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일 간 군사정보보호협정을 뜻하는 '지소미아(GSOMIA)' 종료시한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입니다. ~ 한국과 미국은 방위비 분담금 협상에서 치밀한 수싸움을
계속 진행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한국과 미국은 각각 총선과 대선이라는 본격적인 선거모드에
돌입한 상황입니다. ~ 북미간 비핵화 협상 또한 지지부진한 상황입니다.
미국이 왜 그렇게 지소미아 파기에 대해 우려하는지,
미국이 왜 그렇게 황당한 수치의 방위비 분담금을 요구하는지 ... 이에 대한 근본적 이유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 분량이 너무 많아 이야기는 5편으로 나눠서 게시물이 새로
업데이트 될 때마다 한 편씩 올려볼 생각입니다. ~ 아래는 도움 받은 자료와 각 편마다 들어있는
중심내용을 소개한 것입니다.)
<@ 도움 받은 자료들 >
(국제분쟁의 이해/ 조지프 나이/ 한울 출판)
(거대한 체스판/ Z.브레진스키/ 삼인 출판)
(포스트콜로니얼/ 고모리 요이치/ 삼인 출판)
(일본 전후 정치사/ 이시카와 마스미/ 후마니타스 출판)
(결정의 본질/ 그레이엄 앨리슨, 필립 젤리코/ 모던아카이브 출판)
(인간.국가.전쟁/ 케네스 왈츠/ 아카넷 출판)
(냉전의 역사/ 존 루이스 개디스/ 에코리브르 출판)
(미국의 아시아 회귀 전략/ 이용인, 테일러 워시번/ 창비)
(전환시대의 논리/ 리영희/ 창비)
~ 그 외 한국은행, KDI, 국회 등
(1) 경제편 - 일본의 경쟁력과 위기
(2) 국제정치 - 패전국 일본에 대한 GHQ 점령초기 상황
(3) 국제정치 - GHQ 점령기의 일본 신헌법 제정과정과 자민당 탄생과정
(4) 국제정치 - 일본의 대미추종과 자주파 그리고 신(新)미.일안보조약
(5) 국제정치 - 미국의 세계대전략(Grand Strategy)의 변화 과정과 동맹(alliance)의 의미
~~~~~~~~~
1편: 지난 게시물중 <반일 불매운동 근황>이라는 게시물에 올려져 있습니다.
2편: 지난 게시물중 <1991년, 인터넷의 발명과 인터넷 브라우저 전쟁>이라는 게시물에 올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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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하나의 냉전, 한.미.일 관계와 그 이상의 경계에서 - (3) 국제 정치편
- GHQ 점령기의 일본 신헌법 제정과정과 자민당 탄생과정]
일본에 대한 미국 점령정책의 최고 정점은 바로 일본의 새로운 헌법 제정입니다. 정식명칭은
<일본국헌법(日本國憲法)>이라고 하는데, 최근 언론에서 자주 언급되는 <평화헌법>을 말합니다.
제국주의 시대의 비민주적 헌법을 폐기하고 민주주의를 기본원리로 하는 새로운 헌법으로 다시
만들어졌는데, 당시 맥아더는 일본국헌법의 초안을 미군이 작성한 뒤 일본이 (무조건)수용하도록
강력히 요구했습니다.
메이지 유신(1868)은 말 그대로 ‘메이지 천황(Meiji Tenno)’에 의한 일본근대화 개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개혁은 위로부터의 개혁이었지 아래로부터의 개혁, 즉 시민혁명에 의한 개혁이 아니었기
때문에 평범한 국민들의 민주적 권리인 <시민정신>, 다시 말해 시민적 민주법치 정신이 정립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던 개혁이었습니다. ... 때문에 메이지 유신은 천황을 상징하며, 더 넓게는 하나 된
일본(전체)을 의미하는 <덴노(Tenno)> 중심의 부국강병을 이룩하기 위해 철저한 관료통치를
바탕으로 국가변혁을 이끌어낸 과정이었습니다. 따라서 메이지 유신이 일본 근대화를 앞당겼을 때
그 속엔 국수주의적, 전체주의적 요소가 필연적으로 담겨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GHQ 최고사령관 맥아더는 <샌프란시스코 조약> 이전까지 일본의 배상문제가 거론될 때마다
“일본의 구식민지 포기“ 자체가 바로 <거액의 배상과 동일>하다고 말하며 일본에 대한 그 이상의
배상요구에는 반대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 이에 대해 훗날 도쿄대 교수 ‘하라 아키라’는 다음과
같은 평가를 합니다.
“가해자로서의 속죄 의식으로 배상을 지불함으로써 국제 사회로의 복귀를
꾀하기보다는 오히려 배상을 하나의 경제적 기회로 파악하고 그것을 현지에 대한
경제적 진출의 계기로 삼는 의식이 더 강하게 작용 했으며, 이는 일본이 전쟁에 대한
반성이나 책임에 대한 자각을 충분히 행할 기회를 갖지 못한 것이 되었다. 따라서
‘경제적 진출’이라는 이름의, 미국과 결탁한 신식민주의로 전화해 갔던 것이다.“
- (포스트콜로니얼. 125페이지/ 고모리 요이치/ 삼인 출판)
<시민혁명이 부재>한 상태에서 진행된 위로부터의 근대화 개혁(메이지 유신)과 전쟁범죄에 대한
진정성 있는 사과와 반성 및 책임의 기회를 자발적으로 내팽개쳐서 생성된 <자각의식의 부재>는
유사한 속성을 갖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유비(analogy)관계>를 기초로 세워진 국가가 전후 일본의
참모습입니다. 때문에 일본은 잘못을 구분하는 능력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반성과 책임의식 모두에서
주체성을 상실하였으며, 오직 타국(미국)이 설정한 방향을 관습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에만 익숙해진
상태입니다. ... 결국 <시민혁명의 부재>와 <자각의식의 부재>라는 <유비(analogy)관계>는 일본의
통합의 상징이자 신앙적 의미로까지 확장되는 <천황(덴노)>과 더해지면서 바로 일본만의 고유의
<레종 데타(raison d’État)>를 생성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 국민들에게는 천황은 일본이라는 국가(전체) 그 자체이자 태양신의 자손이므로 <신화적>
의미로도 받아들여집니다. 따라서 <만세일계>의 왕, 즉 “천황폐하 만세”를 부르짖으며 전쟁터에서
죽는 것은 개인의 영광차원을 넘어서는 신과의 영적 결합이자 신성한 접촉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제국주의시절 일본 헌법에 녹아들어있던 덴노(천황)의 신화는 국가이데올로기인 동시에 국가이성,
즉 <레종데타>의 가장 대표되는 상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때문에 이러한 비민주적, 신화적
요소를 제거한 <일본국헌법(日本國憲法)> 제정에 맥아더가 적극적으로 관여하려 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입니다.
