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26일 화요일

◆ 또 하나의 냉전, 한.미.일 관계와 그 이상의 경계에서 - (3) 국제 정치편 [by. 물파스]

(@ 한일 간 군사정보보호협정을 뜻하는 '지소미아(GSOMIA)' 종료시한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입니다. ~ 한국과 미국은 방위비 분담금 협상에서 치밀한 수싸움을
계속 진행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한국과 미국은 각각 총선과 대선이라는 본격적인 선거모드에
돌입한 상황입니다. ~ 북미간 비핵화 협상 또한 지지부진한 상황입니다.

미국이 왜 그렇게 지소미아 파기에 대해 우려하는지,
미국이 왜 그렇게 황당한 수치의 방위비 분담금을 요구하는지 ... 이에 대한 근본적 이유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 분량이 너무 많아 이야기는 5편으로 나눠서 게시물이 새로
업데이트 될 때마다 한 편씩 올려볼 생각입니다. ~ 아래는 도움 받은 자료와 각 편마다 들어있는
중심내용을 소개한 것입니다.)

<@ 도움 받은 자료들 >

(국제분쟁의 이해/ 조지프 나이/ 한울 출판)
(거대한 체스판/ Z.브레진스키/ 삼인 출판)
(포스트콜로니얼/ 고모리 요이치/ 삼인 출판)
(일본 전후 정치사/ 이시카와 마스미/ 후마니타스 출판)
(결정의 본질/ 그레이엄 앨리슨, 필립 젤리코/ 모던아카이브 출판)
(인간.국가.전쟁/ 케네스 왈츠/ 아카넷 출판)
(냉전의 역사/ 존 루이스 개디스/ 에코리브르 출판)
(미국의 아시아 회귀 전략/ 이용인, 테일러 워시번/ 창비)
(전환시대의 논리/ 리영희/ 창비)
~ 그 외 한국은행, KDI, 국회 등

(1) 경제편 - 일본의 경쟁력과 위기
(2) 국제정치 - 패전국 일본에 대한 GHQ 점령초기 상황
(3) 국제정치 - GHQ 점령기의 일본 신헌법 제정과정과 자민당 탄생과정
(4) 국제정치 - 일본의 대미추종과 자주파 그리고 신(新)미.일안보조약
(5) 국제정치 - 미국의 세계대전략(Grand Strategy)의 변화 과정과 동맹(alliance)의 의미
~~~~~~~~~

1편: 지난 게시물중 <반일 불매운동 근황>이라는 게시물에 올려져 있습니다.
2편: 지난 게시물중 <1991년, 인터넷의 발명과 인터넷 브라우저 전쟁>이라는 게시물에 올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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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하나의 냉전, 한.미.일 관계와 그 이상의 경계에서 - (3) 국제 정치편
- GHQ 점령기의 일본 신헌법 제정과정과 자민당 탄생과정]

일본에 대한 미국 점령정책의 최고 정점은 바로 일본의 새로운 헌법 제정입니다. 정식명칭은
<일본국헌법(日本國憲法)>이라고 하는데, 최근 언론에서 자주 언급되는 <평화헌법>을 말합니다.
제국주의 시대의 비민주적 헌법을 폐기하고 민주주의를 기본원리로 하는 새로운 헌법으로 다시
만들어졌는데, 당시 맥아더는 일본국헌법의 초안을 미군이 작성한 뒤 일본이 (무조건)수용하도록
강력히 요구했습니다.

메이지 유신(1868)은 말 그대로 ‘메이지 천황(Meiji Tenno)’에 의한 일본근대화 개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개혁은 위로부터의 개혁이었지 아래로부터의 개혁, 즉 시민혁명에 의한 개혁이 아니었기
때문에 평범한 국민들의 민주적 권리인 <시민정신>, 다시 말해 시민적 민주법치 정신이 정립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던 개혁이었습니다. ... 때문에 메이지 유신은 천황을 상징하며, 더 넓게는 하나 된
일본(전체)을 의미하는 <덴노(Tenno)> 중심의 부국강병을 이룩하기 위해 철저한 관료통치를
바탕으로 국가변혁을 이끌어낸 과정이었습니다. 따라서 메이지 유신이 일본 근대화를 앞당겼을 때
그 속엔 국수주의적, 전체주의적 요소가 필연적으로 담겨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GHQ 최고사령관 맥아더는 <샌프란시스코 조약> 이전까지 일본의 배상문제가 거론될 때마다
“일본의 구식민지 포기“ 자체가 바로 <거액의 배상과 동일>하다고 말하며 일본에 대한 그 이상의
배상요구에는 반대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 이에 대해 훗날 도쿄대 교수 ‘하라 아키라’는 다음과
같은 평가를 합니다.

“가해자로서의 속죄 의식으로 배상을 지불함으로써 국제 사회로의 복귀를
꾀하기보다는 오히려 배상을 하나의 경제적 기회로 파악하고 그것을 현지에 대한
경제적 진출의 계기로 삼는 의식이 더 강하게 작용 했으며, 이는 일본이 전쟁에 대한
반성이나 책임에 대한 자각을 충분히 행할 기회를 갖지 못한 것이 되었다. 따라서
‘경제적 진출’이라는 이름의, 미국과 결탁한 신식민주의로 전화해 갔던 것이다.“
- (포스트콜로니얼. 125페이지/ 고모리 요이치/ 삼인 출판)

<시민혁명이 부재>한 상태에서 진행된 위로부터의 근대화 개혁(메이지 유신)과 전쟁범죄에 대한
진정성 있는 사과와 반성 및 책임의 기회를 자발적으로 내팽개쳐서 생성된 <자각의식의 부재>는
유사한 속성을 갖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유비(analogy)관계>를 기초로 세워진 국가가 전후 일본의
참모습입니다. 때문에 일본은 잘못을 구분하는 능력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반성과 책임의식 모두에서
주체성을 상실하였으며, 오직 타국(미국)이 설정한 방향을 관습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에만 익숙해진
상태입니다. ... 결국 <시민혁명의 부재>와 <자각의식의 부재>라는 <유비(analogy)관계>는 일본의
통합의 상징이자 신앙적 의미로까지 확장되는 <천황(덴노)>과 더해지면서 바로 일본만의 고유의
<레종 데타(raison d’État)>를 생성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 국민들에게는 천황은 일본이라는 국가(전체) 그 자체이자 태양신의 자손이므로 <신화적>
의미로도 받아들여집니다. 따라서 <만세일계>의 왕, 즉 “천황폐하 만세”를 부르짖으며 전쟁터에서
죽는 것은 개인의 영광차원을 넘어서는 신과의 영적 결합이자 신성한 접촉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제국주의시절 일본 헌법에 녹아들어있던 덴노(천황)의 신화는 국가이데올로기인 동시에 국가이성,
즉 <레종데타>의 가장 대표되는 상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때문에 이러한 비민주적, 신화적
요소를 제거한 <일본국헌법(日本國憲法)> 제정에 맥아더가 적극적으로 관여하려 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입니다.
[@ 만세일계(萬世一系): 천황의 혈통이 2천년 이상 단 한 번도 단절된 적 없이 계속해서 이어져
왔다는 의미로, 천황제 국가 일본의 ‘국가이데올로기’의 근간을 이루는 대표적인 상징이자 요소.]

1946년 2월 13일 오전 10시, 외무대신 관저에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 외무대신 요시다 시게루,
헌법문제조사위원장 마쓰모토 박사, GHQ소속 휘트니 민정국장 ~ 이어서 휘트니 장군이 말합니다.

<“지난번 당신들이 제출한 헌법개정안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문서라고 보기에는
맥아더 최고사령관께서 전혀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최고사령관께서는 우리가 가져온
GHQ 헌법 초안을 당신들에게 전달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최고사령관께서 이 문서를
제시하게 된 진의와 이유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 지금 맥아더 최고사령관에게
천황을 전범 취급해야 한다는 외국의 압력이 계속해서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최고사령관께서는 천황을 지켜주기로 결심하셨습니다. 물론 최고사령관의 힘이
전지전능할 수는 없습니다. ~ 다만 우리가 만든 헌법 초안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천황제는 계속 유지될 것이며, 일본이 GHQ 관리에서 하루빨리 벗어나 독립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울 것입니다. 또한 일본 국민들에게도 기본적 자유와 권리가
주어질 것입니다.“ - (일본국헌법 제정과정. / 다카야나기) >

휘트니 장군은 만약 일본 정부가 GHQ의 헌법 초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천황이 전범으로
처형될 수 있으며 요시다 외상을 비롯한 정부의 핵심 각료 상당수가 권력에서 밀려날 것이라고
협박에 가까운 통보를 했습니다. ... 그리고 결국 일본은 GHQ 측과 협의하여 ‘일본국헌법’ 초안을
마무리 하게 됩니다. ... 이쯤 되면 점령기 일본은 미국의 간접통치가 아니라 직접통치를 받았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참고로 당시 외무대신으로 GHQ의 헌법초안을 받아들였던
요시다 시게루는 그해(1946년) 5월 일본 수상이 됩니다. 이후 요시다는 국회에서 헌법 심의를 거쳐
같은 해 11월 헌법을 공포했고, 다음해인 1947년 5월 수상에서 사임합니다. ... 결론적으로 제1차
요시다 내각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오직 GHQ 헌법 시행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참고: 맥아더 최고사령관은 GHQ 헌법 초안에 세 가지 핵심 내용이 반드시 담겨져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 첫 번째는 <(1) 천황의 신화적 요소제거>입니다. ... 1946년 1월 1일, 일본천황은
조서(詔書.왕이 국민에게 알리는 문서)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얘기를 합니다.

“짐과 국민 여러분 사이의 유대는 시종일관 상호 신뢰와 경애로 맺어진 것으로,
단지 신화와 전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천황을 마치 ‘현존하는 신’으로 간주하고
일본 국민을 다른 민족보다 우월한 민족으로 여김으로써 결국 세계를 지배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지고 있다는 허망한 관념에 근거한 것 또한 아닙니다.“
- (일본 전후 정치사. 49페이지/ 이시카와 마스미)

소위 <천황의 인간선언> 이라고 부르는 이 선언에서, 일본국민들에게 천황은 이제 ‘신격(神格)’이
부정된, 자신들과 동등한 <인간의 지위>로 내려앉게 됩니다. ... 이는 전쟁에서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며 죽음을 불사하던 일본 고유의 사상의 근원(국가이데올로기)이 한순간에 사라져버린, 그래서
일본 국민들에게는 더더욱 충격적인 순간이었습니다. ~ 신헌법 이후 이제 일본에서 천황의 존재는
신화가 아닌, 더불어 정치적 권능이 모두 제거된 단순한 <상징>으로만 남게 됩니다.

맥아더가 원했던 GHQ 헌법 초안의 두 번째 핵심내용은 <(2) 전쟁의 폐기>입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일본에서 천황의 존재는 신성의 영역이자 <국가전체>, 그리고 일본 고유의
‘레종데타’의 의미가 있습니다. 때문에 일본 국민 개개인은 <천황이 다스리는 나라> 안에서만
그 존재이유가 설명됩니다. 이것은 결국 일본에서 천황이라는 존재가 사라지지 않는 이상 국민들은
언제나 ‘국가’라는 <전체>에 함몰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입니다. ... 더욱이 이러한
<덴노(Tenno.천황)> 중심의 사상적 기반에 더해 “육군.해군에 대한 군사통수권을 천황이 가진다.”는
<메이지 헌법 제11조(구 일본제국헌법)>의 규정은 일본 내부에 <전체주의의 상시부활가능성>이
영구적으로 내재되어 있다는 걸 의미했습니다. ... 그리고 맥아더는 이것이 꽤나 신경 쓰였고,
천황을 전범으로 처형하라는 주변 국가들의 압력까지 계속해서 더해지자 천황을 상징으로만
남겨두는 대신 일본을 <군비(군대)없는 국가>로 만들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 (@ 천황제를
상징으로라도 존치시킨다면, 일본국민들이 큰 저항 없이 점령정책도 한결 수월해질 것이고, 대신
‘군대 없는 국가’를 신헌법 안에 못 박아 둠으로써 주변국들의 불만도 함께 잠재울 수 있었습니다.)
일본을 두 번 다시 전쟁을 일으킬 수 없는 국가로 만들기 위해 맥아더는 신헌법을 통해 아예
처음부터 싹을 잘라버리려고 했던 거죠. ... 나머지 맥아더가 원했던 세 번째 헌법초안 내용은
<(3) 봉건제 폐기> 였습니다.

한 나라의 헌법을 들여다보겠다는 것은 그 나라의 ‘정신’을 보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일본 헌법(평화헌법)에는 ‘일본의 정신’ 이라기보다는 <미국의 의지>가 상당부분 깃들여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1947년 4월, 일본은 새로운 헌법(일본국헌법)체제하에서 총선거를 실시합니다. ... 선거 결과는
당시 ‘가타야마 데쓰’가 이끌던 일본 사회당이 제1당이 되고, <가타야마 데쓰>는 일본의 제46대
수상이 됩니다. ... 패전 후, 전 국민이 생활고에 시달리던 상황이었으니 사회당으로 국민들 지지가
쏠렸던 것은 그나마 이해가 가는데, 이해하기 힘든 점은 ‘맥아더가 왜 사회당 정권을 허용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 더구나 그때는 미국과 소련의 대립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던, 그야말로 냉전의
초입에 해당하던 시기였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맥아더가 남부침례교회의장 뉴턴박사에게 보낸
편지 내용을 살펴봄으로써 나름의 추측을 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본인의 정신생활은 전쟁으로 공백상태가 되어 있으므로 지금이 일본에게 포교할
절호의 기회입니다. ~ (중략) ~ 가타야마가 일본 수상이 된 것은 정치적인 의미 못지않게
정신적인 의미에서 중요한 일입니다. 역사상 실로 처음으로 일본은 전 생애를 기독교인으로
살아온 지도자를 모시게 된 것입니다. 국제적으로 보아도 이는 의미 있는 일입니다. 동양의
3대 강국인 중국의 장제스, 필리핀의 로하스, 일본의 가타야마 데쓰 ... 이들 3명 모두가
기독교인입니다.“ - (맥아더 서간집 / 아유카와 구니히코) >

전후 일본의 신헌법(일본국헌법) 체제하에서 처음으로 탄생한 정권이 바로 사회주의 계열의
<가타야마 내각> 이었습니다. ... 일본에서 천황이라는 존재가 중력의 힘으로 작용하고 있을 때,
그 힘을 모두 제거하고 하나의 상징으로만 남겨둔 맥아더가 ‘천황’이라는 사상의 공백을 오롯이
기독교 정신으로 채우려는 목적에서 사회당 정권의 탄생배경을 추론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이 이유 하나 때문에 사회당 정권이 가능했다고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당시 GHQ 내부에는
일본의 비군사화와 민주화 및 노동개혁을 추진했던 소위 <민정국(GS:Government Section)>이라는
진보그룹(사회주의 성향)이 존재했었는데, 가타야마 내각이 바로 이 <민정국(GS)>의 지지를 많이
받았다는 점도 사회당 정권 탄생의 주요한 요인이었습니다. ... 하지만 전후 국제질서가 본격적인
미.소 냉전체제로 접어들자 GHQ 점령정책 또한 반공정책 위주로 재편됐고 민정국(GS) 또한 점차
힘을 잃어가게 됩니다. 이후 가타야마 내각은 극좌 성향의 히라노 농림부대신 임명 문제로 GHQ와
갈등을 겪다가 아이러니 하게도 자신들을 지지했던 민정국(GS)에 의해 타격을 받고 붕괴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정보 하나를 포착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미국’에 소속된 공동체
구성원들의 이념적 스탠스는 오직 자국(미국) 안에서만 그 의미가 부여될 뿐, 외부(다른 국가)의
시선에서 그들의 성향이 무엇인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우리들 중 누구라도
자신이 미국의 주변부에 속해있다면, 미국을 바라볼 때는 미국의 정신이 아닌 오직 <미국의 이익>의
관점으로 사태를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이는 이 글을 관통하는 <레종 데타(raison d’État)>의
시선과도 궤를 같이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앞서 보셨듯이 미국(GHQ)의 일본 점령정책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내용은 바로 <일본의 비군사화>
입니다. ... 일본을 더 이상 미국에 위협이 되지 않는 국가로 만들기 위해 <군대(군비) 없는 일본>을
‘일본국헌법(신헌법)’에까지 명문화하여 미국의 의지를 철저히 각인시켰던 것입니다. ... 이에 따라
미국은 점령기 초에 일본에 매우 강력한 경제제재조치를 취합니다. 한 나라 군사력의 근간은 결국
돈(경제)이 좌우하기 때문에 미국은 일본 경제의 기초라고 할 수 있는 공업시설을 먼저 파괴했고
재건 또한 불허하는 방침을 세웠습니다. 더불어 일본인의 생활수준은 그들이 침략한 아시아 국가들
수준보다 높지 않도록 한다는 것이 당시 미국(GHQ)의 일본에 대한 기본적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1948년부터 미국의 점령정책에 큰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미국과 소련의 대립, 즉 본격적인
냉전체제의 시작은 독일(서독)과 일본을 다시 공업국가로 부활시켜 소련에 대항할 수 있는 반공의
보루로 활용해야 한다는 쪽으로 미국의 세계전략을 바꾸게 만들었습니다.

