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6월 25일 일요일

◆ 인구구조 변화에 따른 경제의 파급효과 [by 물파스]

[◆ 인구구조 변화에 따른 경제의 파급효과]



산업구조와 인구 흐름등에서 우리가 가장 많이 닮아가고 있는 일본의 상황을
이야기하지 않을수 없을것 같습니다. (@ 이슈인에서 전에 한 번 언급된 내용입니다.)

이미 많은 분들에게도 익숙한 용어가 되었을 베이비붐 세대를 일본에서는
단카이(団塊) 세대라고 부르는데, 일본의 단카이 세대는 다른 국가들의 베이비붐 세대와는
조금은 특별한 점이 있습니다.

먼저 일본의 단카이 세대는 전세계 베이비붐 세대중에 그 기간(베이비붐)이 매우 단기간에
끝났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미국만 해도 베이붐 기간은 (1946년 ~ 1964년) 으로 대략 18년이며
우리나라의 베이비붐 기간(1차)은 (1955년 ~ 1963년)으로 9년이며, 그 수는 대략 725만 명 수준입니다.

그런데 일본의 단카이 세대는 (1947년 ~ 1949년)으로 3년만에 붐이 끝났습니다.
그리고 그 수는 대략 680만 명 수준으로 추산되며, 이들은 이미 2~3년 전부터
퇴직을 시작한 상황입니다. [@ 단카이 세대: 1976년 경제기획청 장관이자 작가였던
사카이야(堺屋太一)의 "단카이 세대(團塊の世代)" 라는 소설이 발간되면서부터 일본사회에서 점차
사회적 용어로 굳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단카이 세대는 일본의 고도 성장기의 주역 이였으며,
일본 경제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세대였습니다. 더불어 범위를 확대하여 1947~1951년생에 걸쳐 태어난
인구를 단카이 세대라고 주장하는 전문가도 있습니다. ]

그렇다면 단카이 세대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 그 붐이 왜 단기간에 종료되었을까?
먼저 패전으로 인한 궁핍하고 어려웠던 경제가 6.25 한국전쟁으로 (전쟁)특수를 맞이함에 따라
출산보다는 당장의 (어려운)현실을 벗어나고자 하는 이동욕구가 작용했으며, 1945년에서 1950년 동안
대략 630여 만 명의 재외 일본인이 귀환하여 결혼과 출산율이 급증하게 됩니다. 그래서 일본정부는
1948년의 우생보호법(優生保護法)을 제정하여 임신중절의 합법화, 피임기구 판매개시,
적극적인 산아제한 정책 등으로 1951년 이후 부터는 출생률이 감소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일본의 단카이 세대는 2012년부터 본격적인 퇴직이 시작됐는데 ... 2020년이 되면
이들 세대(65세 이상)의 비중이 일본인구의 무려 3분의 1 수준으로 거대 노인국이 될 것이라는
예상이 많습니다. 최근 일본에서는 젊은 세대들의 (행복한)취업 붐(오와하라)이 일어나고 있는데
이는 일할 수 있는 인구, 즉 "생산가능인구"가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나타나는 당연한 현상입니다.
다시말해 현재 일본의 취업붐은 (일본)경제가 좋아져서라기 보다는 "인구 변화" 측면에서 나타나는
일종의 추세적 현상이라 할수 있습니다.

현재 아베 정부는 마이너스 금리정책까지 추진하면서 장기불황을 탈출해보려 하지만
여기에는 조심스러운, 그리고 역설적 불안요인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

본격적인 은퇴를 시작한 단카이 세대(고령세대)의 상당수는 연금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인플레를 유발하는 정책은 이들 연금생활자 들에게는 오히려 소비를 위축시킬 수 있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물론 물가상승으로 화폐가치 하락이 예상되면 저축보다는 소비를
하는게 좀 더 합리적인 선택입니다. 그런데 미시간 대학의 카토나(George Katona) 교수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람들은 더 풍요로와 졌다고 느끼면 지출을 늘이고, 더 궁핍해졌다고 느끼면
지출을 줄인다! ... 인플레이션은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빈곤해 졌다고 느끼도록 만든다.
가격이 오르면, 사람들은 생활수준이 악화되었다고 느끼거나, 설사 소득이 함께 올랐다고 하더라도
가격상승 수준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느끼게 된다! - 카토나(George Katona) "

그리고 이러한 생각들은 연금생활자가 많은 고령화 사회에서 더욱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현재 한국의 상황도 (경제가 아닌)단순한 인구흐름만 놓고 보면 일본과 상당히 비슷한 흐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앞서 얘기했듯이 우리나라 1차 베이비붐(1955~1963) 세대수는 대략 725만 명(전체인구의 14.5%) 수준이며,
이들은 이미 5년 전부터 은퇴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매년 대략 30~40 만 명이 퇴직하는 흐름을 보여주는데,
일단 퇴직과 동시에 이들은 퇴직자산(부동산, 퇴직금 및 기타 금융자산 등)을 제외하면 소득의 현금흐름 측면에서는
거의 무직, 무소득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가지고 있는 퇴직시의 자산으로
남은 여생을 버텨야 하는데, 들어오는 수입이 없으니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게 빈곤화가 진행됩니다.
[@ 일본고령백서 참고하면, 2014년 기준 일본의 고령자 가구는 국민연금 및 후생연금 등의
공적연금에서 월평균 23.7만엔이 들어오지만, 지출은 28.6만엔으로 가계수지가 (-)4.9만엔(연 60만엔)의
적자 상태인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단, 금융자산은 고령자 세대가 젊은 세대보다 여유로운 상황임)
더불어 특별회계 까지 포함하면 일본의 전체 사회보장비용 중에 고령자를 위한 복지 지출비중이 무려
100조엔(1천조원) 수준이라고 합니다. ]

또한 선진국들에 비해 일본의 노후복지 수준은 아직은 부족하기 때문에 소비는 더 위축될 것이며,
이에 따라 고령 유권자들의 (노후)복지 요구로 인한 사회복지 비용증가로 재정악화와 ... 재정악화로 인한
경제활력이 축소되는 일본의 장기 불황형의 추세흐름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어질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일본도 은퇴시기를 늦추거나, 노인 일자리 만들기 및 노인복지 수혜자의 자가부담률을 높이는
방안등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현재 일본의 65세 이상 전세대 중에서 금융자산을 4천 만엔(최근 환율 기준 약 4억 800만원) 이상
가지고 있는 부유층 노인의 비율은 약 17.6% 입니다. 그러나 1천만 엔(약 1억 200만원) 이하의
금융자산을 가진 65세 이상 가계의 비중은 35% 수준 입니다. 다시말해 노인들의 자산 분포가 점점더
양극화되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결과 복지에서 소외되고 소득원이 없는 노인들의 일탈 현상이
일본 내에서도 사회문제가 되고 있습니다.(@고독사, 노인범죄 등) ... 꽉 짜여진 일본 사회에서
일탈을 감행할 만큼 스트레스를 받은 노인인구가 해마다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는 반증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는 또 다른 사회적 비용증가로 이어지게 됩니다.

여기에 노인들에게 일정 비용을 받은 다음 만성 노인 질환에 대해 정부가 지원해주는 이른바
"개호보험"이 2008년 대대적인 개정을 시행했는데 ... 즉! 개호보험의 대상이 되는 환자가
2008년 460만 명까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이에 투입되는 국가재정도 2000년 3조엔에서 2008년 7조엔으로
치솟으면서, 개호보험의 대상이 제한되고 또 본인 부담이 크게 상향 조정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
고이즈미 정권은 보험료를 인상하고(이 보험료는 국민연금에서 차감합니다.) 엄격한 간병 요건을 둠으로써
저소득층 노인들의 삶은 더 피폐해지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개호보험을 신청하고 대기하고 있는 노인 인구만
대략 2014년 기준 대략 50여 만 명 이라고 합니다.

일본의 국민연금은 20~60세의 모든 국민들이 강제 가입하며, 정.액(월 1만 5,025엔)을 부과하는 특징을 지닙니다.
40년을 납부한 경우 65세 이후에 6만 5,741엔을 받게되는데, 이 조건을 충족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2012년 말 기준 국민연금을 제대로 납부하고 있는 사람의 비율은 60%에 수준에 불과했으니, 지금은
그 수치가 더 늘어났을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리고 원래는 60세부터 국민연금을 지급받기로 되어 있었지만,
1961년 생부터는 65세에 지급 받는다니 세대간 갈등이 촉발되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2009년 일본 총무성 통계국에서 작성한 자료에서는 50대보다 60대가 오히려 가계자산이 더 많다고 합니다.
즉 근로활동이 왕성하게 이뤄지는 50대의 가계 평균 자산이 3,710만 엔에 그친 반면 60대는 4,925만 엔,
그리고 70세 이상은 무려 5,024만 엔에 이릅니다. ... 하지만 30대는 마이너스의 가계금융자산(-260만 엔)을 가지며,
주택 보유율은 58.1%에 불과합니다. 반면 일본 60대 노인들의 주택보유율은 91.8%에 이릅니다.
더욱이 국민연금에 이어 후생연금과 기업연금의 개혁(지금율 상향 조정 및 수급 기간 단축)이 시행되니,
젊은 세대들의 불만이 상당합니다.

<저출산과 고령화> ... 과연 어느쪽이 더 중요한 문제인가를 따진다면, 저는 두말할 것도 없이 후자쪽인
고령화를 얘기합니다. 저출산은 정부의 정책과 의지로 일단은 불을 당겨볼수 있겠지만(물론 돈이 들것입니다.)
고령화, 즉 오래사는 노인들에게 정부가 정책이나 의지로서 "빨리 사망하세요" 라고 말하는것은
상당히 곤란합니다. 다시말해 저출산 문제는 정책으로서 나름의 유인 요소를 발견할 수 있지만,
국민에게 "죽음을 강요하기 위한" 정책적 유인 요소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제부터는 인구흐름의 변화,
즉 "생산인구 감소" 요인이 일본 경제(특히 자산거품 붕괴)에 끼친 영향을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리처드 쿠(Richard Koo)의 "대차대조표 불황"에 관한 내용으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 전에 한번 언급했던 내용입니다만, 전체 이야기에 꼭 필요한 내용이라 다시 한 번 얘기해봅니다.]

현재 우리사회의 악화된 소득분배구조와 함께 임계점(臨界點)에 와있는 가계부채 문제는
민간소비 둔화를 더욱 가속화 시키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1400조원 가까운 가계부채 중
무려 500~600조원 정도가 부동산관련(담보대출) 대출입니다. ... 또한 가계대출이 가계의 자산과(부동산)
연계되어 있다는 게 문제인 것입니다 ... 그래서 자산버블과 관련한 일본 노무라증권의 경제학자
리처드 쿠(Richard Koo) 의 보고서인 대차대조표 불황(Balance Sheet Recession)에 대해서도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경기가 좋을 때는 소비가 증가하면서 기업들의 생산도 늘어나, 수요를 따라잡기 위해
생산을 늘리게 됩니다. 이렇게 경제에 수요가 점점 더 증가하게 되면, 가계와 기업, 정부 등의 소비와 함께
투자도 활발해 지면서 경제전체의 총수요가 증가합니다. 그러나 물가가 상승하면서 초과수요로 인한
금리상승도 동반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재고가 쌓이게 되고, 기업들은 생산을 축소하게 됩니다.

또한 사업규모를 재점검(경쟁력 제고) 하면서, 생산설비 확장을 위해 투자된 자금 중 금융권에서
빌렸던 돈을 갚아야하는 채무상환 압박에 시달리고 금융권도 예전(호황)보다 채권회수와 대출조건 강화에
총력을 기울이면서 실업과 함께 일부 도산하는 기업들도 생겨납니다. 경제가 점점 더 불황에 빠져들게
되는 것이죠 ... 이런 불황의 패턴을 <보통의 불황(Ordinary recession)> 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보통의 불황(Ordinary recession)은
정체국면에서 재고 등의 과잉생산과 수요가 균형을 위해 자율적으로 회복의 시간을 갖게됩니다.

이에 비해 리처드 쿠(Richard Koo)의 대차대조표 불황(Balance Sheet Recession) 에서는
자산가치(ex 부동산) 하락에서 출발합니다.

예를 들어, 1억짜리 아파트를 자기돈 5천만원과 은행대출 5천만원을 더해 구입했는데,
얼마뒤 아파트 가격이 절반수준으로 하락해 4천만원이 되었다면 ...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아파트를 팔아서
은행대출을 상환하고(4천만원) 남은 은행대출 1천만원도 소비를 줄이고 열심히 벌어서 갚아야 합니다.
이렇게 자산가치 하락으로 인한 부채부담이 일부 소수나 개인이 아닌 상당한 규모로 커진다면
경제 전체로 보면 수요 감소로 이어지고 결국 불황(recession)에 빠져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문제의 핵심은 커지는 자산의 가치를 부채가 이끌었다는 점입니다.
결국 버블이 꺼지면 개인은 물론 기업들도 자신들의 대차대조표의 건정성 회복을 위해 소비를 줄이고
디레버리징[deleveraging 부채축소]에 주력함으로써 총수요 감소와 함께 불황의 늪으로 빠져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차대조표 불황(Balance Sheet Recession)은 사람들이 어느 정도 부채문제를
해결하고 소비여력을 되찾기 전까지는 계속될 것이라 합니다. 리처드 쿠(Richard Koo)는 이러한 대차대조표
불황에 대해서 해결책은 개인과 기업의 수요 감소분을 정부가 대신 사주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재정정책)

다시 말해, 쿠(Koo)가 주장하는 대차대조표 불황의 핵심은 자산(부동산)가치 하락과
빚 줄이기(디레버리징 deleveraging)입니다. 버블에 한계가 왔을 때 가계나 기업들은 돈을 버는 것 보다
빚을 줄이는데 더 많은 집중을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쿠(Koo)는 가계.기업들이 빚을 줄이기 위해
저축하는 돈을 정부가 끌어다 수요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중자금을 정부가 가져다 쓰게되면
소위 "구축효과"가 일어날수도 있겠지만, 쿠(Koo)는 경제(가계,기업)가 디레버리징(deleveraging) 상황이라면
문제될 것이 없다고 합니다. 구축효과는 버블상황이 아닌 보통의 경제상황에서 벌어지는 현상이라고
말합니다. [◆ 구축효과 - 정부 지출 증가 때문에 발생하는 민간 부문의 소비 및 투자 감소를 말함.]

이렇듯 사람들의 빚 줄이기가 시작되면, 즉 디플레이션 시기에 사람들이 빚을 갚아 나가는 추세가
점점 더 늘어나면 갚아나간 만큼의 돈이 시중에서 없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시중의 돈은 더욱더 줄어들게
되는데 이것은 결국 빚진 사람들이 돈을 벌기가 더 힘들어 진다는 것입니다.

예를들어, 은행의 입장에서 A라는 사람이 빚을 1천만원 갚았다면,
예전 같으면 A가 갚은 돈 1천만원으로 다른 B에게 대출을 해줌으로써 신용을 계속적으로 창조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디플레이션 시기에는 B가 더 이상 돈을 빌려 쓰지 않습니다.(@ B도 빚을 갚아야 하므로)
그래서 정부는 금리를 점점 더 내려서 제로수준까지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가계와 기업들의 빚을 줄이기 위한 노력들은 소비와 투자를 위축시키고, 이러한 과정이
장기적, 그리고 반복적으로 진행된다면 국가경제 전체에 디플레이션 압력이 증폭되게 되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20년을 넘어, 잃어버린 30년을 향하고 있는 일본은 쿠(Koo)의 주장을 실증적으로 가장 잘
증명한다고도 할 수 있는데, 노무라 증권에서 발표한 연구 보고서(2007)에 따르면 1990년부터 2006년
까지의 기간 동안 일본국민들의 자산 가치는(토지와 주식) 무려 1,500조엔(@최근환율기준 1경 5천조원)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최근 환율 기준으로 보면 우리나라 GDP의 10배에 가까운 천문학적인 규모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자산가치의 하락이 무엇보다 돈을 빌려준 금융기관(은행)의 상환요구를 가속화 시킨다는 점입니다.
결국 가계와 기업들은 소비와 투자를 줄이면서 자신들의 부채 정리에 모든 노력을 다하게 되고, 이것은
국가 경제를 마이너스 성장으로 이끌게 됩니다. ... 모두가 잘 아시다시피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을 한다는
의미는 실업이 증가하거나 국민들의 소득 수준이 하락하거나 최소한 정체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소득의 변화는 다시 경제를 불황속으로 빠뜨리며 악순환을 낳는 것입니다.

이러한 악순환의 사이클은 수치로도 증명되는데
앞의 노무라 증권 보고서에서 1998년 하반기 일본 시중은행 전체의 자산규모는 약 760조엔 이었으며,
1998년 당시 일본의 (명목)GDP는 대략 490조엔(한은 해외 통계로는 약 4조 달러) 이었습니다. 그리고
민간 부문에서의 신용(대출) 규모는 대략 590조엔 이었는데, 이후 일본 국민들과 기업들이 빚을 열심히
갚아나가면서 2006년 하반기가 되자 이 수치는 은행 전체 총자산 규모는 790조 엔으로(2006년 명목 GDP
550조엔) 약 30조엔의 소폭 상승의 변화를 보였지만, 민간 부문의 신용(대출) 규모는 491조 엔으로 무려
100조 엔(원화 규모 1천조원)에 가까운 빚이 줄어들게 됩니다. 즉, 일본 국민들과 기업들은 8년동안 해마다
원화규모로 대략 120조원이 넘는 빚을 갚아나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빚을 갚아나가는 것은 좋은 일 아닌가? ~ 라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경제 전체적 측면에서는 A의 부채(Debt)는 B의 자산이 될 수 있습니다.
결국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경제에 <부채 Debt>는 적정수준이 확보될 때에는 상당히 긍정적이며 활력을
불어넣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 부채가 고용을 창출하고 소비를 진작할 수 있도록 제대로 된
정책을 만드는 역할을 정부가 해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본은 건설, 토목에 부채를 너무나 많이
배분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정도 일본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우리 국민들의 자산과 가계부채는 부동산에 너무나 많이 편중되어 있습니다.
다들 아는 얘기를 해보자면, 주식이든, 아파트든 ... 가격의 상승과 하락을 결정짓는 가장 큰 요인은
바로 <수요와 공급>입니다. 이게 기본입니다. ... 그럼 현재 한국사회에의 현실은 어떨까?

먼저 수요측면을 살펴보면 올해 생산가능인구(15~64세)가 정점을 찍고 이제 하락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왜 생산가능인구가 중요한가 하면, 이들이 바로 부동산의 직접적인 수요계층 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돈을 버는 소득계층 이라는 뜻입니다. 개인적 생각으로는 혁명적인 정책이 아닌 이상, 한국사회에서
돈을 버는 인구는 점진적으로 줄어들게 되어있습니다. 그렇다고 이들이 과거보다 소득수준이 월등히
높아진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한국의 부동산 시장변화를 예측하려면 생산가능인구의 하락은
변수가 아니라 상수로 놓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변수로서의 공급> 측면입니다.

일본은 1985년 플라자 합의 이후부터 1990년 초까지 대략 5년여의 기간 동안 급격한 부동산 버블이
형성되었고 1990년 하반기부터 하락하기 시작했는데, 일본 또한 우리와 마찬가지로 생산가능인구의 감소로
20년이 넘는 초장기 불황이라는 디플레이션(자산 가치 하락)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 다만 불황이 기간이
자본주의를 도입한 전세계 국가중에 거의 역대급인 이유로 일본의 이 상황(장기 불황)을 단순히 수요측면에서만
판단하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일본의 수요측면의 사정(생산가능인구 감소 => 수요감소)을 상수로
놓는 동시에 공급측면에서의 변화도 함께 찾아야 그 해답을 정확히 알수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의 국토부에 해당하는 일본의 국토교통성에 자료에 따르면 일본은 본격적인 부동산 하락이
진행되는 1990년 초부터 그 이후에도 부동산 공급을 줄이지 않고 지속적으로 예전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일본의 주택공급(착공기준)량을 살펴보면 ~

1992년 140만호,
1996년 160만호,
2008년 110만호,
2009년 80만호,
2010년 81만호,
2011년 83만호,
2012년 88만호,
2013년 98만호,
2014년 90만호 등 ............

1992년부터 2014년 까지, 대략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거의 해마다 100만호 수준에서
주택 공급은 꾸준히 이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분명 수요는 감소하는데, 공급은 수요 감소라는 현실적 부분을 맞춰가지 못함으로써 부동산 부분에서의
가격하락이 진행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 그리고 이러한 자산가격 하락은 앞서 언급했던
리처드 쿠의 대차대조표 불황에 따라 국민경제가 악화되는데 상당한 영향을 끼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일본은 왜 이렇게 뻔히 보이는 상황에서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았을까?
많은 전문가들은 대표적인 이유중 하나로 <정치 – 세습되는 지역 정치> 를 지적합니다.
잘 아시겠지만, 일본 의원들(특히 자민당)은 지방에서 대를 이어 의원자리를 물려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더불어 이들 의원들은 자신들의 지역구에서 거의 한 두 개 정도의 건설(부동산)관련 사업채를 운영하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성장잠재력을 키우며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산업을 육성하는데 투자를 해도 돈이 부족한데
그 어마어마한 돈을 무려 20년을 넘게 주택을 짓는데 쏟아 부었으니, 어쩌면 지금의 일본 상황은 예견된 결과였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청년)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었던 기회를 20년 동안 안했다는 것과 마찬가지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 더불어 이러한 불편한 일본의 현실이 지금 우리 한국사회에서도 끔찍할 정도로 똑같이
재현되는 것을 보면서 폴란드의 경제학자 오스카 랑게(Oskar Lange)의 말이 생각납니다.

