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21일 일요일

◆정의(justice)와 법의 형식과 일반의지(General will) 사이에서 [by. 물파스] +)질답

[정의(justice)와 법의 형식과 일반의지(General will) 사이에서]



"총통의 의사가 곧 법이다!"

나치 독일에서 히틀러(Adolf Hitler)의 명령은 "법(法)" 그 자체였습니다.
1935년 유대인을 말살하기 위해 나치가 제정한 <뉘른베르크 인종법>과 ... 전선에서 도망치는
병사들은 무차별적으로 사살하라며 당시 나치 친위대장 하인리히 히믈러(Heinrich Himmler)가
내린 <초토화 명령> ... 그리고 정신병자들은 독일에서는 살 가치가 없는 생명으로 규정한
히틀러의 비밀지령 <안락사 명령> 등은 히틀러 시대의 대표적 악법이었습니다.

그래서 독일에게 나치 청산을 위해 가장 시급했던 문제는
<뉘른베르크 인종법>, <초토화 명령>, <안락사 명령> 같은 악법들의 효력이 부정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나치시대의 법이 비록 "악법" 이었다고 하더라도 그 법들은 분명 합법의 외관(형식)을 갖춘
법률이었기 때문에 법(악법)들의 정당화 사유들이 반드시 부정되어야만 나치청산(처벌)이 가능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히틀러와 나치(Nazi)는 당시 국민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으며 민주적으로 선출된 합법적인 정권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시대(나치)에 만들어진 법(악법)은 <(법의)형식과 절차>를 중요시하는 <법률실증주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불법이 아닌 분명한 <합법>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히틀러 체제가 붕괴한 후, 과거청산(나치청산)을 위해 독일사회가 만약 새로운 법을 만들어
나치 악법들을 청소하려 했다면 독일은 흔히 얘기하는 <뮌히하우젠(Münchhausen) 백작의 곤경>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이 있었습니다. ... 엄청난 허풍쟁이로 유명한 동화 속 인물 뭔히하우젠 백작은
어느 날 늪에 빠졌다가 자신의 팔로 직접 자기 머리채를 잡아 올려 늪에서 빠져나왔다는 허풍을 칩니다.
그리고 당시 독일의 상황이 바로 늪에 빠진 뮌히하우젠 백작의 상황과 유사했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히틀러 체제 붕괴 후, 새로운 법을 만들어 <사후적인 적용(처벌)>을 하려한다면
"법률은 그 법률이 제정되기 전에 발생한 사실에 대해 소급해서 적용되지 않는다!" 는
소위 <법률 불소급의 원칙(法律不遡及-原則)>을 위배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 법의 형식과 절차를 무시한 "법률실증주의를 위배"]

결국 독일은 나치청산 과정에서 자신의 팔로 늪에 빠진 본인의 머리채만 붙잡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늪에 빠졌을 때 뮌히하우젠 백작처럼
허풍으로 늪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이 아니라, 더 진지하고 논리적인 그리고 압도적인 법철학적
논법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 그리고 이러한 고민 끝에 등장한 논법이 바로
그 유명한 <라드브루흐 공식(Radbruch formula)> 입니다.

법은 남성의 젖꼭지와 여성의 젖꼭지를 차별 없이 동등하게(평등하게) 취급합니다.
법의 형식과 절차를 중요시하는 법률실증주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당연하며, 또한 오류가 없는
가장 안전한 법의 기능중 하나입니다.(@ 법적안정성) ~ 하지만 사회가 너무 법률실증주의에만
몰입되다 보면, 남성은 그렇지 않지만 여성의 젖꼭지는 아기에게 젖을 먹여 한 생명을 살릴 수
있다는 사실을 그냥 쉽게 지나쳐 외면할 수 있습니다.

구스타프 라드브루흐(Gustav Radbruch)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대표적 법철학자 였습니다.
법철학을 한다면 누구나 한 번쯤은 거쳐야 한다는 독일 법학계의 거장 라드브루흐(Radbruch)
잠시 그의 필모(Filmography)를 살펴보면 ~ ~ ~

@ 1902년 라이프치히 대학과 베를린 대학(박사)에서 법학을 공부
@ 1903년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교수자격 취득, 제1차 세계대전 간호병으로 참전,
@ 전쟁이 끝난 후, 1919년 킬 대학 정교수, 1920년 국회의원 선출
@ 법무장관(1921~1923년) 제직시절 억압적이고 봉건적인 법제를 사민주의(사회민주주의)적인
법제로 전환시키는 작업을 진행, 1926년 정계를 떠나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복귀(교수),
이 시기에도 친(親) 바이마르 성향 교수로써 저술 활동을 지속함.
@ 1933년 나치 집권 후 사상이 의심스럽다는 이유로 대학에서 해직됨.
@ 영국에 머물던 1년을 제외하고 나치체제 하에서 모든 사회활동(정치, 강연 등)을 금지 당함.
@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복귀하여 "법치국가" 재건을 위해 헌신.
이 당시 <법률적 불법과 초법률적 법>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그의 핵심 주장이라 할 수 있는,
그리고 수많은 법철학적 논쟁을 불러일으킨 <라드브루흐 공식(Radbruch formula)>이 탄생함.
@ 이후 <라드브루흐 형법초안>, <법철학> 등 무려 스무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함.

제가 굳이 라드브루흐의 필모그래피, 즉 인생궤적을 언급한 이유가 있습니다.
20세기 천재 철학자라는 비트겐슈타인이 인생 전반기와 후반기에 (본인)사상의 변화를 겪었던 것처럼
라드브루흐도 본인의 법가치관의 뚜렷한 변화(입장변화)를 겪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변곡점은
<1933년 나치 집권>입니다.

라드브루흐는 철저히 법적 안정성을 추구하는 <법률실증주의자> 였습니다.
우리는 다양한 사회구성원들이 모인 <국가>라는 틀 속에서 매일매일 다툼하며, 불안과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는 너무나 나약한 존재들입니다. 따라서 다툼과 불안과 두려움을 해소하여 평화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모든 사회구성원들이 동의하는 절대적인 규칙이나 규범이 존재해야만 가능합니다.
한마디로 <법(法)>의 존재이며, 그 법은 어떤 외적 간섭이나 압력에도 흔들리지 않는, 즉 공동체를 뛰어넘는
암묵적 절대성을 내포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회의 법(法)은 철저한 형식과 절차를 통해야만 절대성,
다시 말해 <법적 안정성>이 보장됩니다.(@ 법질서 확보) ... 그리고 초창기 라드브루흐는 이러한 생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1933년 나치 집권 후 제정된 수많은 악법들과 그 법 체제하에서 자행된 끔찍한
학살과 폭력 등을 지켜보면서 라드브루흐는 큰 혼란에 빠집니다 ... 그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후 전쟁(제2차 대전)이 끝나고 (전후의)라드브루흐는 <법률적 불법과 초법률적 법> 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는데, 이 논문은 독일 사회가 나치를 청산 하는데 상당한 영향을 주게 됩니다.

저는 앞에서 법이 남성과 여성의 젖꼭지를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 짧게 얘기했습니다.
남성과 여성의 젖꼭지를 모두 동등(평등)하게 취급한다면 이것은 실정법에서 바라본 생각입니다.
하지만 여성의 젖꼭지가 아기에게 젖을 물려 생명을 살릴 수 있다는 사실은 산과 바다가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류에게는 보편이자 <자연> 그 자체입니다. 따라서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여성이 아기에게 젖을 물리는 행위에 대해서는 편견 없이 모두가 같은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그래서
국가와 같은 정치공동체가 법이라는 인위적인 힘으로써 <여성이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행위>, 즉
"자연법칙"과 같은 행위를 제한하거나 억압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인류가 누려야할
당연한 권리나 정의(혹은 불변의 법칙)를 <자연법(natural law)> 이라고 합니다. ~ 더불어 자연법은
우리 현실의 실제 삶에 적용되는 일반적인 법(실정법)의 개념과는 다른, 좀 더 포괄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 자연법은 주로 실정법의 비교개념으로 사용됨.)

하지만 법적 안정성(형식과 절차)을 중요시 했던 라드브루흐에게는 자연법적 가치관이
근거가 부족하고 오래된 관습적 경향과 비슷하다 생각해서 다툼이 생겼을 때는 합리적(이성적) 해결방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때로는 감정적(정치적) 판단으로 오히려 법질서(법적안정)에 방해되는 낡은 생각으로
비춰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라드브루흐는 자연법론자들과 자주 대립각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합법적으로 선출된 나치와 그 체제에서 만들어진 악법의 야만적 만행을 지켜보던 라드브루흐는
큰 충격과 함께 자기모순에 빠져버립니다. ~ 나치의 법도 철저한 형식과 절차위에서 분명 적법하게 만들어진
합목적성(合目的性)을 갖춘 법이었기 때문입니다. ~ 그러던 라드브루흐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나치의 법은 법이 아니라, 법률의 탈을 쓴 불법이다!" - 라드브루흐(Gustav Radbruch)>

거의 180도로 바뀐 입장변화입니다. ... 충실히 법의 외관(형식과 절차)을 지켰던
나치의 법(실정법)에 대해 <자연법에 반하는 실정법은 법이 아니다.> 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이것이 전후의 라드브루흐가 주장한 <법률적 불법과 초법률적 법>에 들어있는 생각이며,
여기서 바로 그 유명한 <라드브루흐 공식(Radbruch formula)>이 탄생합니다.
[@ "실증주의의 사울(Saul)에서 자연법의 바울(Paul)로!" ~ ~ 일부 학자들은
라드브루흐의 법철학 일관성을 놓고 법률실증주의자였던 라드브루흐가 자연법론자로
전향했다고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라드브루흐 공식(Radbruch formula)>은 자연법에 가까운 <실질적 자연법>입니다.
이것은 실정법(나치법)이 극도로 부정의 하다면 법이 표면적으로 합법적인 행위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법적 효력을 가질 수 없으며, 그래서 앞서 살펴본 히틀러 체제하에서 실행된
<뉘른베르크 인종법>, <초토화 명령>, <안락사 명령> 같은 악법(명령)들은 인류의 당연한
정의라고 할 수 있는 자유와 인권, 평등의 원칙을 위반했기 때문에 불법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참고 - 라드브루흐의 부정의한 법의 3등급]

(1) 명백하게 부정의해서 처음부터 법의 영역에 포함되지 않는 경우
(2) 법적안정성을 무시하고 효력을 박탈할 정도로 법의 내용이 부정의한 경우
(3) 법의 내용이 정의롭지 못하지만 법적안정성을 위해 효력을 인정해야 하는 경우

라드브루흐 공식은 나치청산 과정에서 중요한 <청산 기준>으로서 자주 원용되었습니다.
한마디로 나치 시대의 악법의 효력을 부정함으로써 합법적인 행위를 불법으로 규정할 수 있었는데
이는 <법률 불소급의 원칙>을 위배하지 않고서도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기 때문에 허풍쟁이
뮌히하우젠 백작에게 일격을 가한 셈이 된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잠시 <라드브루흐 공식(Radbruch formula)>이 담긴 라드브루흐의 명문장을 소개해봅니다.

[@ 정의와 법적안정성의 갈등은 다음과 같이 해결할 수도 있겠다.
실정적인, 즉 규정과 힘을 통해 정립된 법은 비록 그 내용이 정의롭지 못하고
목적에 부합하지 않더라도 우선성을 갖는다. 그러나 정의에 대한 실정법의 모순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에 이르러 법률이 <“부정의한 법”> 으로서 정의 앞에서 물러나야
하는 때에는 그러하지 않다. 법률적 불법과 내용상 정의롭지 못하지만 그래도 효력이
있는 법률 사이에 더 예리한 경계선을 긋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경우에는 아주 분명하게 경계를 확정할 수 있다. 정의를 전혀 추구하지 않는 경우,
법률을 제정할 때 정의의 핵심인 평등을 의도적으로 부인하는 경우, 그때 법률은 한갓
악법에 그치지 않고 아예 법적인 성격을 갖지 못한다. 왜냐하면 법, 즉 실정적인 법도
의미상 정의에 봉사하는 규율과 규정이라고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준에
비추어 보면 나치법은 전부 효력 있는 법의 품격에 이르지 못했다. ... 히틀러 인격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 즉 히틀러로부터 유래하여 나치의 모든 “법”의 본질로 귀결되었던
특성은 바로 진실에 대한 감각과 법에 대한 감각의 총체적 결핍이다. ... 정당이 당파적인
성격을 가질 뿐이라는 점을 무시하고 나치당을 국가 전체와 동일시했던 법률도
법적인 성격을 갖지 못한다. 즉흥적인 위하(힘과 위엄)의 필요에 이끌려 범죄의 경중에 대한
고려 없이 죄질이 다른 범죄에 같은 형벌을 부과하고, 빈번히 사형을 부과하는
온갖 형벌법규도 법적인 성격을 갖지 못한다. 이 모든 것들이 법률적 불법의 사례들일 뿐이다.
- (국가범죄, 461~462 페이지/ 이재승/ 도서출판 앨피)]

라드브루흐는 자신의 이 명문장에서 <"실정적인 법도 의미상 정의에 봉사하는 규율과 규정">
이라며 형식과 절차위에, 즉 법적안정성을 무엇보다 우선시했던 본인의 기존 법철학위에
<정의(justice)> 라는 자연법적 가치관을 올려놓습니다. 그리고 부정의한 법의 3등급 중에서 (2)와 (3)의
구별은 정도나 형량의 문제이므로 둘 사이의 (예리한)경계선을 긋는 것은 불가능 하다고 했지만,
(1)과 (3)의 경계는 “(1)” 자체가 아예 처음부터 법의 영역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이 둘 사이의
경계는 선명하게 그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국민들은 자신들의 모든 권리를 국가에 반납하는 대신 <국가의 주권>, 즉 공동체의 최고 권력인
<국가권력>을 모든 국민들이 똑같은 양으로 분배받습니다(1인 1표) ... 따라서 국가의 주권에는
곧 국민 전체의 의지가 반영되어야 하며, 그 의지는 공공의 이익을 향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루소가 얘기한 <일반의지(General will)>는 한마디로 <공동의 의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루소의 일반의지는 <민의(民意)>, 즉 "국민의 뜻"인 것입니다. 더불어 이러한 일반의지가
명문화 된 것이 오늘날의 <법(法)>입니다. ... 그래서 현대사회 법체계는 말합니다.

"법은 만인을 위해 하나의 입으로 말한다"

하지만 일반의지가 공동체에 아무리 정당하게 투영되었다 하더라고,
그 공동체가 "정의(justice)"라는 기초위에 성립된 것이 아니라면, 공동체는 언제든지 "전체주의"라는
전복된 일반의지로 재형성 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결국 전체의지(Will of All)가 민의 위에 군림하며
세상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유일한 가치관이 되는 최악의 상황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라드브루흐가 "나치의 법은 법이 아니라, 법률의 탈을 쓴 불법이다" 라고 말한것은 나치 정권이
바로 "정의(justice)"를 배제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괴테의 "파우스트(Faust)"는
괴테가 30세가 되던 1779년에 집필을 시작하여 82세인 1831년에 탈고한,
무려 52년이라는 세월이 요구되었던 괴테, 아니 세계의 명작입니다. 괴테가 작품을 구상하고 습작했던
20대 시절의 시간까지 더한다면 파우스트는 60년 이라는 시간의 산물인 것입니다.

파우스트 박사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 서약을 합니다.
메피스토가 제공하는 지상의 모든 쾌락을 체험한후 그에 굴복하게 된다면, 죽음 이후
파우스트 박사의 영혼은 메피스토가 지옥으로 가져갈 수 있도록 약속한 것입니다.