<“국방성 초대장관인 제임스 포레스탈(James Forrestal)은 소련에 대항하려면
구 적국을 포함해서 모든 리더들이 가진 방법을 최대한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일본과 독일에게 한 번 더 임무를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 (중략) ~ 후버 전 대통령은
1947년 5월, 일본이나 독일이야말로 서구문명의 최전선이고 일본은 공산주의 행진에
대항하는 진정한 이데올로기 방파제라고 역설하였다.“ - (냉전과 미일관계/ 이시이 오사무)>

GHQ 점령 초기인 1946년 일본의 경제규모는 (1930년 ~ 1934년의) 18% 수준으로 추락했고,
1947년에 간신히 40% 수준까지 올라왔지만, 여전히 일본은 물자부족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국 NSC(국가안보회의)가 만든 <미국의 대일정책에 관한 권고(NSC13-2)>라는
정책문서가 1946년 10월 정식으로 승인됨으로써 일본경제는 다시 부흥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당시 트루먼 대통령은 디트로이트 은행 총재인 조셉 닷지(Joseph Dodge)에게 일본의 경제 부흥을
요청했고 닷지는 일본으로 건너가 곧바로 일본의 경제부흥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일본 군사력, 경제력 해체와 정치 민주화> or <소련 대항마 역할을 위한 일본 공업(경제)부활>

과연 어느 쪽이 미국에 더 이익인가? ~ 미국의 선택은 단순하고 깔끔하고 명쾌하기까지 했습니다.
개인(기업)이든, 국가든 기존의 정책(점령정책)을 180도 전환한다는 건(그것도 상당히 신속하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미국의 정책 전환에는 일본의 경제부흥뿐만 아니라 사람에 대한 인식도
바꿔놓게 됩니다. 바로 전범(戰犯)에 대한 필요성이었습니다. 그래서 군대와 행정 경험이 풍부했던
고위급 전범들이 줄줄이 석방되었고 상당수는 정계에 복귀하게 되는데 ... 그중 가장 유명했던
인물(전범)이 바로 현 일본 총리 아베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입니다. [@ 패전 직후인 1945년
9월 11일 A급 전범으로 체포되어 스가모 형무소에 갇혀있던 ‘기시 노부스케’는 옥중 서신에서 향후
냉전의 시작과 그로인한 미국의 일본 활용 및 공업부흥 등의 정책전환과 전범들의 석방 가능성
까지를 모두 예측합니다. ‘쇼와시대 요괴’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당시 일본에는 기시 노부스케만큼
국제정치에 탁월한 혜안을 가진 인물은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미국의 급격한 정책변경은 당시 일본을 쥐락펴락하던 맥아더의 점령정책(특히 일본군사력 해체)이
완전히 부정당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 때문에 당연히 맥아더 vs 트루먼 대통령 및 국방성
간에 상당한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일본에 대한 GHQ의 점령을 서둘러 끝내고 평화조약을 맺어 연합군 총사령부를
해체해야 한다. ~ (중략) ~ 제1단계, 일본의 비군사화는 이미 종료되었다. 제2단계,
정치에서 GHQ 지배는 끝나가고 있다. 제3단계, 일본 경제는 점령군이 처리할 수 없는
문제다.“ - (1947년 3월 18일 아사히신문. 맥아더 기자회견) >

당시 맥아더는 일본 점령을 서둘러 끝내려고 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원래 GHQ의 가장 큰 목표는
<일본의 비군사화>였기 때문에 ... 그 목적만 달성된다면 계속 돈을 써가며 더 이상 일본에 머물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던 차에 한국전쟁(6.25)이 발발합니다. ... 일본의 재군비를
가장 크게 반대했던 맥아더에게 <현실로 다가온 공산주의 위협(한국전쟁6.25)>은 더 이상 일본의
재군비 반대를 주장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 결국 1950년 7월 8일(한국 전쟁 발발 13일째),
맥아더는 요시다 수상에게 서간(편지)의 형식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통보합니다.

<“일본 정부에게, 정부 직속의 국가경찰예비대 7만 5천명과
해상보안청 요원 8천명을 증원할 권한을 부여한다.“ – GHQ 총사령관 맥아더>

국가경찰예비대와 해상보안청요원의 증원은, 한국전쟁으로 주일미군이 한반도에 파견됨에 따라
일본 국내 치안공백을 우려한 필연적 조치였던 것입니다. 참고로 당시 국가경찰예비대 7만 5천명은
한국전쟁에 파견된 주일미군 숫자와 거의 비슷한 규모였으며 ... ‘국가경찰예비대’는 이후 일본의
<자위대>로 거듭나게 됩니다. 그런데 당시 요시다 수상은 일본의 재군비에 상당히 소극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 앞서도 언급했지만, 요시다 (경제)노선의 핵심은 <경무장, 플러스경제성장>, 즉 일본의
안보는 전적으로 미국에게 맡김으로써 대폭적으로 줄어든 군비를 오직 일본 경제성장(민간투자)에
투입하여 하루빨리 일본 경제를 재건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그런데 만약 미국의 요구대로 일본이
재군비를 강행하게 된다면 일본 경제는 과부하에 걸려 붕괴할 것이며, 이는 아시아에서 공산주의
진영에게 일종의 기회(공산이념 확장)로 이어지게 될 것이라 요시다는 주장했습니다.

1951년 1월(한국전쟁 발발 7개월째),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평화조약)을 위해 미일간 사전교섭이
있었는데 이때 미 국무성 정책고문 존 덜레스가 일본을 방문합니다. 덜레스는 요시다와의 회담에서
일본의 재군비에 적극 협조할 것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둘은 합의점을 찾지 못했고, 결국 당시
요시다가 가장 많이 의지했던 맥아더의 도움으로 일본의 재군비 논의는 잠시 수그러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맥아더는 한국전쟁과 관련해 트루먼 대통령과의 의견차이로 1951년 4월 11일 파면을
당하고, 이로써 요시다는 자신의 든든한 후원자를 잃게 됩니다.
[@ 존 포스터 덜레스(John Foster Dulles): 미국 국무성 고문.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미일 안보
조약을 기획하였습니다. 1950년대 내내 미일 교섭에서 강경한 입장을 고수함으로써 일본입장에서는
상대하기에 매우 까다로웠던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요시다의 모든 염려는 기우에 불과했다는 것이 한국전쟁에 의해 증명됩니다.
점령정책에 의해 파괴 계획이 있었던 850여개에 달하는 일본 공업시설의 철거가 중지되었고,
무기생산 금지령이 해제됩니다. 또한 점령 초기 상당히 심각했던 일본의 식량사정은(1일 1인 1홉)
‘한국전쟁’이라는 전쟁특수 덕분에 상당부분 개선되었고, 특히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일본의 배상은
공업시설, 기계류 등의 현물 배상 방식에서 ~ 일본의 공업시설을 우선적으로 지원.복구하여 거기서
생산되는 상품과 일본인의 용역 등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바뀌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배상
방식은 모두 미국의 계획과 의지가 충분히 반영된 결과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 ‘공산주의 방파제’
라는 막중한 임무가 부여된 일본이 만약 피침(被侵) 국가들에 대해 직접적인 현물 배상을 했다면
일본의 (경제)재건은 상당히 늦어지거나 다른 아시아 국가들 수준에서 그냥 멈춰버렸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 아무튼 미국의 의도대로 진행된 일본의 배상 방식은 ‘배상’이 아닌, <경제협력>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아시아 전역에 일본의 공업 생산품과 용역이 제공되는 횟수가 서서히 증가하면서
아시아는 시나브로 일본 경제의 상품시장으로 변모해갔던 것입니다. ... 더불어 한국전쟁(6.25)으로
미군의 병참기지 역할이 일본에 주어지면서 일본은 그야말로 엄청난 ‘전쟁특수’를 누리게 되는데,
당시 일본 전체 외화수입에서 한국전쟁특수가 차지했던 비중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제2차 세계대전이후, 반세기 이상을 일본의 상품과 용역, 그리고 교육과 문화에 장악된 아시아
국가들에게(특히 전후세대) ‘친일 의식’은 당연한 현상이거나 구조적 수순이 아니었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아시아 국가들의 상처위에 ‘친일 의식’이 무의식으로 자연스럽게 덧발라져
있어 지금까지 새살이 돋을 자리를 지속적으로 무의식(친일)이 채우고 있었던 것이라 생각됩니다.]

[◆ 일본의 한국전쟁특수 수입 - (일본 외무성 조사보고서)]
@ 1950년 – 외화수입(1억 4,800만 달러), 외화수입 중 한국전쟁 특수비율(14.8%)
@ 1951년 – 외화수입(5억 9,100만 달러), 외화수입 중 한국전쟁 특수비율(26.4%)
@ 1952년 – 외화수입(8억 2,400만 달러), 외화수입 중 한국전쟁 특수비율(36.8%)
@ 1953년 – 외화수입(8억 900만 달러), 외화수입 중 한국전쟁 특수비율(38.1%)

보시다시피 한국전쟁 기간 동안, 일본은 자신들의 전체 외화수입 중 3분의 1을 상회하는 수입을
모두 한국 전쟁을 통해 얻습니다. 더불어 일본의 광공업 생산은 한국전쟁특수 덕분에 전전 수준을
훨씬 더 뛰어넘게 됩니다. ... 맥아더 파면이후, GHQ 제2대 총사령관으로 부임한 ‘매튜 리지웨이’는
전범들의 공직 추방령을 완화하여 대략 25만여 명의 정치인 및 군장교들이 다시 현직으로 복귀하게
됩니다. 특히 하토야마 이치로, 이시바시 탄잔, 기시 노부스케 같은 거물급 정치인들이 다시 정계에
복귀하였고 ... 1952년 10월 GHQ의 일본 점령이 끝나고 나서 치른 첫 총선거에서 중의원 의석의
42%를 추방 해제자들이 차지하게 됩니다.
[@ 매튜 리지웨이(Matthew Ridgway. 1895~1993): 미국 육군 출신, 맥아더 후임으로 GHQ 제2대
총사령관으로 부임함. 한국전쟁에서 중공군을 북쪽으로 밀어내고 유엔군 구출과 남한을 성공적으로
방어함.]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1951년 9월 8일)으로 전쟁 상태를 종결함과 동시에 GHQ의 점령에서도
벗어나게 된 일본은 당시 강화조약(평화조약) 외에 <미일 안보조약>도 함께 체결합니다. 여기에
<경무장, 플러스경제성장>을 외쳤던 요시다 시게루가 1954년 12월까지 장기집권 함으로써 일본의
대미추종노선은 더욱 공고해졌습니다. ... <미일 안보조약>은 일본 입장에서는 상당히 불평등한
조약이었습니다. 당시 일본 국민들 상당수는 ‘미일 안보조약’에 의해 앞으로 미국이 항상 일본을
지켜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1960년 조약을 개정하기 전까지 <미일 안보조약>에는
미국이 일본을 방위해야할 그 어떤 의무조항도 없었습니다. ... “내란이나 작은 국내적 소요사태가
벌어졌을 때 일본 정부의 요청이 있다면 미군이 개입할 수 있다.“ 정도의 안보조약 이었던 것입니다.
반면 미국은 이 조약으로 원하는 규모의 군대, 원하는 기간 동안 일본 전국 어느 곳에서도 자유롭게
미군을 주둔시킬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되었고, 미군과 군속 및 미군 가족의 일본 국내 범죄에
대한 재판권까지 갖게 됩니다. ... 강화조약으로 일본은 분명 GHQ 점령체제에서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치외법권을 가진 미국의 군대가 자신들 마음대로, 자유롭게 일본영토 내에 주둔권리를
갖는다는 건 <미일 안보조약>의 불평등성을 그대로 증명하는 것이었습니다. ... 다만 공산진영의
팽창위협이 한국전쟁이라는 직접적 현실로 다가왔기 때문에 일본 점령이 끝났음에도 미국에게는
일본 내 미군기지(점령군이 아닌 ‘주일미군’) 필요성이 절실했던 것입니다.

미일 안보조약 체결당시 미국 측 서명자는 애치슨 국무장관, 덜레스 국무성고문, 와일리 상원의원,
브리짓스 상원의원으로 4명 이었던 반면, 일본은 ‘요시다 시게루’라는 절대적 대미추종자 단독으로
미국과 안보조약을 체결합니다. 때문에 미일 안보조약의 ‘불평등성’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 이후 미일 안보조약은 아베 현 일본 총리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가 총리로
재임하고 있던 시기인 1960년 1월에 개정되었고, 이때 개정된 미일 안보조약이 현재까지 계속해서
이어져오게 됩니다. 참고로 개정 전 요시다의 안보조약을 <구(舊)미일안보조약>, 개정된 안보조약을
<신(新)미일안보조약>이라고 부르는데 ... 개정된 <신(新)미일안보조약>은 당시 일본 열도 전체를
흔들어 놓는 대형사건이 됩니다.(@ 이 부분은 뒤에서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절대적 대미추종자 <요시다 시게루>는 전후 일본체제를 이해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요시다 이외에도 일본 현대사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이 몇 명 더 있는데, 대표적
인물이 바로 <하토야마 이치로(52.53.54대 총리역임)>와 <기시 노부스케(56.57대 총리역임)>입니다.

GHQ 제2대 총사령관 ‘매튜 리지웨이’의 공직 추방령 해제로 다시 정계에 복귀한 거물급 정치인
<하토야마 이치로(이하 ‘하토야마’)>는 ... 자유당이 1946년 총선거에서 제1당이 되었을 때 ‘총재’
자리에 있었던 인물입니다. 그러나 GHQ의 추방 조치로 ‘요시다 시게루’에게 총재 자리를 양보하고
물러났는데, 이후 추방령이 해제될 즈음 그동안 요시다의 굴욕적 대미추종을 지켜보았던 하토야마는
GHQ 점령체제를 벗어난 일본에게 이제는 새로운 정치체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신당’ 창당을
결심하게 됩니다. ... 하지만 하토야마가 뇌출혈로 쓰러지자 그와 뜻을 함께 했던 측근들은 일단은
신당 창당을 잠시 뒤로 미루고 자유당으로 복귀해 당내에서 반(反)요시다 운동에 전념하는 쪽으로
계획을 수정하게 됩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이후 1952년 최초의 선거가 있었고, 불과 200여일 후인 1953년에 일본은
또 다시 선거를 치릅니다. ... 이 기간 동안 자유당은 <요시다 진영 vs 하토야마 진영>간의 정쟁으로
시간을 다 보내다가 결국 1953년 4월 19일 총선거에서 과반에 못 미치는 202석을 얻고 참패하게
됩니다. ‘진보는 분열로 망하고 보수는 부패로 망한다’는 말과는 반대로 당시 보수진영(자유당)의
선거 참패원인은 바로 자유당 당내의 내부분열이었던 것입니다. 반면 좌파진영은 크게 약진했는데,
대표적으로 좌파사회당의 의석수는 72석으로 이전의 56석보다 16석이 늘어났으며 이는 1951년의
16석에 비하면 1953년의 좌파사회당의 의석수는 무려 4.5배가 늘어난 수치입니다. ... 여기에 다른
좌파진영 수치를 살펴보면 ~ 우파 사회당이 6석 증가로 66석 확보, 노동당 1석 증가로 5석 확보,
의석이 없던 공산당도 1석을 확보합니다.

1953년 선거의 최고 쟁점은 바로 <일본의 재무장(재군비)> 이었습니다. ... 하토야마 진영은
헌법 9조를 개정해 정상 군대를 가져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던 반면, 요시다 진영은 헌법은
그대로 유지한 채 “전투력(戰鬪力) 없는 군대” 라는 모호한 구호를 외치면서 당장은 아니지만
점진적으로 재무장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 앞서도 얘기했지만 요시다 입장에서는
일본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는 재무장이 아니라 “경제성장”이었습니다. (@경무장, 플러스경제성장)

이에 대해 좌파 사회당은 <보안대(경찰예비대)>를 아예 ‘해산’하는 쪽으로, 우파 사회당은 보안대
‘축소’를 주장하며 좌우 양 사회당 간에 입장차이가 있었지만, 큰 틀에서 보면 좌파진영은 재무장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합니다. ... 결국 선거결과가 말해주듯이 당시 일본 국민들 머릿속에는 패전 후
인내와 고통의 시간을 힘들게 보내고 있는데 다시 청춘들에게 총을 들게 한다는 것에 상당한 정서적
거부감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일본 사회당: 일본의 대표적 좌파 정당으로 점진적 사회주의와 중립외교를 주장했습니다.