< 모든 가격은 정치적이다! - 오스카 랑게(Oskar Lange)>



[@ 언론은 신자유주의를 도입한 수많은 국가들에서 나타나는 양극화와 부의 불평등 문제를 자주 거론합니다.
그런데 편중된 부의 비효율, 즉 돈이 쌓여만 있고 활용(순환)되지 못한다는 사실에는 관심이 없는것 같습니다.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일본은 고령층에서도 자산규모가 상당한 부자 노인들이 비중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돈을 잘 쓰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본 정부에서는 이들 부자들의 돈이 쌓여있지 않고
순환될수 있는 방법을 찾느라 많은 고민을 하는것 같습니다. ... 정확하지는 않지만 결국은 "조세" 부문에서
결론지어질 것 같은데 ~ ~ 현재 문재인 정부도 한국의 현실적 상황(가계부채, 국가부채)을 감안한다면
결국은 쌓여있는 부자들의 돈(자산)이 한국경제 구석구석에 골고루 순환될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될 것입니다.
한마디로 자산부분에서의 조세 변화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는 뜻입니다. ]

◆ 믿음(종교) 이라는 것 - "백색 실명"을 유발하는 미아즈마(Miasma) [by 물파스]

[◆ 믿음(종교) 이라는 것 - "백색 실명"을 유발하는 미아즈마(Miasma)]


굶주린 비둘기(or 쥐) 한마리를 작은 라면박스 크기의 상자에 집어넣고 관찰합니다.
비둘기는 상자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탐색합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튀어나온
작은 나무 막대(레버)를 건들이게 됩니다. ... 순간! ~ 레버 위의 작은 구멍에서 먹이 하나가
'툭!' 하고 떨어집니다. 비둘기는 맛있게 먹이를 먹고, 다시 튀어나온 막대를 누릅니다.
점점더 막대를 누르는 속도가 빨라집니다. ... 나무 막대를 누르는 행위는 이렇게 먹이라는
"보상"에 의해 강화 됩니다.

@ 이제 실험을 약간 변형 합니다.

이번에는 나무 막대를 누를때마다 먹이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먹이가 불규칙하게 나오도록
장치를 변경하는 것입니다. 즉, 나무 막대를 누르면 먹이가 나올수도 있고 나오지 않을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먹이라는 보상에 "불규칙성"을 부여하면 특이하게도 비둘기는 더욱 더 열심히 막대를
누른다고 합니다. (카지노를 좋아하는건 인간이나 쥐나 동일한것 같습니다.)

아무리 나무 막대를 눌러도 먹이가 나오지 않으면,
이후에 비둘기는 막대를 누르면서 고개를 끄덕이거나 꼬리를 흔드는 행동을 하는데 ... 그런데
만약 그때 먹이가 나온다면, 그 이후부터 비둘기는 나무 막대를 누를때마다 고개를 끄덕이거나
혹은 꼬리를 흔드는 행동에 더욱 더 집착하게 됩니다.

비둘기가 꼬리를 흔들거나 고개를 끄덕이는 것과 먹이가 나오는 것은,
사실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습니다.(먹이는 계속해서 불규칙하게 나오고 있으므로)
그런데도 비둘기는 자신이 고개를 끄덕이거나 꼬리를 흔드는 행동이 마치 먹이가 나오는 것과
상당한 인과적 영향관계가 있다고 믿게 됩니다!

[◆ "상자의 구석을 향해 머리를 뻗는 습관은 우연히 일어난 것이다.
보상 기계장치가 작동하는 순간 (비둘기는)우연히 그런 행동을 했을 뿐이다.
새(비둘기)는 아주 자연스럽게 두 가지 사건이 연관되어 있다는 잠정적인
가설을 세웠다. 마침 운 좋게도 스키너의 타이밍 장치에 의해 보상이 주어졌다"
- (무지개를 풀며 中/ 253페이지/ 리처드 도킨스 ]

보편적으로 사람들이 어떤 종교(믿음)에 빠지게 될 때의 순간은
거의 대부분 비슷한 지점에 서있을 때입니다. 다만 그 "지점" 이라는 것이 고유한 실체성을
확보한 공간이 아니라 본인(인간) 스스로의 내면에서 자생적으로 치밀하게 구성한
<심리적, 혹은 사회적 관계> 라는 일종의 <무의식의 덫> 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덫을 보상의 의해 강화된 비둘기의 이상행동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매주 로또를 하던 사람이 어느날 집앞 놀이터의 작은 축구공 조각상을 만지고
로또를 구입했는데, 그것이 2등이나 3등에 당첨 되었다면 ... 이제 그 사람은 다음 로또 구입부터는
아마 무조건 로또 구입전에 그 놀이터의 축구공 조각상을 만진후에 로또를 구입하게 될 것입니다.
이후 축구공 조각상을 만지고도 한동안 계속 당첨이 안되다가 ... 어느 날 두손으로 축구공 조각상을
7번을 정성스럽게 어루만지면서 "제발! 이번 한 번만!" 하며 로또를 구입했는데 ... 이때 1등에 당첨 되었다면
이제 이 사람에게는 놀이터의 축구공 조각상을 두손으로 7번 (정성스럽게)어루만지는 행동이 하나의 경건한
의식이 되고, 또 신앙이 됩니다.(@ 어쩌면 축구공 조각상을 몰래 훔쳐가서 집안에 신사를 만들수도 있습니다.)

더불어 로또구입 뿐만 아니라 가족의 건강, 시험운, 주식투자 등
축구공 조각상은 이제 그 사람 인생 전반을 지배하면서 상당한 영향을 끼치게 될 것입니다.
이 실험이 바로 그 유명한 <"스키너상자(비둘기 상자)"> 실험입니다.

그럼 이쯤에서 어떤 종교적 믿음이나 신앙적 행태가
편집증적 망상의 형태로 이동했을 때 보여주는 재밌는 사례를 소개해 보겠습니다.

◆ 정신분석 임상의와 스스로가 죽은 시체라고 생각하는 환자와의 대화

[의사]: "죽은 사람은 피를 흘릴수 없습니다! 그렇지요?"
[환자]: "당연하죠! ~ 어떻게 죽은 사람이 피를 흘립니까!"
[의사]: "그럼 우리 모두 각자 손가락을 바늘로 찔러서 피가 나는지 한 번 확인해 볼까요?"
[환자]: " 좋아요 ~ "

당연하지만, 바늘로 각자의 손가락을 찔러본 의사와 환자는 모두 피가 흘러 나왔습니다.
그리고 의사는 냉정하게 환자에게 말합니다.

[의사]: "자! 이래도 당신이 아직도 '죽은 시체' 라고 생각하시나요? ... 당신은 지금 살아있습니다!"
[환자]: "그렇군요! ~ 제가 틀렸네요. 박사님! ... 죽은 사람도 피를 흘릴수가 있었네요 ~ "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주제 사라마구(Jose' Saramago)'의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 를 보면
어느 날 도시 사람들에게 눈 앞의 모든 것들이 하얗게 보여지는 일명 "백색 실명"이라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전염병이 발생합니다. 병의 전염 속도가 도시 전체를 집어삼킬 정도로 너무나 빠르게
진행되자 정부는 감염된 사람들을 수용소에 몰아넣어 격리하고, 또한 감염자들을 감시하던
무장 군인들에게는 통제를 따르지 않는 눈먼자들은 그냥 사살해도 좋다는 명령을 내립니다.

결국 눈먼 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면서 수용소는 포화상태에 이르게되고,
사회는 이제 눈멀지 않은 정상인보다 눈먼 사람들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아진 사회로 변하게 되면서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식량을 무기로 다른 눈먼자들을 협박하는 무리들과 폭력과 강도, 강.간과 방화 등
범죄가 만연된 사회로 탈바꿈 되면서 이제 사회 정의는 "눈먼 자들"이 결정하는 사회가 됩니다.
한마디로 그동안 눈멀지 않았을때의 가치 체계가 붕괴하는 순간인 것입니다. ... 도덕과 윤리는 사라지고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 폭력적 본성만이 부각되며 "눈먼 상태"는 곧 "눈멀지 않은" 상태와 등치관계임을
작가는 우리에게 경고하며, 또 동시에 상징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이 부분은 저의 개인적 느낌입니다.)

[◆ 나는 독자들로부터 많은 편지를 받는데 대부분은 지극히 호의적이고, 일부는 도움이 될
비판을 하며, 극히 일부는 불쾌하거나 악의 까지 배어 있다. 그리고 이렇게 언급하기가 유감스럽지만,
가장 불쾌한 편지들은 거의 예외 없이 종교가 배후 동기다. 기독교의 적으로 인식되는 사람들은
그런 비기독교적인(unchristian) 독설을 으레 경험하기 마련이다. 무신론을 옹호한, 진실하고
감동적인 영화 <거기에 없었던 신>의 작가이자 연출가인 브라이언 플레밍을 수신인으로
인터넷에 올려진 편지를 예로 들어보자. 2005년 12월 21일자로 보낸 "우리는 웃으면서 태워버리지"
라는 제목의 편지 내용은 다음과 같다. ... ... (@ 당신의 확실하게 누군가의 신경을 건드렸어.
나는 칼을 들고 다니면서 너희 바보 녀석들을 쑤시고 네 눈앞에 창자가 빠져나오는 것을 보면서
환호성을 지르고 싶어. 당신은 성전의 불꽃을 당기려는 모양인데, 나나 나와 같은 누군가가 언젠가
방금 내가 말한 것과 같은 행동을 하고 싶어 할지도 몰라.) ... ... 이 부분에서 저자는 자신의 언어가
지극히 비기독교적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듯하다. 그 뒤에 더 애정 어린 어조로 이렇게 적고
있으니 말이다. ... ... (@ 하지만 신은 우리에게 복수를 하지 말고, 당신 같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시지 ~ ) ... ... 하지만 그의 사랑은 오래가지 않는다.

(@ 신이 당신에게 내릴 처벌이 내가 가할 수 있는 것보다 1,000배는 더 지독하리라는 것을 알고나니
위안이 되는군. 가장 위로가 되는 것은 당신이 아주 무지하다는 죄로 영원히 고통을 겪을 것이라는 점이지.
신의 분노에는 결코 용서가 없어. 당신을 위해 하는 말인데, 칼이 당신의 살에 닿기 전에 당신에게
진리가 보였으면 해. 즐거운 크리스마스 보내기를! ~ 추신: 당신네 인간들은 무엇이 예비되어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할거야 ......... , 내가 당신이 아니라는 점에 신에게 감사 드렸어.)

나는 단순한 신학적 견해 차이가 그런 독설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이 진정으로 당혹스럽다.
~ (중략) ~ 내가 미국에 살지 않기 때문인지 몰라도. 내게 오는 증오 편지들은 대부분 그 정도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창시자가 내세웠던 사랑이라는 미덕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2005년 5월에 한 영국 의사가 보낸 다음의 편지는 확실히 증오로 가득하지만 내게는 불쾌하기보다는
성가시게 느껴지며, 도덕이라는 문제 전체가 무신론을 향한 적대감의 깊은 근원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 당신의 책들,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당신의 지위, 당신이 사랑하는 모든 것들과 지금껏 성취한
모든 것들은 다 헛된 것들입니다. 카뮈(Albert Camus)의 질문과 도전은 피할수 없는 것이 됩니다.
왜 우리 모두는 자살하지 않는 것일까? 사실 당신의 세계관은 학생들은 물론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 모두가 무에서 맹목적 우연을 통해 진화했고, 다시 무로 돌아간다고 말함으로써 그런 효과를
미치고 있습니다. 설령 종교가 참이 아니라고 해도 우리가 살면서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다면
플라톤(Platon)의 말마따나 고귀한 신화를 믿는 편이 훨씬 더 낫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세계관은
불안, 마약 중독, 폭력, 허무주의, 쾌락주의, 프랑켄슈타인 과학, 지상의 지옥, 제3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집니다. ... 나는 당신이 대인 관계에서 얼마나 행복한지 궁금합니다. 이혼했나요? 홀아비인가요?
게이인가요? 당신 같은 사람들은 결코 행복하지 못합니다. 아니, 행복도, 그 무엇도 아무 의미가
없다고 증명하기 위해 기를 쓰는 것이 아니라면요.)

어조는 그렇지 않더라도 이 편지에 담긴 감정은 많은 사람들에게 전형적인 것이다.
이 사람은 다윈주의가, 우리가 맹목적 우연을 통해 진화했고(몇 번째 하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자연선택은 우연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우리가 죽을 때 무로 돌아간다고 가르치는, 본질적으로
허무주의적인 것이라고 믿는다. 그와 같은, 이른바 부정성의 직접적인 결과로 모든 악이 뒤따른다.
아마 그는 홀아비가 내 다윈주의의 직접적인 산물이라고 진심으로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었겠지만
그 부분에서 그의 편지는 기독교인들의 편지에서 계속 나타나는 흥분에 가득한 악의를 담고 있다.
- ( 만들어진 신. 319~323페이지/ 리처드 도킨스/ 김영사) ]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의 <공기, 물, 장소에 대하여 On Airs, Waters, and Places> 라는
논문을 시작으로 의료계는 수백 년 동안 다양한 질병의 원인을 호수나 습지, 늪 같은 잔잔한 물에서 발산되는
건강에 안 좋은 수증기로 생각하고 이러한 증기나 안개를 <미아즈마(Miasma)> 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고대 이탈리아어로 "나쁜 공기"를 뜻하는 말라리아는 이 '미아즈마'가 일으키는 여러 질병 중에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야말로 미아즈마(Miasma)로 가득한 세상입니다.
시대의 질병을 양산하는, 그래서 무수한 시력의 복원 노력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흐려지는 세상.

도킨스의 시선에서 기독교인들은 "백색 실명"에 치명적으로 감염된 자들이자, 동시에 질병을 유발하는
병의 근원, 즉 <미아즈마(Miasma)> 일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 <무의식의 덫> 이라는 공통된 지점에서
스키너 상자속 우매한 비둘기처럼 세상이 온통 하얗게만 보이는, 그래서 살기 위해선 축구공 조각상을
7번 정성스럽게 어루만져야만 식량이라는 보상으로 강화되는 메커니즘을 그들은 "신앙(믿음)" 이라고
주장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눈을 뜨고 있어도 "눈먼 상태!" ... 그래서 저는 그들을 <미아즈마(Miasma)> 라고 진단하겠습니다.




[@ "진실의 가장 큰 적은 거짓이 아니라 신화다!" ~ 라는 말처럼
우리가 대상에 "신성(神性)"을 부여하기 시작하면 이후의 사태는 급속히 악화됩니다.
더불어 인간은 종교는 물론이며, 정치인, 연예인 혹은 자연현상 및 이론 등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신격화> 할 수 있는 참으로 독특하고 기괴한 존재라고 생각됩니다. ]

2017년 6월 19일 월요일

◆ 유한계급론 - 큰 뿔 산양 '크래그'의 뿔은 과연 누구의 것인가? [by 물파스]

[◆ 유한계급론 - 큰 뿔 산양 '크래그'의 뿔은 과연 누구의 것인가? ]



베블런의 유한계급론을 이야기하기 전에 책 한권을 먼저 소개합니다.
얼마 전 우연히 TV채널을 돌리다가 배우 이민호씨가 출연한 <DMZ, 더 와일드> 라는 자연 다큐를
보게 되었습니다. 근 50여 년 동안 인간의 출입이 통제되었던 DMZ의 야생의 세계를 감상할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습니다... 그러다 문뜩 오래전에 황학동(서울 중구) 헌책방에서 구입해 책장에만 꽂아두었던
<쫓기는 동물들의 생애> 라는 책이 생각났습니다. 우리가 어렸을 적 <시튼 동물기>라는 아름다운(?)
동물들의 이야기로만 알고 있었던 책입니다. 흔히 아동용쯤으로 가볍게 생각할 수 있는 책이지만,
평생을 자연을 사랑하며 야생 동물들을 관찰했던 “어니스트 톰프슨 시턴(Ernest Thompson Seton)”의
실제 경험과 관찰을 사실적으로, 때론 잔인하게 그리고 문학적으로도 훌륭하게 녹여낸 (개인적으로)수작이라
생각되는 책입니다.

책에는 여러 (야생)동물들의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그 중에 광활한 로키산맥의 설산에서
<크래그>라는 큰 뿔 산양 무리의 위대한 왕과 크래그를 쫓는 사냥꾼 <스코티>의 대결이 압권입니다.
결국 수많은 실패 속에 사냥꾼 스코티는 <크래그>를 죽이는데 성공하고 거대한 뿔을 획득하지만
남은 생을 알 수 없는 허탈감속에 짓눌려 보내게 됩니다.

[◆ 그들은 그곳에서 휴식을 취했다. 양(크래그)은 한 등성이에 있었고, 스코티는 6백 미터쯤 떨어진
다음 등성이에 있었다. 기나긴 12주 동안 양은 그를 눈 쌓인 열 곳의 긴 산맥을 넘어 8백 킬로미터가
넘는 험한 길로 끌고 온 것이다. ~ (중략) ~ 어떤 사악한 영혼이 그의 몸속으로 들어와 교활한 계획을
짜냈다. 그는 조심스럽게 담뱃대를 비운 뒤 옆에 내려놓고, 뒤에 있는 낮게 구부러진 난쟁이자작나무
가지를 몇 개 잘라냈다. 그는 돌도 몇 개 모았다. 거대한 양은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등성이
언저리까지 가서 막대기와 돌과 남는 옷으로 허수아비를 만들어 자신인 양 세워놓았다. 그런 다음
허수아비 바로 뒤로 몸을 숨긴 채 바위를 넘어 뒤로 기어가서 모습을 감췄다. 그가 한 시간쯤 몸을
감추고 기어간 곳은 양 뒤쪽의 등성이였다. 거기에서 보니 양은 봉우리에 걸린 천둥을 머금은
구름처럼, 눈썹 위로 굽이치는 뿔을 지닌 황소처럼 위엄 있게, 사슴처럼 우아하게 서 있었다.
양은 추격자가 왜 그렇게 오랫동안 가만히 있는지 궁금해 하며, 허수아비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스코티는 양에게서 3백 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양 뒤쪽으로 작은 바위들이 몇 개 있었지만,
그 사이는 눈 덮인 탁 트인 곳이었다. 스코티는 엎드린 뒤 등이 온통 하얗게 될 때까지 눈을 몸 위로
밀어 올렸다. 그런 다음 거대한 양의 머리를 바라보면서 2백 미터나 되는 거리를 기어가기 시작했다.
움직임을 무모할 만큼 빨랐다. 크레그는 여전히 허수아비를 응시하고 있었고, 조바심이 나는지 가끔
발을 구르기도 했다. 크래그가 한번만 민첩하게 살펴보았다면, 눈 속으로 기어가고 있는 적의 모습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뿔, 거대한 오른쪽 뿔이 눈과 적 사이에 가로놓여 있었기 때문에, 크래그가
달아날 수 있는 마지막 짧은 기회는 사라지고 말았다. 사악한 스코티는 숨을 수 있는 바위가 있는
곳으로 점점 가까이 다가갔다. 마침내 그곳에 안전하게 도착하자, 그는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곳은
양에게서 50미터도 채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는 처음으로 그 유명한 뿔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굶은 흔적이 뚜렷하긴 하지만 여전히 크고 넓은 어깨와 굽어 있는 목과 육중한 몸을 보았다. 그는
이 눈부신 동료가 햇빛을 받아 고동치는 코에서 뜨거운 삶의 숨결을 내뿜는 것을 보았다. 그 빛나는
호박색 눈에 담긴 생명의 빛까지도 얼핏 볼 수 있었다. 그는 서서히 총을 들어올렸다. ~ (중략) ~
인간 20명의 목숨을 끊을 때도 떨린 적이 없던 손이 마치 두렵다는 듯 떨리고 있었다. 양면성인가?
그랬다. 그러나 손의 떨림은 서서히 멎어갔다. 사냥꾼의 표정도 차분해지고 단호해졌다. 스코티는
방아쇠를 당겼다. 그 순간 그는 머리를 숙여야했다. 익숙한 “탕!” 소리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소리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멀리서 돌들이 덜걱거리는 소리와 길게 “음매~애애!” 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쳐다보지도 움직이지도 않았다. 2분이 지난 뒤에도 사방은 여전히
고요했다. 그는 겁에 질린 사람처럼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그는 사라졌을까? 어떻게 되었을까?
눈 위에는 거대한 회갈색 형체가 쓰러져 있었고, 그 한쪽 끝에 마치 히드라의 목 두 개가 꼬여 있듯이
그 뿔, 경이로운 뿔이, 15년 동안의 삶을 한 눈에 보여주는, 눈부신 생물의 눈부신 삶을 조각한 기록이
놓여 있었다. - (쫓기는 동물들의 생애. 102~106 페이지/ 어니스트 톰슨 시튼 / 지호 출판 ) ]

큰 뿔 산양 크래그의 이야기는 뒤에서 다시 살펴보기로 하고 ... 그럼 베블런의 유한계급론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중소기업을 다니면서 월급 200만원을 받고 있는 평범한 가장 김철수는
출퇴근용 차량으로 소형차량을 선호합니다. 그런데 김철수는 원래부터 소형차를 선호했던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소득수준에 맞춰서 소형차를 선택했을 뿐입니다. 수입이 좀 더 많았다면 김철수는 중형차를
선택했을 겁니다. 그래서 보통 경제학에서는 이런 상황에서 소형차를 열등재, 중형차를 우등재로 얘기합니다.

