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4월 4일 목요일

◆ 등본 ‘낯설게 하기’로 바라보다 - 우리동네 주민센터 방문기 [by 물파스]

[◆ 등본 ‘낯설게 하기’로 바라보다 - 우리동네 주민센터 방문기]


등본이 필요해 집에서 20분 거리에 있는 우리 동네 주민 센터를 방문했습니다.
인터넷으로도 발급이 가능하다고 하던데, 집에서 멀지 않으니 그냥 직접 방문해보기로 합니다.

< 우. 리. 동. 네. 주. 민. 센. 터 >

주민 센터는 건물 2층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반드시 1층을 지나쳐야 했습니다.
“꺄르르 ~깔! 깔!” ... 1층에 자리한 구립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형형색색의 놀이동산
풍선처럼 너무나 다채롭게 흘러나와 고막이 마치 단맛을 느낀 듯합니다. ... 그렇게 귀에서 단맛이
느껴질 때쯤 시선은 건물 오른편 귀퉁이로 향했는데, 그곳에 폐형광등 수거함이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또 건물 왼편으로는 '유용미생물(EM) 배양액'을 약숫물처럼 무료로 받아갈 수 있는 거대한
탱크(공급기)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유용미생물(EM) 배양액은 물에 희석해 사용하면 친환경
주방세제로 쓸 수도 있고, 악취 및 곰팡이 제거에도 꽤나 쓰임이 좋다고 합니다.

건물 입구 앞 알림판에는 통장 모집공고와 함께 동네소식을 알리는 몇 가지 공고사항이 적혀 있었고,
그 옆으로 나란히 대형마트 전단지처럼 생긴 윤기 나는 컬러풀한 종이에는 얼굴과 죄명, 신체특징, 주소,
나이 등이 상세하게 적혀있는 지명수배자 명단이 게시되어 있었습니다. 참고로 수배자의 70% 정도는
모두 사기범죄자였습니다.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가다 층계참 대형거울 앞에 서서 얼굴근육을 격하게 풀어봅니다.
거울 속 나는 여전히 청춘이지만 그 청춘이 바라보는 거울 밖의 나는 오늘따라 왠지 더 쓸쓸하고
늙어 보입니다. ... 나이를 먹는다는 것, 아니 좀 더 잔인하게 <“누가 늙은 사람인가?”> 라고 물어본다면
모두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명쾌한 답이 있을 수 있을까? ~ 노년 및 노인의 복지정책을 연구하는
팻 테인 교수(Pat Thane. 런던대학 킹스 칼리지. 역사학)는 이렇게 답합니다.

<‘늙었다’는 소리를 들어도 항의하지 않는 사람>

아무리 현대의학이 발전했다고 해도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노년의 신체적 특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 남자는 머리카락이 빠지고 여자는 젊을 때보다 얼굴에 털이 더 많이 자라나는 경향이
나타납니다. 청력은 쇠퇴하기 시작하고 칼슘 부족으로 시력이 저하됩니다. 또한 몸은 나빠진 시력을 위해
부족해진 칼슘을 다시 눈에 축적하게 만드는데, 이 때문에 신체 다른 부분에서 칼슘부족으로 뼈가
물러지고 자주 부러지는 일들이 발생합니다. 피부는 건조해지고 탄력이 줄어들어 주름이 늘어나고
살은 힘없이 처지게 됩니다. 코는 커지고 입은 쪼그라듭니다. ... 그리고 이러한 노화의 과정은 전반적으로
노인의 신체를 젊었을 때보다 약간은 줄어들게 만듭니다.[@참고: 노년의 역사/ 팻 테인/ 글 항아리 출판]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 역시 “늙었다“라는 소리에 적극적으로 항의하지 않는 날이 찾아올 것이며,
그때쯤이면 주민 센터 알림판의 수배자 전단지 크기도 현재보다는 조금은 더 작아지게 될 것입니다. 물론
내가 ‘늙음’에 대해 항의하지 않는 순간까지 그들이 검거되지 않는다면 말이죠.

거울 앞에서 잠시 사색에 잠겼다가 밑에서 들려오는 한 무리의 걸음 소리에 다시 2층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약간의 온기와 함께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이곳저곳을 서성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의도하지 않았지만, 나 또한 (고개를 약간 치켜든 상태에서)주민들과 섞여
주민 센터 이곳저곳을 서성거립니다.