전후 농민.노동자 운동으로 활약했던 니시오, 미즈타니, 히라노 등 3명을 중심으로 만들어졌으며,
<사회당>이라는 공식 당명이 결정되기까지 ... 좌파 색채가 강했던 ‘일본 노동당’, 우파 색채가
강했던 ‘사회대중당’ 여기에 사민(사회민주주의) 계열 등이 혼재되어 주도권 경쟁이 치열했습니다.
이후 일본 사회당은 좌파와 우파로 분열됐고, 1955년 다시 통합하게 됩니다. (1996년 사회당의
당명은 ‘사민당’으로 개칭됩니다.)]

요시다의 자유당은 총선거에서 과반의석을 확보하지 못했지만 여전히 제1당이었습니다. 하지만
소수여당이었기 때문에 총선 이후에는 야당과의 접촉을 적극적으로 시도하며 지속적인 세 불리기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보안대를 자위대로 재편해 외부의 직접적인 침략에 대비한다.“>는
내용으로 당시 제2당 이었던 ‘개진당’과 합의를 이끌어 냅니다. 여기에 일본의 재무장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하토야마 진영을 설득하기 위해 요시다 진영은 당내에 <헌법개정조사회>를 설치하는
조건을 내세워 이들을 다시 요시다 진영으로 합류(복귀)시키는데 성공합니다. (@ 하토야마 진영의
일부는 복귀를 거부함. 8명)

1953년 총선거 이후 ... 요시다의 세 불리기 노력에도 불구하고 보수진영의 분열은 계속됩니다.
그러나 정책에 대해서만은 보수 간의 특별한 대립은 없었습니다. ~ ‘전력.석탄 사업의 파업규제법’,
‘교육2법(일본 교원노조 활동제한법)’, ‘경찰법 개정(국가의 경찰 감독권 강화)’, ‘방위청 설치법 및
자위대 법‘ 등은 좌파 진영(좌우 사회당)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보수진영이 모두 합심하여
통과시킨 법안들이었습니다. ... 그러다가 <조선(造船) 비리 의혹 사건>이라는 보수 분열의 결정적인
사건이 터져버립니다.

<조선(造船) 비리 의혹 사건>은 ... 해운 및 조선업 관계자들이 더 많은 융자를 할당받기 위해,
그리고 이자에 대한 더 많은 국가보조를 받기 위해 해운업 입법과정에서 보수 정계에 뇌물을 준
사건이었습니다. ... 이 사건으로 당시 미쓰비시 조선의 사장이자 일본 조선공업 협회 회장이었던
니와 가네오 및 도코 도시오(이시카와지마 중공 사장) 부회장 등 71명이 체포 됩니다.

1954년 4월 20일, 대검 수뇌부는 뇌물 수령의 핵심 용의자였던 자유당 간사장(한국의 원내대표격)
‘사토 에이사쿠(요시다 진영)’ 체포를 중의원에 요구했으나 요시다 총리, 오가타 부총리 등의 의중에
따라 당시 법무상(한국의 법무부 장관격) ‘이누카이 다케루’는 검찰청 법 14조에 의거해 검찰총장에
대한 지도권을 발동해 간사장 사토 에이사쿠의 체포를 저지합니다.(@ 다음날 이누카이는 사직함)
결국 꼬리보다 못한 17명만이 유죄판결을 받음으로써 모든 수사는 유야무야로 종결되어 버립니다.
[@ 일본의 양원제(兩院制): 입법부가 두 개의 의회로 구성된 제도. 대표적 양원제 국가는 미국이며
각주를 대표하는 상원(United States Senate)과 미국 국민 전체를 대표하는 하원(United States
House of Representatives)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일본의 참의원(參議院)은 미국의 상원에 해당하며
중의원은 미국의 하원에 해당합니다. 반면 하나의 의회로 국회를 구성하는 것을 단원제(單院制)라
하며 한국은 단원제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참고- 다음백과)]

언제 터져도 이상할 게 없었던 당시 보수분열의 에너지는 <조선(造船) 비리 사건>으로 더 크게
증폭되었고 이는 자유당에 대한 내각불신임으로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요시다의 자유당은
내각불신임안에 대해 일단은 거부권을 행사합니다. 그러다 결국 1954년 11월, 요시다 내각 타도를
외치며 제2당이었던 개진당의 거의 모든 의원 69명과 1953년 총선 이후 요시다 진영에 합류했던
하토야마 진영의 43명, 합류하지 않았던 8명 등 총 120명의 의원이 모여 <민주당(일본 민주당)>
이라는 새로운 정당을 결성하게 됩니다. 이후 민주당과 좌우 양 사회당은 공동으로 요시다 내각의
불신임안을 제출합니다.(총 253명) ~ 결국 요시다 내각은 6년 2개월(1차 내각 포함하면 7년 2개월)
이라는 장기 집권을 끝내고 물러나게 됩니다.

1954년 12월 10일 ... 요시다 내각이 물러난 자리에 <제1차 하토야마 내각(민주당)>이 들어섭니다.
그전에 하토야마를 주축으로 한 민주당은 120명이라는 소수당의 한계 때문에 불가피하게 좌우 양
사회당과 협치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요시다 라인인 ‘오가타(이전 부총리)’에게
총리 자리를 내어줄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듬해인 1955년 3월에 총선거를 실시하겠다는
사회당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하토야마는 (좌우)사회당의 지지를 받고 총리가 됩니다. 또한
1954년 12월 10일 총리가 된 하토야마에게 1955년 3월까지는(실제 총선거는 2월 27일) 불과 3개월
남짓한 기간이었기 때문에 제1차 하토야마 내각은 ‘선거관리용 내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간 동안 일본 전역에 <하토야마 붐>이 일어납니다. ... 요시다의 장기집권 및 부패에
대한 국민적 피로감이 일종의 반사효과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토야마 붐’은 좌파진영의 약진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었습니다. ... 1953년 선거 때부터 힘차게
도약하며 ‘과반의석 확보’와 함께 <사회당 정권수립>이라는 원대한 목표를 가졌던 좌파진영 앞에
예상치 못한 ‘하토야마 붐’이라는 변수가 나타난 것입니다. ... 이러한 ‘하토야마 붐’은 좌파진영에
위기감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당시 좌우로 갈라서있던 사회당의 통합을 자극하게 됩니다.

하토야마는 1953년 선거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 선거에서도 <헌법 9조 개정 및 자위군 창설>을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반면 (좌우)사회당은 <평화헌법 옹호>를 주장했는데, 결국 1955년 선거의
최고 쟁점 또한 <일본의 재무장>이었던 것입니다.

1955년 2월 27일 총선거 결과, 하토야마 민주당은 185석을 확보해 제1당이 되었지만 과반의석인
234석엔 턱없이 부족한 결과였습니다. 여기에 자유당은(요시다 진영) 114석을 얻어 민주당과 자유당,
즉 보수진영의 합계의석은 총 299석이 되었는데, ‘하토야마 붐’에도 불구하고 이런 결과는 보수진영
전체적으로 보면 1953년 총선거 당시의 314석에 비해 15석이나 감소된 수치였습니다. ... 더불어
줄어든 보수진영의 의석수는 모두 좌파 사회당이 가져갔으며 ... (좌우)사회당, 노동당, 공산당 등의
의석을 모두 합하면 헌법 개정 저지에 필요했던 1/3의 의석을 좌파진영이 확보하게 된 것입니다.

1955년 총선거이후 시작된 <제2차 하토야마 내각>은 제1차 내각 당시보다 의석수는 늘어났지만
여전히 소수여당의(민주당) 한계에 갇혀 있는 상태였습니다. ... 우선 요시다 진영인 자유당의 공세를
감당해야 했으며, 선거 때마다 존재감을 보여주었던 사회당(특히 좌파 사회당)이 가을에 통합까지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 상황이 이쯤 되니 재계에서 먼저 불안 섞인 불만을 표출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일경련(일본경영자단체연맹)> 및 <경제동우회(재계 인사들의 개인자격으로만 가입가능)>
같은 단체들은 보수 정치권에 대해 다음과 같은 얘기를 합니다.

“선거 때마다 좌파진영의 약진이 두드러지고,
더구나 좌우 사회당은 통합까지 계획하고 있다는데
보수진영은 언제까지 분열과 갈등만 반복하고 있을 겁니까!“

재계의 불만은 결국 사회당 통합에 대한 ‘불안’이었고 <보수합동(통합)>을 요구하는 단계로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실제 당시 경제동우회는 “신속한 보수합동을 실현하라” 라는 내용의 결의를
채택합니다.) ... 또한 미국입장에서도 공산주의 확산을 막는 방파제 일본에 사회당 정권의 수립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공산진영과 대결을 하자면 일본의 보수는 분열이
아니라 하나로 결집해 미국을 도와야 했던 것이죠. 그래서 일본의 보수합동이 성사되기 3개월 전,
미국의 국무장관 덜레스는 당시 민주당 간사장이었던 ‘기시 노부스케(아베총리 외조부)’를 만나
다음과 같은 얘기를 전합니다.

“만일 일본의 보수정당이 하나로 뭉쳐 미국이 주도하는
공산주의자와의 대결에 참여한다면 경제적 지원을 할 수도 있습니다.“ - (CIA 비망록)

결국 좌우 사회당의 통합 분위기는 1955년 10월 13일에 실제 통합으로 현실화 되었고, 보수진영의
자유당과 민주당은 그로부터 한 달여 뒤인 11월 15일에 <자유민주당 결성대회>를 개최함으로써
재계, 미국 그리고 상당수 의원(자유당,민주당)들 염원대로 마침내 <보수합동(대통합)>을 이뤄냅니다.
이는 전후 일본의 정치체제가 좌파진영의 사회당과 보수진영의 자민당(자유민주당)이라는 거대
양당구조가 본격적으로 시작됐음을 알리는 신호였으며, 그래서 1955년은 현대일본정치사에서 가장
중요한 한 해였고, 더불어 이때를 소위 <55년 체제>라고 부릅니다. [@ 사회당은 통합 후 1960년
1월에 일부 세력이 ‘민사당(민주사회당)’을 결성함으로써 다시 분열됩니다.]

일본에게 <55년 체제>는 좌파의 통합이라는 의미도 중요했지만, 무엇보다도 ‘보수대통합’으로
상징되는 <자민당 탄생>이 가장 큰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55년 체제>이후, 하토야마는
1년여를 더 총리직에 머물다 1956년 12월 23일 총리에서 물러납니다. 뒤를 이어 ‘이시바시 탄잔’이
총리가 되지만 병에 걸려 2개월 만에 총리직을 내려놓습니다.(@ 2개월 단명내각) ... 이어서 당시
외무상을 맡고 있던 <기시 노부스케>가 당내 저항 없이 후임 총리에 오릅니다.(1957년 2월 25일)
[◆ 참고: 앞서 보셨듯이 ‘요시다 노선’의 핵심은 군비를 최소화(경무장)하여, 그렇게 아낀 자원을
모두 일본 경제성장에 올인 하는 것이었습니다. 반면 하토야마는 일본의 재군비에 대단히 적극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더불어 ‘이시바시 탄잔’ 또한 일본의 재군비에 긍정적이었지만 ...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할 점은 하토야마와 이시바시의 ‘재군비’ 욕망은 <냉전>이라는 이념적.시대적 상황의
불가피한 여건 때문에 미국의 기대에(공산주의 확산을 막는 방파제) 부응하기 위한 대미 추종적인
‘재군비’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토야마와 이시바시의 ‘재군비’ 욕망은 대미추종이 아닌 탈미(脫美),
다시 말해, 오로지 <일본만의 독자적 자주노선>을 위해서였다는 점이 핵심입니다. ... 물론 여기서
탈미(脫美)가 반미(反美)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 일본의 자주파들은 일본이 미국과의 종속적
관계에서 하루빨리 벗어나 정상국가로서 (최소한)상호적 관계가 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 4편에서는 ~ 그동안 우리가 익숙하게만 보아온 일본의 대미추종적
이미지와는 달리 자주적 성격 또한 상당히 강했던 모습을 보게될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현 일본 총리 아베의 평화헌법 개정 문제와도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2019년 11월 19일 화요일

◆ 또 하나의 냉전, 한.미.일 관계와 그 이상의 경계에서 - (2) 국제 정치편 [by. 물파스]

(@ 한일 간 군사정보보호협정을 뜻하는 '지소미아(GSOMIA)' 종료시한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입니다. ~ 한국과 미국은 방위비 분담금 협상에서 치밀한 수싸움을
계속 진행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한국과 미국은 각각 총선과 대선이라는 본격적인 선거모드에
돌입한 상황입니다. ~ 북미간 비핵화 협상 또한 지지부진한 상황입니다.

미국이 왜 그렇게 지소미아 파기에 대해 우려하는지,
미국이 왜 그렇게 황당한 수치의 방위비 분담금을 요구하는지 ... 이에 대한 근본적 이유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 분량이 너무 많아 이야기는 5편으로 나눠서 게시물이 새로 업데이트
될 때마다 한 편씩 올려볼 생각입니다. ~ 사실 이번 시리즈 글은 '국제정치(특히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에
관한 내용이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 그러나 일본의 수출 규제와 관련해 (1)편은 경제와 관련된
내용으로 짧게 이야기해볼 것이며, 나머지 4편은 모두 국제정치(미국 동아시아 전략) 이야기로
채워질 것입니다. ~ 아래는 도움받은 자료와 각 편마다 들어있는 중점내용을 소개한 것입니다.)

<@ 도움 받은 자료들 >

(국제분쟁의 이해/ 조지프 나이/ 한울 출판)
(거대한 체스판/ Z.브레진스키/ 삼인 출판)
(포스트콜로니얼/ 고모리 요이치/ 삼인 출판)
(일본 전후 정치사/ 이시카와 마스미/ 후마니타스 출판)
(결정의 본질/ 그레이엄 앨리슨, 필립 젤리코/ 모던아카이브 출판)
(인간.국가.전쟁/ 케네스 왈츠/ 아카넷 출판)
(냉전의 역사/ 존 루이스 개디스/ 에코리브르 출판)
(미국의 아시아 회귀 전략/ 이용인, 테일러 워시번/ 창비)
(전환시대의 논리/ 리영희/ 창비)
~ 그 외 한국은행, KDI, 국회 등

(1) 경제편 - 일본의 경쟁력과 위기
(2) 국제정치 - 패전국 일본에 대한 GHQ 점령초기 상황
(3) 국제정치 - GHQ 점령기의 일본 신헌법 제정과정
(4) 국제정치 - GHQ 점령기 일본 자민당 탄생 과정과 미.일 안보조약
(5) 국제정치 - 미국의 세계대전략(Grand Strategy)의 변화 과정과 동맹(alliance)의 의미

~ (1) 경제편: <반일 불매운동 근황>이라는 게시물에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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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하나의 냉전, 한.미.일 관계와 그 이상의 경계에서 - (2) 국제 정치편 ]
- 패전국 일본에 대한 GHQ 점령초기 상황


1945년 11월 ...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한 일본에 폴레 위원장을 대표로한 배상위원회가 방문합니다.
당시 미국의 배상정책은 일본의 경제수준을 최소한으로만 유지하게 한다는 상당히 엄격한 기준을
만들었습니다.

< “일본인의 생활수준은 자신들의 식민지였던
조선인이나 인도네시아인, 베트남인보다 높지 않아야 한다!” - 폴레 >

그러나 냉전이 심화되면서 미국은 일본을 아시아의 반공 봉쇄를 위한 중추기지, 즉 공산주의
확산을 막기 위한 방파제로 사용한다는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그러자면 가장 시급했던 일이 바로
일본의 경제재건이었습니다. 자신을 공격했던 적국이자 패전국 일본에 대한 미국의 대일정책이
<냉전>이라는 비극의 구성요소 때문에 180도 급선회를 하게 된 것입니다.(@ 종이로 만든 방파제는
파도나 해일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방파제도 제 역할을 하려면 기초체력(경제)이 있어야 합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냉전의 보편적 정의는 제2차 세계대전이후, 미국 중심의 자유진영(자본주의)과
소련 중심의 공산진영간의 대립을 말합니다. 당시 초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과 소련에게 ‘유럽’
이라는 공간은 자국은 물론 자국과 이념을 공유하던 수많은 나라들의 생존이 걸린 가장 중요한
지역으로 인식되고 있었습니다. 반면 동아시아는 처음부터 미국과 소련에게는 냉전의 주요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미소 냉전이 전 지구적으로 확대되면서부터 비로소 ‘동아시아’라는 공간의
지정학적 이해가 시작됩니다.

모두 잘 아시다시피, 제2차 세계대전은 유럽과 아시아라는 두 개의 공간에서 벌어진 비극입니다.
그중 유럽의 전쟁은 팽창하는 나치 독일을 저지하기 위해 미국과 소련이 참여한 전쟁이었습니다.
반면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시작된 태평양전쟁은 소련이 참여하지 않은 상황에서
미국이 일본과 싸운 전쟁이었습니다. ... 이후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미국은 소련에게 태평양전쟁
참전을 요청했고 소련은 전쟁참여를 약속합니다.

<◆ 참고: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공습 이전 상황 간략정리>

1920년대 일본은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나름대로 의회 제도가 유지되던 국가였습니다.
