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26일 화요일

◆ 또 하나의 냉전, 한.미.일 관계와 그 이상의 경계에서 - (5) 국제 정치편 [by. 물파스]


(@ 한일 간 군사정보보호협정을 뜻하는 '지소미아(GSOMIA)' 종료시한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입니다. ~ 한국과 미국은 방위비 분담금 협상에서 치밀한 수싸움을
계속 진행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한국과 미국은 각각 총선과 대선이라는 본격적인 선거모드에
돌입한 상황입니다. ~ 북미간 비핵화 협상 또한 지지부진한 상황입니다.

미국이 왜 그렇게 지소미아 파기에 대해 우려하는지,
미국이 왜 그렇게 황당한 수치의 방위비 분담금을 요구하는지 ... 이에 대한 근본적 이유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 분량이 너무 많아 이야기는 5편으로 나눠서 게시물이 새로
업데이트 될 때마다 한 편씩 올려볼 생각입니다. ~ 아래는 도움 받은 자료와 각 편마다 들어있는
중심내용을 소개한 것입니다.)

<@ 도움 받은 자료들 >

(국제분쟁의 이해/ 조지프 나이/ 한울 출판)
(거대한 체스판/ Z.브레진스키/ 삼인 출판)
(포스트콜로니얼/ 고모리 요이치/ 삼인 출판)
(일본 전후 정치사/ 이시카와 마스미/ 후마니타스 출판)
(결정의 본질/ 그레이엄 앨리슨, 필립 젤리코/ 모던아카이브 출판)
(인간.국가.전쟁/ 케네스 왈츠/ 아카넷 출판)
(냉전의 역사/ 존 루이스 개디스/ 에코리브르 출판)
(미국의 아시아 회귀 전략/ 이용인, 테일러 워시번/ 창비)
(전환시대의 논리/ 리영희/ 창비)
~ 그 외 한국은행, KDI, 국회 등

