 대인을 외치는 분들이 등장할 것이니
물파스 너는 가만히 앉아 ‘품위를 지키라’며 비겁함과 소심함이 참 꼴값스럽게 교체되곤 했었습니다.
어쩌면 이 또한 경직된 우리 성문화에 대한 영향이 아닐까를 생각해 봅니다. ~ 편안한 주말 보내십시오.]

2019년 2월 6일 수요일

페미니즘의 난립 / 결국 그것도 돈, 정치, 권력

지금 페미니즘이 난립하는 이유를 이해하려면
운동권과 시민단체, 진보의 역사를 먼저 알아야해
여기 있는 나이 많으신 형님들은 아시겠지만
혹시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오랜만에 한번 길게 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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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진보가 내세우는 캐치프레이즈는 단순했어
1.민주화
2.반독재
3.대통령 직선제

이 세가지 기치 아래 모든 진보세력이 다 모여들었고
이것만으로도 시민들의 환호를 받을수 있었지
근데 문제는 90년대에 들어오면서 시작된다

90년대에 대통령 직선제도 결국 받아들여지고
군사정권이 물러나고 YS 로 정권교체도 되면서
그토록 원하던 민주화도 결국 이루어지게돼지

근데 정작 민주화를 외치던 진보세력은 더이상 할게 없어진거야
더이상 욕할 독재자도 없고
더이상 요구할 목표도 없어진거지
한순간에 백수 실업자가 돼버린거야

그나마 정계에 연줄이 있던 운동권 유명 인사나
재야 거물들은 국회의원 보좌관 자리라도 하나 얻어 먹으면서
우르르 정계로 진출할수 있었지만
밑바닥에서 활동하던 다수의 <시다바리>들은
갈곳도 없고 할것도 없는 잉여 인력으로 사회에 내팽개쳐 진거야
아직도 80년대 운동권에서 활동하던 많은 사람들이
가난 속에서 궁핍한 인생을 연명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고
운동권의 변절과 내부 이권 싸움이 지속되는 근본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어
돌 던지면서 투쟁한건 다 똑같은데
나중에 국회의원이나 관료직같은 좋은 자리를 얻어간 인간들은
잘나가는 유명인 몇명 뿐이었기에 내부에 불만이 쌓일수 밖에 없었던거지

이렇듯 민주화 이후에 다수의 진보 세력이 갈 곳을 잃은 백수가 됐고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헤매다가
발견한게 바로 <시민단체> 였어

더이상 민주화같은 관념적인 정치 이념으로는
시민들의 관심을 받을수도 없고
그런 방식의 정치 행위가 필요치도 않은 사회에서
일반인들의 생활에 직접 연결되는 문제를 테마로 삼는 시민단체는
낙오한 운동권에게는 좋은 일자리였던 거지
전국에 온갖 시민단체들이 난립하게 된게 이때부터였고
정치, 경제, 노동 같은 전통적인 분야뿐만 아니라
환경, 문화, 예술, 심지어 아이들 교육 분야까지 시민단체들의 밥그릇으로
비화되기 시작한것도 이때부터였어
지금도 동네에 듣도 보도 못한
XX연대, XX모임, XX연구회, 라면서 허름한 간판 하나 걸어놓고
시민단체 행세하는 애들이 넘처나는 이유를 이제 알수 있을거야

우리나라 시민단체의 가장 큰 문제는
시민단체가 <시민단체의 일>에 관심이 없다는거야
몰락한 운동권과 진보세력이 차린 신사업이 시민단체이다 보니
이 사람들의 궁국적인 목표는 권력을 획득하는 것이지
시민단체의 임무가 아니거든