그러나 1930년대 군부와 극우세력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야욕이 드러나게
됩니다. 당시 일본은 유럽보다는 동아시아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 여기에 대공황여파로
무역상황까지 악화되자 일본에게 석유 같은 필수원자재의 지속적 확보문제는 그야말로 사활이 걸린
핵심 과제로 떠오르게 됩니다. ~ 아시아 침략 합리화를 위해 소위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
이라는 기막힌 수사(rhetoric)를 사용하며 지역적 패권추구 야욕을 드러낸 일본은 동아시아 지역만
확보한다면, 그동안 태평양에서 막강한 해양세력이었던 미국과 영국의 위협에도 충분히 저항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본의 팽창야욕은 가장 먼저 중국을 겨냥하게 됩니다.
중국을 상대로 한 전쟁은, 당시 중국 국민당을 지원한 미국과의 외교적 마찰을 일으키게 됩니다.
1940년 히틀러가 프랑스를 함락하자 일본은 이틈을 타 프랑스 식민지였던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점령했고 ... 그 시점에서 일본 앞에는 세 가지 선택지가 놓이게 됩니다.

[1] (소련을 겨냥한 서쪽으로의 진군)
양국은 이미 만주 국경을 경계로 전투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만주 국경지대에서의 소련과 일본의 전쟁 발발 가능성을 상당히 높게 점쳤습니다.

[2] (남쪽으로의 진군)
이미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점령한 일본에게 가장 매력적인 나라는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원자재, 특히 석유자원이 풍부했던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지금의 인도네시아) 였습니다.

[3] (가장 무모하고 위험했던 미국을 향한 동쪽으로의 진군)

그리고 결국 일본은 2번과 3번을 선택하게 되는데 ... 히틀러의 소련공격으로 일본에 대한
소련의 위협이 제거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일본의 남진을 막기 위한
미국의 대일(對日) 석유 금수조치였습니다.

“일본에 목줄을 채우고 한 번씩 흔들어 주려고 한다.” - 루스벨트(Franklin Roosevelt)

당시 루스벨트 대통령의 국무차관보였던 애치슨(Dean Acheson)은 일본에 대한 석유금수조치가
설마 전쟁(전면전)으로까지는 확대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그러나 석유의 90% 이상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던 일본에게 석유 없는 전쟁은 그야말로 ‘패망’ 그 자체였습니다. 그래서
목 졸려 죽을 바에는 차라리 전쟁을 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 여기에 더해
미국은 일본에게 중국철수까지 요구합니다. 당시 일본에게 중국은 가장 핵심적인 경제배후지였는데
그것마저 단절된다면 <대동아공영권>을 명분삼아 꿈꿔왔던 일본 제국주의 야욕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시 한 일본 장교는 히로히토 천황에게
“비록 수술은 위험하지만 생명을 건질 수 있는 기회는 역시 수술뿐입니다.” 라며 군부의 결사항전
의지를 전했습니다. (@ 참고: Sagan "The Origins of the Pacific War")

미국에 대한 공격은 일본 스스로도 분명 무모한 전쟁이 될 것임을 진즉에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한편에서는 일본의 전쟁 선택이 비이성적 행동은 아니라고 인식했습니다.
아니 오히려 일본군부내 상당수는 미국을 상대로 한 전쟁이 어쩌면 최선의 결정이 될 수 있다고
까지 생각했습니다. ... 당시 일본 육군 참모본부의 부참모장인 ‘츠쿠다’는 일본군부내의 이러한
비합리적 분위기를 이렇게 얘기합니다.

<전쟁에 돌입한다면 전망은 대체로 밝지 않다. 우리는 모두 평화롭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지 생각하고 있다. “걱정하지마라. 전쟁이 계속된다고 하더라도 내가 모든 책임을
지겠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현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사람들은 어쩔 수없이 전쟁을 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고 있다.>
[@ 참고: 국제분쟁의 이해(178페이지). 조지프 나이(Joseph S. Nye, Jr.)

이러한 복잡 다양한 상황에서 일본은 결국 1941년 12월 7일 미국을 겨냥해 동쪽으로 진군했고,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을 겨냥해 남쪽으로 진군하게 됩니다. 다만 남쪽으로의 진군은 원자재 필요라는
실리적, 합리적 이유가 있었지만 일본의 진주만 공습에 대한 동기는, 기습으로 미국의 사기를 약간만
떨어뜨리기 위해서였는지, 석유금수조치에 대한 생존적 분노였는지 등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 일본의 진주만 공습동기에 대한 이해는 ... 앞서 일본 육군 참모본부의 부참모장
‘츠쿠다’의 한 개인의 시선으로 바라봤을 땐 당시 일본 군부의 행동이 비합리적으로 보였겠지만,
그러한 개개의 군인들이 <군부(조직)>라는 ‘집합적(총합적)’ 형태로 재구성된다면 이때부터는 개인의
이성을 일본 고유의 <레종데타>와 분리시켜, 여기에 군부 내에 합의(동의), 즉 <절차적 투명성>
이라는 민주적 요소와 결합해 전쟁(진주만공습) 결정의 진짜 동기가 과연 무엇이었을까를 고민해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

일본과의 전쟁을 조기에 끝내려했던 미국에게 소련의 참전은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 그런데
1945년 7월, 미국은 당초 예상보다 빠르게 핵실험에 성공합니다. 때문에 소련의 참전은 더 이상
필요치 않다고 생각했으며, 오히려 부담이 될지도 모른다고 미국은 생각합니다. ... 유럽참전의
대가로 영토를 요구했던 소련이 동아시아 참전에서도 분명 참전대가를 요구할 것으로 예상됐기
때문입니다. ... 1945년 8월 9일, 얄타회담에서의 약속대로 소련은 대일 전쟁에 참전합니다. 그러나
미국은 일본 히로시마(8월 6일), 나가사키(8월 9일)에 원폭을 투하합니다. 일본의 항복을 앞당겨
소련의 참전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태평양전쟁은 종결됩니다.

소련은 미국에게 일본의 공동점유를 제의했지만 미국은 이를 거절합니다. ... ‘섬나라’라는 일본의
지정학(geopolitics)적 가치와 아시아에서의 가장 핵심적 산업요충지라는 지경학(geoeconomics)적
가치가 고려되어 미국에게 일본은 절대 양보할 수 없는 나라였던 것입니다. 결국 일본을 단독으로
점령한 미국의 행위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시점부터 이미 미소간의 불신의 기운이(냉전의 기운)
어느 정도는 작동하고 있었다는 걸 말해줍니다.

일본에 대한 미국의 점령정책은 (일본)군국주의 거세와 정치민주화에 초점이 맞춰졌으며, 피해국에
대한 엄중한 배상도 요구했습니다. ... 제2차 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중국에서는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국공내전)이 벌어졌는데 사태는 국민당에게 불리하게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 물론 미국은
공산당의 승리를 바라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부패 때문에 국민들의 신뢰를 잃어가고 있던 국민당을
지원할 의사도 없었습니다. (@미국은 국민당에게 재정적인 지원만 하다가 1947년부터는 지원규모를
급격히 줄입니다.) ... 이후 미국은 국민당에게 걸었던 희망을 포기하고, 대신 공산당 세력을 중국의
북부지역에 묶어두려는 보다 제한적인 목표를 추구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미국의 일본점령 정책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1947년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 발표로 유럽에서는 서서히 미소 냉전이 시작됐고,
중국에서는 공산당의 승리가 거의 확실시되면서 아시아에서의 일본의 전략적(미국 동아시아전략)
가치가 급격히 커지게 됩니다. ... 이제 미국에게 일본은 단순히 군국주의 거세와 정치민주화 차원을
넘어선 아시아에서의 공산진영 확산을 막는 방파제 역할이 되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 따라서
<“일본인의 생활수준은 조선인이나 인도네시아인, 베트남인보다 높지 않아야 한다!”>는 미국의
일본에 대한 기본적 인식(점령정책)은 이 시점부터 180도 변하게 됩니다. 이 때문에 미국에게는
무엇보다 일본의 경제재건이 시급했으며, 안타깝게도 일본에게 전쟁 책임을 물어 피해국에게 배상을
추진하려던 정책도 흐지부지 되어버립니다.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냉전 기간 중 터키.그리스 등의
지중해 국가들이 소련의 영향권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아지자 이들 국가들의 경제, 군사적 원조를
위해 트루먼 대통령의 요청으로 미국의 의회가 4억 달러의 기금을 책정하기로 선언함.]

1950년부터 동아시아는 본격적인 냉전모드에 진입합니다. ... 1949년 10월 중국에 마오쩌둥을
주석으로 하는 공산국가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지고 그 이듬해인 1950년 2월 중국과 소련의
‘우호동맹 상호원조조약’이 체결되면서 공산진영의 결속과 확산이 가시화되자 미국 의회에서부터
서서히 불만 섞인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더구나 소련의 핵실험 성공이라는 상당한 충격까지
더해지면서 ‘매카시(Joseph McCarthy)’ 상원의원을 중심으로 공화당 정치인들의 비난이 민주당
행정부를 향합니다. ... “중국을 잃어버린 건 트루먼 대통령 때문이다!”

1950년 4월에는 미국의 <국가안전보장회의>가 <NSC-68>이라는 정책문서를 작성합니다.
문서는 소련 중심의 공산세력 확장을 반드시 막아야 한다는 ‘봉쇄정책’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었는데, 이를테면 국제적 세력균형에 매우 큰 영향을 끼치는 서유럽과 일본 같은 지역은 절대로
소련 영향권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내용입니다. ... 더불어 <NSC-68>은 봉쇄정책 수단으로 미국의
군사력이 압도적인 수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대폭적 군비증강) ... 하지만 NSC-68의
제안대로 <압도적 군사력>을 보유하려면 엄청난 돈이 필요했습니다. 때문에 트루먼 대통령은
공산주의 팽창을 막는 ‘봉쇄정책’에는 충분히 공감했으나, 많은 상처를 남긴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이 얼마 되지도 않은 시점에서 또 다시 전시에 준하는 상황을 만들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에
NSC-68의 제안에는 거부감을 드러냈습니다. 그런데 1950년 6월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합니다.
한국전쟁은 당시 미국에게 문서로만 고민하던 공산세력의 팽창문제가 현실로 다가온 직접적이고
실질적인 위협이었으며, 냉전기에 일어난 최초의 <열전(熱戰)>이었던 것입니다. ... 결국 트루먼은
<NSC-68>의 주장을 수용하는 방향으로 봉쇄정책을 추진하게 됩니다.(@국방예산 대폭 증액)

미국과 소련 중심의 냉전구도에서 스탈린 사후의 소련은 주로 유럽에 관심을 집중합니다. 반면
중국은 아시아지역에서의 지도적 공산국가로 거듭나고 있었습니다. 당시 중국은 한국전쟁에 직접
참전한 교전 당사국이었으며 대만해협에서도 자주 위기를 일으켰습니다. 또한 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지원 및 공산이념 확장을 위해서도 에너지를 집중합니다. ... 중국이 이처럼 대내외적으로 공산화
확장행보를 이어가자 미국은 중국을 아시아에서 공산주의 팽창의 주된 위협세력으로 간주하고
그 대응차원으로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군사동맹 체제를 구축합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일본이
있었는데 ... 여기서 미국은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통해 일본에 대한
군사점령을 종결하고 일본과 동맹 관계를 이미 체결한 상태였습니다. ~ 앞서 언급했듯이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공산세력 확장을 봉쇄하기 위한 핵심 방파제가 되어야 했고, 이를 위해 미국은 일본의
경제재건을 위해 <애치슨 라인(Acheson line)>과 동아시아지역의 ‘거대한 초승달(Great Crescent)’
모양의 반공 및 지역통합지대 구축을 추진합니다. ... 군사점령을 종결하고 일본과 동맹 관계를 맺은
미국은 1953년 한국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고, 1954년에는 대만과도 군사동맹을 맺습니다. 이후
필리핀, 태국, 호주 등과도 각각 동맹을 맺으면서 미국은 동아시아 지역에서 연속적 양자동맹체제를
구축하게 됩니다. ... 그런데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이러한 개별적 양자동맹 체제는 유럽 자유진영의
집단적 안보(방위) 동맹 체제인 나토(NATO), 즉 <북대서양조약기구>와는 비교되는 점이 많습니다.
이 부분은 상당히 중요한 내용이라 뒤에서(마지막 5편에서) 좀 더 자세히 얘기하겠습니다.

[◆ 애치슨 선언: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50년 1월 12일, 미국의 국무장관이었던 애치슨은
전미국신문기자협회에서 미국의 극동 방위선을 알류샨 열도-일본-오키나와-필리핀을 잇는 선으로
정한다는 소위 ‘애치슨 라인(Acheson line)’을 발표합니다. ... 이때 한국, 대만, 인도차이나반도,
인도네시아는 이 방위선에서(Acheson line) 제외되었는데, 다만 애치슨은 제외된 지역이 스스로를
방어하며 생존해나갈 수 있도록 미국의 경제원조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안보에서는
제외되지만 경제는 지원한다? 왜일까? 이들 제외된 국가들이 경제적으로 일정 궤도에 올라와야지만
일본 경제를 위한 상품시장이 되고, 일본공업을 위한 원료시장(원료공급처)으로써의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일본의 경제 재건을 위한 서포트(support) 성격이 강했다는
의미입니다. ~ 정리해보면 결국 이 모든 것은 동아시아에서 일본을 공산주의 팽창 봉쇄를 위한
핵심방파제로 쓴다는 미국의 계획에 부합하는 것이었습니다. ... 참고로 애치슨 선언은 스탈린이
김일성의 남침계획을 왜 승인하게 되었는가를 설명하는 하나의 논쟁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극동방위선(Acheson line)의 한국 제외는 미국이 한국을 군사적으로 적극 방어하겠다는 의지가
없다는 의미로 해석되며, 이로 인해 미군의 개입 가능성을 낮게 본 소련이 북한의 남침계획을
승인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확실한 증거는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았고,
이 때문에 애치슨 선언은 한국전쟁 발발 원인 중 하나라는, 그래서 분명한 미국의 실책이었다는
설과, 북한의 남침을 유도하기 위한 미국의 의도된 계획이라는 설 등 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 앞서 언급했던 <샌프란시스코 조약>은 한국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큽니다. 그래서
이 얘기는 좀 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 흔히 대일강화(평화)조약(對日講和條約) 이라고 하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Treaty of Peace with Japan)>은 태평양전쟁의 전후처리에 관한 회의를
말합니다. ...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에 54개국이(공식 서명국은 49개국) 모여 전후처리에
관한 논의를 했는데, 당시 한국은 태평양전쟁의 직접적 당사국이 아니었다는 이유로 서명국, 즉
공식 참가국으로서의 지위를 인정받지 못합니다.(@ 옵서버 자격으로 참가) ... 회의를 주도한 미국은
한국이 공식 서명국으로 참여하게 된다면 분명 일본에게 상당수준의 배상을 요구하게 될 테고,
이 요구가 그대로 관철되면 일본의 경제를 부흥시켜 동아시아 반공 봉쇄를 위한 방파제 역할을
일본에 맡기려했던 미국의 전략적 계획이 지연될 것을 우려해 한국의 공식 참가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 이 조약에서 미국은 일본영토 내에서의 계속적인 미군 주둔과 미군기지 사용, 그리고
일본의 주권회복과 재군비 등이 반영된 강화조약을 체결합니다. ... 더불어 강화조약과는 별도로
미일 안전보장조약(동맹)도 체결합니다.