(1) 경제편 - 일본의 경쟁력과 위기
(2) 국제정치 - 패전국 일본에 대한 GHQ 점령초기 상황
(3) 국제정치 - GHQ 점령기의 일본 신헌법 제정과정과 자민당 탄생과정
(4) 국제정치 - 일본의 대미추종과 자주파 그리고 신(新)미.일안보조약
(5) 국제정치 - 미국의 세계대전략(Grand Strategy)의 변화 과정과 동맹(alliance)의 의미
~~~~~~~~~

1편: 지난 게시물중 <반일 불매운동 근황>이라는 게시물에 올려져 있습니다.
2편: 지난 게시물중 <1991년, 인터넷의 발명과 인터넷 브라우저 전쟁>이라는 게시물에 올려져 있습니다.
3편: 지난 게시물중 <국민이 묻는다 참가자들>이라는 게시물에 올려져 있습니다.
4편: 지난 게시물중 <남편 용돈 최신 트렌드>라는 게시물에 올려져 있습니다.

=============


[◆ 또 하나의 냉전, 한.미.일 관계와 그 이상의 경계에서 - (5) 국제 정치편
- 미국의 세계대전략(Grand Strategy)의 변화 과정과 동맹(alliance)의 의미

국가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국가들이 모인 공간이 바로 국제 정치의 세계이며, 국가들은
개인(국민)의 이성이 아닌 국가이성(Reason of State), 즉 <레종 데타(raison d’État)>의 지시를 받고
행동합니다. ... 따라서 국가 간의 동맹은 <레종데타와 레종데타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지금부터는 레종데타들의 결합이라 할 수 있는 <동맹(alliance)>, 특히 한.미.일 동맹관계와
미국의 세계전략 변화(특히 동아시아 전략변화) 과정에 대한 내용을 중점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전후(해방 후), 한.미.일 관계의 거의 대부분은 <미국의 세계전략(동아시아 전략)>이라는 큰 틀
안에서만 움직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 그중 한.일 관계의 공식적 시작점은 박정희
정권부터라고 할 수 있는데, 이때에 형성된 한.일 관계가 냉전체제하에서의 한.일 관계의 기본적
성격을 규정하게 됩니다.

계속 언급했었지만, 전후 일본은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에 의해 <공산주의 확산을 막는 방파제>
역할을 해야만 했습니다. ~ 그렇다면 왜 일본이었을까? ~ 패전 후, 일본이 아무리 굴욕적인 미국의
점령정책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일본은 1853년 미국의 해군 제독 페리의 통상압력에 의한 ‘개국’
선택부터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항복 선언까지 대략 백년 가까운 시간동안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과
경쟁하면서 이미 상당한 수준의 국가경쟁력을 쌓아놓고 있었습니다. ... 이를테면 국민들의 높은
교육수준과 산업기술력, 관료조직 체계, 기업들의 기획.관리 및 연구개발 능력 등을 감안했을 때
당시 아시아에서 일본을 대체할만한 마땅한 국가가 없었다고 해도 될 것입니다. ... 이 때문에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에서 한일 관계는 지금까지 미일 관계의 하부 시스템, 또는 부속 체계로서만
작동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따라서 <한일 관계>는 <미일 관계>라는 상위의 틀 안에서만
움직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1961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경제발전에 모든 역량을 집중합니다. ... 천연자원은 물론
산업기술력과 도로, 항만, 전기, 통신, 철도 같은 산업인프라 그 어떤 것도 준비되지 않았던 당시의
한국 현실을 감안한다면 박정희 정권이 경제발전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던 건 너무나 당연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때문에 외부의 자본유입 없이 자력으로 경제가 발전하기에는 한계가 있었으며,
이런 상황에서 박정희 정권이 생각했던 건, 바로 일본의 경제협력 이었습니다. ~ 여기엔 박정희의
친일성향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 “장면과 박정희는 식민지시대 일본인들 통치하에 생활했다.
장면은 가톨릭계 중등학교 교장이었으며, 박정희는 만주, 일본 사관학교 졸업 후 일본장교를 지냈다.
두 사람 모두 식민지 정권에서 출세했고, 일본어와 일본인들의 사고방식을 알았으며, 많은 일본인
친구들을 사귀었다. 이승만에 있어서 일본은 적이었으나, 이 젊은 두 지도자들에게 일본은 하나의
본보기였다.“ - (한국과 일본: 정치적 관계의 조명. 1985. 이정식) ]

냉전체제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미국은, 한국과 일본의 관계개선이 없다면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보유지가 매우 어렵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미국은 일본에게 일종의 동맹국으로서의 ‘책임분담’을
요구하게 되었고, 한일 관계는 이렇게 미국이 만든 <큰 틀(미국의 동아시아 전략)> 안에서 규정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 미국의 동맹국으로서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보의 책임을 일정부분 나눠가진
일본은 한국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가장 먼저 <경제협력>에 힘을 쏟습니다. 여기에 때마침 일본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박정희 정권은 <한일 국교정상화>를 서둘렀고, 한일 교섭은 ‘경제협력’을
중심으로 빠르게 진행됐습니다. ~ 대신 과거사(식민지 지배청산) 문제와 영토분쟁(독도) 같은 한일
간의 핵심적 쟁점 사항들은 미국의 큰 틀과 일본의 경제협력에 가려져 외롭게 방치되어버립니다.
이렇게 박정희 정권 당시의 한일 관계는 미국의 전략적(동아시아 전략) 이해가 상당부분 반영되어
유지됩니다. (@ 물론 이후의 한일 관계도 미국의 큰 틀 안에서 작동되었습니다.)

이어서 1969년 11월 미국의 닉슨 대통령과 일본의 ‘사토 에이사쿠(자주파, 요시다 계열)’ 총리는
공동성명에서 <한국조항>을 추가했는데 그것은 <“한국의 안전이 곧 일본의 안전과 직결 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 이는 만약 한국이 적(敵.소련.북한,중국 등의 공산권)으로부터 공격을 받는다면
일본은 그것을,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 전역의 평화와 안전을 위협하는 행위로 간주하고, 미국은
이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일본 내 미군기지(주일미군)와 그 설비들을 즉각적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일본이 최대한 협조한다는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 이후 1975년 미국의 베트남전 종료, 같은 해
4월 김일성 북경방문과 전쟁 도발적 발언, 카터의 미 지상군 철수선언, 비무장지대(DMZ) 북한 땅굴
발견 등의 일련의 사건과 사태들은 한국과 일본이 <지역안보>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하여 서로간의
협력과 이해를 증진시킬 수밖에 없는 당위적 계기를 만들어주었습니다. ... 냉전시대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이러한 배경 속에서 협력과 갈등을 반복하며 이어져 오다가 1990년대 초 공산진영의 붕괴,
즉 <탈냉전> 시대를 맞이하게 됩니다. ~ 이에 따라 미국에게는 탈냉전 시대에 맞는 새로운
세계전략이 요구되었고, 한국과 일본 또한 관계의 재설정을 필요로 하는 시대로 접어들게 된
것입니다.

1991년 소련의 붕괴로 냉전시대가 종식되었고(탈냉전), 세계는 ‘미국과 소련’의 <양극체제>에서
미국 중심의 <단극(일극)체제>로 힘의 전이가 일어납니다. ~ 이는 미국에게 수많은 동맹국들과의
동맹관계를 새롭게 조정해야할 필요성을 안겨주었습니다. 물론 여기엔 한국도 포함됩니다. 그리고
2009년 <한.미 동맹을 위한 공동비전>에서 한국과 미국의 동맹관계는 북한 위협을 억지하는 단순한
군사동맹에서 ‘한반도를 넘어서 지역안정과 글로벌 위협에 대처‘하는 소위 <포괄적 전략동맹>으로
한.미 동맹을 새롭게, 그리고 발전적으로 재규정합니다. [@ ‘포괄적 전략동맹’은 한.미 관계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 미국과 일본(고이즈미 정권)은 우리보다 빠른 2005년 10월 29일
<미.일 동맹 – 미래를 위한 변혁과 재편>이라는 공동문서에 서명을 했는데 ... 이는 과거(1960년)
기시정권 때 체결했던 <신(新)미일안보조약>에 새로운 전략이 추가된 것이었습니다.(확장판) ~
이전까지만 해도 미.일 안보조약에 포함된 지역은 일본과 극동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확장판에서는
“미.일 동맹 관계는 글로벌 과제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고 협력한다.”로 수정됩니다. 이는 미.일 간의
군사협력의 범위가 극동에서 전 세계로 확대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냉전 시절 한국의 안보를 보장하기 위한 절대적 조건은 바로 <한.미 동맹>이었습니다. 그런데
탈냉전시대를 맞이한 오늘날의 국제정치질서는 미국을 정점에 두는 <단극체제>가 지속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 이것은 냉전시대 형성된 동맹관계의 성격변화가 불가피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한국을 예로 들면, 한국이 미국과 동맹관계를 유지함으로써 발생하는 ‘연루의 위험과 방기의 공포’,
‘자율성 제한’, ‘비용분담증가’ 같은 소위 <동맹 비용>과 미국이 제공하는 <안보 이득>의 비교가
냉전시대 때와 탈냉전 시대인 지금의 시점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 한국입장에서 ‘연루의 위험과 방기의 공포’는 일종의 딜레마입니다. ~ 연루의 대표적 사례는
한국군의 해외파병과 사드배치 문제입니다. 국내적으로 찬반대립이 심해 국민들의 갈등을 유발하는
요인이 미국과의 동맹관계로부터 나온다는 것입니다. ~ “한국과 미국은 동맹 관계이므로 한국은
미국이 계획하는 일에 참여하라“ ~ 국가안보의 핵심부분을 세계 최고수준의 무기체계를 보유한
미국에 의지하는 한국 입장에서는 어쩔 수없이 미국의 세계전략(동아시아 전략)에 <연루>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만약 미국의 요구를 거절한다면 미국으로부터 버림받을 수 있다는 <방기의 공포>가
발생합니다.]

냉전의 해체로 세계는 벌써 30여 년째 탈냉전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 한국(남한)은 여전히
‘북한과의 대립’ 이라는 냉전모드를 지속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 그렇다 하더라도 단극체제하의
<한.미 동맹의 성격변화>는 필연적인 흐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냉전시대 미국이 동맹을 필요로 했던 이유는 아시다시피 공산진영, 특히 소련의 팽창위협을
억지하고 미국의 이익을 안정적으로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소련의 팽창위협이 사라진
지금에도 미국은 여전히 다수의 국가들과 동맹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 냉전시절 미국에게
‘소련’은 그 존재 자체가 <구조적 위협>이었지만 지금은 그러한 <구조적 위협(소련)>이 대부분
소멸되었기 때문에 미국으로서는 동맹유지를 원하는 국가들 모두에게 동맹우산을 제공해야할
동기가 현재로서는 거의 사라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미국은 왜 아직까지 많은 국가들과
동맹관계를 유지하려는 걸까? ~ 그것은 아마도 <미국의 이익>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더불어
이것은 <◆“이제 미국은 자국의 필요에 따라 동맹 파트너를 일방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탈냉전 시대인 지금의 세계가 미국중심의 단극체제하에 놓인 상황에서
<(한.미)동맹의 성격변화>의 본질을 파악하려면 미국의 세계전략, 즉 <대전략(Grand Strategy)>을
반드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대전략(Grand Strategy)은 장기적, 거시적 측면에서의 <국가이익>을 먼저 규정하고 ... 그렇게
규정한 국가이익에 위협이 되는 모든 요인을 파악하여 다양한 정책수단 및 확실한 대응을 체계화한
<최상위 안보전략지침>입니다. ~ 대전략은 <국가이익>을 넓게 설정하면 할수록, 위협요인 또한
비례적으로 커지게 됩니다. 때문에 대응 전략에 더 많은 자원을 동원해야하고 또 배치해야 하는데,
예를 들어, 북한을 위협요인으로 상정하면 이제 북한과 거래하는 국가 및 (초국적)기업들을 감사하고
정보를 수집해야하며, 그들 국가 및 (초국적)기업들과 거래하는 또 다른 연계 그룹들을 감시해야
합니다. ... 그러다보면 종국에는 수집해야할 정보와 감시대상이 엄청난 수로 증가하게 되고, 또한
그렇게 증가한 대상들의 가치(정보가치)를 판별하는 문제까지를 감안한다면 비용은 천문학적으로
증가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더 많은 군사력과 경제력, 치밀한 외교력과 정보수단 등이 총 망라되는
것입니다. ... 따라서 <대전략(Grand Strategy)>은 최초의 설정을 어떻게 하느냐가 굉장히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1980년대 후반, 미국은 자신들의 최고의 정보력과 외교력으로 냉전의 해체를 예감합니다. 이에 따라
미국 의회는 ‘한.미 동맹’을 포함한, 아시아지역에서의 미국의 모든 동맹관계에 대한 전반적인
<재검토(동맹관계 재검토)>를 요청하기 시작합니다. ~ 상원군사위원회 ‘넌’ 위원장과 공화당의
‘워너’ 의원은 유럽지역의 주둔미군, 주일미군, 주한미군 및 해외주둔 미군속(군무원) 유지 경비 등에
관한 4개의 법안을 하나의 일괄법안으로 수정제출 하였고, ‘넌-워너’ 수정법안에 의거해 국방부는
1990년 1차보고서를, 1992년 2차보고서를 의회에 제출합니다. 이를 <넌-워너 보고서>라고 합니다.
이후 미국의 <대전략(Grand Strategy)>에 가까운 보고서들이 계속 발표됐는데, 클린턴 행정부시절인
1995년 <나이 보고서(Nye Report)>와 1998년에 국방부가 발표한 <동아시아전략보고서>가
대표적입니다.

부시 행정부시절(아버지 부시.George H. W. Bush)인 1990년 4월에 미 국방부가 의회에 제출한
<1차 동아시아전략보고서>는 냉전해체 이후의 미국이 자신들의 동맹전략에 대한 입장을 처음으로
정리한 문건입니다.(특히 아시아 국가들과의 동맹관계) ... 당시 보고서에서 부시행정부가 강조했던
대전략(Grand Strategy)의 핵심은 탈냉전시대 세계의 일극(pax americana)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한
미국이 동아시아 지역에서 과연 어떠한 전략(동맹관계)을 가져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는데 ~ 이를
직관적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미국의 압도적 힘의 우위만이 세계평화를 보장할 수 있다” - (미국유일 우월전략)>

미국이 모든 잠재적 경쟁 상대국(주로 강대국)들을 압도적인 힘의 우위로 제압할 만큼의 충분한
역량을 키워야만 평화가 보장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경쟁 국가들의 부상은 국제질서의 가장 큰
위협이자 동시에 미국의 최대 위협이며, 이는 자칫 전쟁발발의 위험으로까지 전이될 수 있기 때문에
미국은 이들 경쟁 국가들과 단순히 평화를 유지하는 차원을 넘어선 그 이상의 것(힘), 다시 말해
미국의 압도적인 정치, 군사, 경제적 우위로 잠재적 경쟁 국가들이 미국에 대한 도전 자체를 아예
시도조차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 1992년 보고서(@방어지침) 또한 이와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 “어떠한 국가도 잠재력 있는 미래 경쟁자로 부상하지 못하게
미국의 전략은 다시 집중되어야 한다.” - (New York Times. March 8. 1992) >

미국의 대전략(Grand Strategy)을 파악하면, 미국이 필요로 하는 동맹의 속성은 쉽게 도출됩니다.
잠재적 경쟁국가들(중국, 러시아, 일본, 독일, 프랑스, 영국 등)을 가장 큰 위협이라 인지했던 미국이
그들의 출현(부상)을 최대한 억지하기 위해 세웠던 동맹전략의 핵심 골격은 다음과 같습니다.

<◆ “나토(NATO)를 통해 러시아 견제와 독일의 독자적인 대외정책을 차단하고,
중국 견제와 일본 통제를 위해 ‘미.일 동맹’을 맺고, 걸프 지역의 사활적 이익을 지키기 위해
이스라엘에 대한 지속적인 지원과 후견관계를 유지한다.“ >

이와 같은 핵심 골격은 ~ 유럽, 중동 그리고 아시아를 포함, 사실상의 전 지구적인 영역이 모두
미국의 영향력아래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더불어 미국의 힘에 의한 우월전략에서 지역적 갈등이나
인종갈등, 환경, 종교 및 인권과 난민 같은 인도주의적 문제 등은 이제 더 이상 미국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다만 경쟁국 및 동맹국과 연관되어 세계패권 유지에 영향이 있을 때에만 미국은 비로소
지역갈등이나 인도주의적 문제 등에 적극적 개입의지를 보입니다. ... 냉전해체 이후, ‘소련’이라는
확실한 적(敵)이 사라지고, 이제는 그 빈 자리를 <경쟁국>이라는 존재가 차지함으로써 미국에게는
<적(敵) 개념>의 선명성이 상당히 흐려진 상황입니다. ~ 따라서 미국은 자신들의 압도적 힘의 우위,
특히 군사력을 탈냉전 시대에 맞게 재설정을 해야 하는 문제에 봉착했는데, 이는 냉전시기 소련의
팽창위협을 억지하기 위해 독일, 일본, 한국에 집중되었던 전진배치 병력을 재조정해야 하는 문제로
이어졌고, 그중에 가장 큰 규모로 병력 재조정을 고려했던 국가가 바로 한국이었습니다. ~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한.미 동맹의 성격변화(관계의 재설정)> 문제로 이어지게 됩니다.
(@ 이것이 무려 30여 년 전의 보고서 내용입니다.)

1990년 <1차 동아시아보고서>는 미군병력 감축과 전진배치의 필요성에 대한 재고를 주장합니다.
미국의 국내적 압력(특히 의회)과 동맹국의 경제성장과 같은 몇몇 조건들은 탈냉전 시대를 맞이한
미국에게 동아시아 지역 내의 새로운 안보환경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으며, 이는 결국 돈의 효율성
문제로 환원됩니다.(@ 가장 적은 비용으로 패권유지) ... 또한 당시 지상군 전진배치의 상당수가
한국이었기 때문에 현실적인 동아시아 안보재설정 대상의 1순위는 <한.미 동맹>이었던 것입니다.
당시 보고서에는 주한미군에 대한 한국 측의 기여, 즉 <방위비 분담금 증액>에 대한 요구와 함께
<미군감축>에 대한 내용도 함께 포함하고 있었는데, 이는 동아시아에서 <주한미군의 역할>을
새롭게 규정하겠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습니다. ~ 따라서 과거 주한미군의 전통적 역할이었던
<지역 균형자 및 최종 안보 보증인>에서 단순한 <국지적 안정화>로 주한미군의 역할을 축소해야
한다고 보고서는 주장합니다. ~ 결국 <보증인>이라는 단어를 삭제함으로써 미국은 동맹국인 한국의
안보를 더 이상 보장하지 않겠다는 의미를 보고서는 반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 “동북아시아 지역의 갈등의 부재를 미국이 보장할 수는 없지만,
적대 행위를 국지화, 최소화함과 동시에 미국에게 갈등 해결에 필요한
외교적 레버리지를 제공하려는 것이다.“ - (1차 동아시아전략보고서. 1990) >

정리해보면 ~ 미국은 한국 안보의 최종 보증인 역할에서 벗어나야하며 만약 분쟁이 발생하더라도
그 분쟁의 확산을 방지하고 최소화, 국지화하는데 주한미군의 역할을 한계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보고서는 북한의 위협을 과소평가 하거나 외면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지는 않습니다. ~ 대신
주한미군이 아닌, <주일미군>이 북한위협을 억지하는데 훨씬 더 효율적이라 주장합니다. ... 그러나
이러한 <넌-워너 보고서. 1990. 1992>의 계획(주한미군 감축 및 역할축소)은 북한의 핵무기 개발로
유보됩니다. <넌-워너 보고서>는 탈냉전 초기, 미국의 동맹전략의 방향성을 알려줌으로써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 분명한 것은 북한 위협에 대한 억지력의 상당부분이
한국의 경제성장과 맞물려 점진적으로 미국에서 한국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 이를테면
핵을 제외한 북한의 재래식 군사력에 대한 억지력은 전적으로 한국이 책임져야 한다는 부분입니다.

<넌-워너 보고서. 1990. 1992> 이후, ~ 1995년 <나이 보고서(Nye Report)>는 클린턴 행정부의
(안보)대전략을 <개입과 확산> 전략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 이 전략의 핵심 내용을 살펴보면,
먼저 미국의 안보와 경제의 안정적인 성장을 위해 <자유시장경제의 확산>이 필수적이어야 하고,
그것은 <지역 안보환경의 안정> 없이는 불가능 하다고 주장합니다. 더불어 지역안보의 안정을
위한 수단으로 <동맹 간의 협력>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 <개입과 확산> 전략은 과거 민주주의
국가들 사이에서는 큰 전쟁이 거의 없었다는 경험에 비추어, 오늘날 강대국들 상당수가 민주주의
국가들이거나 민주주의로 이행중인 국가들이라는 점에서 강대국들 사이에서는 대규모 전쟁이나
갈등이 촉발될 가능성이 낮다고 보며, 대신 약소국들의 군사도발과 소규모 국지적 분쟁 등을 오늘날
지역안보의 실질적 위협이라고 보고서는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클린턴 행정부는 동아시아
지역에서 미국에게 실질적 위협이 되는 요소로 약소국들의 군사도발, 이를테면 <북한 핵보유> 등을
꼽습니다. ~ ~ 결론적으로 미국은 지역의 안보환경을 안정화 시키는데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미국이 주도하는 <민주적 자유시장경제공동체>가 널리 <확산>될 수 있도록 최대한 힘을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개입과 확산> 전략의 핵심내용입니다.

앞서 보셨듯이 <넌-워너 보고서>가 동아시아에서의 미국의 역할(특히 주한미군)을 축소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면 ~ <나이 보고서(Nye Report)>는 반대로 동아시아의 중요성을 크게 강조했습니다.
이는 한국, 중국, 대만과 같은 개도국들의 경제성장이 미국 경제와 연관되어 그 비중이 추세적으로
증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동아시아 지역의 안정적 안보환경과 경제성장이 미국 경제의
지속적인 성장에도 상당한 도움이 된다고 강조하는데 ~ 특히, 동북아 안정의 핵심을 <한반도>라고
규정하고 이에 따라 <한.미 동맹>의 중요성을 다시 강조합니다. ~ <넌-워너 보고서. 1990. 1992>가
한반도의 갈등을 국지적 차원으로 격하시켰다면, 클린턴 행정부는 한반도의 안정을 동북아 안정의
핵심이자 필수요인으로 규정한 것입니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은 클린턴 행정부의 <개입과 확산> 전략에 가장 방해가 되는 요인이자, 동시에
동아시아 안보에 심각한 위협요인이 됩니다. 여기에 북한의 재래식 군사위협까지 더해지기 때문에
주한미군의 주둔필요성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보고서는 주장합니다. 1990년의 <넌-워너 보고서>가
북한의 재래식 군사위협을 전적으로 한국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 <나이 보고서>는
주한미군의 계속적, 주도적인 역할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주한미군의 철수나 감축계획은 없어야하며,
무엇보다 <전시작전권 전환>같은 문제는 한국군이 지금보다 더 현명하고 성숙(maturity)해진 미래
어느 시점에 신중하게 논의해야 한다고 보고서는 주장합니다. ~ 그런데 몇 년 뒤, 미국의 대전략에
큰 변화를 가져온 ‘초대형 사건’이 터져버립니다. 부시(George Walker Bush. 아들부시) 행정부 출범
초기였던 2001년에 일어난 <9.11테러>입니다.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미국)본토가 공격당한 그야말로 충격적인 테러사건이 2001년 9월 11일에
일어납니다. ~ 뉴욕의 세계무역센터(WTC) 쌍둥이 빌딩과 국방부 건물인 펜타곤(워싱턴)을 대상으로
항공기 자살 테러가 일어난 것입니다. ~ ~ 9.11 테러이후, 미국의 안보 대전략(Grand Strategy)은
전면적인 대변환을 계획합니다. ~ <치명적(lethal), 경량화(light), 이동성(mobile)>을 국방 변환의
중심적 지침으로 삼고 해외주둔 미군병력(특히 전진배치 지상군)에 대한 재배치 계획을 수립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전략적 유연성 계획>입니다. ... <전략적 유연성>은 말 그대로 해외주둔
미군을 미국의 세계전략에 따라 언제든지 유연하게 활용하겠다는 의미인데, 주둔국의 동의 없이도
미군이 신속하게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이죠. 이렇게 되면 ‘주한미군’ 또한 미국이 원하면
언제든지 한국을 떠나 다른 곳에 배치될 수 있는 것입니다. [◆ 부시 행정부시절 미 국방장관을
지낸 ‘도널드 럼스펠드(Donald Rumsfeld)’와 그의 추종그룹들은 2000년대 초반부터 주한미군을
국제 분쟁지역(ex. 중동, 남중국해)에 적극적으로 활용(파견)하려는 의사를 내비쳤습니다. 하지만
미.중 간의 군사적 충돌 같은, 다시 말해 우리 의지와는 상관없는 다른 나라들의 분쟁에 개입될 수
있다는 위험 때문에 한국정부는 미국의 ‘전략적 유연성’ 도입에 거부의사를 밝힙니다. 그러나 결국
2000년대 중반 한미 양국은 <전략적 유연성>에 합의를 합니다. 합의 내용은, 미국의 세계전략에
따라 ‘주한미군’이 한국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데 한국이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파견 병력이
다시 한국으로 귀환할 시에는 양국 간 논의로 결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이는 앞서 언급했던
‘연루의 위험과 방기의 공포’의 전형적인 사례였습니다.]

9.11테러 이전까지 미국의 안보전략을 지배했던 기본 방침은 고정된 적들만 위협으로 간주한다는
<위협기반 전략> 이었습니다. ~ 그러다가 9.11 테러 이후 미국이 ‘전략적 유연성’과 함께 내세운
전략이 <역량기반 전략>입니다. ~ <위협기반 전략> 하에서는 ‘적(敵)개념’이 선명합니다. 때문에
적(敵)의 위치와 성격, 힘의 크기 등이 뚜렷하여 대응전략 또한 현명하게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9.11 테러는 미국의 안보 전략이 더 이상 <위협기반>에 머무를 수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불확실성 시대에 <위협의 원천>이 더 이상 고정된 적이 아니라 <불확실성> 그 자체가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 이에 따라 예측할 수 없는 우발적, 기습적 위협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압도적인 군사력에 반드시 <유연성>이 더해져야 합니다. ~ 물리적 힘(군사력)도 센데, 거기에 더해
그 힘이 너무나 치명적이며, 언제 어디서든 신속하게 나타날 수 있는 이동성까지 갖추고 있다면
예측하기 힘든(불확실성) 기습적 역량을 키우려했던 적(敵)의 계획 자체를 아무 의미 없는(futility)
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역량기반 전략>의 핵심인 것입니다.

미국의 안보 대전략이 <전략적 유연성>과 <역량기반 전략>으로 대변환 되면서 주한미군의 재배치
문제 등 전반적인 <한.미 동맹의 성격변화>가 불가피 했습니다. 결국 2004년 ‘럼스펠드’ 국방장관은
주한미군 재배치 계획을 승인하였고, 당시 주한미군 2사단 3,600명 규모의 전투 병력을 이라크로
파견하게 됩니다. 여기에 3만 7,000명 규모의 주한미군을 2008년 9월 까지 2만 5,000명 수준으로
감축함과 동시에 주한미군의 허브를 한강 이남의 <오산.평택 및 대구> 기지로 재배치(이전)하는
계획을 발표합니다. 이는 주한미군이 북한의 재래식 군사위협, 즉 장사정포 사거리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겠지만 ~ 아무튼) 주한미군 개입의 개연성을 최소화 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북한 재래식 군사위협이 예측하기 어려운 <역량기반>의 위협이 아닌, 충분히
예측 가능한 <위협기반>이라 판단하여 억지 가능한 위협으로 규정짓고, 대신 <오산.평택 및 대구>
두 곳의 허브기지에 병력을 집중 재배치함으로써 이제는 주한미군이 한반도를 넘어선 국제분쟁
지역에 언제든지 투입 가능한 <전략적 유연성> 원칙에 따라 움직이는 미국의 핵심 안보자산이라는
의미도 담겨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후 2008년 게이트 국방장관 때 28,500명으로 주한미군의
숫자는 동결되었고, 현재 주한미군은 이 수준에서 유지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다만 미국은 지난해
<2019회계연도 국방수권법>에서 주한미군을 현재의 수준보다 6,500명 적은 2만2,000명 수준으로
감축하려던 계획(“2만2,000명 이하로는 줄일 수 없다.”)에서 다시 지금 수준인 2만 8,500명 수준으로
유지하겠다고 최근(2019년 5월) 미국 상원 군사위원회가 발표한 상황입니다. ~ G2로 부상한 잠재
경쟁국 중국과 러시아 및 북한의 견제를 위해서 아직까지 주한미군이 현재 수준인 2만 8,500명에서
유지되는 것이 미국의 전략적 판단이라는 것인데, ~ 이러한 주한미군의 성격변화는 결국 미국의
‘세계대전략(Grand Strategy)’이라는 큰 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리해보면
주한미군의 병력 수 및 역할 변화의 문제는 미국의 의지와 대전략에 따른 결과입니다. 간혹 언론을
통해 ‘주한미군 감축 및 철수’ 같은 내용이 보도될 때마다 <“외교가 개판이네!”>라며, 사태 변화의
책임을 오롯이 한국 정부의 외교력 탓으로 돌리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너무나 편협하고 무지에
가까운 단순한 시선입니다. 주한미군과 한.미 동맹의 성격변화는 한국정부의 이념 성향과는 무관한,
더불어 외교력의 유능과 무능과는 별개로 미국의 <대전략 논리>가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대전략은 ~ 전 세계에서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혹시 모를 다양한 가상의 긴박사태를
상정하고 그에 대한 수많은 대응 시나리오까지도 자신들 안보전략의 한 파트에 포함시켜놓고
있는데, ~ 그 대표적 사례가 바로 <북한정권의 급작스런 붕괴>입니다.

다트머스대학 행정학과의 제니퍼 린드(Jennifer Lind) 교수와 미국 최대의 글로벌 정책연구소인
랜드연구소(RAND Corporation) 베넷(Bennett) 박사는 2001년 하버드대학 케네디 행정대학원 산하
국제문제센터에서 발행하는 계간지 <국제안보(International Security)> 가을호에 게재한 논문
<북한의 붕괴: 군사임무와 소요사항 (The Collapse of North Korea: Military Missions and Requirements)>에서
북한 붕괴에 대비한 군사작전과 이때에 소요되는 군 인력을 산출해 발표했었습니다. ~ 당시 논문은
<북한 붕괴 시 필요한 병력 규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 (1)북한 전역의 안정화를
위해 18만~31만 2천명, (2)대량살상무기(WMD) 확보에 3천~1만명, (3)난민 유입이 예상되는 북한,
중국, 러시아, 한국 간 국경지대에 배치할 국경통제병력 2만 8천명, (4)저항세력 억지 및 궤멸 작전
투입 병력 7천명~1만 5천명, (5)재래식 무기 무장해제 4만 9천명 등 ~ 이를 모두 더한다면 필요
병력수는 최소 26만 7천명에서, 최대 40만 9천명 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 이와 같은 수치는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미군과 나토(NATO) 평화유지군이 코소보나 이라크 등 세계 여러 국제분쟁
지역에서 실제 활동을 하면서 소요된 병력 수를 근거로 산출한 수치입니다. 이에 따라 린드 교수와
베넷 박사는 북한인구 1천 명당 13명의 안정화 병력이 요구된다고 주장했는데, 이것도 북한군의
큰 저항이 없는 낙관적 상황을 가정했을시의 수치라고 얘기했습니다.

린드 교수는 <북한의 급작스런 붕괴>에서, 필요병력 ‘수치’보다 세계가(특히 미국)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할 핵심중의 핵심을 <대량살상무기(WMD)의 안전한 확보>라고 주장합니다. ... 대량살상무기는
치명적 파괴력을 지닌, 말 그대로 인명을 대량으로 살상할 수 있는 핵폭탄, 생화학무기(ex.탄저균),
중장거리 미사일 등의 무기들을 말합니다.[@ Weapons of Mass Destruction] ~ 그런데 진짜 문제는
무기들의 가공할 살상력뿐만이 아닙니다. ~ 그 엄청난 살상력이 다른 곳으로도 전이될 수 있다는
<가능성>입니다. 그리고 이를 미국입장에서 보면 앞서 언급한 <역량기반 전략>과 맞닿아 있습니다.
미국의 안보전략은 2001년 9월 11일 이전과 이후로 나뉩니다. ~ 냉전해체 후, 세계 유일의 일극의
지위를 확보하고 있었던 미국에게는 <고정된 적(敵)>만이 유일한 위협의 개념이었습니다.(위협기반)
하지만 9.11테러는 그동안 미국이 인식하고 있었던 위협의 개념을 송두리째 바꿔놓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 핵의 존재>는 북한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 자체만으로 미국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적(敵) 개념>이 되는 것입니다. ~ <북한의 핵 능력이(핵물질과 핵무기 제조기술)> 테러집단에게
이전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만에 하나라도 <북한의 핵능력>이 불확실성을
극한으로 끌어올린 테러조직에게 이전되어 그들이 소형화된 전술핵무기나 핵배낭 같은 치명적인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게 된다면, 향후 미국의 <역량기반 전략>이 감당해야할 정치적, 심리적, 경제적
비용은 엄청나게 증가할 것입니다. 린드 교수가 강조했던 <대량살상무기(WMD)의 안전한 확보>는
바로 이런 맥락과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한 집단의 의사결정 과정과 그 이면에서 펼쳐지는 숨은 이야기들을 살펴보면 흥미로운 점들이
꽤나 많습니다. ~ 그중에 거대규모, 특히 국가단위의 전략과 정책결정(의사결정) 과정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국가이성’에 의한 의사결정, 즉 <레종데타에 의한 의사결정 과정>에는
우리가 모르는 신비한 <연역적 메커니즘>이 존재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입니다. ~ 2003년 취임한
노무현 대통령은 미국 안보 대전략의 핵심이었던 <전략적 유연성>에 보조를 맞추듯 이라크 파병을
결정합니다. 서민을 대표하며 진보를 상징하던 노무현 정권이 집권하자마자 가장 우파적 결정을
내렸던 이유는 대통령의 의지가 아니라 바로 <레종 데타(raison d’État)>라는 국가이성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때에도 분명히 <레종데타에 의한 의사결정 과정>을 거쳤을 것이며 그러한
과정 중에는 거부할 수 없는 어떤 신비한 힘(연역 메커니즘)이 작동됐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는
특히 민주주의 국가에서 자주 경험되는데, 즉 한 국가의 의사결정은 비록 최고결정권자(대통령)가
존재하더라도 도출된 최종적 결과는 최고결정권자 단독에 의한 결정이 아니며, 정부 내의 다양한
구성원들의 권력배치와 거기서 양산되는 상호적 긴장관계의 연속이 만들어낸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은 뒤에서 이어질 이야기를 위해 꼭 필요하다 생각되어, 과거 미국의 실제 의사결정
사례를 참고해 간략히 살펴보고 계속해서 나머지 이야기를 이어갈 볼 생각입니다.

@ 예전 경제학에서는 <주인-대리인 문제(Principal-agent problem)>라는 이름하에 활발한 논의가
있었습니다. 주인-대리인 관계에서 최종 의사결정자는 당연히 ‘주인’입니다. ~ 주인은 의사결정을
내리거나 행동을 취할 때, 주변에서 도움이나 조언을 얻을 수 있는 ‘대리인’을 개입시킵니다.
이론적으로 대리인은 주인의 목적 달성을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합니다. 예컨대 대리인은
주인이 현명한 결정을 내리도록 돕기 위해 더 많은, 그리고 전문적인 정보를 제공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 주인 A가 의사와 변호사를 만나는 경우, 이때에 의사와 변호사는
대리인입니다. 의사는 암이라는 질병과 치료 방법에 대해, 변호사는 온갖 법률문제에 대해 A보다
월등히 많은 전문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A가 최종선택을 했다고 해서 A가 단독으로
내용을 결정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수술을 받을지 말지에 대한 최종결정은 A가 내리지만,
역시 대리인이 제공하는 정보와 판단이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그렇게 내리는 결정은 대리인, 즉
전문가 조언 없이 내리는 결정보다 더 나은 결정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 다만 여기서 주인과
대리인이 가진 각자의 정보는 <비대칭적>이며, ~ 동시에 양측의 이해관계 또한 다르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약 처방만으로 충분한 단순 감기증상에 대해 의사는 주인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MRI, CT 등의 각종 비싼 검사를 권유합니다. 주인은 대리인의 행위가 진정으로 자신을 위한건지,
아니면 대리인 본인의 이익을 위한 행위인지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가 없습니다. ~ 이 지점에서
주인과 대리인의 <정보 비대칭성>이 문제가 됩니다. ... 회사 경영권 방어를 위해 주인(주주)은
변호사를 고용했지만, 변호사가 (더 큰 이익을 위해)상대측과 공모해 회사에 불리한 자문을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이 절대 권력으로 결정을 내리는, 위계질서가 명확한 조직에서 명목상 대리인일지라도
그는 사실상 <능동적인 참가자> 입니다. 그들은 특별한 이해관계에 대해 적절히 주의를 환기시키고,
결정의 정당성을 위해 그런 이해관계를 대변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복합적인 결정에서
대리인은 주인의 의사를 충실히 대변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의사결정에 참가하는 일종의 <경기자>
이기도 합니다. 결론적으로 대리인(경기자)은 문제의 결정이나 행동의 결과에 꽤 많은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의사결정 과정에서 <대리문제>속에 내포된 부정적 영향을 억제하기 위한 많은 연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 “모든 정보를 공유(정보 비대칭성 제거)” 함으로써 정보의 불균형을 해소한다든지,
“주인의 이익이 곧 대리인의 이익”이 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자는 식의 연구들입니다. 하지만
‘케네스 애로(노벨 경제학상)’는 신탁 의무를 지우거나, 전문가 정신의 강조, 대리인 자신의 전문가적