시민단체가 먹고 사는 방법을 알려줄께
1.사람들이 관심있어 하는 테마를 잡는다
(환경오염, 도시개발, 학원교육, 남녀차별 등등등)
2.사람들의 공포감과 분노감을 극대화시킨다
3.회원을 끌어모으고 조직을 확대한다
4.비대해진 조직과 회원들을 기반으로 정치인에게 접근한다
5.선거기간동안 특정후보를 지지하거나 낙선운동을 펼쳐 정치력을 과시한다
6.정계에 만들어진 연줄을 기반으로 정부사업을 따내거나 수익사업을 획득한다
7.전국 조직이 갖춰지면 이를 기반으로 정당에 공천을 요구하거나 장관직을 요구한다

대형 사건이 터지면
광화문에 평소에 알지도 못했던 온갖 시민단체들이
깃발을 들고 나온다
이 세력이 궁극적으로 원하는건
자신의 정치력을 과시해서 진보 내에 지분을 넓히고
유명세를 이용해 회원들을 끌어모으려는 것이다
광화문이 시민단체의 거대한 영업장소가 돼버리는거지
진보 정치인들은 이 세력들을 이용해 선거에서 이기려하고
권력을 쟁취해야 하기 때문에 절대 시민단체 세력을 무시하지 못한다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이다

이제
권력이 바뀐후로 시민단체들이 유난히 활개치는 이유
그리고
페미 정책이 엄청난 반발을 일으키는 줄 알면서도
끊임없이 반복하는 이유를 조금이나마 이해할수 있을거야

이번 시장에서 돈이 되고, 표가 되고, 권력이 되는
가장 유망한 테마 주식이 바로 "페미니즘" 이기에
정치인과 시민단체 온갖 잡다한 진보세력이
한탕 크게 해먹으려고 분위기를 뛰우고 있는거지
물론 이 한탕주의는 지금까지 진보세력이 늘 그래왔듯이
"민주주의" "정의" "평등"으로 포장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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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가 부패한 만큼
진보 내부에 꽤 추악한 모습이 감춰져 있는걸
멍청한 애들이 잘 모르는것 같아서 한번 써봤습니다

◆ 칸트의 정언명령 [by. 물파스]

[◆ 칸트의 정언명령]

(@ 오래전 박근혜와 최순실 관계에 대해 상당히 긴 글을 올렸었는데, 그때 글의 일부내용입니다.)

모두가 그 어떤 배려나 양보 없이 오로지 각자의 이익을 위해서만 행동한다면
세계는 그야말로 하루가 멀다고 온통 대립과 분쟁에 휩싸여 혼란스런 세상의 연속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분쟁의 해결을 위해서는 흔히 “이성적으로 판단하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감정에 휘둘려
사리를 분별하지 못해 편향된 사고나 성급한 판단을 내리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서는 이성을 힘을
빌려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인간들의 이기적이고 비양심적인 본성이 수시로 나타난다면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즉
혼란을 막을 수 있는일에는 무엇이 있을까를 생각해보면, 공동체의 이성으로 만든 <법과 제도>라는
합의된 강제성을 활용한다면 문제가 비교적 쉽게 해결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이성적인 결과인 거죠.
하지만 인간 사회라는 것이 그렇게 간단치만은 않다는 걸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너무나 많이 배워 왔고,
또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혼란스러운 사회 상태에 대해서 법과 제도로도 어찌해볼 수 없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교통사고를 당해 피를 흘리며 도로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고도 그냥 지나친다거나,
하루종일 굶었다며 거리에서 배고픔을 호소하며 돈이나 빵을 구걸하는 걸인을 보고도 그냥 모른 채 하며
지나가는 사람이 있다 해도, 그들은(무관심한 사람들) 사회가 만든 법과 제도로 제재를 가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닌 것입니다. ... 그래서 이러한 이기심과 무관심이 공동체 내에 만연하게 된다면 이성으로 만든, 아무리 훌륭한
법이 존재한다고 해도 사회는 그야말로 극단적인 삭막함 속에 놓이게 되어 공동체라는 말이 무색해 질 정도의
말 그대로 껍데기만 공동체인 사회가 될 가능성이 매우 커질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아무리 공동체의 선과 평화를 위한다 해도 인간의 <도덕적 양심>까지
우리 공동체가 강제할 수단은 없다는 것입니다. ... 한마디로 인간의 "도덕"은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는
이성적 사고만으로는 어찌해볼 방법이 없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좀 더 근원적인 해결 방법은
없는 것인가? ~ 하는 물음이 생길 것입니다. 그래서 300년 전에 태어난 독일의 대철학자 칸트(Immanuel Kant)의
견해를 들어볼까 합니다.