보통 점령국이 식민지를 지배할 때, 점령국에 대한 충성도 높은 소수파를 우대하는 것은 상투적
전략입니다. 다수파를 우대하면 점령국을 상대로 한 독립운동의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에 점령국에
대한 충성이나 의존도를 높이려면 대개는 식민지에 대한 주요 권한(법적, 행정적)을 소수파에게
쥐어줍니다. 그래야만 식민지배가 한층 더 수월해지기 때문이죠.(ex. 친일반민족행위자의 생성), 또한
점령국이 식민지를 떠날 때는 주변국들의 단합을 약화시키기 위해 식민지에 분쟁의 소지를 남겨두기도
합니다. 그 대표적 사례가 바로 영토 분쟁입니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일본은 주권을 회복했지만,
대신 미국은 일본 안에 영토분쟁의 씨앗을 심어놓았습니다. ... 북쪽으로는 러시아(쿠릴열도),
남쪽으로는 중국(센카쿠열도), 그리고 한국과의 독도분쟁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당시 일본이 반환해야 하는 영토에 <독도>는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만약 미국이 한국을 조약의 공식 참가국(서명국)으로 받아주었다면 지금의 일본과의 ‘독도분쟁’
자체가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은 일본이 앞으로 더 이상은 다른 나라를 침략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세계를
상대로 공식화한 조약입니다. 이로 인해 일본은 <평화국가>로 다시 거듭나게 됩니다. 또한 한국은
조약의 공식 서명국이 아니었기 때문에 전후처리의 주체가 되지 못했고, 이 때문에 일본과의 과거
문제는 일본과 양자협의를 통해서만 해결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됩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협의가
바로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입니다. ... 한국이 조약의 공식 참가국이 아니라는 점은, 쉽게 말해
일본으로부터 보상 및 배상받을 권리를 국제적으로 박탈당했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 그래서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 당시 우리는 일본에게 <경제협력자금> 이라는 형태로 지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 샌프란시스코 조약은 1939년 이후 일본이 연합국을 침략했다는 사실에만 방점이
찍혀있었기 때문에 그 이전에 있었던 한국과 중국의 침략 및 식민화에 관한 내용은 애초 포함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태평양전쟁 이전에 일본이 저질렀던 식민지 주민학살, 생체실험, 강제징용,
성노예 등의 반인도적 전쟁범죄는 샌프란시스코 조약내용에 포함되지 않았고 오직 ‘태평양전쟁’에
대한 책임만 물었습니다. ... 결국 이 조약의 핵심 당사국인 미국과 영국, 일본이 말하는 <평화조약>
에서의 <평화>는 제2차 세계대전 교전국들, 즉 폭압적으로 식민지를 개척했던 옛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평화’였던 것입니다. 또한 일본에게 과도한 징벌을 하게 되면 제1차 세계대전의 독일이 그랬던
것처럼 ~ 다시 경제적 곤경에 빠져 이웃 국가들을 침략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동아시아 공산주의
확산을 막는 방파제 임무가 주어진 일본에게는 징벌을 최소화하고 대신 빠른 경제재건이 시급했던
것입니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의해 평화국가로 새롭게 태어난 일본은 이제 미국의 동아시아전략에 따라
아시아에서의 공산주의 확산을 막는 방파제 임무를 부여받고 소위 <요시다 노선>이라고 부르는
본격적인 경제 재건에 나서게 됩니다.

<“일본의 모든 관청과 군부는 항복 후 연합국 최고사령관이 발표한
포고문과 명령 및 지시를 그대로 따른다. ~ (중략) ~ 일본은 포츠담 선언을
준수하기 위해 연합국 최고사령관이 요구하는 모든 명령에 따른다.“ - (일본 항복문서 中)>
[@ 포츠담 선언: 1945년 7월 미국, 영국, 중국의 3개국 대표가 독일의 포츠담에 모여
일본에게 항복의 기회를 주기위해 항복 조건과 일본 점령지 처리에 관하여 발표한 선언.]

패전 후 일본은 7년에 가까운 미국의 점령기간을 겪습니다. 점령기간 중 일본엔 천황과 정부와
수상이 존재하고 있었지만, 이 모든 것은 형식과 허울뿐이었고 정책결정과 집행권한의 대부분은
GHQ(연합국총사령부)가 관할하게 됩니다. 천황과 일본정부 위에 GHQ가 존재하고 있었던 거죠.
그리고 당시 GHQ의 최고사령관이 바로 <맥아더(Douglas MacArthur)장군>이었으며, 미국의 점령
정책을 가장 잘 따를 것 같은 일본 수상이 <요시다 시게루(Yoshida Shigeru)>였습니다. 요시다의
역할은 항복문서에도 나와 있듯이 오직 미국(GHQ)의 요구에 충실히 따르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 GHQ(General Headquarters): 연합국총사령부, 이름은 연합국이지만 실질은 미국의 단독기관성격]

<요시다 시게루(Yoshida Shigeru)> ... 일본 보수의 본류라고까지 하는 요시다 시게루는,
45대 수상(총리)으로 일본 경제부흥을 최대 목표로 삼은 인물입니다. 제1차 요시다 내각은 1년 만에
끝났지만, 1년 5개월 뒤에 다시 수상이 되어 장기집권을 이어가게 됩니다. ... 이후 요시다의 정책은
지금의 일본 자민당의 주류 정책이 되어 50여년을 이어갑니다.

패전 후, 현재의 일본 경제를 만든 <요시다 노선>을 살펴보려면, 그 전에 먼저 <일본 신헌법>의
태동과정부터 알아봐야 합니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평화국가>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새로운
주권국가(sovereign state)로 다시 태어난 일본은, 사실상 말이 주권국가지 실질은 미국의 보호를
받는 <보호국>이자 여전히 미국의 종속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국가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주권국가(主權國家)’란 무엇입니까? ... 타국의 간섭이나 지배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나라의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권리를 주체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독립국을 말합니다. 그리고 가장 대표적인
핵심 권리가 바로 <안보주권>입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일본은 패전 후 GHQ 점령기간
중에 형성된 미국의 보호 상태, 즉 안보측면에서는 아직까지 미국의 간접통치를 받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마이크 폼페이오(Mike Pompeo) 국무장관>, <마크 에스퍼(Mark Esper) 국방장관>
최근 우리가 언론을 통해 자주 듣는 미국의 핵심인사들입니다. 이미 많은 분들도 아시겠지만,
미국의 외교와 군사안보측면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가 바로 ‘국무장관’과 ‘국방장관’입니다. 그런데
미국에는 이 둘 말고도 또 하나의 핵심직책이 존재합니다. 바로 <국가안보 담당 대통령보좌관>
입니다. 줄여서 <국가안보보좌관>이라고 하는데 ... 미국 대통령과 거의 떨어지지 않고 항상 곁에
존재하면서 때로는 국무장관이나 국방장관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맡기도 합니다. 미국의 역대
‘국가안보보좌관’중 가장 유명했던 인물은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였습니다.
[@ 2019년, 미국 NSC(국가안보회의)의 ‘국가안보보좌관’은 매파 ‘존 볼턴(John Bolton)’ 이었지만
9월 11일로 해임(사임)됐고, 변호사 출신(인질협상 전문가) ‘로버트 오브라이언(매파)’이 미국의
새로운 국가안보보좌관에 임명된 상황입니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Zbigniew Brzezinski)> 또한 키신저만큼 유명했던 미국의 ‘국가안보보좌관’중
한사람 이었습니다. 한국에도 소개된 그의 책 <거대한 체스판(The Grand Chessboard)>에는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미.일 관계가 어떻게 발전될 것인가 하는 것은 중국의 지정학적 미래와 관련해서
중요한 차원이다. 1949년 중국 내전 이래로 미국의 극동정책은 일본에 기초를 두어왔다.
일본은 처음에는 단지 미국의 군사기지에 불과했지만 차차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의 정치 군사적 존립 기반이 되고, 미국에 매우 중요한 세계적 동맹국이 되었지만
여전히 미국의 ‘안보적 보호국’에 머물러 있다.“ - (거대한 체스판. 225페이지) >

지미 카터 대통령시절 미국의 3대 핵심인사라는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낸 ‘Z.브레진스키’는
자신의 책(거대한 체스판)에서 일본을 거침없이 ‘미국의 보호국’이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냉전시기
세계지도를 체스판 삼아 지구적 군사안보전략을 기획했던 인물이 본인 이름을 내걸고 펴낸 책에서
일본의 안보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미국이 일본정부에게 직접적인 지시를 내린 것은
아니지만, 일본 안보정책의 실질적 결정권한이 미국에 있다는 것은 일본 내부에서도 어느 정도는
인정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 물론 한국도 안보주권 행사에서는(이를테면 ‘전시작전통제권’ 등)
미국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고는 말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분단’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현실적으로 제한적인 안보주권행사만 가능합니다. 따라서 일본과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많습니다.

현대 미.일 관계의 시작점은 일반적 동맹계약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항복문서>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 당시 GHQ의 최고 권력자였던 맥아더 장군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일본 국민에 대해 사실상 무제한의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역사상 어떤 식민지 총독이나 정복자도 내가 일본 국민에게 행사했던 권력을
휘둘렀던 사례가 없을 정도다. 군사점령이라는 것은 결국 한쪽은 노예가 되고,
다른 한쪽은 주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 (맥아더 회고록 中) >

‘아시아에서 공산주의 확산을 막는 방파제 일본!’ ~ 점령국 미국(GHQ)에게 일본은 세계전략상
매우 유용한 수단이자 도구였습니다. 당시 일본을 바라보는 미국의 인식이 그러했습니다. 때문에
맥아더에게 일본 천황이나 수상은 노예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 다만 상품이 품질에 따라
구분되듯이, 노예도 계급적(상급, 하급) 구분이 가능한데 일본 지배계층이 상급노예라면, 하급노예의
대부분은 일반 국민들이었습니다. ... 그리고 당시 맥아더에게 매우 유용했던 일본의 상급 노예가
바로 ‘요시다 시게루’ 였습니다.

< “윌로비는 요시다와 매우 가까웠지. 요시다는 테이코쿠 호텔에 있는 윌로비 방에
몰래 들어가려고 종종 뒤뜰에 숨어 있곤 했어. 뒤쪽 계단을 올라오는 요시다와 마주친 적이
몇 번 있었지. 때로는 일본 정치가가 미국대사관에 있는 맥아더 관저에 가지 않아도
윌로비와의 논의만으로 차기 수상이 결정되기도 하고 내각도 만들어졌지.“ >
[알려지지 않은 일본 점령 – 윌로비 회고록(테이코쿠호텔 사장과의 담화 中)]

‘찰스 윌로비(Charles Willoughby)’는 GHQ 정보참모 제2부장(육군소장)으로 맥아더의 신임이
두터웠고 일본 패전시 항복문서 조인식에도 참가했던 인물입니다. 철저한 반공주의자로서 좌익에
대한 검열을 주도했고 미국중앙정보국(CIA) 설립에도 상당한 관여를 했었습니다. <요시다 노선>을
지지했었으며, 미국점령기간 중에 요시다가 가장 믿고 의존했던 인물이 바로 윌로비였습니다. 또한
윌로비는 생물화학무기를 연구하던 731부대의 전범을 기소하지 않는 조건으로 일본이 미국에
정보를 넘겨줄 때도 깊게 관여했으며, 정보참모답게 윌로비는 배후공작에도 매우 능했던 사람입니다.
일본 수상이 점령국 수장이 아닌, 한낱 정보참모에 불과한 윌로비를 만나기 위해 몰래 호텔뒷문으로
숨어들어가 내각을 구성하기도하고, 심지어 차기 수상 인선까지 의논할 정도로 당시 패전국 일본의
형편과 민낯이 그러했으며, 윌로비라는 인물 또한 전후 일본이 만들어지는데 상당한 영향력을
끼쳤던 사람입니다. 이러한 일본의 모습에 트루먼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은 얘기를 합니다.

< 매사추세츠 공대 총장인 콤프턴 박사가 일본에서 귀국한 뒤 백악관에
찾아와 내게 보고했다. 그의 보고서는 다음과 같았다. ~ “일본은 사실상 군인을 모시는
봉건조직 가운데 노예상태였다. 일본 국민은 일본인 보스를 모시다가 새로이 점령군을
모시게 된 것이다. 대부분의 일본인에게 있어서 이러한 전환은 새 정권에서 생계만
유지된다면 별 차이가 없다.“ - (트루먼 회고록 中) >

미국의 일본 점령기간 중 일본의 자주적, 주체적 권한(특히 정치.군사적)은 상실된 상태였습니다.
대신 <경무장, 플러스경제성장> 이라는 요시다의 국가발전노선, 즉 일본의 안전보장을 전적으로
미국에 의지함으로써 군비를 대폭적으로 줄이고, 그렇게 줄어든 군비를 오직 경제성장(민간투자)에
투입한다는 요시다의 정책의지는 어쩌면 당시 일본 상황(노예상태)에서 당연한 선택일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 더불어 요시다 같은 절대적 대미 추종론자는 미국입장에서도 점령기 일본에게 가장
적합했던 수상이었습니다. ... 그러나 요시다는 일본이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주권을
회복(?)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수상으로 남아있게 됩니다. 이는 점령기 요시다의 <대미 추종노선>이
주권회복 이후에도 지속되었다는 의미이며 ... <일본 보수본류의 흐름>으로써 현재까지 이어져오게
되는 하나의 주요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 일본의 ‘보수본류’는 ‘미국추종’의 다른 이름이며
말 그대로 요시다 시게루의 직계 라인을 뜻합니다. ... 요시다의 자유당계 흐름에서 시작해서 이를
이어받은 (이케다 하야토), (사토 에이사쿠), (다나카 가쿠에이) 등 소위 요시다 우등생들을 말하는데
이들은 <기시 노부스케(아베총리 외조부)>의 민주당계 라인과 함께 현 일본 자민당 내 핵심 파벌의
하나를 형성하고 있으며, 이들 모두는 전후 일본정치 바로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3)편에서는 일본의 신헌법 제정과정을 살펴볼 것입니다.
응원글 주시는 분들마다 고맙다는 답글을 하고 싶지만 ~ 그럴수록 스크롤 압박만 더 커질것 같아
비록 답글이 없더라도 ~ 그 밑에 '고맙습니다'라는 투명한 답글이 있다고 생각해주시면
좋을것 같습니다. ]

◆ 또 하나의 냉전, 한.미.일 관계와 그 이상의 경계에서 - (1) 경제편 [by. 물파스]



(@ 한일 간 군사정보보호협정을 뜻하는 '지소미아(GSOMIA)' 종료시한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입니다. ~ 한국과 미국은 방위비 분담금 협상에서 치밀한 수싸움을
계속 진행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한국과 미국은 각각 총선과 대선이라는 본격적인 선거모드에
돌입한 상황입니다. ~ 북미간 비핵화 협상 또한 지지부진한 상황입니다.

미국이 왜 그렇게 지소미아 파기에 대해 우려하는지,
미국이 왜 그렇게 황당한 수치의 방위비 분담금을 요구하는지 ... 이에 대한 근본적 이유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 분량이 너무 많아 이야기는 5편으로 나눠서 게시물이 새로 업데이트
될 때마다 한 편씩 올려볼 생각입니다. ~ 사실 이번 시리즈 글은 '국제정치(특히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에
관한 내용이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 그러나 일본의 수출 규제와 관련해 (1)편은 경제와 관련된
내용으로 짧게 이야기해볼 것이며, 나머지 4편은 모두 국제정치(미국 동아시아 전략) 이야기로
채워질 것입니다. ~ 아래는 도움받은 자료와 각 편마다 들어있는 중점내용을 소개한 것입니다.)

<@ 도움 받은 자료들 >

(국제분쟁의 이해/ 조지프 나이/ 한울 출판)
(거대한 체스판/ Z.브레진스키/ 삼인 출판)
(포스트콜로니얼/ 고모리 요이치/ 삼인 출판)
(일본 전후 정치사/ 이시카와 마스미/ 후마니타스 출판)
(결정의 본질/ 그레이엄 앨리슨, 필립 젤리코/ 모던아카이브 출판)
(인간.국가.전쟁/ 케네스 왈츠/ 아카넷 출판)
(냉전의 역사/ 존 루이스 개디스/ 에코리브르 출판)
(미국의 아시아 회귀 전략/ 이용인, 테일러 워시번/ 창비)
(전환시대의 논리/ 리영희/ 창비)
~ 그 외 한국은행, KDI, 국회 등

(1) 경제편 - 일본의 경쟁력과 위기
(2) 국제정치 - 패전국 일본에 대한 GHQ 점령초기 상황
(3) 국제정치 - GHQ 점령기의 일본 신헌법 제정과정
(4) 국제정치 - GHQ 점령기 일본 자민당 탄생 과정과 미.일 안보조약
(5) 국제정치 - 미국의 세계대전략(Grand Strategy)의 변화 과정과 동맹(alliance)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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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하나의 냉전, 한.미.일 관계와 그 이상의 경계에서 - (1) 경제편 ]


아리스토텔레스는 보통 이상의 인간을 모방하느냐, 보통 이하의 인간을 모방하느냐에 따라,
그리고 서술하느냐(서사시) 실제로 연기하느냐에 따라서 시(詩)를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비극은 보통 이상의 인간을, 희극은 보통 이하의 인간을 모방한다) ... 저는 개인적으로 오늘날의
국제정치를 아리스토텔레스 식으로 정의된 시에 대입해 본다면 현존하는 국제정치의 대부분이
<‘비극’적 속성>을 내포한다고 생각됩니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의 정의를 살펴보면 좀 더
쉽게 이해됩니다.

“비극은 진지하고 일정한 크기를 가진 완결된 행동을 모방하며,
듣기 좋게 맛을 낸 언어를 사용하되 이를 작품의 각 부분에 종류별로
따로 삽입한다. 비극은 드라마 형식을 취하고 서술형식을 취하지 않는데,
연민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사건으로 바로 이러한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실현한다.“ -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비극 속에는 <플롯, 성격, 조사, 사상, 볼거리, 노래> 같은 여섯 개의
구성요소들이 들어있는데 ... 이러한 구성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상대(敵)의 속셈과 상황이
어떤 경로로 흐를지에 대해 나름의 예측도 가능하지만, 변수들의 모순적 작용으로 인하여 인물들의
운명이 뒤바뀌는 예측불가의 급반전도 연출된다고 합니다.