[@ 만세일계(萬世一系): 천황의 혈통이 2천년 이상 단 한 번도 단절된 적 없이 계속해서 이어져
왔다는 의미로, 천황제 국가 일본의 ‘국가이데올로기’의 근간을 이루는 대표적인 상징이자 요소.]
1946년 2월 13일 오전 10시, 외무대신 관저에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 외무대신 요시다 시게루,
헌법문제조사위원장 마쓰모토 박사, GHQ소속 휘트니 민정국장 ~ 이어서 휘트니 장군이 말합니다.
<“지난번 당신들이 제출한 헌법개정안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문서라고 보기에는
맥아더 최고사령관께서 전혀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최고사령관께서는 우리가 가져온
GHQ 헌법 초안을 당신들에게 전달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최고사령관께서 이 문서를
제시하게 된 진의와 이유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 지금 맥아더 최고사령관에게
천황을 전범 취급해야 한다는 외국의 압력이 계속해서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최고사령관께서는 천황을 지켜주기로 결심하셨습니다. 물론 최고사령관의 힘이
전지전능할 수는 없습니다. ~ 다만 우리가 만든 헌법 초안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천황제는 계속 유지될 것이며, 일본이 GHQ 관리에서 하루빨리 벗어나 독립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울 것입니다. 또한 일본 국민들에게도 기본적 자유와 권리가
주어질 것입니다.“ - (일본국헌법 제정과정. / 다카야나기) >
휘트니 장군은 만약 일본 정부가 GHQ의 헌법 초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천황이 전범으로
처형될 수 있으며 요시다 외상을 비롯한 정부의 핵심 각료 상당수가 권력에서 밀려날 것이라고
협박에 가까운 통보를 했습니다. ... 그리고 결국 일본은 GHQ 측과 협의하여 ‘일본국헌법’ 초안을
마무리 하게 됩니다. ... 이쯤 되면 점령기 일본은 미국의 간접통치가 아니라 직접통치를 받았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참고로 당시 외무대신으로 GHQ의 헌법초안을 받아들였던
요시다 시게루는 그해(1946년) 5월 일본 수상이 됩니다. 이후 요시다는 국회에서 헌법 심의를 거쳐
같은 해 11월 헌법을 공포했고, 다음해인 1947년 5월 수상에서 사임합니다. ... 결론적으로 제1차
요시다 내각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오직 GHQ 헌법 시행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참고: 맥아더 최고사령관은 GHQ 헌법 초안에 세 가지 핵심 내용이 반드시 담겨져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 첫 번째는 <(1) 천황의 신화적 요소제거>입니다. ... 1946년 1월 1일, 일본천황은
조서(詔書.왕이 국민에게 알리는 문서)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얘기를 합니다.
“짐과 국민 여러분 사이의 유대는 시종일관 상호 신뢰와 경애로 맺어진 것으로,
단지 신화와 전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천황을 마치 ‘현존하는 신’으로 간주하고
일본 국민을 다른 민족보다 우월한 민족으로 여김으로써 결국 세계를 지배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지고 있다는 허망한 관념에 근거한 것 또한 아닙니다.“
- (일본 전후 정치사. 49페이지/ 이시카와 마스미)
소위 <천황의 인간선언> 이라고 부르는 이 선언에서, 일본국민들에게 천황은 이제 ‘신격(神格)’이
부정된, 자신들과 동등한 <인간의 지위>로 내려앉게 됩니다. ... 이는 전쟁에서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며 죽음을 불사하던 일본 고유의 사상의 근원(국가이데올로기)이 한순간에 사라져버린, 그래서
일본 국민들에게는 더더욱 충격적인 순간이었습니다. ~ 신헌법 이후 이제 일본에서 천황의 존재는
신화가 아닌, 더불어 정치적 권능이 모두 제거된 단순한 <상징>으로만 남게 됩니다.
맥아더가 원했던 GHQ 헌법 초안의 두 번째 핵심내용은 <(2) 전쟁의 폐기>입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일본에서 천황의 존재는 신성의 영역이자 <국가전체>, 그리고 일본 고유의
‘레종데타’의 의미가 있습니다. 때문에 일본 국민 개개인은 <천황이 다스리는 나라> 안에서만
그 존재이유가 설명됩니다. 이것은 결국 일본에서 천황이라는 존재가 사라지지 않는 이상 국민들은
언제나 ‘국가’라는 <전체>에 함몰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입니다. ... 더욱이 이러한
<덴노(Tenno.천황)> 중심의 사상적 기반에 더해 “육군.해군에 대한 군사통수권을 천황이 가진다.”는
<메이지 헌법 제11조(구 일본제국헌법)>의 규정은 일본 내부에 <전체주의의 상시부활가능성>이
영구적으로 내재되어 있다는 걸 의미했습니다. ... 그리고 맥아더는 이것이 꽤나 신경 쓰였고,
천황을 전범으로 처형하라는 주변 국가들의 압력까지 계속해서 더해지자 천황을 상징으로만
남겨두는 대신 일본을 <군비(군대)없는 국가>로 만들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 (@ 천황제를
상징으로라도 존치시킨다면, 일본국민들이 큰 저항 없이 점령정책도 한결 수월해질 것이고, 대신
‘군대 없는 국가’를 신헌법 안에 못 박아 둠으로써 주변국들의 불만도 함께 잠재울 수 있었습니다.)