시간이 흘러 호봉과 경력이 쌓인 김철수에게 어느 날 타사에서 스카웃 제의가 들어옵니다.
조건이 월등이 나았기 때문에 즉시 이직을 결심한 김철수는 이제 소득이 월 600만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김철수는 자신의 차량을 소형차에서 중형차로 바꿔버렸습니다. (김철수)소득이 증가해 열등재인
소형차의 수요는 감소하고, 우등재인 중형차 소비가 늘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만약 김철수가
직장을 옮기지 않고, 소득 또한 그대로인 상황에서 소형차(열등재)의 가격만 대폭적으로 하락했다면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 ~ 소형차(열등재) 가격의 하락은 김철수 입장에서는 소득이 상승한 것과 같은
효과를 주게 됩니다. 다시 말해, 전과 비교해 월급 200만원이라는 소득은 변한 게 없어도, 그 수준에서
소비가 가능했던 상품(소형차)의 가격이 크게 하락했다면 이것은 김철수에게 (실질)소득이 상승한 것과
같은 효과를 주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소형차의 수요는 감소하게 됩니다. ... 그런데 보통의 수요공급
법칙에 의하면 가격이 하락하면 수요가 증가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가격이 하락한 소형차의 수요도
증가해야 하는데, 오히려 수요가 감소하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한마디로 가격과 수요량 변화가 일반적
"수요-공급 법칙"과는 역의 상관관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가격이 하락하면 수요량 또한 감소하는 것이죠.
그리고 이러한 (열등)재화를 기펜재(giffen goods)라고 합니다.
[@ 기펜재를 살펴보는 이유는 베블런효과와 비교해 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보통의 경제학에서는 주로 이윤, 지대, 자본, 임금 등과 같은 범주들이 많이
언급 됩니다. 하지만 베블런은 경제를 바라보는 관점을 법과 사회문화, 윤리, 제도 같은 범주들에
좀 더 많은 집중을 했습니다. 그래서 베블런을 흔히 <제도학파(制度學派)> 경제학자(사회학자)라
부릅니다 ... 경제의 제도적인 면을 중요시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블런을 비롯한 제도학파 경제학은 수학공식과 각종 복잡한 그래프를 활용한 신고전학파
경제학을 비판합니다. ... 예를들어, 마셜의 이론들은 너무나 추상적이어서 현실적으로 그 이론들이
적용되는 세계(제도)는 제대로 볼 수도 없고, 또한 경제는 물처럼 항상 변화 하는데 ... 그러한 변화
속에서 '균형' 같은 언어는 그저 아름다운 시어(詩語)일 뿐, 현실 세계의 경제에는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경제의 현실적인 법과 제도적인 부분을 중요시 했던 베블런은 19세기 마지막해인
1899년에 <유한계급론(The Theory of the Leisure Class)> 이라는 첫 저술을 발표합니다.

먼저 유한계급론에서 <유한(有閑)> 이라는 의미의 국어사전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생활이 풍족하여 여가가 많음.
(2) 시간의 여유가 있어 편안한 겨를이 많음

그런데 베블런이 말한 '유한(有閑)'의 의미는 국어사전 정의처럼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일에 지친
피로를 달래기 위해 떠나는 일종의 휴가(레저)나 휴식의 개념이 아닙니다. 베블런이 말한 <유한>은
역사적인 제도와 진화론적 개념 아래에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 쉽게 말해 열심히 땀 흘려
일하지 않고 게으르며, 오직 금전적인 부를 누리면서 하루를 (과시적)소비에만 치중되는 삶을 살아가는
사회의 상류 부유계층을 말합니다.

과거의 상류계층(귀족)은 굳이 생산적인 직업을 갖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됐습니다.
노예가 있었고, 생산적인 일의 대부분은 모두 평범하고 가난했던 국민들의 몫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들 유한계급(상류층)들은 주로 금전적인 경쟁과 과시적인 여가, 과시적인 소비에 집중합니다.
더불어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사회가 약탈적인 모습을 띄며 삶의 수단을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으면
"유한계급"은 영원히 존속된다고 베블런은 주장했습니다.

@ 최고급 외제승용차에 타고있던 회장님은 반드시 비서가 차문을 열어주어야만 내립니다.
@ 상류층 김여사는 세계최고의 명품백, 그것도 한정판만 구입합니다.
@ A은행은 자산규모 100억 이상의 고객들만 앤디워홀 작품전시회에 초대합니다.
@ 박여사는 세계최고 발레공연을 보기위해 관계자에게 VVIP 회원카드를 보여주자
표를 사기위해 기다리는 다른 많은 (일반)사람들을 제치고 공연장으로 입장합니다.

베블런은 역사와 인류학의 연구를 통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립니다.
"땀 흘리지 않고 그냥 가만히 앉아서 부와 재산을 늘려야만 그 사회에서 명성과 부러움을
얻을 수 있었다!" ... 이것이 바로 <유한계급>의 탄생이라는 것입니다.

유한계급들이 돈을 쓰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이 보기에는 너무나 낭비적이고 쓸데없는 것처럼
보여야 합니다. 그래야만 평범한 사람들과는 구별이 되기 때문입니다.(과시적소비) ... 그리고 아무나
즐길 수 없는 취미와 상류층만의 품위, 체통이 존재합니다.

이러한 베블런의 과시적 여가와 과시적 소비의 현상들은 현대에 와서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습니다.

[◆ 이렇게 아무나 누릴 수 없는 명품(포르쉐, 에르메스 등)이나 서비스(은행 PB룸)를 소비하는
"과시적소비" 만으로 본인은 "평범함" 과는 더욱 더 구별되고, 보다 더 우월적인 (사회적)신분을 획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참고적으로 보통의 재화는 가격이 상승하면 수요가 줄어드는데 반해
과시적 소비에 의한 명품 등은 가격이 상승하면 오히려 수요가 증가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마디로 더 비싼 것을 구입할수록 평범함에서 더 많이 벗어나 본인의 상류(층) 계급에 대한
정체성을 쉽게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누구나 쉽게 구입할 수 있다면 그냥 평민인 거죠) ... 그래서
이러한 부자들의 허영심에 의한 과시적소비로 가격이 상승해도 수요가 증가하는 현상을 소위
<베블런 효과(veblen effect)> 라고 합니다. ... 더불어 이 또한 앞서 살펴보았던 기펜재 효과처럼
일반적 <수요-공급> 법칙과는 역의 상관관계인 것입니다. 다만 기펜재 효과는 열등재서만 발견되는데
반해 베블런 효과는 정상재의 소비에서 발견됩니다. ]

명품상표가 붙어있는 옷들과 형이상학적인 엠블런이 달린 최고급 외제승용차, 회원들만 입장할 수
있는 호텔 최고급 레스토랑 등 ~ 이러한 상황에서 기업들은 베블런의 과시적 소비 같은 현상들이
소비에 많은 영향을 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기업의 경영자는 상품의 질과 기능(효용)
등을 높이려 하기 보다는 예상되는 과시적 가격(명품가격)만을 높일 수 있는 방법만을 생각하게 되고
여기서 베블런 같은 제도 학파들은 저급한 상품을 기업(경영자)들이 마치 고급상품처럼 포장하려는
유혹에 빠지고 과대 선전하기 때문에 기술개발 같은 부분은 뒤처지는, 즉 진보에 오히려 장애가
된다고 비판합니다.(@시간과 재능의 낭비)

더불어 베블런은 마르크스처럼 인간에게는 창조의 욕구(무언가 새로운 기술을 개발해서 솜씨를
뽐내고 싶은 인간의 욕구)가 있다고 했는데 만약 위와 같은 과시적 여가와 과시적 소비가 사회전반에
만연되면 인간의 창조적 욕구가 사라진다고 했습니다. 또한 마르크스는 계급투쟁의 대표적인 주체를
부르주아(자본가)와 프롤레타리아(노동자) 두 계층의 대립으로 보았지만, 베블런은 마르크스와는 다르게
자본가도 아니고 노동자도 아닌, <"기업 경영자"와 "엔지니어(기술자)"의 대립>을 주장합니다.
[@ 경영자 Vs 엔지니어 ] ... 그리고 경영자는 기업을 소유했든, 소유하진 않았든 상관없습니다.

엔지니어는 인간의 기본적인 창조욕구에 따라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개발하려고 하지만,
경영자는 오로지 과시적 가격에만 신경쓰다보니 엔지니어의 창조성을 억압하게 되는 것입니다.
경영자에게는 오직 이윤만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 더불어 여기서 중요한 베블런의 또 한가지 주장은
바로 <노동조합>입니다. 노조도 경영자들과 마찬가지로 신기술과 기계의 효율성을 무시하고
노조원들의 이해관계(임금인상)에만 관심을 둔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유한계급”의 과시적 소비행태가 오늘날에 와서는 사회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는데 ...
쉽게 말해, 본인은 평범한 직장 근로자 임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능력을 상회하는 소비(과시적소비)를
함으로써 본인도 상류계급 편입을 지향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결국 본인은 평범한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상실감만 더 커질 뿐입니다.


[◆ 이제 노인이 된 스코티는 그 이후로 두 번 다시 사냥을 하지 않았다. 그는 광기 어린
그 기나긴 추격을 하면서 스스로 무너져 내렸던 것이다. 그는 이제 금광에서 벌어온 약간의 돈에
의지한 채, 뭔가에 홀린 듯이 철저하게 홀로 살아가고 있었다. 늦겨울의 어느 날 예전의 동료가
그의 오두막집에 들렸다. 그들은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었다. 하지만 나눈 말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당신이 건더 봉의 양을 죽였다는 말을 들었어!" ... 스코티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여주겠나?"
"직접 보게" ... 노인은 벽에 드리운 천을 향해 고개를 주억거렸다.
동료는 천을 끌어내렸다. 그러자 놀랄 때 흔히 들을 수 있는 감탄사들이 따라 나왔다.
스코티는 고개를 돌려 그것을 바라보면서, 말없이 그 찬사들을 듣고 있었다.
난로 불빛이 산양의 유리 같은 눈에 반사되자 붉은 눈이 화를 내며 노려보는 듯했다.

"다 보고 나면 덮어두게” ... 스코티는 몸을 돌려 담배를 피우면서 말했다.

"이보게 스코티. 그렇게 신경이 쓰인다면 왜 저것을 팔지 않나? 뉴욕 사람이 나한테 말하더군.
얼마에 팔 것인지 자네에게 물어보라고 말이야! ~ "

"그 뉴욕 사람에게 말하라구! 절대 팔지 않겠다고 말야. 절대 그(크래그)와 떨어지지 않을 거야!
나는 그를 끝장낼 때까지 그의 곁에 있을 거야. 그는 내게 복수할 때까지 내 곁에 머물 거야.
그는 나를 노인으로 만들었네. 그는 나를 미치광이로 만들었어! ~ (중략) ~ 산악 고지대 너머
타바코 고원 너머에서 봄이 다가왔다. 서쪽으로부터 다가온 비가 조용히 경사면에 높게 쌓인
눈 더미를 씻어냈다. 그 부서진 오두막집에도 서서히 빛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가운데에
전혀 손상되지 않은 양의 머리가 놓여 있었다. 그의 호박색 눈은 경이로운 뿔 아래에서 전과 다름없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는 부서진 뼈 조각과 넝마와 반백의 인간 머리카락이 놓여 있었다.
늙은 스코티는 잊혀졌지만, 그 숫양의 머리는 오늘날 한 궁전의 벽에, 왕의 보물들 사이에 소중히 걸려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경이로운 뿔을 바라보면서 쿠터네이 고지대 저 먼곳에서 그 뿔을 키운 영예로운
건더 봉의 양 이야기를 한다. - (쫓기는 동물들의 생애. 110~115 페이지/ 어니스트 톰슨 시튼 / 지호 출판 ) ]

위대한 큰 뿔 산양의 왕 크래그를 쫓았던 사냥꾼 스코티는 결국 경이롭고 신비로운
전설의 뿔을 얻었지만, 그 뿔의 마지막 여정은 어느 영국 상류계층의 집안을 화려하게 장식하면서 잠이 듭니다.

유한계급은 단순한 생활욕구 충족이 아니라 자신의 부를 수많은 사람들에게 선보이고 입증하기
위해서 소비를 선택합니다. ~ ~ 전설의 큰 뿔 산양에 모든 것을 쏟아 부었던 늙은 사냥꾼의 열정과 애증도
그들 유한계급에게는 단지 만인 앞에서 자신의 부를 입증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합니다.



[@ 읽고 싶은 책은 너무나 많은데 속도가 못 따라가니
과거 언젠가 내가 틀림없이 직접 산 책인데도 불구하고
책장에 쌓여만 가는 많은 책들을 보며, 어머니는 과시적 소비라 나무랍니다.]

원자력 정책에 관한 글 [by ??]

원자력 발전소의 경우 중대사고가 나면 국가적인 재앙이 되고 위험한건 맞다. 원자력분야의 연구자들에게 원전사고가 일어 날수 있는 경우의 수 즉 어떤 종류의 사고이든간에 인간이 상상하고 예상할수 있는 모든사고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대비와 안전에 대한 대응을 한다. 이를 위한 연구만을 하는 분야 즉 인간이 예상할수 있는 가상적인 사고에 대한 연구분야가 있다.
소생은 원자력 분야의 안전중에서 기기검증(Equipment Qualification 이걸 E.Q.라 한다.)분야에 20년 넘도록 일해왔고 이 분야에 국내에서 처음으로 시험설비구축과 체계화를 위해 일했던 사람이기에 나도 돌파리수준은 아니라고 자평한다.
.
전문가집단에서 가장 위험한건 잘 알지도 모르면서 정치에 오염되어 헛소리하는 사람들이고 자기의 연구를 조작하거나 데이터를 사실대로 있는 그대로 발표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런 일에 정치가 개입되면 헛소리하는 사람들이 나오는데 진정한 전문가라고 보지 않는다. 예를 들어 백남기씨 사망원인을 이제 와서 번복하는 집단이야 말로 전문가로서 윤리를 잃어버린 집단이라고 본다. 이들이야 말로 똑똑한 악질에 분류되어야 할 사람들이다. 정치적인 압박이 있었다면 차라리 침묵이라도 하든지... 아주 비열하고 비윤리적인 행동이란 말이다. 그만큼 사실과 진실에는 물러섬이 없어야 바로 전문가인 것이다. 차라리 모르면 모른다고 말하고 실수가 있었으면 틀렸다고 고백하는 것이 학자로서 크나큰 용기인 것이다.
.
고리 1호기가 영구정되었는데 10년간 수명연장을 할 당시에 고리1호기 기계류 부품을 소생이 직접 기기검증을 했었고 또한 오래된 밸브등에 대해서 상용품 대체를 직접 했던 사람이다.
고리 1호기를 건설할 당시보다 수명연장을 한 이후가 더욱더 안전하다고 주장하면 날더러 미친놈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고리 1호기를 준공할 때보다 30년 운전후 10년간 수명연장을 할 때 안전에 대한 기준이 더 강화되었고 당시 오래된 부품을 신 부품으로 교체했기 때문에 더더욱 안전하다고 장담한다.(이런 일을 한 결과 원자력 짝퉁부품 사건이 국가적으로 문제가 되었을 때 감사원 감사를 진절머리나게 받았고, 서비스를 개선하기 위해 창업을 해서 연구소의 시설장비를 사용했다고 배임, 횡령죄로 구속까지 되었던 사람이다.) 소생이 수행한 기기검증업무에 문제가 없는지 전문가들 까지 동원해서 벼라별별 감사를 모두 다 받았지만 그 어떤 이상이나 비리도 없었기에 이런 글을 올릴 수 있고 연구소에 복직을 해서 다시 다니게 된 것이다.
.
오늘 소생이 강조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1. 원자력은 사고가 나면 위험 하다는 건 맞는 말이다. 2. 그런 위험에 충분이 대비하고 있고 안전에 대한 준비가 철저히 하고 있다. 3. 국내의 경우 안전을 과도하게 강조하기 때문에 원자력 부품을 제조하는 회사들의 경우 supply chain이 이미 끊어져서 해외수출길조차도 경쟁력을 잃고 있는 중이다. 사실 너무나 과도한 측면이 크다.
.
그럼 신 재생에너지는 어떤가? 태양열, 풍력등의 경우(특히나 태양열) 그 발전 효율이 과거 반도체 기술이 진보하는 것처럼 나날이 발전하고 있고 효율 또한 올라가고 있다. 즉 원자력은 사고가 나면 위험하고 반면 태양광 이용기술은 발전하고 있으며 전력생산단가 또한 태양광의 경우 기하급수적으로 떨어지고 있는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원자력발전의 전력생산 단가는 충분한 경쟁력이 있으며 지구 온난화와 미세먼지를 위한 대안으로 원자력보다 더 좋은 에너지원은 대안이 아직은 없다. 우리나라 전력의 30%이상을 원자력 발전에 의존하고 있는데 LNG Gas가격이 떨어진다고 해도 원자력 발전의 장점을 능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에너지란 발전단가나 비용만을 가지고 평가할수 있는게 아니라 1.지정학적인 문제, 2. 경제적인 효율 3. 지리적인 문제 4. 국가 안보적인 관점 5. 시기와 함께 국제적인 timing즉 국제정세에 따른 대응준비 등 종합적인 고려를 해야만 하는 국가적인 산업이다. 국가안보의 측면에서 고려 돼야 한다.
.
우리나라의 경우 현재 전력 예비율이 충분하고 산업의 구조가 과거와 같이 고 소비전력 사용을 하는 산업구조가 아니기 때문에(철강, 중화학공업분야 등) 원자력 발전의 축소를 말하지만 원자력의 근본을 피할수도 없고 또 다시 원자력발전을 추구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이 또한 두고 봐라! 내말이 맞나 틀리나?) 정부정책에서 원자력 발전과 탈핵이라는 문제는 별개의 문제이다. 그걸 동일시 할 이슈가 아닌데 뭔가 인식을 잘 못하는 듯 하다.
.
소생이 확신하는 미래산업중에 앞으로 20-30년후에는 전기자동차가 일반화될 것이라고 믿는다. 5G이동통신이 가능하고 밧데리의 효율이 올라간다면 미래는 전기자동차가 주종을 이룰 것이고 무인형 자동차의 출현이 가능하다. 지금 화석연료를 자동차에 사용하지만 앞으로는 전기밧데리로 자동차 운용을 하게 되는데 우리나라처럼 밀집형주거(아파트)형태로 살고 있는 환경에서는 지금보다는 분산형 전원시스템으로 바뀔 것이다.(주변에 소형 발전소를 만들어서 전력공급)
.
그렇다면 전력의 소비율은 기하 급수적으로 올라갈 것이고 태양광 발전이 좋고 지금보다 더욱더 효율이 올라간다고 가정해도 전력을 저장하는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고 밤과 낮시간 동안의 연속성이 없는데다가 대규모의 부지를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본다.
소생이 직접 경험한 지식과 체험을 토대로 말씀드린다면 원자력의 경우 사실적인 문제보다는 여론에 의해 정책이 좌지우지 되는 경향이 강하고 정치적인 결정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본다.
원자력은 중대사고가 나면 위험한건 100% 동의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그런 사고가 날 확률은 지구와 달이 충돌하는 확률만큼이나 거의 없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원자력에서 나오는 고준위 폐기물(폐 연료봉) 처리에 대한 국가적인 연구와 지원은 필요하고 향후 문제가 될수도 있는 사안이다. 반면 원자력 발전소가 후쿠시마와 같이 중차대한 사고로 연계될 가능성은 없다고 본다.
.
소련의 체르노빌, 미국의 쓰리마일, 일본의 후쿠시마와 같은 발전소 사고의 원인은 바로 안전을 취급하는 전문가들의 나태함과 안이함에서 발생한 것이었지 자연재해가 근본 원인이 아니었다. 만사가 다 그렇긴 하지만 원전사고의 주범은 바로 인력의 문제였고 전문가들이 현장대응을 곧바로 적시에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심지어 일본의 후쿠시마 사고조차도 지진이 원인이 아니라 지진에 의한 쓰나미 때문에 원자력 발전소를 정시시켜놓고 추가로 냉각을 하지 못한 원인이 대형사고를 발생시킨 것이다. 비상정지를 시킨 이후 냉각을 위한 비상발전기가 물에 잠김으로서 비상급수가(냉각수) 되지 않아서 발생한 문제란 말이다. 당시 동경전력 사장이 일본 통산성에서 낙하산으로 내려온 비전문가였기 때문에 사고를 키웠고 근본적인 이유는 관료들에 의한 인사문제가 대형사고를 만든 것이다.
.
오늘 고리1호기 정지와 관련해서 문재인 대통령께서 비핵화와 원자력 반대입장을 말씀하셨다. 대통령의 주변에 많은 전문가들이 있을 것이고 전문가들의 자문을 받아서 결정한 내용이라고 믿는다. 환경단체와 같이 어떤 이념이나 자신들의 존재감을 위한 발언에 움질일 이유도 없고 또한 원전 찬핵론자들의 요구에 동화할 이유도 없다.
.
사실과 진실 그리고 에너지 분야의 전문가들이 숙의를 한 이후 결정되는 조언에 정부시책을 고민해서 결정했으면 좋겠다. 소생의 시각이나 개인적인 의견은 원자력을 이렇게 금지시키고 수명연장을 더 이상 진행시키지 않는 것이야 말로 엄청난 국가적인 손해다. 다른 한편으로는 현장의 문제와 전문가집단이 그리고 여론이 대통령에게 제대로 사실이 전달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소생은 찬핵도 반핵도 아니지만 객관적인 시각만큼은 전문가로서 당당히 말하고 싶다. 결론은 지금처럼 이렇게 고리1호기를 영구정지시키는것도 옳지 않고 향후 원자력 분야를 없애겠다는 대통령의 말씀에도 이의가 있다. 원자력 발전은 계속하되 고준위 폐기물 처리에 더 많은 연구를 해야 하고 안전과 관련된 규제업무는 현장의 인력을 중시하는 쪽으로 진행된다면 안전에 이상이 없다고 확신한다.