파우스트 박사의 죽음이 가까워 지자 메피스토는 악령들을 불러모으고 무덤을 파게 합니다.
결국 파우스트 박사는 죽게되고, 서약대로 메피스토가 박사의 영혼을 가져가려 하자 ~ 이때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들이 파우스트의 영혼을 구원하려 악령들과 치열한 싸움을 시작합니다.

천사들이 뿌린 신성한 장미꽃들은 불꽃처럼 강렬한 기운을 내뿜으며 악령들을 불태웠고
그 사이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는 가장 아름다운 천사의 유혹에 잠시 넋을 놓고 황홀감에 취합니다.
그리고 천사들은 파우스트 박사의 영혼을 안고 하늘로 올라갑니다.

여기서 잠시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 그렇다면
악마(메피스토펠레스)를 유혹한 천사는 과연 천사적인가? 악마적인가? ~ 무슨말인가하면
메피스토에게 선악의 관점이 아닌 단순 <직업성>을 부여하고 바라보자는 뜻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직업적 본분, 즉 파우스트 박사의 영혼을 지옥으로 가져가야할 소임을 맡은 메피스토의
영업을 천사들이 방해한 것은 아닐까? ... 다시 말해, 천사와 악마(메피스토)에게 직업성을 부여하여
판단한다면 천사들에게는 명백히 영업방해죄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이는 결국 사태를 '직업윤리'라는 형식의 틀(법률 실증주의) 안에서 판단할 것인가, 아니면
정의(영혼의 구원)라는 자연법적 가치관에서 바라볼 것인가의 문제로 고민이 나눠지게 됩니다.




[@ 사회가 고도화되고 전문가의 영역이 더 많아질수록 이러한 고민들과 담론들은
더 많이 생성될 것입니다. ... 법적 형식틀에서 규정되는 '심신미약'과 일반의지가 투영된
국민들의 공분을 정의(justice)이라는 기초위에서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 저 또한
상당히 어려운 질문이라 생각됩니다. ... 편안한 주말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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ㅁㅇㄹ
 
정말 잘읽었습니다. 직접쓰신 글이라면 대단하네요. 법에 ㅂ 자도 모르는 중생이 읽어도 이해가 쏙쏙되네요. 질문 몇가지만 드리고 싶습니다.
1. 말씀하신 대로라면 정의(justice) 를 정의(define) 하는 것이 자연법적인 사고에서는 굉장히 중요하겠는데, 이에대한 논의나 재미있는 일화를 알고계시다면 소개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2. 말씀하신것을 간단히 요약하면 독일은 나치청산을 위해 '후향적으로보아 정의에 심하게 벗어났다고 판단되는 법, 그리고 그 법에 따른 행위는, 이전에 적법한 절차를 거쳐 만들어졌더라도 위법이다' 라는 논리를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시대에 걸쳐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했어야 옳은걸까요? 예컨데 나치집권시대에 태어나, 나치가 만든 법과 분위기에 자란 세대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 사상을 받아들이고, 그것이 정의(justice) 라고 생각하며, 정의로운 행동을 한다고 생각하고 유대인 학살에 동참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그것이 부정의인지 정의인지를 판단할 충분한 기회가 주어졌다고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이렇게 자란세대가 패전이후에 '나는 그 당시에 그것이 정의인줄 알았고, 또 모두 합법적인 행위들이었다' 라고 이야기 한다면 그사람을 과연 처벌하는게 옳을지 고민됩니다. (요약하자면 "'법적안정성' 이 너무 무너져 억울한 자들이 생기지 않았을까.. 그들은 그럼 그당시에 어떻게 행동했어야 하나" 라는 고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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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파스
 
ㅁㅇㄹ//


1. 정의를 논할때 빼놓을수 없는 사람이 바로 세계적인 정치철학자 존 롤스(John Rawls) 입니다.
그의 주장에서 가장 핵심적인 논의가 바로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인데 ... 무지의 베일은
그 누구도 미래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불확실한 상황이며, 이러한 상황 하에서 사람들은 최소한의
사회적 틀을 형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 우리는 태어나기 이전에 우리가 정상인으로 태어날지 장애인으로 태어날지
전혀 알수 없습니다. 물론 장애인 보다는 정상인으로 태어날 가능성이 더 높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장애인이라는 작은 가능성에 누구나 포함될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원초적 상황> 하에서는
장애인에 대한 기본적인 사회적 배려(제도, 시설, 우대 등)를 하게 된다는 개념입니다.

더불어 원초적 상황에서 형성될 가장 기본적 정의를
누구나 자유를 갖는다는 것과, 불평등은 모든 사람에게 이득이 될 때에만 존재해야 된다는 것이라고
롤스는 말합니다. ... 여기서 불평등이 이득이 된다는 뜻은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인 이득을 얻는데 있어서
"기회가 공정"하다면 그 지위나 이득으로부터 오는 불평등은 충분히 인정할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롤스의 <차등의 원칙(difference principle)>이라고 합니다. ~ 롤스의 원초적 상황 하에서의
사회적 틀 형성과 사회적 약자(빈곤층)에 대한 효용 극대화 등은 조금은 극단적인 평등주의를 반영하기도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바탕에 <합리적인 불평등>도 인정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복지 선진국인 북유럽 국가들이
최빈곤층에게 실시하고 있는 복지정책은 위에서 얘기한 롤스의 분배적 정의론과 상당부분 깊은 연관이 있기도 합니다.

원형 모양의 감옥이 하나 있습니다.
중앙에 높은 감시탑이 하나 있는데 ... 이 감시탑은 늘 어둡습니다. 그리고 죄수의 방은 밝게 해놓았는데
이러한 구조는 감시탑 안에서는 감방안의 죄수들이 항상 보이므로 언제나 감시가 가능하지만, 감방안의 죄수들은
중앙 감시탑의 교도관이 보이질 않습니다. 따라서 죄수는 교도관이 지금 잠시 자리를 비우거나 졸더라도
항상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탈옥 같은건 절대로 꿈꾸지 못합니다 ... 이 감옥이 바로
1791년 공리주의자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이 제안한 원형감옥 "판옵티콘(Panopticon)"의 모습입니다.

인간에게 쾌락을 가져다주는 행위가 바로 선이며 옳은 것이라는 윤리관이 "공리주의" 입니다.
방금 언급한 원형감옥 판옵티콘을 설계한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 의 주장인데,
공리주의에서는 사회의 행복은 그 사회의 포함된 개인들 각각의 행복(쾌락)을 모두 합한 것입니다.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 "최대 다수의 최대행복" 입니다.

따라서 공리주의 주장대로라면, 사회의 이익(행복)을 최대화하기 위해서는
다수의 행복을 증진시켜야 하며, 이때 소수의 행복은 배제될수 있다는 것입니다 ... 예를들어,
고압 송전탑 건설은 벤담의 "공리주의" 입장에서 보면 다수의 국민들과 기업들의 전력수요를 위해서
송전탑 인근에 사는 주민들의 행복은 배제될수 있는 것입니다.

언뜻 살펴보면 매우 불공정하고 비상식적인 일처럼 보이겠지만... 이와 비슷한 일들이 지금까지도
우리 사회에서 태연하게 일어나고 있는 생생한 현실임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 그리고 이러한
공리주의적 관점은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소위 "민주주의"란 이름으로 그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으며,
더 중요한 점은 오늘날의 "자본주의"와 궁합이 탁월하게 잘 맞는다는 점입니다.

자본주의에서는 가장 적은 비용으로 최대의 효율을 달성하면, 그보다 더 완벽한 성과는 없습니다.
다시말해, 가장 적은 비용으로 다수가 행복해 진다면 그보다 좋은건 없다는 것이지요! ~ 그래서
앞서 살펴본 벤담의 원형감옥, 즉 판옵티콘(Panopticon) 에도 자본주의적 논리가 암묵적으로 숨겨져 있다고
할 수 있는데 ... 수많은 감방을 감시하는데 있어서 중앙의 감시탑 하나만(교도관 1명) 있으면
해결(모든 죄수의 감시)이 가능하므로, 이것은 감옥의 구조나 감시체제를 논하기 이전에,
최소의 비용(교도관 1명)으로 최대의 효과(성과)를 올릴수 있는 가장 자본주의적인 산물에 가깝다 할수 있습니다.

그래서 ... 이러한 자본주의와 공리주의와의 천박한 만남에 대해서 존 롤즈는 다음 처럼 일침을 가합니다.

"모든 인간은 전체 사회복지라는 명목으로도 유린될 수 없는 정의에 입각한 불가침성을 갖는다.
그러므로, 정의는 타인들이 갖게 될 보다 큰 선(善)을 위하여 소수의 자유를 뺏는 것이 정당화되는 것을
거부한다. 다수가 누릴 보다 큰 이득을 위해 소수에게 희생을 강요해도 좋다는 것을 정의는 용납할 수 없다"
- by J. Rawls, 「A Theory of Justice < 롤즈의 정의론 中 >

그럼 이쯤에서 상당한 고민과 혼돈이 발생합니다.
사회정의를 위해 환자의 상태를 다수에게 공개한 어느 의사의 행위는

<"다수(공동체의 안전)가 누릴 보다 큰 이득을 위해 소수에게
희생(환자의 상태,개인 신상)을 강요하는 것은 정의가 용납할수 없다" - 롤스>

~ 라는 롤스의 '정의'에 대한 개념에 배치되기 때문입니다. ... 결국 정의는
하나의 정답으로 존재하는 개념은 아닌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는 철학의 문제로 확장됩니다.

1번 물음에 대한 저의 생각은 여기까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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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권위주의 정권에서 저질러진 범죄는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국가에 대한 범죄(쿠데타), 둘째는 인권 범죄, 셋째는 부역(附逆)입니다.
과거청산 국면에서는 둘째 유형의 범죄가 주로 처벌되고, 셋째 유형은 도덕적 비난은
받아도 좀처럼 범죄로 분류되지 않습니다. - 새뮤얼 헌팅턴(Samuel Huntington) ]

나치청산 과정에서 <라드브루흐 공식(Radbruch formula)>은 몇 차례 판결에 원용되긴 했지만
형사적 책임보다는 주로 배상책임과 관련해서 원용된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 한마디로 실질적
청산효과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는 것인데, 이는 라드브루흐 공식이 (나치)체제 청산의 논리로는
전혀 작동되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 왜냐하면 종전 후 나치청산 과정의 상당부분을 연합국
군정청이 주도하면서, 그리고 나치청산 작업을 빠른 시간 안에 마무리하기 위해서 핵심전범의
(청산)처리만 연합국 군정청이 도맡았고 나머지 인적청산 문제는 그냥 독일에게 넘겼는데 ~ 당시
세계질서가 재편되는 상황 속에서 미국은 서독의 재건을 동구권의 사회주의 물결이 확산되는 것을
막는 하나의 방어벽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나치청산을 조기에 마무리하려했던 결과였습니다.

상황이 이러했으니 당시에 라드브루흐 공식을 활용할 여지는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나치에 부역했던 상당수 공무원들이 다시 복직되기도 했는데,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독일이 <탈나치화에서 재나치화>로 향하고 있다며 거센 비난을 쏟기도 했습니다.

독일의 과거청산(나치청산) 작업은 통일과정에서도 계속되었습니다.
그런데 히틀러 체제하에서 수많은 사법살인을 저질렀던, 다시 말해 나치에 부역했던 그 많던
서독 출신 법조인들은 거의 대부분 살아남아 현직으로 복귀했습니다. 하지만 통일독일에서
동독 출신 법조인들에게는 상황이 많이 달랐습니다. ... 종전 후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했던
<라드브루흐 공식(Radbruch formula)>이 나치 전력이 있던 동독 법조인들을 단죄할 때는
상당한 힘을 발휘한 것입니다.

동독 법조인 보다 더 심했던 서독의 광신적 나치 법조인들은 거의 대부분 무죄로 현직에 복귀시켰던 독일이,
통일 후 동독 출신들에게는 <법률적 불법과 초법률적 법>의 잣대를 준엄하게 들이댔던 것입니다. ... 결국
독일의 나치청산은 우리의 예측영역 밖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자연법의 바울(Paul)로 변신한 라드브루흐가
그렇게 애타게 부르짖던 <정의>를 위해 정의의 바깥에서 <부정의>하게 진행되었던 것입니다. ... 그래도 우리가
독일의 과거청산 사례를 의미 있게 바라봐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에게 비록 (나치)청산 과정에서
동서독이 구분되는 현실적 오류(부정의)가 생성되긴 했지만 <라드브루흐 공식(Radbruch formula)> 이라는
치열한 법철학적 고민이 있었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2번 물음의 대한 답은 여기까지 입니다.

2018년 10월 15일 월요일

◆군집에 포섭된 개체들에 관하여 [by. 물파스]

[ 군집에 포섭된 개체들에 관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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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네 마을의 개 - 기형도)

전쟁은 장마비처럼 줄기차게 대지에 흙줄을 파며 지나갔다.
노마네 마을은 구멍투성이였다.
전쟁이 끝난 후 마을 사람들은 다리를 놓고 종루를 고치며
밭을 일구기에 여념이 없었다.
가을이 다 갈 때까지 마을 사람들은 분홍빛 사막 위에 꽃을 피우듯이
열심히 마을을 깁고 기웠다. 그러던 어느날 마을이 어느 정도 회복되고,
겨울이 소리없이 다가왔을때 노마의 마을에는 이상한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밤이면 흰빛의 미친개가 나타나 사람을 물어 죽인다는 소문이 그것 이었다.
더구나 그 개는 전쟁 동안 굴 속에 숨어 죽은 사람을 뜯어먹으며 살아왔다고
사람들은 수군대었다. 마을 사람들은 불안에 떨기 시작하였다.
밤이면 문을 걸어잠갔으며 어느 날 밤부턴가는 마을이 대낮같이 횃불을
머리에 인 채 활활 타올랐으며 언제부턴가는 밤마다 갓난아이의 입을
헝겊으로 틀어막아 소리를 못 지르게 하는 집이 하나하나 늘어갔다.
밤마다 소문은 비누거품처럼 사람들 사이에서 더욱 부플어올랐고,
두려움은 점점 그 개를 보았다는 사람이 늘어감에 따라 커져갔다.

어느날 흰눈이 구름 허물어지듯 마을을 뒤덮으면서,
마을 사람들은 급기야 그들의 눈에 뜨이는 개란 개는 모조리
미친개처럼 느끼기 시작하였다.

그 후로 개들이 하나하나 죽어갔다.
하얀 개뿐이 아니라 검정, 노랑, 빨강 개까지 죽음을 당하기 시작했다.
마을은 또 다른 전쟁으로 번져갔다. 개들은 밤마다 피를 흘리며 쇠줄을 끊고
산속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달아난 개들은 다음날이면 산 중턱에 사금파리에 베인
발바닥같이 배를 가른 채 죽어 있었다. 사람들은 미친개의 피를 먹으면
미친개에 물리지 않는다는 또 다른 소문으로 인하여, 죽은 개 주위에
붉게 물든 눈까지 한 움큼씩 퍼서, 그 배인 피를 빨아먹었다.

그러나 노마는 자기의 삽살개를 광 속 깊이깊이 감추어 두었다.
삽살개는 절대로 미치지 않았다고 노마는 생각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숨겨둔 개까지 찾아내어 죽이기 시작했을 때,
어느 날 밤 노마는 삽살개를 끌어안고 얼음 뒤덮인 산을 올라갔다.
산꼭대기의 바위 사이에 삽살개를 감추어두고 노마는 울면서 내려왔다.