일본을 두 번 다시 전쟁을 일으킬 수 없는 국가로 만들기 위해 맥아더는 신헌법을 통해 아예
처음부터 싹을 잘라버리려고 했던 거죠. ... 나머지 맥아더가 원했던 세 번째 헌법초안 내용은
<(3) 봉건제 폐기> 였습니다.
한 나라의 헌법을 들여다보겠다는 것은 그 나라의 ‘정신’을 보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일본 헌법(평화헌법)에는 ‘일본의 정신’ 이라기보다는 <미국의 의지>가 상당부분 깃들여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1947년 4월, 일본은 새로운 헌법(일본국헌법)체제하에서 총선거를 실시합니다. ... 선거 결과는
당시 ‘가타야마 데쓰’가 이끌던 일본 사회당이 제1당이 되고, <가타야마 데쓰>는 일본의 제46대
수상이 됩니다. ... 패전 후, 전 국민이 생활고에 시달리던 상황이었으니 사회당으로 국민들 지지가
쏠렸던 것은 그나마 이해가 가는데, 이해하기 힘든 점은 ‘맥아더가 왜 사회당 정권을 허용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 더구나 그때는 미국과 소련의 대립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던, 그야말로 냉전의
초입에 해당하던 시기였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맥아더가 남부침례교회의장 뉴턴박사에게 보낸
편지 내용을 살펴봄으로써 나름의 추측을 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본인의 정신생활은 전쟁으로 공백상태가 되어 있으므로 지금이 일본에게 포교할
절호의 기회입니다. ~ (중략) ~ 가타야마가 일본 수상이 된 것은 정치적인 의미 못지않게
정신적인 의미에서 중요한 일입니다. 역사상 실로 처음으로 일본은 전 생애를 기독교인으로
살아온 지도자를 모시게 된 것입니다. 국제적으로 보아도 이는 의미 있는 일입니다. 동양의
3대 강국인 중국의 장제스, 필리핀의 로하스, 일본의 가타야마 데쓰 ... 이들 3명 모두가
기독교인입니다.“ - (맥아더 서간집 / 아유카와 구니히코) >
전후 일본의 신헌법(일본국헌법) 체제하에서 처음으로 탄생한 정권이 바로 사회주의 계열의
<가타야마 내각> 이었습니다. ... 일본에서 천황이라는 존재가 중력의 힘으로 작용하고 있을 때,
그 힘을 모두 제거하고 하나의 상징으로만 남겨둔 맥아더가 ‘천황’이라는 사상의 공백을 오롯이
기독교 정신으로 채우려는 목적에서 사회당 정권의 탄생배경을 추론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이 이유 하나 때문에 사회당 정권이 가능했다고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당시 GHQ 내부에는
일본의 비군사화와 민주화 및 노동개혁을 추진했던 소위 <민정국(GS:Government Section)>이라는
진보그룹(사회주의 성향)이 존재했었는데, 가타야마 내각이 바로 이 <민정국(GS)>의 지지를 많이
받았다는 점도 사회당 정권 탄생의 주요한 요인이었습니다. ... 하지만 전후 국제질서가 본격적인
미.소 냉전체제로 접어들자 GHQ 점령정책 또한 반공정책 위주로 재편됐고 민정국(GS) 또한 점차
힘을 잃어가게 됩니다. 이후 가타야마 내각은 극좌 성향의 히라노 농림부대신 임명 문제로 GHQ와
갈등을 겪다가 아이러니 하게도 자신들을 지지했던 민정국(GS)에 의해 타격을 받고 붕괴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정보 하나를 포착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미국’에 소속된 공동체
구성원들의 이념적 스탠스는 오직 자국(미국) 안에서만 그 의미가 부여될 뿐, 외부(다른 국가)의
시선에서 그들의 성향이 무엇인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우리들 중 누구라도
자신이 미국의 주변부에 속해있다면, 미국을 바라볼 때는 미국의 정신이 아닌 오직 <미국의 이익>의
관점으로 사태를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이는 이 글을 관통하는 <레종 데타(raison d’État)>의
시선과도 궤를 같이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앞서 보셨듯이 미국(GHQ)의 일본 점령정책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내용은 바로 <일본의 비군사화>
입니다. ... 일본을 더 이상 미국에 위협이 되지 않는 국가로 만들기 위해 <군대(군비) 없는 일본>을
‘일본국헌법(신헌법)’에까지 명문화하여 미국의 의지를 철저히 각인시켰던 것입니다. ... 이에 따라
미국은 점령기 초에 일본에 매우 강력한 경제제재조치를 취합니다. 한 나라 군사력의 근간은 결국
돈(경제)이 좌우하기 때문에 미국은 일본 경제의 기초라고 할 수 있는 공업시설을 먼저 파괴했고
재건 또한 불허하는 방침을 세웠습니다. 더불어 일본인의 생활수준은 그들이 침략한 아시아 국가들
수준보다 높지 않도록 한다는 것이 당시 미국(GHQ)의 일본에 대한 기본적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1948년부터 미국의 점령정책에 큰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미국과 소련의 대립, 즉 본격적인
냉전체제의 시작은 독일(서독)과 일본을 다시 공업국가로 부활시켜 소련에 대항할 수 있는 반공의
보루로 활용해야 한다는 쪽으로 미국의 세계전략을 바꾸게 만들었습니다.