책장에 꽂혀있는 몇 권의 책들을 훑어보다가 책장 옆으로 공구 대여함이 보입니다.
살면서 일 년에 꼭 한두 번은 특수공구가 필요할 때가 생기는데 ... 해머드릴, 목재용 전기톱, 렌치세트 등
년에 한두 번 사용하려고 구매하기에는 조금은 부담스러운 가격의 특수공구들을 주민들을 위해 센터에서
무료로 대여해 준다고 합니다(3일)

공구 대여함 뒤쪽으로 돌아 나오니 자동혈압측정기가 보입니다. 본인의 혈압을 측정하던 할아버지를
구경하던(혹은 다음 순서를 기다리던) 몇몇의 어르신들을 구경합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자동혈압측정기
옆에는 체성분분석기(인바디)까지 설치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본인의 몸 상태를 점검하던
어떤 아주머니는 나에게도 한 번 해보라며 권유합니다. 괜찮다고 말하자 아주머니는 계속 말을 이어갑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칼 가는 사람이 와서 공짜로 칼도 갈아주고 가끔은 자전거 수리하는 분도 오셔서
재능기부를 하신다고 ~ 요새 주민 센터가 좋은 행사를 참 많이 한다며 칭찬 일색이었습니다. 그때 복지과
담당 직원이 지나가면서 한마디 거듭니다. 원래는 동네에서 열쇠집하는 아저씬데 칼 가는 솜씨가 좋아
자발적으로 봉사하시는 거라며, 사거리 복권방 옆에 있는 열쇠집이라며 위치까지 알려줍니다. ... 그러자
아주머니는 큰 깨달음을 얻은 듯 그 즉시 나를 보며 얘기합니다.

"원래는 사거리 복권방 옆에 있는 열쇠집 아저씬데, 칼을 아주 잘 간데요 ~ "

분명 동시에 같이 들었는데, 아주머니는 반복하여 내게 칼 가는 아저씨의 정체를 재확인 시켜줍니다.
흥이 났는지 복지담당 직원이 또 다른 정보를 전해줍니다. 오늘 저녁 3층 강당에서 요가와 체형교정
운동 강습이 있다며 참석하면 도움이 많이 될 거라 얘기합니다. 체형교정 운동이 요가와 어떻게 다른지,
또 어떤 운동인지 너무 궁금해서 물어보려다 그만 둡니다. 평소 주민 센터를 방문할 일이 거의 없었던
터라 나름 볼거리와 다양한 행사가 많다는 사실에 생각보다 많이 놀랐지만, 세련되지 못한 주민처럼
보일까봐 일부러 티를 내지는 않았습니다.

번호표를 뽑고 자리에 앉아 기다리면서 주위를 계속해서 찬찬히 둘러봅니다.
각종 민원서류를 발급하는 창구 직원 뒤쪽으로는 열일하는 복사기와 프린터가 수많은 서류들을 계속해서
쏟아내고 있었는데, 그 광경이 마치 동네 목욕탕에 가면 목구녁 깊숙이 칫솔을 넣고 ‘우~웩!’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흔한 아저씨와 닮아 있고, 또 만취한 중소기업 과장의 구토하는 모습과도 많이 닮아 있었습니다.

얼마의 비용을 지불한 사람들은 건네받은 서류를 한동안(누가 생각해도 짧은 시간이지만, 꼭 ‘한동안’
이라고 표현하고 싶게 만드는 참 미묘하게 짧은 시간)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서 들여다봅니다. 자세히
들여다봐도 가족관계나 집 주소 등을 빼놓고는 분명 새로울 것이 없어보였는데 본인들은 큰 깨달음을 얻은 듯,
입을 야무지게 악다물고 주민 센터를 나갑니다. 그러는 동안에도 센터에는 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들고나가며
분주합니다.

우리 동네에는 생각보다 많은 주민이 사는 것 같았습니다. 지역별(구별) 인구통계를 살펴본 적이 없으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 동네에 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에도 몇 명의
주민들이 센터를 방문합니다. 내 차례가 되어 신분증을 제시하고 등본을 발급받습니다. ... 비용을 지불하고,
그리고 나 또한 한동안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서 서류를 뚫어져라 쳐다봅니다. 낯설지 않은 가족들 이름과
집 주소를 확인하고, 무언가 큰 깨달음을 얻은 듯한 얼굴표정과 동시에 악다문 입모양을, 나보다 순서가 늦은
다른 주민들에게 선보입니다.(원래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 그리고 등본에 계급이 표시되지 않았다는 걸
다행이라 생각할 때쯤 서글픈 상상하나 떠오릅니다. ~ 시나브로 등본이 낯설어 집니다.