다음날, 최후의 개인 삽살개를 잡기 위해, 마을 사람들은 손에 손에
몽둥이와 칼을 들고 산으로 올랐다. 산은 온통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 같았다.
사람들은 뻣뻣이 굳은 얼굴을 찡그리며 말없이 산을 올랐다.
노마도 어른들을 따라 올랐다. ... 삽살개는 쉽사리 눈에 띄지 않았다.
사람들은 바위 틈, 소나무 가지 끝이며 덤불 속까지 샅샅이 뒤졌다.
사냥은 저녁까지 계속되었고, 희끗희끗 눈발이 내리기 시작했다.
눈은 바람 속에 섞이어 꽃처럼 흩날리었다.

눈이 그치고 새파란 밤하늘에 달이 떠오르고 산밑의 동네가 얼음처럼
빛나던 밤중에, 삽살개는 산꼭대기 바위 틈에서 쪼그린 채
문풍지같이 떠는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사람들이 다가갔고 삽살개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학살당하였다.
사람들이 그 피를 건져 먹기 시작했을때, 눈 위에 꽃잎 같은 핏방울이
점점이 떨어질 때, 노마의 가슴에는 약솜처럼 고요한 피곤이 몰려왔다.

개들은 이제 그 그림자조차 가위에 잘리운 채 마을에서 사라졌다.
이제 마을의 밤은 성대를 잃은 고요 속에서 예전의 어둠을 되찾았다.
그러나 그 고요는 오래지 않아 미친개가 언제 또다시 나타나지 않을까하는
불안에 빠져들면서 다시 술렁이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또다시 횃불과 몽둥이를 준비하였지만
개들은 한 마리도 나타나지 않았다.
개들이 나타나지 않을수록 마을 사람들은 더욱 초조하였고
두 눈에 빨강 거미줄을 세우며 밤을 지새웠다.
그러다가 겨울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이상하게도 마을 사람들이 하나하나 밤마다 산과 들을 쏘다니기 시작하였다.

나뭇가지에 걸려 찢긴 윗옷을 걸치고 신발을 잃어버린 채
그들은 미친개를 찾아 헤매기 시작하였다.
아침이면 그들은 큰 소리로 울부짖다가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해의 마지막 눈이 산사태처럼 쏟아지던 밤,
노마는 온 몸에 흰 눈을 맞으며 미친 마을을 떠났다.
강물처럼 무릎 위로 차오르는 눈길을 헤엄치듯 사라져
다시는 마을로 돌아오지 않았다.

[기형도 산문집(짧은 여행의 기록). 174~176페이지/1990년 초판. 살림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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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헌책방에서 7천원에 구입한 기형도 산문집에 소개된 내용입니다.
1990년 3월 7일 초판 발행, 3,500원 ... 28년전 가격 대비 정확히 두 배의 값을 치르고서야
얻을수 있었던 기형도 시인의 생각덩어리들 ~ 책을 집어들고 아무렇게나 펼쳐 도착한 곳이
바로 노마네 마을 이었습니다. ... 원래는 어머님의 부탁으로 꿈해몽 책을 사러 갔었는데
노마네 마을의 강렬함에 빠져 책방 주인과 가격흥정 한 번 없이 값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바람의 이빨'이라 불리는 사막메뚜기(Schistrocerca gregaria)는
혼자일때는 작은 강도 건너지 못하는 나약한 곤충입니다. ... 그러나 메뚜기들이
무리를 이루고, 떼를 이루면 ... 그리고 아사상태에까지 빠진다면 무리는 일사불란한 군집공포로
하나가 되어 인류를 위협하는 존재로 탈바꿈합니다. 그래서 이 군집공포는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건조한 바람을 타고 남태평양을 건너는 초인적 힘을 발휘하기도 합니다. ... 하루에 자기 몸무게의
2배를 갉아먹는 악마적 식성은 심할때는 1000억 이란 군집공포로서 광활한 대륙을 초토화 합니다.

하지만 군집이 공포로만 다가오는 것은 아닙니다.
호주령 크리스마스섬(Christmas Island)에 사는 홍게(Red Crab)들은
11월 산란기가 되면 바다를 향해 대이동 시작합니다. ... 그리고 이동하는 홍게들의 수가
무려 1억 마리가 넘는다고 하니, 직접 눈앞에서 살아있는 1억의 개체들이 이동하는 광경을
보게 된다면 아름답고 감탄스런 장관을 넘어 불가사의한 자연현상에 가깝다 해도 될 것입니다.

무리나 군집 상태는 인간사회에서도 자주 목격됩니다.
스포츠 경기에서 선수나 팀을 응원하는 대규모 관중, 행사에 동원된 군대의 열병식,
노조원들의 노동운동, 정부(정책)를 비판하는 대규모 (촛불)집회 ... 등

군집이 공포로 다가오거나 아름다운 광경이 되는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고독한 개체에서 벗어나 무리지어 집단에 합류한 개체들이
익명의 단위로 전환되어 스스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오직 군집의 존재를 위해서만
작용하게 될 때입니다. ... 때문에 군집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개인을 월등히 앞서는
힘과 위용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개인은 어쩔수없이 "사회" 라는 군집 안에서만
그 정체성이 확인되므로 우리 모두는 "개인"이라는 개체성을 겸비한 채 서서히 익명으로 잊혀지는
필연적 존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그래서 두터운 군집의 외투를 뚫고 나오려는
송곳 같은 움직임을 "저항" 이라 부르는가 봅니다.

계산해보니, 7천원을 주고 산 기형도 시인의 사유는
28년 동안 해마다 연평균 2.5%의 가치가 더해져 나에게 말을 걸어 온 것이었습니다.
삽살개를 잃고 마을을 떠난 노마의 슬픔과 공포에 비한다면, 웃돈을 더 얹어주었어도
아깝지 않았을텐데 ... 책방 주인의 가격책정 솜씨가 조금은 아쉽기도 합니다. ~



[@ 날씨가 쌀쌀합니다. ~ 건강들 잘 챙기시길 바랍니다.]

◆금본위제도 [by. 물파스] (재탕+추가)

[ 금 본위제도 ... 속 시원히 살펴봅시다! ]


(이 글은 예전에 한 번 올려던 글입니다.
이미 보셨던 분들은 복습한다 생각하시고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더불어 글 후반부에는 오늘날 중앙은행 시스템을 도입한 대부분의 국가에서
사용하는 유동성지표 개념에 대해 간단한 내용을 추가했습니다.)


19세기 말 즈음의 세계는 돈 자체가 바로 금(Gold) 이었습니다.
좀 더 정확히 얘기하면 그 당시(1870년~1913년) ‘금본위제도’를 채택한 많은 국가들에서는
금으로 만든 주화가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통화 당국이 발행한 지폐도 사용되었는데 ... 지폐를
통화 당국에 가져가면 언제든지 ‘법으로 정한 무게의 순금’ 으로 바꿀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제1차 세계대전발발 이전(1914년 이전)에는 영국은 1파운드(Pound Sterling)에
순금 113.0016 그레인(grain) 비율로 지폐를 금(Gold)으로 바꿀 수 있었고, 미국에서는 1달러($)에
순금 23.22그레인(grain) 비율로 지폐를 금(Gold)으로 바꿀 수 있었습니다.

[@그레인(grain) = 금(gold) 1그램과 밀가루 1그램은 ... 그 무게는 동일하지만,
가치의 차이는 엄청납니다 ... 이렇게 무게에 비해 가치가 상당히 높은
물건[금(gold), 약(drug) 등]의 무게를 측정하는데 사용되는 야드파운드법(yard pound法)의
무게단위가 바로 그레인(grain)입니다 ... 1그레인은 약 0.0648그램(기호는 gr)]

@ 영국 = 1파운드 = 순금 113.0016 그레인 = (7.32 그램)
@ 미국 = 1달러($) = 순금 23.22 그레인 = (1.504 그램)
[1파운드=4.86 달러($) ... (7.32/1.504 = 4.86)]

따라서 당시에 런던에 사는 베컴이 1파운드를 순금 7.32그램[113.0016그레인]으로 바꾼 다음에
재빨리 미국 뉴욕으로 가서 순금 7.32그램을 내놓으면 4.86 달러($)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1파운드 = 4.86달러($)> ... 이렇게 당시 금본위제도를 시행하고 있었던 국가들 사이에서는
그 나라 화폐(파운드, 달러, 프랑, 등등)의 1단위에 순금이 얼마정도 포함되어 있는지를 비교하여
각국 통화의 교환비율을 산출할 수 있었습니다 ... 그리고 이렇게 자국화폐 1단위에 순금이 얼마정도
포함되어 있는지 ... 다시 말해 지폐를 제시하면 얼마만큼의 금(Gold)으로 교환해줄지를 평가한 것을
보통 금평가(Gold parity) 라고 말합니다.[@ 길가다가 1파운드를 줍게되면 금 7.32그램을 주운것과 같고,
1달러($)를 주웠다면 금 1.504그램을 주운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 더불어 금본위제도를 시행한 국가들은
금으로 교환(태환)할 수 있는 지폐의 발행규모를 자신들이 보유한 금의 양에 따라 통제하고 있었습니다 ... 예를 들어,
미국은 1달러($)를 순금 1.504그램으로 교환(태환)해 주어야 했는데 ... 만약 미국의 전체 금 보유고가
1킬로그램(kg) 이었다면, 지폐의 발행규모는 약 665달러($)[1000/1.504] 가 된다는 것입니다 ... 결론적으로 이렇게
금본위제도를 실시하고 있었던 국가들의 화폐는 모두 일정량의 금(Gold)으로 교환해 주어야 했기
때문에 환율도 모두 자연스럽게 고정되어(고정 환율)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통화당국이 통화량을 이처럼 모두 정확한 금의 중량(무게) 만큼만[금1kg=665달러($)] 허용하게 된다면,
경기침체나 불황 등의 위기가 닥쳤을 때는 좀 더 신속하고 민감하게 대처하기가 힘들게 되기 때문에,
다수의 국가들은 금본위제도라는 기초위에서 통화량(지폐발행)에 조금은 유연성을 부여하기도 했습니다.

영국은 1844년 제정된 <은행허가법 Bank Charter Act>에 의해서 중앙은행의 발권부가 발행하는
금으로 교환(태환)가능한 지폐의 발행규모를 자신들의 금보유고에 1400만 파운드를 더한 금액까지는
허용했었고 ... 독일은 1876년 제정된 법에 따라 독일제국(국립)은행[Reichsbank 라익스뱅크]의
금보유고 및 재무성증권 보유고의 3배 까지는 지폐발행을 허용했으며, ~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
발발시기 즈음인 1913년에 중앙은행(Fed)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 이전에는 연방정부에게서
발권허가를 받은 국법은행(National Bank)들이 발행한 은행권이 유통되었습니다. 여기서 국법은행들이
발행한 은행권의 금태환은 일차적으로는 발행은행들에게 책임이 있었지만 ... 궁극적인 책임은
미국 재무성이었기 때문에 당시 민간은행(국법은행)들은 은행권 발행고의 5%에 해당하는 상환자금을
재무성에 예치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렇게 당시 금본위제도를 시행했던 국가들의 지폐발행은 조금씩은 차이가 있었지만, 이러한
지폐발행(규모)을 결정하는 건 결국 금(Gold) 보유고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발행된 지폐가 한 날 한시에 모두 금으로 태환(교환)될 가능성은 낮았기 때문에 통화당국이 지폐의
발행량과 정확히 같은 양의 금(Gold)을 보유하도록 강제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 하지만,
통화당국이 통제수준을 벗어나 자신들이 보유한 금보다 훨씬 더 많은 지폐를 발행하게 된다면
심각한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에, 위 영국이나 독일, 미국처럼 법과 규제로서
항상 지폐발행 규모를 자신들의 금보유고에 연동시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 현대 금융경제에서는 대부분의 국가들이 은행제도의 안정성을 위해 ‘지급준비율’을 법으로
정해놓고 있지만, 고전적 금본위제도 시기에는 법적 규제가 없는 국가들이 많았습니다 ... 하지만
당시에는 “금보유고” 라는 기초위에서 지급준비율 제도가 나름대로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정리해보면 ... 당시의 금본위제도하에서 시중의 통화량은
먼저 통화당국의 금보유고(금화,금괴 등의 실물 금)와 이를 근거로 발행된 지폐(금으로 교환할수 있는),
그리고 지폐(현금)를 가지고 경제활동을 하면서 사람들이 은행에 저축도 하고 대출도 받으면서
형성되는 은행의 예금통화 ... 등이라 할 수 있습니다.

<< 고전적 금본위제도 아래에서의 통화 공급 - (역피라미드)>>

(3) 예금통화 .............. @@@@@@@@@@@@@@@@@@@@
(2) 금태환지폐(현금) ............ @@@@@@@@@@@
(1) 금괴,금화 ................................... @@

결론적으로 금본위제도에서 통화의 공급은 역피라미드 형태로서,
가장 하단에 금괴(금화)가 있으며, 그 위에 금(gold)을 근거로 발행된 지폐가 있으며,
가장 상단에는 지폐(현금)를 은행에 저축한 예금 등이 있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리고 총통화의 공급을 결정짓는 건 가장 하단에 있는 실물의 금(Gold)이 되는 것이고, 또한
그 나라 통화당국은 이러한 역피라미드가 쓰러지지 않도록 법과 규제로 금의 보유량을 적절하게
조절하는 것입니다. [@ 참고로 통화량을 결정짓는 가장 하단의 실물의 금(Gold), 즉 그 나라가 보유한
금의 총량을 화폐적 금스톡(Monetary Gold Stock), 또는 금스톡(Gold stock) 이라고 합니다.]

당시의 금본위제도 하에서는 금의 수출과 수입이 자유로웠는데 ... 다시말해 금(Gold)의 국제적인
이동이 자유로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강들의 제국주의로 ... 남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아메리카대륙 등 본국을 포함한 수많은 식민지에서 금의 생산이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전 세계적으로 금스톡(Gold stock)은 꾸준히 증가했고 이러한 금스톡(Gold stock)의
증가는 통화량을 증가시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역피라미드에서도 나타났듯이, 금의 생산이 꾸준히 이루어지면 신용화폐(지폐, 예금 등)의
증가규모는 더 커지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총 통화량 중에서 중앙은행이 보유하는 금(Gold)보유고, 즉
금스톡(Gold stock)의 비율은 점진적으로 줄어들고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이것은 결국 고전적 금본위제도 시기였던 1870년~1913년 동안에 역피라미드가 점점 더 불안정한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중앙은행의 금보유고 비율은 하락했지만,
앞서 살펴본 영국, 독일, 미국 등처럼 각국은 자국이 설정한 금본위제도와 관련된 법과 규제의 한도는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중앙은행의 금태환성을 희생하면서까지 통화공급을 확대해야
한다는(예를들어 경기회복을 위해서) 정치적 압력이 그리 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선거권은 주로 소득과 재산이 일정수준 이상인 성인 남자들에게만 주어졌기 때문에 ... 따라서
경기악화로 투자활성화와 실업구제를 위한 확장적 통화정책을 실행해야 한다는 주장 같은 건
사회적으로 그렇게 강력하게 제기되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정치적 간섭이 적었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많이 확산되지 않은 상황에서도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어느 정도는 유지될 수 있었고, 특히
중앙은행의 책임은 통화의 공급 보다는 ‘금태환성’이 더 중요시 되던 시기였습니다. 다시 말해 지폐를
가져오면 언제든지 약속했던 금으로 교환(태환)해 줄 수 있다는 믿음과 신뢰를 대내뿐 아니라
대외적으로도 철저히 유지하는 것이 “통화공급”보다 더 중요한 사항이었다는 뜻입니다.