<“국방성 초대장관인 제임스 포레스탈(James Forrestal)은 소련에 대항하려면
구 적국을 포함해서 모든 리더들이 가진 방법을 최대한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일본과 독일에게 한 번 더 임무를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 (중략) ~ 후버 전 대통령은
1947년 5월, 일본이나 독일이야말로 서구문명의 최전선이고 일본은 공산주의 행진에
대항하는 진정한 이데올로기 방파제라고 역설하였다.“ - (냉전과 미일관계/ 이시이 오사무)>
GHQ 점령 초기인 1946년 일본의 경제규모는 (1930년 ~ 1934년의) 18% 수준으로 추락했고,
1947년에 간신히 40% 수준까지 올라왔지만, 여전히 일본은 물자부족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국 NSC(국가안보회의)가 만든 <미국의 대일정책에 관한 권고(NSC13-2)>라는
정책문서가 1946년 10월 정식으로 승인됨으로써 일본경제는 다시 부흥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당시 트루먼 대통령은 디트로이트 은행 총재인 조셉 닷지(Joseph Dodge)에게 일본의 경제 부흥을
요청했고 닷지는 일본으로 건너가 곧바로 일본의 경제부흥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일본 군사력, 경제력 해체와 정치 민주화> or <소련 대항마 역할을 위한 일본 공업(경제)부활>
과연 어느 쪽이 미국에 더 이익인가? ~ 미국의 선택은 단순하고 깔끔하고 명쾌하기까지 했습니다.
개인(기업)이든, 국가든 기존의 정책(점령정책)을 180도 전환한다는 건(그것도 상당히 신속하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미국의 정책 전환에는 일본의 경제부흥뿐만 아니라 사람에 대한 인식도
바꿔놓게 됩니다. 바로 전범(戰犯)에 대한 필요성이었습니다. 그래서 군대와 행정 경험이 풍부했던
고위급 전범들이 줄줄이 석방되었고 상당수는 정계에 복귀하게 되는데 ... 그중 가장 유명했던
인물(전범)이 바로 현 일본 총리 아베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입니다. [@ 패전 직후인 1945년
9월 11일 A급 전범으로 체포되어 스가모 형무소에 갇혀있던 ‘기시 노부스케’는 옥중 서신에서 향후
냉전의 시작과 그로인한 미국의 일본 활용 및 공업부흥 등의 정책전환과 전범들의 석방 가능성
까지를 모두 예측합니다. ‘쇼와시대 요괴’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당시 일본에는 기시 노부스케만큼
국제정치에 탁월한 혜안을 가진 인물은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미국의 급격한 정책변경은 당시 일본을 쥐락펴락하던 맥아더의 점령정책(특히 일본군사력 해체)이
완전히 부정당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 때문에 당연히 맥아더 vs 트루먼 대통령 및 국방성
간에 상당한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일본에 대한 GHQ의 점령을 서둘러 끝내고 평화조약을 맺어 연합군 총사령부를
해체해야 한다. ~ (중략) ~ 제1단계, 일본의 비군사화는 이미 종료되었다. 제2단계,
정치에서 GHQ 지배는 끝나가고 있다. 제3단계, 일본 경제는 점령군이 처리할 수 없는
문제다.“ - (1947년 3월 18일 아사히신문. 맥아더 기자회견) >
당시 맥아더는 일본 점령을 서둘러 끝내려고 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원래 GHQ의 가장 큰 목표는
<일본의 비군사화>였기 때문에 ... 그 목적만 달성된다면 계속 돈을 써가며 더 이상 일본에 머물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던 차에 한국전쟁(6.25)이 발발합니다. ... 일본의 재군비를
가장 크게 반대했던 맥아더에게 <현실로 다가온 공산주의 위협(한국전쟁6.25)>은 더 이상 일본의
재군비 반대를 주장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 결국 1950년 7월 8일(한국 전쟁 발발 13일째),
맥아더는 요시다 수상에게 서간(편지)의 형식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통보합니다.
<“일본 정부에게, 정부 직속의 국가경찰예비대 7만 5천명과
해상보안청 요원 8천명을 증원할 권한을 부여한다.“ – GHQ 총사령관 맥아더>
국가경찰예비대와 해상보안청요원의 증원은, 한국전쟁으로 주일미군이 한반도에 파견됨에 따라
일본 국내 치안공백을 우려한 필연적 조치였던 것입니다. 참고로 당시 국가경찰예비대 7만 5천명은
한국전쟁에 파견된 주일미군 숫자와 거의 비슷한 규모였으며 ... ‘국가경찰예비대’는 이후 일본의
<자위대>로 거듭나게 됩니다. 그런데 당시 요시다 수상은 일본의 재군비에 상당히 소극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 앞서도 언급했지만, 요시다 (경제)노선의 핵심은 <경무장, 플러스경제성장>, 즉 일본의
안보는 전적으로 미국에게 맡김으로써 대폭적으로 줄어든 군비를 오직 일본 경제성장(민간투자)에
투입하여 하루빨리 일본 경제를 재건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그런데 만약 미국의 요구대로 일본이
재군비를 강행하게 된다면 일본 경제는 과부하에 걸려 붕괴할 것이며, 이는 아시아에서 공산주의
진영에게 일종의 기회(공산이념 확장)로 이어지게 될 것이라 요시다는 주장했습니다.
1951년 1월(한국전쟁 발발 7개월째),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평화조약)을 위해 미일간 사전교섭이
있었는데 이때 미 국무성 정책고문 존 덜레스가 일본을 방문합니다. 덜레스는 요시다와의 회담에서
일본의 재군비에 적극 협조할 것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둘은 합의점을 찾지 못했고, 결국 당시
요시다가 가장 많이 의지했던 맥아더의 도움으로 일본의 재군비 논의는 잠시 수그러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맥아더는 한국전쟁과 관련해 트루먼 대통령과의 의견차이로 1951년 4월 11일 파면을
당하고, 이로써 요시다는 자신의 든든한 후원자를 잃게 됩니다.