(◆ 등본에서 내 이름 하나만 남게 되거나, 등본에서 내 이름 하나만 사라지거나 ... )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는 원래 러시아 형식주의의 대표적 이론가인
‘빅토르 시클롭스키(victor Shklovsky)’가 정의한 예술기법이론입니다. 특히 문화예술 영역이
자기정체성을 공고히 유지하기 위해서는 창조나 창의, 즉 기존에 없던 것을 새롭게 만들어 내거나
원래 있던 것을 재구성하여 전혀 다른 새로운 시선을 끊임없이 제공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시선이나 사유들은 보편적으로 우리의 반복되는 일상에서보다는 새로운 경험,
이를테면 여행(탐험)이나 봉사활동, 삶의 위기(사고, 질병, 사별 ... ) 등을 경험할 때 얻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마디로 지루하고 반복적인 일상보다는 그런 일상에서 과감히 탈출했을 때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새로운 사유를
얻을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 더불어 일상의 탈출은 곧 <낯선 경험>이 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낯선 경험>을 일상처럼 자주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낯선 경험은 말 그대로
삶에서 어쩌다 한 번씩 나를 찾아오는 ‘(낯선)손님’과 같습니다. 결국 <일상의 탈출 = 낯선 경험> 이므로,
새로운 시선과 창의적 아이디어를 (많이)얻으려면 자신의 일상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러나 일상을 포기하면
그 순간부터 ‘일상포기의 삶’ 자체가 또 다른 일상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아주 많이(자주)
<낯선 경험>을 만들어(생산) 낼 수 있을 것인가? ~ 이러한 고민 끝에 나온 발상이 바로 시클롭스키의
<낯설게 하기>인 것입니다.

시클롭스키의 <낯설게 하기> 이론은, 낯선 경험을 일상처럼 자주 할 수 없다면 차라리 반복되는 일상 자체를
낯설게 바라보자는 의미입니다. 매일같이 마주하는 상황이나 풍경 등을 마치 처음 보는 아주 낯선 일처럼
바라보는 것인데, 이는 <의심과 반성>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즉 평소에 너무나 당연시하던 일들을 한번쯤 가볍게
의심해 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인데 ... 예를 들면, 신호등에 파란불이 켜지면 건너고, 빨간불 상태면
왜 정지해야만 하는지, 그런 규칙은 누가 정했으며 또 어떻게 시작됐는지 같은 의심과 반성 말입니다.
좀 더 알기 쉽게 설명해본다면, 수십 년을 신호등 체계아래서 생활해온 어른에게는 신호등 체계는 아무런 의심 없이
그냥 당연하게(수동적으로) 받아들여야할 공동체의 암묵적 약속입니다. 그러나 이제 막 말을 배우고 주변의 사물을
인식하기 시작한 아기에게는 신호등의 (교통)체계를 논하기 이전에 아예 <신호등> 이라는 그 둔탁한 ‘사물’ 자체만으로도
매우 신기한(낯설다) 경험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아이의 시선이 <낯설게 하기>인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건
수신자가 정보를 보낸 송신자의 의도대로 정보를 일방적으로(수동적으로)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
바로 <낯설게 하기>의 핵심인 것입니다. 그래서 신호등을 교통 시스템의 부속이 아닌 거리의 <조형물>로 바라보는
시선도 <낯설게 하기>의 좋은 예라 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낯설게 하기>는 평범한 일상을 너무 당연하게만 받아들이지 말고 한 두 걸음 뒤로 물러나
일정한 거리를 두고 지켜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일상을 <낯설게 하기>로 만들면 평소에는 잘 보이지
않던 것들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거기서 우리는 새로운 시선과 참신한 아이디어를 얻게 될 것입니다.
[@ ‘낯설게 하기’는 생각(사유)과 사물, 현상 등 다양한 분야로 확장해서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낯설게 하기>를 직관적으로 느껴보기 위해 하나의 사례를 참고해 봅니다.