평판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하는 등의 제안은 전통 경제학의 연구영역 밖의 문제라고 얘기합니다.
더구나 집단의 규모가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는 ‘정부’의 의사결정 과정에서 <대리문제>가 정부의
의사결정을 방해하는 요소 중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면 ... <대리문제>는 당장이라도 위와 같은
개선방법을 적용시켜야 할 것입니다. ~ 앞서 얘기했듯, 대리인이 <대리인과 경기자의 경계>를
오고갈 때 복잡한 문제의 발생은 필연적입니다. 이는 클린턴 행정부시절 보스니아에 미군 2만 명을
보내는 문제에서 잘 드러났습니다.

[◆ 1995년 6월 어느 여름밤, 백악관에서는 프랑스 대통령 ‘자크 시라크’를 위한 만찬이
열리고 있었다. 만찬이 끝날 무렵 국무부 차관보 ‘리처드 홀브룩’이 잠시 여유가 생긴 대통령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그날 아침 클린턴은 보스니아에 주둔 중인 UN 평화유지군이 세르비아군에
포위됐다는 보고를 받았었다. 그 상황에서 프랑스.영국.네덜란드 군대가 주축이 된 UN 평화유지군이
철수하겠다고 할 때 미국이 해야 할 일을 놓고 백악관 참모들 사이에서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홀브룩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 ~ ~
내가 입을 열었다.
“대통령님 멋진 저녁 분위기를 망치지나 않을까 우려됩니다만,
분명히 할 것이 있습니다. ... 지금의 NATO 계획에 따라 UN이 철수하기로
결정할 경우 미국은 보스니아에 군대를 파견키로 ‘이미’ 결정했습니다.
말씀드리기 송구스럽습니다만, 그 문제에 대해서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대통령이 놀라서 나를 보며 물었다.
“무슨 소리요? 병력파견 문제는 때가 되면 내가 결정할 겁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 내가 입을 열었다.
“대통령님, NATO가 이미 철수 계획을 승인했습니다. ... 이 과정은 그러니까
자동적입니다. 특히 UN이 철수를 결정할 경우 NATO 병력을 지원한다고
우리가 공개적으로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은 국무부 장관 워렌 크리스토퍼를 돌아봤다.
“이게 사실입니까?”
“예, 그런 것 같습니다.” ... 크리스토퍼가 짧게 답했다.
“이 문제는 내일 아침에 다시 얘기합시다.”

대통령이 불쾌한 듯 말했다. 그리고는 힐러리의 손을 잡고 입을 다문 채 방을 나섰다.
=========

수개월 전 클린턴 대통령은 동맹국에 보스니아로의 파병을 권유하면서 만일 문제가 발생하면
철수를 돕겠다고 약속합니다. ~ 동맹국들은 군대를 파병했고, 클린턴은 다른 더 시급한 문제에
집중했습니다. 당시 NATO는 미국 국방부 전문가가 참석한 가운데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고,
긴급 상황이 발생하면 안전한 철수를 위해 미군 2만 명을 파병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NATO
집행위원회는 이 계획을 승인했고 미국 대표도 대통령 아래 급에서 승인한 지침에 따라 찬성을
하게 됩니다. ~ 하지만 위에서 ‘리처드 홀브룩’이 묘사한 상황을 보면 클린턴 대통령은 ‘자신의’
정부가 내린 결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분위기였습니다. ... 사태가 벌어지고 나서, 대통령 집무실
책상위에는 클린턴이 지금껏 한 번도 읽어본 적 없는 수백 페이지짜리 긴급보고서가 놓여있었고,
거기에는 클린턴이 한 번도 브리핑 받은 적이 없는 대단히 세세한 작전계획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 하지만 보고서를 작성한 군인도 미군의 보스니아 파병에 관심이 없었고, 군부와
펜타곤에서 일하는 군무원들은 오히려 파병에 반대했습니다. ... ‘대통령’이라는 신분은 전체를
조망하는 자리입니다. 따라서 군부 의견도 중요했지만 동시에 외교적 측면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 미국 정부의 외교를 전담하는 곳은 <미국 국무부>입니다. 당시 국무부 차관보였던
‘리처드 홀브룩’은 만약 미국이 파병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NATO 동맹에 균열이 생길 것이며,
모든 비난의 화살은 대통령(클린턴)을 향하게 될 것이라며, <국무부 관리로서> 해야 할 말을 강하게
주장한 것입니다. ... 이제 클린턴 대통령은 새로운 결정을 해야 하는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
‘UN평화유지군’의 철수를 위해 미군 수만 명을 보스니아에 파병하든지, 아니면 보다 그럴듯한
다른 명분을 찾아내 파병하든지, 둘 중 하나였던 것입니다.

클린턴 대통령, 펜타곤(Pentagon), 국무부 외교관(홀브룩)의 이해관계는 같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이들 각자가 가지고 있는 정보와 전문지식은 철저히 <비대칭적> 이었습니다. 심지어 국무부 차관보
홀브룩은 펜타곤이 이미 2년 전에 작성해놨던, 긴급 상황에 대한 다양한 보고서(보스니아 사태포함)를
국무부 장관이 대통령에게 보고하기 6일 전에야 겨우겨우 펜타곤을 압박해서 얻어낼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누군가는 자신의 견해를 접고, 양보하고 순응해야 했습니다. 결국 클린턴 대통령이
양보하고 순응하며 관리들의 견해를 따랐고, ~ 파병에 대해 방어적 입장을 취했던 펜타곤보다
더 강한 주장을 펼쳤던 국무부 관리 ‘리처드 홀브룩’의 견해가 최종적으로 승리(관철)하게 됩니다.
그러나! ~ 리처드 홀브룩의 견해가 관철되는 동안은 상황이 이미 늦었음을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보스니아인 수천 명 이상이 학살당했고, 크로아티아가 공세를 취했으며, 동맹국들은 자체적으로
철수를 시작한 다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참고: (결정의 본질. 316~320페이지/ 그레이엄 앨리슨, 필립 젤리코/ 모던아카이브 출판) ]
========

여러 사람이 참가해 의사결정을 내리는 경우, 누가 어떤 자격으로 참가하는지를 알기 전에는
결과 예측이 상당히 어렵다는 것을 보스니아 사태가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 메릴랜드 대학의
존 스타인브루너 교수는 정책결정 패턴을 <세 가지 부류>로 분류했습니다.

(1) 미정형 사고방식(uncommitted thinking) - 고위정책결정자들은 보다 많은 융통성이 있기
때문에 미정형 사고방식을 가집니다.

(2) 이론형 사고방식(theoretical thinking) - 전문가들은 각자의 전문 분야에서 일반적으로 통하는
이론형 사고방식을 가집니다.

(3) 판에 박힌 사고방식(grooved thinking) - 직업관료(하위관료) 조직원들의 사고방식입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새롭게 임명되는 고위관리는 대개는 내부 발탁보다는 외부 인사를 추천받아
임명하는 정치적인 방식이 보편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임명된 관리들과 직업관료 사이에
존재하는 사고방식 차이는 너무나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사고방식의 차이는 결국 생각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뭉치게 만듭니다. 세력이 형성되는 거죠. 흔히 <파벌 또는 계파>라고 하는데,
앞서 일본의 전후 정치를 얘기할 때, <당인파와 관료파>처럼 출신의 차이가 사고방식의 차이를
만들기도 하는 것입니다. ... 정치적으로 임명된 관리들 대부분은 본인이 맡은 정부업무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편입니다. 설령 그 분야 전문가라 할지라도 오랜 시간동안 직업 관료들 사이에서만
형성되어온 공통문화와 끈끈한 신뢰관계, 다시 말해, 그들만의 <관료 생태계>가 존재하기 때문에
방금 임명장을 받은 고위관리가 직업관료 생태계에 적응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정권이 끝나면 고위 관리도 대부분은 함께 떠나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임명된 고위관리는 태생적으로
<한시적> 이라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 ~ 반면 직업적 관료 권력은 스스로가 사표를
던지지 않는 이상은 아주 긴 시간을, 즉 본인의 인생 전체를 관료로 시작해 관료로 끝을 맺을 수가
있습니다. 더구나 한번 상승한 지위는 이후 능력이 떨어져도 최소한의 지위를 보장받습니다.
(@ 지위의 하방경직)

집단의 크기가 클수록, 특히 국가단위의 의사결정 과정에는 ~ 주인, 대리인, 경기자 등의 수많은
이해관계자들이 참여합니다. 더불어 이들 각자가 보유한 정보와 전문지식은 <비대칭적 상호관계>
하에 놓여있습니다. 또한 ‘(경기)참여자’가 누구냐에 따라 경합하는 사고방식도 제각각입니다. 때문에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교류(힘겨루기, 이해관계)>과정을 거쳐서 도출되는 최종결과는 일반의 처음
예상과는 다른 형태의 결론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한마디로 <비대칭적 상호관계의 경기 결과>를
예측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죠. ... 이로 인해 <정부 부처 간 엇박자>, 임명직 고위
관리와 직업 관료간의 사고방식 차이로부터 유발되는 보고오류 및 누락 같은 <조직 내 소통불화>,
정권 후반기로 갈수록 <직업 관료에 대한 장악력 약화> 등의 문제들이 자주 발생하곤 합니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비가측적 상황의 연출은 일시적,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내부에 잠재되어 있다가
정부의 의사결정이 있을 때마다 등장하는, 결코 피할 수 없는 <연역적 메커니즘>이라고 생각됩니다.
========

국가단위의 의사결정 과정 속에 숨어있는 복잡성(비대칭적 상호성) 문제는 여기까지 살펴보고,
이제 다시 앞의 이야기를 가져와 계속 이어가 보겠습니다. ... <북한의 급작스런 붕괴>에 관하여
린드(Jennifer Lind) 교수는, 필요병력 수치보다 우리가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할 핵심 사항으로
<대량살상무기(WMD)의 안전한 확보>를 언급했습니다. ~ 9.11테러 이후, 미국의 안보 대전략이
<전략적 유연성 및 역량기반 전략>으로 대변환 되면서부터 이제 북한을 바라보는 미국의 인식은
<대량살상무기(WMD)를 확산시키는 존재>로 초점이 이동한 상태입니다. ... 그리고 이러한 미국의
북한 인식변화 속에는 “북한의 재래식 군사위협은 남한이 충분히 억지할 수 있다.” 라는 의미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남한에서의 주한미군 역할의 점진적 축소를 예고하는
것입니다. 주한미군은 더 이상 <북한 억지>라는 하나의 목적에만 국한된 안보자산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 더불어 이러한 변화는 <전략적 유연성과 역량기반 전략>하에서 미국이 필요로 하는
동맹의 개념이 전 지구적 위협에 얼마나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느냐의 <동맹 효율성> 개념으로
확장된 것입니다. 미국이 생각하는 동맹 개념이 <가성비>를 따져 묻는 단계까지 도달한 것이죠.

미국이 동맹에게 ‘효율성(가성비)’을 따져 묻겠다는 의미는 결국 <비용(돈)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미국은 천문학적인 돈을 썼습니다. ~ 과거와 같이
전 세계 주요 분쟁지역마다 개입하여 압도적 군사력(돈)을 쓸 여력이 많이 줄어들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에서의 경험 때문에 국제문제 개입에 대해서는 이제 (미국)국내적으로도
정치적 부담이 많아진 상황입니다. ‘소련(공산진영)’ 이라는 선명하고 구조적인 위협요소가 사라진
지금의 현실에서 세계를 무대로 테러방지, 재해구조,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 같은 수많은 안보이슈에
상당한 비용(군사력)을 반복적으로 지출하고 있는 정부에게 다수의 미국 유권자들은 많은 피로감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 ~ ~ 그러나! ~ 미국은 이러한 현실적 부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계
<일극(pax americana)>으로서의 지위를 계속해서 유지하고 싶어 합니다.

<◆ “미국의 세계패권은 지속되어야 한다. 그러나 써야할 돈(군사력)이 부족하다?”>

결국 답은 기존 동맹국들과 지역안보 책임을 함께 나눠 갖는 것입니다.(돈과 군사력의 공동부담)
특히 미국에게 지속적인 패권유지의 당위성을 제공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바로 중국의 부상인데
그중 미국이 유독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부분이 <중국 군사력의 질적 증강>입니다.

중국은 해양의 중요성과 장거리 공군력 및 정보화 전력 등에 힘을 쏟기 시작했습니다.
이른바 군의 현대화 및 정보화, 정예화로 대표되는 <군의 질적 증강>입니다. ~ 과거 ‘인해전술’의
국가로 상징되던 중국 ‘인민해방군(중국군)’이 환골탈태(換骨奪胎)하며 첨단 군대로 새롭게 거듭나고
있는 것입니다. ~ 인민을 대량 동원하는 ‘인민전쟁’ 개념을 더 이상 고수하지 않겠다는 것인데,
이에 따라 중국은 가장 먼저 병력을 감축하기 시작했습니다. ~ 여기에 항공모함 확보로 해군력을
증강시켰고, 전자기파(EMP) 무기 및 해커.바이러스 등의 정보마비 무기 같은 비대칭 전력증강,
스텔스 전투기 젠-20, 항공우주산업 육성으로 인한 유인우주선 발사 등 전반적인 군의 질적 증강
및 군사기술혁신(RMA: Revolution in Military Affairs)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 이는
병력 1인당 군사비 지출내역을 보면 쉽게 이해됩니다.

◆ 영국 <국제전략문제연구소. IISS(International Institute for Strategic Studies)>의 자료를 참고로
2009년, 2014년 주요국의 병력 1인당 국방비 지출내역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달러($) 기준]

<2009년 주요국의 병력 1인당 국방비 지출>
@ 미국 - 43만 7천 달러($)
@ 한국 – 3만 7천 달러($)
@ 일본 – 22만 8천 달러($)
@ 중국 – 3만 1천 달러($)
@ 러시아 – 4만 달러($)

<2014년 주요국의 병력 1인당 국방비 지출>
@ 미국 - 40만 5천 달러($)
@ 한국 – 5만 3천 달러($)
@ 일본 – 19만 3천 달러($)
@ 중국 – 5만 5천 달러($)
@ 러시아 – 9만 달러($)

미국은 한해 700조원에 가까운 국방비를 지출하는 세계 최고의 군사대국답게 ~ 병사 1명에게
지출되는 비용이 무려 40만 달러($)를 상회하고 있습니다. 원화로 환산(최근환율)하면 4억 5천만
원이 넘는 돈입니다. 압도적이죠! ~ 일본도 2억 원이 넘습니다. 물론 이 금액이 오롯이 병사를 위해
사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전체 국방비를 병력수로 나눈 수치이기 때문에, 병사 1명당 국방비 지출이
높다는 것은 군대의 정예화 및 현대화 속도가 빠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자료(IISS)를 보면
중요한 변화가 보입니다. ~ 우선 한국은 북한과 직접 대치하고 있는 휴전국가라는 특수성 때문에
병력 1인당 국방비 지출의 증가는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 그러나 미국과 일본의 2014년 수치는
2009년과 비교해보면 병력 1인당 국방비 지출액수가 (추세적으로)줄어든 상황이며, ... 반면 중국과
러시아는 수치가 큰 폭으로 상승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2009년 한국보다 낮았던 중국은
2014년에 한국을 추월한 상황입니다. 이는 인민해방군의 정예화.현대화 속도가 한국군을 앞서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1인당 GDP(2018년 기준)가 한국은 3만 달러($)를 진즉에 넘어섰고,
중국은 이제 겨우 1만 달러($) 수준임을 감안한다면, 현재 중국의 인민해방군에 대한 자본집중도가
얼마나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 북한과 대치중인 상황이라 한국은 지상군(육군)의 절대규모가 반드시 요구되는 상황이며,
따라서 지상군 위주의 대병력 체계유지는 일정부분 당위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더불어 대륙세력
견제를 원하는 미국도 한국 측에 강력한 지상군 운용을 바라기 때문에, 한국은 주변 강국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해공군력의 자본집중도가 떨어집니다. ... 결국 한국군의 정예화 및 현대화는 지상군의
(점진적)축소 없이는 달성되기 어려운 목표이며, ~ 설령 지상군 축소를 계획한다고 해도 지상군의
‘절대규모’ 라는 현실적인 부분을 고려한다면 한국 군대의 정예화 및 현대화 속도는 더딜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한국 지상군은 해공군력과의 조화, 즉 육.해.공 합동 전력을(첨단 정보화 전력포함)
극대화시킴으로써 전체 군사력을 증강시켜야 할 것이며, 이 과정에서 한.미 동맹의 역할이 상당히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소련(공산진영)’ 이라는 명징한 적(敵)이 사라진 오늘날, 중국의 부상은 미국과 미국의 동맹국들에게
많은 고민거리를 안겨주고 있습니다. ~ 한마디로 <경제는 중국 & 안보는 미국> 이라는 딜레마에
빠진 상태라는 것입니다. ...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조차 경제부문만 놓고 보면 중국시장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매력적인 가치를 지닌 시장입니다. ~ 이는 미국뿐만 아니라 한국, 일본, 유럽도
마찬가지 상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계패권 경쟁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계속적으로 커지게
될 것입니다. 다만 중국경제의 상당부분이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시장경제>의 틀 밖에서 작동되고
있다는 점이 미국을 자극합니다.(@특히 금융.자본시장) ~ 더불어 중국의 폐쇄적인 경제민족주의는
미국식 자본주의가 아닌, 중국 자신들이 룰 메이커(Rule maker)로써 중심적 역할을 할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최근 타결된 ‘RCEP(알셉)’은 경제부문에서 중국의 존재감이 세계에 확실히
각인된 상징적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물론 RCEP의 핵심은 아세안 국가들이라는 의견도
많습니다. ~ 그렇다 하더라도 ‘RCEP 타결’이 전 세계에 중국의 부상을 알리는데 충분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지속적인 세계패권을 원하는 미국에게 지금 눈앞으로 다가온 현실적 문제는 결국 <비용>입니다.
특히 경제와 군사안보 분야에서 점점 더 영향력을 키워가고 있는 중국의 존재는 ~ 그렇지 않아도
세계패권 유지에 많은 돈을 쓰고 있는 미국에게 더 많은 지출 부담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 결국
중국 견제와 동북아 지역에서의 지속적 패권유지를 원하는 미국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방안은 <동맹의 포괄적 활용>입니다. ~ 여기에는 비용(돈)뿐만 아니라, 지역 안보의 공동책임까지
포함되는데 ... 그 핵심이 바로 <아시아 집단안보체제(다자동맹)>의 구축입니다. ~ 아시아의 안보를
미국이 홀로 책임지는 것보다, 다수의 동맹국들이 함께 나눠 책임지는 것이 비용측면에서 훨씬 더
부담이 덜하기 때문입니다.

야구에서 빈볼시비가 발생하면 더그아웃(dugout)의 모든 선수들이 뛰쳐나와 상대편으로 향합니다.
동료 선수에 대한 위협은 팀 전체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모두 함께 싸운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국제정치에서 말하는 ‘집단안보체제’의 의미는 바로 야구의 빈볼시비 개념과 유사합니다. 실제로도
<국제연합헌장 51조>에는 이러한 내용의 조약원칙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 “회원국 하나에 대한 공격은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된다.”
- (국제연합헌장 51조. ‘집단적 자위의 원칙’) >

미.소 냉전시기 ‘냉전의 설계자’라고 불리던 미국 외교전문가 조지 케넌(George F. Kennan)은
종전 이후의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은 얘기를 했습니다.

“세계에는 기술적, 산업적 창조력이 매우 뛰어난 네 곳의 중요 지역이 있는데,
이들 지역이 <어느 쪽과 동맹을 맺느냐>에 따라 국제적인 <세력균형>의 판도가
달라질 수 있다! ~ 그 네 곳의 지역은 미국, 소련, 유럽, 일본이다.“

케넌의 이러한 주장은 <집단안보> 개념으로 이어집니다. ~ 그리고 여기서 또 한 명의 전문가인
존 루이스 개디스(John Lewis Gaddis) 예일대 교수 말을 들어보면 집단안보 개념이 좀 더 선명하게
다가옵니다. ... 개디스 교수에 따르면 한국전쟁 당시 남한의 위상은 국제 세력균형에 미치는 영향이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남한의 방어를 위해 전쟁 참여를 신속하게 결정한
이유는 국제연합(UN)이 승인한 경계 38도선을 넘은 북한의 남침이 미국에게는 <집단안보체제>라는
전체 구도(국제질서)가 도전받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국제연맹>과,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국제연합(UN)> 창설은 그야말로
<집단안보체제>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제 1.2차 세계대전을 경험한 세계인 모두는
지구에서 더 이상의 참혹한 전쟁비극은 없어야 한다며, 따라서 어떠한 형태의 침략전쟁도 불법으로
간주하고 이를 어기는 국가에 대해서는 다른 나머지 국가들이 합심하여 (자동적으로)처절한 응징에
나서야 한다며, <국제기구(국제연맹, 국제연합)> 창설을 통해 약속했던 것입니다. ... 그리고 이것이
국제기구를 통한 <집단안보체제>의 개념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 그렇다면 왜 아시아에서는
<나토(NATO)>와 같은 집단안보 체제가 구축되지 못했을까? ~ 하는 궁금증이 생깁니다.

지난 글에서 말했듯이, 아시아에서 안보 동맹 체제는 (미국-일본), (미국-한국), (미국-대만), (미국-태국),
(미국-호주) 처럼 미국을 중심으로 한 개별적인 양자동맹(쌍무동맹) 관계만이 구축되어 있습니다.
이들 모두가 다같이 함께 참여하는 <다자안보체제>가 구축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 물론
<시토(SEATO)> 라는 동남아시아 집단방위 기구가 존재하긴 하지만, 여기엔 한국과 일본, 대만이
빠져있기 때문에 사실상 ‘다자안보기구’로써의 기능은 거의 작동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아시아에서는 나토(NATO)와 같은 서방자유진영의 다자 안보체제가 형성되지 못했는데,
그 대표적 이유로 일본에 대한 아시아 주변국들의 반감 및 거부감이 지적됩니다. 아시아 국가들
입장에서는 전범국 일본의 진정성 있는 사과와 반성도 없는 상태에서 일본에게 큰 지분이 배분되는
<아시아 집단안보체제> 구축에 의심이 들 수밖에 없었던 건 당연했습니다. 여기에 미국이 아시아
국가들과 동등한 자격으로 다자안보체제에 참여하려는 뜻이 별로 없었다는 점도 중요한 대목입니다.
압도적인 경제력과 군사력을 가진 미국에게 아시아 집단안보체제의 참여는 실익측면에서도
그렇게 매력적인 이벤트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 냉전시기 미국에게 중요했던 지역은 유럽이었으며,
조지 캐넌의 말처럼 유럽이 어느 쪽과 동맹을 맺느냐에 따라 국제적 <세력균형>의 판도가 달라질
것을 미국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미국에게 아시아는 문화적 수준이나 동질성이 매우
낮은 지역으로 인식되었고, 이러한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아시아 집단안보체제>
구축에 미국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던 것입니다. ... 대신 아시아는 공산세력의 팽창을 막기 위해
일본 하나만 제대로 키우면 된다는 생각이 그 당시 미국의 세계대전략(Grand Strategy) 이었던
것입니다. ~ ~ 하지만 냉전이 끝난 지금의 동아시아 질서는 중국의 부상과 함께 많은 부분에서
변화가 진행 중입니다.

2001년 9.11테러 이후, <전략적 유연성 & 역량기반 전략> 이라는 미국의 대전략(Grand Strategy)
변화는 해외 주둔 미군부대와 동맹국의 안보이익 범위가 전 지구적으로 넓어짐으로써, 동맹국들은
이제 미국과 안보이익을 함께 공유(?)하는 <포괄적 동맹>으로 발전한 상황입니다. ~ 하지만 말이
안보이익 ‘공유(?)’지 실질은 미국이 원하는 지역안보에 동맹국들도 함께 동참해야(ex. 해외파병)
한다는 묵시적 강제성이 내포된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따라서 주일미군, 주한미군의 역할은
이제 일본과 한국이라는 한정된 공간에 얽매인 안보자산이 아닌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동맹국의
군대인 자위대, 한국군 등은 <포괄적 동맹관계>하에서 전 지구적 안보에 미국과 함께 참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 다만 일본은 군대가 헌법상(9조) 제약에 걸려있고, 호주는 군사적(세계 군사력)
측면에서는 20위 수준으로 약소국에 가까우며 ~ 20위권 밖에 있는 태국이나 필리핀 등의 동남아
국가들에 비하면, 미국에게 한국군의 대전략적 가치는 상당히 우수합니다. ~ 한국은 세계 7위의
군사강국으로써 전장에 즉시 투입가능한 잘 훈련된 대규모 지상군 병력체계와 효율적 해공군력을
갖춘 국가입니다. ... 따라서 미국의 동아시아 동맹국들 중에 한국은 군사안보역량이 가장 뛰어난
국가라고 할 수 있으며 ~ 노무현 정부시절인 2005년 미국이 우리에게 <전략적 유연성> 합의를
강력히 요구한 이유도 바로 이러한 한국군의 즉각적 전투능력과 잠재력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2009년 출범한 미국의 오바마 정부는 <피봇 투 아시아(pivot to Asia)>라는
미국의 새로운 대전략(Grand Strategy)을 발표합니다. ... 미국 외교의 중심축을 아태(아시아태평양)
지역으로 이동한다는 것인데, 그동안 중동(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등) 지역에 주로 집중되었던 미국의
외교 및 군사안보 역량을 아시아지역으로 이동시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실질은 <중국 견제>
였습니다.

냉전 종식 후, 일극(pax americana)의 주체로써 많은 비용을 지출해가며 세계경찰 노릇을 하던
미국은 2008년 세계금융위기(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로 그동안 세계경찰을 하면서 소요됐던 비용에
더해 천문학적 비용을 추가적으로 지출하게 됩니다. 여기에 중국의 부상(특히 군사력 질적 증강)은
미국의 대전략(Grand Strategy)을 수정.보완하게 만드는데, 그것이 바로 동맹을 활용하여 비용을
최대한 줄이면서 중국을 견제하는 것입니다. ~ 그중에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나토(NATO)와 같은
<아시아 집단안보체제(다자동맹)>인 것입니다. ... 하지만 앞서 보셨듯이 아시아 국가들의 일본에
대한 반감 때문에 이는 당장 성사되기는 어려웠고, 대신 미국이 우선적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전략이 바로 <소다자 동맹체제>였던 것입니다.

◆ 중국(북한 포함) 견제를 위한 미국의 ‘소다자 동맹체제’
(1) 동북아 지역안보 - (미국, 한국, 일본)
(2) 동남아 지역안보 - (미국, 일본, 호주)
(3) 인도양 지역안보 - (미국, 일본, 인도)

신속성과 정확성이 생명인 군사안보 분야에서 이러한 <소다자 동맹체제>가 효율적으로 운영되려면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요소가 바로 <정보공유 및 교류 >입니다. ... ‘동북아 지역’의 소다자 동맹
구축을 위해 오바마 대통령이 정권말기(2016년)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대전략(Grand Strategy)에
따라 강력히 추진했던 정책 중 가장 큰 성과가 바로 <지소미아(GSOMIA)>라고 하는 한.일간 군사
정보보호협정 이었던 것입니다. ... 그리고 이러한 미국의 대전략(Grand Strategy)은 트럼프 정부에서
<인도-태평양 전략>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트럼프 정부가 내놓은 새로운 아이디어가 아니라 오바마,
아니 그 이전 정부부터 조금씩 수정되고 보완되면서 이어진 미국 대전략(Grand Strategy)의 아주 큰
흐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계지도를 펴놓고 미국을 보면 ... 동쪽으로는 대서양, 서쪽은 태평양으로 둘러싸여 있고,
북쪽은 캐나다, 남쪽은 멕시코라는 우방국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미국의 지리적 이점은
그 어떤 나라도 미국 이라는 나라를 군사적으로 위협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 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 세계 최강의 해양세력 미국, 절대로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았던 미국이
지금 나토(NATO), 독일, 일본, 한국 등 최고의 동맹국들을 상대로 엄청난 방위비 분담금 증액을
요구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우리에게는 주한미군 감축 및 철수까지 언급하고 있습니다.
[◆(참고): 작년 8월 발효된 ‘국방수권법’은 2019년 한해를 기준으로하기 때문에 ... 만약 트럼프
대통령이 올해 말까지 결심한다면, 주한미군 숫자를 6,500명 감축하여 2만 2,000명 수준으로 만드는
것은 가능합니다. <주한미군 순환배치> 계획에 따라 내년(2020년) 3월 말까지는 반드시 한국을
떠나야 하는 미군부대가 있으며, 그 떠난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 다시 한국에 들어와야 하는 새로운
미군부대가 있는데, 만약 트럼프 대통령이 올해 안에 한국에 들어올 새로운 미군 부대를 지정하지
않는다면 그걸로 그냥 끝이 납니다. 그럼 현재 2만 8,500명 수준인 주한미군 숫자에서 마이너스(-)
상황만 발생하게 되는 것이죠. 한마디로 주한미군이 자동적으로 감축된다는 것입니다. ~ 따라서
미국은(트럼프) 어쩌면 이 부분을 이번 지소미아(GSOMIA) 연장문제와 방위비 분담금 증액을 위한
‘협상카드’로 활용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지금까지 보셨듯이, 주한미군 감축이나 이동 및 역할 변화는 미국의 세계대전략(Grand Strategy)
하에서 움직이는 부분이므로 우리의 외교력이 발휘되기는 어려운 영역입니다. 더구나 ‘지소미아’는
<소다자 동맹체제>라는 미국 대전략의 핵심이었습니다. ~ 결국 ‘지소미아’ 문제는 우리 외교력을
넘어선 <미국 대전략>에 속한 문제였기에 저는 개인적으로 현 정부가 너무 성급했다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지소미아 문제가 원상복구 되지 않는다면, 그 후폭풍이 상당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돈의 문제는 다릅니다. 외교력은 이럴 때 발휘하는 것입니다. 최근 개도국 지위를 포기한 한국에게
미국의 방위비 분담금 증액요구는 일단 미국이 명분 하나를 얻고 출발하는 셈입니다.(한국은 이제 잘사는 나라다!)
하지만 현재 트럼프 정부의 요구는 아무리 생각해도 비상식적입니다. 따라서 이 부분을 상식선, 이를테면
15~20억 달러($) 수준의 액수로 낮춰 우선적으로 협상테이블에 올려놓고 ~ 여기서부터 협상을
진행하되, 협상과정에서 한국 측의 요구, 예를 들면 ~ 미사일 사거리 지침을 없애거나 한.미 원자력
협정을 개정하여 우라늄 농축을 현행 20%에서 30%이상으로 할 수 있게끔 요구하는 것입니다.
즉 줄건 주되, 최대한 우리도 주는 부분을 상쇄시킬 정도의 군사.경제적 이득을 요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미국의 대전략 범위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에 ~ 우리가 외교력을
얼마나 잘 발휘하느냐에 따라 결과 또한 달라질 수 있습니다.

지난 글(1~4편)에서 보셨듯이 ~ 미국이 일본을 다루는 방식을 보면 느끼는 점이 참 많습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한 번 물어보고 싶습니다. ... 미국입장에서는 한국과 일본에 과연 어떤
성향의 정부가 들어서는 게 이득일까? 좌파적인 정부일까, 우파적인 정부일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아마도 ~ ~ ~ <“미국이 다루기 쉬운 정부”>가 답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생각됩니다.
아니 역사적으로 항상 그러했습니다. 반면 동맹국 입장에서 트럼프 정부는 <예측하기 힘든 정부>
입니다. ~ 동맹을 다루는 방식이 과거의 전통적 방식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해고된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도 트럼프를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 어쩌면 앞서
얘기했던 <주인-대리인 문제(Principal-agent problem)>가 현 트럼프정부 내에서 활발히 작동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예측하기 힘든 정부>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아닌가 생각됩니다.
황당한 수치의 방위비 분담금 요구도 트럼프 정부 내 <비대칭적 상호관계의 경기>가 하나의
원인 제공을 했을 수도 있다는 개인적 추측을 해봅니다.

지난 글(4편-일본의 대미추종과 자주파)에서 얘기했듯이 현 일본 총리 아베의 외조부였던
기시 노부스케는 ‘강성 자주파’ 였습니다. ... 현재 겉으로 보여 지는 아베총리의 모습은 적극적
대미추종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아베의 내면에는 외조부 기시의 정신(자주파)이
아주 강렬하게 착근되어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 평화헌법(9조) 개정으로 정상적 군대 갖기에서
단순하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의 혼이 아베에게 그대로 이어져 미국과의
종속관계를 벗어나 진정하고도 독립적인 군국주의로의 회귀의 염원이 아베의 무의식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됩니다. ~ 그래서 동아시아 안보질서의 가장 큰 변수는 일본의 평화헌법
개정이라 생각됩니다. ... 이는 현실적인 문제로도 도미노처럼 이어집니다. ~ 평화헌법 개정은
연이어 ‘미.일 안보조약 개정’으로, 다시 ‘한.미 안보조약 개정’으로 ... 그리고 미국의 세계대전략 중
하나였던 <소다자 동맹체제>와 이러한 변화는 중국, 러시아, 북한 등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치게
될 것입니다. ~ 결국 동북아 전체를 뒤흔들 대형 사건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이 바로 일본의
평화헌법 개정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번 글을 쓰면서 참고했던 <'결정의 본질'>이라는 책에 나왔던 문장을
소개하는 것으로 글을 마치겠습니다.

< 결정의 궁극적인 본질은 제3자가 이해할 수 없다.
사실, 결정하는 사람 자신도 모를 때가 많다. 의사결정 과정에는 가장 깊이 관여한
사람조차도 알 수 없는 어둡고 혼란스러운 부분이 항상 존재하기 마련이다. - 존F. 케네디 >

< 나는 공직에 참여하지도 않고 역사를 기록하는 지식인과, 생각하지도 않고
중대한 결정에 참여하는 정치인을 만난 적이 있다. 전자는 항상 일반적인 원인을 찾는
경향이 있는 반면, 후자는 일관성이 없는 일상을 살면서 모든 것이 특정 사건 탓이고
자신이 잡아당기는 밧줄이 세상을 움직인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둘 다 세상을
제대로 모르는 것 같다. - 알렉시 드 토크빌 >
============




[@ 사상, 이념, 이데올로기(Ideologie) ... 어떤 단어를 사용하든 상관없습니다.
중요한건 가치관이 개입되는 글을 쓸 때면 평범했던 글자 하나와 단어 하나도 어느새
거대한 빙산으로 바뀌어 비교적 짧은 구절하나 심는 작업도 마치 썰매개가 그 큰 빙산의 무게를
짊어지고 극한의 추위 속에서 수십, 수백키로를 달려 구토 직전의 노동(뜀박질)을 체험 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내면은 용암이 분출하듯 주체할 수 없는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차올라
온 몸의 신경을 타고 밖으로 그 열기를 내 뱉습니다. 이렇게 극저온의 껍질과 극고온의 내면을 오고가며
어느 정도 글이 완성될 즈음엔 정작 내 정신은 어느 온도에 맞춰야 안정이 될까 불안하기도 합니다. ...
글을 마무리 하며 모두분들이 각자 평안함을 느끼는 적당한 온도를 찾기를 바랍니다.
이와 더불어 단순한 사상의 기능공이나 가치관의 숙련공이 되지 않기를 기원합니다.]
-------

응원글 주시는 분들마다 ~ 한분 한분 고맙다는 답글을 하고 싶지만
그럴수록 스크롤 압박만 더 커져 다른 분들의 불편이 우려됩니다. 다만
주시는 응원글 아래 투명하게 "고맙습니다"라는 답글이 달려있는셈 쳐주시면
저도 마음이 편할것 같습니다. ~

◆ 또 하나의 냉전, 한.미.일 관계와 그 이상의 경계에서 - (4) 국제 정치편 [by. 물파스]

(@ 한일 간 군사정보보호협정을 뜻하는 '지소미아(GSOMIA)' 종료시한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입니다. ~ 한국과 미국은 방위비 분담금 협상에서 치밀한 수싸움을
계속 진행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한국과 미국은 각각 총선과 대선이라는 본격적인 선거모드에
돌입한 상황입니다. ~ 북미간 비핵화 협상 또한 지지부진한 상황입니다.

미국이 왜 그렇게 지소미아 파기에 대해 우려하는지,
미국이 왜 그렇게 황당한 수치의 방위비 분담금을 요구하는지 ... 이에 대한 근본적 이유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 분량이 너무 많아 이야기는 5편으로 나눠서 게시물이 새로
업데이트 될 때마다 한 편씩 올려볼 생각입니다. ~ 아래는 도움 받은 자료와 각 편마다 들어있는
중심내용을 소개한 것입니다.)

<@ 도움 받은 자료들 >

(국제분쟁의 이해/ 조지프 나이/ 한울 출판)
(거대한 체스판/ Z.브레진스키/ 삼인 출판)
(포스트콜로니얼/ 고모리 요이치/ 삼인 출판)
(일본 전후 정치사/ 이시카와 마스미/ 후마니타스 출판)
(결정의 본질/ 그레이엄 앨리슨, 필립 젤리코/ 모던아카이브 출판)
(인간.국가.전쟁/ 케네스 왈츠/ 아카넷 출판)
(냉전의 역사/ 존 루이스 개디스/ 에코리브르 출판)
(미국의 아시아 회귀 전략/ 이용인, 테일러 워시번/ 창비)
(전환시대의 논리/ 리영희/ 창비)
~ 그 외 한국은행, KDI, 국회 등

(1) 경제편 - 일본의 경쟁력과 위기
(2) 국제정치 - 패전국 일본에 대한 GHQ 점령초기 상황
(3) 국제정치 - GHQ 점령기의 일본 신헌법 제정과정과 자민당 탄생과정
(4) 국제정치 - 일본의 대미추종과 자주파 그리고 신(新)미.일안보조약
(5) 국제정치 - 미국의 세계대전략(Grand Strategy)의 변화 과정과 동맹(alliance)의 의미
~~~~~~~~~