등산객이 비탈진 등산로에서 아래로 굴러 떨어져서 다쳤다 해도 우리는 산(山) 에게 책임을 물을 수가 없습니다.
이는 단지 중력이라는 과학적 <인과법칙>에 따라 그러한 사고가 발생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윤리적, 도덕적 양심은 어떨까?

과학(법칙)같은 지식적 측면의 이성은 우리 인간이 얼마든지 사유가 가능한 영역입니다.(이론적 접근 가능)
한마디로 과학은 충분히 이성으로 사유가 가능한 대상인 것입니다. ... 하지만 신, 영혼, 자유, 도덕 같은 영역은
유의미 하지만 이성으로 사유(검증)하기에는 불완전, 혹은 불가능 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각자의 양심에 따른
도덕적 행동을 왜 해야만 하는지는 과학적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며, 대신 신과 종교가 과학적 질문을 허용하지 않듯이,
인간의 도덕적 행동에도 그 어떤 질문이나 이유를 묻지 않아야 한다고 칸트는 주장했습니다. ... 한마디로
인간의 도덕적 행동은 그 어떤 이유나 이해 없이 무조건 양심이 시키는 명령에 따라 <"의무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칸트의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칸트는, 과학은 이론적인 이성으로는 접근이 가능했지만 ... 신과 영혼, 도덕 등은
이론적으로는 접근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러한 형이상학적 개념들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이성의 지식적 측면이 아닌,
다른 측면의 이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으며, 인간의 도덕적 행동은 직접적인 <"실천(행동)">으로, 즉
아무 조건을 달지 말고 그냥 <의무적>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리고 칸트는 이렇게 우리 내면에
우리를 도덕적으로 행동(실천)하게 만드는 "의무적인 의식"이 존재한다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실천이성">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까지만 살펴보면, 칸트가 규정한 "도덕"은 너무나 막연한 것 같습니다. ... 또한
<"의무적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부분도 조금은 억지스럽고 이해하기도 힘듭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좀 더 확실히 이해하려면 너무나 유명한 칸트의 발언을 살펴봐야 합니다.

◆ "너의 의지의 준칙이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 타당하도록 행동하라." - 칸트(Immanuel Kant)

인간의 도덕은 지식적인(이론적인) 이성으로는 사유가 불가능 합니다. 그런데 칸트는 이러한
형이상학적(신, 영혼, 도덕 등) 영역을 과감히 이성의 영역 안으로 끌고 들어옵니다. ... 그리고
인간의 도덕(도덕적 행동)에도 과연 과학법칙(중력) 같은 "보편적인 원리"가 있을 수 있겠는가? ~ 를
끊임없이 사유하며 고뇌한 끝에 내 놓은 결론이 바로 위의 원칙입니다.