[◆ 띵동! ~ 띵동! ... 쿵! 쿵! 쿵!
적막이 흐르던 새벽 3시 무렵, 누군가 철수의 오피스텔에 찾아와
벨을 누르고, 문 또한 급하게 두드립니다. 문을 열어보니 철수의 20년 지기
동건 이가 서있었습니다. ~ “지금 회사에서 물건 찾아오기 게임을 하고 있는데,
대략 가로 1미터, 세로 약 2미터 정도 되는 철판을 찾고 있어! ~ 가장 먼저
찾아오는 사람에게 상금이 자그마치 1억이다! 철수 니가 도와주면 상금 절반인
5천만 원을 줄께! ~ 도와주라!“ ~ 취업에 성공해 이제 입사 1개월 된 동건은
자신을 포함한 신입사원 전원에게 회사에서 과제를 주었다고 합니다.
철수는 5천만 원이라는 거액에 잠시 흔들렸지만, 새벽 3시인 지금 동건을 도와줄
마땅한 방법이 없었습니다.

“미안하다 동건아! ~ 아무리 생각해도 당장은 방법이 없는 것 같다!”

그렇게 말하곤 철수는 가로 1미터, 세로 2미터짜리 오피스텔 철문을 닫았습니다.]

우리는 보편적으로 자신이 사는 집의 문을 <큰 철판>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멍청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반복적인 일상이 본인의 삶과 관계된 주변의 모든 사물과 사유와 현상들을 그냥 당연하게
받아들이도록(수동적, 자동적) 만들면서 그 어떤 새로움이나 신선한 아이디어를 발견할 수 없도록 하나의
익숙한 패턴(일상)을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패턴이 형성됐다는 것은 결국 <‘일상’이라는 정보 송신자>의
의도대로 우리의 삶이 무기력하게 그냥 그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 그래서 창의적인
생각이나 새로운 시선을 얻으려면 일상 자체를 <낯설게 하기>로 만듦으로써 가능성을 높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낯설게 하기>는 이후 독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1898~1956)'가 연극이론에
도입하면서 중요한 결실을 맺습니다. 연극은 무대와 객석의 경계가 분명합니다. 따라서 본인이 관객이라면
<"나는 지금 연극을 거리를 두고 보고 있다(낯설게 보다)">라는 감정이 브레히트 연극이론의 핵심입니다.

무대 위, 배우의 연기가 압도적으로 뛰어나다면 관객은 자신도 모르게 그 배우의 연기에 <동화>되어 버립니다.
<동화 되었다>는 것은 결국 관객이 연극에 푹 빠져버렸다는(몰입) 뜻인데 이는 연극을 낯설게 바라보지 못했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브레히트의 <낯설게 하기>는 관객들의 동화를 가장 꺼려해야할 행동이라 주장합니다.

관객이 무대장치와 배우의 연기에 너무 강하게 몰입하고 동화된다면(감정이입), 어느 순간부터는 무대와
객석의 경계가 흐려지면서 연극을 "보고있다"가 아니라 "연극을 주입당하고 있다(송신자의 의도대로)"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극의 각종 무대장치와 배우의 훌륭한 연기에 관객이 감정적으로
동화된다면 관객은 연극의 배후에서 펼쳐지는 여러 복합적인 관계들을 통합적 시선에서 바라볼 수 없게
됩니다. 한마디로 연극이 연극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진짜 현실처럼 받아들여지는 매우 위험한 순간이
찾아올 수도 있다는 것이죠. ~ 이쯤 되면 관객의 상태는 수많은 등장인물들의 각각의 성격과 플롯 및
장치(데우스 엑스 마키나. deusexmachina)의 배치문제 등이 어떻게 절묘하게 섞여서 한 편의 연극으로
흘러가는지를 전혀 파악할 수 없게 됩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 쓰인
무대 기법의 하나. 초자연적인 힘을 이용하여 극의 긴박한 국면을 타개하고 결말로 이끌어 가는 기법이다.
에우리피데스가 즐겨 쓴 수법으로, 기중기와 같은 기계를 이용해서 갑자기 신이 공중에서 나타나
위급하고 복잡한 사건을 해결하는 데서 나온 말이다.(다음백과 참조)]

그래서 브레히트는 연기자에게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는 사항이 <"주인공이 고통 받는 장면이 나오면
함께 아파하지 말고, 아 이것은 한 편의 연극이구나.">라고 관객 스스로가 느낄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했으며, 그것의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낯설게 하기>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가끔씩 우리의 (막장)드라마
시청자 게시판을 들여다보면, 배역(특히 악역)에 대해 너무 과몰입한(동화) 사람들 상당수가 캐릭터의 특징과
(상징적)소품 등이 드라마의 플롯상에서 어떤 인과성이나 상관성을 가지고 있는지 파악하기보다는 무조건적,
일방적 비난만을 쏟아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럴 경우 드라마 전체(종합)가 아닌 부분만 남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제발 현실과 드라마를 구분 좀 하라'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 결론적으로 브레히트의
<낯설게 하기> 이론은 동화되는 감정을 의도적으로 파괴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연극을 수시로 모니터링
하게하고(‘거리를 두고 낯설게 보라!’) 연극의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할 수 있게끔 하라는 것입니다.