[@ 존 포스터 덜레스(John Foster Dulles): 미국 국무성 고문.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미일 안보
조약을 기획하였습니다. 1950년대 내내 미일 교섭에서 강경한 입장을 고수함으로써 일본입장에서는
상대하기에 매우 까다로웠던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요시다의 모든 염려는 기우에 불과했다는 것이 한국전쟁에 의해 증명됩니다.
점령정책에 의해 파괴 계획이 있었던 850여개에 달하는 일본 공업시설의 철거가 중지되었고,
무기생산 금지령이 해제됩니다. 또한 점령 초기 상당히 심각했던 일본의 식량사정은(1일 1인 1홉)
‘한국전쟁’이라는 전쟁특수 덕분에 상당부분 개선되었고, 특히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일본의 배상은
공업시설, 기계류 등의 현물 배상 방식에서 ~ 일본의 공업시설을 우선적으로 지원.복구하여 거기서
생산되는 상품과 일본인의 용역 등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바뀌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배상
방식은 모두 미국의 계획과 의지가 충분히 반영된 결과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 ‘공산주의 방파제’
라는 막중한 임무가 부여된 일본이 만약 피침(被侵) 국가들에 대해 직접적인 현물 배상을 했다면
일본의 (경제)재건은 상당히 늦어지거나 다른 아시아 국가들 수준에서 그냥 멈춰버렸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 아무튼 미국의 의도대로 진행된 일본의 배상 방식은 ‘배상’이 아닌, <경제협력>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아시아 전역에 일본의 공업 생산품과 용역이 제공되는 횟수가 서서히 증가하면서
아시아는 시나브로 일본 경제의 상품시장으로 변모해갔던 것입니다. ... 더불어 한국전쟁(6.25)으로
미군의 병참기지 역할이 일본에 주어지면서 일본은 그야말로 엄청난 ‘전쟁특수’를 누리게 되는데,
당시 일본 전체 외화수입에서 한국전쟁특수가 차지했던 비중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제2차 세계대전이후, 반세기 이상을 일본의 상품과 용역, 그리고 교육과 문화에 장악된 아시아
국가들에게(특히 전후세대) ‘친일 의식’은 당연한 현상이거나 구조적 수순이 아니었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아시아 국가들의 상처위에 ‘친일 의식’이 무의식으로 자연스럽게 덧발라져
있어 지금까지 새살이 돋을 자리를 지속적으로 무의식(친일)이 채우고 있었던 것이라 생각됩니다.]
[◆ 일본의 한국전쟁특수 수입 - (일본 외무성 조사보고서)]
@ 1950년 – 외화수입(1억 4,800만 달러), 외화수입 중 한국전쟁 특수비율(14.8%)
@ 1951년 – 외화수입(5억 9,100만 달러), 외화수입 중 한국전쟁 특수비율(26.4%)
@ 1952년 – 외화수입(8억 2,400만 달러), 외화수입 중 한국전쟁 특수비율(36.8%)
@ 1953년 – 외화수입(8억 900만 달러), 외화수입 중 한국전쟁 특수비율(38.1%)
보시다시피 한국전쟁 기간 동안, 일본은 자신들의 전체 외화수입 중 3분의 1을 상회하는 수입을
모두 한국 전쟁을 통해 얻습니다. 더불어 일본의 광공업 생산은 한국전쟁특수 덕분에 전전 수준을
훨씬 더 뛰어넘게 됩니다. ... 맥아더 파면이후, GHQ 제2대 총사령관으로 부임한 ‘매튜 리지웨이’는
전범들의 공직 추방령을 완화하여 대략 25만여 명의 정치인 및 군장교들이 다시 현직으로 복귀하게
됩니다. 특히 하토야마 이치로, 이시바시 탄잔, 기시 노부스케 같은 거물급 정치인들이 다시 정계에
복귀하였고 ... 1952년 10월 GHQ의 일본 점령이 끝나고 나서 치른 첫 총선거에서 중의원 의석의
42%를 추방 해제자들이 차지하게 됩니다.
[@ 매튜 리지웨이(Matthew Ridgway. 1895~1993): 미국 육군 출신, 맥아더 후임으로 GHQ 제2대
총사령관으로 부임함. 한국전쟁에서 중공군을 북쪽으로 밀어내고 유엔군 구출과 남한을 성공적으로
방어함.]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1951년 9월 8일)으로 전쟁 상태를 종결함과 동시에 GHQ의 점령에서도
벗어나게 된 일본은 당시 강화조약(평화조약) 외에 <미일 안보조약>도 함께 체결합니다. 여기에
<경무장, 플러스경제성장>을 외쳤던 요시다 시게루가 1954년 12월까지 장기집권 함으로써 일본의
대미추종노선은 더욱 공고해졌습니다. ... <미일 안보조약>은 일본 입장에서는 상당히 불평등한
조약이었습니다. 당시 일본 국민들 상당수는 ‘미일 안보조약’에 의해 앞으로 미국이 항상 일본을
지켜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1960년 조약을 개정하기 전까지 <미일 안보조약>에는
미국이 일본을 방위해야할 그 어떤 의무조항도 없었습니다. ... “내란이나 작은 국내적 소요사태가
벌어졌을 때 일본 정부의 요청이 있다면 미군이 개입할 수 있다.“ 정도의 안보조약 이었던 것입니다.