1편: 지난 게시물중 <반일 불매운동 근황>이라는 게시물에 올려져 있습니다.
2편: 지난 게시물중 <1991년, 인터넷의 발명과 인터넷 브라우저 전쟁>이라는 게시물에 올려져 있습니다.
3편: 지난 게시물중 <국민이 묻는다 참가자들>이라는 게시물에 올려져 있습니다.
==========


[◆ 또 하나의 냉전, 한.미.일 관계와 그 이상의 경계에서 - (4) 국제 정치편 ]
- 일본의 대미추종과 자주파 그리고 신(新)미.일안보조약

<기시 노부스케>는 총리에 오르자마자 가장 먼저 <외교>에 힘을 쏟았습니다. ... 1957년 5,6월
동남아시아와 미국을 방문했는데, 특히 미국 방문에서는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미일 신시대>를
주창하며 공동성명을 발표합니다. 당시 기시의 미국 방문의 실제 목적은 요시다 정권시절 체결했던
<구(舊)미일안보조약>을 개정하는 것이었습니다. ... 오늘날 미일 관계를(특히 안보관계) 제대로
이해하려면 기시 노부스케가 미국과 체결한 <신(新)미일안보조약>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기시정권 때 개정된 <신(新)미일안보조약>이 지금까지 이어져오며 오늘날 미일안보관계의 기초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알려진 ‘기시 노부스케’의 이미지는 요시다 시게루와 마찬가지로 대미 추종적이었습니다.
앞서 잠깐 언급했지만 일본의 보수합동, 즉 <자민당>의 탄생배경에는 미국 CIA의 정치자금 지원도
큰 부분을 차지했는데, 이에 대해 미국의 역사학자 ‘마이클 샬러(Michael Schaller)’는 다음과 같은
얘기를 합니다.

“미국무차관보인 로저 힐즈먼(정보 담당)에 따르면, 1960년대 초까지 CIA에서 일본 (보수)정당과
정치인에게 제공된 자금은 매년 200만~1,000만 달러 수준이었다.“ - 마이클 샬러(Michael Schaller)

1960년대 초, 미국 CIA가 자민당을 비롯한 일본 정계에 자금 지원을 했다는 사실은 훗날 미국
정부문서 공개와 함께 1994년 10월 9일자 ‘뉴욕 타임즈’ 보도를 통해 모든 내용이 명백한 사실로
밝혀집니다. ... 이렇듯 자민당 창당초기에 미국 CIA의 자금 지원이 있었다는 사실은 기시 내각이
<대미 추종적> 이미지로 각인되기에 충분한 근거를 제공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예상과는 다르게
기시 노부스케는 ‘하토야마 이치로’, ‘이시바시 탄잔’처럼 강성 <자주파(자주노선)>였으며, 동시에
일본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대단히 실리적인 전략가이기도 했습니다.(@ 쇼와시대 요괴)

이시바시 내각에서 외무상을 지냈던 기시 노부스케는 요시다 시절의 <구(舊)미일안보조약>이
미국에만 유리한 조약이라 생각했습니다. ... 형식상 GHQ(연합국총사령부) 점령은 끝난 상태였지만
실질은 여전히 미국이 일본을 지배하고 있다는 생각이 기시의 의식 속에 계속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기시 노부스케에게 <구(舊)미일안보조약의 개정> 문제는 기시 본인의 당위적 신념과도
맞닿아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시 노부스케의 회고록을 보면 우리는 이에 대한 기시의 신념의
농도를 느껴볼 수 있습니다.

[ Q: “3년 5개월이라는 집권기간 동안 기시 내각의 전체 업무를
10으로 했을 때, ‘안보조약 개정’ 문제는 어느 정도의 비중을 차지했었나?“ ]

[ A: “글쎄 아마도 7이나 8정도 비중은 차지하지 않았었나 생각된다.
하토야마나 이시바시 정권에서도 부분적으로 안보조약 개정을 미국에
요구했었지만, 그때마다 미국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그래서 미국을 상대로
안보조약을 바꾸는 일은 상당한 용기와 추진력과 인내가 필요했다. 뿐만 아니라
야당의 견제와 여당(자민당)의 당내 의견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 - (기시 노부스케 회고록 中)

앞서도 보셨겠지만 <자민당>은 자유당이라는 대미 추종의 요시다 진영과 자주파인 하토야마의
민주당이 모여 보수합동으로 탄생한 정당입니다. ... 그래서 ‘구안보조약 개정’처럼 미국의 심기를
건드리는 정책이 등장할 때마다 이에 반대하는 의견(대미 추종파)이 상당히 많았던 상황입니다.
그럼 이쯤에서 기시 노부스케의 정치적 사명이자 당위적 신념인 <신(新)미일안보조약>에 대한
내용을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기시 노부스케는 <헌법 9조>와 <구(舊)미일안보조약>을 개정해야만 미국과의 불평등한 관계, 즉
종속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헌법 9조>를 개정해야만 정상국가 수준의
군대를 보유하게 되고, 이러한 군사력만 뒷받침 되어준다면 안보조약 또한 편무적(일방적) 관계에서
<상호 방위>라는 좀 더 대등하고 쌍무적인 관계로 재정립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 하지만
통합 사회당을 비롯한 좌파진영의 의석수가 1/3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개헌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었으며, 따라서 기시에게 당장 가능한 것은 <안보조약> 하나뿐이었던 것입니다.

기시 내각이 생각했던 <신(新)미일안보조약>은 ‘구안보조약’에 비해 분명 일본에 유리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 먼저 주일미군의 이동과 배치, (군사)행동에 대해 미일 양국 간 사전 협의를
의무적으로 하자는 내용이 포함됐습니다. 그 전까지 미국은 일본영토 내에서의 주일미군에 관한
그 어떤 부분에 대해서도 일본 정부에 보고나 통보할 의무가 없었습니다. 이에 대한 좀 더 세밀한
내용은 <구(舊)미일안보조약>의 실무조항 격인 <미일행정협정(1952년 체결)>을 살펴보면 됩니다.

@ 일본은 미국에 대하여 안보조약 제1조의 목적 수행에 필요한
시설과 구역(미군기지) 사용을 허가한다.

@ 일본과 미국은 시설과 구역을 일본에 반환할 수 있고, 또는
새로운 시설과 구역을 제공할 수 있다.

< “ ~ 할 수 있다.”> ... ‘행정협정’의 내용을 보면 조항의 상당부분이 <“ ~ 할 수 있다.”>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는 일종의 ‘가능성’을 의미하는데, 쉽게 말해 <미국의 의지(선택)>에 따라
양국의 권리와 의무가 최종적으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미국이 원하면 일본은 언제든지 미국에
일본영토, 즉 미군 기지를 제공해야 하며, 기지(영토)반환 또한 미국이 원해야만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렇듯 <행정협정>에는 주일미군의 ‘주둔권리’와 그 이외의 주일미군에 관련된 다양한 실무적
내용들이 상당히 디테일하게 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기시는 우선적으로 큰 틀의 <안보조약>을
개정한다면 이후 <행정협정>은 수월하게(일본에 유리하게) 풀어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또한 기시는 본인의 생각대로 행정협정까지 마무리가 잘 된다면 대담하게도 <주일미군 철수>까지
가능하리라 생각 했습니다.

[ “주일미군을 철수시키고, 긴급사용 시 필요한 미군 기지만 제공할 것을
제안하였다. 10년 후 오키나와와 오가사와라 군도 내 권리와 권익을 일본에게
반환하도록 원대한 제안도 하였다.“ - (기시 노부스케 회고록 中) ]

기시의 적극적인 미일안보조약(구안보조약) 개정의지에 결국 미일 양국은 <구(舊)미일안보조약>을
다시 검토하기로 합의를 합니다. ... 미국은 일본의(기시내각) 요구를 일정부분 수용하는 조건으로
핵심내용 하나를 <신(新)미일안보조약>에 추가합니다. 그것은 주일미군이 일본 이외의 ‘극동지역’
방위에도 포괄적으로 개입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는 일본이 미국의 세계전략(동아시아 전략)에
아주 깊숙이, 그리고 자동적으로 편입하게 된다는 의미였습니다. ... 냉전체제 상황 하에서 일본은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미국과 연계된 전쟁(열전)에 자동개입 함으로써 동아시아지역의 긴장을
고조시키는 문제국가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 여기에 기시 노부스케의 간절한 자주노선 의지는
야당 및 반대 측 의견을 모두 무시하고 <신(新)미일안보조약>을 강력하게 밀고나가게 했습니다.
[@ 기시의 ‘자주노선 의지’란 결국 <‘군국주의’의 회귀>에 대한 기시 노부스케의 간절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1960년 1월 6일 미일 양국은 <신(新)미일안보조약>에 대해 잠정적 합의를 하고, 19일 워싱턴에서
공식적으로 안보조약 개정에 대한 조인을 하게 됩니다. ... 새로운 안보조약의 비준은 큰 문제없이
통과될 것으로 예상됐습니다. 당시 자민당의 중의원 의석은 288석으로 압도적 다수를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표면적으로 보면 <신(新)미일안보조약>은 기시의 의지가 상당부분 반영되어
마치 일본에 유리하게 개정된 일종의 외교적 승리로 비춰졌습니다. 그러나 <신(新)미일안보조약>의
실질을 따져본다면 ~ 앞서 언급했듯이 미국의 세계전략(동아시아 전략)에 일본이 편입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일본 전역에서 소위 <안보투쟁>으로
이름 붙여진 ‘안보조약 개정저지 운동’이 불길처럼 타오르게 됩니다.

사회당을 비롯한 진보진영에서는 신안보조약이 체결되기 이전부터 쉬지 않고 안보조약 개정의
위험성을 국민들에게 알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959년 3월부터 사회당과 한국의 민노총격인
<총평(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 그리고 <원수협(일본의 대표 반핵단체.전국조직)> 등의 130여개
단체가 <안보조약개정저지국민회의>를 결성하게 됩니다.
[@ 총평(1950년 7월 12일 결성): 일본의 노동운동은 ‘총평’이전, 즉 패전 이후 주로 공산당이
주도권을 잡고 활동해왔었습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상당수 조합 및 조합원들이 ‘민주화동맹’을
맺고 새로운 노동조직을 결성했는데 그것이 바로 ‘총평(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입니다. 더불어
반공적 성격이 강하다보니 총평 발족 당시 미국정부와 GHQ, 그리고 미국의 최대 노동연합인
<미국노동총연맹(The American Federation of Labor, AFL)> 등의 지원이 많았었습니다. ]

<신(新)미일안보조약>에 반대하는 움직임은 기시정권의 예상을 벗어나 전국적으로 불타올랐습니다.
특히 학생과 지식인층이 대거 참여하면서 <안보투쟁(반대운동)>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는데,
이는 결국 <반(反) 기시정권> 운동으로 전이됩니다. ... 그러다가 1960년 6월 15일 <안보투쟁>은
정점에 다다릅니다. ~ 도쿄대 여학생 ‘시라카바 미치코’가 시위과정에서 사망을 한 것입니다.

[◆ 전학련(전일본학생자치회총연합) 국회 내부로 난입.
도쿄대학 여학생 ‘시라카바 미치코’ 사망. ~ 부상 4백 명, 경관 최루탄 사용.
6.15 행동일 저녁, 국회 데모에 나선 전학련 주류파 약 7천여 명은 중의원 뒷문으로
몰려갔다. 국회 구내에서 경찰관과 부딪쳐 난투극을 벌였다. 전학련 주류파 약 4천명은
국회 정원을 점거하여 항의집회를 계속했다. - (1960.6.15. 아사히 신문) ]

‘시라카바 미치코’의 사인은 흉부 압박과 뇌출혈로 판명되었고 ... 미치코의 사망은 불에 기름을
부은 듯, 그동안 시위에 참여하지 않았던 수많은 사람들까지 결집하게 만들었습니다. ... 3일 뒤인
6월 18일, 일본 정치역사상 최대 규모인 50여만 명의 시위대가 국회와 수상 관저를 둘러싸고
안보조약 개정 저지와 기시정권 타도를 외쳤습니다. 하지만 결국 <신(新)미일안보조약>은 다음날인
6월 19일 오전 0시, <“참의원이(중의원 가결 후) 30일 이내에 의결하지 않을 경우 중의원 의결을
국회의 결의로 간주한다.”>는 ‘예산과 조약에 관한 헌법 규정’에 의해 자동 승인됩니다. ... 더불어
기시 내각은 비준서 교환을 끝낸 6월 23일 총사퇴합니다. ~ 기시 정권의 사퇴로 일본 정치사에서
가장 뜨겁고 격렬했던 <안보투쟁>또한 차갑게 식어버립니다.

<안보투쟁>으로 전학련과 총평은 자신들의 요구사항 중 하나였던 ‘기시내각 타도’에는 성공했으나,
투쟁의 본질인 안보조약 개정 저지에는 실패합니다. 그리고 이때 개정된 <신(新)미일안보조약>이
오늘날까지 미일 안보관계의 기초로서 계속해서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 1960년 <안보투쟁>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세력은 바로 전학련에 속해있던 <분트(Bund)>라는 조직입니다. 독일의 국채를
뜻하기도 하는 <분트(Bund)>는 ‘연대’를 의미하기도 하는데, 전후 일본에서는 공산주의자 동맹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였습니다. ~ 전학련은 GHQ 점령기 때인 1948년 9월, 일본 전국의 국공립 및
사립 145개 대학의 학생자치회가 결성한 연합 조직으로, 정식명칭은 <전일본학생자치회총연합>
입니다. 초창기 전학련은 일본 공산당의 강력한 지휘아래서 한국전쟁 반대와 같은 반전 및 평화운동
등을 전개해 나갔습니다. 그러다가 1955년 이후부터는 학생들 보통의 요구, 즉 <일상성 투쟁>을
시작하면서 독자적 조직으로 성장해 나갑니다. 그리고 앞서 보셨듯이 1960년 <안보투쟁>에서
운동(투쟁)의 정점을 찍는데, 안보투쟁 직전 시기에 전학련 학생들이 일본 공산당과 결별하면서
<분트(Bund)>를 조직합니다. ... 국회 의석을 가진 정당과 결별했으니, 당연히 학생들로만 조직된
분트(Bund)의 자금사정은 상당히 어려워졌습니다. 거리로 나가 투쟁기금을 모으기도 했지만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재계가 나서서 전학련(분트Bund)에 자금을 지원합니다. ... 만약
당시 전학련에 외부의 자금지원이 없었다면 1960년 그 뜨거웠던 안보투쟁도 그냥 흐지부지 끝났을
겁니다.

전학련(분트Bund)에 자금을 지원한 재계의 핵심 인사로는 <이마자토 히로키(일본정공 회장)>와
<나카야마 소헤이(일본흥업은행 부회장)> 등이 있습니다. 이들은 보수합동(자민당 탄생)을 종용했던
‘경제동우회’ 창립 멤버들이며, 경제동우회는 일본의 대표적인 대미추종 모임입니다.(경영자 그룹)
이 때문에 분트(Bund)가 자금걱정 없이 <안보투쟁>에 전념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자금지원의
최종적 배후에는 미국이 크게 관여하고 있었다는 견해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추론에는 많은
의문점이 있습니다. 우선 <신(新)미일안보조약>은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이 거의 대부분 반영되어
미국 입장에서는 만족할만한 조약이었습니다. 더구나 기시 정권의 <재군비(자위대 강화)> 의지는
일본 산업계에도 상당한 기회(기업성장)가 될 거라 예상됐습니다. 따라서 미국이나 일본재계가 굳이
기시 정권을 반대할 그 어떤 합리적 이유는 없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보조약
개정 반대와 기시정권 타도를 외쳤던 <전학련(분트bund)>에 미국은 자금지원을 용인했던 것입니다.

~ 왜일까?

◆ 앞서 자민당의 탄생배경을 살펴보았듯이, 전후 일본보수를 상징하는 대표적 보수정당이 바로
<자민당>입니다. ... 하지만 자민당을 분해해보면 그 속에는 <대미추종>의 요시다 진영(자유당)과
<자주노선(자주파)>의 하토야마 진영(민주당)으로 나뉘며 ... 오늘날까지도 자민당 당내에는 여러
<파벌(계파)>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안보투쟁 당시의 기시정권은 강성 <자주파>였습니다.
일본이 아시아에서 공산주의 확산을 막는 방파제 역할을 하려면 <재군비(자위대 강화)>는 반드시
필요했던 일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이라는 견고한 ‘틀(Frame)’ 안에서만
성립되는 논리입니다. ~ 그런데 기시는 일본만의 독자적인 <자주노선(군국주의 회귀)>을 미국이
만든 ‘틀(Frame)’ 바깥에서 추진하려 했던 것입니다. ... 더불어 기시의 당내 기반이나 관료 장악력이
미국의 예상보다 강해서 정권의 내부 분열을 이용해 붕괴시키려는 전략은 큰 효과가 없을 거라
예측되었습니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바로 <반정부 시위>같은, 주로 독재국가를 무너뜨릴 때
활용되는 방법이었습니다. ... 그리고 재계(경제동우회)를 통한 외부자금 지원이 기시 정권 붕괴의
강력한 도구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안보투쟁 이후, 기시 정권이 물러난 자리에 <‘이케다 하야토’ 내각>이 들어섭니다. 앞서 계속해서
언급했지만, 자민당에는 <대미추종 vs 자주파(독자노선)>라는 정치독립과 종속 성향으로 구분되는
파벌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당인파 vs 관료파>라는 소위 <출신별 파벌>까지 얽혀있습니다.
물론 일본의 사실상의 파벌(계파)을 언급할 때는 한국의 동교동계(김대중), 상도동계(김영삼), 친노,
친박 처럼 인물중심의 파벌을 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따라서 일본의 파벌을 구분할 때는 먼저
인물중심의 계파를 따져본 후, 여기에 대미추종과 자주노선, 그리고 출신별 파벌을 더해야 합니다.
출신 파벌의 하나인 당인파는 처음 정치를 ‘정당’에서부터 시작한 사람들을 뜻합니다. 반면 관료파는
관료출신의 정치인들을 의미하는데, 기시 노부스케(56.57대 총리), 이케다 하야토(58.59.60대 총리),
사토 에이사쿠(61.62.63대 총리) 등이 바로 관료파 정치인들입니다. ... 이 때문에 기시의 후임으로
총리 자리에 오른 <이케다 하야토>는 당시 정치부 기자들로부터 “기시의 아류” 라는 평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케다는 기시와는 정반대의 정책을 추진합니다. ... 기시와 같은 관료파임에도
개헌을 포기한다는 태도를 취하며, ‘안보(자주노선)’ 측면보다는 <“10년 안에 국민소득을 2배로”>
같은 슬로건을 내세우며, 과거 <요시다 노선>처럼 정책의 방점을 <경제>에 찍습니다.(@ 대미추종)
기시 정권하에서 안보이슈로 상당한 피로감을 느끼고 있던 국민들에게 ‘경제’에 방점을 찍은
이케다의 신정책은 성공적이었고, 이에 뒤질세라 사회당 또한 <“4년 안에 국민소득 1.5배”>라는
슬로건으로 맞받아치며 대응합니다. 이로써 1960년 뜨겁게 타올랐던 ‘안보투쟁’의 열기는 이케다
정권에서 시나브로 빠르게 식어버립니다. ... 기시와 같은 파벌(관료파) 임에도 불구하고 이케다는
‘자주노선’이 아닌 <대미추종>을 선택한 것입니다. [@ 이케다 내각이 끝난 후, 1964년 11월 9일
관료파였던 ’사토 에이사쿠‘가 총리(수상) 자리에 오르는데, 이때 사토 내각은 이케다의 “대미추종”을
과감히 버리고, 기시 때와 같은 “자주노선”을 택합니다.] ... 참고로 이케다 내각이 들어설 당시의
미국의 생각이(수뇌부 분위기) 어땠는지는 미국의 역사학자 마이클 샬러(Michael Schaller)의 저서
‘미일 관계는 무엇이었나?’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습니다.