국제정치에서 예측불가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전쟁(War)>이라는 비극입니다. ... 그래서
저는 국제정치 또한 여러 구성요소들 ~ 이를테면 정치체제, 민족, 역사(과거사), 경제, 안보, 영토,
문화 등과 같은 국가를 형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의 구성요소들처럼
복합적으로 상호작용하며 국가 간의 대립, 견제, 균형, 협력, 배반 등을 유발하는 그야말로 치열한
<보통 이상의 국가들 놀음>이라고 정의하려 합니다. ... 더불어 이러한 국제정치의 ‘비극적 속성’
내지는 ‘비극적 한계’의 틀 안에서 국제정치, 특히 한일 관계와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에 대한 생각을
여러 자료를 통해 조심스럽게 풀어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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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8년 지금의 독일 지역에서는 종교 개혁을 둘러싸고 신교(프로테스탄트)와 구교(가톨릭) 간에
<삼십년전쟁(Thirty Years' War. 1618~1648)>이라고 불리는 세력다툼이 벌어졌습니다. ... 그런데
가톨릭 국가였던 프랑스는 프로테스탄트 세력을 지원합니다. 이는 당시 수상이자 추기경이었던
<리슐리외(Richelieu)>의 주장이 있었기 때문인데, 이로 인해 프랑스의 수많은 가톨릭 세력들로부터
종교적 신념을 무시했다는 이유로 강한 반발을 사게 됩니다. 이때 리슐리외는 ‘국가이성’을 설파하며
가톨릭 세력인 스페인-오스트리아 제국의 확장을 저지합니다.

<“국가의 행동은 개인의 이성이 아닌,
‘국가이성(Reason of State)’에 따라 이루어진다!” - 리슐리외>

소위 <레종 데타(raison d’État)>라고 부르는 국가이성은, 국가행동의 결과로 나타나는 국가이익의
정당성은 개인 범주의 규범차원에서는 평가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권력자 개인의 신념이나 종교적
신념으로 내리는 명령과 국가이성이 내리는 명령은 엄연히 다르기 때문에 ~ 오직 국익을 위한
<국가의 행동>을 개인적 차원의 도덕적, 윤리적 기준이나 잣대로는 함부로 평가할 수 없다는
것이죠. ~ 저는 <집단의 타자규정>과 관련된 내용의 예전 저의 글에서 이런 얘기를 했었습니다.

[◆ 보편적으로 성숙한 집단(세력)은 어른의 질서체계 안에서 작동되며,
운영 또한 민주적입니다. 따라서 이들의 타자규정은 무차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내부동의(합의)를 통해 이루어지는데, 이러한 절차적 투명성을 바탕으로 한 타자규정은
한 번 결정되면 반질서적 집단의 타자규정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무서운 힘을 갖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민주적>이라는 의미는 상당한 파괴력을 내포한 <잔혹성(폭력)>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도 생각해 봅니다. ]

오늘날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있는 상당수의 국가들은 자신들이 경제력, 군사력 등의 힘의 우위를
아무리 많이 가졌다고 해도 다른 국가들을 (명분,이유없이)함부로 위협하지는 못합니다. ... 하지만
정부가 의회와 타협하고, 의회는 민주적 과정을 통해 한번 타국을 위협하기로 결정한다면, 이후에
일어날 폭력은 웬만한 독재국가 그 이상의 힘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가장 큰 장점이자 대표적 특징인 <절차적 투명성>이 사후에 현상으로 드러난
폭력의 결과와 그에 대한 도덕적 책임(정당성의 유무와 관계없이)을 모두 상쇄시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민주주의 국가에서 한 번 결정된 폭력의 사용은(그것이 경제보복이든, 군사보복이든) 거침이
없으며, 그에 따른 도덕적 책임은 <절차적 투명성> 이라는 이름하에 그 사회 전반에 고르게 분배
됩니다.[@결정의 엘리트(소수)화, 책임의 전사회화] ... 결론적으로 <절차적 투명성>은 사후 도덕적
책임에 대한 사전적 면죄부에 다름이 아닙니다. 앞서 <민주적>이라는 말속에 함의된 <잔혹성>에
대한 지적이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결국 국제정치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동안 ‘개인’ 차원에서만 맴돌던 <국민(개인) 단위>의 상식의
틀을 완전히 파괴해야만하며, 따라서 국제정치는 <개인 이성>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이성, 즉
<국가이성(레종 데타)> 이라는 새로운 층위의 이성과 <절차적 투명성> 이라는 민주주의의 특성을
함께 결합하여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비극이 상연되는 <국제무대>라는 공간에는 온갖 전쟁의 연속입니다. ... 경제전쟁 혹은 무역전쟁,
환율(통화)전쟁, 자원전쟁, 종교전쟁, 이념전쟁, 영토전쟁(분쟁) 등 크고 작은 수많은 전쟁과 분쟁이
지금도 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대립과 갈등에서 군사적 충돌만
배제한다면 완곡하면서도 차가운 느낌의 강렬한 용어 하나가 다가옵니다. 바로 <냉전(cold war)>
입니다. 그래서 ‘한.미.일 관계’ 이야기는 <냉전>의 기본적 의미를 살펴보는 것부터 시작하려 하는데,
오늘날의 국제정치 현실이 바로 <냉전의 암묵적 지속상태>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방에서 총알이 빗발치고 하늘에서는 가공할 포탄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려 내가 사는 지역을
뜨거운 화염바다로 만드는 실제 전쟁인 <열전(熱戰)>에 반대되는 의미가 바로 <냉전(冷戰)>입니다.
냉전(cold war)은 말 그대로 차가운 전쟁입니다. 다시 말해 직접적인 군사력을 사용해 싸우는
전투행위는 없지만, (국제적으로)군사적 긴장 상태가 수반되면서 정치, 경제, 외교영역에서 치열한
<경쟁>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나 냉전의 의미를 단순히 군사적 충돌이
없는 상태에서의 국제적인 긴장과 경쟁 상황만으로 파악하는 것은 단순한 이해이며, 수면 아래
거대한 빙산 같은 역사적 맥락까지를 알아야만 비로소 냉전을 이해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냉전의 보편적인 정의를 살펴보면 <2차 세계대전 종전 후부터 미국 중심의 자유진영과
동유럽 사회주의 정권을 포함한 소련 중심의 공산진영과의 대략 50여 년간의 대립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 냉전 - 미국 중심의 자유진영(자본주의) vs 소련 중심의 공산진영 ]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대립(경쟁)이라는 점에서 냉전은 분명 이데올로기(이념) 전쟁이었으며,
여기에는 군사력(군비경쟁)은 물론, 경제와 정치, 외교 등의 영역에서까지 경쟁관계가 심화되었던
정치적 성격이 강한 전쟁(이념 및 정치 대립)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냉전의
정의를 정확히 이해했다고 하더라도 그 냉전의 원인, 즉 <냉전은 누가(무엇이) 야기 시켰는가?>
하는 물음에서는 입장차이가 있는데,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대체적으로 세 가지 입장으로 나뉘고
있습니다.

◆ 냉전에 대한 시각 – 1.전통주의 2.수정주의 3.탈수정주의

(1) [전통주의]: 소련의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공격적 확장은(공산이념팽창)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 자유주의 진영과의 대화와 협력을 처음부터 불가능하게 만들었으며,
이 때문에 자유진영은 공산주의 팽창에 대한 자유진영의 당위적 수호를 위해 경제.군사적
방어 태세로 맞대응 할 수밖에 없었다는 논리입니다.

(2) [수정주의]: 공산주의 세력 팽창 때문이 아니라, 미국의 (미국식)자본주의 경제팽창이
냉전의 실질적 원인이라는 주장입니다. 자본주의는 <시장>이 필요하며, 시장은 한계가
없어야만 합니다. 한마디로 미국식 자본주의 경제가 계속해서 유지되려면 시장은 끊임없이
제공되어야만 하고, 이는 결국 시장의 전지구화, 즉 <세계화>라는 필요를 낳게 됩니다.
이러한 자본주의 경제논리는 미국의 팽창적 대외정책으로 이어졌고, 이에 위협을 느낀
소련의 대응으로 냉전이 초래됐다는 것입니다.

(3) [탈수정주의]: 전통주의와 수정주의는 냉전의 원인이 각각 소련의 이념팽창과
미국의 경제팽창 때문이라는 논리입니다. ... 이에 반해 탈수정주의자들은 냉전의 책임은
어느 한쪽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폅니다. 미.소 양강의 긴장관계가 지속되던
냉전 시기의 정치, 경제, 외교 분야에서 드러난 각종 정황과 팩트(외교문서)를 세밀하게
분석하여 냉전을 단편적 시각이 아닌, 복합의 영역으로 끌어오고자 노력하는데 ... 세계 모든
국가들은 적어도 자국영토 안에서는 최고의 권위체입니다. 각국은 자신들만의 <정부>를 구성하고,
군대와 경찰과 법원을 소유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여러 국가들이 모여 있는 지구라는 공간에는
오직 개별 국가들만 존재할 뿐, 개별 국가들을 넘어서는 <상위의 중앙권위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소위 <국제체제의 무정부성(international anarchy)>이라고 하는데 ... 이와 같은
국제체제의 무정부 속성은 미국과 소련이 자국의 생존과 번영을(각자의 이념체제만을 확대)
위해서만 권력을 추구하도록 만들었으며, 이것이 결국 냉전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논리가
바로 ‘탈수정주의’의 주장인 것입니다.(@ 일부 탈수정주의자들은 기존의 전통주의와 수정주의
시각을 일정부분 인정하기도 합니다.)

모든 역사가 그렇듯이 결국은 <해석>의 문제이며, 과거 냉전(미국vs소련) 역사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 또한 초점이 어디에 맞춰지는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래서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강대국 시절의 냉전 초점이 주로 이념과 군사적 차원에 맞춰졌다면 ... 앞서 오늘날의 냉전,
즉 탈냉전의 세계를 <냉전의 암묵적 지속상태>라 규정했던 저는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에
그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이는 중국이라는 G2의 등장이 오늘날 국제무대에서 상연되고 있는
비극의 변수로 작용하고, 이에 대한 미국의 대응(세계전략)이 한국과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
전반에 어떠한 결과를 도출할 것인가가 매우 궁금하기 때문입니다. [@ 여기서 제가 강조하는
비극의 의미는 ‘슬픈 사건’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뜻하는 게 아닙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처럼
비극의 여러 구성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상호작용하여 연출되는 예측가능과 불가능이 공존하는
일련의 사태(드라마)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글 제목이 ‘한.미.일 관계의 냉전’이고, 그 냉전의 초점을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에 맞췄기 때문에
먼저 경제부문, 특히 일본 제조업(소재.부품.장비) 경쟁력과 지금 일본경제가 처한 현실을 객관적으로
살펴보고, 이후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이라는 <국제정치> 부문을 자세히 살펴보는 것으로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 보겠습니다.

일본이 아무리 잃어버린 20년의(이젠 30년이 되어감.) 장기침체를 겪었다고 해도 기술경쟁력에
있어서는 여전히 세계 최고수준의 국가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토요타로 대변되는 자동차
산업과 함께 기계 산업을 포함한 초정밀도를 요구하는 소재, 부품, 장비 분야의 기술경쟁력은 가히
압도적인 수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IT산업과 조립완성품 분야에서는 한국과 중국에 밀려
세계시장 점유율이 많이 낮아지긴 했지만 ~ 소재, 부품, 장비 분야는(특히 첨단 소재와 초정밀기기)
거의 ‘난공불락(難攻不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최근 가장 뜨거운 이슈인 반도체 분야만 보더라도 관련 핵심 제조장비와 부품 소재는 대부분이
일본 제품입니다. ... 일본경제산업성(한국의 산업통상자원부에 해당)의 2015년 경제백서 내용을
참고해 한국무역협회에서 발표한 내용을 보면, 일본산 포토레지스트의 세계 시장 점유율은 무려
99%에 가깝고, 지금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다고 합니다. 이에 따라 국내 반도체 기업의 일본산
포토레지스트 비중은 93%, 에칭가스(고순도 불화수소)는 42%, 디스플레이의 핵심소재인 플루오린
폴리이미드의 일본산 비중은 84% 입니다. (@ 지금 검색만 해봐도 이 내용은 쉽게 확인됩니다.)

아래는 세계시장에 전량을 공급하는 일본산 부품, 소재와 기업들의 목록입니다.

<◆ 자동차 부품, 소재분야>
@ 인버터 모듈 - (미쓰비시전기)
@ 자동차용 차세대 2차 전지 - (파나소닉 EV에너지, 오토모티브에너지, 서플라이, 블루에너지)
@ 드라이브 레코더 - (로지텍, 파이어스타, Route-R)
@ 콘덴서 - (니혼케이콤, 히구치전기)
@ 수정진동자 - (일본전파공업, 교세라, 세이코인스톨전자디바이스, 타마디바이스)
@ 플라스틱 광파이버(POF) - (미쓰비시레이온, 아사히카세이, 도레이)

<◆ 가전제품 부품, 소재분야>
@ 편광판 보호필름(TAC필름) - (후지필름, 코니카필름, 코니카미놀타)
@ 유리기판(청판) - (아사히글라스)
@ 반사시트(백색) - (도레이, 日榮化工)

<◆ 휴대폰, OA기품, 통신네트워크 부품, 소재분야>
@ 무선 근거리 통신(NFC) - (소니와 NXP 세미컨덕터 공동개발)
@ LED 프린트헤드 - (후지제록스, 교세라, 코덴시)
@ 광통신용렌즈(유리비구면렌즈) - (파나소닉, 아사히글라스, 올림푸스전기)

이 외에도 세계시장에 절반 이상을 수출하는 일본산 제품들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한때 세계시장에서 종합전자분야의 절대 강자로 군림했던 소니, 파나소닉, 샤프 같은 회사들은
2,00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한국과 중국 같은 신흥국 추격에 밀려 지금은 그 존재감을 많이
상실했지만 ... 30년의 시간을 까먹는 동안에도 일본이 쉽게 무너지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이러한
세계 최고수준의 기술경쟁력을 가진 히든챔피언(강소, 강중기업) 덕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일본의 대표적 히든챔피언(소재, 부품, 장비 분야)>
@ 도레이 – (소재기업, 50여 년간 아시아시장에서 굳건한 지위확보)
@ 스미토모화학 - (농업화학 분야 세계 최고수준)
@ 대일본 스크린제조 - (웨이퍼 세정장치 세계최고 수준, 유기EL 도포장치 한국수출)
@ 도쿄일렉트론 - (반도체 제조장치 세계 2위)
@ 일본전자 - (전자현미경 세계 1위)
@ 호리바제작소 - (엔진 계측기 세계시장 80% 점유)
@ 화낙(FANUC) - (수치제어(NC) 세계 1위)
@ 아사히화성 - (스마트폰용 전자컴퍼스 세계최대, 리튬이온전지용 세퍼레이터 세계시장 50%)
@ 미쓰이 금속 - (스마트폰용 고기능 동박 세계시장 80% 점유)

소재, 부품, 장비 분야에서 현재 일본의 기술경쟁력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대충은 가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위에서 언급한 기업도 일부분이며 해외 연구기관에서 인정한 일본의 잠재
히든챔피언 수는 대략 2,000여개로 파악됩니다. ... 그런데 이것만 보면 일본의 경제는 앞으로도
100년은 더 거뜬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한 나라의 국가경쟁력은 기업들의 기술력수준 하나만으로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시 말해, 일본이 아무리 세계최고수준의 기술기업들을 보유하고 있어도
잃어버린 30년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 결국 현재 일본이 처한 현실도 그렇게
녹록치는 않다는 뜻입니다. 상당한 위기상황이라는 거죠.

제가 생각하는 현재 일본의 가장 큰 문제는 <저출산 및 초고령사회>, <정치 리더십 부재>,
<국가재정>입니다. ... 그중 국가재정 부분은 예전 저의 글 <금융의 전인미답 - 일본의 부채실험>
이라는 글을 참고해 핵심내용만 얘기해 보겠습니다.