반면 미국은 이 조약으로 원하는 규모의 군대, 원하는 기간 동안 일본 전국 어느 곳에서도 자유롭게
미군을 주둔시킬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되었고, 미군과 군속 및 미군 가족의 일본 국내 범죄에
대한 재판권까지 갖게 됩니다. ... 강화조약으로 일본은 분명 GHQ 점령체제에서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치외법권을 가진 미국의 군대가 자신들 마음대로, 자유롭게 일본영토 내에 주둔권리를
갖는다는 건 <미일 안보조약>의 불평등성을 그대로 증명하는 것이었습니다. ... 다만 공산진영의
팽창위협이 한국전쟁이라는 직접적 현실로 다가왔기 때문에 일본 점령이 끝났음에도 미국에게는
일본 내 미군기지(점령군이 아닌 ‘주일미군’) 필요성이 절실했던 것입니다.
미일 안보조약 체결당시 미국 측 서명자는 애치슨 국무장관, 덜레스 국무성고문, 와일리 상원의원,
브리짓스 상원의원으로 4명 이었던 반면, 일본은 ‘요시다 시게루’라는 절대적 대미추종자 단독으로
미국과 안보조약을 체결합니다. 때문에 미일 안보조약의 ‘불평등성’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 이후 미일 안보조약은 아베 현 일본 총리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가 총리로
재임하고 있던 시기인 1960년 1월에 개정되었고, 이때 개정된 미일 안보조약이 현재까지 계속해서
이어져오게 됩니다. 참고로 개정 전 요시다의 안보조약을 <구(舊)미일안보조약>, 개정된 안보조약을
<신(新)미일안보조약>이라고 부르는데 ... 개정된 <신(新)미일안보조약>은 당시 일본 열도 전체를
흔들어 놓는 대형사건이 됩니다.(@ 이 부분은 뒤에서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절대적 대미추종자 <요시다 시게루>는 전후 일본체제를 이해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요시다 이외에도 일본 현대사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이 몇 명 더 있는데, 대표적
인물이 바로 <하토야마 이치로(52.53.54대 총리역임)>와 <기시 노부스케(56.57대 총리역임)>입니다.
GHQ 제2대 총사령관 ‘매튜 리지웨이’의 공직 추방령 해제로 다시 정계에 복귀한 거물급 정치인
<하토야마 이치로(이하 ‘하토야마’)>는 ... 자유당이 1946년 총선거에서 제1당이 되었을 때 ‘총재’
자리에 있었던 인물입니다. 그러나 GHQ의 추방 조치로 ‘요시다 시게루’에게 총재 자리를 양보하고
물러났는데, 이후 추방령이 해제될 즈음 그동안 요시다의 굴욕적 대미추종을 지켜보았던 하토야마는
GHQ 점령체제를 벗어난 일본에게 이제는 새로운 정치체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신당’ 창당을
결심하게 됩니다. ... 하지만 하토야마가 뇌출혈로 쓰러지자 그와 뜻을 함께 했던 측근들은 일단은
신당 창당을 잠시 뒤로 미루고 자유당으로 복귀해 당내에서 반(反)요시다 운동에 전념하는 쪽으로
계획을 수정하게 됩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이후 1952년 최초의 선거가 있었고, 불과 200여일 후인 1953년에 일본은
또 다시 선거를 치릅니다. ... 이 기간 동안 자유당은 <요시다 진영 vs 하토야마 진영>간의 정쟁으로
시간을 다 보내다가 결국 1953년 4월 19일 총선거에서 과반에 못 미치는 202석을 얻고 참패하게
됩니다. ‘진보는 분열로 망하고 보수는 부패로 망한다’는 말과는 반대로 당시 보수진영(자유당)의
선거 참패원인은 바로 자유당 당내의 내부분열이었던 것입니다. 반면 좌파진영은 크게 약진했는데,
대표적으로 좌파사회당의 의석수는 72석으로 이전의 56석보다 16석이 늘어났으며 이는 1951년의
16석에 비하면 1953년의 좌파사회당의 의석수는 무려 4.5배가 늘어난 수치입니다. ... 여기에 다른
좌파진영 수치를 살펴보면 ~ 우파 사회당이 6석 증가로 66석 확보, 노동당 1석 증가로 5석 확보,
의석이 없던 공산당도 1석을 확보합니다.
1953년 선거의 최고 쟁점은 바로 <일본의 재무장(재군비)> 이었습니다. ... 하토야마 진영은
헌법 9조를 개정해 정상 군대를 가져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던 반면, 요시다 진영은 헌법은
그대로 유지한 채 “전투력(戰鬪力) 없는 군대” 라는 모호한 구호를 외치면서 당장은 아니지만
점진적으로 재무장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 앞서도 얘기했지만 요시다 입장에서는
일본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는 재무장이 아니라 “경제성장”이었습니다. (@경무장, 플러스경제성장)
이에 대해 좌파 사회당은 <보안대(경찰예비대)>를 아예 ‘해산’하는 쪽으로, 우파 사회당은 보안대
‘축소’를 주장하며 좌우 양 사회당 간에 입장차이가 있었지만, 큰 틀에서 보면 좌파진영은 재무장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합니다. ... 결국 선거결과가 말해주듯이 당시 일본 국민들 머릿속에는 패전 후
인내와 고통의 시간을 힘들게 보내고 있는데 다시 청춘들에게 총을 들게 한다는 것에 상당한 정서적
거부감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일본 사회당: 일본의 대표적 좌파 정당으로 점진적 사회주의와 중립외교를 주장했습니다.
전후 농민.노동자 운동으로 활약했던 니시오, 미즈타니, 히라노 등 3명을 중심으로 만들어졌으며,
<사회당>이라는 공식 당명이 결정되기까지 ... 좌파 색채가 강했던 ‘일본 노동당’, 우파 색채가
강했던 ‘사회대중당’ 여기에 사민(사회민주주의) 계열 등이 혼재되어 주도권 경쟁이 치열했습니다.
이후 일본 사회당은 좌파와 우파로 분열됐고, 1955년 다시 통합하게 됩니다. (1996년 사회당의
당명은 ‘사민당’으로 개칭됩니다.)]