[◆ 1960년 6월 6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서 CIA 대표 에모리는 기시가 사임하고,
가능하면 요시다가 다시 복귀해야 한다고 말했다. CIA는 자민당에 대한 재정적 영향력을
이용해 기시를 대신할 좀 더 온건한 보수 정치가로 새로운 내각을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후 맥아더 주일 대사(맥아더 2세, 맥아더 장군의 친조카)는 요시다와 만난 자리에서
기시를 대신에 수상(총리)을 제의했으나, 요시다는 본인 대신 ‘이케다’와 ‘사토’를 추천했다.
6월 21일 이케다는 맥아더 대사를 찾아가 기시의 뒤를 잇고 싶다며 간절하게 부탁했고
맥아더 주일대사도 이케다가 미일 협력의 충실한 신봉자이며, 가장 뛰어난 수상 재목이라
평가했다. - (마이클 샬러, 미일 관계는 무엇이었나? 中) ]

샬러의 책을 보면 ... 1960년대 까지도 백악관, CIA, 주일대사 등 미국의 핵심 기관 모두에게는
대미추종에 가장 적합하고 적극적이었던 요시다의 향수가 오랫동안 남아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같은 파벌임에도(관료파) 자주노선이 아닌, 대미추종을 선택했던 이케다의 권력욕과 미국의
요시다 향수가 더해져 <‘이케다 하야토’ 내각>이 탄생한 것입니다.

오늘날의 일본을(전후 일본) 정확히 이해하려면 <자민당 탄생 과정과 정치 파벌(계파)>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전후 일본을 지금까지 움직여온 사실상의 권력주체가 바로 자민당이기 때문입니다.
이 글에서 <요시다 시게루 - 하토야마 이치로 - 기시 노부스케 - 이케다 하야토>로 이어지는
일본의 핵심 정치인들을 언급했던 이유는 이들이 자민당의 탄생 과정과 대미추종, 자주파(독자노선),
관료파, 당인파 같은 일본 정치파벌의 역학관계를 가장 잘 설명해주기 때문이었습니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의해 소위 ‘평화국가’로 새롭게 태어난 일본은, 그 이후로 지금까지
대미추종과 자주노선을 수시로 번갈아가며 정권을 이어오고 있었습니다. ~ 그러다가 1980년대부터
서서히 대미추종 파벌이 강세를 보이기 시작했고, 1990년대 후반부터 ‘기시 노부스케’와 같은 강성
자주파는 사라졌고, 선택적 대미저항과 대미추종이 계속됐습니다. ... 요시다 이후, 대미추종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줬던 대표적 사례는 1982년 11월 27일에 취임한 <‘나카소네 야스히로(71.72.73대)>
총리였습니다.[@ 선택적 대미저항은 미국과 적절한 타협을 하면서도 다른 부분(특히 안보)에서는
대미저항(자주적 성격)적 모습을 보여줍니다.]

나카소네 얘기를 하려면, 나카소네 이전의 총리였던 <스즈키 젠코(70대 총리)>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 1980년 7월 17일 일본 70대 총리로 취임한 <스즈키 젠코>는 대미추종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자주파도 아니었으며, 전반적인 대미 스탠스는 <선택적 대미 저항> 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총리 취임 후, 이듬해인 1981년 5월 미국을 방문한 스즈키 총리는 기자회견에서
논쟁을 불러일으킬만한 매우 충격적 발언을 하게 되는데, 이때에 기자회견으로 일본 정계가 발칵
뒤집힙니다. ... <“미일 동맹에 반드시 군사적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라는 미국입장에서 보면
그야말로 괘씸한 발언을 한 것입니다. 이는 기시 정권 때 개정한 <신(新)미일안보조약>을 부정하는
발언으로 오해될 수 있었습니다. ‘미일 군사협력’ 이라는 명목 하에 일본 자위대가 미국의 요청이
있을 때마다, 또 미국의 세계전략을(동아시아 전략) 위해 활용되는(자위대 파견 등) 것을 스즈키는
처음부터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더불어 스즈키 총리의 최우선 외교과제와 외교 철학은
<아시아 국가들과의 우호관계 강화 및 아시아에서 일본의 정치적 입지강화> 였습니다.

[@ 미국과 관계를 악화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일본은 아시아 국가로서 이들 국가와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 미국, 유럽, 또는 소련, 중국처럼 3국 혹은 4국으로 분리된 국제정세가
시작될 것이다. 일본은 아시아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 아시아의 존경과 지원, 이해와 협력을
얻은 일본이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주장 및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한다. 아시아 외교 및 아시아
우호관계를 강화하는 것이 외교의 최대 목표다. - (총리 스즈키 젠코. 일본 정치를 말하다 中)]

미국에서의 스즈키 발언이후, 일본 외무성은 국내외 언론들을 상대로 부랴부랴 수습하기 바빴고,
이 사태로 스즈키는 “안보문제를 전혀 모르는 무식한 수상(총리)” 이라는 이미지가 박혀버립니다.
앞서 <선택적 대미저항>이라고 했던 ‘스즈키 젠코’ 총리는 사실 <평화주의자>에 더 가까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스즈키 본래의 신념이 처음부터 ‘평화주의’는 아니었고 당시의 냉전질서가
그를 <평화주의자>로 이끌었다는 전문가들의 견해가 많았습니다. 즉 외부요인에 따른 신념의
변화였던 것이죠. ... 그렇다면 당시의 냉전 상황은 어땠으며, 그로인해 일본이 느꼈던 중압감의
무게는 어느 정도였을까?

미국이 자신들의 압도적 군사력을 활용하는 보편적인 방법은 대표적으로 두 가지입니다. ~ 하나는
전 세계 퍼져있는(65개국 800여 미군기지) 해외 미군부대를 활용하는 것이며(@ 여기서는 ‘주일미군’)
다른 하나는 동맹국의 군대를(자위대, 한국군 등) 활용하는 것입니다. ... 참고로 미국은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서 자위대를 활용하고자 여러 번 시도했었습니다. 그때마다 ‘헌법 9조’를 근거로 내민
일본의 저항에 부딪혀 자위대 활용계획은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 심지어 일본의 적극적 대미추종
파벌들조차 직접적 전투에 참여하는 자위대 파병(전투병)에는 거부감을 나타냈습니다. 평화적 재건
목적이나 의료 같은 전투 목적 이외의 파병에는 어느 정도 긍정적 의사를 내비쳤으나 ... 직접적인
전투병 파병에는 일본도 신중한 태도를 보였던 것입니다.

1970년대 말부터 소련은 오호츠크 해 인근에 원자력 잠수함을 배치하고 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1970~80년대는 냉전이 절정에 이른 시기였습니다. ... 당시 소련의 기술력이라면 오호츠크 해 깊은
바다 속에 숨어있는 잠수함에서 미사일을 발사하여 8천 킬로미터 떨어진 미국 본토에 핵미사일을
떨어뜨릴 수 있었습니다.(@ SLBM) ... 때문에 미국이 일본 자위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싶었던 건
어쩌면 너무나 당연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 더불어 대미추종 파벌이 강세를 보이던 시기였기
때문에 미국은 자위대를 활용하고자 하는 속내를 계속해서 공공연하게 내비쳤습니다.
[◆ 미국을 포함, 전 세계가 가장 두려워하는 무기가(무기체계) 바로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 즉
‘SLBM’(Submarine-Launched Ballistic Missile) 입니다. ~ 사전포착이 매우 어려운(불가능에 가까운),
잠수함에서 발사되는 미사일공격 체계는 이동성이 뛰어나기 때문에 공격지점에 대한 선택이 자유롭고,
더 중요한 것은 공격 후 재빨리 다른 곳으로 회피하여 생존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상대에게 본토가 선제 핵공격을 받는다고 해도, 바다 속의 핵전력(SLBM)은 그대로 살아남아
동일한 핵 보복이 가능한 체계이기 때문에(@보복공격 전력의 핵심!) ... 냉전시기 미국과 소련은
각각 상대의 이러한 SLBM 전력체계 때문에 서로를 쉽사리 위협하지 못했고, 따라서 공포의 균형
상태만을 생성했던 것입니다. 이를 소위 <'상호확증파괴(MAD, Mutual Assured Destruction)'>
이론이라고 합니다. ~ 상대가 나를 선제핵공격 한다면, 살아남은 나의 핵전력(SLBM)이 다시 상대를
공격하게 되고, 또 다시 상대의 살아남은 핵전력(SLBM)이 나를 공격하고 ~ ~ 이러한 쌍방 간의
상호적 공격의 반복으로 종국에는 모두가 전멸되는(파괴의 점진적 확대. 상호확증파괴) 상황까지
갈 수 있기 때문에, 쌍방모두에서 기계적인 핵억제가 일어난다는 이론이 ‘상호확증파괴’ 입니다.
결국 <상호확증파괴>가 성립되는 양국 간에는 핵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인데, 이는 냉전시기
미국과 소련의 대립이 그것을 실제로 증명했습니다. ... 참고로 현재 SLBM 체계를 완성한 국가로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중국 등이 있으며, 최근 북한의 SLBM(북극성3형) 발사 소식이 전해지자
그동안 다른 미사일 발사에는 큰 반응을 보이지 않던 유럽과 미국이 유엔 안보리(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 하는 등 ... SLBM 발사에는 상당히 민감해하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속사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이나 지상에 배치된 핵무기는 감시(첩보)위성으로 비교적 쉽게 포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다 속 잠수함에서 발사되는 SLBM은 사전 포착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당시에 소련의 SLBM을 사전에 막고 싶었던 미국은 잠수함을 수색.탐지할 항공기가 절실했었습니다.
그리고 그에 꼭 맞는 비행기가 바로 <P-3C>라는 ‘대잠초계기’였는데 ... 미국은 일본이 <P-3C>를
대량으로 구매해 오호츠크 해에 숨어있는 소련 잠수함을 찾아주기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자위대 파병(전투병)처럼, 자칫하면 미.소 양강의 전쟁에 일본이 어쩔 수없이 휘말릴 수
있는 위험이 있었습니다. ... 이러한 냉전 분위기 속에서 스즈키의 충격적 발언은 미국을 분노하게
만들었고, 심지어 미국은 ~ “스즈키는 총리 그릇이 아니다.”, “바보 같은 총리” 라는 거친 비난까지
쏟아냈습니다.

스즈키 이후 ... 1982년 11월 27일 <나카소네 야스히로>는 일본의 71대 총리에 취임합니다.
취임 후, 두 달도 안 된 시점인 1983년 1월 17일에 나카소네는 미국을 방문하여 레이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습니다. 이렇게 서둘러 미일 정상회담을 추진한 이유는 스즈키 발언으로 심기가 많이
불편했던 미국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였다는 얘기가 많았습니다. ... 워싱턴에 도착한 나카소네는
다음날 ‘워싱턴포스트’ 사주인 그레이엄 여사의 조찬모임에 초대됩니다. ~ 그리고 조찬모임에서
나카소네 총리는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합니다.

<◆ “적군(소련)의 침공에 대비해 일본열도 전체를 큰 성벽을 세운 거대한 배처럼 만들겠다!”>

이것이 그 유명한 나카소네의 <불침항모(不沈航母)> 발언입니다. 공산주의 팽창을 막는 방파제,
즉 소련의 태평양 진출을 막기 위해서 일본열도 전체를 침몰하지 않는 항공모함으로 만들겠다는
의미인데 ... 물론 이 발언은 미국의 세계전략(동아시아 전략)에 일본이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는
일종의 상징적 표현이었습니다. 또한 미국을 위한 일본의 ‘적극적 협조’는 단순히 말에서 그치지
않았고, 미국이 원했던 대로 나카소네는 ‘대잠초계기’ <P-3C>를 100기 이상 구입합니다. ... 이때
미국은 일본에게 일방적으로 <P-3C> 구입을 요구(강매)한 것은 아닙니다. 미국도 나름의 명분을
마련했습니다.

< “소련이 중동석유 운반 항로인 해상교통로(시레인.Sea Lane)를 공격할지 모르니까
일본이 P-3C를 대량으로 구매하여 시레인 방위를 책임지고 맡아줬으면 좋겠다.“ >

만약 당시 소련이 실제 일본을 공격하고자 했다면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이면 충분했습니다.
결국 일본의 <P-3C> 구입은 일본을 방위하기 위한 목적이 아닌, 미국의 안전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나카소네의 <불침항모(不沈航母)> 발언과 <P-3C> 구입은 스즈키 총리 때 쌓인 미국의 불신을
한 번에 씻어냈습니다. [@ 나카소네는 플라자합의로 엔고의 토대를 만든 인물이기도 합니다.]

<◆ “일본은 자신들의 돈으로 미국이 판매하는 무기(P-3C)를 구입해, 미국을 지키는데 사용한다!”>

나카소네의 대미추종 사례는 우리에게 <동맹(alliance)> 개념에 대한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줍니다.
지역안보라는 명분과 우호적 동맹관계 유지를 위한 행위가 국익과 상충되거나 혹은 큰 효용이 없을
때에 과연 어떤 선택이 최선이며 바람직한 것인지 한번쯤은 진지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이후에도 일본의 대미 스탠스는 대미추종과 자주노선, 그리고 선택적 저항을
번갈아가며 정권을 이어갔는데 ... 총리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다케시타 노보루(74대), 선택적 저항 – (금융은 협력, 자위대 협력은 거절)
@ 미야자와 기이치(78대), 자주 노선 - (기본적 사항은 협조, 클리턴 정권에 대등외교 교섭)
@ 호소카와 모리히로(79대), 자주 노선 - (미일 동맹 보다는 다자 및 다각적 안보 중시)
@ 하시모토 류타로(82.83대), 선택적 저항 - (미국 국채 대량 매도를 희망)

@ 고이즈미 준이치로(87.88.89대), 대미추종 - (자위대 해외파견, 우정민영화 등 미국식 신자유주의
적극 도입)

@ 후쿠다 야스오(91대), 선택적 저항 - (아프가니스탄 육상자위대 파견거부, 미국 서브프라임
사태 당시 미국 금융회사에 대한 거액 융자 거부)

@ 하토야마 유키오(93대), 자주 노선 - (일본 오키나와 현 기노완 시에 있는 미군 군용 비행장
‘후텐마기지’를 오키나와 현 외부 이전과 동아시아공동체를 제창)

이후 ~ 간 나오토(94대), 노다 요시히코(95대), 아베 신조(96.97.98대) - 모두 대미 추종적 성향




[@ 다음 마지막 5편이 이번 지소미아 문제와 방위비 분담금 문제 등 종합적으로
정리하는 내용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분량도 가장 많을거 같습니다. ~ 5편은 게시물중
최대한 한.미.일 관련된 내용이 포함된 게시물에 올려보려 하는데, 만약 그런 게시물이 올라오지 않았다면
관련성이 적더라도 첫 게시물에 올려보겠습니다. ~ 지면을 너무 많이 차지하는것 같아 죄송한 마음입니다.
영자님께도 죄송합니다.]

◆ 또 하나의 냉전, 한.미.일 관계와 그 이상의 경계에서 - (3) 국제 정치편 [by. 물파스]

(@ 한일 간 군사정보보호협정을 뜻하는 '지소미아(GSOMIA)' 종료시한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입니다. ~ 한국과 미국은 방위비 분담금 협상에서 치밀한 수싸움을
계속 진행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한국과 미국은 각각 총선과 대선이라는 본격적인 선거모드에
돌입한 상황입니다. ~ 북미간 비핵화 협상 또한 지지부진한 상황입니다.

미국이 왜 그렇게 지소미아 파기에 대해 우려하는지,
미국이 왜 그렇게 황당한 수치의 방위비 분담금을 요구하는지 ... 이에 대한 근본적 이유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 분량이 너무 많아 이야기는 5편으로 나눠서 게시물이 새로
업데이트 될 때마다 한 편씩 올려볼 생각입니다. ~ 아래는 도움 받은 자료와 각 편마다 들어있는
중심내용을 소개한 것입니다.)

<@ 도움 받은 자료들 >

(국제분쟁의 이해/ 조지프 나이/ 한울 출판)
(거대한 체스판/ Z.브레진스키/ 삼인 출판)
(포스트콜로니얼/ 고모리 요이치/ 삼인 출판)
(일본 전후 정치사/ 이시카와 마스미/ 후마니타스 출판)
(결정의 본질/ 그레이엄 앨리슨, 필립 젤리코/ 모던아카이브 출판)
(인간.국가.전쟁/ 케네스 왈츠/ 아카넷 출판)
(냉전의 역사/ 존 루이스 개디스/ 에코리브르 출판)
(미국의 아시아 회귀 전략/ 이용인, 테일러 워시번/ 창비)
(전환시대의 논리/ 리영희/ 창비)
~ 그 외 한국은행, KDI, 국회 등