고전적 금본위제도(1870년~1913년) 시기에는(중간에 불황기간이 있었지만...)
국제통화체제나 금본위제도 국가들의 국제수지가 비교적 균형을 이루며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시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

만약 A라는 국가가 B국가와의 무역거래에서 흑자를 기록했다면, 즉 수입보다 수출이 많았다면,
B국가로부터 A국가로 금(Gold)이 유입됩니다. 그리고 외국(B)으로 부터의 금(Gold)유입은
A국의 금스톡(Gold stock)을 증가시키게 되며, 통화량이 늘어나 물가가 상승하게 됩니다 ... 또한
물가상승은 외국상품에 비해 가격경쟁력을 떨어뜨려 기존의 흑자구조를 축소시키며 양국간의 무역불균형을
자동적으로 조절하게 되는 것입니다.. 더불어 무역수지뿐만 아니라 자본수지 측면에서도
흑자국 A국은 통화량이 증가하면서 이자율이 낮아지게 되고, 반면 적자국이었던 B국은 금(Gold)유출로
인한 통화량 축소로 이자율이 상승하게 되어, 결국 (국제)자본은 이자율이 낮은 A국에서 이자율이 높은 B국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됩니다. ... 결론적으로 금본위제도라는 메커니즘은
국가간 경제의 불균형을 자연스럽게 균형으로 회복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금본위제도의 안정적인 국제통화체제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무너지게 되는데
모두 잘 아시겠지만 전쟁은 재정지출의 확대가 불가피합니다. 더구나 제1차 세계대전은 총력전의
양상이었기 때문에 ... 전쟁참여 국가들은 자국의 금스톡(Gold stock) 한도를 지키면서
재정지출(통화공급)을 준수할 여유가 없었던 상황이었습니다 ... 더불어 당시에는 금(Gold)의 국제적
이동이 자유로웠는데, 이것은 곧 정치적 안정과 평화가 전제되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전쟁은
이러한 안정과 신뢰를 보장할 수 없었으므로 금본위제도는 더 이상 유지되기 힘들게 됩니다.
[@ 따라서 당시 전쟁중에 금(Gold)으로 교환해주지 않는 불환지폐(不換紙幣)가 남발되었음.]

제1차 세계대전 기간(1913년 ~ 1919년) 동안에 전쟁 참여국들은 전비를 조달하기 위해서
통화증발(增發)[돈을 계속 찍어냄]을 시작했습니다.. 금태환성의 신뢰는 무너졌고, 금본위제도는
사실상 정지되었습니다. 통화량이 증가하고 전쟁 중 물자의 공급이 원활하지 못했으니
당연히 인플레이션이 발생했으며, 전쟁기간 동안에(1913~1919) 독일의 도매물가는 4.2배,
프랑스는 3.6배, 영국 2.4배, 미국은 2.1배가 상승하게 됩니다.
(@ 독일의 하이퍼 인플레이션 hyperinflation은 1921년부터 1923년 사이에 일어남)

그리고 드디어 전쟁이 끝나면서 많은 사람들이 전쟁 때문에 수요가 거의 소멸되어
불황이 찾아오리라 예상했었는데, 1919년 여름부터 예상과 달리 물가가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전쟁 때문에 파괴된 도로와 다리, 수많은 생산 시설물 등의 재건을 위해 유럽 국가들은
통화 공급을 더 확대하였고 대규모 적자재정은 물론, 전쟁 중 발행된 공채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재건비용 때문에 지속적인 공채(국채) 발행이 이루어졌는데(세금만으로는 불가능한 상황이었음) ... 이런 상황 속에서
국채에 대한 이자부담 때문에 이자율 또한 낮게 유지할 수밖에 없었으며, 낮은 이자율의 기반위에서
통화량은 계속해서 증가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전후 일시적 호황을 가져오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전후의 이러한 지속적인 통화 공급 확대로 인플레이션이 우려된 유럽은, 다시 인플레이션을
진정시키고(금리인상) 과거(전쟁전) 평화로웠던 시절로의 회귀를 생각하게 됩니다 ... 한마디로
“금본위제로 돌아가자!” 를 외쳤던 것입니다.(@ 금리인상 ... 즉, 당시 통화긴축은 금본위제도의
재건을 위한 준비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참고}
@ [고전적 금본위제]: 1870년부터 1차세계대전 발발 직전인 1913년 동안의 금본위제를 뜻함(1870~1913)
@ [전간기(戰間期) 금본위제]: 1차 세계대전 종전 후부터 2차세계대전 발발 직전까지의 금본위제(1919년~1939년)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금본위제로 돌아가자”는 바로 고전적 금본위제로 돌아가고 싶다는 뜻입니다.

미국은 전쟁(1차 세계대전)이 거의 끝날 무렵에 개입했기 때문에 전쟁기간 동안 물가수준은 유럽국가들
보다는 상당히 안정적 이었습니다 ... 따라서 전쟁전의 환율수준으로 금본위제도가 재건된다면 미국은
가격경쟁력 측면에서 가장 우월적 위치에 있게 되어(물가수준이 가장 낮았으므로) 무역에서는 경상수지
흑자국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습니다.

따라서 국제수지 적자로 인한 금(Gold) 유출을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었던 미국은 전쟁이 끝나고
1919년에 바로 전쟁전의 금평가(Gold parity)에 따라 달러($)의 금태환성을 회복하고 금본위제도로 복귀하게 됩니다.
그리고 1919년에 미국은 금(Gold)의 자유로운 수출과 수입을 허용한 유일한 국가가 되었는데 ... 반면
미국과 상황이 달랐던 유럽은 금(Gold) 수출은 철저히 통제하면서 동시에 금(Gold) 수입은 꾸준히 늘리고
있었습니다.(@금본위제로 돌아가자!) ... 그 결과 미국의 금(Gold)이 조금씩 국외로 유출되기 시작했고,
금보유고(금스톡) 또한 줄어들게 됩니다.

그러자 미국 연준(FRB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은 금(Gold)보유고 고갈을 막기 위해,
통화긴축(금리인상)으로 대응합니다. 결론적으로 유럽의 금본위제 재건(@금본위제로 돌아가자!)과
미국의 통화긴축이 맞물려 1920년 중반부터 서서히 물가와 생산규모가 하락하기 시작합니다.(@ 불황의 조짐)

그럼 여기서 사례를 단순화해 금평가와 그로인한 당시의 유럽과 미국의 물가 문제를 살펴보겠습니다.

[ 전쟁 전 금본위제도: (금 1g = 1파운드 = 1달러)]
@ 영국 콜라 1병 = (금 1그램 = 1파운드)
@ 미국 콜라 1병 = (금 1그램 = 1달러)

[ 전쟁 중(1차 세계대전) 물가상승: (영국 100% 상승), (미국 25% 상승)]
@ 영국 콜라 1병 = (금 2그램 = 2파운드)
@ 미국 콜라 1병 = (금 1.25그램 = 1.25달러)

자세히 보시면, 전쟁 전 금본위제도에서 금평가(Gold parity) 는
영국의 1파운드와 미국의 1달러($)가 모두 각각 금1g의 가치가 있습니다 ... 다시말해,
1파운드와 1달러($)는 모두 금1g으로 태환(교환)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 그리고
전쟁전의 콜라의 가격은 영국과 미국에서 1파운드와 1달러($)인 상황입니다 ... 그런데
전쟁 중에 물가가 상승해서 영국에서는 콜라 1병의 가격이 1파운드에서 2파운드로 100% 상승했고,
미국에서는 콜라 1병의 가격이 1달러($)에서 1.25달러($)로 25% 상승한 상황입니다 ...
[@ 이때에도 금평가(Gold parity)는 여전히 (금1g = 1파운드 = 1달러($)) 입니다]

따라서 전쟁 후, 만약 금 10(g)을 가지고 있는 소비자가 있다면 영국에서는 콜라 5병을 구매할 수
있고, 미국에서는 8병을 구매할 수 있게 됩니다. 당연하겠지만, 똑같은 금(gold)의 양으로 더 많은
콜라를 살 수 있는 미국이 (콜라)무역에서는 가격경쟁력 때문에 흑자국이 될 가능성이 높게됩니다.
그런데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전쟁에 참여한 국가들 대부분은 전쟁비용 조달 때문에 계속적인 통화증발(增發)과
대량의 공채발행으로 물가(상승) 문제가 상당히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과거 ‘고전적 금본위제’ 시절로
복귀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물가 문제와 함께 전쟁전의 금평가(Gold parity)로 인한 유동성 문제 등
여러 골치 아픈 문제들이 기다리고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전쟁(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19년 말부터 선진공업국들은 과거 좋았던 시절인
‘고전적 금본위제’로 돌아가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게됩니다. 하지만 방금 언급했던
금평가(Gold parity)’ 문제 때문에 곧바로 금본위제(고전적)로 돌아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전쟁 종료 후 대부분의 전쟁참여국들에게 물가(상승)문제는 상당히 심각했습니다. 결국
물가가 안정되었던 과거 (고전적)금본위제로 돌아가려면, 물가를 떨어뜨려 다시 같은 양의 금10g 으로
10병의 콜라를 살 수 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재정지출 축소와 수요억제 및 통화량 축소 같은
소위 ‘디플레이션(Deflation) 정책’ 을 사용할 수 있는데 ... 이것은 엄청난 실업과 생산위축을 야기할 수 있었기 때문에
상당한 위험을 감수해야만 했습니다. 물론 금(Gold)의 양을 늘리는 것도 ‘고전적 금본위제’ 시절로 복귀하기 위한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었지만, 당시에는 금본위제 재건 준비를 위해 대부분 금수출을 통제하며
서로가 금을 수입하려고만 했기 때문에 금(Gold)의 양을 늘리는 것도 한계가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또한 고전적 금본위제 시절의 금평가(Gold parity)를 물가가 상승한 전쟁 후에도 그대로 적용하게 된다면
심각한 유동성 부족 문제가 발생할 수 있게 됩니다.

예를 들어, 위의 콜라 사례에서 영국의 상황을 살펴보면 전쟁 전에는 (금1g = 1파운드)의
금평가(Gold parity)가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만약 당시(전쟁전) 영국 중앙은행의
금보유고[금스톡(Goldstock)]가 금 10g 뿐이어서 통화량(태환권지폐)도 금평가에 따라
정확히 10 파운드만 발행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발발하자 영국정부는
전비조달을 위해 금본위제 원칙을 깨고 화폐(태환권) 10파운드를 추가로 발행하였다면 ... 이제
전체 통화량은 20파운드가 됩니다 (@ 금보유고는 여전히 10g 뿐임) ... 그런데 전쟁이 끝나고보니
물가도 상승(콜라 1파운드 => 2파운드)했고 ... 시중 통화량은 20파운드인데 비해서 보유하고 있는
금(Gold)의 양은 10g 뿐인 상황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정부가 과거 전쟁이 발발하기 전의
(고전적)금본위제로 복귀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금평가(Gold parity)였던 (금1g = 1파운드)의
원칙을 따라야 했는데 ... 그 원칙을 따르려면 금(Gold)의 양을 10g 더 늘리던지(금보유고)
아니면 시중 통화량을 다시 줄여야 합니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 햇듯이 금(Gold)의 양을 늘리는데도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가장 쉬운 방법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시중 통화량을 줄여서
다시 예전처럼 금보유고 10g에 딱 맞아 떨어지는 통화량인 10파운드 수준으로 시중통화량을 조절해야 합니다.
전쟁전 금평가가 (금1g = 1파운드) 였고, 금보유고도 여전히 10g 뿐이기 때문에 통화량은 10파운드가 됩니다.

그런데 이때(전쟁 종료후)에는 이미 물가가 상승한(콜라1병 2파운드) 상황이기 때문에
콜라를 5병밖에 살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은 결국 모두가 원했던 대로 전쟁이 발발하기 전이었던
(고전적)금본위제 시절로 돌아갔다 하더라도, 그때처럼 10파운드로 콜라 10병을 구매할 수 있는 상황이
더 이상 아니게 된다는 것입니다 ... 결국 실질통화 공급이 감소해서 유동성 부족 문제가 발생하는
상황이 올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 전쟁전의 금본위제로 돌아가는 방법에는 크게 2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디플레이션(deflation) 정책이고, 다른 하나는 통화가치를 “평가절하” 하는 것입니다.]

고전적 금본위제로 복귀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였던 ‘디플레이션(Deflation) 정책’은
살펴보았듯이 ... 가능은 하겠지만 실업과 생산축소 같은 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고, 특히
그 당시(고전적 금본위제)의 금평가(Gold parity)에 맞춰서 통화를 공급하게 되면(10파운드),
물가수준이 상승한 경우에는 유동성부족(실질통화공급감소)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 그렇다면
물가(상승) 문제를 어느정도 해결하면서 “고전적 금본위제”로 복귀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생각해봐야
하는데 ... 그것이 바로 ‘통화의 평가절하’ 입니다.

[ 전쟁 중(1차 세계대전) 물가상승: (영국 100% 상승), (미국 25% 상승)]
@ 영국 콜라 1병 = (금 2그램 = 2파운드)
@ 미국 콜라 1병 = (금 1.25그램 = 1.25달러)
@ 금 10그램 = (영국 콜라 5병), (미국 콜라 8병)

[ 물가상승 상황에서 파운드화의 (통화)가치 평가 절하 => (1파운드 = 금 0.5그램), (1달러 = 금 1그램)]
@ 영국 콜라 1병 = (금 1그램 = 2파운드)
@ 미국 콜라 1병 = (금 1.25그램 = 1.25달러)
@ 금 10그램 = (영국 콜라 10병), (미국 콜라 8병)

금본위제도 아래에서 통화(화폐)의 가치는 바로 지폐가 과연 얼마의 금으로 태환(교환)
가능한가에 따라서 결정되어 집니다 ... 더불어 화폐(지폐) 1단위당 어느 정도 중량의 금(Gold)으로
교환할 수 있는가를 금평가(Gold parity) 라고 얘기했습니다.

다시 위의 콜라 사례를 보시면 ... 영국은 전쟁 중에 물가도 상승했고(콜라 2파운드),
금평가(Gold parity)도 여전히 (금1g = 1파운드)인 상황입니다 ...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의 파운드화를
“평가절하” 하게되면, 교환해주는 금(Gold)의 양을 줄여야 합니다.[@미국 달러($)는 평가절하 안함]
결국 금평가(Gold parity) 를 다시 해야 한다는 것인데 ... 사례에서 파운드화를 평가절하한 후에는
금평가(Gold parity)도 (1파운드 = 금 0.5g) 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2파운드 콜라는 금1g 으로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 결론적으로 영국은 평가절하 후부터는 똑같은 양의 금10g 으로
이제는 콜라 10병을 구매할 수가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 금10g = 20파운드 = 콜라 10병)
더불어 영국은 미국과의 무역에서도 가격경쟁력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전쟁(1차 세계대전)중에, 그리고 전쟁이 끝나고 인플레이션으로 통화가치가 60% 이상 하락했었던
독일이나 프랑스 같은 국가들에서는 디플레이션(Deflation) 정책으로는 과거의 안정적인 물가수준을
회복하기는 상당히 어려웠기 때문에 통화의 평가절하를 선택합니다. (@ 평가절하로 무역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게 되면 국외로부터 금이 유입됩니다. 하지만 디플레이션 정책은 실업과 생산위축
이라는 사회적 희생이 수반되게 됩니다.)