요시다의 자유당은 총선거에서 과반의석을 확보하지 못했지만 여전히 제1당이었습니다. 하지만
소수여당이었기 때문에 총선 이후에는 야당과의 접촉을 적극적으로 시도하며 지속적인 세 불리기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보안대를 자위대로 재편해 외부의 직접적인 침략에 대비한다.“>는
내용으로 당시 제2당 이었던 ‘개진당’과 합의를 이끌어 냅니다. 여기에 일본의 재무장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하토야마 진영을 설득하기 위해 요시다 진영은 당내에 <헌법개정조사회>를 설치하는
조건을 내세워 이들을 다시 요시다 진영으로 합류(복귀)시키는데 성공합니다. (@ 하토야마 진영의
일부는 복귀를 거부함. 8명)
1953년 총선거 이후 ... 요시다의 세 불리기 노력에도 불구하고 보수진영의 분열은 계속됩니다.
그러나 정책에 대해서만은 보수 간의 특별한 대립은 없었습니다. ~ ‘전력.석탄 사업의 파업규제법’,
‘교육2법(일본 교원노조 활동제한법)’, ‘경찰법 개정(국가의 경찰 감독권 강화)’, ‘방위청 설치법 및
자위대 법‘ 등은 좌파 진영(좌우 사회당)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보수진영이 모두 합심하여
통과시킨 법안들이었습니다. ... 그러다가 <조선(造船) 비리 의혹 사건>이라는 보수 분열의 결정적인
사건이 터져버립니다.
<조선(造船) 비리 의혹 사건>은 ... 해운 및 조선업 관계자들이 더 많은 융자를 할당받기 위해,
그리고 이자에 대한 더 많은 국가보조를 받기 위해 해운업 입법과정에서 보수 정계에 뇌물을 준
사건이었습니다. ... 이 사건으로 당시 미쓰비시 조선의 사장이자 일본 조선공업 협회 회장이었던
니와 가네오 및 도코 도시오(이시카와지마 중공 사장) 부회장 등 71명이 체포 됩니다.
1954년 4월 20일, 대검 수뇌부는 뇌물 수령의 핵심 용의자였던 자유당 간사장(한국의 원내대표격)
‘사토 에이사쿠(요시다 진영)’ 체포를 중의원에 요구했으나 요시다 총리, 오가타 부총리 등의 의중에
따라 당시 법무상(한국의 법무부 장관격) ‘이누카이 다케루’는 검찰청 법 14조에 의거해 검찰총장에
대한 지도권을 발동해 간사장 사토 에이사쿠의 체포를 저지합니다.(@ 다음날 이누카이는 사직함)
결국 꼬리보다 못한 17명만이 유죄판결을 받음으로써 모든 수사는 유야무야로 종결되어 버립니다.
[@ 일본의 양원제(兩院制): 입법부가 두 개의 의회로 구성된 제도. 대표적 양원제 국가는 미국이며
각주를 대표하는 상원(United States Senate)과 미국 국민 전체를 대표하는 하원(United States
House of Representatives)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일본의 참의원(參議院)은 미국의 상원에 해당하며
중의원은 미국의 하원에 해당합니다. 반면 하나의 의회로 국회를 구성하는 것을 단원제(單院制)라
하며 한국은 단원제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참고- 다음백과)]
언제 터져도 이상할 게 없었던 당시 보수분열의 에너지는 <조선(造船) 비리 사건>으로 더 크게
증폭되었고 이는 자유당에 대한 내각불신임으로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요시다의 자유당은
내각불신임안에 대해 일단은 거부권을 행사합니다. 그러다 결국 1954년 11월, 요시다 내각 타도를
외치며 제2당이었던 개진당의 거의 모든 의원 69명과 1953년 총선 이후 요시다 진영에 합류했던
하토야마 진영의 43명, 합류하지 않았던 8명 등 총 120명의 의원이 모여 <민주당(일본 민주당)>
이라는 새로운 정당을 결성하게 됩니다. 이후 민주당과 좌우 양 사회당은 공동으로 요시다 내각의
불신임안을 제출합니다.(총 253명) ~ 결국 요시다 내각은 6년 2개월(1차 내각 포함하면 7년 2개월)
이라는 장기 집권을 끝내고 물러나게 됩니다.
1954년 12월 10일 ... 요시다 내각이 물러난 자리에 <제1차 하토야마 내각(민주당)>이 들어섭니다.
그전에 하토야마를 주축으로 한 민주당은 120명이라는 소수당의 한계 때문에 불가피하게 좌우 양
사회당과 협치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요시다 라인인 ‘오가타(이전 부총리)’에게
총리 자리를 내어줄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듬해인 1955년 3월에 총선거를 실시하겠다는
사회당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하토야마는 (좌우)사회당의 지지를 받고 총리가 됩니다. 또한
1954년 12월 10일 총리가 된 하토야마에게 1955년 3월까지는(실제 총선거는 2월 27일) 불과 3개월
남짓한 기간이었기 때문에 제1차 하토야마 내각은 ‘선거관리용 내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간 동안 일본 전역에 <하토야마 붐>이 일어납니다. ... 요시다의 장기집권 및 부패에
대한 국민적 피로감이 일종의 반사효과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토야마 붐’은 좌파진영의 약진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었습니다. ... 1953년 선거 때부터 힘차게
도약하며 ‘과반의석 확보’와 함께 <사회당 정권수립>이라는 원대한 목표를 가졌던 좌파진영 앞에
예상치 못한 ‘하토야마 붐’이라는 변수가 나타난 것입니다. ... 이러한 ‘하토야마 붐’은 좌파진영에
위기감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당시 좌우로 갈라서있던 사회당의 통합을 자극하게 됩니다.
하토야마는 1953년 선거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 선거에서도 <헌법 9조 개정 및 자위군 창설>을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반면 (좌우)사회당은 <평화헌법 옹호>를 주장했는데, 결국 1955년 선거의
최고 쟁점 또한 <일본의 재무장>이었던 것입니다.