(1) 경제편 - 일본의 경쟁력과 위기
(2) 국제정치 - 패전국 일본에 대한 GHQ 점령초기 상황
(3) 국제정치 - GHQ 점령기의 일본 신헌법 제정과정과 자민당 탄생과정
(4) 국제정치 - 일본의 대미추종과 자주파 그리고 신(新)미.일안보조약
(5) 국제정치 - 미국의 세계대전략(Grand Strategy)의 변화 과정과 동맹(alliance)의 의미
~~~~~~~~~

1편: 지난 게시물중 <반일 불매운동 근황>이라는 게시물에 올려져 있습니다.
2편: 지난 게시물중 <1991년, 인터넷의 발명과 인터넷 브라우저 전쟁>이라는 게시물에 올려져 있습니다.

===============


[◆ 또 하나의 냉전, 한.미.일 관계와 그 이상의 경계에서 - (3) 국제 정치편
- GHQ 점령기의 일본 신헌법 제정과정과 자민당 탄생과정]

일본에 대한 미국 점령정책의 최고 정점은 바로 일본의 새로운 헌법 제정입니다. 정식명칭은
<일본국헌법(日本國憲法)>이라고 하는데, 최근 언론에서 자주 언급되는 <평화헌법>을 말합니다.
제국주의 시대의 비민주적 헌법을 폐기하고 민주주의를 기본원리로 하는 새로운 헌법으로 다시
만들어졌는데, 당시 맥아더는 일본국헌법의 초안을 미군이 작성한 뒤 일본이 (무조건)수용하도록
강력히 요구했습니다.

메이지 유신(1868)은 말 그대로 ‘메이지 천황(Meiji Tenno)’에 의한 일본근대화 개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개혁은 위로부터의 개혁이었지 아래로부터의 개혁, 즉 시민혁명에 의한 개혁이 아니었기
때문에 평범한 국민들의 민주적 권리인 <시민정신>, 다시 말해 시민적 민주법치 정신이 정립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던 개혁이었습니다. ... 때문에 메이지 유신은 천황을 상징하며, 더 넓게는 하나 된
일본(전체)을 의미하는 <덴노(Tenno)> 중심의 부국강병을 이룩하기 위해 철저한 관료통치를
바탕으로 국가변혁을 이끌어낸 과정이었습니다. 따라서 메이지 유신이 일본 근대화를 앞당겼을 때
그 속엔 국수주의적, 전체주의적 요소가 필연적으로 담겨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GHQ 최고사령관 맥아더는 <샌프란시스코 조약> 이전까지 일본의 배상문제가 거론될 때마다
“일본의 구식민지 포기“ 자체가 바로 <거액의 배상과 동일>하다고 말하며 일본에 대한 그 이상의
배상요구에는 반대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 이에 대해 훗날 도쿄대 교수 ‘하라 아키라’는 다음과
같은 평가를 합니다.

“가해자로서의 속죄 의식으로 배상을 지불함으로써 국제 사회로의 복귀를
꾀하기보다는 오히려 배상을 하나의 경제적 기회로 파악하고 그것을 현지에 대한
경제적 진출의 계기로 삼는 의식이 더 강하게 작용 했으며, 이는 일본이 전쟁에 대한
반성이나 책임에 대한 자각을 충분히 행할 기회를 갖지 못한 것이 되었다. 따라서
‘경제적 진출’이라는 이름의, 미국과 결탁한 신식민주의로 전화해 갔던 것이다.“
- (포스트콜로니얼. 125페이지/ 고모리 요이치/ 삼인 출판)

<시민혁명이 부재>한 상태에서 진행된 위로부터의 근대화 개혁(메이지 유신)과 전쟁범죄에 대한
진정성 있는 사과와 반성 및 책임의 기회를 자발적으로 내팽개쳐서 생성된 <자각의식의 부재>는
유사한 속성을 갖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유비(analogy)관계>를 기초로 세워진 국가가 전후 일본의
참모습입니다. 때문에 일본은 잘못을 구분하는 능력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반성과 책임의식 모두에서
주체성을 상실하였으며, 오직 타국(미국)이 설정한 방향을 관습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에만 익숙해진
상태입니다. ... 결국 <시민혁명의 부재>와 <자각의식의 부재>라는 <유비(analogy)관계>는 일본의
통합의 상징이자 신앙적 의미로까지 확장되는 <천황(덴노)>과 더해지면서 바로 일본만의 고유의
<레종 데타(raison d’État)>를 생성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 국민들에게는 천황은 일본이라는 국가(전체) 그 자체이자 태양신의 자손이므로 <신화적>
의미로도 받아들여집니다. 따라서 <만세일계>의 왕, 즉 “천황폐하 만세”를 부르짖으며 전쟁터에서
죽는 것은 개인의 영광차원을 넘어서는 신과의 영적 결합이자 신성한 접촉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제국주의시절 일본 헌법에 녹아들어있던 덴노(천황)의 신화는 국가이데올로기인 동시에 국가이성,
즉 <레종데타>의 가장 대표되는 상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때문에 이러한 비민주적, 신화적
요소를 제거한 <일본국헌법(日本國憲法)> 제정에 맥아더가 적극적으로 관여하려 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입니다.
[@ 만세일계(萬世一系): 천황의 혈통이 2천년 이상 단 한 번도 단절된 적 없이 계속해서 이어져
왔다는 의미로, 천황제 국가 일본의 ‘국가이데올로기’의 근간을 이루는 대표적인 상징이자 요소.]

1946년 2월 13일 오전 10시, 외무대신 관저에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 외무대신 요시다 시게루,
헌법문제조사위원장 마쓰모토 박사, GHQ소속 휘트니 민정국장 ~ 이어서 휘트니 장군이 말합니다.

<“지난번 당신들이 제출한 헌법개정안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문서라고 보기에는
맥아더 최고사령관께서 전혀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최고사령관께서는 우리가 가져온
GHQ 헌법 초안을 당신들에게 전달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최고사령관께서 이 문서를
제시하게 된 진의와 이유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 지금 맥아더 최고사령관에게
천황을 전범 취급해야 한다는 외국의 압력이 계속해서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최고사령관께서는 천황을 지켜주기로 결심하셨습니다. 물론 최고사령관의 힘이
전지전능할 수는 없습니다. ~ 다만 우리가 만든 헌법 초안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천황제는 계속 유지될 것이며, 일본이 GHQ 관리에서 하루빨리 벗어나 독립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울 것입니다. 또한 일본 국민들에게도 기본적 자유와 권리가
주어질 것입니다.“ - (일본국헌법 제정과정. / 다카야나기) >

휘트니 장군은 만약 일본 정부가 GHQ의 헌법 초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천황이 전범으로
처형될 수 있으며 요시다 외상을 비롯한 정부의 핵심 각료 상당수가 권력에서 밀려날 것이라고
협박에 가까운 통보를 했습니다. ... 그리고 결국 일본은 GHQ 측과 협의하여 ‘일본국헌법’ 초안을
마무리 하게 됩니다. ... 이쯤 되면 점령기 일본은 미국의 간접통치가 아니라 직접통치를 받았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참고로 당시 외무대신으로 GHQ의 헌법초안을 받아들였던
요시다 시게루는 그해(1946년) 5월 일본 수상이 됩니다. 이후 요시다는 국회에서 헌법 심의를 거쳐
같은 해 11월 헌법을 공포했고, 다음해인 1947년 5월 수상에서 사임합니다. ... 결론적으로 제1차
요시다 내각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오직 GHQ 헌법 시행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참고: 맥아더 최고사령관은 GHQ 헌법 초안에 세 가지 핵심 내용이 반드시 담겨져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 첫 번째는 <(1) 천황의 신화적 요소제거>입니다. ... 1946년 1월 1일, 일본천황은
조서(詔書.왕이 국민에게 알리는 문서)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얘기를 합니다.

“짐과 국민 여러분 사이의 유대는 시종일관 상호 신뢰와 경애로 맺어진 것으로,
단지 신화와 전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천황을 마치 ‘현존하는 신’으로 간주하고
일본 국민을 다른 민족보다 우월한 민족으로 여김으로써 결국 세계를 지배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지고 있다는 허망한 관념에 근거한 것 또한 아닙니다.“
- (일본 전후 정치사. 49페이지/ 이시카와 마스미)

소위 <천황의 인간선언> 이라고 부르는 이 선언에서, 일본국민들에게 천황은 이제 ‘신격(神格)’이
부정된, 자신들과 동등한 <인간의 지위>로 내려앉게 됩니다. ... 이는 전쟁에서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며 죽음을 불사하던 일본 고유의 사상의 근원(국가이데올로기)이 한순간에 사라져버린, 그래서
일본 국민들에게는 더더욱 충격적인 순간이었습니다. ~ 신헌법 이후 이제 일본에서 천황의 존재는
신화가 아닌, 더불어 정치적 권능이 모두 제거된 단순한 <상징>으로만 남게 됩니다.

맥아더가 원했던 GHQ 헌법 초안의 두 번째 핵심내용은 <(2) 전쟁의 폐기>입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일본에서 천황의 존재는 신성의 영역이자 <국가전체>, 그리고 일본 고유의
‘레종데타’의 의미가 있습니다. 때문에 일본 국민 개개인은 <천황이 다스리는 나라> 안에서만
그 존재이유가 설명됩니다. 이것은 결국 일본에서 천황이라는 존재가 사라지지 않는 이상 국민들은
언제나 ‘국가’라는 <전체>에 함몰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입니다. ... 더욱이 이러한
<덴노(Tenno.천황)> 중심의 사상적 기반에 더해 “육군.해군에 대한 군사통수권을 천황이 가진다.”는
<메이지 헌법 제11조(구 일본제국헌법)>의 규정은 일본 내부에 <전체주의의 상시부활가능성>이
영구적으로 내재되어 있다는 걸 의미했습니다. ... 그리고 맥아더는 이것이 꽤나 신경 쓰였고,
천황을 전범으로 처형하라는 주변 국가들의 압력까지 계속해서 더해지자 천황을 상징으로만
남겨두는 대신 일본을 <군비(군대)없는 국가>로 만들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 (@ 천황제를
상징으로라도 존치시킨다면, 일본국민들이 큰 저항 없이 점령정책도 한결 수월해질 것이고, 대신
‘군대 없는 국가’를 신헌법 안에 못 박아 둠으로써 주변국들의 불만도 함께 잠재울 수 있었습니다.)
일본을 두 번 다시 전쟁을 일으킬 수 없는 국가로 만들기 위해 맥아더는 신헌법을 통해 아예
처음부터 싹을 잘라버리려고 했던 거죠. ... 나머지 맥아더가 원했던 세 번째 헌법초안 내용은
<(3) 봉건제 폐기> 였습니다.

한 나라의 헌법을 들여다보겠다는 것은 그 나라의 ‘정신’을 보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일본 헌법(평화헌법)에는 ‘일본의 정신’ 이라기보다는 <미국의 의지>가 상당부분 깃들여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1947년 4월, 일본은 새로운 헌법(일본국헌법)체제하에서 총선거를 실시합니다. ... 선거 결과는
당시 ‘가타야마 데쓰’가 이끌던 일본 사회당이 제1당이 되고, <가타야마 데쓰>는 일본의 제46대
수상이 됩니다. ... 패전 후, 전 국민이 생활고에 시달리던 상황이었으니 사회당으로 국민들 지지가
쏠렸던 것은 그나마 이해가 가는데, 이해하기 힘든 점은 ‘맥아더가 왜 사회당 정권을 허용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 더구나 그때는 미국과 소련의 대립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던, 그야말로 냉전의
초입에 해당하던 시기였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맥아더가 남부침례교회의장 뉴턴박사에게 보낸
편지 내용을 살펴봄으로써 나름의 추측을 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본인의 정신생활은 전쟁으로 공백상태가 되어 있으므로 지금이 일본에게 포교할
절호의 기회입니다. ~ (중략) ~ 가타야마가 일본 수상이 된 것은 정치적인 의미 못지않게
정신적인 의미에서 중요한 일입니다. 역사상 실로 처음으로 일본은 전 생애를 기독교인으로
살아온 지도자를 모시게 된 것입니다. 국제적으로 보아도 이는 의미 있는 일입니다. 동양의
3대 강국인 중국의 장제스, 필리핀의 로하스, 일본의 가타야마 데쓰 ... 이들 3명 모두가
기독교인입니다.“ - (맥아더 서간집 / 아유카와 구니히코) >

전후 일본의 신헌법(일본국헌법) 체제하에서 처음으로 탄생한 정권이 바로 사회주의 계열의
<가타야마 내각> 이었습니다. ... 일본에서 천황이라는 존재가 중력의 힘으로 작용하고 있을 때,
그 힘을 모두 제거하고 하나의 상징으로만 남겨둔 맥아더가 ‘천황’이라는 사상의 공백을 오롯이
기독교 정신으로 채우려는 목적에서 사회당 정권의 탄생배경을 추론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이 이유 하나 때문에 사회당 정권이 가능했다고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당시 GHQ 내부에는
일본의 비군사화와 민주화 및 노동개혁을 추진했던 소위 <민정국(GS:Government Section)>이라는
진보그룹(사회주의 성향)이 존재했었는데, 가타야마 내각이 바로 이 <민정국(GS)>의 지지를 많이
받았다는 점도 사회당 정권 탄생의 주요한 요인이었습니다. ... 하지만 전후 국제질서가 본격적인
미.소 냉전체제로 접어들자 GHQ 점령정책 또한 반공정책 위주로 재편됐고 민정국(GS) 또한 점차
힘을 잃어가게 됩니다. 이후 가타야마 내각은 극좌 성향의 히라노 농림부대신 임명 문제로 GHQ와
갈등을 겪다가 아이러니 하게도 자신들을 지지했던 민정국(GS)에 의해 타격을 받고 붕괴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정보 하나를 포착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미국’에 소속된 공동체
구성원들의 이념적 스탠스는 오직 자국(미국) 안에서만 그 의미가 부여될 뿐, 외부(다른 국가)의
시선에서 그들의 성향이 무엇인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우리들 중 누구라도
자신이 미국의 주변부에 속해있다면, 미국을 바라볼 때는 미국의 정신이 아닌 오직 <미국의 이익>의
관점으로 사태를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이는 이 글을 관통하는 <레종 데타(raison d’État)>의
시선과도 궤를 같이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앞서 보셨듯이 미국(GHQ)의 일본 점령정책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내용은 바로 <일본의 비군사화>
입니다. ... 일본을 더 이상 미국에 위협이 되지 않는 국가로 만들기 위해 <군대(군비) 없는 일본>을
‘일본국헌법(신헌법)’에까지 명문화하여 미국의 의지를 철저히 각인시켰던 것입니다. ... 이에 따라
미국은 점령기 초에 일본에 매우 강력한 경제제재조치를 취합니다. 한 나라 군사력의 근간은 결국
돈(경제)이 좌우하기 때문에 미국은 일본 경제의 기초라고 할 수 있는 공업시설을 먼저 파괴했고
재건 또한 불허하는 방침을 세웠습니다. 더불어 일본인의 생활수준은 그들이 침략한 아시아 국가들
수준보다 높지 않도록 한다는 것이 당시 미국(GHQ)의 일본에 대한 기본적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1948년부터 미국의 점령정책에 큰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미국과 소련의 대립, 즉 본격적인
냉전체제의 시작은 독일(서독)과 일본을 다시 공업국가로 부활시켜 소련에 대항할 수 있는 반공의
보루로 활용해야 한다는 쪽으로 미국의 세계전략을 바꾸게 만들었습니다.

<“국방성 초대장관인 제임스 포레스탈(James Forrestal)은 소련에 대항하려면
구 적국을 포함해서 모든 리더들이 가진 방법을 최대한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일본과 독일에게 한 번 더 임무를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 (중략) ~ 후버 전 대통령은
1947년 5월, 일본이나 독일이야말로 서구문명의 최전선이고 일본은 공산주의 행진에
대항하는 진정한 이데올로기 방파제라고 역설하였다.“ - (냉전과 미일관계/ 이시이 오사무)>

GHQ 점령 초기인 1946년 일본의 경제규모는 (1930년 ~ 1934년의) 18% 수준으로 추락했고,
1947년에 간신히 40% 수준까지 올라왔지만, 여전히 일본은 물자부족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국 NSC(국가안보회의)가 만든 <미국의 대일정책에 관한 권고(NSC13-2)>라는
정책문서가 1946년 10월 정식으로 승인됨으로써 일본경제는 다시 부흥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당시 트루먼 대통령은 디트로이트 은행 총재인 조셉 닷지(Joseph Dodge)에게 일본의 경제 부흥을
요청했고 닷지는 일본으로 건너가 곧바로 일본의 경제부흥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일본 군사력, 경제력 해체와 정치 민주화> or <소련 대항마 역할을 위한 일본 공업(경제)부활>

과연 어느 쪽이 미국에 더 이익인가? ~ 미국의 선택은 단순하고 깔끔하고 명쾌하기까지 했습니다.
개인(기업)이든, 국가든 기존의 정책(점령정책)을 180도 전환한다는 건(그것도 상당히 신속하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미국의 정책 전환에는 일본의 경제부흥뿐만 아니라 사람에 대한 인식도
바꿔놓게 됩니다. 바로 전범(戰犯)에 대한 필요성이었습니다. 그래서 군대와 행정 경험이 풍부했던
고위급 전범들이 줄줄이 석방되었고 상당수는 정계에 복귀하게 되는데 ... 그중 가장 유명했던
인물(전범)이 바로 현 일본 총리 아베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입니다. [@ 패전 직후인 1945년
9월 11일 A급 전범으로 체포되어 스가모 형무소에 갇혀있던 ‘기시 노부스케’는 옥중 서신에서 향후
냉전의 시작과 그로인한 미국의 일본 활용 및 공업부흥 등의 정책전환과 전범들의 석방 가능성
까지를 모두 예측합니다. ‘쇼와시대 요괴’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당시 일본에는 기시 노부스케만큼
국제정치에 탁월한 혜안을 가진 인물은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미국의 급격한 정책변경은 당시 일본을 쥐락펴락하던 맥아더의 점령정책(특히 일본군사력 해체)이
완전히 부정당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 때문에 당연히 맥아더 vs 트루먼 대통령 및 국방성
간에 상당한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일본에 대한 GHQ의 점령을 서둘러 끝내고 평화조약을 맺어 연합군 총사령부를
해체해야 한다. ~ (중략) ~ 제1단계, 일본의 비군사화는 이미 종료되었다. 제2단계,
정치에서 GHQ 지배는 끝나가고 있다. 제3단계, 일본 경제는 점령군이 처리할 수 없는
문제다.“ - (1947년 3월 18일 아사히신문. 맥아더 기자회견) >

당시 맥아더는 일본 점령을 서둘러 끝내려고 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원래 GHQ의 가장 큰 목표는
<일본의 비군사화>였기 때문에 ... 그 목적만 달성된다면 계속 돈을 써가며 더 이상 일본에 머물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던 차에 한국전쟁(6.25)이 발발합니다. ... 일본의 재군비를
가장 크게 반대했던 맥아더에게 <현실로 다가온 공산주의 위협(한국전쟁6.25)>은 더 이상 일본의
재군비 반대를 주장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 결국 1950년 7월 8일(한국 전쟁 발발 13일째),
맥아더는 요시다 수상에게 서간(편지)의 형식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통보합니다.

<“일본 정부에게, 정부 직속의 국가경찰예비대 7만 5천명과
해상보안청 요원 8천명을 증원할 권한을 부여한다.“ – GHQ 총사령관 맥아더>

국가경찰예비대와 해상보안청요원의 증원은, 한국전쟁으로 주일미군이 한반도에 파견됨에 따라
일본 국내 치안공백을 우려한 필연적 조치였던 것입니다. 참고로 당시 국가경찰예비대 7만 5천명은
한국전쟁에 파견된 주일미군 숫자와 거의 비슷한 규모였으며 ... ‘국가경찰예비대’는 이후 일본의
<자위대>로 거듭나게 됩니다. 그런데 당시 요시다 수상은 일본의 재군비에 상당히 소극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 앞서도 언급했지만, 요시다 (경제)노선의 핵심은 <경무장, 플러스경제성장>, 즉 일본의
안보는 전적으로 미국에게 맡김으로써 대폭적으로 줄어든 군비를 오직 일본 경제성장(민간투자)에
투입하여 하루빨리 일본 경제를 재건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그런데 만약 미국의 요구대로 일본이
재군비를 강행하게 된다면 일본 경제는 과부하에 걸려 붕괴할 것이며, 이는 아시아에서 공산주의
진영에게 일종의 기회(공산이념 확장)로 이어지게 될 것이라 요시다는 주장했습니다.

1951년 1월(한국전쟁 발발 7개월째),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평화조약)을 위해 미일간 사전교섭이
있었는데 이때 미 국무성 정책고문 존 덜레스가 일본을 방문합니다. 덜레스는 요시다와의 회담에서
일본의 재군비에 적극 협조할 것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둘은 합의점을 찾지 못했고, 결국 당시
요시다가 가장 많이 의지했던 맥아더의 도움으로 일본의 재군비 논의는 잠시 수그러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맥아더는 한국전쟁과 관련해 트루먼 대통령과의 의견차이로 1951년 4월 11일 파면을
당하고, 이로써 요시다는 자신의 든든한 후원자를 잃게 됩니다.
[@ 존 포스터 덜레스(John Foster Dulles): 미국 국무성 고문.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미일 안보
조약을 기획하였습니다. 1950년대 내내 미일 교섭에서 강경한 입장을 고수함으로써 일본입장에서는
상대하기에 매우 까다로웠던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요시다의 모든 염려는 기우에 불과했다는 것이 한국전쟁에 의해 증명됩니다.
점령정책에 의해 파괴 계획이 있었던 850여개에 달하는 일본 공업시설의 철거가 중지되었고,
무기생산 금지령이 해제됩니다. 또한 점령 초기 상당히 심각했던 일본의 식량사정은(1일 1인 1홉)
‘한국전쟁’이라는 전쟁특수 덕분에 상당부분 개선되었고, 특히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일본의 배상은
공업시설, 기계류 등의 현물 배상 방식에서 ~ 일본의 공업시설을 우선적으로 지원.복구하여 거기서
생산되는 상품과 일본인의 용역 등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바뀌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배상
방식은 모두 미국의 계획과 의지가 충분히 반영된 결과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 ‘공산주의 방파제’
라는 막중한 임무가 부여된 일본이 만약 피침(被侵) 국가들에 대해 직접적인 현물 배상을 했다면
일본의 (경제)재건은 상당히 늦어지거나 다른 아시아 국가들 수준에서 그냥 멈춰버렸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 아무튼 미국의 의도대로 진행된 일본의 배상 방식은 ‘배상’이 아닌, <경제협력>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아시아 전역에 일본의 공업 생산품과 용역이 제공되는 횟수가 서서히 증가하면서
아시아는 시나브로 일본 경제의 상품시장으로 변모해갔던 것입니다. ... 더불어 한국전쟁(6.25)으로
미군의 병참기지 역할이 일본에 주어지면서 일본은 그야말로 엄청난 ‘전쟁특수’를 누리게 되는데,
당시 일본 전체 외화수입에서 한국전쟁특수가 차지했던 비중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제2차 세계대전이후, 반세기 이상을 일본의 상품과 용역, 그리고 교육과 문화에 장악된 아시아
국가들에게(특히 전후세대) ‘친일 의식’은 당연한 현상이거나 구조적 수순이 아니었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아시아 국가들의 상처위에 ‘친일 의식’이 무의식으로 자연스럽게 덧발라져
있어 지금까지 새살이 돋을 자리를 지속적으로 무의식(친일)이 채우고 있었던 것이라 생각됩니다.]

[◆ 일본의 한국전쟁특수 수입 - (일본 외무성 조사보고서)]
@ 1950년 – 외화수입(1억 4,800만 달러), 외화수입 중 한국전쟁 특수비율(14.8%)
@ 1951년 – 외화수입(5억 9,100만 달러), 외화수입 중 한국전쟁 특수비율(26.4%)
@ 1952년 – 외화수입(8억 2,400만 달러), 외화수입 중 한국전쟁 특수비율(36.8%)
@ 1953년 – 외화수입(8억 900만 달러), 외화수입 중 한국전쟁 특수비율(38.1%)

보시다시피 한국전쟁 기간 동안, 일본은 자신들의 전체 외화수입 중 3분의 1을 상회하는 수입을
모두 한국 전쟁을 통해 얻습니다. 더불어 일본의 광공업 생산은 한국전쟁특수 덕분에 전전 수준을
훨씬 더 뛰어넘게 됩니다. ... 맥아더 파면이후, GHQ 제2대 총사령관으로 부임한 ‘매튜 리지웨이’는
전범들의 공직 추방령을 완화하여 대략 25만여 명의 정치인 및 군장교들이 다시 현직으로 복귀하게
됩니다. 특히 하토야마 이치로, 이시바시 탄잔, 기시 노부스케 같은 거물급 정치인들이 다시 정계에
복귀하였고 ... 1952년 10월 GHQ의 일본 점령이 끝나고 나서 치른 첫 총선거에서 중의원 의석의
42%를 추방 해제자들이 차지하게 됩니다.
[@ 매튜 리지웨이(Matthew Ridgway. 1895~1993): 미국 육군 출신, 맥아더 후임으로 GHQ 제2대
총사령관으로 부임함. 한국전쟁에서 중공군을 북쪽으로 밀어내고 유엔군 구출과 남한을 성공적으로
방어함.]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1951년 9월 8일)으로 전쟁 상태를 종결함과 동시에 GHQ의 점령에서도
벗어나게 된 일본은 당시 강화조약(평화조약) 외에 <미일 안보조약>도 함께 체결합니다. 여기에
<경무장, 플러스경제성장>을 외쳤던 요시다 시게루가 1954년 12월까지 장기집권 함으로써 일본의
대미추종노선은 더욱 공고해졌습니다. ... <미일 안보조약>은 일본 입장에서는 상당히 불평등한
조약이었습니다. 당시 일본 국민들 상당수는 ‘미일 안보조약’에 의해 앞으로 미국이 항상 일본을
지켜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1960년 조약을 개정하기 전까지 <미일 안보조약>에는
미국이 일본을 방위해야할 그 어떤 의무조항도 없었습니다. ... “내란이나 작은 국내적 소요사태가
벌어졌을 때 일본 정부의 요청이 있다면 미군이 개입할 수 있다.“ 정도의 안보조약 이었던 것입니다.
반면 미국은 이 조약으로 원하는 규모의 군대, 원하는 기간 동안 일본 전국 어느 곳에서도 자유롭게
미군을 주둔시킬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되었고, 미군과 군속 및 미군 가족의 일본 국내 범죄에