{ 통화의 평가절하를 통해 금본위제를 재건한 국가
- 독일, 프랑스, 벨기에, 이탈리아, 포르투갈, 체코 등 }

{ 전쟁 인플레이션 속도가 비교적 완만해서 통화가치 하락정도가 나름대로
감당할만한 수준이었던 국가 [디플레이션(Deflation) 정책을 선택한 국가]
- 영국,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네덜란드 등 }

전쟁 종료 후 재정적자 문제가 가장 심각했던 국가는 바로 패전국 독일 이었습니다.
전후 재건비용과 천문학적인 배상금, 프랑스와 국지전(루르지방) 등으로 인한 계속적인 전비지출 등
특히 1921년부터 시작된 배상금은 같은 해 국민소득의 10% 수준 이었고, 1921~1922 동안은 배상금
규모는 독일 수출액의 80% 수준에 달하는 규모였습니다. 당연히 재정이 적자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독일 정부는 이러한 어려움을 세금증가와 민간차입으로 해결하려 했지만, 역부족 이었고
더구나 전쟁기간중에 공채의 발행도 엄청났기 때문에 ... 결국 당시 독일 정부가 할수있는
최선의 방법은 “통화증발(增發)” 즉, 돈을 마구마구 찍어내는 수밖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 세금증가를 통해 재정적자를 문제를 해결하려했던 당시 바이마르 정부의 재무장관
에르츠베르거 (Matthias Erzberger)는 민족주의자에게 암살을 당합니다]

통화증발은 인플레이션을 초래하게 됩니다 ... 더불어 앞으로 물가가 오를것이라는 생각이
사회전반에 퍼지게 되면(인플레이션 기대심리) 실질이자율이 감소하게 되고, 이것은 저축률을
떨어뜨리게 됩니다.(@ 물가가 오르면 저축보다는 아파트 같은 실물자산 투자가 유리합니다.)

저축이 줄어든다는 것은 정부의 공채를 사줄 수요가 줄어드는 것이기도 하므로 ... 정부 입장에서는
재정조달을 결국 돈을 더 찍어내는데(통화증발) 더욱더 의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 (실질이자율 감소) : 1만원짜리 갈비탕을 먹으로 갔다가, 지금 사먹지 않고 은행에
저축하고 1년 후, 원금 1만원과 이자를 포함한 돈을 다 찾아서 다시 갈비탕을 사먹으러
갔는데 만약 돈이 부족하여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면 실질이자율이 감소하게 된것임!]

또한 물가가 계속적으로 상승하면, 당연히 실물자산 가격이 오르고 현물형태로 자산을 보유하려는
경향이 나타나는데 ... 이것은 투기적 수요와 물가상승을 더욱더 부추기는 요인이 됩니다 ... 더불어
정부가 세금을 걷는 동안에도 인플레이션이 강하게 진행되고 있었다면 ... 결국 세수의 실질가치도
하락하게 되는 것이고, 재정적자는 더욱더 악화되게 됩니다 ... 그리고 이러한 악순환은 정부에게
“돈을 더 많이 찍어내! ~ 더 찍어내야 한다!” ... 라는 최면을 걸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통화증발(增發)”을 통해 배상금, (국지적)전비, 전후 재건비용 등 ... 엄청나게 늘어난 재정수요를
해결하려했던 독일은 결국 인플레이션만 더욱더 악화시키게 되었고 ... 1921년에서 1923년 동안에
독일에서 일어난 이러한 누적적인 악순환의 과정은 결국 하이퍼인플레이션(Hyperinflation) 이라는
희대의 괴물을 만들게 된 것입니다.

특히 당시 독일의 천문학적인 배상금 규모가 재정적자에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었는데,
이러한 전쟁배상금 지불은, 곧 자본유출을 의미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또한 배상금 지불을 위한
바이마르 정부의 세금인상이 공공연하게 기정사실화 되자, 민간자본의 해외도피가 시작됐고,
이것은 자본수지 악화와 국제수지 악화로 이어지게 됩니다. (민간)자본이 독일을 떠나기 시작하자
독일 마르크화의 가치도 하락했고, 결국 수입품의 가격상승을 유발시키며 국내(독일)의 물가상승을
더욱더 부채질하게 되었습니다.
[@ 배상금 지불 때문에 국제수지가 악화되면서 발생한 환율상승과 재정적자 때문에 일어난 통화증발의
두 요인 중에서 ... 과연 무엇이 독일의 ‘하이퍼인플레이션(Hyperinflation)’에 더 큰 원인이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1920년대 초에 의견대립이 있었습니다. 케인즈(Keynes) 같은 영어권학자들 사이에서는
통화증발을 원인으로 보았고, 독일의 정치가 칼 헬퍼리히(karl helfferich)는 환율상승을 하이퍼인플레이션의
중요한 원인으로 생각했습니다.(이 부분은 지금도 견해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배상금 지불이 시작되면서부터 독일의 물가는 급격하게 상승하기 시작했는데
1918년 107 이라는 물가지수가 1923년에는 무려 "820만!"에 도달하게 됩니다. 또한 독일과 경제적으로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오스트리아와 중부 유럽으로 이러한 하이퍼인플레이션의 여파가 조금씩 물들게 됩니다.

독일의 ‘하이퍼 인플레이션(Hyperinflation)’ 으로 중부유럽이 경제적 위기에 빠지자 ... 승전국들은
이 지역이 잘못하면 정치적으로도 불안해져서 러시아의 볼셰비키혁명같은 사회주의가 물들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우려 때문에 승전국들은 일시적으로 독일의 배상금
지불중단을 허용해 주었고, 1924년 8월에는 향후 5년간 독일이 연간 배상해야 하는 액수를 경감해
주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도스안(Dawes Plan) 인데 ... 이것은 독일에게 한해(1년) 동안 갚아야
하는 액수를 줄여준 것뿐이지, 배상 총액을 줄여준 것은 아닙니다. 더불어 도스안(Dawes Plan)에 의해
독일은 미국에게 8억 마르크의 차관을 얻을 수 있었고, 독일은 이 돈으로 영국과 프랑스 등에게
배상금을 지불하게 됩니다.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 등의 승전국들은 독일에게서 받은 배상금으로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 미국에게 진 빚을 갚게 됩니다. ... 이것이 무얼 의미하는 것이냐 하면
제1차 세계대전때 빚을 지게 된 국가들은 승전국이든 패전국이든 ~ 결국은 미국이 개입해야만
채무관계가 해결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미국이 아니라 미국의 자본이죠!

도스(Dawes Plan)계획과 미국 자본 유입으로 배상금 지불 문제와 재정적자 문제에서
어느 정도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자 ... 독일은 하이퍼인플레이션(Hyperinflation)을 끝내기 위해서
1923년 11월에 당시 통화단위였던 라이히스마르크(Reichsmark)의 1조 배에 해당하는
새로운 통화 ‘렌텐마르크(Rentenmark)’를 도입하여 화폐개혁을 단행하게 됩니다.

[@ 1조 라이히스마르크(Reichsmark) = 1렌텐마르크(Rentenmark) ]

이후 ... 독일의 하이퍼인플레이션은 렌텐마르크의 탄생에 의해 완전히 소멸되었고,
새로운통화 렌텐마르크는 소위 ‘기적의 통화’로 이름을 높였습니다. 또한 독일은 렌텐마르크의
가치(통화가치) 유지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으며, 렌텐마르크의 발행액은 24억(렌텐마르크)을 초과할수 없었고,
토지나 건물같은 실물자산을 담보로만 발행할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화폐 개혁으로 통화가 안정되면서
독일은 1924년 드디어 금본위제로 복귀하게 됩니다

프랑스는 독일보다는 심하지 않았지만 ... 비슷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승전국이라 배상금 문제는 없었고, 재정적자도 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전후 재건비용이 커서
생각보다 많은 비용이 소요되고 있었고 전시공채에 대한 원금과 이자상환 문제 때문에
재정지출을 줄이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 더불어 제1차 세계대전을 경험하면서 노동계급의 입지가
강화되었고, 전후에 비례대표제가 도입되어 정치영역에서는 (정치)권력이 분산되면서 세금부담을
누구에게 부담시키느냐로 서로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면서 세금인상 논의는 사실상 접점을 찾기가
매우 어려웠던 상황이었습니다. (1924년~1926년 사이에 프랑스 재무장관은 10번 교체됨)

이러한 상황 속에서 프랑스도 편한 방법을 선택하게 됩니다. 바로 “통화증발(增發)” 이었습니다.
그리고 독일보다는 덜 했지만, 물가는 하이퍼인플레이션 이라 불리울만큼 심각한 수준까지 다가가게
됩니다 ... 그러자 1926년 집권한 푸앵카레(Raymond Poincaré) 정부는 세금 인상과
재정지출 감소 같은 재정 안정화 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 이후 물가는 어느정도 진정이 되었고,
환율도 안정이 되면서 ... 드디어 1928년 프랑스도 금본위제로 복귀하게 됩니다.

다만, 프랑스는 전쟁과 전쟁 이후에도 상당한 통화증발이 있었기 때문에
전쟁 이전의 금평가(Gold parity)를 그대로 적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 보유하고 있는 금(Gold)보다
발행된 화폐의 양이 절대적으로 많았기 때문에 금태환 요구를 모두 만족시키기가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프랑스는 ‘통화의 평가절하’ 를 선택하게 됩니다 ... 다시말해 금평가를 전쟁이전에 비해
5분에 1로 낮추었던 것입니다. [@ 전쟁전에 지폐를 제시해서 금(Gold)을 10을 받았다면,
평가절하 이후에는 2를 받게 되었다는 것임]

독일과 프랑스에 비해서 영국의 인플레이션은 상당히 완만한 수준이었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물가수준이 높지 않았다면 ... 영국은 큰 고민없이 전쟁전의 ‘고전적 금본위제’ 시절로 돌아갈 수
있었을 겁니다 ... 물가가 높지 않았다는 것은 화폐발행(통화량)이 적었다는 것인데, 이것은 결국
발행된 화폐를 금(Gold)으로 교환(태환)해 주는데 부담이 적게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 하지만
앞에서도 잠시 살펴보았듯이, 전쟁이 끝나고 나서 영국의 물가는 독일과 프랑스가 아닌,
미국과 비교해보면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따라서 물가가 상승한 상태에서
전쟁전의 금평가(Gold parity)를 그대로 적용하게 되면 ... 앞의 콜라 사례에서 보셨다시피 ...
물가가 상대적으로 더 많이 상승했던 영국은 금(Gold) 10g으로 5병의 콜라를 구매할 수가 있게되고,
상대적으로 물가가 완만하게 상승했던 미국은 같은 금(Gold) 10g으로 콜라 8병을 구매할 수가
있게 됩니다 ... 따라서 당연히 영국은 국제수지 적자가 발생하면서 금(Gold)의 유출이 발생합니다.
그런데 단순히 높은 물가와 전쟁전 금평가 수준을 따지지 않았더라도, 20세기초(1913년)에 영국은
이미 제조업에서 독일과 미국에게 뒤지고 있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무역에서 경상수지 적자와
금(Gold) 유출을 예상할수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 1913년 세계 산업생산 - 미국36%, 독일16%, 영국14%)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이 전쟁전의 (고전적)금본위제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앞에서 살펴본대로
‘디플레이션(Deflation) 정책’ 이나 ‘통화가치 평가절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제조업에서의 경쟁우위도 사라졌고, 물가수준도 미국과 비교해보면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이었던 영국은
‘고전적 금본위제’로 돌아가기 위해서 고심끝에 ‘디플레이션(Deflation) 정책’을 택하게 됩니다 ...
[@ 가격이 4.86달러($)인 빵이 있습니다 ... 그런데 시간이 몇 년 지나서 빵의 가격은 3.40 달러($)로
떨어졌습니다 ... 여기서 만약 빵의 가격을 예전가격인 4.86달러($) 수준으로 회복하려면
과연 어떠한 방법을 써야 하겠습니까? ... 우선적으로 생각할수 있는것은 빵의 공급을 줄이는 것입니다.]

전쟁전 고전적 금본위제 시기에 4.86달러($)와 교환되던 파운드화는 전쟁이 끝나고 나서 파운드당
3.40달러($)로 교환되고 있었습니다. 파운드화의 가치가 떨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전쟁전 4.86달러($)
수준으로 가치를 회복하려면, 파운드화의 공급을 축소해야 합니다(@ 빵의 공급을 줄이는 것처럼)
결국 고전적 금본위제로 복귀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통화긴축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디플레이션 정책은 실업과 생산축소 같은 사회적 희생이 수반되게 됩니다. 그래서
당시 케인즈(Keynes)도 긴축정책을 통해서 금본위제로 돌아가는 것은 재앙이 될 것이라 경고했고,
영국의 경제불황은 통화긴축이 아닌 통화팽창 정책이 더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 그러나 영국의 재무성은
어떠한 고통이 있더라도 전쟁전의 “고전적 금본위제” 시절의 금평가를 그대로 적용해서
금본위제를 재건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 이러한 생각은 당시 영국의 금융중심지 였던
런던의 시티(@ 지금의 뉴욕 월가, 한국 여의도와 비슷한 지역임)지역의 국제금융업계의 생각이 많이 반영된 것입니다.

그들의 생각은 ... 만약 영국이 프랑스처럼 ‘통화의 평가절하’를 통해서 금본위제로 돌아간다면
파운드화의 대외 신인도와 위상을 크게 손상시키게 되어, 파운드화의 기축통화 역할이 위축될 것이고
자신들의 밥그릇인 국제금융업이 심한 타격을 받게될 것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물론 디플레이션 정책에 반대도 많았지만, 전쟁전 금평가를 그대로 유지해서 ‘파운드화의 가치안정’을
계속해서 지켜야 한다는 견해가 전반적으로 우세했었고 ... 파운드의 가치안정은 무역과 투자를
활성화해서 영국경제를 회복시킬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감 또한 영국정부를 도취되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영국은 1925년에 금본위제로 복귀하게 됩니다.(전쟁전 금평가를 그대로 적용!)
더불어 파운드화의 가치를 안정되게 유지하려면 ... 당연히 금(Gold)으로 태환(교환) 하는데 제약이
없어야 하고, 전쟁전에 교환해 주었던 금(Gold)의 양을 보장해야 합니다(전쟁전의 금평가 유지)
이것이 가능하려면, 결국 영국 정부가 금보유고를 늘리던지, 아니면 통화량을 더 이상 증가시키면
안되었기 때문에, 긴축정책을 써야 했던 것입니다... 지적했듯이 긴축정책(디플레이션 정책)으로 물가는
하락하겠지만, 이것은 실질임금을 상승시켜 기업들의 고용과 투자를 위축시키게 됩니다.(실업증가)
또한 투자위축은 총수요를 정체시켜 경기침체 상황을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 제1차 세계대전으로 세계금융의 중심이 뉴욕으로 옮겨간 분위기였는데, 이때 영국 런던의 시티 은행가들은
전쟁전의 금평가를 그대로 적용해서 금본위제로 복귀하게 된다면 런던이 다시 금융의 중심지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따라서 파운드화는 가치안정에 최대한 집중해야 하며, 절대로 평가절하를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 하지만
케인즈(Keynes)는 전쟁 이후 많은 유럽 국가들이 미국에 상당한 빚을 지고 있었고, 대부분의 금(Gold)이
미국으로 유입된 상황에서 만일 영국이 파운드화를 금에 고정시키면 그 순간 파운드화는 금이 아니라 달러($)에
종속되고 말 것이라 주장합니다. 특히 그는 전쟁이후 세계경제의 중심축이 이미 미국으로 이동했으며,
이러한 흐름이 일시적인 상황이 아니라는 것도 인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고전적 금본위제도’ ... 즉, 전쟁(1차세계대전) 이전의 금본위제도하에서
무역불균형 및 분쟁 등이 발생했을 때, 특별히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려했던 국제기구가 없었음에도
불국하고 만성적으로 국제수지 적자나 또는 흑자를 내는 국가는 거의 없었습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당시의 (고전적)금본위제도하에서는 금평가(Gold parity)에 의해서 환율이 고정되어 있었고,
경상수지 흑자에 의해 상대국으로부터 금(Gold)이 유입되면 결국 통화량이 늘어나서 물가가 올라가고
이것은 상대국 상품에 비해 가격경쟁력이 떨어져 다시 흑자구조가 줄어들게 되는데 ... 금본위제도는
이러한 국제수지 불균형을 자동적으로 조절해주는 기능이 있었습니다 ... 그래서 만성적인 적자국이나
흑자국은 고전적 금본위제 시기에는 거의 없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 그런데
1920년대에 재건된 (전간기)금본위제 국가들은 조금은 사정이 달랐습니다.