2017년 6월 14일 수요일

항소이유서 - 유시민

항소이유서


본 적 : 경상북도 ********************

주 소 : 서울특별시 구로구 **************

성 명 : 류 시 민

죄 명 : 폭력행위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 요지


본 피고인은 1985년 4월 1일 서울지방법원 남부지원에서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 받고 이에 불복, 다음과 같이 항소이유서를 제출합니다. 다음 본 피고인은 우선 이 항소의 목적이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거나 1심 선고형량의 과중함을 호소하는데 있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두고자 합니다.

이 항소는 다만 도덕적으로 보다 향상된 사회를 갈망하는 진보적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려는 노력의 소산입니다. 또한 본 피고인은 1심 판결에 어떠한 논란거리가 내포되어 있는지 알지 못하며 알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자신의 행위의 정당성을 판단하는 기준으로서 본 피고인이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하느님이 주신 양심이라는 척도이지 인간이 만든 법률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법률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는 본 피고인으로서는 정의로운 법률이 공정하게 운용되는 사회에서라면 양심의 명령이 법률과 상호적대적인 모순관계에 서게 되는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으리라는 소박한 믿음 위에 자신의 삶을 쌓아올릴 수밖에 없었으며 앞으로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인간과 인간, 인간집단과 인간집단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폭력행위는 본질적으로 그 사회의 현재의 정치적·사회적·도덕적 수준의 반영인 동시에 미래의 그것을 결정하는 규정 요인 중의 하나입니다.

따라서 “폭력행위등 처벌에 관한 법률”(이하 폭행법이라 함) 위반 혐의로 형사소추되어 1심에서 유죄선고를 받은 본 피고인으로서는 자신이 관련된 사건이 우리 사회의 어떠한 정치적·사회적·도덕적 상태의 반영이며 또 미래의 그것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규명함과 동시에 사건과 관련된 각 개인 및 집단의 윤리적 책임을 명백히 밝힐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우리 사회가 젊은 대학생들이 동 시대의 다른 젊은이들을 폭행하였다는 불행한 이 사건으로부터 “개똥이와 쇠똥이가 말똥이를 감금 폭행하였다. 그래서 처벌을 받았다”는 식의 흔하디 흔한 교훈밖에 배우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사건 자체보다 더 큰 비극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이 항소이유서는, 부도덕한 개인과 집단에게는 도덕적 경고를, 법을 위반한 사람에게는 법적 제재를, 그리고 거짓 성령 속에 묻혀 있는 국민에게는 진실의 세례를 줄 것을 재판부에 요구하는 청원서라 하겠습니다. 거듭 밝히거니와 본 피고인은 법률에 대해 논한다는 것이 아니므로 이 글 속에서 ‘책임’ ‘의무’ ‘과실’ 등등의 어휘는 특별한 수식어가 없이 사용된 경우, 그 앞에 ‘윤리적’ 또는 ‘도덕적’이라는 수식어가 생략된 것으로 간주하여 무방합니다.

그리고 본 피고인이 특히 힘주어 말하고 싶은 단어나 문장에는 윗점을 사용하였습니다. 본 피고인은 우선 이 사건을 정의(定義)하고 나서 그것을 설명한 다음 사건과 관련하여 학생들과 현정권(본 피고인이 신봉하는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원칙에 비추어 제 5 공화국이 합법성과 정통성을 갖추지 못하고 있음을 표시하기 위해 정부대신에 정권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각자가 취한 행위를 분석함으로써 이 글의 목적을 달성코자 합니다.

이 사건은 학생들에 의해서는 ‘서울대 학원 프락치사건’으로, 정권과 매스컴에 의해서는 ‘서울대 외부인 폭행사건’으로 또는 간단히 ‘서울대 린치사건’이라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건명칭의 차이는 양자가 사건을 보는 시각을 전혀 달리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현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건의 본질 자체가 달라질 리는 만무한 일입니다.

본 피고인이 가능한 한 객관적인 입장에서 이 사건을 정의하자면 이는 정권과 학원 간의 상호적대적 긴장이 고조된 관악캠퍼스 내에서, 수사기관의 정보원이라는 혐의를 받은 네명의 가짜학생을 다수의 서울대 학생들이 연행·조사하는 과정에서, 혹은 약간의 혹은 심각한 정도의 폭행을 가한 사건입니다.

‘정권과 학원 간의 상호적대적 긴장상태’를 해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4월 민주혁명을 짓밟고 이 땅에 최초의 군사독재정권을 수립한 5·16 군사쿠데타 이후 4반세기에 걸쳐 이어온 학생운동의 반독재 민주화 투쟁혈사(血史)와 아울러 가열되어온 독재정권의 학원 탄압사를 살펴보아야 할 터이지만, 이 글이 항소이유서임을 고려하여, 1964~65년의 대일 굴욕외교 반대투쟁(소위 6·3사태), 1974년의 민청학련 투쟁, 1979년 부산마산지역 반독재 민중투쟁 등을 위시한 무수한 투쟁이 있어 왔다는 사실을 지적하는데 그치기로 하고 현 정권의 핵심부분이 견고히 형성되어 사실상 권력을 장악한 1979년 12월 12일의 군사쿠데타 이후 상황만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경제적 모순·사회적 갈등·정치적 비리·문화적 타락은 모두가 지난날의 유신독재 아래에서 배태·발전하여 현 정권 하에서 더욱 고도성장을 이룩한 것들입니다. 현 정권은 유신 독재의 마수에서 가까스로 빠져 나와 민주 회복을 낙관하고 있던 온 국민의 희망을 군화발로 짓밟고, 5·17 폭거에 항의하는 광주시민을 국민이 낸 세금과 방위성금으로 무장한 ‘국민의 군대’를 사용하여 무차별 학살하는 과정에서 출현한 피 묻은 권력입니다.

현 정권은 정식출범조차하기 전에 도덕적으로는 이미 파산한 권력입니다. 현 정권이 말하는 ‘새 시대’란, 노골적·야수적인 유신 독재 헌법에 온갖 화려한 색깔의 분칠을 함으로써 그리고 총칼의 위협 아래 국민에게 강요함으로써 겨우 형식적 합법성이나마 취할 수 있었던 새로운 ‘유신 시대’이며, 그들이 말하는 ‘정의(正義)’란 소수 군부 세력의 강권 통치를 의미하며, 그들이 옹호하는 ‘복지’란 독점 재벌을 비롯한 있는 자의 쾌락을 뜻하는 말입니다.

‘경제성장’ 즉 자본주의 발전을 위하여 ‘비효율적인’ 각종 민주 제도(삼권 분립, 정당, 노동조합, 자유 언론, 자유로운 집회 결사) 등을 폐기시키려 하는 사상적 경향을 우리는 파시즘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그러한 파시스트 국가의 말로가 온 인류를 재난에 빠뜨린 대규모 전쟁 도발과 패배로 인한 붕괴였거나, 가장 다행스러운 경우에조차도 그 국민에게 심대한 정치적·경제적 파산을 강요한 채 권력 내부의 투쟁으로 자멸하는 길뿐임을 금세기의 현대사는 증명하고 있습니다.

나찌 독일, 파시스트 이탈리아, 군국주의 일본은 전자의 대표적인 실례이며, 스페인의 프랑코 정권, 합법정부를 전복시키고 등장했던 칠레·아르헨티나 등의 군사 정권, 하루저녁에 무너져버린 유신체제 및 지금에야 현저한 붕괴의 조짐을 보이고 있는 필리핀의 마르코스 정권 따위는 후자의 전형임에 분명합니다.

국가는 그것이 국가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만이 구성원 모두에게 서로 방해하지 않고 자유롭게 행복과 자아실현을 추구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주기 때문에 존귀합니다. 지난 수년간, 인간다운 삶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을 요구하며 투쟁한 노동운동가, 하느님의 나라를 이 땅에 구현하기 위해 노력한 양심적 종교인, 진실과 진리를 위하여 고난을 감수한 언론인과 교수들, 그리고 민주제도의 회복을 갈망해온 민주정치인들의 선봉에 섰던 젊은 대학인들은, 부도덕하고 폭력적이며 비민주적일 뿐만 아니라 반민중적이기 때문에, 국민이 자유롭게 보고 듣고 말할 수 있는 조건 아래 서라면 단 한주일도 유지될 수 없는 현 군사독재정권이 그토록 존귀한 우리 조국의 대리인이 될 수 없음을 주장해 왔습니다. 우리 국민은 보다 민주적인 정부를 가질 자격과 능력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 정권은 12·12 군사쿠데타 이후 4년 동안 무려 1,300여명의 학생을 각종 죄목으로 구속하였고 1,400여명을 제적시키는 한편 최소한 500명 이상을 강제 징집하여 경찰서 유치장에서 바로 병영으로 끌고 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정 구석구석에 감시초소를 세우고 사복 형사를 상주시키는 동시에 그것도 모자라 교직원까지 시위 진압대로 동원하는 미증유의 학원 탄압을 자행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한 번도 이러한 사실을 시인한 적이 없으며, 1982년 기관원임을 자칭한 괴한에게 어린 여학생이 그것도 교정에서 강제추행을 당하는 기막힌 사건이 일어났을 때조차, 최고위 치안 당국자는 국회 대정부 질의에 대하여 “교내에 경찰을 상주시킨 일이 없다. 유언비어의 진원지를 밝혀내 발본색원하겠다”고 태연하게 답변하였을 정도입니다. 현재 학원가를 풍미하고 있는 전경 특히 경찰에 대한 불신과 적대감은 이와 같은 정권의 학원 탄압 및 권력층의 상습적인 거짓말이 초래한 유해한 결과들 중의 한가 지에 불과합니다.

이솝우화의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은 양떼를 잃어버리는 작은 사건을 낳는데 그쳤지만 주 유왕(周 幽王)이 미녀 포사(褒似)를 즐겁게 하기 위해 거짓봉화를 울린 일은 중국대륙 전체를 이후 500여년에 걸친 대 전란의 와중에 휩쓸리게 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양치기 소년의 외침을 외면한 마을사람들이나 오랑캐에게 유린당하기까지 주(周) 왕실을 내버려 둔 제후들을 어리석다 말하지 않습니다.

정권의 주장이라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지 않으려는 학생들의 불신은 과연 누구의 책임이겠습니까? 더욱이 야만적이고 부도덕한 학원탄압은 전국 각 대학에서 목숨을 건 저항을 유발하였고 그 결과 일일이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학생들이 생명을 잃거나 중상을 당했습니다. 서울대학교에서만도 고 김태훈·황정하·한희철 등 셋이나 되는 젊은 생명이 희생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으로 83년 12월의 소위 자율화조치 이후에도 주전선(主戰線)이 교문으로 이동하였다는 단 한 가지를 제외하면 거의 변함없이 계속되어 왔으며, 특히 지난해 9월 총학생회 부활을 전후하여 더욱 강화되었던 수사기관의 학원사찰, 교문 앞 검문검색, 미행과 강제연행 등으로 인해 양자 간의 적대감 또한 전례 없이 고조된 바 있습니다. 즉 소위 자율화조치 이후에도 ‘학원과 정권 사이의 적대적 긴장상태’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건은 바로 이와 같은 조건 하에서 수명의 가짜 학생이 수사기관의 정보원이라는 혐의를 받을만한 행위를 하였기 때문에 거의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예기치 못한 사건입니다. 이들의 의심을 받게 된 경위 및 사건경과는 이미 밝혀진 바이므로 재론할 필요가 없지만 여기에서 가짜 학생에 대해서는 약간의 부연설명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들이 실제로 정보원인지 그 여부는 극히 중요한 정치적 관심사임에 분명하지만 사건의 법률적·윤리적 측면과는 거리가 있는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학생들이 연행·감금·조사 또는 폭행한 것은 결코 정보원이나 단순한 가짜학생이 아닌 ‘정보원 혐의를 받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에 폭력 자체가 정당할 수는 없으며 또 아니라고 해서 학생들의 일체의 행위가 모두 부당했다고 말할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본 피고인이 이 문제에 대해 재론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정보원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위의 이유에 의해서 입니다. 갖가지 목적으로 학생처럼 위장하고 캠퍼스를 배회하는 수많은 가짜 학생들, 이들은 소위 대형화·종합화된 오늘날의 대학에서, 졸업정원제·상대평가제 등 대학을 사회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이 마비되어 제 한 몸 잘사는 일에만 관심이 있는 전문기능인의 집단양성소로 전락시키기 위해 독재정권이 고안해 낸 각종 제도가 야기한바 대학인의 원자화·고립화 등 비인간화 현상을 틈타 캠퍼스에 기생하는 반사회적 인간집단으로서, 교내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절도·사기·추행·학원사찰의 보조활동(손형구의 경우처럼) 등과 복합적인 관련을 맺고 있음으로 해서 대학인 상호간에 광범위한 불신감을 조성하고 대학의 건강한 공동체문화를 파괴하는 암적 존재입니다.

현 정권은 이들이 대학인의 일체감을 파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교내에 사복경찰을 상주시킴으로써 야기된 숱한 문제들마저 이들에게 책임전가 시킬 수 있다는(여학생 초생사건 때처럼) 이점 때문에 가짜학생의 범람현상을 방관 또는 조장하여 온 것입니다.

따라서 학생들이 이들에 대해 평소 품고 있는 혐오감이 어떠한가는 설명할 필요조차 없는 일입니다. 이들이, 이들 가짜들이, 혹은 복학생들의 소규모 집회석상에서 혹은 도서실에서, 법과대학 사무실에서, 강의실에서, 버젓이 학생행세를 하면서 학생활동에 대한 정보 수집활동을 하다가 탄로 났을 경우, 법이 무서워서 이를 묵과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올바른 일이겠습니까? 상호적대적인 분위기 속에서, 바로 그들을 보냈으리라 추정되는 수사기관에, 정보원 혐의를 받고 있는 가짜학생의 신분조사를 의뢰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물론 대학의 교정은 개방된 장소이므로 은밀한 사찰 행위뿐만 아니라 예전처럼 수백 수천의 정·사복 경찰이 교정을 온통 휘젓고 다닌다 할지라도 이는 전혀 비합법 행위는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본 피고인은 이러한 행위가 도덕적으로 바람직하다고 하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반면 이러한 부도덕한 학원 탄압 행위에 대한 학생들의 여하한 실질적 저항 행위도, 비록 그것이 윤리적으로 정당한 일이지만, 현행 법률에 대한 명백한 침해가 될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정의로운 사회에서라면 존재할 수 없는 법과 양심의 상호적대적인 모순관계가 필연적으로 발생합니다. 그 누구도 이 상황에서 법과 양심 모두를 지키기란 불가능합니다.

이 사건이야말로 우리 사회 전체가, 물론 대학사회도 포함하여, 당면한 정치적·사회적 모순의 집중적 표현이라는 학생들의 주장은 바로 이와 같은 논거에 입각한 것입니다. 법은 자기를 강제할 수 있는 힘을 보유하고 있지만 양심은 그렇지 못합니다. 법은 일시적 상대적인 것이지만 양심은 절대적이고 영원합니다. 법은 인간이 만든 것이지만 양심은 하느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본 피고인은 양심을 따랐습니다. 그것은 법을 지키는 일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양심의 명령을 따르는 일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본 피고인뿐만 아니라 모든 학생들이, 이 사건에서만이 아니라 그 이전의 어느 사건에서도 그랬습니다. 지난해 9월, 10일간에 걸친 일련의 사건은 이렇게 하여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자체로서 그리 복잡하지 않은 이 사건은 서울대생들의 민한당사 농성사건, 주요 학생회 간부들의 제적·구속, ‘학생운동의 폭력화’에 대한 정권과 매스컴의 대공세, 서울대 시험거부 투쟁과 대규모 경찰투입 등 심각한 충격파를 몰고 왔으며 공소 사실을 거의 전면 부인하는 피고들에게 유죄를 선고함으로써 일단락된 바 있습니다.

사건종료 다음날인 9월 28일 전 학도호국단 총학생장 백태웅과 뒤늦게 프락치사건 대책위원장 겸 사회대학생장 오재영군 등이 지도한 민한당사 농성은 자연발생적·비조직적으로 일어난 이 사건을 부도덕한 학원사찰 및 정권의 비민주성을 비판하는 조직적 투쟁으로 고양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비로 가짜 학생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학생들의 법률적·윤리적 과실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 때문에 학원사찰의 존재라는 별개의 정치적 문제를 덮어둘 수는 없는 일이므로 이 투쟁은 그 자체로서 완전히 정당한 행위였다고 본 피고인은 생각합니다.

이 일이 있은 다음 날인 9월 29일 저녁 학교당국은 이정우·백기영·백태웅·오재영 등 4명의 총학생회 주요간부를 전격적으로 제명 처분하였으며 본 피고인은 9월 30일 하오 경찰에 영장 없이 강제연행 당한 후 며칠간의 조사를 받고 구속되었습니다. 본 피고인이 가장 먼저 연행당한 것은 미리 도피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도피하지 않은 것은 필요를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고, 필요를 느끼지 않은 것은 도망 칠만큼 잘못한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본 피고인은 경찰·검찰에서의 조사 및 법정진술시 기억력의 한계로 인한 사소한 착오 이외에 여하한 수정·번복도 한 바 없었으며 오직 사실 그대로를 말했을 따름입니다. 어쨌든 서울시경국장은 10월 4일 소위 ‘서울대 외부인 폭행사건’의 수사결과를 도하 각 신문·TV·라디오를 통해 발표하였는데, 그에 의하면 4명의 외부인을 감금·폭행한 이 일련의 사건이 복학생협의회 대표였던 본 피고인 및 학생대표들의 합의 아래 의도적이고 조직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10월 4일 이전에 경찰에 연행된 몇몇 학생들 중(본 피고인을 포함) 어느 누구도 이 발표를 뒷받침해줄 만한 진술을 한 바 없으며, 이후에 작성된 구속영장·공소장 및 관련학생들의 신문조서들이 모두 이 발표의 기본선에 맞추어 만들어진 것임은, 만일 이 모든 서류를 날짜별로 검토해 본다면, 누구의 눈에나 명백한 일입니다.

한마디로 10월 4일의 경찰 발표문의 본질은 모종의 정치적 목적을 위한 견강부회·침소봉대·날조왜곡 바로 그것입니다. 그 목적이란 다름이 아니라 학생운동을 폭력지향적인 파괴활동으로 중상모략함으로써 이 사건의 정치적 성격은 물론 현정권 자체의 폭력성과 부도덕성을 은폐하려는 것입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이 사건이 비조직적·우발적으로가 아니라, 학생단체의 대표들에 의해 조직적이고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어야 했습니다.

그래야만 몇몇 관련 학생뿐만이 아니라 학생운동 전체를 비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총학생회장, 학도호국단 총학생장, 프락치사건 대책위원장, 복학생협의회 대표 등은,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인간이며 어떤 행위를 실제로 했는가에 관계없이 선전을 위한 가장 손쉬운 희생물이 되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수법은 지난 수십년 간 대를 이어온 독재정권들이 기회 있을 때마다 상투적으로 구사해온 낡은 수법을 그대로 답습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현정권은 막 출범한 서울대 학생회의 주요 간부의 활동을 실질적으로 봉쇄하는 동시에, 60만 대군을 동원해도 때려 부술 수 없는 학생운동의 도덕성을 훼손시키는 데에 어느 정도는 성공한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마치 자신이 더 도덕적인 존재가 된 듯한 자기 만족 조차 조금은 맛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검찰 역시 사실을 밝혀내는 일보다는 경찰의 발표를 뒷받침하기에만 급급하여 대동소이한 내용의 공소를 제기하고 그것에만 집착하여 왔습니다. 사건 발생 후 일개월도 더 지난 작년 11월, 관악경찰서 수사과 형사들이 김도형·손택만군 등 무고한 학생들에게 가혹한 고문을 가함으로써 공소사실과 일치하는 허위자백을, 형사들 자신의 표현을 빌자면, 짜내었다는 사실이 그 증거입니다.

즉 경찰은 본 피고인들이 ‘폭행법’을 위반하였다는 증거를 바로 그 ‘폭행법’을 위반하여 관련된 학생들을 고문함으로써 짜낸 것입니다. 그 짜내어진 허위자백이 증거로 채택된다는 사실을 못 본 체 하더라도 ‘법 앞에서의 평등’이라는 중대한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전혀 정당한 윤리적 기초를 갖지 못하였기 때문에 양심인으로서는 복종의 의무를 느낄 필요가 없었던 지난날의 긴급조치나 현행 ‘집시법’과 달리 이 ‘폭행법’은 지켜져야 하며 또 지켜질 수 있는 법률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각인은 현 정권에 대한 정치적 견해에 따라 이 법 앞에서 불평등한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본 피고인은, 과분한 탓인지 모르겠으나, 학생들을 상습적으로 폭행·고문하는 각 대학 앞 경찰서의 정보과 형사들이 그 때문에 ‘폭생법’ 위반으로 형사소추당했다는 비슷한 이야기조차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난해 5월 19일, ‘민주화운동 청년연합’이 주최한 광주항쟁 희생자 추모집회에 참석하였다가 귀가하는 길에, 그녀 자신 제적학생이면서 역시 고려대학교 제적학생인 서원기씨의 부인 이경은씨가 동대문 경찰서 형사대의 발길질에 6개월이나 된 태아를 사산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부부는 이 법의 보호 밖에 놓여 있음이 누구의 눈에나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고소장을 접수하고서도, 검찰은 수사조차 개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본 피고인 역시 여러 차례 수사기관에 연행되어 조사받는 과정에서 폭행당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지만 이 법의 보호를 요청할 엄두조차 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누구에게도 협박 또는 폭행을 가한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본 피고인은 폭력법으로 유죄를 선고받고 말았습니다. 본 피고인이 굳이 지난 일을 이렇듯이 들추어냄은 오직, 흔히 이야기되고 있는 바 검찰의 정치적 편향성의 존재를 환기하기 위한 것입니다. 즉 이 사건을 담당한 경찰관 역시 앞에서 밝힌 바 현 정권의 정치적 음모와 무관하지 않았음을 지적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결론적으로 검찰이 주장하는 바 공소사실의 대부분은 불순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 경찰이 날조한 사건 내용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으로서, 한편에 있어서는 정권과 매스컴이 공모하여 널리 유포시킨 일반적인 편견이 기초 위에 서 있으며,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경찰이 고문수사를 통해 짜낸 관련 학생들의 허위자백에 의해 지지되고 있는 공허한 내용으로 가득 찬 것입니다.