대한 재판권까지 갖게 됩니다. ... 강화조약으로 일본은 분명 GHQ 점령체제에서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치외법권을 가진 미국의 군대가 자신들 마음대로, 자유롭게 일본영토 내에 주둔권리를
갖는다는 건 <미일 안보조약>의 불평등성을 그대로 증명하는 것이었습니다. ... 다만 공산진영의
팽창위협이 한국전쟁이라는 직접적 현실로 다가왔기 때문에 일본 점령이 끝났음에도 미국에게는
일본 내 미군기지(점령군이 아닌 ‘주일미군’) 필요성이 절실했던 것입니다.

미일 안보조약 체결당시 미국 측 서명자는 애치슨 국무장관, 덜레스 국무성고문, 와일리 상원의원,
브리짓스 상원의원으로 4명 이었던 반면, 일본은 ‘요시다 시게루’라는 절대적 대미추종자 단독으로
미국과 안보조약을 체결합니다. 때문에 미일 안보조약의 ‘불평등성’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 이후 미일 안보조약은 아베 현 일본 총리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가 총리로
재임하고 있던 시기인 1960년 1월에 개정되었고, 이때 개정된 미일 안보조약이 현재까지 계속해서
이어져오게 됩니다. 참고로 개정 전 요시다의 안보조약을 <구(舊)미일안보조약>, 개정된 안보조약을
<신(新)미일안보조약>이라고 부르는데 ... 개정된 <신(新)미일안보조약>은 당시 일본 열도 전체를
흔들어 놓는 대형사건이 됩니다.(@ 이 부분은 뒤에서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절대적 대미추종자 <요시다 시게루>는 전후 일본체제를 이해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요시다 이외에도 일본 현대사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이 몇 명 더 있는데, 대표적
인물이 바로 <하토야마 이치로(52.53.54대 총리역임)>와 <기시 노부스케(56.57대 총리역임)>입니다.

GHQ 제2대 총사령관 ‘매튜 리지웨이’의 공직 추방령 해제로 다시 정계에 복귀한 거물급 정치인
<하토야마 이치로(이하 ‘하토야마’)>는 ... 자유당이 1946년 총선거에서 제1당이 되었을 때 ‘총재’
자리에 있었던 인물입니다. 그러나 GHQ의 추방 조치로 ‘요시다 시게루’에게 총재 자리를 양보하고
물러났는데, 이후 추방령이 해제될 즈음 그동안 요시다의 굴욕적 대미추종을 지켜보았던 하토야마는
GHQ 점령체제를 벗어난 일본에게 이제는 새로운 정치체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신당’ 창당을
결심하게 됩니다. ... 하지만 하토야마가 뇌출혈로 쓰러지자 그와 뜻을 함께 했던 측근들은 일단은
신당 창당을 잠시 뒤로 미루고 자유당으로 복귀해 당내에서 반(反)요시다 운동에 전념하는 쪽으로
계획을 수정하게 됩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이후 1952년 최초의 선거가 있었고, 불과 200여일 후인 1953년에 일본은
또 다시 선거를 치릅니다. ... 이 기간 동안 자유당은 <요시다 진영 vs 하토야마 진영>간의 정쟁으로
시간을 다 보내다가 결국 1953년 4월 19일 총선거에서 과반에 못 미치는 202석을 얻고 참패하게
됩니다. ‘진보는 분열로 망하고 보수는 부패로 망한다’는 말과는 반대로 당시 보수진영(자유당)의
선거 참패원인은 바로 자유당 당내의 내부분열이었던 것입니다. 반면 좌파진영은 크게 약진했는데,
대표적으로 좌파사회당의 의석수는 72석으로 이전의 56석보다 16석이 늘어났으며 이는 1951년의
16석에 비하면 1953년의 좌파사회당의 의석수는 무려 4.5배가 늘어난 수치입니다. ... 여기에 다른
좌파진영 수치를 살펴보면 ~ 우파 사회당이 6석 증가로 66석 확보, 노동당 1석 증가로 5석 확보,
의석이 없던 공산당도 1석을 확보합니다.

1953년 선거의 최고 쟁점은 바로 <일본의 재무장(재군비)> 이었습니다. ... 하토야마 진영은
헌법 9조를 개정해 정상 군대를 가져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던 반면, 요시다 진영은 헌법은
그대로 유지한 채 “전투력(戰鬪力) 없는 군대” 라는 모호한 구호를 외치면서 당장은 아니지만
점진적으로 재무장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 앞서도 얘기했지만 요시다 입장에서는
일본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는 재무장이 아니라 “경제성장”이었습니다. (@경무장, 플러스경제성장)

이에 대해 좌파 사회당은 <보안대(경찰예비대)>를 아예 ‘해산’하는 쪽으로, 우파 사회당은 보안대
‘축소’를 주장하며 좌우 양 사회당 간에 입장차이가 있었지만, 큰 틀에서 보면 좌파진영은 재무장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합니다. ... 결국 선거결과가 말해주듯이 당시 일본 국민들 머릿속에는 패전 후
인내와 고통의 시간을 힘들게 보내고 있는데 다시 청춘들에게 총을 들게 한다는 것에 상당한 정서적
거부감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일본 사회당: 일본의 대표적 좌파 정당으로 점진적 사회주의와 중립외교를 주장했습니다.
전후 농민.노동자 운동으로 활약했던 니시오, 미즈타니, 히라노 등 3명을 중심으로 만들어졌으며,
<사회당>이라는 공식 당명이 결정되기까지 ... 좌파 색채가 강했던 ‘일본 노동당’, 우파 색채가
강했던 ‘사회대중당’ 여기에 사민(사회민주주의) 계열 등이 혼재되어 주도권 경쟁이 치열했습니다.
이후 일본 사회당은 좌파와 우파로 분열됐고, 1955년 다시 통합하게 됩니다. (1996년 사회당의
당명은 ‘사민당’으로 개칭됩니다.)]

요시다의 자유당은 총선거에서 과반의석을 확보하지 못했지만 여전히 제1당이었습니다. 하지만
소수여당이었기 때문에 총선 이후에는 야당과의 접촉을 적극적으로 시도하며 지속적인 세 불리기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보안대를 자위대로 재편해 외부의 직접적인 침략에 대비한다.“>는
내용으로 당시 제2당 이었던 ‘개진당’과 합의를 이끌어 냅니다. 여기에 일본의 재무장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하토야마 진영을 설득하기 위해 요시다 진영은 당내에 <헌법개정조사회>를 설치하는
조건을 내세워 이들을 다시 요시다 진영으로 합류(복귀)시키는데 성공합니다. (@ 하토야마 진영의
일부는 복귀를 거부함. 8명)

1953년 총선거 이후 ... 요시다의 세 불리기 노력에도 불구하고 보수진영의 분열은 계속됩니다.
그러나 정책에 대해서만은 보수 간의 특별한 대립은 없었습니다. ~ ‘전력.석탄 사업의 파업규제법’,
‘교육2법(일본 교원노조 활동제한법)’, ‘경찰법 개정(국가의 경찰 감독권 강화)’, ‘방위청 설치법 및
자위대 법‘ 등은 좌파 진영(좌우 사회당)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보수진영이 모두 합심하여
통과시킨 법안들이었습니다. ... 그러다가 <조선(造船) 비리 의혹 사건>이라는 보수 분열의 결정적인
사건이 터져버립니다.

<조선(造船) 비리 의혹 사건>은 ... 해운 및 조선업 관계자들이 더 많은 융자를 할당받기 위해,
그리고 이자에 대한 더 많은 국가보조를 받기 위해 해운업 입법과정에서 보수 정계에 뇌물을 준
사건이었습니다. ... 이 사건으로 당시 미쓰비시 조선의 사장이자 일본 조선공업 협회 회장이었던
니와 가네오 및 도코 도시오(이시카와지마 중공 사장) 부회장 등 71명이 체포 됩니다.

1954년 4월 20일, 대검 수뇌부는 뇌물 수령의 핵심 용의자였던 자유당 간사장(한국의 원내대표격)
‘사토 에이사쿠(요시다 진영)’ 체포를 중의원에 요구했으나 요시다 총리, 오가타 부총리 등의 의중에
따라 당시 법무상(한국의 법무부 장관격) ‘이누카이 다케루’는 검찰청 법 14조에 의거해 검찰총장에
대한 지도권을 발동해 간사장 사토 에이사쿠의 체포를 저지합니다.(@ 다음날 이누카이는 사직함)
결국 꼬리보다 못한 17명만이 유죄판결을 받음으로써 모든 수사는 유야무야로 종결되어 버립니다.
[@ 일본의 양원제(兩院制): 입법부가 두 개의 의회로 구성된 제도. 대표적 양원제 국가는 미국이며
각주를 대표하는 상원(United States Senate)과 미국 국민 전체를 대표하는 하원(United States
House of Representatives)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일본의 참의원(參議院)은 미국의 상원에 해당하며
중의원은 미국의 하원에 해당합니다. 반면 하나의 의회로 국회를 구성하는 것을 단원제(單院制)라
하며 한국은 단원제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참고- 다음백과)]

언제 터져도 이상할 게 없었던 당시 보수분열의 에너지는 <조선(造船) 비리 사건>으로 더 크게
증폭되었고 이는 자유당에 대한 내각불신임으로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요시다의 자유당은
내각불신임안에 대해 일단은 거부권을 행사합니다. 그러다 결국 1954년 11월, 요시다 내각 타도를
외치며 제2당이었던 개진당의 거의 모든 의원 69명과 1953년 총선 이후 요시다 진영에 합류했던
하토야마 진영의 43명, 합류하지 않았던 8명 등 총 120명의 의원이 모여 <민주당(일본 민주당)>
이라는 새로운 정당을 결성하게 됩니다. 이후 민주당과 좌우 양 사회당은 공동으로 요시다 내각의
불신임안을 제출합니다.(총 253명) ~ 결국 요시다 내각은 6년 2개월(1차 내각 포함하면 7년 2개월)
이라는 장기 집권을 끝내고 물러나게 됩니다.

1954년 12월 10일 ... 요시다 내각이 물러난 자리에 <제1차 하토야마 내각(민주당)>이 들어섭니다.
그전에 하토야마를 주축으로 한 민주당은 120명이라는 소수당의 한계 때문에 불가피하게 좌우 양
사회당과 협치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요시다 라인인 ‘오가타(이전 부총리)’에게
총리 자리를 내어줄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듬해인 1955년 3월에 총선거를 실시하겠다는
사회당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하토야마는 (좌우)사회당의 지지를 받고 총리가 됩니다. 또한
1954년 12월 10일 총리가 된 하토야마에게 1955년 3월까지는(실제 총선거는 2월 27일) 불과 3개월
남짓한 기간이었기 때문에 제1차 하토야마 내각은 ‘선거관리용 내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간 동안 일본 전역에 <하토야마 붐>이 일어납니다. ... 요시다의 장기집권 및 부패에
대한 국민적 피로감이 일종의 반사효과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토야마 붐’은 좌파진영의 약진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었습니다. ... 1953년 선거 때부터 힘차게
도약하며 ‘과반의석 확보’와 함께 <사회당 정권수립>이라는 원대한 목표를 가졌던 좌파진영 앞에
예상치 못한 ‘하토야마 붐’이라는 변수가 나타난 것입니다. ... 이러한 ‘하토야마 붐’은 좌파진영에
위기감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당시 좌우로 갈라서있던 사회당의 통합을 자극하게 됩니다.

하토야마는 1953년 선거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 선거에서도 <헌법 9조 개정 및 자위군 창설>을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반면 (좌우)사회당은 <평화헌법 옹호>를 주장했는데, 결국 1955년 선거의
최고 쟁점 또한 <일본의 재무장>이었던 것입니다.

1955년 2월 27일 총선거 결과, 하토야마 민주당은 185석을 확보해 제1당이 되었지만 과반의석인
234석엔 턱없이 부족한 결과였습니다. 여기에 자유당은(요시다 진영) 114석을 얻어 민주당과 자유당,
즉 보수진영의 합계의석은 총 299석이 되었는데, ‘하토야마 붐’에도 불구하고 이런 결과는 보수진영
전체적으로 보면 1953년 총선거 당시의 314석에 비해 15석이나 감소된 수치였습니다. ... 더불어
줄어든 보수진영의 의석수는 모두 좌파 사회당이 가져갔으며 ... (좌우)사회당, 노동당, 공산당 등의
의석을 모두 합하면 헌법 개정 저지에 필요했던 1/3의 의석을 좌파진영이 확보하게 된 것입니다.

1955년 총선거이후 시작된 <제2차 하토야마 내각>은 제1차 내각 당시보다 의석수는 늘어났지만
여전히 소수여당의(민주당) 한계에 갇혀 있는 상태였습니다. ... 우선 요시다 진영인 자유당의 공세를
감당해야 했으며, 선거 때마다 존재감을 보여주었던 사회당(특히 좌파 사회당)이 가을에 통합까지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 상황이 이쯤 되니 재계에서 먼저 불안 섞인 불만을 표출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일경련(일본경영자단체연맹)> 및 <경제동우회(재계 인사들의 개인자격으로만 가입가능)>
같은 단체들은 보수 정치권에 대해 다음과 같은 얘기를 합니다.

“선거 때마다 좌파진영의 약진이 두드러지고,
더구나 좌우 사회당은 통합까지 계획하고 있다는데
보수진영은 언제까지 분열과 갈등만 반복하고 있을 겁니까!“

재계의 불만은 결국 사회당 통합에 대한 ‘불안’이었고 <보수합동(통합)>을 요구하는 단계로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실제 당시 경제동우회는 “신속한 보수합동을 실현하라” 라는 내용의 결의를
채택합니다.) ... 또한 미국입장에서도 공산주의 확산을 막는 방파제 일본에 사회당 정권의 수립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공산진영과 대결을 하자면 일본의 보수는 분열이
아니라 하나로 결집해 미국을 도와야 했던 것이죠. 그래서 일본의 보수합동이 성사되기 3개월 전,
미국의 국무장관 덜레스는 당시 민주당 간사장이었던 ‘기시 노부스케(아베총리 외조부)’를 만나
다음과 같은 얘기를 전합니다.

“만일 일본의 보수정당이 하나로 뭉쳐 미국이 주도하는
공산주의자와의 대결에 참여한다면 경제적 지원을 할 수도 있습니다.“ - (CIA 비망록)

결국 좌우 사회당의 통합 분위기는 1955년 10월 13일에 실제 통합으로 현실화 되었고, 보수진영의
자유당과 민주당은 그로부터 한 달여 뒤인 11월 15일에 <자유민주당 결성대회>를 개최함으로써
재계, 미국 그리고 상당수 의원(자유당,민주당)들 염원대로 마침내 <보수합동(대통합)>을 이뤄냅니다.
이는 전후 일본의 정치체제가 좌파진영의 사회당과 보수진영의 자민당(자유민주당)이라는 거대
양당구조가 본격적으로 시작됐음을 알리는 신호였으며, 그래서 1955년은 현대일본정치사에서 가장
중요한 한 해였고, 더불어 이때를 소위 <55년 체제>라고 부릅니다. [@ 사회당은 통합 후 1960년
1월에 일부 세력이 ‘민사당(민주사회당)’을 결성함으로써 다시 분열됩니다.]

일본에게 <55년 체제>는 좌파의 통합이라는 의미도 중요했지만, 무엇보다도 ‘보수대통합’으로
상징되는 <자민당 탄생>이 가장 큰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55년 체제>이후, 하토야마는
1년여를 더 총리직에 머물다 1956년 12월 23일 총리에서 물러납니다. 뒤를 이어 ‘이시바시 탄잔’이
총리가 되지만 병에 걸려 2개월 만에 총리직을 내려놓습니다.(@ 2개월 단명내각) ... 이어서 당시
외무상을 맡고 있던 <기시 노부스케>가 당내 저항 없이 후임 총리에 오릅니다.(1957년 2월 25일)
[◆ 참고: 앞서 보셨듯이 ‘요시다 노선’의 핵심은 군비를 최소화(경무장)하여, 그렇게 아낀 자원을
모두 일본 경제성장에 올인 하는 것이었습니다. 반면 하토야마는 일본의 재군비에 대단히 적극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더불어 ‘이시바시 탄잔’ 또한 일본의 재군비에 긍정적이었지만 ...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할 점은 하토야마와 이시바시의 ‘재군비’ 욕망은 <냉전>이라는 이념적.시대적 상황의
불가피한 여건 때문에 미국의 기대에(공산주의 확산을 막는 방파제) 부응하기 위한 대미 추종적인
‘재군비’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토야마와 이시바시의 ‘재군비’ 욕망은 대미추종이 아닌 탈미(脫美),
다시 말해, 오로지 <일본만의 독자적 자주노선>을 위해서였다는 점이 핵심입니다. ... 물론 여기서
탈미(脫美)가 반미(反美)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 일본의 자주파들은 일본이 미국과의 종속적
관계에서 하루빨리 벗어나 정상국가로서 (최소한)상호적 관계가 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 4편에서는 ~ 그동안 우리가 익숙하게만 보아온 일본의 대미추종적
이미지와는 달리 자주적 성격 또한 상당히 강했던 모습을 보게될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현 일본 총리 아베의 평화헌법 개정 문제와도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2019년 11월 19일 화요일

◆ 또 하나의 냉전, 한.미.일 관계와 그 이상의 경계에서 - (2) 국제 정치편 [by. 물파스]

(@ 한일 간 군사정보보호협정을 뜻하는 '지소미아(GSOMIA)' 종료시한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입니다. ~ 한국과 미국은 방위비 분담금 협상에서 치밀한 수싸움을
계속 진행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한국과 미국은 각각 총선과 대선이라는 본격적인 선거모드에
돌입한 상황입니다. ~ 북미간 비핵화 협상 또한 지지부진한 상황입니다.

미국이 왜 그렇게 지소미아 파기에 대해 우려하는지,
미국이 왜 그렇게 황당한 수치의 방위비 분담금을 요구하는지 ... 이에 대한 근본적 이유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 분량이 너무 많아 이야기는 5편으로 나눠서 게시물이 새로 업데이트
될 때마다 한 편씩 올려볼 생각입니다. ~ 사실 이번 시리즈 글은 '국제정치(특히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에
관한 내용이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 그러나 일본의 수출 규제와 관련해 (1)편은 경제와 관련된
내용으로 짧게 이야기해볼 것이며, 나머지 4편은 모두 국제정치(미국 동아시아 전략) 이야기로
채워질 것입니다. ~ 아래는 도움받은 자료와 각 편마다 들어있는 중점내용을 소개한 것입니다.)

<@ 도움 받은 자료들 >

(국제분쟁의 이해/ 조지프 나이/ 한울 출판)
(거대한 체스판/ Z.브레진스키/ 삼인 출판)
(포스트콜로니얼/ 고모리 요이치/ 삼인 출판)
(일본 전후 정치사/ 이시카와 마스미/ 후마니타스 출판)
(결정의 본질/ 그레이엄 앨리슨, 필립 젤리코/ 모던아카이브 출판)
(인간.국가.전쟁/ 케네스 왈츠/ 아카넷 출판)
(냉전의 역사/ 존 루이스 개디스/ 에코리브르 출판)
(미국의 아시아 회귀 전략/ 이용인, 테일러 워시번/ 창비)
(전환시대의 논리/ 리영희/ 창비)
~ 그 외 한국은행, KDI, 국회 등

(1) 경제편 - 일본의 경쟁력과 위기
(2) 국제정치 - 패전국 일본에 대한 GHQ 점령초기 상황
(3) 국제정치 - GHQ 점령기의 일본 신헌법 제정과정
(4) 국제정치 - GHQ 점령기 일본 자민당 탄생 과정과 미.일 안보조약
(5) 국제정치 - 미국의 세계대전략(Grand Strategy)의 변화 과정과 동맹(alliance)의 의미

~ (1) 경제편: <반일 불매운동 근황>이라는 게시물에 올렸습니다.

===============

[◆ 또 하나의 냉전, 한.미.일 관계와 그 이상의 경계에서 - (2) 국제 정치편 ]
- 패전국 일본에 대한 GHQ 점령초기 상황


1945년 11월 ...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한 일본에 폴레 위원장을 대표로한 배상위원회가 방문합니다.
당시 미국의 배상정책은 일본의 경제수준을 최소한으로만 유지하게 한다는 상당히 엄격한 기준을
만들었습니다.

< “일본인의 생활수준은 자신들의 식민지였던
조선인이나 인도네시아인, 베트남인보다 높지 않아야 한다!” - 폴레 >

그러나 냉전이 심화되면서 미국은 일본을 아시아의 반공 봉쇄를 위한 중추기지, 즉 공산주의
확산을 막기 위한 방파제로 사용한다는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그러자면 가장 시급했던 일이 바로
일본의 경제재건이었습니다. 자신을 공격했던 적국이자 패전국 일본에 대한 미국의 대일정책이
<냉전>이라는 비극의 구성요소 때문에 180도 급선회를 하게 된 것입니다.(@ 종이로 만든 방파제는
파도나 해일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방파제도 제 역할을 하려면 기초체력(경제)이 있어야 합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냉전의 보편적 정의는 제2차 세계대전이후, 미국 중심의 자유진영(자본주의)과
소련 중심의 공산진영간의 대립을 말합니다. 당시 초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과 소련에게 ‘유럽’
이라는 공간은 자국은 물론 자국과 이념을 공유하던 수많은 나라들의 생존이 걸린 가장 중요한
지역으로 인식되고 있었습니다. 반면 동아시아는 처음부터 미국과 소련에게는 냉전의 주요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미소 냉전이 전 지구적으로 확대되면서부터 비로소 ‘동아시아’라는 공간의
지정학적 이해가 시작됩니다.

모두 잘 아시다시피, 제2차 세계대전은 유럽과 아시아라는 두 개의 공간에서 벌어진 비극입니다.
그중 유럽의 전쟁은 팽창하는 나치 독일을 저지하기 위해 미국과 소련이 참여한 전쟁이었습니다.
반면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시작된 태평양전쟁은 소련이 참여하지 않은 상황에서
미국이 일본과 싸운 전쟁이었습니다. ... 이후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미국은 소련에게 태평양전쟁
참전을 요청했고 소련은 전쟁참여를 약속합니다.

<◆ 참고: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공습 이전 상황 간략정리>

1920년대 일본은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나름대로 의회 제도가 유지되던 국가였습니다.
그러나 1930년대 군부와 극우세력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야욕이 드러나게
됩니다. 당시 일본은 유럽보다는 동아시아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 여기에 대공황여파로
무역상황까지 악화되자 일본에게 석유 같은 필수원자재의 지속적 확보문제는 그야말로 사활이 걸린
핵심 과제로 떠오르게 됩니다. ~ 아시아 침략 합리화를 위해 소위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
이라는 기막힌 수사(rhetoric)를 사용하며 지역적 패권추구 야욕을 드러낸 일본은 동아시아 지역만
확보한다면, 그동안 태평양에서 막강한 해양세력이었던 미국과 영국의 위협에도 충분히 저항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본의 팽창야욕은 가장 먼저 중국을 겨냥하게 됩니다.
중국을 상대로 한 전쟁은, 당시 중국 국민당을 지원한 미국과의 외교적 마찰을 일으키게 됩니다.
1940년 히틀러가 프랑스를 함락하자 일본은 이틈을 타 프랑스 식민지였던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점령했고 ... 그 시점에서 일본 앞에는 세 가지 선택지가 놓이게 됩니다.

[1] (소련을 겨냥한 서쪽으로의 진군)
양국은 이미 만주 국경을 경계로 전투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만주 국경지대에서의 소련과 일본의 전쟁 발발 가능성을 상당히 높게 점쳤습니다.

[2] (남쪽으로의 진군)
이미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점령한 일본에게 가장 매력적인 나라는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원자재, 특히 석유자원이 풍부했던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지금의 인도네시아) 였습니다.

[3] (가장 무모하고 위험했던 미국을 향한 동쪽으로의 진군)

그리고 결국 일본은 2번과 3번을 선택하게 되는데 ... 히틀러의 소련공격으로 일본에 대한
소련의 위협이 제거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일본의 남진을 막기 위한
미국의 대일(對日) 석유 금수조치였습니다.

“일본에 목줄을 채우고 한 번씩 흔들어 주려고 한다.” - 루스벨트(Franklin Roosevelt)

당시 루스벨트 대통령의 국무차관보였던 애치슨(Dean Acheson)은 일본에 대한 석유금수조치가
설마 전쟁(전면전)으로까지는 확대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그러나 석유의 90% 이상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던 일본에게 석유 없는 전쟁은 그야말로 ‘패망’ 그 자체였습니다. 그래서
목 졸려 죽을 바에는 차라리 전쟁을 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 여기에 더해
미국은 일본에게 중국철수까지 요구합니다. 당시 일본에게 중국은 가장 핵심적인 경제배후지였는데
그것마저 단절된다면 <대동아공영권>을 명분삼아 꿈꿔왔던 일본 제국주의 야욕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시 한 일본 장교는 히로히토 천황에게
“비록 수술은 위험하지만 생명을 건질 수 있는 기회는 역시 수술뿐입니다.” 라며 군부의 결사항전
의지를 전했습니다. (@ 참고: Sagan "The Origins of the Pacific War")

미국에 대한 공격은 일본 스스로도 분명 무모한 전쟁이 될 것임을 진즉에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한편에서는 일본의 전쟁 선택이 비이성적 행동은 아니라고 인식했습니다.
아니 오히려 일본군부내 상당수는 미국을 상대로 한 전쟁이 어쩌면 최선의 결정이 될 수 있다고
까지 생각했습니다. ... 당시 일본 육군 참모본부의 부참모장인 ‘츠쿠다’는 일본군부내의 이러한
비합리적 분위기를 이렇게 얘기합니다.

<전쟁에 돌입한다면 전망은 대체로 밝지 않다. 우리는 모두 평화롭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지 생각하고 있다. “걱정하지마라. 전쟁이 계속된다고 하더라도 내가 모든 책임을
지겠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현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사람들은 어쩔 수없이 전쟁을 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고 있다.>
[@ 참고: 국제분쟁의 이해(178페이지). 조지프 나이(Joseph S. Nye, Jr.)

이러한 복잡 다양한 상황에서 일본은 결국 1941년 12월 7일 미국을 겨냥해 동쪽으로 진군했고,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을 겨냥해 남쪽으로 진군하게 됩니다. 다만 남쪽으로의 진군은 원자재 필요라는
실리적, 합리적 이유가 있었지만 일본의 진주만 공습에 대한 동기는, 기습으로 미국의 사기를 약간만
떨어뜨리기 위해서였는지, 석유금수조치에 대한 생존적 분노였는지 등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 일본의 진주만 공습동기에 대한 이해는 ... 앞서 일본 육군 참모본부의 부참모장
‘츠쿠다’의 한 개인의 시선으로 바라봤을 땐 당시 일본 군부의 행동이 비합리적으로 보였겠지만,
그러한 개개의 군인들이 <군부(조직)>라는 ‘집합적(총합적)’ 형태로 재구성된다면 이때부터는 개인의
이성을 일본 고유의 <레종데타>와 분리시켜, 여기에 군부 내에 합의(동의), 즉 <절차적 투명성>