@ 고전적 금본위제(1870년 ~ 1913년)
@ 전간기(戰間期) 금본위제는(1919년~1939년)

먼저 전쟁의 최대수혜자였던 미국과 과감한 평가절하를 선택했던 프랑스의 국제수지는 흑자를
나타냈는데 ... 프랑스는 금본위제를 도입하기 1년전인 1927년부터 1931년까지 국제수지 흑자였고,
미국은 1920년대 내내 흑자였습니다.. 하지만 영국은 1927년부터 1931년 동안 적자를 나타냈습니다.
1925년, 당시 영국의 재무장관이었던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이 런던의 은행가들의 여론을 반영하여
“대영제국의 영광을 재현하자!” 를 외치며 금본위제를 도입했지만 ... 도입당시 선택했던
긴축정책(디플레이션정책)은 생각보다 영국의 물가를 만족할만큼 떨어뜨리지 못했습니다. 또한
앞에서 콜라사례를 살펴보았듯이 ... 통화의 평가절하[@ 교환해주는 금(Gold)의 양을 줄임]를 하게되면
화폐의 신뢰에 손상이 가겠지만[@ 예전보다 금(Gold)을 적게 바꿔주니까 1g => 0.5g] ... 대신에
가격경쟁력이 생깁니다 ... 따라서 당시 물가가 안정됐던 미국과 통화의 평가절하로 가격경쟁력이
우월했던 프랑스는 경상수지가 흑자였지만, 제조업경쟁력도 잃었고 경기침체 상황에서 오히려 긴축정책을 펼치고,
파운드화도 과대평가 되어있던 영국의 경상수지는 적자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금본위제도의 암묵적 규칙이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면 영국은 국제수지 적자로 인해 금(Gold)의 유출이 일어나
통화량이 감소하고 물가가 하락할 것이고 미국과 프랑스는 흑자로 인해 금(Gold)의 유입이 일어나 통화량이 증가하고
물가가 상승하게 될것입니다 ... 그리고 이러한 불균형은 금본위제도의 자동조절기능으로 얼마 뒤에 해소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미국, 프랑스의 흑자는 수년동안 지속되었고, 영국의 적자상태도 상당히 오랜기간 동안
해소되지 못하고 지속 되었습니다 ... 이것은 국제수지 흑자국(미국, 프랑스 등)이 금본위제도의
기본 룰(Rule)을 지키지 않고, 소위 ‘불태화정책(不胎化政策)’을 시도했기 때문입니다.

<@ 영국 남자>
"흑자국 중앙은행은, 금(Gold)이 유입되면 통화의 공급증가로 이어지지 못하도록 증권을 팔아서
민간으로부터 통화량을 흡수합니다! ~ 물가상승이나 투기가 일어날 것을 대비하는 것이죠! ~ 반대로
금(Gold)이 유출되면 통화 공급이 줄어들지 못하도록 민간에게서 증권을 사들여 시중에 돈을 풀어버립니다!
결국 불태화정책은, 오늘날 중앙은행의 "공개시장조작"과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저 여자에게
지금까지 꽤 많은 금(Gold)이 들어갔는데 아직까지 우리의 관계는 해소되지 못하고 있답니다! ~ 계속 적자라구여!"

<@ 프랑스 여자>
"불태화정책이 금(Gold) 유입과 유출 자체를 막은 것은 아니에요! ~ 다만 금(Gold) 유입.유출로 인한
통화량 증가와 감소를 통제한다는 것이 핵심이죠! ~ ~ ~ 당신이 전쟁전의 고전적이고 우아한 시절에
내게 금(gold)을 줬다면 우리의 관계는 금방 해소됐을 꺼에요 ~ 흣!"

물가가 만족할 만큼 떨어지지도 않았고, 더구나 그런 상황에서 금본위제로 복귀한 영국에게
국제수지 흑자국들이 금(Gold) 유입에도 불구하고 통화공급을 확대하는데 있어서 자국(흑자국)의
물가상승과(@ 프랑스의 하이퍼인플레이션 공포) 투기우려 때문에 ... 금본위제 규칙을 무시한
불태화정책(不胎化政策)을 실행 하므로서 영국의 국제수지 적자와 금(Gold) 유출에 대한 고민은 계속
되었던 것입니다 ... 하지만 영국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본위제도의 유지를 위해서 긴축정책을
더욱더 강하게 밀어부쳤습니다 ...1920년대 초반에는 고전적 금본위제시절로의 복귀를 위해서
그리고, 1920년대 후반에는 재건한 금본위제 유지를 위해서 디플레이션 정책을 계속 실행했던
영국에게 1920년대는 그야말로 “불황의 늪”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러한 장기적 침체속에서
1926년에 영국에서는 전국적인 총파업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미 언급했듯이 ‘고전적 금본위제’ 시절에는 금스톡(Gold stock) 과
이를 근거로 발행된 화폐(태환권)의 비율이 적정했었고, 금본위제 국가들도 자신들만의 법과 규제로
역피라미드가 쓰러지지 않도록 통화량을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 다시말해 발행된 지폐의
금(Gold) 태환(교환)요구에 언제든지 대응할수 있도록 철저하게 금스톡과 통화량을 관리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전쟁 종료후에는 금스톡(금보유고)에 비해 발행된 통화량이 너무나 크게 증가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프랑스는 하단의 금(Gold)을 상단의 지폐에 골고루 분배하는 ‘평가절하’를 선택한 것입니다.
금스톡은 고전적 금본위제때와 비슷한 양인데 비해 상단의 화폐규모가 더 늘어났으니
분배되는 금(Gold)의 양[교환되는 금(Gold)의 양]은 줄어들게 됩니다.(평가절하) ... 또한 영국은
상단의 지폐규모를 줄여서(긴축정책) ‘고전적 금본위제’ 시절로 돌아가려 했던것입니다.

미국은 전쟁으로인한 인플레이션 영향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전적)금본위제로 돌아가기 위해서
디플레이션 정책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을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금(Gold)을 빨아들였기 때문에
통화의 평가절하도 필요없었습니다 ... 세계 최고의 산업생산능력과 넘치는 자본, 광활한 대륙과
자원 등 ... 1920년대의 미국은 엄청난 호황이었던 것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엄청나게 늘어난 통화량과 (고전적)금본위제 재건을 위한 긴축정책 및
금본위제 기본적 룰(Rule)을 무시한 채 국제수지 흑자국들이 실행한 불태화정책 등 ...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는 전반적으로 긴축적 기조였다고 말 할수 있습니다 ... 더구나 영국의 고집스런 파운드화
가치안정을 위한 긴축정책은 대량의 실업을 양산했고, 이로 인해 1926년에는 전국적인 총파업이 발생하게 됩니다.

영국의 총파업은 사회적, 정치적으로 불안을 초래하면서 국외로 자본도피를 부추겼습니다.
자본의 해외도피는 영국의 자본수지를 악화시켰고, 같은해(1926년) 프랑스에서 푸앵카레 정부가 들어서면서
인플레이션이 위협수준까지 오르자 안정화 정책(세금인상, 재정지출감소)을 실시했는데 ... 이것은 곧 프랑화 가치에
신뢰감이 쌓이게된 계기가 되었고 ... 그 즈음 영국에 도피해 와 있었던(프랑스가 불안할 때) 프랑스 자본이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여기에 더해 1926년 말부터는 금본위제 복귀 준비를 하던 프랑스가
금보유고 확충을 위해 (프랑스)중앙은행이 보유하고 있던 파운드화를 금(Gold)으로 바꿔달라고
영국에 요청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당시 프랑스가 인도나 필리핀, 라틴아메리카 등의 후진국들 처럼
파운드화를 준비금으로 하는 금환본위제도를 전혀 선택할 마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 금환본위제도 - 당시 후진국들 상황 }

"우리는 금(Gold)대신에 영국 파운드화를 보유고로 정했습니다.
후진국이다보니 금(Gold)이 너무 부족했어요! ~ 그래서 금환본위제도를 택하게 되면
중앙은행이 금(Gold)을 보유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돈을 은행에 제시하면
영국 파운드화로 바꿔줄겁니다. ~ 그런데 파운드화는 언제든지 금(Gold)으로 바꿀수 있잖아요! ~ 결국
영국이 금본위제도에서 이탈하지 않는 이상 우리 후진국들도 금본위제도를 택한 것과 같은 효과를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영국은 막막했습니다. 자본은 계속해서 영국을 빠져나갔고, 프랑스마저 파운드화를 가져와서
금(Gold)으로 바꿔달라고 하니 ... 어떻하든 해법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마지막 희망은
미국뿐임을 알게됩니다 ... 미국 연방준비이사회는 1927년에 1200만 파운드를 받고 영국 중앙은행에
금(Gold)을 공급하기로 결정했습니다 ... 뿐만아니라, 적자상태가 지속되던 영국의 경상수지를 개선시키기 위해
미국은 앞서 얘기했던 ‘불태화정책(不胎化政策)’ 을 버리고 금리인하, 통화공급 증가와 같은
확장정책을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 [@ 이 당시 잉글랜드 은행총재였던 노먼(Montagu Norman)과
연방준비이사회 총재인 스트롱(Benjamin Strong)이 매우 친밀한 관계였기 때문에 협상이 매끄럽게
진행되었다는 것은 많이 알려진 사실입니다.]

영국을 돕기위해 실시한 미국의 확장정책(통화공급 증가)은 곧바로 미국의 물가와 주식가격 상승으로
나타났습니다 ... 1928년 여름, 주식가격에 거품이 있다고 판단한 연방준비이사회(FRB)는
대출규모를 축소하고 이자율을 인상합니다.!

[1928년 1월 ~ 1929년 9월]
@ 재할인율 4회 걸쳐 인상함 ( 3.50% => 6% )
@ 콜금리 ( 3.50% => 20% )

미국의 금리인상은 가장먼저 (국제적인)자본이동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 이자율 상승으로
해외에 투자되었던 자본들이 미국으로 돌아오게 되면서, 전쟁(1차 세계대전) 종료후 세계에
가장 많은 자본을 수출한 미국의 자본수출이 급감하게 됩니다 ... 1925년에는 8억 9,000만 달러($),
1928년에는 약 15억 달러($)로 증가했다가 ... 1929년에는 약 8억 달러($)로 급감했습니다.
[@ 자본수출에는 기본적으로 2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하나는 외국에 신규법인을 설립하는것과 철도, 도로, 광산개발 같은 형태로 투자해
이윤을 얻는 산업자본의 수출이며, 또다른 자본수출 형태는 외국정부 채권의 매입과
차관 공여 및 은행대부 등 이자소득을 목적으로하는 대부(대출)자본 수출입니다 ]

이러한 상황은 해외자본 의존도가 특히 높았던 오스트레일리아, 아르헨티나 등 저개발 국가들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 자본이 빠져나간 (저개발)국가들은 국제수지가 급격히 악화되었고,
이로인해 많은 저개발 국가들은 긴축정책(@ 금리를 높여서 최대한 자본을 묶어두려고 ..)을
실시하게 됩니다.. 또한 수입을 자제하면서 최대한 금본위제도를 지키려 노력했습니다(@금유출 방어)
하지만, 이러한 강도 높은 긴축정책은 결국 생산위축과 실업을 양산하면서 실물경기를 더욱더
침체속으로 빠져들게 만들었습니다.

미국의 금리인상은, 1924년 도스안(Dawes Plan) 에 의해 미국자본을 도입해서 전쟁 배상금을 갚았던
독일에게도 상당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 1928년 하반기부터 미국자본의 유입이 조금씩
줄어들면서 독일의 국내투자 환경도 얼어붙기 시작했는데 ... 이러한 투자위축과 자금경색은 결국
독일경제에 불황을 몰고왔습니다. 또한 자본유입 감소로 국제수지가 악화되자 결국 독일정부도
긴축정책으로 대응하기 시작했고, 특히 1930년에서 1932년 사이에 당시 브뤼닝(Heinrich Brüning)
정권은 세금인상, 공무원임금 삭감, 복지축소 등의 (긴축)정책을 펼처서 독일경기를 더욱더
악화시켰던 것입니다 ... 그리고 독일의 경기악화는 실업과 함께 국민들의 생활수준을 비참하게
만들었는데, 이러한 상황속에서 주요한 정치세력이 탄생합니다. ~ 바로 나치(Nazi) 였습니다!

미국의 (통화)긴축은 해외 자본에 의존하고 있던 자본수입국들을 불황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그중에 특히, 저개발국가들은 더 이상 미국에서 자본을 얻기가 힘들어지자 ... 영국(런던)으로
몰려들었습니다. 하지만 영국도 미국에 기대고 있던 상황이라 ... 자본수지 악화에 대응하기 위해서
금리를 인상하게 됩니다. 그 결과 영국의 경기도 점점 불황으로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 전쟁 종료 후, 국제자본의 환류 순환>>

제1차 세계대전후 세계최고의 채권국이된 미국은 차관 및 대부형태 방식으로 세계에 많은 자본을
수출했습니다 ... 독일은 도스안(Dawes Plan)에 따라 미국의 자본이 유입되어 배상금을 지불할 수 있게 되었고,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게서 배상금을 받아 미국에게 전시채무를 상환합니다. 아르헨티나등의 중남미 국가들과
캐나다로 유입된 미국자본은 무역적자와 채무상환 형태로 다시 영국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 이러한
자본의 순환적 환류는 1920년대 내내 미국의 경기를 호황으로 만들었고, 이렇게 만들어진 과잉유동성은
조금씩 미국의 주식과 토지투기(@ 플로리다가 가장심했음)로 이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 그러나
1928년 여름부터 시작된 미국의 통화긴축(금리인상)은 미국자본에 의존했던 수많은 국가들 뿐만아니라,
결국 미국의 경기도 침체속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 미국 금리인상 이후 유럽국가들도 자국 통화가치 방어와
자본유출을 막기 위해서 금리를 인상함]

풍부해진 (과잉)유동성은 1920년대 미국의 경제를 호황으로 만들었습니다 ... 그리고
이러한 과잉 유동성은 1923년 ~ 1929년 동안에 부동산관련 (투기적)대출을 48% 증가시켰고,
1920년대 중반을 넘어서부터는 주식시장에 투기적 열풍이 불면서 조금씩 거품이 형성되어 갔습니다 ... 특히
주식시장의 거품(투기적 주가상승)은 미국의 투자자들에게 마치 당장 부자가 된 것같은 환상을 심어주면서 ...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대출을 받아 주식에 투자하게 만들었습니다. 주식이 열풍인것은 분명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만기가 2361년, 2862년 이었던 철도채권이 유통되기도 했습니다 (-_- ;;;)

1929년 당시 다우지수를 살펴보면
8월 30일에 지수는 380.33 입니다.[@ 9월 3일 => 381.17 (당시 최고신기록) ] ... 그리고
드디어 암흑의 10월! .. 10월24일 다우지수는 폭락을 기록했다가 장 막판에 299.47로 끝나 ... 간신히
지수만회를 했지만(@ 은행가들의 협의로 지수방어), 우선 ‘300 포인트’ 라는 경제호황의 상징적
의미가 무너졌다는 것이고, 이날(10월24일 목요일) 하루 동안에만 무려 1290만주가 팔리면서 종전의
400만주 기록을 처참하게 깨뜨렸다는 것입니다 ... 시카고와 버팔로 거래소는 오후 12시 40분에 문을 닫았고
문닫기 바로직전까지 11명의 투자자가 자살을 선택했습니다 ... 그리고 5일뒤인 10월 29일(화요일)
다우지수는 230.07 포인트로 장을 마감합니다 ... 이 수치는 전날(10월 28일)의 260.64 에 비해 30.57 포인트가 하락한 것인데,
이것은 하락률 기준으로 당시 다우지수 폭락 10대기록에 포함되는 수치인 것입니다. 더불어 이날(10월 29일) 하루 동안에
무려 1640만주가 팔렸습니다. ~~~ <대공황의 시작 !> 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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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중앙은행 시스템을 도입한 대부분의 국가에서 사용하는 유동지표에 대하여]


지나가는 아무 사람들에게 <화폐>가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아마도 예상되는 대답들은
저나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화폐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 “화폐는 돈이다.” 라며
단순하고 간단명료하게 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화폐는 은행통장에 들어있는 내 재산” 이라고
대답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경제학적 측면에서의 화폐의 의미는 돈(소득)이나 재산(富)
같은 넓은 의미보다는 조금은 좁게 정의됩니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화폐는 <교환의 매개, 거래의 지불수단>과 같은 <기능적 측면>이 더 많이
강조되는데 ... (1)교환의 매개, (2)가치의 저장 (3)가치 척도 ~ 이렇게 세 가지 측면이 대표적인
<화폐의 기능>입니다. 더불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일반적인 “돈”의 의미를 경제학에서는 주로
<통화(Currency)>라고 합니다.