그러나 본 피고인이 이 사건에서 드러난 학생들의 과실과 본 피고인 자신의 법률적·윤리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하여 이렇듯 정권의 부도덕을 소리 높이 성토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가짜 학생에 대한 연행·조사가 윤리적으로 정당하다손치더라도, 이들에게 가한 폭행까지를 정당화할 의향은 없습니다. 조사를 위한 감금은 가능한 한 짧아야 하며 폭행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물론 현상적으로 폭력처럼 보인다고 해서 그것이 본질상 다 폭력의 영역에 속할 수는 없지만, 무력한 개인에게 다중이 가한 폭행은 비록 그것이 경찰에 대한 이유 있는 적대감의 발로인 동시에 그들이 상습적으로 학생들에게 가해온 고문을 흉내 낸 것이라 할지라도 학생운동의 비폭력주의에서 명백히 이탈한 행위라고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또 폭행을 가한 당사자들이 스스로 나서서 책임을 감당하지 않은 것 또한, 비록 그것을 어렵게 만든 당시의 특수한 정치적 사정이 개재됐다손치더라도, 학생들이 가진 윤리적 결함의 표현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자신 폭행과 절대로 무관하며 사건 전체와도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하여 틀림이 없을 총학생회장 이정우 군이 스스로 모든 책임을 떠맡아 항소조차 포기했다고 하는 아름다운 행위가, 그 누구도 선뜻 폭행의 책임을 감당하려 하지 않음으로써 발생한 윤리의 공백상태를 어느 정도는 메꾸어 주었다고 본 피고인은 확신합니다.

본 피고인은 역시 언행이나 조사를 지시한 사실이 없지만(지시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만일 그럴 필요가 있었다면 언제라도 기꺼이 직접 그들을 연행·조사하였을 것입니다(그것이 위법임은 물론 잘 알지만). 본 피고인은 복학생 협의회의 사실상의 대표로서 개인적으로 비폭력의 원칙을 준수해야 할 소극적 의무에 부가하여 학생운동의 전체수준에서도 이 원칙이 관철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적극적 의무 또한 완수해야 할 위치에 있습니다.

따라서 문제의 9월 26일 밤 전기동·정용범 양인이 구타당하는 광경을 잠시 목격하고서도 그것을 제지하려 하지 않았던 본 피고인에게는 다른 학생들보다 더 큰 윤리적 책임이 있음에 분명합니다(법률적 측면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또한 임신현·손형구의 경우에도 본 피고인이 사건에 접했을 때는 이미 감금 및 조사가 진행 중이었으므로 어떠한 지시를 내릴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본 피고인 자신 조사를 위한 감금에 명백히 찬동했으며 또 잠시나마 직접 조사에 임한 적도 있기 때문에 법률을 어긴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며 그에 따른 책임이라면 흔쾌히 감수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경우, 가능한 한 짧은 감금과 비폭력이라는 원칙을 관철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며 실제로 이 원칙이 관철되었으므로 본 피고인은 아무런 윤리적 책임도 느끼지 않습니다.

어쨌든 상당한 정도의 법률적·윤리적 책임이 자신에게 있음을 떠맡기 위해 이정우군처럼 처신할 수도 있었을 것이며 그 또한 나쁘지 않은 일이었으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이미 밝힌 바와 같이 너무나도 명백한 정권의 음모의 노리개가 될 가능성 때문에 본 피고인은 사실과 다른 것은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결코 시인하지 않으리라 결심하였고 또 그런 자세로 법정투쟁에 임해 왔습니다.

그래야만 본 피고인은 자신이 느끼고 있는 책임감이, 공소사실을 기정사실화시키기 위해 우격다짐으로 요구하는 그것과는 성질상 판이한 것임을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본 피고인은 이 사건의 재판이 갖는 정치적 의미가 무엇이며 이 사건을 우리 사회의 도덕적 진보의 계기로 삼으려면 사법부가 본연의 윤리적 의무를 완수해야 함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 사건은 누적된 정권과 학원 간의 불신 및 적대감을 배경으로 하여 수명의 가짜학생이 행한 전혀 비합법적이라 할 수 없지만 명백히 부도덕한 정보수집행위가 본질적으로 부도덕하지 않으나 명백히 비합법적인 학생들의 대응행위를 유발함으로써 빚어진 사건입니다. 지난 수년간 현 정권이 보여준 갖가지 부도덕한 행위들 – 학원 내에 경찰을 수백명씩이나 상주시키면서도 온 국민에게 거짓증언을 한 치안당국자의 행위, 소위 자율화조치라고 하는 아름다운 간판 위에서 음성적인 확원사찰을 계속 해온(이에 관해서는 법정에서 상세히 밝힌 바 있음) 수사기관의 행위, 불순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 사건조차 서슴지 않고 날조·왜곡한 행위 등 - 은 같은 뿌리에서 돋아난 서로 다른 가지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이 재판은 사건의 진정한 원인을 규명하여 그에 대한 처방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의 행위중 비합법적인 부분만을 문제 삼아 처벌하기 위한 것입니다. 아마도 사법부 자체는 이처럼 부도덕한 정권의 학원난입 행위를 옹호하려는 의도가 없을 런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사태의 전후맥락을 모조리 무시한 채 조사를 위한 연행·감금마저(폭행부분이 아니라) 형사처벌의 대상으로 규정한 1심의 판결은 지금 이 시간에도 갖가지 반사회적 목적으로 위해 교정을 배회하고 있을 수많은 가짜학생 및 정보원의 신변안전을 보장한 ‘가짜학생 및 정보원의 안전보장 선언’이 아니라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본 피고인은 결코 학생들의 행위 전부에 대한 무죄선고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반복되는 말이지만, 부도덕한 자에 대한 도덕적 경고와 아울러 법을 어긴 자에 대한 법적 제재가 가해져야 하며, 허위선전에 파묻힌 국민에게는 진실의 세례를 주어야 한다는 것, 사태의 책임소재를 분명히 하지 않고서는 우리 모두의 도덕적 향상은 기대될 수 없는 것을 주장할 따름입니다. 법정이 신성한 것은 그것이 법정이기 때문이 결코 아니며, 그곳에서만은 허위의 아름다운 가면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때로는 추악해 보일지라도 진실의 참모습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오늘날의 사법부가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正義)를 세우며, 또 그 정의가 강자(强者)의 지배를 의미하지 않는다면, 1심의 재판과정에서 매장당한 진실이 다시금 생명을 부여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본 피고인은 믿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아마도 이 사건으로 인하여 그렇지 않아도 쉽게 허물어버리기 어려울 만큼 높아져 있는 현재의 불신과 적대감의 장벽 위에 분노의 가시넝쿨이 또 더하여지는 것을 보아야 할 것이고, 언젠가는 더욱 격렬한 형태로 폭발할 유사한 사태를 반드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지난 5년간 현정권에 반대했다 하여 온갖 죄목으로 투옥되었던 1,500여명의 양심수 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이 ‘신성한 법정’에서 정의로운 재판관들에 의해 유죄선고를 받았습니다. 야수적인 유신독재 치하에서도 역시 그만큼 많은 분들이 전대미문의 악법 ‘긴급조치’를 지키지 않았다 하여 옥살이를 하였습니다. 긴급조치 위반사건의 보도 또한 긴급조치 위반이었으므로 아무도 그 일을 말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변론을 하던 변호사도 그 변론 때문에 구속당했습니다.

지금에 와서 긴급조치가 정의로운 법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그리고 그때 투옥되신 분들이 ‘반사회적 불순분자’ 또는 ‘이적행위자’였다고 말하는 이도 거의 없지만, 그분들을 ‘죄수’로 만든 법정은 지금도 여전히 ‘신성하다’고 하며 그분들을 기소하고 그분들에게 유죄를 선고한 검찰과 법관들 역시 ‘정의구현’을 위해 일하고 있다고 합니다. 누군가가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사법부가 정의를 외면해 왔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법정이 민주주의의 처형장으로 사용되어 왔다”는 뜻일 것입니다. 누군가가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사법부가 정의를 세워왔다”고 말한다면, 그리고 그가 진정 진지한 인간이라면, 그는 틀림없이 “정의란 독재자의 의지이다”고 굳게 믿는 인간일 것입니다.

본 피고인은 그곳에 민주주의가 살해당하면서 흘린 피의 냄새가 짙게 배어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곳에서만은 진실의 참모습을 만날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신성한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싶습니다. 본 피고인은 자신에게 유죄를 선고하는 재판관이 ‘자신의 지위가 흔들리지 않는 한도 내에서만 정의에 관심을 갖는’ 그런 정도가 아니라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우는’ 현명한 재판관이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실을 밝히는 일이야말로 정의가 설 토대를 건설하는 일이라 믿습니다. 이상의 논의에 기초하여 본 피고인은 1심판결에 승복할 수 없는 이유를 간단히 언급하고자 합니다. 본 피고인은 판결문을 받아보았을 때 참으로 서글픈 심정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무려 7회에 걸쳐 진행된 심리과정에서 밝혀진 사건의 내용과 거의 무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본 피고인이 그토록 진지하게 임했던 재판의 전과정이 단지 예정된 판결을 그럴듯하게 장식해주기 위해 치루어진 무가치한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았음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우선, 「판결이유」의 ‘범죄사실’ 제 1 항 중 “······임신현이····· 구타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피고인 유시민은 성명불상 학생들에게 위 임신현의 신분을 확인·조사토록 하고···”라는 부분은 형식논리상으로조차 성립할 수 없었습니다.

본 피고인에게 지시를 받은 학생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면, 어떻게 그가 성명불상일 수가 있습니까? 그리고 본 피고인이 한번도 이를 시인한 바 없으며, 백수택군 등 여러 학생들의 진술은 물론이요, 임신현 자신의 법정진술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할지라도, 본 피고인이 임신현이 연행 구타되던 현장에 있었음을 증명하기란 불가능한 일인데 하물며 본 피고인이 성명불상의 누군가에게 어떠한 지시를 내렸다는 일이 어찌 증명 가능하겠습니까?

사실 본 피고인은 그때 그곳에 있지 않았습니다. 다음, ‘범죄사실’ 제 2 항 중 “·····위 김도인은 피고인 백태웅과 피고인 유시민 앞에서····· 구타하여 동인(손형구를 말함)에게 전치 3주간의·····다발성 좌상을 가한·····” 부분 역시, “백태웅과 유시민에게 조사받는 동안 한 번도 폭행당한 일이 없다”고 한 손형구 자신의 법정진술에조차 모순됩니다. 그리고 ‘범죄사실’ 제 3 항 중 “피고인 유시민은·····동일(9월 26일을 말함) 21:00경부터 익일 01:00까지 피고인 윤호중, 같은 오재영 및 백기영, 남승우, 오승중, 안승윤 등과 같이·····(정용범을)·····계속 조사하기로 결의하고·····” 및 ‘범죄사실’ 제 4 항 중 이와 유사한 대목 역시, 본 피고인이 당시 진행중이던 총학생회장 선거관리 및 학생회칙의 문제점에 관해 선거관리 위원들과 장시간에 걸쳐 논의한 사실을 왜곡해 놓은 것에 불과하며, 이는 오승중, 김도형 등의 진술에 의해서도 명백히 밝혀진 일입니다.

이 몇 가지 예는 특히 현저하게 사실과 다른 부분을 지적한 것에 불과하며 판결문 전체가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의 유사한 모순점을 내포하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조차 없습니다. 이는 사건 전체가 본 피고인 및 학생대표들의 지휘 아래 의도적으로 진행된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정권의 의도를 반영하는 현상으로서, 기실 판결문의 내용 중 대부분이 침소봉대·견강부회·날조왜곡 된 지난해 10월 4일 경찰발표문을 원전(原典)으로 삼아 구속영장·공소장을 거쳐 토씨하나 바꾸어지지 않은 그대로 옮겨진 것에 대한 증거입니다.

1심판결은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사건과 관련된 각 개인 및 집단의 윤리적 법적 책임을 명확히 함으로써 우리 사회 전체의 도덕적 향상에 기여해야 할 사법부의 사회적 의무를 송두리째 방기한 것이라 판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듭 밝히거니와 본 피고인이 이처럼 1심판결의 부당성을 구태여 지적한 것은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당한 이유에 의한 유죄선고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현재 마치 '폭력 과격 학생'의 본보기처럼 되어 버린 본 피고인은 이 항소이유서의 맺음말을 대신하여 자신을 위한 몇 마디의 변명을 해볼까 합니다. 본 피고인은 다른 사람보다 더 격정적이거나 또는 잘난 체하기 좋아하는 인간이 결코 아니며, 하물며 빨간 물이 들어 있거나 폭력을 숭배하는 젊은이는 더욱 아니기 때문입니다.

본 피고인은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장 평범한 청년에 지나지 않으며 늘 "불의를 보고 지나치지 말라", "이웃의 아픔을 나의 아픔처럼 생각하라", "거짓말하지 말라"고 가르쳐 주신, 지금은 그분들의 성함조차 기억할 수 없는 국민학교 시절 선생님들의 말씀을 불변의 진리로 생각하는, 오히려 조금은 우직한 편에 속하는 젊은이입니다.

본 피고인은 이 변명을 통하여 가장 순수한 사랑을 실천해 나가는, 조국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실천하는 행위, 곧 민주주의의 재생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투쟁 전체를 옹호하고자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7년 전인 1978년 2월 하순, 고향집 골목 어귀에 서서 자랑스럽게 바라보시던 어머니의 눈길을 등 뒤로 느끼면서 큼직한 짐보따리를 들고 서울 유학길을 떠나왔을 때, 본 피고인은 법관을 지망하는 (그 길이 여섯이나 되는 자식들을 키우시느라 좋은 옷, 맛난 음식을 평생토록 외면해 오신 부모님께 보답하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또 그 일이 나쁜 일이 아님을 확신했으므로) 아직 어린티를 벗지 못한 열아홉 살의 촌뜨기 소년이었을 뿐입니다.

모든 이들로부터 따뜻한 축복의 말만을 들을 수 있었던 그때에, 서울대학교 사회계열 신입생이던 본 피고인은 '유신 체제'라는 말에 피와 감옥의 냄새가 섞여 있는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유신만이 살길이다"고 하신 사회 선생님의 말씀이 거짓말일 수도 없었으니까요, 오늘은 언제나 달콤하기만 했으며, 생각하기만 해도 가슴 설레던 미래는 오로지 장밋빛 희망 속에 감싸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진달래는 벌써 시들었지만 아직 아카시아 꽃은 피기 전인 5월 어느 날, 눈부시게 밝은 햇살 아래 푸르러만 가던 교정에서, 처음 맛보는 매운 최루 가스와 걷잡을 수 없이 솟아나오던 눈물 너머로 머리채를 붙잡힌 채 끌려가던 여리디 여린 여학생의 모습을, 학생 회관의 후미진 구석에 숨어서 겁에 질린 가슴을 움켜쥔 채 보았던 것입니다.

그날 이후 모든 사물이 조금씩 다른 의미로 다가들기 시작했습니다. 기숙사 입구 전망대 아래에 교내 상주하던 전투 경찰들이 날마다 야구를 하는 바람에 그 자리만 하얗게 벗겨져 있던 잔디밭의 흉한 모습은 생각날 적마다 저릿해지는 가슴속 묵은 상처로 자리 잡았습니다.

열여섯 꽃 같은 처녀가 매주일 60시간 이상을 일해서 버는 한달치 월급보다 더 많은 우리들의 하숙비가 부끄러워졌습니다. 맥주를 마시다가도, 예쁜 여학생과 고고 미팅을 하다가도 문득문득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아이처럼 얼굴이 화끈거리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이런 현상들이 다 ‘문제 학생’이 될 조짐이었나 봅니다.

그리고 그 겨울, 사랑하는 선배들이 ‘신성한 법정'에서 죄수가 되어 나오는 것을 보고 나서는 자신이 법복 입고 높다란 자리에 않아 있는 모습을 꽤나 심각한 고민 끝에 머리 속에서 지워버리고 말았습니다. 다음해 여름 본 피고인은 경제학과 대표로 선출됨으로써 드디어 문제 학생임을 학교 당국 및 수사 기관으로부터 공인받았고 시위가 있을 때면 앞장서서 돌멩이를 던지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점증하는 민중의 반독재 투쟁에 겁먹은 유신 정권이 내분으로 붕괴해 버린 10·26정변 이후에는, 악몽 같았던 2년간의 유신 치하 대학 생활을 청산하고자 총학생회 부활 운동에 참여하여 1980년 3월 '총학생회 대의원회 의장'이라는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되었습니다.

잊을 수 없는 그 봄의 투쟁이 좌절된 5월 17일, 본 피고인은 갑작스러이 구속 학생이 되었고, ‘교수와 신부를 때려준 일’을 자랑삼는 대통령 경호실 소속 헌병들과, 후일 부산에서 ‘김근조 씨 고문 살해'사건을 일으킨 장본인들인 치안 본부 특수 수사관들로부터 두 달 동안의 모진 시달림을 받은 다음, 김대중 씨가 각 대학 학생회장에게 자금을 나누어 받았다는 허위 진술을 해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구속 석 달 만에 영문도 모른 채 군법 회의 공소 기각 결정으로 석방되었지만, 며칠 후에 신체검사를 받자마자 불과 40시간 만에 변칙 입대당함으로써 이번에는 ‘강집 학생'이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입영 전야에 낯선 고장의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이면서 본 피고인은 살아 있다는 것이 더 이상 축복이 아니요 치욕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날 이후 제대하던 날까지 32개월 하루 동안 본 피고인은 ‘특변자(특수 학적 변동자)'라는 새로운 이름을 가지게 되었으며 늘 감시의 대상으로서 최전방 말단 소총 중대의 소총수를 제외한 일체의 보직으로부터 차단당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리고 영하 20도의 혹한과 비정하게 산허리를 갈라 지른 철책과 밤하늘의 별만을 벗 삼는 생활이 채 익숙해지기도 전인 그해 저물녘, 당시 이등병이던 본 피고인은 대학시절 벗들이 관계한 유인물 사건에 연루되어 1개월 동안 서울 보안사 분실과 지역 보안 부대를 전전하고 대학 생활 전반에 대한 상세한 재조사를 받은 끝에 자신의 사상이 좌경되었다는, 마음에도 없는 반성문을 쓴 다음에야 부대로 복귀할 수 있었으며 동시에 다른 연대로 전출되었습니다.

하지만 본 피고인은 민족 분단의 비극의 현장인 중동부 전선의 최전방에서, 그것도 최말단 소총 중대라는 우리 군대의 기간 부대에서 3년을 보낼 수 있었음을 크나큰 행운으로 여기며 남에게 뒤지지 않는 훌륭한 병사였음을 자부합니다.

그런데 제대 불과 두 달 앞둔 1983년 3월 또 하나의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지난해 세상을 놀라게 한 ‘녹화 사업' 또는 ‘관제 프락치 공작'이 바로 그것입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일신의 안전을 위해서는 벗을 팔지 않을 수 없도록 강요하는 가장 비인간적인 형태의 억압이 수백 특변자들에게 가해진 것입니다.

당시 현역 군인이던 본 피고인은 보안 부대의 공포감을 이겨 내지 못하여 형식적으로나마 그들의 요구에 응하는 타협책으로써 일신의 안전을 도모할 수는 있었지만 그로 인한 양심의 고통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군사 독재정권의 폭력 탄압에 대한 공포감에 짓눌려 지내던 본 피고인에게 삶과 투쟁을 향한 새로운 의지를 되살려준 것은 본 피고인과 마찬가지로 강제 징집당한 학우들 중 6명이 녹화 사업과 관련하여 잇달아 의문의 죽음을 당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동지를 팔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한 순결한 양심의 선포 앞에서 본 피고인도 언제까지나 자신의 비겁을 부끄러워하고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순결한 넋에 대한 모욕인 탓입니다. 그래서 1983년 12월의 제적 학생 복교 조치를 계기로 본 피고인은 벗들과 함께 ‘제적 학생 복교추진 위원회'를 결성하여 이 야수적인 강제 징집 및 녹화 사업의 폐지를 위해 그리고 진정한 학원 민주화를 요구하며 복교하지 않은 채 투쟁하였습니다.

이때에도 정권은 녹화 사업의 존재, 아니, 강제 징집의 존재마저 부인하면서 우리에게 ’복교를 도외시한 채 정부의 은전을 정치적 선동의 재료로 이용하는 극소수 좌경 과격 제적 학생들'이라는 참으로 희귀한 용어를 사용해 가면서, 어용 언론을 동원한 대규모 선전 공세를 펼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해 9월 여러가지 사정으로 복학하게 되었을 때 본 피고인은 ‘민주화를 위한 투쟁은 언제 어디서나 어떤 형태로든 계속되어야 한다'는 소신에 따라 ‘복학생 협의회'를 조직하였습니다.