<◆ 아베 내각도 현재 일본의 재정건전성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잘 알고 있지만
노력에 비해 재정적 어려움은 해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획기적인
대안 없이는 해법이 쉽지만은 않아 보입니다. [@ 세계경제포럼(WEF)에 따르면
일본의 정부부채 및 재정수지 등의 거시적 경제여건은 조사 대상국 140개국 중에서
104위를 차치했습니다.(The Global Competitiveness Report 2016–2017)] ... 아베정부는
2020년까지 기초재정수지를 흑자로 전환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는데, 그러자면 증세와 함께
쓰는 돈을 줄여야 하는데, 현재 일본 현실에서(고령화, 저출산 대책, 의료.요양 복지 등)
국채를 신규발행 못한다면 국가운영이 불가능한 상황이기 때문에 해마다 신규국채발행은
계속해서 이어질 것입니다. - (금융의 전인미답 - 일본의 부채실험 이야기 中)>

일본은 현재 국가재정의 (35~40%) 수준을 국채발행을 통하여 조달하고 있습니다. 2018년 일본의
국가예산 규모는 98조엔 규모였습니다. 한국 원화로는 무려 1천조 원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특별회계예산까지 더한다면(일반회계와 중복되는 부분 제외) 일본 정부의 총지출 규모는 무려
200조엔을 넘어섭니다. ... 더불어 ‘국채비’(기존에 발행된 국채상환 자금과 나머지 국채발행 잔액에
대한 이자비용) 비중은 예산대비 대략 (23~25%) 수준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 일본정부가
쓰는 돈(일반회계) 중에서 4분의 1은 정부의 빚(debt) 상환과 이자비용에 쓰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 일본국채비: 2017년(23조 5천억 엔), 2018년(23조 3천억 엔) ... (2017년 일본재무성 자료참고)]

<@ 참고: 중앙정부 재정 구조>
(1) 일반회계: 세입(세금 및 자산매각), 세출(부처 사업)
(2) 특별회계: 기업특별회계(우편사업 및 조달), 기타특별회계(농어촌 개선, 신도시, 교통시설 등)
(3) 기금: 연금기금, 주택기금, 여성기금, 방송발전기금 등

@ 예산 = (1)+(2)
@ 정부총지출 = (1)+(2)+(3)
==========

일본의 가계금융자산은 무려 1,600조엔 규모이며, 국채의 상당부분은 리스크를 기피하는
고령자 가계가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의 천문학적인 국가부채(GDP대비 240%)와 재정적자,
그리고 기형적 국채발행 관행에는 아직까지는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고 있는 상황입니다.
(@10년 만기 국채수익률이 1% 미만임에도 일본 가계들은 계속 매입 중) ... 그러나 저금리 상황의
지속으로 국내 저축이 줄어들고 경상수지가 적자 전환 되거나 구조화되기 시작한다면 일본경제는
(특히 국채부분에서) 본격적인 위험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2018년 일본의 국채잔고 규모는
882조엔 이며, 원화로 환산하면 1경에 가까운 9,600조원입니다. ... 더불어 일본의 연간 경상수지는
최근 10년(2009~2018년) 동안은 계속해서 흑자 흐름을 보여주고 있었는데, 이 기간 동안 최저는
360억 달러(2014년), 최고는 2,200억 달러(2010년)였으며, 작년(2018년) 경상수지는 1,740억 달러로
흑자폭이 5년 만에 감소세로 돌아선 상황입니다. (ECOS 한국은행 경제통계 참고)]

여기에 저출산 및 고령화 문제는 일본이라는 국가가 <인구가 감소하면서 늙어가는> 정도로만
단순히 이해하기에는 사정이 좀 더 심각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 현재 일본 인구문제의 가장 큰
변수는 16~64세의 <생산가능 인구감소!> ... 한마디로 현역세대의 인구감소라는 치명적인 흐름이
단단히 고착화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생산가능 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한 1990년대 중반(1996년)부터
일본의 내수는 정점을 찍고 하향세로 돌아섰고, 투자와 고용이 위축되기 시작했습니다. ... 사회는
점점 더 활력을 잃어갔으며, 당시 일본 후생성의 충격적인 인구통계 발표(합계출산율 1.57)에 대해
학계와 국내외 주요 경제연구소는 계속해서 경고를 보냈음에도 정부와 정치권은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낙관론까지 펼쳤습니다.
[◆ 합계 출산율: 여성이 평생 동안 낳을 수 있는 자녀의 수를 말하며, 이 수치가 2.1 이하로
떨어지면 한 나라의 전체 인구수가 본격적인 감소추세로 돌아선다는 신호입니다. ... 참고로
작년(2018년) 우리나라 합계출산율 수치는 0.98로, 인구감소 문제가 처음으로 대두되기 시작했던
1990년대 중반의 일본보다 훨씬 더 심각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도 대책이 시급합니다.]

인구문제는 일본사회 전반에 활력이 떨어뜨렸고, 사회의 활력저하는 기업의 혁신을(주로 경영측면)
저해하는 주요인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일본은 GDP 대비 제조업 비중이 20% 수준으로 독일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세계시장에서 독일이 자국 제조업 점유율을 10% 수준으로 유지하고 있는 동안,
일본은 1990년대 초 10%대 정점을 찍고 이후 지속적으로 하락하여 현재는 3~4%대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독일도 인구문제(저출산, 고령화)에 있어서는 일본과 비슷한 경험을 했었지만 ... 독일은 정부와
정치권, 기업, 노조 등 사회 모든 구성원들이 머리를 맞대고 협력하여 경제. 사회부문에서 꾸준한
개혁을 추진함으로써 나름의 결실을 얻었습니다. ... 반면 일본은 개혁의 선두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할 <정치적 리더십>의 부재로 ‘생산가능 인구감소’ 같은 미래 일본 국력의 흥망을 판가름할
메가(mega)급 변수에 대한 대응시점을 놓쳐버렸습니다. ... 일본 미래에 대한 장기비전을 수립하고
이에 대한 정책을 세심하게 준비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낙후된 정치시스템과 관료주의는 일본사회
개혁의 추동력을 잃게 만드는 매우 큰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1948년 요시다 시게루 총리에서 1980년대 중반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까지는 대체적으로
일본 총리의 재임기간은 4~5년 이었으며 정치권의 리더십 또한 어느 정도 성과를 발휘하던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199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총리의 재임기간이 1년 전후로 정치적 불안정이
계속해서 이어졌고, 이는 정부의 장기정책 추진에도 상당한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1년짜리 인턴식 총리의 한계 때문에 관료시스템도 장기적인 관점의 정책추진에는 부담이 매우
컸습니다. 이는 결국 정책의 상당부분이 단기성과 집착으로만 이어지게 되었고, 이러한 사회분위기는
민간영역에까지 영향을 끼쳤습니다. 특히 기업들은 제조기술력에서는 일정부분 혁신을 이끌어냈지만
<경영혁신> 측면에서는 과거를 추억하며 현실에 안주하는 사례가 많아졌습니다. ... 여기에,
앞서 언급했던 정부의 재정문제와 국채문제는 현재 일본의 위기상황을 더욱 더 악화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 한국 언론들은 한국의 내년(2020년) 예산을 <슈퍼예산 500조원> 이라며 정부의
돈 씀씀이에 대해 많은 기사를 쏟아내고 있는데, 일본은 매년 우리 슈퍼예산 절반수준인 250조원에
가까운 돈을 정부가 진 빚을 갚는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국채비) ... 결론적으로 지금의 일본은
정부수입의 상당비중을 빚(국채)에 의존하는 구조이며, 정부지출에서 빚(국채)이 차지하는 비중 또한
상당히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원전 및 지진 등의 재해 사고를 제외한다면 일본의 위기는
바로 금융(국채) 부문에서 먼저 터지게 될 것입니다. 더불어 한국과 중국의 제조기술 자립화도 빠른
속도로 일본을 추격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일본은 <개혁과 혁신> 그 이상의
사회적 돌파구가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시점이며, <슘페터(J. Schumpeter)> 식으로 표현해본다면
일본이라는 ‘국가’ 그 자체의 <창조적 파괴>가 절실히 필요하다 생각됩니다.

[◆ 참고: 참의원 선거이후 일본에서는 아베총리의 3선을 넘어 4선론까지 거론되고 있는데,
이는 일본이 단기총리의 한계를 인지하고 향후 국가정책에 대한 장기전략 수립의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5년을 넘게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는 ‘아베노믹스‘의 성과를
들여다보면 ~ <과연 총리의 재임기간이(장기든, 단기든) 현재 일본에게 의미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 다시 말해, 이제 일본경제는 케인즈, 밀턴프리드먼, 하이에크, 양적완화,
FRB 등 그 무엇을 소환해도 위기를 벗어나기가 매우 어려운 상태라는 뜻입니다. ... 앞서 보셨듯이
지금의 일본재정현실을 감안한다면 양적완화의 점진적 축소를 의미하는 ‘테이퍼링(tapering)’ 전략은
불가능에 가깝고, 천문학적인 국채잔고 때문에 세계가(특히 미국) 금리상승 분위기로 전환된다면
상당히 치명적입니다. 무역에서는 꾸준히 흑자 기조를 유지하고 있지만, 흑자폭은 2010년 최고점
2200억 달러를 달성한 이후, 최근 10년 동안 단 한 번도 전 고점을 돌파하지 못하다가 작년(2018년)엔
그 흑자폭마저 5년 만에 감소세로 돌아선 상황입니다. 여기에 정체수준에 가까운 실질성장률과
생산가능 인구 감소로 인한 내수 축소, 해마다 늘어나는 복지지출 등의 문제들은 일본을 점점 더
위기로 밀어 넣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지금의 일본상황은 시간이 흐를수록 계속해서 더 많은 돈을
뿌려야 하는 지경까지 온 것입니다. ~ 한마디로 일본은 지금 <재정적 과속상태>를 지속해야 하는데,
중요한건 <페달을 뗄 수 없다>라는 점입니다. ... 앞서 제가 슘페터의 <창조적 파괴>를 언급했던
이유와 일본 금융상황에 대한 예전의 글 제목을 <금융의 전인미답 - 일본의 부채실험 이야기>라고
정했던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일본의 무한정 양적완화의 궁극의 모습은 무엇일까? ~ 아니 그전에 먼저 양적완화를
논하려면 달러($)가 우선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의 개인적 견해는 바로 <본위(Standard)>의 문제라
생각됩니다. ... 다시 말해 달러($)와 엔화의 양적완화의 핵심은 바로 <본위>의 존재 여부입니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랜 시간동안 신뢰받았던 통화는 바로 금(Gold)이었습니다. 그러다가 1944년
<브레튼우즈 체제>로 세계가 가장 사랑(신뢰)하는 통화는 금에서 달러($)로 전환됩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당시 미국이 전 세계 금의 70%이상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즉 달러($)는 언제든 금(gold)으로 교환될 수 있는 통화였기 때문에, 달러의 본위, 즉 달러의 가치는
결국 금(Gold)이 보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 그러나 한국전쟁(6.25전쟁)과 베트남 전쟁 등으로
세계에 달러 공급이 엄청나게 증가하자 달러($) 신뢰에도 서서히 균열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2008년 말의 서브프라임 사태는 달러($) 신뢰에 더한 충격을 가한 대사건이었습니다. ... 결국
달러($)가 다시 세계인의 신뢰를 회복하려면 초창기 브레튼우즈 체제에서처럼 달러에 <가치>가
부여될 수 있는, 즉 금(Gold)과 같은 본위가 풍부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미국에 금(Gold) 말고
또 다른 본위가 존재하는가? ~ 물론 미국은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많은 금을 보유한 국가입니다.
인류가 선사시대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채굴한 금의 양은 대략 1억 3,000만 킬로그램(13만톤)
입니다. 이것은 한 면이 약 20미터인 정육면체 크기에 해당하는데, 유럽의 평범한 4인 가족이 사는
연립주택규모 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는 매년 약 2,500톤의 금이
생산(채굴)되고 있으며, 대부분은 장신구로 가공되고 일부는 의료용(치과)과 산업용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 더불어 지금까지 생산된 전체 금(Gold)의 약 25% 정도는 금괴의 형태로 전 세계
중앙은행 금고에 보관되어 있는데, 전 세계에서 금을 가장 많이 보유한 곳은 미국 정부입니다.
미 재무부의 금 보유량은 약 8천톤 정도이며, 이 수치는 세계 각국 정부 금 보유량 전체의 3분의
1에 이르는 규모이며, 단일 기관으로 따지면 뉴욕연방준비은행이 맨해튼의 지하 수장고에
약 2만5,000개의 금괴를 보관하고 있으며, 뉴욕연방준비은행의 금 보유량만 해도 전 세계 금의
3%수준에 이릅니다. ... 더불어 이와 비슷한 양의 금(Gold)이 켄터키주 포트녹스(Fort Knox)의 지하
금고에 보관돼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그런데 이것과는 별개로 미국에 이제 금(gold)에
버금가는 <셰일(shale)> 이라는 새로운 본위가 더해졌습니다. ... 이는 달러($)에 대한 강한신뢰가
당분간은 계속해서 지속될 것으로 예측된다는 뜻입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들 중에서 현금이 있는 분들은 아무 지폐나 꺼내서 자세히 한 번
들여다보시길 바랍니다. ... 지폐 상단 중앙에는 <한국은행> 이라고 인쇄되어 있으며, 뒷면에는
<Bank of Korea> 라고 인쇄되어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만약 달러($)가 있는 분들은
달러($)도 함께 확인해 보시죠. ... 아마 <Federal Reserve Note> 라고 선명하게 인쇄된 영문을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 Federal Reserve Note 는 ‘연방준비은행권’을 뜻함.]

<한국은행 Bank of Korea>, <Federal Reserve Note> ... 이것은 곧 화폐의 발행주체가 누구인가를
화폐 소유자에게 명확히 주지시켜주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화폐소유자’는 가지고 있는 동전과
지폐 액면에 표시된 금액만큼의 ‘명목가치’를 화폐 발행주체로부터 언제든지 되돌려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또한 화폐발행주체(한국은행, 미연준Fed)도 당연히 화폐 액면금액 만큼의 가치를
화폐 소유자에게 반드시 되돌려줘야 하는 의무가 있기 때문에 ‘화폐발행주체(중앙은행)’ 입장에서는
이미 발행된 화폐(지폐, 동전)는 명백한 <부채(debt)>인 것입니다. ... 결론적으로 우리가 평범한
일상에서 아무런 의심 없이 사용하는 1천원, 1만원, 5만원 같은 지폐와 동전들, 즉 <현금>이라는
통화는 우리나라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의 <채무증서>인 셈입니다.(@ 달러도 연준의 채무증서임)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생깁니다. ... 만약 누군가 5만원권 1장을 들고 한국은행에
찾아가 “5만원의 가치를 돌려주세요!” ~ 라고 한다면 과연 한국은행은 그 5만원의 가치를 어떤
방법으로, 또 어떻게 돌려주는 걸까?

개인 및 기업들 사이에 일어나는 보편적인 (채권-채무) 관계라면 ‘5만원의 가치’를 비슷한 금액의
케이크(현물)나 영화.연극 같은 문화서비스로 돌려주는 게 가능합니다. 그러나 연준, 한국은행처럼
한 나라의 중앙은행은 화폐소유자의 지불요구에(5만원) 대해 또 다른 <채무증서>, 즉 1만원권
5장이나 또는 1천원권 50장으로 5만원의 지불요구를 되돌려 줍니다. ... 다시 말해 어느 나라든지
각 나라 중앙은행들은 화폐소유자의 지불요구를 자신들이 발행한 또 다른 <화폐(채무증서)>로만
돌려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ex). [5만원은 1만원 5장 ... 100달러($)는 10달러 10장]

그럼 이 논리를 그대로 수용한다면, 현재 일본에서 진행되고 있는 무한정 양적완화 상황은 크게
염려하지 않아도 될 거 같습니다. ... 다시 말해, 만약 엔화 소유자의 지불요구가 언제든 발생해도
일본중앙은행(BOJ)이 또 다른 ‘채무증서’ 즉 새로운 화폐발행(Money Printing)을 통해서 대응한다면
일본의 고민은 한순간에 사라질 것입니다. ~ “가능한 주장일까?” ~ 결론부터 말씀드린다면, 결국
<엔화 붕괴>라는 파국을 맞이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세계 최고수준의 산업
기술력과 GDP 세계 3위라는 경제 강국의 이미지(명성)가 지금까지는 엔화의 신뢰에 든든한 바탕이
되었지만, 이제는 그 신뢰에도 서서히 임계점이 다가오고 있는 모습입니다. 반면 달러($)는 사정이
다릅니다. ... 좀 과장해서 표현한다면 달러를 많이 보유한 국가(혹은 기업, 개인)가 미국에 달러를
제시한다면 미국은 제시된(지급요청) 달러가치를 이제는 셰일(현물)로 돌려주어도 다른 국가들은
큰 불만이 없을 거라는 뜻입니다. ... 예전엔 이걸 금으로 돌려 줬는데, 이후 미국이 세계에 달러를
너무 많이 풀어버렸기 때문에 돌려줄(교환해줄) 금의 가치가 줄어들어 달러에 대한 신뢰가 흔들렸던
것입니다. 이제 문제는 일본입니다. 아니 정확히는 엔화가 되겠죠. 쉽게 말해, 엔화(엔화의 가치)를
보증해줄만한 <본위(Standard)>가 과연 존재하느냐에 대한 문제인 겁니다. 물론 금융의 기술적 부분,
이를테면 우방끼리의 ‘통화스왑’같은 부분을 제외한다면 ~ 아마도 본위에 대한 문제가 미래 엔화의
운명을 판가름하게 될 핵심이라 생각됩니다.]

<◆ 참고: “일본자금이 빠져 나가면 한국에 제2의 IMF가 오는가?”>

최근 많은 분들이 국내에 들어와 있는 일본자금이 빠져나가면 한국에 제2의 IMF사태가 올지도
모른다며 불안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 한국은행 통계자료를 참고로
개인적 견해를 얘기해볼까 합니다.