[1] 교환의 매개
화폐가 없는 물물교환의 경제를 상상해보죠. ... A는 빵을 생산하고, B는 우유를 생산합니다.
어느 날 A는 우유의 필요가 생겼고, B는 빵의 필요가 생겼다면 이들이 서로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는 각각 자신들이 생산한 빵과 우유를 들고 약속된 장소에서 만나 교환을 해야 합니다.
A와 B가 오직 빵과 우유만 생산하는 경제공동체에서 살고 있다면 이들의 물물교환은 어렵지 않게
성사될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A와 B가 각각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줄 상대를 만나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입니다.(@많은 물리적 시간과 탐색 노동의 소요) ...이때 <화폐>라는 개념이
등장한다면 이제 사람들은 자신들이 생산한 상품(빵, 우유)을 일일이 들고 다닐 필요도 없을뿐더러
단순히 상품을 내주고 화폐를 받기만 하면 됩니다. 또한 상품을 판매한 사람도 판매 대가로 받은
화폐로 언제든 자신의 필요를 전보다 더 쉽게 충족시킬 수 있게 됩니다. 이제 사회 모든 구성원들은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켜줄 상대를 찾는데 쏟아야할 에너지의 상당부분을 모두 본인의 생산 활동에
투입함으로써 사회 전체적으로는 생산성이 크게 향상될 것입니다.

[2] 가치의 저장
예를 들어 ... 고등어나 갈치를 잡아 생활하는 어민들에게는 생선 자체가 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고 잡은 생선들을 당장 팔지 않고 보관하고 있다가 자신들의 생활비가 필요할 때마다 조금씩
내다 팔아 돈을 마련해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만약 어민 김철수씨가 최근 1천만 원 상당의 갈치를
잡았는데 이를 당장 시장에 내다팔지 않고 집에 보관하고 있다가 쌀값, 과일값, 교통비 같은 각종
생활자금이 필요할 때마다 갈치를 조금씩 내다팔아 돈을 마련해 사용한다면 팔지 않고 보관하고
있던 나머지 생선(갈치)들의 보관문제는 너무나 큰 골칫거리가 될 것입니다. 보관에 따른 비용도
문제지만, 날마다 갈치의 상태(신선도)도 살펴야하고 도난 같은 문제도 신경 써야 합니다. 하지만
잡은 갈치 모두를 최대한 빨리 현금화(판매) 한다면 이제 김철수씨는 갈치 보관에 따른 모든 고민을
잊어버리고 단지 아주 작은 금고만 마련하면 됩니다.(@ 판매 대금을 은행에 넣어두면 금고조차 필요
없게 됩니다.) ... 결론적으로 갈치를 모두 팔아서 돈(화폐)으로 보관하고 있다면 이제 김철수씨는
언제든지 본인이 원하는 욕구(쌀, 과일, 택시비 등)를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바로바로 충족시킬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화폐는 구매력(김철수의 욕구 – 쌀, 과일, 교통비)을 장기간, 또 탁월하게
보관(저장)할 수 있는 <가치저장>측면에서는 상당히 우월한 기능을 보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3] 가치척도
화폐는 <단위>가 존재합니다. 따라서 세상의 수많은 상품들의 객관적 비교(측정)가 가능해지는데
만약 화폐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라면, 사람들은 서둘러 다른 척도(기준)를 찾아야합니다. 만약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척도)이 <갈치>로 정해진다면 ... 이제 세상의 모든 상품과 서비스의 가치는
갈치로만 비교해야 할 것입니다. (사과 5개는 갈치 1마리), (쌀 20kg은 갈치 4마리), (택시기본요금은
갈치 2마리) ... 그런데 이때 어떤 사람이 나타나 갈치는 크기와 신선도에 따라 가치가 모두 제각각
이므로 기준이 될 수 없다면서 <닭>을 새로운 기준(척도)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자
또 다른 이는 닭보다 조용하고 오래 사는 <거북이>를 기준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 이렇게
화폐가 아닌 다른 상품을 그 사회의 척도로 삼는다면 불편을 떠나 ‘혼란’ 그 자체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화폐의 기능적 측면에 대해서는 굳이 공부를 하지 않아도 우리 모두는 이미 실제 현실의
삶에서 (화폐의 기능을)직관적으로 이해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화폐>를 언제,
그리고 왜 보유(수요)하려고 하는 걸까? ... 그래서 경제학에서 말하는 <화폐 수요의 동기>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려고 하는데 ... 한마디로 사람들이 돈을 은행예금이나 주식 및 채권 같은 금융상품,
또는 부동산 같은 실물 자산에 투자하지 않고, 그냥 <현금> 상태 그대로 보유하려는 욕구가 있는데
왜 그런지, 또 어떤 상황에 놓였을 때 그런 욕구(화폐 수요)가 발생하는지를 살펴보겠다는 것입니다.

본인이 근로자라면 회사로부터 정기적(월급)으로 노동의 대한 대가를 주로 본인 통장을 통해
지급받습니다. 본인이 자영업자라면 매출에 대한 영업이익이 발생합니다. 파트타임이나 일용직
노동자라도 어쨌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노동에 대한 대가를 돈(현금)으로 지급받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렇게 노동에 대한 대가로 얻은 <돈(현금)> 이라는 보상액 전부를 모두 자신의
지갑이나 금고에 그대로 넣어 두지는 않습니다. ... 왜냐하면 <현금>은 그 자체로서 아무런 수익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보통은 이자가 아무리 적더라도 은행의 수시입출금 통장이나
예.적금 통장에 돈(월급)을 넣어둡니다. ... 물론 재테크 감각이 앞선 사람들은 주식이나 채권,
펀드 같은 투자형 상품이나 심지어 대출을 받아 부동산에 투자하기도 합니다.

결국 사람들이 합리적이라면 본인 수중에 들어온 돈을 그냥 <현금>이라는 형태 그대로 보유하려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현실에서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화폐(현금)>를 그냥 보유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이 발생합니다.

예를 들어, 100만원의 월급을 받은 김철수는 지금까지 받은 월급 전액을 모두 주식이나 채권에
투자했습니다. 그래서 현재 김철수의 현금보유는 ‘0’원인 상황입니다. ... 따라서 만약 김철수가
지금 당장 편의점에서 담배를 사거나 커피를 마시고 싶다면 현재 보유한 주식이나 채권 일부를
팔아서 현금화해야 합니다. ~ 너무 불편하겠죠.

이렇게 일상에서의 평범한 소비 생활을 하려면 최소한의 <현금>은 가지고 다녀야 합니다.
물론 요즘엔 소액이라도 카드사용이 보편화되었기 때문에 우리사회가 점점 현금이 필요하지 않은
사회로 이동 중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아직까진 일상생활에서 <화폐(현금)>에
대한 수요(보유)는 여전히 필요하다 할 수 있습니다. ... 결론적으로 사람들이 아무 수익도 발생하지
않는 화폐(현금)를 일부라도 보유하려고 하는 이유는 일상생활을 하는데 큰 불편을 겪지 않기 위한
평범한 <거래욕구> 때문입니다. ... 담배를 사거나, 약국에서 물파스를 사거나, 퇴근길에 지하철역
앞에서 군고구마 한 봉지라도 사가지고 집으로 들어가려면 우리는 소액이라도 분명 현금의 필요를
느낄 것입니다. 그래서 경제학에서는 이러한 이유로 <화폐(현금)>를 보유하려는 사람들의 욕구를
<화폐 수요의 거래적 동기> 라고 합니다.

또한 당연하겠지만, 우리는 고소득자일수록 <화폐 수요>가 클 것이라 예상할 수 있습니다.
한 달에 1천만 원을 버는 의사와 시급 7,000원을 받고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대학생의
화폐수요는 상당한 차이가 날것입니다. 편의점에서 일하는 대학생의 지갑에는 현금이 많아 봐야
10만원을 넘지 않을 것이며, 의사는 최소 수십만 원에서 많게는 백만 원 단위로 대학생 보다는
현금을 좀 더 많이 가지고 다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물가수준이 높아질 때도 <화폐 수요>는 커지게 될 것이라는 예상을 할 수 있습니다.
담배 값이 오르고, 점심때마다 회사 인근에서 자주 사먹던 곰탕가격도 어느 날 8천원에서 9천원으로
1천원 올랐다면 ... 우리는 평소보다 현금을 조금은 더 여유롭게 챙겨서 가지고 다녀야 할 것입니다.
<화폐 수요(보유)>가 늘어나는 것입니다. 다만 물가가 단기간에 급격히 상승하는 경우에는 오히려
화폐 보유는 부정적 효과를 가져 옵니다. 따라서 이런 경우에는 <화폐 수요>가 줄어듭니다.
[@ 화폐 수요 감소는 소비가 줄어드는 게 아니라 ‘현금 보유’에 대한 동기가 작아진다는 뜻임.]

반복되는 일상의 평범한 거래 말고도 우리는 살면서 갑작스럽게 <현금>이 필요할 때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일종의 <비상금> 개념일수도 있는데 ... 병원비라든지, 경미한 (교통)사고 합의금, 친한 친구
에게 급하게 돈을 빌려 줘야할 때처럼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발생하여 돈(현금)이 필요한 경우는
살다보면 흔히 있는 일입니다. ... 그래서 이러한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사람들이 <화폐(현금)>를
보유하려는 욕구를 <화폐 수요의 예비적 동기>라고 합니다.

이미 앞에서 언급했었지만 <현금>은 그 자체로서 아무런 수익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쉽게 말해 현금은 이자율이 ‘0%’ 라는 뜻입니다. ... 사람들이 주식이나 채권을 보유(투자)하려는
이유는 현금을 그냥 그대로 책상 서랍에 넣어두는 것보다는 그래도 주식과 채권투자에서 최소한의
<기대수익률>이 예상되기 때문입니다. 다만 주식과 채권은 ‘가격변동’이라는 위험이 상존하기 때문에
자칫하면 <기대수익률>이 음(-)의 값으로 전환될 수도 있습니다. ... 따라서 비록 주식과 채권에서
높은 수익이 기대된다고 해도 <투자 위험>이라는 불안요인 때문에 위험이 없는 현금을 더 선호하는
사람들이 존재 합니다. 여기에 향후 경제에 대한 부정적 전망까지 더해지면 사람들은 지금 투자하면
손해가 커질 것이 분명하므로 이럴 바엔 차라리 <“때를 기다리는 게 더 낫겠다!”> 라며 현금보유를
선택하는 비중이 높아집니다. ... 이처럼 <자산축적> 이라는 관점에서 유불리를 따져 <화폐(현금)>를
보유하려는 사람들의 욕구를 <화폐 수요의 투기적 동기>라고 합니다.

[@ 참고] - 월급을 현금 뭉치 형태로 받아 그대로 서랍에 넣어두기만 해도 돈(현금)은 쌓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런 단순한 사고를 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겁니다.
연이율 3% 짜리 예금상품에 100만원을 예금하고 1년 뒤에 상품 만기가 되면 원금 100만원과 함께
1만원권 3장을 추가로 더 받을 수 있습니다. 자산이 축적(증가)되는 것입니다. 물론 아주 낮은 확률로
은행이 망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망할 위험이 아예 존재하지도 않고, 수익률이 음(-)의 값이
될 가능성도 없는, 즉 위험이 제로(zero)면서 <현금>상태보다 더 높은 이자를 얻을 수 있는 상품이
존재할 수 있을까? ~ 바로 <국채(government bond)> 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현금보다 더 많은
이자를 기대할 수 있고, 채무 불이행 위험도 아예 존재하지 않는 <국채>라는 자산 축적의 대상이
분명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화폐(현금)>를 거래 동기나 예비적 동기 이외에
<자산축적(투기적 동기)>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보유하려고 합니다. ~ 참 이상하죠? ~ 국가가 망하지
않는 이상 돈 떼일 염려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데, 더구나 이자수익 까지 기대할 수 있는데,
그래서 <“때를 기다리는 게 더 낫겠다!”>라며 다음을 기약할 필요도 없는데 ...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채>에 투자하지 않고 현금에 투자(?) 하려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상품을 구입하거나
비상금처럼 <거래 목적이나 예비적 동기> 때문에 현금을 보유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산축적의
관점, 즉 <현금>을 하나의 투자, 혹은 투기적 상품으로 인식하고 이자 수익이 전혀 발생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현금을 보유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계에서도 이러한 <화폐 수요의 투기적 동기>에
대해서 많은 분석을 하고는 있지만 이직은 명쾌한 해답을 내놓지는 못하고 있는것 같습니다.
[@ ‘화폐수요의 투기적 동기’ 라는 게 진짜 존재하느냐고 의문을 품는 연구자들 있습니다. ]

경제학적 측면에서 이제 우리는 사람들이 화폐, 즉 <현금>을 왜 보유(수요)하려고 하는지
나름의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화폐 수요)를 알아서 도대체 어디에 써먹을까?
더불어 고작 이정도 수준의 <화폐수요 이야기>만을 가지고 유용하게 사용할 때나 있을까? ...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화폐수요 이야기의 <유용성>을 위해서는 직관적 이해를 넘어
좀 더 이론적이고 논리적인 접근이 필요합니다. ~ 바로 화폐의 수량, 즉 이제는 <통화량>을 이해할 차례입니다.