그러나 불과 복학한 지 보름 만에 이 사건으로 다시금 제적 학생 겸 구속 학생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본 피고인의 이름은 ‘폭력 학생'의 대명사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본 피고인은 이렇게 하여 5.17폭거 이후 두 번씩이나 제적당한 최초의 그리고 이른바 자율화 조치 이후 최초로 구속 기소되어, 그것도 ‘폭행법'의 위반으로 유죄 선고를 받은 ‘폭력 과격 학생'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본 피고인은 지금도 자신의 손이 결코 폭력에 사용된 적이 없으며 자신이 변함없이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임을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늙으신 어머니께서 아들의 고난을 슬퍼하며 을씨년스러운 법정 한 귀퉁이에서, 기다란 구치소의 담장 아래서 눈물짓고 계신다는 단 하나 가슴 아픈 일을 제외하면 몸은 0.7평의 독방에 갇혀 있지만 본 피고인의 마음은 늘 평화롭고 행복합니다.

빛나는 미래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 설레던 열아홉 살의 소년이 7년이 지난 지금 용서받을 수 없는 폭력배처럼 비난받게 된 것은 결코 온순한 소년이 포악한 청년으로 성장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 시대가 ‘가장 온순한 인간들 중에서 가장 열렬한 투사를 만들어 내는' 부정한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본 피고인이 지난 7년간 거쳐 온 삶의 여정은 결코 특수한 예외가 아니라 이 시대의 모든 학생들이 공유하는 보편적 경험입니다. 본 피고인은 이 시대의 모든 양심과 함께 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에 비추어, 정통성도 효율성도 갖지 못한 군사 독재 정권에 저항하여 민주 제도의 회복을 요구하는 학생 운동이야말로 가위눌린 민중의 혼을 흔들어 깨우는 새벽 종소리임을 확신하는 바입니다.

오늘은 군사 독재에 맞서 용감하게 투쟁한 위대한 광주 민중 항쟁의 횃불이 마지막으로 타올랐던 날이며, 벗이요 동지인 고 김태훈 열사가 아크로폴리스의 잿빛 계단을 순결한 피로 적신 채 꽃잎처럼 떨어져 간 바로 그날이며, 번뇌에 허덕이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부처님께서 세상에 오신 날입니다.

이 성스러운 날에 인간 해방을 위한 투쟁에 몸 바치고 가신 숱한 넋들을 기리면서 작으나마 정성들여 적은 이 글이 감추어진 진실을 드러내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것을 기원해 봅니다. 모순투성이이기 때문에 더욱더 내 나라를 사랑하는 본 피고인은 불의가 횡행하는 시대라면 언제 어디서나 타당한 격언인 네크라소프의 시구로 이 보잘 것 없는 독백을 마치고자 합니다.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

1985년 5월 27일 성명 류 시 민

서울 형사 지방 법원 항소 제5부 재판장님 귀하

아버지와 얼레



^^

[◆ 비정규직 문제와 계열화로 전염되는 절망적 현실 [by 물파스]

(@ 이 글은 제가 그동안 이슈인에 올렸던 몇몇 글들과 또 그 중에서 가장 분량이 많았던
<일반의지(General will) - 계열화되는 사실과 사실들의 결합> 이라는 제목의 글 에서
중요 부분을 발췌하고 여기에 몇 가지 다른 내용을 추가한 글입니다. 상당부분 저의
주관적 견해가 섞인 글인데, 분량을 줄인다고 했는데도 너무 깁니다. ~ 죄송합니다. )



[◆ 비정규직 문제와 계열화로 전염되는 절망적 현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그리고 글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을 전하기 위해
머릿속으로 하나의 상상을 해보면서 글을 시작합니다.

지금 눈앞에서 총알 하나가 날아가고 있습니다. ... 그리고 날아가는 총알을 기준으로 앞뒤 상황을
바라보니, 총알 뒤에서 방아쇠를 당기고 있는 사람은 올림픽 금메달 리스트였으며, 총알의 앞에는
과녁이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 상황은 게임(사격)을 의미합니다.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상황을 바라보니 총알 뒤에서 방아쇠를 당기는 사람은 사냥꾼이었으며,
총알 앞에는 야생 멧돼지가 거칠게 뛰어다니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 상황은
(멧돼지)사냥이 됩니다. 그리고 이번엔 날아가는 총알을 기준으로 앞뒤에 각각 군인들이 서로를
향해 총구를 겨누는 장면이 포착됩니다. ... 예상하시겠지만 이 상황은 (절대)일어나서는 안 되는
전쟁 상황인 것입니다.

<총알, 올림픽 메달리스트, 과녁, 사냥꾼, 멧돼지, 군인> ... 이렇게 각각의 사실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어떻게 결합되고 배열(계열화) 되는가에 따라서 그 의미는 다양하게 생성되기도
하며, 또 증폭될 수도 있습니다. ... 더불어 이러한 사실들의 계열화는 우리에게 <사실>과 <사고>와
<사건>을 구별할 수 있게도 만듭니다.

대기업 사원 김철수가 빨간 마티즈(소형차)를 타고가다 마포대교 아래로 추락해 사망했습니다.
이것은 보통의 (교통)사고이며, 또 사실입니다. ... 그런데 김철수는 바로 얼마 전, 유력 정치인과
재벌이 연관된 불법 정치자금 비리를 폭로했던 <내부고발자라는 사실>과 본인 소유의 중형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티즈를 렌트했다는 사실> ... 그리고 하필 우연히도 사고 당일
<블랙박스가 고장나있었다는 사실>이 결합하여 계열화 되면, 이것은 하나의 <사건>이 됩니다.

다시 김철수로 돌아가 봅니다. ~ 이번에도 김철수는 마티즈를 타고가다 마포대교 아래로
추락사 했습니다. ... 그동안 회사의 가장 핵심 부서였던 전략기획실에서 근무하며 (비)자금 관리를
담당했던 김철수는 시간이 흐를수록 죄책감과 스트레스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다 병원 종합검진에서
악성 종양이 발견되었고 본인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게 된 김철수는 고민 끝에 비자금
비리를 폭로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비리 폭로전 마지막 휴가를 위해 혼자서 조용히 여행을
떠나려다 결국은 삶의 의미를 잃고 무기력하게 자살을 선택한 것입니다.

하나의 예를 더 들어봅니다. ... 앞의 두 시례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김철수는 마티즈를 타고가다
마포대교 아래로 떨어져 사망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의 김철수는 결혼을 약속한 자신의 애인 수지가
명동의 한 호텔 앞에서 낯선 남자와 진한 키스를 나누면서 함께 차를 타고 가는 광경을 목격한
것입니다. 자신의 애인인 수지가 분명하다면 수지는 지금쯤 부모님과 함께 제주도에서 유채꽃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불법 정치자금 폭로 문제로 머릿속이 너무나
복잡했는데 ... ... 분노와 절망 등 복잡한 심경에 오늘 만나기로 했던 언론사 기자들과의 약속을
모두 취소하고 흥분상태에서 수지와 그 남자가 함께 탄 차를 무리하게 뒤쫓다 과속(난폭)운전이
원인이 되어 사고가 난 것이었습니다.

위의 세 가지 (교통)사고는 모두 <마티즈를 타고 가던 김철수가 마포대교 아래로 추락사>한
사고입니다. 하지만 ... <내부고발, 악성종양(시한부 삶), 바람난 애인> 이라는 사실들이 김철수와
이웃 항으로 연결되면서 (교통.추락)사고는 <정치적 사건, 자살(생명의 가치), 사랑의 배신> 이라는
전혀 다른 의미(결과)로 계열화(사건화) 되어 생성되고 있습니다.

철학자들도 어려워한다는 프랑스가 낳은 세계적인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는
이렇게 각각의 <사실>들이 이웃 항과 어떻게 연결되고 배열되는가에 따라 드러나는
다양한 계열화의 양상(의미)들을 보여주며 (내부고발자), (시한부 인생), (배신당한 남자) ... 라는
그 <차이의 반복(마포대교 추락)>이 생성하는 <사건의 변이>를 우리에게 안내하고 있습니다.
[◆ 마티즈가 마포대교 아래로 떨어진 교통사고라는 점이 반복되고 있지만, 각각의 사고에는
내부고발과 시한부 인생, 사랑의 배신이라는 <차이(사실)>들이 질료처럼 사용되어 계열화 되면서
그 결과는 각각 다른 의미로 <사건화>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이들의 작은 다툼에서조차 잘잘못을 따지고 또 화해를 시키는데 꽤 많은 세심함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단순히 애들 싸움이라며 그래서 그 <다툼>을 가볍게 취급하려는
시도는 향후 감당해야할 부담의 무게를 생각한다면 <애들 싸움>은 이제 단순한 섣부름을 넘어선
단계까지 왔다고 생각됩니다. ~ 또한 아이들도 엄연히 아이들만의 <세계>가 존재하기 때문에
아이들의 다툼은 그 <세계> 안에서만큼은 충분히 유치하지 않으며 나름의 의미가 부여됩니다.

그런데 아이들의 세계를 넘어 성인의 세계 안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다툼의 양상들은 그 복잡성
측면에서는 아이들의 그것과는 비교조차 안 될 것이며, 무엇보다 성인의 다툼 안에는 관념적 우위를
점하는데서 끝나지 않고 <법의 현실과 (경제적)생존> 이라는 본인의 삶이 반영됨으로써 그 어느
누구에게도 함부로 양보를 권유할 수 없는 상태로까지 갈등과 대립은 평행선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나 다툼이 <개인 vs 개인>이 아닌, 그 개인들이 모인 <집단 vs 집단>의 다툼으로 확장된다면
이때부터는 <법> 이라는 공동체가 마련한 합리적 기준만으로는 해결이 거의 불가능한 수준까지
진행되며 다시 <타협, 양보, 화해> 라는 관념적 속성으로 회귀하여야만 해결이 가능하다 할 것입니다.
특히 그 다툼의 중심에 <노동>이 자리하고 있을 때는 <타협, 양보, 화해>는 절대적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한 번 밥그릇에 빠져보니 뒤집어 엎을수도 없고, 또 다른 밥은
맛이 없어 먹기가 힘들더라 ~ " - 40년 경력의 흙집 미장쟁이의 직업이야기 ]

즐겨보는 TV프로 <극한직업>에서 평생을 흙집 미장일을 하던 분이 촬영하던 카메라를 보며
넋두리처럼 했던 말입니다.

인간에게 일(노동) 이란 밥의 동의어이며, 밥은 생명과 직결됩니다.
먹고사는 일이 전부인 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에 대해 정당한 대가를 바라는 것은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며 그것은 살기위한 처절한 몸부림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그 다툼의 상대보다
더 우월한 지위를 얻고자하는 것도 아니며, 단지 <먹고> ... 그래서 <살려고>하는 생존본능에 다름이 아닙니다.

우리 정부는 2007년 기간제법을 도입할 때 회사의 직원들이 갑자기 아프거나(질병) 육아휴직 같은
특별한 사유가 발생했을 경우에만, 즉! 그 업무 공백을 메울 필요성이 있을 때에만 기간제 직원을
한시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규정을 두었습니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보통의 일상 업무에는 기간제
직원을 둘 수 없도록 규정한 것입니다. 하지만 2년 기간제를 허용(기간제법 통과)함으로서 그 기간(2년)
동안은 자유롭게 비정규직 근로자를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 현행법상 비정규직 2년을 채우면 기업은 근로자를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1) 1년 미만 근무시: 퇴직금 지급의무 없음.
(2) 2년 미만 근무시: 정규직 전환의무 없음.

직원들이 아파서 업무공백 상태를 보완할 필요가 있거나 아니면 (중소)기업들이 자사의 주력업무 외에
(국제)법률이나 회계, 특허, 금융 같은 전문적 근로가 필요하지만 계속적 채용(상시근로)에는
비용 부담이 너무나 커서 그들을 일시적으로 사용(고용)할 수 있도록 만든 비정규직 법의 시작은
아쉽게도 기업들의 고용방식이 왜곡되는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 근로자를 2년을 넘게 사용한다면
그것은 분명 일시적인 업무공백이 아니라 계속적인 업무라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래서 정부는
당시 이 법을 만들 때, 위에서 언급한 대로 비정규직 기간을 1년과 2년 이라는 기준을 마련하여
각각 퇴직금 지급과 정규직 전환 기준을 정한 것입니다.

그러나 기업측은 정규직 전환에 대한 부담 때문에 근로자가 2년의 기간을 다 채우기도 전에
계약을 파기 하거나, 퇴직금 및 야근수당 등을 지급하지 않기 위해(비용절감) 근로계약을
5개월, 8개월, 10개월 ...처럼 소위 <(근로)계약기간 쪼개기> 같은 편법을 사용하는게 다반사입니다.

OECD가 발표한 수치로 보면, (2014년 기준)한국의 (1년 뒤)정규직 전환율은 대략 11% 수준입니다.
조사 대상국 16개국 순위 중에 우리가 16위로 꼴찌였는데, 우리보다 한 단계 높았던 일본(15위)의
정규직 전환율은 17.5%, 14위 프랑스가 대략 18% 수준이었습니다.[@ 조사대상 16개국 평균 1년뒤
정규직 전환율은 35.7%, 3년뒤 정규직 전환율 평균은 53.8%,(한국 3년뒤 정규직 전환율 22% 수준)]

그동안 기업과 (친기업)언론들은 노동유연화의 성공사례로 독일의 <하르츠 개혁(Hartz-Reformen)>을
자주 언급했습니다. ~ 이들은 오늘날 독일 경제가 유럽의 리더로서 자리할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중에는
바로 하르츠개혁이라는 노동 개혁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어쩌면 비정규직이 더 많이 양산될수도 있는
한국형 하르츠 (노동)개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독일의 하르츠개혁 이면에는
노동개혁을 할 수밖에 없었던 그야말로 절박한 구조적 원인이 있었습니다.
파산한 국가(동독)를 외상으로 구매한 것과 같았던 1990년 (동서독)통일은 이후 저성장과 극심한 실업난을
몰고 왔으며, 여기에 고령화로 인한 사회보장비용 지출 부담까지 더해지면서 (노동)개혁의 당위적 필요성이
사회전반에서 형성되었습니다. 결국 독일은 2003년 슈뢰더 총리 주도로 "아젠다 2010" 이라는
노동개혁(하르츠개혁) 을 발표하게 됩니다.
[◆ 독일 실업률: (1992년 7.5%), (1997년 11.5%), (2001년 9.5%), (2005년 12%) ... 이러한 실업률은
통일문제와 함께 유로존 출범 초기인 2,000년 초에 독일이 마르크화 환율이 너무 높은 상태에서
유로존에 가입했던 부분도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 마르크화 강세 => 수출부진=> 실업 ) ]

독일은 "하르츠개혁(Hartz-Reformen)" 이후 수치상으로는 놀라운 결과를 보여주었습니다.
경제활동 참가율이 상승했고, 12%수준의 실업률이 4~5%대까지 낮아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서울대 행정대학원의 미하엘 교수는 다음과 같은 의견을 제시합니다.

[◆ "독일의 실업률이 낮아지고, 경제가 회복한 것을 하르츠개혁 덕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한국에 많은데,
이것 또한 사실이 아니다. 2002년부터 현재까지 10여 년의 독일 성장은 유럽 통합에 따른 통화 절하 효과에 따른
것이다! ~ 일단 하르츠개혁은 '노동법'을 수정한 게 아니다 ... 실업급여와 연금제도를 손 본 것이 개혁의 골자다.
'실업급여'의 수급기간을 단축해 노동생산성을 높이고, 미니잡(minijob)을 만들어 탄력적 저임금 일자리를 늘린
것이다. ~ 한국이 지금 '노동개혁'이라고 이야기하는 임금피크제나 해고 요건을 완화하는 법 개정,
노조의 협상력을 낮추는 등의 개혁이 아니라는 뜻이다." - [요르그 미하엘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

유로화라는 화폐통합이 독일경제에 상당한 도움이(통화절하) 되었다는 미하엘 교수의 주장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습니다 ... 그러나 하르츠개혁의 효과가 전혀 없었다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하르츠개혁의 효과는 분명히 존재했었습니다. 하지만 통계수치의 개선이 꼭 질적 성공으로까지 이어졌다고는
장담 할 수 없습니다.

하르츠 개혁의 원래 취지는 실업급여만 받고 일을 하지 않는 미취업자들을 일터로 나오게 만들기 위한
압박용 목적이 컸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아르바이트 개념과 비슷한 "미니잡(mini job)" 을 만들어
실업률을 낮추고자 했던 것입니다. 대신 미니잡은 월 450유로(대략 59만원)의 임금상한선이 정해져 있는데
부족한 급여는 정부가 지원해주고, 미니잡 노동자에게는 소득세를, 고용주에게는 사회보험료 납부를
보조(면제)해 주기로 한 것입니다 ... 또한 1년 이상 미취업 상태가 지속되거나 특별한 사유 없이 취업을
거부할 땐 하르츠 법에 의해 실업급여가 (단계적)삭감되기도 합니다 ... 더불어 독일정부는 사람들을 이렇게
일터로 나오게만 한다면 미니잡을 통해서 더 나은 일자리로 갈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며 ... 한마디로
미니잡은 "나쁜 일자리"에서 "좋은 일자리"로 가기위한 하나의 <징검다리>가 될 것이라 장담했었습니다.

이러한 미니잡 정책으로 2003년 제도를 도입할 당시 약 598만명 이었던 미니잡 종사자들의 수는
2013년에는 733만명으로 대략 135만명 증가했고, 같은 기간 독일 사회보험 가입자 수는 232만명 증가하게
됩니다. 결국 10년간의 고용증가분중 약 60% 정도가 미니잡에서 발생한 것입니다.[▶(135/232 = 58%)]
하지만 미니잡 정책은 저임금 일자리만 확대시켰으며, 특히 청년들의 기회를 빼앗아 버렸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2010년 기준으로 독일은 다른 유럽 국가들과 비교를 해보아도 ... 미니잡 같은 파트타임 뿐 만 아니라
전일제 고용에서도 저임금 비율이 크게 증가했습니다. 이 같은 결과는 비록 고용률은 증가시켰지만
저임금을 비롯한 사회의 소득 불평등을 더욱 더 심화 시키기도 했습니다 ... 그러자 독일정부는 하르츠개혁의
부작용을 인정하고 그 대안으로 먼저 최저임금제를(8.5유로) 도입하게 됩니다.
[◆ 독일의 최저임금 도입 논의는 유럽연합에 가입한 동유럽 8개국 근로자의 거주이전의 자유가
2011년 5월 1일부터 전면적으로 허용된다는 부분이 어느 정도 반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뜩이나 하르츠개혁(미니잡)으로 저임금과 함께 사회전반에서 소득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었는데,
여기에 임금수준이 낮은 동유럽 근로자들까지 유입된다면 독일 노동시장은 그야말로 "임금 덤핑(Lohndumping)"이
발생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 한국이었다면 임금덤핑이 위기였을까요? ~ 아니면 기회였을까요? ]

하르츠개혁은 현재 독일 내에서도 "재개혁"(re-reform)이 논의 중입니다.
넘어지고 부딪혀서 찢어진 상처를 봉합하듯 실업률, 고용률 및 경제활동 참가율 등의 수치적 외과수술이
진행되는 동안 ... 나쁜 일자리와 저임금, 소득 불평등(양극화) 같은 내과적 질병은 점점 더 깊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노동자 보호수준은 우리가 생각하는 수준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대표적으로 2002년 말 독일은 하르츠개혁을 추진하면서 근로자 파견에 관한 법률을 기업들이 요구하는
수준으로 개정하게 됩니다. 당시 실업률이 워낙 높았기 때문에 신규고용창출에 초점을 맞춘
(법률)개정이었는데, 이때 독일정부는 (기업들이 원하는 수준으로)규제를 대폭 완화해 주면서
대신 중요한 조건(반대급부)을 내걸었습니다 ... 바로 < "평등대우 원칙의 확대" > 였습니다.

독일의 파견 근로자에 대한 "평등대우 원칙"은 사실 하르츠개혁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2001년 근로자파견법 개정당시 도입되었는데 ... 파견근로자가 동일 사용사업주에게 연속하여 12개월
사용된 경우에는 그 사업장의 비교가능한 근로자와 동일한 근로조건을 보장할 것을 규정한 것입니다.
[(구)근로자파견법 제10조 제5항 ]

한마디로 파견근로자는 자신이 비록 비정규직이라고 하더라도 파견되어 근로를 제공하는 사용사업장의
다른 (정규직)근로자와 동일한 근로조건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 다시말해
철저한 <"동일노동.동일임금(gleicher Lohn für gleiche Arbeit)"> 원칙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
당시 정부의 입장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르츠개혁 당시 독일정부는 이미 2001년에 존재했던 "평등대우 원칙"을 더 넓게 확대하자는
조건(반대급부)을 내걸면서 기업들이 원하는 수준으로 (파견)규제를 대폭적으로 완화해주었던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근로자파견에 관한 규제(ex.업종확대)는 대폭적으로 풀었지만, 동시에 (파견)근로자 보호에 있어서는
더 크게 강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번 밥그릇에 빠지면 뒤집어 엎기도 힘들고 다른 밥은 맛이 없어 먹기가 참 힘들다는
40년 경력의 흙집 미장쟁이의 말처럼 "노동"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결국 노동을 시장논리로만 접근하려는것은 상당히 위험한 발상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앞에서도 언급했었지만 노동의 문제는 <타협과 양보와 화해>가 반드시 수반되어야만 그 해결이
가능하다 할수 있습니다. ... 그리고 독일은 이러한 문제의 초점을 가장 잘 알고 있는 대표적인 국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한 국가의 노동의 문제에서 정부의 역할이 무엇인지 가장 잘 보여준다고
생각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대한민국 정부는 그동안 자국의 노동현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지
그 역사적 흐름을 잠시만 살펴보겠습니다.