보통의 시각에서 연극이나 영화, 드라마 속 배우들이 연기를 압도적으로 잘 한다면 그것만큼 보는 이를
즐겁게 하는 것은 없을 겁니다. ... 그런데 이렇게 너무나 당연시되는 사실들에서 한 발짝 물러나 사태나
상황을 <낯설게 바라본다면(낯설게 하기)> 극을 보는 새로운 시선이 생겨날 것입니다. 흔한 일상(적)이라
생각했던 것에 대하여 한 번쯤 낯설게 바라봄으로써 새로움 ~ 예를 들면, 그 일상의 이면에서 조용히
흐르고 있는 숨은 역사성이나 변증법적으로 발화되는 창발적 모습 등을 발견하라는 거죠. ... 그래서 저도
더 이상 등본을 사무적(일상적)으로만 보지 않고, 약간의 거리를 두어 낯설게 바라보려 합니다. 너무나
당연해서 그동안 “공문서!” 그 이상의 의미부여를 하지 않았던 등본을 예전 보다 낯설게 바라보며 좀 더
새로운 시선을 찾아내고 싶다는 뜻입니다. (@소모적 의미부여가 아닌 창조적 발견)

(◆ 등본에서 내 이름 하나만 남게 되거나, 등본에서 내 이름 하나만 사라지거나 ... )

거지같은 서글픈 상상에 심장 밑 어딘가에 숨어있던 울컥한 마음이 목젖 언저리까지 꾸역꾸역
기어 올라와 쓸쓸히 머물다 사라지기를 여러 번, 그러다 생뚱맞게 작년 말 친구들과 맥주잔을 기울이던
상황 하나가 추가됩니다.

"나는 연합뉴스TV 기상캐스터! ~ 걔 누구더라 걔 있잖아! ~ OO가 참 좋더라!"
"나는 MBC가 제일 좋던데 ~ “
“기상캐스터보다는 스포츠 아나운서가 더 낫지”
"소심한 놈들 ~ 원래 (모든)기상캐스터와 스포츠 아나운서는 그냥 다 좋은 거야!"

"4시 44분! ~ 그 뭐냐 시간 보면 항상 444에 걸려! ~ 그거랑 똑같아!
기상캐스터 나올 때면 항상 와이프가 옆에 있어! ~ 아니 없다가도 그냥 생겨나!
막 생겨! ... 그러면 나도 모르게 채널 딴 데로 돌리는데, 처음엔 별 신경 안 쓰다가
몇 번 반복되니까 와이프가 한마디 하더라고 ‘둘이 연애 하냐? ~ 뭐가 찔려서 채널 돌리는데?’ 라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 거야 ‘어 그냥 뉴스 끝나서’ 라고 대충 얼버무리는데, 이게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어느 순간부터 나 스스로 자기검열을 하고 있는 거야 ~ 그래서 슬퍼!“

“슬프긴 뭐가 슬프냐? ~ 그래도 와이프랑 애들이랑 함께 살 때가 좋은 거야.”

캘리포니아 대학의 세계적인 사회학자 아네트 로손(Annette Lawson)은 간통을 바라보는
남녀의 시각이 어떻게 다른지 본인의 책 <애인을 꿈꾸는 이유>에서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여성들은 일반적으로 결혼생활에서 누리지 못하는 감정적인 원인을 간통의 이유로 내세우는
경향이 강하다고 합니다. 설문에 참여했던 대부분의 여성들은 하나같이 간통을 통해 자기 자신을
재발견 하는 기회가 됐으며, 더 나아가 이전보다 더 발전된 자신을 경험했다며 본인의 간통을
<미화>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 반면 남성들은 간통을 결정하면 가장 우선적, 실질적으로 고려하는
사항이 바로 <간통으로 유발될 수 있는 위험>이었다고 합니다.