1955년 2월 27일 총선거 결과, 하토야마 민주당은 185석을 확보해 제1당이 되었지만 과반의석인
234석엔 턱없이 부족한 결과였습니다. 여기에 자유당은(요시다 진영) 114석을 얻어 민주당과 자유당,
즉 보수진영의 합계의석은 총 299석이 되었는데, ‘하토야마 붐’에도 불구하고 이런 결과는 보수진영
전체적으로 보면 1953년 총선거 당시의 314석에 비해 15석이나 감소된 수치였습니다. ... 더불어
줄어든 보수진영의 의석수는 모두 좌파 사회당이 가져갔으며 ... (좌우)사회당, 노동당, 공산당 등의
의석을 모두 합하면 헌법 개정 저지에 필요했던 1/3의 의석을 좌파진영이 확보하게 된 것입니다.
1955년 총선거이후 시작된 <제2차 하토야마 내각>은 제1차 내각 당시보다 의석수는 늘어났지만
여전히 소수여당의(민주당) 한계에 갇혀 있는 상태였습니다. ... 우선 요시다 진영인 자유당의 공세를
감당해야 했으며, 선거 때마다 존재감을 보여주었던 사회당(특히 좌파 사회당)이 가을에 통합까지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 상황이 이쯤 되니 재계에서 먼저 불안 섞인 불만을 표출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일경련(일본경영자단체연맹)> 및 <경제동우회(재계 인사들의 개인자격으로만 가입가능)>
같은 단체들은 보수 정치권에 대해 다음과 같은 얘기를 합니다.
“선거 때마다 좌파진영의 약진이 두드러지고,
더구나 좌우 사회당은 통합까지 계획하고 있다는데
보수진영은 언제까지 분열과 갈등만 반복하고 있을 겁니까!“
재계의 불만은 결국 사회당 통합에 대한 ‘불안’이었고 <보수합동(통합)>을 요구하는 단계로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실제 당시 경제동우회는 “신속한 보수합동을 실현하라” 라는 내용의 결의를
채택합니다.) ... 또한 미국입장에서도 공산주의 확산을 막는 방파제 일본에 사회당 정권의 수립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공산진영과 대결을 하자면 일본의 보수는 분열이
아니라 하나로 결집해 미국을 도와야 했던 것이죠. 그래서 일본의 보수합동이 성사되기 3개월 전,
미국의 국무장관 덜레스는 당시 민주당 간사장이었던 ‘기시 노부스케(아베총리 외조부)’를 만나
다음과 같은 얘기를 전합니다.
“만일 일본의 보수정당이 하나로 뭉쳐 미국이 주도하는
공산주의자와의 대결에 참여한다면 경제적 지원을 할 수도 있습니다.“ - (CIA 비망록)
결국 좌우 사회당의 통합 분위기는 1955년 10월 13일에 실제 통합으로 현실화 되었고, 보수진영의
자유당과 민주당은 그로부터 한 달여 뒤인 11월 15일에 <자유민주당 결성대회>를 개최함으로써
재계, 미국 그리고 상당수 의원(자유당,민주당)들 염원대로 마침내 <보수합동(대통합)>을 이뤄냅니다.
이는 전후 일본의 정치체제가 좌파진영의 사회당과 보수진영의 자민당(자유민주당)이라는 거대
양당구조가 본격적으로 시작됐음을 알리는 신호였으며, 그래서 1955년은 현대일본정치사에서 가장
중요한 한 해였고, 더불어 이때를 소위 <55년 체제>라고 부릅니다. [@ 사회당은 통합 후 1960년
1월에 일부 세력이 ‘민사당(민주사회당)’을 결성함으로써 다시 분열됩니다.]
일본에게 <55년 체제>는 좌파의 통합이라는 의미도 중요했지만, 무엇보다도 ‘보수대통합’으로
상징되는 <자민당 탄생>이 가장 큰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55년 체제>이후, 하토야마는
1년여를 더 총리직에 머물다 1956년 12월 23일 총리에서 물러납니다. 뒤를 이어 ‘이시바시 탄잔’이
총리가 되지만 병에 걸려 2개월 만에 총리직을 내려놓습니다.(@ 2개월 단명내각) ... 이어서 당시
외무상을 맡고 있던 <기시 노부스케>가 당내 저항 없이 후임 총리에 오릅니다.(1957년 2월 25일)
[◆ 참고: 앞서 보셨듯이 ‘요시다 노선’의 핵심은 군비를 최소화(경무장)하여, 그렇게 아낀 자원을
모두 일본 경제성장에 올인 하는 것이었습니다. 반면 하토야마는 일본의 재군비에 대단히 적극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더불어 ‘이시바시 탄잔’ 또한 일본의 재군비에 긍정적이었지만 ...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할 점은 하토야마와 이시바시의 ‘재군비’ 욕망은 <냉전>이라는 이념적.시대적 상황의
불가피한 여건 때문에 미국의 기대에(공산주의 확산을 막는 방파제) 부응하기 위한 대미 추종적인
‘재군비’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토야마와 이시바시의 ‘재군비’ 욕망은 대미추종이 아닌 탈미(脫美),
다시 말해, 오로지 <일본만의 독자적 자주노선>을 위해서였다는 점이 핵심입니다. ... 물론 여기서
탈미(脫美)가 반미(反美)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 일본의 자주파들은 일본이 미국과의 종속적
관계에서 하루빨리 벗어나 정상국가로서 (최소한)상호적 관계가 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 4편에서는 ~ 그동안 우리가 익숙하게만 보아온 일본의 대미추종적
이미지와는 달리 자주적 성격 또한 상당히 강했던 모습을 보게될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현 일본 총리 아베의 평화헌법 개정 문제와도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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