이라는 민주적 요소와 결합해 전쟁(진주만공습) 결정의 진짜 동기가 과연 무엇이었을까를 고민해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

일본과의 전쟁을 조기에 끝내려했던 미국에게 소련의 참전은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 그런데
1945년 7월, 미국은 당초 예상보다 빠르게 핵실험에 성공합니다. 때문에 소련의 참전은 더 이상
필요치 않다고 생각했으며, 오히려 부담이 될지도 모른다고 미국은 생각합니다. ... 유럽참전의
대가로 영토를 요구했던 소련이 동아시아 참전에서도 분명 참전대가를 요구할 것으로 예상됐기
때문입니다. ... 1945년 8월 9일, 얄타회담에서의 약속대로 소련은 대일 전쟁에 참전합니다. 그러나
미국은 일본 히로시마(8월 6일), 나가사키(8월 9일)에 원폭을 투하합니다. 일본의 항복을 앞당겨
소련의 참전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태평양전쟁은 종결됩니다.

소련은 미국에게 일본의 공동점유를 제의했지만 미국은 이를 거절합니다. ... ‘섬나라’라는 일본의
지정학(geopolitics)적 가치와 아시아에서의 가장 핵심적 산업요충지라는 지경학(geoeconomics)적
가치가 고려되어 미국에게 일본은 절대 양보할 수 없는 나라였던 것입니다. 결국 일본을 단독으로
점령한 미국의 행위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시점부터 이미 미소간의 불신의 기운이(냉전의 기운)
어느 정도는 작동하고 있었다는 걸 말해줍니다.

일본에 대한 미국의 점령정책은 (일본)군국주의 거세와 정치민주화에 초점이 맞춰졌으며, 피해국에
대한 엄중한 배상도 요구했습니다. ... 제2차 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중국에서는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국공내전)이 벌어졌는데 사태는 국민당에게 불리하게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 물론 미국은
공산당의 승리를 바라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부패 때문에 국민들의 신뢰를 잃어가고 있던 국민당을
지원할 의사도 없었습니다. (@미국은 국민당에게 재정적인 지원만 하다가 1947년부터는 지원규모를
급격히 줄입니다.) ... 이후 미국은 국민당에게 걸었던 희망을 포기하고, 대신 공산당 세력을 중국의
북부지역에 묶어두려는 보다 제한적인 목표를 추구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미국의 일본점령 정책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1947년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 발표로 유럽에서는 서서히 미소 냉전이 시작됐고,
중국에서는 공산당의 승리가 거의 확실시되면서 아시아에서의 일본의 전략적(미국 동아시아전략)
가치가 급격히 커지게 됩니다. ... 이제 미국에게 일본은 단순히 군국주의 거세와 정치민주화 차원을
넘어선 아시아에서의 공산진영 확산을 막는 방파제 역할이 되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 따라서
<“일본인의 생활수준은 조선인이나 인도네시아인, 베트남인보다 높지 않아야 한다!”>는 미국의
일본에 대한 기본적 인식(점령정책)은 이 시점부터 180도 변하게 됩니다. 이 때문에 미국에게는
무엇보다 일본의 경제재건이 시급했으며, 안타깝게도 일본에게 전쟁 책임을 물어 피해국에게 배상을
추진하려던 정책도 흐지부지 되어버립니다.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냉전 기간 중 터키.그리스 등의
지중해 국가들이 소련의 영향권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아지자 이들 국가들의 경제, 군사적 원조를
위해 트루먼 대통령의 요청으로 미국의 의회가 4억 달러의 기금을 책정하기로 선언함.]

1950년부터 동아시아는 본격적인 냉전모드에 진입합니다. ... 1949년 10월 중국에 마오쩌둥을
주석으로 하는 공산국가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지고 그 이듬해인 1950년 2월 중국과 소련의
‘우호동맹 상호원조조약’이 체결되면서 공산진영의 결속과 확산이 가시화되자 미국 의회에서부터
서서히 불만 섞인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더구나 소련의 핵실험 성공이라는 상당한 충격까지
더해지면서 ‘매카시(Joseph McCarthy)’ 상원의원을 중심으로 공화당 정치인들의 비난이 민주당
행정부를 향합니다. ... “중국을 잃어버린 건 트루먼 대통령 때문이다!”

1950년 4월에는 미국의 <국가안전보장회의>가 <NSC-68>이라는 정책문서를 작성합니다.
문서는 소련 중심의 공산세력 확장을 반드시 막아야 한다는 ‘봉쇄정책’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었는데, 이를테면 국제적 세력균형에 매우 큰 영향을 끼치는 서유럽과 일본 같은 지역은 절대로
소련 영향권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내용입니다. ... 더불어 <NSC-68>은 봉쇄정책 수단으로 미국의
군사력이 압도적인 수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대폭적 군비증강) ... 하지만 NSC-68의
제안대로 <압도적 군사력>을 보유하려면 엄청난 돈이 필요했습니다. 때문에 트루먼 대통령은
공산주의 팽창을 막는 ‘봉쇄정책’에는 충분히 공감했으나, 많은 상처를 남긴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이 얼마 되지도 않은 시점에서 또 다시 전시에 준하는 상황을 만들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에
NSC-68의 제안에는 거부감을 드러냈습니다. 그런데 1950년 6월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합니다.
한국전쟁은 당시 미국에게 문서로만 고민하던 공산세력의 팽창문제가 현실로 다가온 직접적이고
실질적인 위협이었으며, 냉전기에 일어난 최초의 <열전(熱戰)>이었던 것입니다. ... 결국 트루먼은
<NSC-68>의 주장을 수용하는 방향으로 봉쇄정책을 추진하게 됩니다.(@국방예산 대폭 증액)

미국과 소련 중심의 냉전구도에서 스탈린 사후의 소련은 주로 유럽에 관심을 집중합니다. 반면
중국은 아시아지역에서의 지도적 공산국가로 거듭나고 있었습니다. 당시 중국은 한국전쟁에 직접
참전한 교전 당사국이었으며 대만해협에서도 자주 위기를 일으켰습니다. 또한 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지원 및 공산이념 확장을 위해서도 에너지를 집중합니다. ... 중국이 이처럼 대내외적으로 공산화
확장행보를 이어가자 미국은 중국을 아시아에서 공산주의 팽창의 주된 위협세력으로 간주하고
그 대응차원으로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군사동맹 체제를 구축합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일본이
있었는데 ... 여기서 미국은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통해 일본에 대한
군사점령을 종결하고 일본과 동맹 관계를 이미 체결한 상태였습니다. ~ 앞서 언급했듯이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공산세력 확장을 봉쇄하기 위한 핵심 방파제가 되어야 했고, 이를 위해 미국은 일본의
경제재건을 위해 <애치슨 라인(Acheson line)>과 동아시아지역의 ‘거대한 초승달(Great Crescent)’
모양의 반공 및 지역통합지대 구축을 추진합니다. ... 군사점령을 종결하고 일본과 동맹 관계를 맺은
미국은 1953년 한국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고, 1954년에는 대만과도 군사동맹을 맺습니다. 이후
필리핀, 태국, 호주 등과도 각각 동맹을 맺으면서 미국은 동아시아 지역에서 연속적 양자동맹체제를
구축하게 됩니다. ... 그런데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이러한 개별적 양자동맹 체제는 유럽 자유진영의
집단적 안보(방위) 동맹 체제인 나토(NATO), 즉 <북대서양조약기구>와는 비교되는 점이 많습니다.
이 부분은 상당히 중요한 내용이라 뒤에서(마지막 5편에서) 좀 더 자세히 얘기하겠습니다.

[◆ 애치슨 선언: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50년 1월 12일, 미국의 국무장관이었던 애치슨은
전미국신문기자협회에서 미국의 극동 방위선을 알류샨 열도-일본-오키나와-필리핀을 잇는 선으로
정한다는 소위 ‘애치슨 라인(Acheson line)’을 발표합니다. ... 이때 한국, 대만, 인도차이나반도,
인도네시아는 이 방위선에서(Acheson line) 제외되었는데, 다만 애치슨은 제외된 지역이 스스로를
방어하며 생존해나갈 수 있도록 미국의 경제원조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안보에서는
제외되지만 경제는 지원한다? 왜일까? 이들 제외된 국가들이 경제적으로 일정 궤도에 올라와야지만
일본 경제를 위한 상품시장이 되고, 일본공업을 위한 원료시장(원료공급처)으로써의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일본의 경제 재건을 위한 서포트(support) 성격이 강했다는
의미입니다. ~ 정리해보면 결국 이 모든 것은 동아시아에서 일본을 공산주의 팽창 봉쇄를 위한
핵심방파제로 쓴다는 미국의 계획에 부합하는 것이었습니다. ... 참고로 애치슨 선언은 스탈린이
김일성의 남침계획을 왜 승인하게 되었는가를 설명하는 하나의 논쟁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극동방위선(Acheson line)의 한국 제외는 미국이 한국을 군사적으로 적극 방어하겠다는 의지가
없다는 의미로 해석되며, 이로 인해 미군의 개입 가능성을 낮게 본 소련이 북한의 남침계획을
승인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확실한 증거는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았고,
이 때문에 애치슨 선언은 한국전쟁 발발 원인 중 하나라는, 그래서 분명한 미국의 실책이었다는
설과, 북한의 남침을 유도하기 위한 미국의 의도된 계획이라는 설 등 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 앞서 언급했던 <샌프란시스코 조약>은 한국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큽니다. 그래서
이 얘기는 좀 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 흔히 대일강화(평화)조약(對日講和條約) 이라고 하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Treaty of Peace with Japan)>은 태평양전쟁의 전후처리에 관한 회의를
말합니다. ...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에 54개국이(공식 서명국은 49개국) 모여 전후처리에
관한 논의를 했는데, 당시 한국은 태평양전쟁의 직접적 당사국이 아니었다는 이유로 서명국, 즉
공식 참가국으로서의 지위를 인정받지 못합니다.(@ 옵서버 자격으로 참가) ... 회의를 주도한 미국은
한국이 공식 서명국으로 참여하게 된다면 분명 일본에게 상당수준의 배상을 요구하게 될 테고,
이 요구가 그대로 관철되면 일본의 경제를 부흥시켜 동아시아 반공 봉쇄를 위한 방파제 역할을
일본에 맡기려했던 미국의 전략적 계획이 지연될 것을 우려해 한국의 공식 참가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 이 조약에서 미국은 일본영토 내에서의 계속적인 미군 주둔과 미군기지 사용, 그리고
일본의 주권회복과 재군비 등이 반영된 강화조약을 체결합니다. ... 더불어 강화조약과는 별도로
미일 안전보장조약(동맹)도 체결합니다.

보통 점령국이 식민지를 지배할 때, 점령국에 대한 충성도 높은 소수파를 우대하는 것은 상투적
전략입니다. 다수파를 우대하면 점령국을 상대로 한 독립운동의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에 점령국에
대한 충성이나 의존도를 높이려면 대개는 식민지에 대한 주요 권한(법적, 행정적)을 소수파에게
쥐어줍니다. 그래야만 식민지배가 한층 더 수월해지기 때문이죠.(ex. 친일반민족행위자의 생성), 또한
점령국이 식민지를 떠날 때는 주변국들의 단합을 약화시키기 위해 식민지에 분쟁의 소지를 남겨두기도
합니다. 그 대표적 사례가 바로 영토 분쟁입니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일본은 주권을 회복했지만,
대신 미국은 일본 안에 영토분쟁의 씨앗을 심어놓았습니다. ... 북쪽으로는 러시아(쿠릴열도),
남쪽으로는 중국(센카쿠열도), 그리고 한국과의 독도분쟁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당시 일본이 반환해야 하는 영토에 <독도>는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만약 미국이 한국을 조약의 공식 참가국(서명국)으로 받아주었다면 지금의 일본과의 ‘독도분쟁’
자체가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은 일본이 앞으로 더 이상은 다른 나라를 침략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세계를
상대로 공식화한 조약입니다. 이로 인해 일본은 <평화국가>로 다시 거듭나게 됩니다. 또한 한국은
조약의 공식 서명국이 아니었기 때문에 전후처리의 주체가 되지 못했고, 이 때문에 일본과의 과거
문제는 일본과 양자협의를 통해서만 해결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됩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협의가
바로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입니다. ... 한국이 조약의 공식 참가국이 아니라는 점은, 쉽게 말해
일본으로부터 보상 및 배상받을 권리를 국제적으로 박탈당했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 그래서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 당시 우리는 일본에게 <경제협력자금> 이라는 형태로 지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 샌프란시스코 조약은 1939년 이후 일본이 연합국을 침략했다는 사실에만 방점이
찍혀있었기 때문에 그 이전에 있었던 한국과 중국의 침략 및 식민화에 관한 내용은 애초 포함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태평양전쟁 이전에 일본이 저질렀던 식민지 주민학살, 생체실험, 강제징용,
성노예 등의 반인도적 전쟁범죄는 샌프란시스코 조약내용에 포함되지 않았고 오직 ‘태평양전쟁’에
대한 책임만 물었습니다. ... 결국 이 조약의 핵심 당사국인 미국과 영국, 일본이 말하는 <평화조약>
에서의 <평화>는 제2차 세계대전 교전국들, 즉 폭압적으로 식민지를 개척했던 옛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평화’였던 것입니다. 또한 일본에게 과도한 징벌을 하게 되면 제1차 세계대전의 독일이 그랬던
것처럼 ~ 다시 경제적 곤경에 빠져 이웃 국가들을 침략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동아시아 공산주의
확산을 막는 방파제 임무가 주어진 일본에게는 징벌을 최소화하고 대신 빠른 경제재건이 시급했던
것입니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의해 평화국가로 새롭게 태어난 일본은 이제 미국의 동아시아전략에 따라
아시아에서의 공산주의 확산을 막는 방파제 임무를 부여받고 소위 <요시다 노선>이라고 부르는
본격적인 경제 재건에 나서게 됩니다.

<“일본의 모든 관청과 군부는 항복 후 연합국 최고사령관이 발표한
포고문과 명령 및 지시를 그대로 따른다. ~ (중략) ~ 일본은 포츠담 선언을
준수하기 위해 연합국 최고사령관이 요구하는 모든 명령에 따른다.“ - (일본 항복문서 中)>
[@ 포츠담 선언: 1945년 7월 미국, 영국, 중국의 3개국 대표가 독일의 포츠담에 모여
일본에게 항복의 기회를 주기위해 항복 조건과 일본 점령지 처리에 관하여 발표한 선언.]

패전 후 일본은 7년에 가까운 미국의 점령기간을 겪습니다. 점령기간 중 일본엔 천황과 정부와
수상이 존재하고 있었지만, 이 모든 것은 형식과 허울뿐이었고 정책결정과 집행권한의 대부분은
GHQ(연합국총사령부)가 관할하게 됩니다. 천황과 일본정부 위에 GHQ가 존재하고 있었던 거죠.
그리고 당시 GHQ의 최고사령관이 바로 <맥아더(Douglas MacArthur)장군>이었으며, 미국의 점령
정책을 가장 잘 따를 것 같은 일본 수상이 <요시다 시게루(Yoshida Shigeru)>였습니다. 요시다의
역할은 항복문서에도 나와 있듯이 오직 미국(GHQ)의 요구에 충실히 따르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 GHQ(General Headquarters): 연합국총사령부, 이름은 연합국이지만 실질은 미국의 단독기관성격]

<요시다 시게루(Yoshida Shigeru)> ... 일본 보수의 본류라고까지 하는 요시다 시게루는,
45대 수상(총리)으로 일본 경제부흥을 최대 목표로 삼은 인물입니다. 제1차 요시다 내각은 1년 만에
끝났지만, 1년 5개월 뒤에 다시 수상이 되어 장기집권을 이어가게 됩니다. ... 이후 요시다의 정책은
지금의 일본 자민당의 주류 정책이 되어 50여년을 이어갑니다.

패전 후, 현재의 일본 경제를 만든 <요시다 노선>을 살펴보려면, 그 전에 먼저 <일본 신헌법>의
태동과정부터 알아봐야 합니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평화국가>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새로운
주권국가(sovereign state)로 다시 태어난 일본은, 사실상 말이 주권국가지 실질은 미국의 보호를
받는 <보호국>이자 여전히 미국의 종속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국가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주권국가(主權國家)’란 무엇입니까? ... 타국의 간섭이나 지배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나라의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권리를 주체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독립국을 말합니다. 그리고 가장 대표적인
핵심 권리가 바로 <안보주권>입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일본은 패전 후 GHQ 점령기간
중에 형성된 미국의 보호 상태, 즉 안보측면에서는 아직까지 미국의 간접통치를 받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마이크 폼페이오(Mike Pompeo) 국무장관>, <마크 에스퍼(Mark Esper) 국방장관>
최근 우리가 언론을 통해 자주 듣는 미국의 핵심인사들입니다. 이미 많은 분들도 아시겠지만,
미국의 외교와 군사안보측면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가 바로 ‘국무장관’과 ‘국방장관’입니다. 그런데
미국에는 이 둘 말고도 또 하나의 핵심직책이 존재합니다. 바로 <국가안보 담당 대통령보좌관>
입니다. 줄여서 <국가안보보좌관>이라고 하는데 ... 미국 대통령과 거의 떨어지지 않고 항상 곁에
존재하면서 때로는 국무장관이나 국방장관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맡기도 합니다. 미국의 역대
‘국가안보보좌관’중 가장 유명했던 인물은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였습니다.
[@ 2019년, 미국 NSC(국가안보회의)의 ‘국가안보보좌관’은 매파 ‘존 볼턴(John Bolton)’ 이었지만
9월 11일로 해임(사임)됐고, 변호사 출신(인질협상 전문가) ‘로버트 오브라이언(매파)’이 미국의
새로운 국가안보보좌관에 임명된 상황입니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Zbigniew Brzezinski)> 또한 키신저만큼 유명했던 미국의 ‘국가안보보좌관’중
한사람 이었습니다. 한국에도 소개된 그의 책 <거대한 체스판(The Grand Chessboard)>에는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미.일 관계가 어떻게 발전될 것인가 하는 것은 중국의 지정학적 미래와 관련해서
중요한 차원이다. 1949년 중국 내전 이래로 미국의 극동정책은 일본에 기초를 두어왔다.
일본은 처음에는 단지 미국의 군사기지에 불과했지만 차차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의 정치 군사적 존립 기반이 되고, 미국에 매우 중요한 세계적 동맹국이 되었지만
여전히 미국의 ‘안보적 보호국’에 머물러 있다.“ - (거대한 체스판. 225페이지) >

지미 카터 대통령시절 미국의 3대 핵심인사라는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낸 ‘Z.브레진스키’는
자신의 책(거대한 체스판)에서 일본을 거침없이 ‘미국의 보호국’이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냉전시기
세계지도를 체스판 삼아 지구적 군사안보전략을 기획했던 인물이 본인 이름을 내걸고 펴낸 책에서
일본의 안보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미국이 일본정부에게 직접적인 지시를 내린 것은
아니지만, 일본 안보정책의 실질적 결정권한이 미국에 있다는 것은 일본 내부에서도 어느 정도는
인정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 물론 한국도 안보주권 행사에서는(이를테면 ‘전시작전통제권’ 등)
미국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고는 말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분단’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현실적으로 제한적인 안보주권행사만 가능합니다. 따라서 일본과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많습니다.

현대 미.일 관계의 시작점은 일반적 동맹계약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항복문서>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 당시 GHQ의 최고 권력자였던 맥아더 장군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일본 국민에 대해 사실상 무제한의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역사상 어떤 식민지 총독이나 정복자도 내가 일본 국민에게 행사했던 권력을
휘둘렀던 사례가 없을 정도다. 군사점령이라는 것은 결국 한쪽은 노예가 되고,
다른 한쪽은 주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 (맥아더 회고록 中) >

‘아시아에서 공산주의 확산을 막는 방파제 일본!’ ~ 점령국 미국(GHQ)에게 일본은 세계전략상
매우 유용한 수단이자 도구였습니다. 당시 일본을 바라보는 미국의 인식이 그러했습니다. 때문에
맥아더에게 일본 천황이나 수상은 노예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 다만 상품이 품질에 따라
구분되듯이, 노예도 계급적(상급, 하급) 구분이 가능한데 일본 지배계층이 상급노예라면, 하급노예의
대부분은 일반 국민들이었습니다. ... 그리고 당시 맥아더에게 매우 유용했던 일본의 상급 노예가
바로 ‘요시다 시게루’ 였습니다.

< “윌로비는 요시다와 매우 가까웠지. 요시다는 테이코쿠 호텔에 있는 윌로비 방에
몰래 들어가려고 종종 뒤뜰에 숨어 있곤 했어. 뒤쪽 계단을 올라오는 요시다와 마주친 적이
몇 번 있었지. 때로는 일본 정치가가 미국대사관에 있는 맥아더 관저에 가지 않아도
윌로비와의 논의만으로 차기 수상이 결정되기도 하고 내각도 만들어졌지.“ >
[알려지지 않은 일본 점령 – 윌로비 회고록(테이코쿠호텔 사장과의 담화 中)]

‘찰스 윌로비(Charles Willoughby)’는 GHQ 정보참모 제2부장(육군소장)으로 맥아더의 신임이
두터웠고 일본 패전시 항복문서 조인식에도 참가했던 인물입니다. 철저한 반공주의자로서 좌익에
대한 검열을 주도했고 미국중앙정보국(CIA) 설립에도 상당한 관여를 했었습니다. <요시다 노선>을
지지했었으며, 미국점령기간 중에 요시다가 가장 믿고 의존했던 인물이 바로 윌로비였습니다. 또한
윌로비는 생물화학무기를 연구하던 731부대의 전범을 기소하지 않는 조건으로 일본이 미국에
정보를 넘겨줄 때도 깊게 관여했으며, 정보참모답게 윌로비는 배후공작에도 매우 능했던 사람입니다.
일본 수상이 점령국 수장이 아닌, 한낱 정보참모에 불과한 윌로비를 만나기 위해 몰래 호텔뒷문으로
숨어들어가 내각을 구성하기도하고, 심지어 차기 수상 인선까지 의논할 정도로 당시 패전국 일본의
형편과 민낯이 그러했으며, 윌로비라는 인물 또한 전후 일본이 만들어지는데 상당한 영향력을
끼쳤던 사람입니다. 이러한 일본의 모습에 트루먼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은 얘기를 합니다.

< 매사추세츠 공대 총장인 콤프턴 박사가 일본에서 귀국한 뒤 백악관에
찾아와 내게 보고했다. 그의 보고서는 다음과 같았다. ~ “일본은 사실상 군인을 모시는
봉건조직 가운데 노예상태였다. 일본 국민은 일본인 보스를 모시다가 새로이 점령군을
모시게 된 것이다. 대부분의 일본인에게 있어서 이러한 전환은 새 정권에서 생계만
유지된다면 별 차이가 없다.“ - (트루먼 회고록 中) >

미국의 일본 점령기간 중 일본의 자주적, 주체적 권한(특히 정치.군사적)은 상실된 상태였습니다.
대신 <경무장, 플러스경제성장> 이라는 요시다의 국가발전노선, 즉 일본의 안전보장을 전적으로
미국에 의지함으로써 군비를 대폭적으로 줄이고, 그렇게 줄어든 군비를 오직 경제성장(민간투자)에
투입한다는 요시다의 정책의지는 어쩌면 당시 일본 상황(노예상태)에서 당연한 선택일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 더불어 요시다 같은 절대적 대미 추종론자는 미국입장에서도 점령기 일본에게 가장
적합했던 수상이었습니다. ... 그러나 요시다는 일본이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주권을
회복(?)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수상으로 남아있게 됩니다. 이는 점령기 요시다의 <대미 추종노선>이
주권회복 이후에도 지속되었다는 의미이며 ... <일본 보수본류의 흐름>으로써 현재까지 이어져오게
되는 하나의 주요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 일본의 ‘보수본류’는 ‘미국추종’의 다른 이름이며
말 그대로 요시다 시게루의 직계 라인을 뜻합니다. ... 요시다의 자유당계 흐름에서 시작해서 이를
이어받은 (이케다 하야토), (사토 에이사쿠), (다나카 가쿠에이) 등 소위 요시다 우등생들을 말하는데
이들은 <기시 노부스케(아베총리 외조부)>의 민주당계 라인과 함께 현 일본 자민당 내 핵심 파벌의
하나를 형성하고 있으며, 이들 모두는 전후 일본정치 바로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3)편에서는 일본의 신헌법 제정과정을 살펴볼 것입니다.
응원글 주시는 분들마다 고맙다는 답글을 하고 싶지만 ~ 그럴수록 스크롤 압박만 더 커질것 같아
비록 답글이 없더라도 ~ 그 밑에 '고맙습니다'라는 투명한 답글이 있다고 생각해주시면
좋을것 같습니다. ]

부동산과 경제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