결론적으로(아네트 로손의 연구를 전적으로 신뢰한다면) ... 여자에게는 간통이 자기 자신이
새롭게 태어나고 현재보다 더 나은 미래로의 전진을 뜻하는 일종의 진보적 출구의 의미가 될 것이며,
반면 남자에게는 본격적으로 위험부담이 시작되는 입구의 압박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흔해빠진 지하철 손잡이처럼 질기게도 참 질기게도 버텼지만 결국 가족 순위권 끄트머리로 밀려나
등본에 위태롭게 박혀있는,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낭만적 사랑을 기대할 수 없는 그런 몇 놈의 유부남들이
만나서 하는 대화란 것들이 대게는 거기서 거기이듯, 그때 우리들은 꽤나 큰 입구의 위험부담(?)을 안고서
각자의 이상형을 TV기상캐스터와 스포츠 아나운서에 투영해 사뭇 진지한 대결을 벌였습니다. ... 잠시 후,
'한동안' 이라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감지하고 마무리 짓듯 등본에서 눈을 뗍니다. 그리고 나 스스로에게
질문해 봅니다.

< '나는 지금 이상형과 함께 살고 있는가?' >

등본이라는 공문서에 결박되어 문서 끄트머리에 어거지로 구겨 넣어진 신세지만 그나마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만으로도 감지덕진데, 지금 여기서 ‘첫사랑’이나 ‘이상형’ 따위를 따져 묻는 것은 가족에
대한 배신이자 한심스런 사치라 싶다가도 ~ 기러기 아빠로서 이미 등본에 덩그러니 자기 이름 혼자만
남게 된(그리고 조만간 혼자 남게 될) 몇 놈의 친구들 처지를 생각한다면 ~

"그래! ~ 이상형이든, 기상캐스터든, 스포츠 아나운서든
나는 그냥 니들 장단에 맞춰 모든 여자들을 사랑하리라"고 다짐합니다.

<밥 먹고 청소하자 vs 청소하고 밥 먹자>
<잘 때 TV는 끄고 자라 vs 알아서 끈다>
<셔츠 좀 바꿔 입어라 vs 오늘 하루만 더 입을 거다>

따지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 갈등이 깊어져 같이 사는 사람이 미워지면 말과 행동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체취와 소유한 물건까지 모든 것이 미워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위안이 되어야 할 등본 공유의
삶이 때로는 지옥의 조건으로 변할 때가 많습니다. ... 그래서인지 영국의 천재극작가 셰익스피어는
129번 소네트(詩)에서 이성을 향한 욕망에 대해 이렇게 얘기합니다.

<“넋을 잃고 쫓아다니지만, 막상 얻고 나면 원수가 따로 없네.”>

사실 이 말은 인간의 육체적 욕망에 대한 표현입니다. 셰익스피어는 인간의 육욕(肉慾)을 지옥과 천국의
울타리에 모호하게 걸쳐있는 양가적 감정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이 양가적 감정이 육욕을
포함한 전체 삶을 공유하는 것으로까지 충분히 확대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프로이트는
“모순이 공존할 수 없는 것은 오직 논리학뿐이며, 사람의 마음은 사랑과 증오의 감정이 수시로 오고가는
대립의 연속이며, 언제나 모순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리고 슬프지만 오늘날 가족의
의미는 그렇게 정의될 수 있습니다. ~ 아니 굳이 프로이트의 충고가 아니더라도 개인들(부모, 자녀) 각자가
지니고 있던 고유한 모순은 ‘가족’이라는 단일공간으로 모여든 순간부터 카오스적 충돌을 일으킵니다.

가족 안에는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 or 부모, 자녀>와 같이 가족 성원(成員)으로 대표되는, 즉
사회가 만든 보편적 사유(정신구조)가 존재하며, 동시에 한 개별주체(개인)로서의 사유 또한 존재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처음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개별집단(가족)> 이라는 새로운 사유가 만들어져 추가됩니다.
이후 지구적으로 통용되는 사회보편의 정신구조와 개별주체(개인)의 정신구조, 그리고 개별집단(가족)의 정신구조는
생물의 이종교배, 아니 ‘다종교배’라는 이종교배 그 이상의 의미로 정의될 수 있는 혼돈의 결합과정을
거치면서 각각 별개의 독립된 공간으로 분리되는데 ... 이때 이 분리된 공간 안에서 <사회보편의 모순>,
<개인(개별주체)의 모순>, <집단(가족)의 모순>이라는 층위가 서로 다른 모순들이 새롭게 생성됩니다.
따라서 가족의 슬픔은 항상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크기로 다가오게 됩니다. 더불어 우리는 이러한
복잡한 모순관계를 위계적 시선이 아닌, 상대적 또는 대칭적 시선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 모순의 양적 확대와 질적 변화]