통화량은 현금통화와 예금통화의 합입니다.[@ 통화량 = (현금통화 + 예금통화) ]
좀 더 쉽게, 단순하게 정의하면 다음의 (1)과 (2)의 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지금 당장 만질 수 있는 지갑속의 현금(현금통화)
(2) 지금 당장 만질 수는 없지만 언제든지 현금화 할 수 있는 금융자산(예금통화)

앞서 화폐의 정의, 특히 화폐의 기능적 측면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았는데, 보통 정부와 언론에서
<돈(화폐)>에 대한 이야기 할 때는 기능적 차원의 “돈”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통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입니다. <통화>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 ‘돈(현금)’의 범주를 훨씬 더 넘어서는
개념인데 ... 자판기에서 사용하는 동전(주화)과 지갑에 넣고 다니는 지폐(1천원, 1만원, 5만원 등)를
포함하여 은행에 넣어둔 예.적금 및 주식과 채권, 보험 같은 여러 금융자산 또한 통화의 범주에
포함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 더불어 금융상품을 얼마나 쉽게(빠르게) <현금화> 할 수 있느냐를
따져서 보통 <유동성이 높다(좋다), 낮다(나쁘다)> 라고 합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에서는 이러한 통화의 범주를 세분화 하여 구별해 놓았는데
공식적으로는 <통화 및 유동성 지표>라고 부르며, 분류된 각각의 통화 지표 항목의 규모(수치)를
세심하게 취합해 통계를 내고 월, 분기, 연간 등 정기적으로 공표하고 있습니다.

<<통화 및 유동성 지표별 구성내역>>

[1] M1(협의 통화) = [현금, 요구불예금, 수시입출식예금]
[2] M2(광의 통화) = [(M1) + (정기예금, 시장형금융상품, 실적배당형금융상품, 기타 예금 및 금융채)]
[3] Lf(금융기관 유동성) = [(M2) + (2년 이상 장기금융상품, 생명보험계약준비금, 증권금융예수금)]
[4] L(광의 유동성) = [(Lf) + (기타 금융기관상품, 국채, 지방채, 회사채, 기업어음(CP))

<2016년 한국은행 통계, 통화지표별 규모(@ 평잔 기준, 광의 유동성 L은 말잔 기준)>

[1] M1(협의 통화) = ( 734 조 원 )
[2] M2(광의 통화) = ( 2,342 조 원 )
[3] Lf(금융기관 유동성) = ( 3,229 조 원 )
[4] L(광의 유동성) = ( 4,253 조 원 )

현재 한국은행에서 사용하는 통화 및 유동성 지표의 구성내역과 최근(2016년)의 (유동성)규모입니다.
더불어 이러한 지표별 구분의 핵심은 앞서 얘기한 <현금 유동성>입니다. 한마디로 각각의 상품들을
얼마나 빨리 <현금화>할 수 있느냐에 따라서 지표를 분류해 놓았다는 뜻입니다.

중앙은행이 이렇게 현금화 할 수 있는 정도(현금유동성)에 따라 지표를 분류해 놓은 이유는
오늘날 현대 국가의 경제규모를 감안했을 때 한 가지 통화지표만으로는 그 돈의 양과 흐름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너무나 어려워졌기 때문입니다.

[1] M1(협의통화)의 구성 내역을 보면, 현금을 포함해 요구불예금과 수시입출식예금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현금은 “현금” 그 자체이므로 더 이상 언급이 불필요하고, 요구불예금과 수시입출식 예금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이자가 거의 안 붙는 은행계좌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수시로) 돈(현금)을 넣었다. 뺐다 할 수 있기 때문에 이자는 거의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따라서 M1(협의통화)은 <현금 유동성>이 가장 우수한 항목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M2), (Lf), (L) 순으로 현금화 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즉 유동성이 떨어지는 항목들이 추가되어
구성됩니다. 결론적으로 M1(협의통화)에 포함되는 요구불예금, 수시입출식예금 등은 정기 예.적금처럼
일정기간 은행에 돈(현금)이 묶여있어야 하는 구속력 있는 상품들이 아니기 때문에 <현금>과 가장
가까운 친구들(현금의 성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M1)은 왜 <현금 및 현금에 가까운 상태>에 있으려고 하는가? ~ 바로 거래(소비)가
발생하면 그 즉시 <결제>에 사용하려는 목적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M1(협의통화)의
규모를 통해서 우리는 현재 시장의 거래(결제)욕구가 어느 정도 수준인가를 나름대로 파악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 M1은 시장의 단기 유동성 수준을 파악하는데 적합한 지표]

[참고] - 2015년의 소비자물가 총 지수를 100으로 했을 때, IMF 외환위기가 닥쳤던 1997년의 지수는
대략 60수준이었습니다. [@ 총 지수(전국기준)에는 식음료, 의류, 보건, 주택, 교육, 통신, 교통, 전기
오락문화, 숙박, 가사서비스 등 거의 모든 항목들이 포함됩니다. ~ ~ ~ 2,000년(66), 2,003년(73),
2,005년(78), 2,010년(91), 2,013년(98) - 한국은행 상세통계 참고]

소비자물가를 개별항목이 아닌 총 지수를 기준(전국)으로 했을 때, 1997년부터 2015년까지 18년
동안의 우리나라 (소비자)물가는 대략 연평균 2.8785% 수준으로 완만한 상승세를 보여주었습니다.
같은 기간 우리나라 M1(협의통화 평잔) 규모는 1997년 118조원에서 2016년 734조원 수준으로
대략 연평균 10.1%씩 증가했는데 ... 이것은 결국 우리나라의 M1(협의통화) 규모가 물가상승률을
감안하더라도 해마다 평균적으로 대략 7%씩 증가했다는 뜻입니다.[@ 실질 M1 증가율 7%]
종합해보면 1997년~2016년까지 우리나라의 (실질)단기 유동성은 해마다 7%씩 꾸준히 증가해 왔는데
이것은 곧 한국의 실질적 소비(내수) 규모가 해마다 7%씩 커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 더불어
지난해 국회예산정책처 발표를 보면 한국의 내수시장 규모는 현재 GDP의 55%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 2016년 한국 GDP 규모가 약 1조4천억 달러($) 였으므로, 우리의 내수시장(2016년) 규모는
대략 800조원을 조금 넘는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수치는 2016년 M1(협의통화) 규모
734조원과 2016년 ‘가계최종소비지출(한국은행통계)’ 규모 760조원과 비교했을 때에도 크게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 따라서 우리는 M1(협의통화) 크기가 어떻게 변화(증감)하는지만 유심히 살펴보아도
현재의 내수(소비) 분위기를 어느 정도는 파악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물론 이렇게 우리의
내수규모와 M1(협의통화)이 커질 수 있었던 이유는 당연히 국민들의 소득이 증가했기 때문입니다.
한국은행 통계를 참고해보면 ... 우리의 1인당 국민총소득(명목)은 1997년 (1,147만원)에서 2016년에
(3,198만원)으로 증가했는데, 이 수치는 결국 국민들의 소득이 해마다 평균 5.54%씩 증가했다는 걸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국민들의 소득은 연평균
5.54%씩 증가하는데 M1증가율은 7% 수준을 약간 상회하고 있다는 것은 시중에 돌아다니고 있는
결제성 돈의 규모(단기 유동성)가 버는 돈을 초과하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 그리고 그 초과분은
결국 부채(Debt)의 증가와 연계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2] M2(광의통화)는 명칭 그대로 ‘협의통화(M1)’보다 더 넓은 의미의 통화지표입니다.
M2(광의통화)에는 협의통화(M1) 항목을 모두 포함하며, 여기에 정기 예.적금처럼 일정기간
은행에 돈(현금)이 묶여있어야만 하는 상품들과 CD(양도성예금증서), RP(환매조건부채권) 같은
시장형 금융상품 및 수익증권 같은 실적 배당형 상품들이 추가되어 구성됩니다. 다만 2년 이상의
장기 금융상품들은 제외되는데, 여기서 추가되는 상품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계약해지>라는 절차를
거쳐야만 <현금화>할 수 있는, 즉 돈(현금)을 찾는데 약간의 제약이 따르기 때문에 추가된 상품들
상당수는 소비거래(결제성) 목적보다는 <자산증식(저축)> 목적이 좀 더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가 구성된 상품들 대부분이 2년을 넘지 않기 때문에 이들 (추가된)상품들의
또 다른 특징은 약간의 이자욕구(이자소득)를 포기하면 비록 계약해지라는 번거로운 절차가 있더라도
<현금화>하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따라서 ‘광의통화(M2)’는
<소비거래욕구와 자산증식욕구>가 혼합된 지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Lf(금융기관유동성)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증권사와 생명보험회사 상품(농협 및 우체국 포함)을
포함하며. 추가 구성된 상품들 대부분이 2년 이상 장기금융 상품입니다. 특히 ‘증권금융예수금’은
증권사 및 선물회사가 예치한 예탁금이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 투자자는 보통 주식을 사고팔 때
은행 계좌처럼 증권사에 본인만의 계좌를 만들어 매매를 합니다. 또한 주식을 사고팔고 하다보면
계좌에 잔액이 남게 되는데, 이 잔액이 바로 <고객예탁금>입니다. 그리고 법(증권 및 선물 거래법)에
의해 증권사(선물회사)는 고객예탁금을 <한국증권금융>에 전액 예치해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결국 <고객예탁금>은 주식(선물)에 투자되지 않고 <잔액(현금)> 형태로 남아있는 금액이기 때문에
고객이 원하면 언제든지 <현금화(유동화)> 하여 돌려줘야하는 돈입니다. ‘생명보험계약준비금’ 또한
계약자가 요구하면 보험사가 돌려줘야할 의무가 있는 고객의 돈입니다. 이렇듯 Lf(금융기관유동성)에
추가 구성되는 상품들은 M1(협의통화)은 물론, M2(광의통화)에 비해서도 <현금화(유동화)>하는데
제약(시간)이 많이 따르는 상품들이 추가되어 구성됩니다.

[4] L(광의 유동성)은 지금까지 얘기한 통화지표를 모두 포함하면서 여기에 정부나 기업이 발행하는
채권과 어음 등이 추가되어 구성됩니다. ... 앞서 살펴본 (M1), (M2), (Lf) 등은 유동성을 구분하는
범위가 조금씩 차이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이들 지표는 <금융기관상품>이라는 공통된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L(광의 유동성)’은 정부와 지자체 및 기업의 채무증서(채권) 까지도
하나의 통화(유동성) 종류로 인정 하겠다는 것입니다.

[참고1] - 정부가 대규모 신도시를 개발하는 경우에는 보통은 ‘토지보상금’이 짧은 시간에 상당한
규모로 지급되게 됩니다. 때문에 이러한 대규모 ‘토지보상금’이 <어떠한 방식(형태)>으로 지급되느냐에
따라서 통화지표에 미치는 영향 또한 다르게 나타나는데, ~ 만약 토지보상금을 정부가 <현금>으로
지급한다면 보편적으로 정부는 시중(민간)에 없던, 즉 중앙정부가 중앙은행(한국은행)에 맡겨놓았던
소위 <정부예금>을 민간영역에 처음으로 내놓는 것이기 때문에 M1(협의통화)부터 ~ L(광의유동성)
까지 모두 증가하게 됩니다. ... 하지만 정부가 <국채(토지보상채권)> 또는 <공사채(토지개발채권)>
형태로 토지보상금을 지급한다면 이때에는 오직 <L(광의유동성)>만 증가하게 됩니다. ... 결론적으로
우리는 지금까지 살펴본 M1(협의 통화), M2(광의 통화), Lf(금융기관 유동성), L(광의 유동성) 이라는
여러 통화지표의 변화(증감)를 통해서 시중에 돈이 어떠한 형태로 변신하여 돌아다니는지 나름대로
추적을 해볼 수 있는 것입니다.

[참고2] - 정부도 일을 하면서 돈을 법니다. 물론 버는 돈의 상당부분은 바로 국민들로부터 걷어
들인 “세금”입니다. 여기에 각종 벌과금(ex. 교통범칙금), 수수료, 국립(박물관,공원,극장 ... ) 입장료
등으로도 정부는 돈을 법니다. 그리고 정부 소유의 건물과 토지 등을 팔아서 돈을 벌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벌어들인 정부의 수입은 한국은행법 제71조에(국고금 예수기관) 의거해 한국은행이
정부의 수입을 도맡아서 관리하게 되는데(@국고관리) ... 이때 한국은행에 맡겨진 정부의 돈을
<정부예금> 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정부의 재정정책 변화는 1차적으로 <정부예금>의 증감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한마디로 정부가 경기부양을 위해 ‘확장정책(재정지출 확대)’을 펼치게 되면
<정부예금>이 감소하면서 시중에 통화가 공급된다는 것입니다. 반면 경기과열을 우려해 정부가
재정지출을 축소하거나(긴축정책) 복지재원 마련을 위해 ‘증세’를 하게 된다면 이때는 시중의 돈이
정부에게로 흡수되면서 <정부예금>이 증가하고 시중 통화는 줄어들게 됩니다. ~ 이 메커니즘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정부가 국채를 발행하고 중앙은행(한국은행)이 국채를 인수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통화의 공급측면만 간략히 살펴봅니다.] ... 우선 정부가 100억 원의 국채를 발행하면
한국은행이 국채를 인수(보유)하면서 동시에 정부에게 100억 원의 돈(현금)을 지급합니다. 물론 이 돈은
앞서 언급한 한국은행법 제71조(국고금 예수기관)에 따라 한국은행에 마련된 <정부예금> 당좌계좌에
입금되고 정부는 언제든지 이 돈을 가져다 쓸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통화 공급> 경로에 그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또한 한국은행의 대차대조표에도 특별한 변화가 생기지 않는데, 한국은행이
정부국채 100억 원을 인수하면 차변의 자산항목인 국채 100억 원이 증가하지만, 동시에 부채 항목인
<정부예금> 또한 100억 원 증가하게 되므로, 이 둘은 서로 상쇄되어 아직까지는 시중(민간)에 통화가
공급되지 않습니다. ... 그리고 이후 정부가 <정부예금>을 꺼내다 쓰게 되면, 즉 본격적으로 정부의
재정지출이 시작되면 <정부예금>이 감소하면서 이때부터 시중에 통화가 공급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이러한 통화 공급은 본원통화 증가와 함께 개인 및 기업의 예금증가로 이어져 M1(협의통화)과
M2(광의통화)의 증가로 연계됩니다. [@고객이 시중은행에 돈을 예금하면 은행입장에서는 고객의 돈이
부채입니다. 은행이 고객에게 돈을 빌린 것이죠 ... 마찬가지로 <정부예금>또한 한국은행 입장에서는
부채입니다. 정부가 “내 돈 내놔!” 하면 언제든지 돈을 내줘야하기 때문입니다. ]
[@ 재정수지 적자 –> 정부예금 감소 –> 시중에 통화가 공급됨.]
[@ 재정수지 흑자 –> 정부예금 증가 –> 시중의 통화를 흡수함.]

지금까지 한국은행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통화 및 유동성 지표>의 종류와 또 각각의
지표 속에 어떤 의미가 숨어있었는지를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습니다. ... 그런데 여기서 곰곰이 한번
생각해보면 우리는 왜 이렇게까지 복잡하게 통화지표를 여러 갈래로 구분하고, 또 상품별 종류와
규모까지 따져보아야 할까요? ~ 그래서 의문을 품고 우리에게 이런 수고를 하게 만든 그 최초의
원인제공자를 찾다보면 그 뿌리는 바로 다름 아닌 <현금!, 현금!, 현금!> 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 현금에 대한 나머지 이야기도 하고 싶으나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기 때문에
여기서 이만 글을 마칩니다! ~ 그리고 지난번에 한번 언급했던
사회주의, 68혁명, 페미니즘 등에 관한 이야기는 내용이 워낙 많아서
지금도 시간내서 계속 정리하고 매끄럽게 다듬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글이 완성 되면 3편 정도로 나눠서 올려볼 예정입니다. ~ 긴 글이라 불편드려 죄송합니다. ]

부동산과 경제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