등산객이 넘어져 산 아래로 굴러 떨어지거나 밤나무에서 밤송이가 떨어지거나 ... 그리고
타자가 친 홈런 볼이 하늘을 향해 힘차게 날아가다가 결국은 외야 관중석으로 떨어지는 것은
모두가 '중력법칙' 이라는 보편적인 과학 원리에 따른 결과인 것입니다. ... 그렇다면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인류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보편적인 도덕의 원리가 있을 수 있을까? ... 여기에 칸트는
<"보편적 도덕법칙(원리)">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칸트의 주장처럼 모든 인간에게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도덕법칙(원리)을
찾아보는 것은 너무나 어렵습니다. ... 예를 들어, 거리에서 구걸하는 걸인에게 천 원짜리 한 장을 건넨 행위를
어떤 이는 매우 도덕적인 행동이라 생각하고 있는 반면, 이와는 반대로 그러한 행위(적선)는 오히려 걸인의 자활의지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별로 좋은 행동이 아니라는 의견도 많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실제 인간사회의 현실에서는
"도덕적 행동"에 대한 기준이 개개인 마다 주관적이며 편차가 있기 때문에 칸트의 주장은 쉽게 받아들이기가
어렵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칸트가 주장한 것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가? ... 그래서 칸트를(칸트의 발언)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기서 한 발짝 더 깊게 들어가서 ... 먼저 법(法)과 선(善)에 대한 그동안의 인식을 전환시켜야 합니다.

꾸준히 사회적 이슈로 많이 거론되고 있는 보복운전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대부분의 구성원(국민)들이 보기에는 보복운전은 분명히
잘못된 행동이라고 얘기할 것입니다. 한마디로 보복운전은 "선(善)한 행동이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공동체는 보복운전을 하게 될 경우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공동체의 보편성이 담긴 법(法)을 만들어
적용하게 됩니다. ... 한마디로 우리는 보복운전을 하지 않는 것이 선(善) 이라는 보편적 시선을 갖기 때문에
이후에 법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선한 판단이 먼저 존재한 후에, 그 뒤를
법이 따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입법원리(법이 만들어지는 과정)는 선한 판단 뒤에 법을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칸트는 우리에게 익숙한 이러한 입법의 원리를 전복시킵니다.

근대철학 이전까지만 해도 신(God)은 그 자체로서 진리였습니다.
때문에 신의 계율(말씀, 명령) 또한 묻고 따지지 말아야 할 엄격한 법(法) 이라고 할 수 있었으며,
그러한 신의 말씀(명령)을 따르는 것은 당연한 선이라 생각했습니다. ... 한마디로 법(신의 계율)이 먼저 존재한 후에,
그것을 따르는 것이(신의 말씀을 따르는 삶) 바로 선(善) 이라는 것입니다. ... 그리고 칸트는 여기서 힌트를 얻어,
인간의 <보편적 도덕법칙>또한 신의 계율처럼 그 자체로서 하나의 법(法)이며, 그것을 지키는 것이 선(善)이라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선한 판단 같은 건 따지지 말자는 거죠. 그냥 (보편적)도덕법칙대로 행동하는 것! ~ 이 자체가
바로 선한 행동(도덕적 행동) 이라는 뜻입니다. 결론적으로 칸트가 주장한 <보편적 도덕법칙>이란
아무 조건도 따지지 말고 <“의무적”>으로 행동해야 하는( ~ 해야만 한다!) 규칙(원칙)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원칙(규칙)에 따라 사는 것이 바로 진정한 선이며, 도덕적 행동 이라고 했습니다.[◆ 의무에 따르는 삶!]

결국 앞의 사례에서 걸인에게 천원을 건넨 행위는 잘했다는 칭찬을 받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칸트의 도덕법칙에 따르면 도덕적 행동은 아닌 것입니다. ... 우리가 그동안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도덕적 행동과 칸트가 생각하는 도덕적 행동과는 괴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 아무튼 마음속 깊은 곳에서
타인을 불쌍하게 생각하는, 즉 동정심이 마구마구 샘솟아 자선을 베풀었다고 해도 칸트는 그것이 아무조건 없이
<“의무적(해야만 한다)”>으로 행동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진정한 도덕적 행동이 아니라고 했던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칸트의 도덕적 행동은 <“천원을 주고 싶다!”>가 아니라 <“천원을 줘야 한다!”>가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 "너의 의지의 준칙이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 타당하도록 행동하라." 라는 칸트(Kant)의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 당신이 하려는 어떤 도덕적인 행동이(의지가) 모든 사람이 보기에
법으로 만들어져도 전혀 이상할 것 없을 정도로 보편성을 내포하고 있다면, 그렇게 행동하라!> ~ 라는 뜻입니다.
좀 더 쉽게 풀어보면, 당신이 지금 하는 행동에 대해서,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똑같이 본인을 따라 해도 괜찮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 행동은 보편성(일반원칙)을 가진 도덕적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거리에서 구걸하는 걸인을 볼 때 마다 나는 그에게 의지박약한 놈이라며 주먹질을 할 것이다!"