[◆ “진즉에 갈라서야 했는데 지금까지 버틴 건 모두 자식들 때문입니다.” ... 부부 갈등이 심한 가정에서는
간혹 자신들의 갈등 문제에 자녀나 타인을 끌어들이려고 합니다. 가족심리학자 보웬은 이런 유형을
<삼각관계>라고 말했는데, 삼각관계가 꼭 연인들 세계에서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또한
삼각관계에 (어쩔 수없이)개입하게 된 자녀는 성인이 된 후에 자신의 부모를 지긋지긋하게 생각하고 결국
부모를 떠나려는(해방)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 지금 본인의 가족(부모)이 매우 큰 짐으로
느껴진다면 아마도 현재 본인이 <삼각관계>에 심하게 끼어있는 건 아닌지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합니다.]

[◆ “피곤해 보이네! ~ 영화 지루해?” ... 부부 갈등에서 자주 쓰이는 방어기제 중 하나가 바로 자신의
심리상태를 상대방에게 투사하는 것입니다. 투사는 내가 상대에게서 느끼는 감정을 상대도 똑같이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내(남편)를 미워하면 아내(남편)도 나를 미워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따라서 현재 지루함과 피곤함을 느끼는 건 정작 본인이지만 이런 감정을 상대에게 전가시키면서 투사가
일어납니다. 피곤함이나 지루함 같은 단순 감정을 전가시키며 일어나는 투사는 그나마 다행입니다. 나름
견딜만하다는 것이죠. 하지만 투사에 쓰일 감정적 재료가 상대에 대한 원망과 분노, 혐오 같은 극단적
감정이라면 부부의 갈등은 극으로 치닫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투사는 부부사이 뿐만 아니라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도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낸 아이는 성인이 되어서도 불행한 삶을 살아갈 가능성 또한 매우 높습니다.
보통 <삶의 부메랑>이라고 하는데, 이 현상에 처음으로 천착한 사람이 바로 프로이트입니다. 프로이트는
우리가 자신도 모르게 어린 시절의 (고통스러웠던)패턴을 반복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 술과 마약 및
도박 중독, 자학과 폭력의 일상성 등은 자기 파괴적 행동 중에서도 상위 목록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극단적 자기파괴는 불행한 인간관계로 이어지며, 불행한 인간관계는 다시 가족 내부로 침투하여 가족
구성원(특히 자녀)의 무의식에 <반복강박>이라는 바이러스를 주입하게 된다고 프로이트는 말합니다. 그래서
반복강박을 가진 사람들은 어린 시절의 고통스런 경험을 성인이 되어서 본인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반복하게 된다고 합니다. ]

가족의 화목의 크기보다 가족의 상처가 더 크다면 이는 <잉여상처>가 됩니다.(내가 만든 말임.) ~ 따라서
아무리 가족의 화목의 크기를 늘려가려고 해도 <잉여상처>를 가진 가족은, 가족내부에 ‘반복강박’이라는
바이러스가 계속해서 자리하고 있다면 가족의 상처의 크기와 깊이(농도)가 화목이 커지는 속도보다 훨씬 더
빠르기 때문에 그 가족은 항상 <잉여상처 가족>으로 남게 됩니다. ... 결국 이 악순환적 고리, 즉 고통스런
삶의 부메랑은 가족구성원 중 누군가 하나는 반드시 죽어야만 바뀔 가능성이 높아지게 됩니다.

한번 굳어진 가족의 패턴은 대개는 <경로의존성>을 가집니다. 그래서 현재 본인의 가족이 분명 어딘가
잘못되었음을 인지하고 있어도 그 경로를 벗어나기가 좀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고통을 겪고
있는 상당수의 사람들은 (가족의)변화를 꿈꾸는데, 그 꿈이라는 것이 보통은 <평범한 가족>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평범한 가족’만큼 모순된 것은 없을 것입니다.