현재 한국의 외환보유액은 2019년 10월 기준, 4,060억 달러($)이며 ... 외환보유액 구성 비율을
살펴보면 [금(gold) 47.9억 달러($)], [특별인출권(SDR) 33.7억 달러($)], [IMF포지션 26.7억 달러($)],
[외환 3,950억 달러($)]로 ... 전체 외환보유액 중 외환이 97%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또한
보유 외환 중 통화별 자산비중을 살펴보면 ~ 달러($)화 자산이 68.1%, 유로화 20.2%, 엔화 4.9%,
영국 파운드화 4.5%, 기타 통화 7.7%로 달러화 자산과 유로화 자산비중만 더해도 거의 90%에
가깝습니다. 그렇다면 90%에 가까운 달러화 및 유로화 자산의 상품 구성은 어떻게 될까 살펴보면
정부채(국채) 비중이 37.5%, 정부 기관채 19.2%로 이 둘만 더해도 전체의 60%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나머지 ABS(13.2%), 회사채(14.7%), 주식(8.6%)입니다. ... 정리해 보면, 한국의 외환보유총액
4,060억 달러 중 97%가 달러화, 유로화 자산이며, 이들 자산 중 57% 수준의 금액이 모두 정부채,
정부기관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절대금액으로 따져보면 대략 2,240억 달러가 넘는 금액이 모두
달러 및 유로화표시의 정부관련 자산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세계외환보유액 순위로만 따져도 13위
수준에 해당하는 규모입니다. ... 결론적으로 현재 대한민국 외환보유액에 관한 유동성, 즉 현금화
가능성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수준이라 할 수 있습니다. ~ 한마디로 제2 IMF의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뜻이죠.
======

<@ 토막상식: IMF position >
오늘날 IMF는 국제금융시장에서 "상징적 의미" 가 더 중요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만약 A 라는 국가가 IMF의 지원을 받기로 결정된다면 국제금융시장의 수많은 금융기관들이 A에게
대출 및 투자를 재개할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는 뜻입니다. ... 한마디로 A에 대한 'IMF의 지원결정'은
<시장정상화 기능>으로서 역할을 한다는 것이죠.

IMF에 가입하려는 가맹국은 신청서 작성하고 쿼터(IMF Quota)를 할당받습니다. "가입회비" 정도로
쉽게 생각하시면 될 텐데, 아무튼 가맹국에게 할당되는 쿼터는 그 나라의 GDP나 무역규모 등의
경제력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납입하는 회비(쿼터)중 25%는 금(Gold)으로, 나머지 75%는
자국통화로 납입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금(gold)으로 납입하던 25% 부분이 특별인출권(SDR)으로
대체됩니다. SDR은 그냥 직관적으로 표현한다면 전 세계 어딜 가도 금이나 달러($)처럼 돈으로
인정해주는 만국공용 상품권 정도로 생각하시면 편합니다.(제3의 통화) ... IMF의 금융지원정책에는
생각보다 종류가 다양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지원정책 몇 가지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IMF 지원정책 >
(1) Reserve Tranche: 리저브 트랑셰(슈)
가맹국은 자신의 reserve tranche 포지션에 따라 자유롭게 외화를 꺼내쓸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
가맹국은 자신의 출자액의 25% 한도 내에서 상환의무 없이 언제라도 돈(외화)을 인출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처음 회비 납부할 때 25%는 금(Gold)으로 납입했으니, 나중에 꺼내 쓸때도 25% 까지는
마음대로(금, 달러, 엔, 유로 등) 꺼내 써도 된다는 뜻입니다.

(2) Credit Tranche: 크레팃 트랑셰
가맹국이 리저브 트랑셰 부분을 초과해 인출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이 부분은 복잡하니 패쓰!)

(3) 긴급지원정책(1995년부터 실행)
갑작스럽고,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국제수지 방어를 위해 긴급자금을 지원하는 정책자금입니다.

(4) 부채 및 부채상환 삭감을 위한 정책
부채 및 부채상환을 위해 금융지원을 하는 정책, 지원규모는 심사여부에 따라 모두 다르고, IMF가
제시하는 프로그램을 얼마나 잘 완수하느냐에 따라 지속적인 금융지원제공 여부가 결정됩니다.
보편적으로 3개월, 6개월 단위로 금융지원이 결정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분기, 반기보고서로
프로그램 이행여부 계속보고) ... 한 마디로 “말 잘 들으면 계속 돈 꿔주겠다!” 이런 의미입니다.

이렇듯 IMF 가맹국은 ... 자신이 출자한 출자액 한도 내에서는 언제든지 돈을 꺼내 쓸 수 있으며,
출자액을 초과해서 지원받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긴급한 상황이 닥쳤을 때도 지원 받을 수 있으며,
아프리카 같은 최빈국들에는 양허성(시혜적) 융자제도도 존재합니다. 특히 이런 ‘양허성 융자’에는
금리가 제로(0)에 가깝습니다. ... 1997년 우리나라의 외환위기처럼 과도한 (단기)부채위기 같은
경우에는 IMF가 제시한 프로그램에 대해 성실히 이행하고 있다는 분기(반기) 보고서 등을 제때에
제출하면서 높은 이자에 원금도 잘 갚아 나아가야 합니다. 2010년 유럽 재정위기당시 그리스도
이 범주에 포함됐었습니다. 이외에도 환율안정기금, 특별신용융자 등 다양한 지원제도가 있으며,
인출방법과 한도 및 상환기간, 수수료율 및 이자율 등은 ... "현재 가맹국이 어떤 상황인가?" 에
따라서 모두 다릅니다.
======

이제 정리를 한 번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 무역 흑자국인 일본이 오히려 적자국(한국)을
상대로 수출규제를 한다는 것은 일반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하기 힘든 행위지만, 이는
국가가 자국의 이익과 생존을 위해 행동하는, 즉 <레종데타(국가이성)>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일본의 셈법이 무엇인지 작은 단서라도 찾아볼 수 있겠다 싶습니다. 그런데 일본의 수출규제는
일본기업들과 지역경제(관광산업)에도 손해가 큽니다. 또한 이번 사태로 한국이 일본의 기술종속에서
벗어나는 하나의 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일본이 한국과의 무역에서 오랫동안 손해를 보고
있었던 상황이라면(적자국) ~ 그래서 그 손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당위적 레종데타’ 라면 지금의
행동에 나름의 정당성이 부여됩니다. 그런데 일본은 애초부터 한국과의 무역에서 손해(적자국)를
보던 국가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굳이 손해를 볼 필요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감수하면서
까지 한국을 상대로 수출규제를 한다는 것은, 지금의 일본의 행동에 <레종데타(국가이성)>를 초월한
그 이상의 다른 특별한 기제가 작동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 글(국제정치편) 부터는 그 얘기를
해볼까 합니다. ~ 바로 앞서 언급했던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입니다.




[@ 2편은 다음 업뎃 게시물중 최대한 한.미.일 관련된 내용이 포함된 게시물에
올려보려 하는데, 만약 그런 게시물이 올라오지 않았다면 ~ 관련성이 적더라도 첫 게시물에
올려보겠습니다. 나머지 3~5편 또한 마찬가지 원칙으로 올려볼 것입니다.
분량이 많아 지면을 홀로 차지하는것 같아 죄송한 마음입니다. 영자님께도 죄송합니다. ]

2019년 10월 27일 일요일

◆ 쿠르드 민족의 슬픈 사연 [by. 물파스]

[◆ 쿠르드 민족의 슬픈 사연]


중동 역사상 가장 슬픈 민족! ... 바로 ‘쿠르드 인’ 아닐까 생각됩니다.
많은 분들은 중동의 슬픈 민족 하면 대개는 ‘팔레스타인 인(Palestine人)’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중동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 삶을 살고 있는 민족은 <쿠르드 인>입니다. ... 쿠르드 민족은
터키, 이라크, 이란, 시리아, 아르메니아 등에 넓게 분포되어 살고 있습니다. 이들은 ‘쿠르드 어’를 사용하며,
특히 쿠르드 인의 대부분은 터키와 이라크, 이란 국경 부근에 집중되어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쿠르드 민족은 왜 이렇게 비극적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영토(국가)>가 없기 때문입니다. ... 아시다시피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인’ 또한
영토가 없어 수많은 박해와 소외를 당한 경험이 있습니다. 이렇듯 <영토 없는 민족>에게는 역사가 말해주듯
늘 ~ ‘비극적 삶’이 수반됩니다.

19세기 러시아는 부동항(不凍港. 일 년 내내 얼지 않는 항구)을 차지하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터키와 이란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습니다.(러시아 남하정책) ... 이때에 이루어진 제2차 러시아-이란 전쟁에서
러시아는 승리하고 지금의 코카서스(러시아 남서부, 흑해와 카스피 해 사이의 지역) 지방과
아제르바이잔 지방을 차지하게 됩니다. ... 한편 이를 지켜본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기 위해
이란을 지지합니다. 이후 영국과 러시아의 힘겨루기에 의해 국경선이 그어지는데(19세기 중엽) ~
이때에 그어진 국경선으로 지금의 터키와 이란, 이라크가 영토가 확정됩니다. ... 그런데 중요한건
이 당시 쿠르드 민족의 대부분이 영국과 러시아의 대립에 의해 그어진 국경선 근처에 모여 살았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 어느 날 평화롭게 한숨 잘 자고 아침에 일어났더니,
자신들이 살던 영토가 터키, 이란, 이라크 이렇게 세 개의 나라로 나눠진 것입니다. ~ 쿠르드 인 입장에서는
너무나 황당한 사태가 벌어진 것입니다. ... 용산구에 살던 사람이 다음날 강남으로 출근하려 일어났더니
서로가 각각 다른 나라가 되어있다면 어떤 기분이 들겠습니까?

이렇게 쿠르드 민족은 아무런 예고나 징후도 없이, 자신들 의지와는 무관하게
민족이 분단되어 버린 것입니다. ~ 그러다가 제1차 세계대전이후 쿠르드 민족의 재통합 기회가 찾아옵니다.
1차 세계대전에 의해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붕괴하고, 새로운 국경을 확정할 필요가 생긴 것입니다.
이때를 맞춰 쿠르드 인들도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갔습니다. ... 그러나 전후 중동에서 영향력을 키운
영국과 프랑스는 어떻게 하면 ‘자국에 좀 더 많은 권리를 가져올까’ 에만 신경을 썼습니다. 이 때문에
영토와 자원 등 그 어떤 이권도 없는, 오히려 불안정한 요인이 될 쿠르드 민족의 독립 따위에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더불어 쿠르드 인들의 독립운동도 터키, 이란, 이라크 각각의 영토 안에서
산발적으로만 이루어졌기 때문에 쿠르드 민족 전체를 아우르는 독립운동으로까지 전개되기에는
한계가 많았습니다. ... 그렇지만 이때의 독립운동은 쿠르드 인의 <민족의식>을 꽃피운 계기가 되어
오늘날까지도 지속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가는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정리해보면 ... 오늘날 대략 4천만 명 수준으로 파악되고 있는 쿠르드 인들의 대부분은
터키, 이란, 이라크, 시리아, 이렇게 4개국에 걸쳐 넓게 분포되어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쿠르드 인들이
하나로 통합하려면 ~ 결국 이들 4개국 중 누군가가 자신들 영토의 일부를 내놔야(제공) 합니다. 하지만
이는 지금으로서는 거의 실현불가능하며, 그렇기 때문에 독립국가 건설은 머나먼 미래의 과제로만 남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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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발발하면 아군이든 적군이든 결국 어느 한 쪽은 승리나 패배를 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의 (보이지 않는)피해가 발생하기 마련입니다. ~ 이러한 애꿎은
민간인의 피해를 가리키는 군사 용어가 바로 콜래트럴 데미지(Collateral Damage)이며,
우리말로는 "부수적 피해" 혹은 "이차적 피해" 라고 번역됩니다.

2018년 4월 13일(미국시간)
미국과 그 동맹국들(영국, 프랑스)이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에 토마호크 미사일 100여기를 발사하며
대대적 공습을 시작했었습니다. ... 시리아 정부가 반군을 상대로 잔인하게 화학무기를 사용했다는 것이
공습의 명분인데, 당시 공습 소식은 전파를 타고 빠르게 세계로 퍼져나갔습니다. ~ 한국의 언론들 또한
새벽부터 공습 소식을 전하느라 분주했고, 지상파 메이저 언론들도 저녁 뉴스의 첫 꼭지를
미국의 시리아 공습으로 장식했습니다. ... 그런데 당시 지상파 언론들은 저녁뉴스의 헤드라인 제목을
미국 국가안보보좌관인 매파 존 볼튼(John Bolton)의 <‘첫 작품’> 이라고 표현했던 것이 아직도 제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있습니다.

무고한 인명이 살상되는 전쟁 공격이 당사자의 공간에서 <잔인함>으로 현실화될 때,
또 다른 공간에서는 품격 있는 <첫 작품>으로 승화되어 갈채를 받기도 하는 세상입니다.




[@ 지난번 얘기했던대로 한.미.일 관계에 대한 글이 이번주 내에 최종 마무리가 될 것 같습니다.
아마도 지금까지 이슈인에 올린 글 중에서 가장 분량이 많은 글이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래서
글은 4~5편으로 나눠서 올려볼까 생각중입니다. ~ 기온이 많이 차졌습니다. 건강 잘 챙기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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썰전에서 이철희가 맨날 꼭 그렇게만 볼게 아니구요 가 생각나네
물파스 반대로만 생각하는 사람인가? 언더도그마현상이라고 강자는 나쁜넘이고 약자는 착한자라고 착각하시나?

화학무기는 불특정다수를 죽이는 무기고 토마호크는 유도미사일이라 정확히 군사시설만 공격했을텐데
무고한 시민 안죽이고 적만 공격했으면 당연히 첫작품이라 말할수도 있는거지

IS가 쿠르드족을 공격해서 미국이 도와준거지 쿠르드족이 미국을 도와준게 아닙니다 IS가 퇴치된 마당에 적국 시리아사람을 도와줄필요가 없는거 아닌가요?

터키에선 쿠르드족이 테러일으키고 시리아정부가 자기네 국경안에 쿠르드족을 도와주겠다고 하는데 피아구별좀 하세요 ,반미주의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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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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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터키 공화국을 건설한 '무스타파 케말(케말파샤)' 대통령은
모든 종교와 민족색을 철저히 배제하고 터키의 민주화만을 목표로 세우게 됩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케말파샤는 "터키 영토엔 오직 터키인만이!" ~ 라는 슬로건을 내세우죠.
한마디로 터키 영토안에 살고있는, 터키 국적을 가진 모든 이들에게는 그 어떤 차별이나 박해없이
모두 다 평등한 대우를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 표면적으로만 보면 상당히 평화적이고, 또한
민주적인 의미로 해석됩니다.

그런데 쿠르드족 같은 '소수민족' 입장에서보면 케말파샤의 정치성향은 상당한 위협으로 다가옵니다.
실제로 당시 케말파샤의 슬로건이 실제 정책으로 이어지자 수많은 문제들이 발생했습니다.
터키에 사는 소수민족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쿠르드족을 케말파샤는 어떻해서든
<터키인>으로 강제 동화시키려고 했던 겁니다. ... 우선 쿠르드어 사용금지, 쿠르드 인쇄물 금지,
쿠르드 문화(이를테면 결혼, 장례 등) 금지 등 ... 결국 케말파샤의 정책은 소수민족의 차별과 박해로
이어졌습니다. 그 과정에서 잔인한 학살도 일어났죠.

쿠르드 인들도 <쿠르드 노동당(PKK)>이라는 무력조직을 결성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갑니다.
중간 중간 이라크와 터키가 연합하여 PKK 를 공격하는 사태로 일어났죠. ~ 1979년 사담 후세인이
정권을 잡았을땐 이라크 거주 쿠르드족은 처참할 정도의 살육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쿠르드족이 테러집단 이라고요?
이란, 이라크, 터키, 시리아 ... 중동 그 어느지역에서도 환영을 받지 못하는 비극의 민족이
자신들의 독립을 위해 총을 든 것을 테러라고 규정 하신다면 ~ 저는 더 이상 할말이 없네요.
님의 논리대로라면 ~ 일제 강점기 우리의 독립운동가 분들도 테러집단으로 규정해야 합니다.

지금의 사태가 왜 일어났는지, 그 이전의 역사적 과정은 모두 깡그리 무시한채
전 세계 그 어느누구도 풀기힘든 오늘날 <중동의 종교 및 민족>의 역학관계에 대해
너무도 단순하게 ... "니가 옳다, 그르다", 혹은 "내편과 니편" 처럼 피아를 식별하는 문제로
간단히 치환시켜버리는 님의 스킬에 그저 감탄(?)만 절로 나올뿐입니다!

참고로 저는 친미, 반미 이런거에 관심 없습니다.
지금까지 이슈인에 올린 글들 대부분은 '이즘(~ ism)'을 제거한 글 입니다.
저는 상식과 사유를 논하고 싶은 사람입니다.

부동산과 경제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