이러한 행동을 과연 다른 모든 사람에게 따라하도록 얘기할 수 있을까? ~ 당연히 이것은 칸트가 얘기한
도덕적 행동이 아닐 것입니다. ... 칸트에게 도덕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자 의무>였습니다.
이미 앞에서도 언급했었지만, 모든 인간이 개인의 이기심과 비양심적인 행동만을 추구하게 된다면
종국에는 모두의 자유가 박탈당하게 되는 상황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결국 참된 도덕은 이성에서 나오며,
도덕은 의무적인 법칙으로 규정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럼 정리하는 의미에서 윤리학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조지아 주립대학 로버트 L. 애링턴 교수의
얘기를 들어보겠습니다.

[◆ 동정심이라는 동기는 "도덕적 내용이 부족하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동정심이라는
동기로부터 행위하는 사람은 진정으로 옳은 것을 행하는데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단지 동정심이라는 경향성을 만족시키는데 관심을 쏟을 뿐이다. 그리고 자신이 행하는 바의
도덕성에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는 사람은 분명히 “도덕적 가치”를 갖는 방식으로 행위 하는데
실패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칸트는 오직 의무라는 동기만이 행위에 도덕적 가치를
부여한다고 주장한다. ~ (중략) ~ 칸트는 도덕적 가치가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어떤 사람이
자신의 의무를 행하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무에 따라
행위하는 경우라고(@ 이러한 경우에는 행위의 동기가 오직 의무감뿐이기 때문에) 주장한다.
- 서양 윤리학사. (414~415 페이지)/ 로버트 L. 애링턴/ 서광사 ]

칸트는 개인의 동정심의 성취욕구나 타인을 도와줌으로써 칭찬받고 싶다는 마음 같은 것을
“경향성” 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도덕적 행동은 이러한 경향성이 도덕적 행동의 동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으며, 인간에게 의무적으로 도덕적 행동을 유발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실천하는 능력”>밖에는 없으며 인간의 이성은 이러한 실천 능력에 쉬지 말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앞서 이미 언급했듯이 이러한 이성을 바로 칸트의 <"실천 이성">이라고 합니다.

더불어 도덕(도덕적 행동)이 “의무”라면 그것은 곳 명령이 됩니다.(@ 신의 말씀이 곧 명령인 것처럼)
그래서 칸트의 보편적 도덕원리(법칙)를 <"정언명령(定言命令)">이라고 부르며, 정언 명령은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상관하지 말고 행위 자체가 선이기 때문에 무조건적으로 따라야할
도덕적 명령을 말합니다. ... 이와는 반대로 조건을 달고 행동하는 것을 <"가언명령(假言命令)"> 이라고 하는데,
예를 들면 "칭찬받고 싶다면 거지에게 천원을 주어라!" ... 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동은 결국 목적이 칭찬받는 것이기 때문에 가짜 도덕인 것입니다. 따라서 가언명령이 됩니다.

그래서 ... <"너의 의지의 준칙이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 타당하도록 행동하라."> ~ 라는 명령은
칸트의 대표적인 정언 명령이 되는 것이며, 인간(타인)을 위해 행하는 도덕에는 그 어떤 조건도 달지 말고,
그냥 의무감으로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 그 자체로서 대하라 뜻입니다.
[@ 의무감에서 남을 돕는 행위가 동정심보다는 더 도덕적인 것입니다!]

부동산과 경제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