[◆ 예를 들어보자. 만일 내가 자갈밭의 돌들을 하나씩 주워 일일이 무게를 달고
그 평균이 145g 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이 수치는 그 자갈들의 본질에 대해서
나에게 거의 아무것도 말해주지 못한다. 이 발견을 근거로 누군가가 첫 번째 시도에서
145g짜리 자갈을 집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크게 실망하고 말 것이다.
정말이지, 그 사람이 아무리 오랜 시간을 찾아 헤맨다 해도 정확히 145g 나가는
자갈을 발견하지 못할 가능성은 여전히 계속해서 남아있게 될 것이다.
- (무엇이 개인을 이렇게 만드는가?. 22페이지 / 칼 구스타프 융/ 부글북스) ]

융은 이 책에서 “통계적 방법은 이상적인 평균이라는 측면에선 사실들을 보여주지만, 경험적 현실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아무런 그림도 제시하지 못한다.“고 얘기합니다. 결국 통계에서의 평균의 의미는 경험적
현실세계로 넘어오면 <평범함>으로 치환될 수 있습니다. 앞서도 얘기했지만 한 개인의 가정사 안에는
오직 그 가족만이 알 수 있는 다양한 모순들(사회보편, 개별주체, 개별집단)로 가득 차있습니다. 따라서
“평범한 가정에서 성장했다”라는 말은 최소한 (경험적)인간사회에서만큼은 허구에 가깝다고 할 수 있으며
이는 드넓은 자갈밭에서 (0.00 ~ 00001g)의 오차도 없는 정확히 145g짜리 자갈을 줍는 행위와 같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수천만 명이 사는 국가에 등본체계가 제도화 되어있지 않다면 원활한 행정은 불가능할 겁니다. 그러나
등본은 국민 개개인들이 힘겹고도 소중하게 살아온 수많은 날들과 붉은 상처들과 하얀 사연들을 절대로
대변해줄 수는 없습니다. 다시 말해 등본을 아무리 자세히 들여다보아도 그 행위가 사무적(일상적) 행위에서
그치고 만다면 결국 등본은 행정 권력에 의해 일정한 양식으로 규정된 <제도적 가족> 이라는 답답한
한계에 묶일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 따라서 평생을 살을 부대끼며 함께해온 <실체적 가족>이라는
공간[@ 개별 가족사(家族史)]을 이해하려면 지금부터라도 ‘등본’처럼 가족을 상징하는 것들에 대하여
한 번쯤 <낯설게 하기>로 바라보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한마디로 등본을 <낯설게> 바라보며 등본 아래로
조용히 침전해 들어가다 보면 (등본의)형식 이면에서 조용히 흐르고 있던 가족의 역사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 더불어 아무리 갈등이 많은 관계라 하더라도 한 개인에게 가족의 의미는 역시나
가장 중요한 위안의 공급처입니다. 그래서 등본을 공유할 가족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큰 모순이며 처절한 슬픔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 등본에서 내 이름 하나만 남게 되거나, 등본에서 내 이름 하나만 사라지거나 ... )

<우리 동네 주민 센터>에는 공공 어린이집과 폐형광등 수거함이 있습니다.
친환경 세제인 유용미생물(EM) 배양액을 무료로 나눠주기도 하며, 지명수배자 명단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덤으로 본인이 공동체적 사명감이 넘치는 주민이라면 통장에 지원해 볼 수도 있습니다.
주민 센터를 들어가기 전, 층계참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며 잠시 노년에 대한 사색에 빠져볼 수도
있습니다. ... 혈압과 체성분을 분석해 볼 수 있으며, 년 중 한두 번 쓸까 말까한 특수공구도 빌려 쓸 수
있습니다. 요가와 체형교정 운동이라는 것도 배울 수 있습니다. 계절이 바뀌면 동네 열쇠집 아저씨가
공짜로 칼을 갈아주러 오시고, 고장난 자전거를 무료로 수리해 주는 아저씨도 오십니다. 사람이 많아
기다리기 지루하면 비치된 인문서적을 보며 교양을 쌓을 수도 있습니다. 주민들 대화에 끼어들어 몇 마디
거들어주는 친절한 공무원도 만나볼 수 있으며, 발급받은 서류를 확인하다보면 등본에 의해 위태롭게
구원받은 자신의 삶을 <낯설게 하기>로 바라보는 기회가 생기기도 할 것입니다.



[@게시물에 어울리지 않는 긴 글입니다. 죄송합니다. ~ 희망찬 한 주 되시길 바랍니다.]

부동산과 경제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