시대마다 기업의 형편과 변명은 늘 존재했었습니다.
일요일은 제발 좀 쉬게 해 달라며, 그래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외침을
서슬 퍼런 군사독재 권력을 향해 던지며 자신을 불태웠던 47년 전 전태일 열사의 희생은
한국사회에 노동의 주체성을 일깨워 주었던 가장 진보적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소장은 건의서 뒷면의 연서장들을 들쳐보고 나서 고개를 들었다.
“투쟁이란 건 파업을 의미하는 건가?” ~ 동혁이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말한다.
“파업도 포함됩니다.” ~ (중략) ~ “어쩌면 자네들은 혜택을 못 받게 될지도 모를 텐데?
돈이 생겨, 술이 생기는가? 도대체 뭘 바라구 이런 짓을 벌이나? 덮어놓고 불평, 불만을
터뜨려 보자는 식이로군.“

“우리가 못 받으면, 뒤에 오는 사람 누군가 개선된 노동 조건의 혜택을 받게 될 거요.”
“우리 노사 관계를 떠나 인간 대 인간으로 이야기해 봄세. 자네들 의견을 존중해서
터놓구 얘기하구 싶군. 노가다는 솔직하랬다구. 얼마를 요구할 텐가? 자네들 심정을
다 알지. 우리 바꾸는 게 어떤가?“

“그 따위 말에는 대답하고 싶지 않소. 최소한 두 가지의 조건만이라도 확답을 하고
각서를 써 주시오. 두 가지 사항은 노임과 감독조에 관한 것 말입니다.“

동혁의 옆에 묵묵히 서 있던 3함바 고참 인부가 소장에게 달려들 태세로 말했다.
“당신에게 일러두겠는데, 10분 내로 감독조 새끼들을 우리한테 인도하라구.
안 되면 우리가 사무실로 밀구 들어가겠소!“ - (객지 中. 황석영. 1971) ]

훌륭한 문학 작품은 시대를 반영합니다.
이 작품은 황석영 선생님의 <객지(客地). 1971년> 라는 소설의 한 대목입니다.
1970년대 “아세아 건설”이라는 건설회사가 추진한 “운지 간척 공사장”이 배경입니다.
당시 우리의 노동현실과 노동자들의 투쟁과정을 너무나 생생하게 사실적으로 그려내서
한국의 대표적인 <노동소설>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소설에서 비인간적 생존(노동) 현실을 감당하지 못한 노동자들은 사측과 첨예한 대결구도로
발전하는데, 이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타협파와 투쟁파로 갈립니다. 사측은 폭력배가 주축이 된
감독조와 경찰력을 이용해서 노동자들의 저항에 대응합니다. ... 이후 명문화되지 않은 사측의
회유책과 공작에 흔들린 많은 노동자들은 투쟁의 현장을 이탈합니다. 결국 동혁이 주도한 쟁의는
실패로 돌아가지만, 동혁은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위 대목에서 동혁은 현장소장에게 내일의 빛을 담아 얘기합니다.
< “우리가 못 받으면, 뒤에 오는 사람 누군가 개선된 노동 조건의 혜택을 받게 될 거요.” >
이것은 작가(황석영)가 동혁을 통해 미래 한국노동에 대한 희망을 얘기한 것입니다.
하지만 작가가 희망한 미래한국, 즉 2017년 한국의 노동현실은 여전히 어렵습니다.

[◆ 존경하는 ‘아세아 건설’ 회장님 귀하. 저희들은 운지 간척 공사장의 일용 인부로 고용된
사람들입니다. 애초에 우리는 이것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 생각하고 말없이 일만 해왔습니다만.
그냥 참고 견디기엔 너무도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어 궐기하기로 하면서 몇 가지 건의 말씀을
드립니다. 노임을 법정 임금에 미달된 액수로 받으면서 게다가 간조가 보름 간격인지라,
현금 없는 대부분의 우리 부랑 인부들은 전표를 헐값에 팔아 일용품을 사든지 전표를
본 가격보다 싸게 함바의 숙식대로 치르고 있습니다. 서기들은 전표로 부당한 이윤을 취하고,
함바는 거기대로 노임을 착취합니다. 대부분의 객지 인부들은 함바와 서기, 그리고 그들이
경영하는 매점에 이삼천 원 정도의 빚을 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다른 일터를
찾아 뜨고 싶어도 마음대로 갈 수가 없어서 묶여버린 것입니다. ~ (중략) ~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의 네 가지 문제를 시정해 주십사 건의하는 바입니다. ~ 첫째, 노임을 현재의
도급 임금과 같은 액수로 올려 줄 것. 단, 노동량에 상관없이 날품일 때에도 적용할 것.
둘째, 정확한 시간 노동제를 확립할 것. 셋째, 감독조를 해산시키는 대신 인부들이 교대로
자치 담당하게 할 것. 넷째, 함바를 개선하고 식당을 통합하여 회사가 운영할 것. 그래서
일일 전표를 식권과 직결시키고 나머지는 현금으로 지불해 줄 것. ~ 위와 같은 우리의 요구가
실현될 때까지는 다음의 서명자들은 여하한 투쟁이라도 불사하겠음을 알려드립니다.
- 운지 간척공사 일용인부 일동 .... (객지 中. 황석영. 1971) ]

한국에서 노동운동은 곧 진보운동의 다른 이름이었습니다. ~ 그리고 한국 노동이
2017년까지 걸어왔던 길은 말로는 다 표현 못할 고달픔과 처절함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래서 한때 권위주의적 정권은 한국 노동운동에 과도할 정도의 <이데올로기>를 덮어씌웠습니다.
국가와 회사(자본가)에 대한 노동자의 정당한 요구는 빨갱이로 덧칠됐고, 헌법에 보장된 노동자의
쟁의 행위는 대부분 <불법>으로 규정되었으며, 불법은 다시 <폭력>이란 이름으로 명찰을 바꿔달고
대중에게 재생산 되었습니다.

◆ 그럼 여기서 잠시 질문을 하나 드려보겠습니다. ~ ~ ~ <“누가 빨갱이인가?”>

분단 이후 한국사회가 군사독재라는 잿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을 때 <반공주의 이데올로기>는
독재 권력의 강요와 선동으로 <악(惡)의 범용성>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집단(개인) 이라면 먼저 <공산주의는 무엇인가?> 라는 접근 방식을 사용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공산주의는 생산수단을 공유하자는 사상이며, 반면 이러한 문제가 있군!”> ... 질문은 이렇게
대상에 대한 다면적 평가로부터 시작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는 <반공 이데올로기>라는
틀 속에서 이미 <빨갱이 = 악(惡)> 으로 규정해 버립니다. ... 따라서 이제 독재 권력은
<“누가 빨갱이인가?“> 라며 의심하고 대상만 선정하면 자신들의 앞길에 걸림돌이 될 만한
모든 것들은 순식간에 악(惡)으로 규정되어 처참하게 찢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 그리고 이때
(무지한)대중들의 자발적이며 열광적인 참여까지 이루어진다면 이것은 사회가 파시즘의 징후에
매우 가깝게 다가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마녀사냥(빨갱이 사냥)이 강압이 아닌
흥분과 최면(선동)에 의한 대중의 자발성을 유도하는 형태를 취했다면 이것은 파시즘의 대표적
특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 아무튼 군사독재 시절 한국 노동의 외피에는 그렇게
빨갱이가 덧칠되었던 것입니다. ... 더불어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작동방식에 대해서 슬로베니아의
천재 철학자라는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은 <이데올로기적 전도효과> 라고 설명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가 가진 것은 <노동력> 뿐입니다. ~ 따라서 노동자들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바로 <노동력 제공거부(파업)> 뿐입니다. 한마디로
노동자가 자신의 현재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 파업을 하는 것은 정당한 행위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실정법은 파업의 조건과 절차를 엄격하게 따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파업)조건을 위반하면 노동자의 파업행위를 모두 불법으로 규정하고 그에 대한 책임도 과도하게
묻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의 실정법은 노동자 파업행위를 <형법상 범죄구성요건에 해당하지만,
정당화 사유를 갖춘 때에만 위법성이 조각된다>는 논법을 구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파업은 범죄라는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인데, 이것이 현재 한국의 실정법이 한국의 노동을
바라보는 현실이며, 이렇게 범죄로 규정된 파업에는 다시 <폭력>의 이미지가 덧칠되어 대중을 향해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 것입니다.

[◆ 어떤 프레임을 부정하면 그 프레임이 활성화 된다 ... 그리고 프레임은
자주 활성화 될수록 더 강해진다. 이 사실이 정치 담론에 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내가 상대편의 언어를 써서 그의 의견을 반박할 때,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의 머릿속에서는
상대편의 프레임이 더 활성화되고 강해지는 한편 나의 관점은 약화된다. 이는 진보주의자들이
보수 세력의 언어와 그 언어가 활성화하는 프레임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들의 언어가 아닌 우리의 언어를 써서 우리의 신념을 말해야 한다는 뜻이다. ]
-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 조지 레이코프 / 외이즈 베리 출판. 2015) ]

예전에 여당의 유력 정치인이 우리가 국민소득 3만 불을 넘지 못하는 것은 바로
<노조의 쇠파이프> 때문이라는 발언을 해서 수많은 노동자들의 공분을 샀던 적이 있었습니다.
비정규 노동자가 800만 이라는 현실이 증명하듯 현재의 우리 노동현실을 외면한 여당 인사의
당시 발언은 <노조의 쇠파이프와 국민소득 3만불> 사이에 교묘한 프레임을 형성해 놓았습니다. 다시 말해
이러한 프레임은 우리가 반복하여 <노조>를 말할 때마다 국민들의 머릿속에서는 <노조 = 쇠파이프>가
계속 되새김질되어 폭력적 이미지가 자동적으로 떠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정치적 수사(Rhetoric)속에 얼마나 파괴적이고 잔인한 속성이 은폐되어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과거 권위주의 시대에 <이념>으로 덧칠되었던 노조는 오늘날 민주화된 시대에는 <폭력>으로 덧칠되어
이미지의 교체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 더불어 대학에서 공부하는 경제학 서적들은 어느새 1천 페이지라는
육중한 무게를 넘어서며 우리에게 조용히 다가와 수요와 공급을 얘기하고, 생산과 소비, 시장과 정부를 얘기하며
소득과 분배, 상품과 기업을 얘기 합니다. 또 성장과 경쟁을 얘기하고 무역과 환율, 은행과 화폐 ... 여기에
환경과 게임이론, 인간의 행동(경제) 까지 ... 이렇게 오늘날의 경제학은 한계를 모르는 암세포처럼 지속적으로
자기영역을 확장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경제(활동)의 불변의 근간은 바로 사람의 <일(노동)> 입니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그 두꺼운 경제학에서 일(노동)을 언급할 때는 오직 딱 한 번, 바로 일(Labor)이 없는 상태인
<실업>을 논할 때 빼고는 거의 없습니다. 과거에는 빨갱이라는 <이념>으로 덧칠되었고,
그나마 민주화가 많이 진행된 시대에도 한국의 노동운동은 <폭력(적)>이라는 프레임 속에서 결백을 증명하느라
많이 바쁩니다. 그런데 이제는 1천 페이지 분량의 경제학 교재에서조차 한 자리를 차지하려면 눈치를 봐야하는
신세입니다. ~ 한마디로 (경제)영역 확장의 가장 큰 공헌을 했던 <노동(일)>이 정작 자신을 알리기 위해 배분받는
활자는 가장 적은 양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도 <노조(노동운동), 권위주의, 민주주의, 이념,
쇠파이프, 프레임> 이라는 각각의 사실들이 생성하는 서글픈 노동의 계열화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실 대한민국의 노동법(노동관계법)은 놀랍게도 1953년 한국전쟁(6.25) 중에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이때 제정된 <노동관계법>은 미국의 와그너법과 일본 노동법을 모태로 만들어졌는데,
이 법은 당시 여야의 초당적 합의에 의해 탄생된 것입니다. 하지만 (1950년 ~1960년대)의 한국은
아직 산업화 이전의 국가였습니다. 결국은 당시 제정된 노동관계법은 현실적인 실천과는 무관하게
<“한국에도 근대적 노동법이 존재한다!”>라고 국제사회에 보여주기 위한 일종의 장식효과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당시의 법(노동관계법)이 한국의 노동현실을 제대로 반영하고 기능했으려면
우리는 좀 더 많은 시간을 인내하며 차분히 미래를 기다리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이후의 한국 상황은 군사독재라는 더 깊은 어둠속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 와그너법(Wagner Act.) - 1935년에 미국에서 뉴딜 정책의 일환으로 정해진 노동관계의 법.
노동자의 단결권과 단체 교섭권 및 단체 협약을 인정하고, 부당 노동 행위를 금지하였다. 1947년에
태프트하틀리법(Taft-Hartley法)에 의하여 수정됨.]

[◆ "공산주의자들은 이제까지의 모든 사회질서를 강제력으로
전복시킴으로서만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을 공공연하게 선언한다.
지배계급들로 하여금 공산주의 혁명 앞에서 전율케하라. 프롤레타리아들은 혁명에서
족쇄 말고는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들은 세계를 획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 " <공산당 선언 87쪽> ]

1864년 런던에서는 최초의 국제적인 노동자 조직이 탄생합니다.
조직의 정식명칭은 <국제노동자협회(International Working Men's Association)>인데,
바로 그 유명한 <제1인터내셔널(First International)>입니다. ~ 이러한 국제적 노동조직이 만들어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모두가 잘 아시겠지만 바로 <칼 마르크스(Karl Marx)> 입니다.

2017년 기준으로 대략 170여년 전(@1848년 공산당 선언),
<노동자들이 잃을 건 족쇄뿐이며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에게 단결하라>는 마르크스의
이 전율적인 외침은 단순한 외침이 아니라 세계에 <노동의 담론>을 투척한 것입니다. 즉 세계는
마르크스 이후부터 노동을 바라보는 <시선의 전복>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한국에게는 그로부터
100년도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산업화가 한창 진행되던 박정희 (개발)독재체제시기. ~
특히 1970년은 한국 <노동운동 역사의> 첫 출발점 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70년은 바로 청계천 평화시장 봉제공장에서 일하던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 해입니다.

하루 평균 14~15시간의 노동과 한 달에 28일을 근무했던 도저히 인간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마치 고문과 같았던 노동조건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평화시장 노동자들은 만성 질병에 시달릴 수
밖에 없었고, 이러한 사정 때문에 <“평화시장 여공은 시집가도 3년밖에 못 써먹는다!“>는 말까지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 앞서 살펴봤듯이 산업화 이전에 만들어진 <노동관계법>에서 보장하는
자율적인 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은 서슬 퍼런 유신독재체제에서는 전혀 행사되지 못했습니다.
이에 전태일은 홀로 외로운 싸움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습니다.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실태를 언론에
호소해 보기도 했고, 유럽이 19세기 중반에 국제적인 노동조직 <제1인터내셔널>을 조직했을 때,
한국에서는 100년보다 더 많은 시간이 더 흘러서야 겨우겨우 전태일이 평화시장 재단사 모임인
<바보회>를 만들어 계속해서 투쟁을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소설 <객지(客地)>의 주인공 동혁이
실패했던 것처럼, 전태일의 투쟁은 국가를 상대로 그것도 군사독재 권력을 상대하기에는 너무나
역부족 이었습니다. 결국 전태일은 죽음으로 항거를 다짐합니다. ~ 그리고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은 자신의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성냥불을 붙입니다.

불길은 삽시간에 전태일의 온몸을 감싸며 타올랐고, 그렇게 불길에 휩싸인 채 전태일이 외쳤던
비장한 한마디는 마르크스의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같은 거창한 담론이 아니라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일요일은 쉬게 하라!“> 같은 처절함과 절박함 그 자체였습니다.
이때가 그의 나이 불과 스물두 살이었습니다.

병원에 실려간 전태일 열사는 울먹이는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어머니 담대해지세요. ~ 내가 못 다 이룬 일 어머니가 꼭 이루어주세요 ~”> 하고
마지막 유언을 남기며 그렇게 생을 마감합니다.

박정희 시대에 한국이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룩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지만,
이는 전태일 열사와 같은 수많은 평범한 국민들의 희생이 가장 낮은 곳에서 든든한 토대가
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와 더불어 박정희 정권이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한 것 또한
명백한 사실이며, 이는 국가의 가장 상위법인 <헌법>을 위반한 것입니다. ...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 국민들은 <수단이 결과에 의해 정당화>되는 또 하나의 <혼돈의 계열화>를 목격하게 됩니다. ~ 다시 말해
한국과 박정희에 <군사쿠데타>라는 사실이 이웃항으로 연결돼 계열화되면 그는 헌정질서를 파괴한
독재자가 되지만, <고도의 경제성장> 이라는 사실이 이웃항으로 연결돼 계열화되면 박정희는 주식회사 한국을
성공적으로 이끈 존경받는 CEO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독재자 박정희>라는 사실과
<주식회사 한국의 존경받는 CEO> 라는 사실이 다시 이웃항으로 연결돼 계열화되면
이는 <국민적 딜레마>라는 이중화된 계열화의 양상이 새롭게 생성되어 쌓이게 됩니다.

화가(painter)는 자신과 함께하던 개가 아프면 가족애를 느끼며 개의 고통에 마음아파 합니다.
하지만 개의 자리에 닭이 온다면 그 순간부터 화가는 <생산>을 염려하는 <자본가>로 둔갑합니다.
이렇듯 계열화는 단순한 양상의 변화를 넘어 우리의 예측영역 바깥에서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1970년 전태일 열사의 분신이후 본격적으로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는 시작됩니다.
그러나 무려 47년 이라는, 반세기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노조조직률과 단체협약 적용률은
OECD 꼴찌에 가까운 10% 수준밖에 안 되며, 비정규 노동자가 800만 가까운 현실에서 정부와 여당은 노조 때문에
해고가 어렵다며, 그래서 <노동 유연화>라는 세계적 추세를 따라야만 경제가 살아난다며 (노동)개혁안을
국민들에게 들이밀고 있습니다. ...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무리 모든 경제주체들이 수긍하는 훌륭한,
또는 상당히 합리적인 대안이 나온다고 하더라도 악어의 입처럼 법(노동)과 법적용 사이의 (현실적)간극이
계속해서 벌어져만 있다면 서글픈 <노동의 계열화>는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계속해서 생성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우려는 최근에 현실로 더 빠르게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 끝내 비정규직 우산 빼앗은 기아차노조
h ttp://news.nate.com/view/20170428n34492?modit=1493388399

기아차 노조가 끝내 분리 투표를 통해 비정규직의 우산을 빼앗았다.
조합의 정규직 근로자들이 “연대”보다는 “각자도생”을 택하면서 기아차 노조의
<1사 1노조>는 9년 만에 막을 내렸다. 기아차 비정규직의 처우는 더욱 열악해질
위기에 놓였다. ~ (중략) ~ 금속노조는 2006년 산별노조를 실현하고 정규직, 비정규직
연대를 강화하기 위해 <1사 1노조> 원칙을 담은 규약을 채택했다. 기아차지부는
2008년 완성차 정규직노조 가운데 처음으로 사내하청지회를 흡수하는 방식으로
1사1노조를 건설하며 <연대 투쟁>의 모범이라는 평가를 노동계에서 받았다.
하지만 지난해 10월 기아차 노사가 사내하청 비정규직 1,049명을 정규직으로
신규채용하기로 합의한 것과 관련해 사내하청분회가 “나머지 2,000여명은 평생
비정규직으로 살라는 것”이라고 반발하며 독자 파업을 실시하는 등 지부와 갈등을 빚었다.
갈등이 봉합되지 않자 지난 6일 지부 대의원회의에서 한 정규직 대의원이 1사1노조 유지에
대해 조합원 의견을 묻는 총투표를 하자는 안건을 내면서 총투표로 이어졌다. ]

현대 자본주의의 가장 최적화된 작동원리는 바로 <수직적 복종과 수평적 경쟁>입니다.
그리고 그 (수평적)경쟁의 진짜 본질은 바로 <없는 놈들끼리!> ~ 라는 식은땀 나는 구호입니다.
<99% 들의 경쟁!> ... 그래서 노조에게 <연대>는 바로 생명입니다. 그런데 (정규직)노조가 업고가도
모자를 판에 자기 자식(비정규직)을 거리에 그냥 내다버린 사건이 지난 2017년 4월 28일 한국의 대표
노조인 기아자동차에서 일어났습니다.

정규직, 비정규직, 귀족 노조, 산별 노조 ... 명칭과 구분은 무엇이든 좋습니다.
결국 문제는 (노동)법과 그 법이 현실에서 적용될 때의 간극의 크기를 더 이상 좁히지 못했기 때문에
이러한 허탈한 <노동의 계열화>가 생성된 것입니다. 전태일 열사의 분신이후 우리에게는 반세기에 가까운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7년 한국의 노동운동은 주어진 시간을 다시 반납하고 있습니다.

◆ 그럼 여기서 잠시 <대한민국 헌법 제32조 1항, 3항>을 살펴보겠습니다.
h ttp://www.law.go.kr/lsEfInfoP.do?lsiSeq=61603#

[1] - 모든 국민은 근로의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사회적.경제적 방법으로 근로자의 고용의 증진과
적정임금의 보장에 노력하여야 하며,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최저임금제를 시행하여야 한다.
[3] - 근로조건의 기준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도록 법률로 정한다.

<비정규직> 이라는 말속에는 이미 술어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특별한 수식어는 필요치 않지만,
그들(비정규직)이 명문화된 법과 현실적 법적용의 괴리 안에서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고 있는지는
상당한 설명과 시간이 필요합니다. ... 우리 헌법은 국가가 노동자들이 적정임금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라고 명시합니다. 또한 노동자는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받아야 한다고도 말합니다. ~ 하지만
비정규직은 정규직과 동일노동을 하고서도 거의 절반 수준의 임금밖에 받지 못하는 것이 지금의
(노동)현실입니다. 더불어 원청과 하청의 노동구조에서는 애초부터 인간의 존엄성은 제외하고 시작합니다.

2017년 5월 1일 삼성중공업에서 크레인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이 사고로 6명의 근로자가
생명을 잃었고 25명의 근로자가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이날은 바로 <근로자의 날>이었습니다.
또한 사상자 전원 모두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 이었습니다. 삼성중공업 소속 정규직들은 대부분
가족들과 휴일을 만끽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죽음은 국민들에게 더욱 안타까운 소식으로
전해졌습니다. ... 정규직들은 노동절이나 공휴일에 쉬어도 임금이 지급되며, 만약 일을 하더라도
가산임금이 지급됩니다. ~ 하지만 하청 노동자들에게는 <근로자의 날>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결국 문제는 법과 그 법이 적용되는 현실적 간극의 크기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간극이 좁혀지지
않는다면 <노동의 퇴행적 계열화>, 혹은 <노동의 음(-)의 계열화>는 지속적으로 생성될 것입니다.

마르크스는 <"나는 인류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만을 제기해 왔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곧 <문제의 발견>이 해결이라는 뜻인데, 그렇다면 <법과 법적용의 간극> 이라는
문제의 발견은 마르크스의 말대로 우리도 곧 희망을 찾을 수 있다는 의미일까요?

오늘날 한국 경제에 절대적 강자로 군림한 재벌 대기업에는 비정규직이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예 채용하지 않기때문에 처음부터 논란의 소지를 없애놓은 것입니다. 대신 재벌들은 그 인력들을
대부분 아웃소싱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 기업 입장에서는 아주 효율 높은 고용전략입니다.
하지만 한국경제 전체로 보면 고용의 질이 저하되는 것입니다. ~ 무엇이 옳은 겁니까?
한국 경제성장의 절대적 역할을 담당하고있는 재벌 대기업의 효율높은 고용전략이 잘못된 것일까요?
아니면 한국경제 전체의 고용의 질이 떨어지는 노동시장의 구조가 잘못된 것일까요?

솔직히 저도 "정답은 이것이다!" ~ 라고 자신있게 말하기가 너무나 어렵습니다.
그래서 처음 글을 시작할때 저는 <타협과 양보와 화해> 라는 비겁한 뉘앙스로 저 나름의 도피처를
마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너무나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문제의 원인을
사실과 사실들이 이웃항으로 연결되어 생성하는 <계열화>의 퇴행적 현상이라고 저는 진단하고 있습니다.

과거 KTX의 경우를 살펴보면 ~
당시 비정규직 노조였던 여승무원 노조는 철도공사측에 직접 채용을 요구했었습니다.
하지만 공사측은 정규직 채용은 어렵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 노조는 <연대가 생명>과 같습니다.
그래서 만약 그때 KTX 정규직 노조가 나서서 이렇게 말했으면 어땠을까 생각해 봅니다.

"여승무원 정규직 채용으로 수반되는 추가 비용상승분은 우리 정규직 노조가 분담하겠다!
그들의 고통을 우리가 함께 나눠갖겠다! ~ 그러니 여승무원들을 정규직으로 채용하라!"

그러나 현실에서 KTX 정규직 노조는 관객의 입장으로 여승무원 (비정규)노조를 바라보았습니다.
제가 앞서 언급한 <타협과 양보와 화해> ... 그 어느것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현재 우리 한국사회에서 드러나고 있는 노동의 문제에서 가장 큰 오류가
<타협과 양보와 화해>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기업과 (정규직)노조와 정부 등이
각자의 고루한 <자기역할(?)>에만 충실하고 있는 상황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기업은 효율을 지향하고 !
노조는 현재의 안위를 보존하며 !
정부는 법과 규제만을 양산한다 ! ........

모두가 각자의 위치에서 그에 걸맞는 최선을 다한다고는 말하고 있지만,
동시에 모두는 거리에서 죽어가는 노숙자를 바라보기만 하는 <방관자>로서만 존재할 뿐인 것입니다.

비정규직, 고용비용, 정규직 이익침해, 정부(정당) 지지율 같은 각각의 수많은 사실들은
서로에게 어떻게 이웃항으로 연결되어 계열화 되느냐에 따라서 한국사회 노동의 문제는
순간마다 자기 자식을 버리는것과 같은 충격적인 (새로운)계열화가 지속적으로 생성될 것입니다.

[◆ "한 번 밥그릇에 빠져보니 뒤집어 엎을수도 없고, 또 다른 밥은
맛이 없어 먹기가 힘들더라 ~ " - 40년 경력의 흙집 미장쟁이의 직업이야기 ]



[@ 밥그릇을 두 번 엎었던 경험자에 입장에서 보면 한국사회에서 노동문제는 정말 풀기가 어렵습니다.
환절기라서 그런지 독감이 유행인가 봅니다. ~ 건강들 잘 챙기세요 ]

2017년 6월 5일 월요일

◆ 일본 거품붕괴 관한 짧은 이야기 [by 물파스]

[◆ 일본 거품붕괴 관한 짧은 이야기 ]

(@ 1990년대 초반에 시작된 일본 거품붕괴의 과정에서부터 1997년 한국 및 동아시아
외환위기까지의 과정에 대해서 전부터 한번쯤 정리해볼 필요가 있겠다 싶어 조금씩 글을 쓰고 있는데,
아직은 글이 완성되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일본의 거품붕괴 이야기만 간략히 얘기해보고,
전체적인 큰 흐름은 재밌게 정리해서 나중에 다시한 번 올려보겠습니다. )



(경제, 금융, 부동산)거품이 발생하는 이유는 뭘까?
사실 답은 간단하면서도 간단치 않습니다. ... 간단한 답은 “돈의 과도한 유입” 니다.
흔히 <과잉 유동성> 이라고도 하는데, 이렇게만 보면 거품의 본질은 거품의 대상이 금융(주식)이
되었든 부동산이 되었든, 어쨌든 돈이 평균을 상회하다 못해 엄청나게 그 곳(주식, 부동산 등)으로
몰려들었기 때문이라는 간단한 사실로 증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왜 그럼 돈은 그곳으로 몰려들었나?"> 라는 좀 더 근본적인 물음을 하게 된다면
이때부터 거품의 본질을 찾는 해답은 상당히 복잡해지기 시작합니다.

보통 자금의 흐름, 즉 (국제적인)자금의 이동이 일어나게 된다면 반드시 자금의 유입과 유출을 경험한
나라들은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자동적인 조정이 일어나게 됩니다. ~ 물론 다들 잘 아시겠지만
자금이 유입되는 나라들에서는 자국의 통화가치가 상승하는 것이고, 반대로 자금 유출이 많은 나라들은
통화가치 하락이 발생하게 됩니다.

여기에 자금유입 국가들은 풍부해진 유동성으로 인하여 경제는 호황을 동반할 가능성이 높아지게 되고
이러한 경제호황은 거의 대부분 자산 가격(주식,부동산)의 상승을 불러오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산가격 상승과 호황은 또 다시 해외 자금의 유입을 유인하고, 금융적인 측면에서도
풍부한 유동성은 저금리로 이어져 기업들의 투자증가라는 연쇄적인 파급효과로 이어지게 됩니다.
[@ 돈 빌리는 비용(금리)이 줄어들고, 주가상승으로 자본비용까지 줄어들면 투자자 입장에서는
투자수익률이 개선됨으로 지속적인 투자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또한 기업입장에서도 다양한 투자를
시도할 수 있게 됨으로 고용이 증가하고, 고용의 증가는 국민들의 소득증가와 소비증가(내수확장)로
이어져 경제는 최고조에 이르게 됩니다. ]

글로벌 인덱스펀드들은 주로 개별 종목보다는 한 국가의 주가지수수준을 보며, 즉 전체적인 면을
고려해 투자하는 펀드입니다. 한마디로 국가단위(그 나라의 종합주가지수)의 장기적인 성장세를 면밀히
분석해 투자하는 형태인데, 1980년대 세계적인 글로벌 인덱스 펀드들의 상당수가 일본증시에
몰려들었습니다. 당연히 엔화의 가치상승과 주가 상승을 동반했습니다. ~ 그렇다면 수많은
투자대상국들 중에 초국적인 자금(인덱스 펀드)들은 왜 일본으로 몰려왔을까?

패전 후, 일본 경제는 한국과 중국의 경제가 막 성장하던 그때처럼, 마찬가지로 유럽과 미국의 기술을
도용하고, 디자인을 베끼며 성장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러다가 1950년대 ~ 1970년 초까지
대략 20여 년간 연평균 10%를 초과하는 기록적인 성장률을 달성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1980년대에
들어서자 일본은 독일까지 넘어서며 세계 2위의 산업 강국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도요타, 혼다, 닛산은 세계 자동차산업을 주도했고, 소니와 마쓰시타, 샤프 등은 전자산업을
니콘과 캐논은 세계 (사진)광학산업을 아예 씹어먹을 정도가 되면서, 전 세계에 이른바 <재팬 붐>을 일으켰습니다.

이러한 일본의 급격한 성장 배경에는 일본정부[@특히 대장성(우리의 기획재정부 성격)]의
독특한 정책이 뒤받침 되었기 때문인데, 당시 일본의 정치와 대장성 관료들은 일종의 종합계획을
수립하게 됩니다. ... 다양한 산업분야에서 <승자와 패자>를 구분하여 한마디로 승자독식적 정책지원을
하게 되는데, 먼저 세계 시장에서 살아남을 만한 산업부문을 선별했고, 그렇게 선택된 산업부문에 속한
기업들에게는 저금리의 자금지원과 각종 정책 및 법률지원을 통해 급격한 성장을 촉진했습니다.

정부구매를 몰아주고, 해외 경쟁자들을 관세로부터 보호하고, 대신 기업들에게는 (완벽한)품질로
보답하라며 철저한 기술적 완성도를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정부의 다방면의 지원과 혜택은
(일본)기업들의 완벽한 기술력과 합쳐져 세계 시장에서 일본 제품은 품질과 가격경쟁력으로 승부하게 되면서
시장 점유율을 높여갔습니다.

또한 해외 기업들은 일본의 까다로운 (법, 행정)규제로 인해 일본 시장에서 제품을 판매하거나 자회사를
설립하는 것조차 상당히 어려웠습니다. 실례로 당시 미국과 유럽기업들은 도쿄증권거래소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인 “회원권”조차 구입하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주목할만한 점은, 당시 대장성이 예금 및 대출금리 상한선을 낮게 유지하도록 했었는데
이는 결국 예금금리 수준이 물가상승률 보다 낮은 수준으로까지 떨어지게 만들었습니다. 한마디로
실질금리 수준이 마이너스(-)가 된 상황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국민들의 종특인지는 모르겠지만
오히려 일본국민들의 저축률은 더 높아지는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 이렇게 낮은 금리에 유동성마저
풍부해지니 (일본)기업들은 소위 “돈 걱정 없이” 투자 할 수 있는 최상의 여건이 조성된 것이었습니다.
더불어 일본은행들 입장에서도 그냥 땅 짚고 헤엄치는 격으로 거져 이익을 남겼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발맞춰 대장성 관료들은 승자독식 기업들 중에서도 더 국제경쟁력이 있는 승자에게
더 낮은 금리로 대출해 줄 수 있도록 은행들에게 공공연한 비밀(?) 지시를 내리는 경우가 비일비재 했습니다.

은행예금 및 금융상품의 수익률이 마이너스(-) 수준까지 왔음에도 이 당시 한 가지 다른 예외적
상품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동산”> 입니다.[@ 주식도 예외적인 상품에 포함할 수 있습니다.]

1980년대가 넘어가면서 일본에서는 소위 <금융자유화>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일본기업들은 뉴욕이나 런던 등지에서 별다른 제재 없이 기업 활동을 할 수 있는데,
미국 및 유럽 기업들은 일본시장에서 자유롭게 기업 활동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역차별이라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도쿄의 금융시장을 개방하라는 세계의 압력이(@실질은 미국의 압력) 시작된 것입니다.
결국 이 문제제기는 일본 국민들도 인정하면서 예금금리와 대출 금리가 상향조정되었고
일본 관료(대장성)들의 특혜성 지시 또한 많이 축소되었습니다.

이 당시 미국의 압력이 바로 <플라자 합의>입니다.
[@ 왜 미국이 압력을 행사했나를 따져보려면 그 이전의 오일쇼크와 함께 당시 미국의 정치 경제적인 부분까지
살펴봐야 함으로 그 부분은 다음에 기회있으면 다시 얘기하기로 하겠습니다. ]

<플라자 합의>는 간단히 말하면 미국이 일본과의 무역에서 너무나 많은 적자를 보고 있었기 때문에
엔화를 절상하라는 압력이었습니다. 결국 엔화 절상(엔고)으로 일본 기업들의 수출 부진이 예상되었고
이를 막기 위해 일본 정부는 저금리 정책을 실행해 내수침체에 대비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저금리는
엄청난 통화량 증가로 이어지며, 부동산 시장의 과열로 이어지게 되엇던 것입니다.

금융규제가 (일본)자국시장에서 맴돌던 수준에서 점차 국제화 수준으로 개방되자
이를 계기로 일본 금융기관(특히 은행들)들은 자국시장에서의 땅 짚고 헤엄치기 식의 경영에서 벗어나
해외시장에서 좀 더 넓은 기회를 찾아보고자 해외지사와 자회사 설립에 박차를 가하게 됩니다.

넘쳐나는 일본의 자금 유동성은 해외(미국, 영구, 독일, 스위스 등)에 설립된 지사 및 자회사를 통해
해외에 나가있는 일본기업들 뿐만 아니라, 다른 국적의 기업(비일본계)들 에게까지 흘러(대출)들어
갔습니다. ~ 만약 빌려줄 돈이 부족하면 국제 <은행간 시장>을 통해 일본은행의 해외 자회사들은
돈을 차입했고, 이것마저 부족하면 NDF(Non Deliverable Forward) 라는 역외 금융시장에서까지
돈을 빌려와 사업을 확장해 나갔습니다.

이 시기에 세계 10대 은행 중 무려 7개가 일본은행 이었고, 특히 일본의 최대 투자은행인 노무라의
자본금은 당시 미국의 5대 투자은행 규모를 넘어서기도 했습니다.

저금리에 넘치는 자금력, 일본 기업들의 제품 경쟁력(품질과 가격) 등은 당연히 기업들의 주가를
끌어올렸고, 주가상승은 자연스럽게 자본비용 하락과 투자증가로 이어졌습니다. 여기에 일본기업들은
자사 주식을 특정 수량으로 교환할 수 있는 달러($)화 표시 전환사채를 발행하여 해외 (투자)자금을
지속적으로 끌어들였고, 이렇게 모인 자금은 일본기업들이 설비투자 및 미국. 유럽 등의 해외 기업을
인수하는데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 이렇게 보면 당시 글로벌 인덱스 펀드 자금이 일본으로 몰려들었던것은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고 할수 있습니다.)

이를 증명하듯 미쓰이 부동산은 당시 약 3억달러 수준이었던 뉴욕시 6번가의 엑손빌딩을
무려 두 배가 넘는 6억 3천만 달러에 사들였고, 이에 뒤질세라 다른 일본 기업들도 미국의 상징적
건물과 기업들을 마구 사들였습니다. 미쓰비시 부동산의 록펠러 센터 50% 지분매입, 스미모토은행 계열은
캘리포니아 페블리치 골프장을 매입, 소니는 콜럼비아 레코드 및 콜럼비아 영화사 인수,
마쓰시타는 MGM 유니버셜 인수 등

19세기 서양에 문호를 개방한 일본은 서구 여러 나라에 <신사유람단>을 파견해
정부의 행정과 공공서비스, 은행 시스템, 중앙은행의 역할과 교통체계 등을 견학하며 향후
일본의 경제를 어떻게 발전시켜야 하는지 많은 고민을 하게 됩니다.

도쿄 중앙역은 암스테르담의 센트럴 스테이션을 본떠 만들었고, 일본 은행은 벨기에 국립은행을
기초해 만들었습니다. 또한 공공서비스는 프랑스, 도로와 철도시스템은 영국을 주로 참고했는데
일본사람이 도로의 좌측으로 운전하는 것은 바로 이때에 영국의 영향을 받은 탓입니다.

일본의 기업들(산업)은 과거 봉건 가문을 중심으로 발달했었는데,
미쓰이, 미쓰비시, 스미모토 같은 (고전적)명칭들은 현대까지 이어져오며 상사, 은행, 제조업 이름에
그대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 가문 기업들은 하나의 은행지주사가 상사와 조선, 제철 등의
여러 계열회사의 지분을 대량으로 소유하면서 요즘말로 흔히 말하는 <계열사 밀어주기> 방식으로
장기자본, 대출 등을 공급해 주는 체계였습니다. 다시말해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한국 <재벌>의
모체가 바로 일본식 모델이었으며, 이러한 일본의 가문 경영은 초창기 독일 모델에 기초해 있었습니다.

이렇게 질적, 양적 두 부문에서 엄청난 성장을 지속하던 일본 경제는
특히 은행에서부터 조금씩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금융 자유화 바람에 힘입어
일본 은행들은 자체적으로 수익성 부동산을 매입하거나 다른 건설업체들의 부동산 (건설)자금을
대출해 주었는데, 이로 인해 투자자들은 금융 상품에서의 마이너스 수익률에서 부동산 분야의
플러스 수익률에 조금씩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1929년 대공황 직전 미국 증시의 상당부분을 철도 관련 기업들이 점유하고 있었던 것처럼
당시 도쿄 증시에는 부동산과 관련된 기업들의 비중이 상당히 높았습니다. ... 부동산 가격 상승은
도쿄증시에 상장된 부동산 기업들의 주가를 끌어올렸고, 이들 기업들의 주가상승은 다시 현물(부동산)
시세를 끌어올리는 일종의 사이클을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 여기에 한 발 더 나아가
자금 대여자였던 은행들 또한 자산의 상당비중이 부동산이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단순영업(예대영업)
보다 더 높은 수익률이 부동산보유에서 창출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 (영업이익 < 부동산 이익) ]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은행의 자본여력을 여유롭게 만들어 다시 부동산 대출을 증가시켰던 것입니다.

당시 일본의 한 저명한 금융관계자는 일본은행들은 영업이익이 절대로 마르지 않는
영구적인 기계를 발명했다고까지 얘기하기도 했습니다. 상황이 이쯤 되니 자신들이 힘들게 상품을 만들어
수출해 버는 돈보다 부동산 가격상승과 주가상승으로 버는 돈이 더 많아지는걸 직접 눈으로 목격한
일반 제조업체들까지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이들 기업들은 은행에서 대출 받은 돈으로
투자를 늘리기 보다는 너도 나도 현물(부동산)과 부동산 관련 주식들을 매입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모든 분들도 잘 아시겠지만 부동산, 즉 그것이 아파트가 되었건, 빌딩이 되었건 간에 부동산은
그 현물적인 특성상 폭발적인 (부동산)수요에 맞춰 공급되기 어려운 투자대상입니다. 부동산을
건설하는데는 당연히 절대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화폐 속도에 맞춰 부동산이 공급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 합니다. 결론적으로 부동산 시장에서의 수요움직임(특히 돈의 움직임)이 공급을
약간만이라도 초과하게 된다면 부동산은 쉽게 과열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당시 일본의 상황에서 일본은행들이 꺼려했던 주택융자 사업을 위해 일본정부는
일명 <주센(住專)> 이라는 주택융자만 전문으로 하는 은행 설립을 허가해 줍니다. 2008년 미국에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터졌을 때, 당시 수많은 군소 모기지 전문은행이 파산했는데, 이와 유사한
개념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 그리고 여기에 더해 일본 정부도 자체적으로 미국의
패니 메이(Fanny Mae)와 프레디 맥(Freddy Mac)과 같은 국책성격의 모기지(주택융자) 전문 기관을 설립합니다.

이렇게 형성된 일본의 (부동산)거품은 결국은 1990년대에 들어와 평범한 시민들이 집값이 너무 비싸
주거의 어려움을 겪게 만들었고, 일본사회에 전체에 사회적 갈등을 유발하게 됩니다.
그래서 일본정부는 과열된 부동산 시장을 진정시키고자 우선 부동산 대출 규제에 들어갑니다.
그중 대표적 규제는 은행들의 <부동산 대출증가율>이 <대출 총액 증가율>을 넘어설 수 없도록
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은행의 전체 여신에서 부동산 대출 비중을 줄이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대출규제는 그동안 부동산을 담보로 언제든지 대출이 가능했던 투자자들의 현금유동성을
막아버렸습니다. 쉽게 말해, 대출 원리금 상환 부담이 있더라도 부동산가격은 계속 상승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 번 대출을 받은 뒤에라도 상승한 부동산 가격에(담보가치 상승) 대출한도는 또 자연스럽게
늘어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부분이 규제로 막혀버리니 당장 대출 원리금을 상환할 현금을
구하지 못한 투자자들은 소유했던 부동산을 급매로 내놓는 일이 조금씩 많아졌던 것입니다.

대출 규제로 인한 신규 매수세가 실종되고, (급)매물이 추세를 타면서 그 수도 증가하고
결국 어느 지점에서 수요보다는 공급이 초과하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본격적인 거품의 붕괴로 이어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 그리고 이러한 흐름은 상당수의 주센은행과 중견 은행들의 연쇄적 파산으로
이어졌습니다.



[@ 경제는 <흐름>이기 때문에, 어느 한 구간을 설정해 설명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급하게 올리느라 오타가 있더라도 양해 바라며, 이 부분은 다시 깔끔하고 재밌게 정리해서
우리의 1997년 외환위기까지, 혹은 이후 2008년 서브프라임 사태까지 하나의 큰 흐름을 볼수 있도록
정리해서 다시 올려보겠습니다. ]

2017년 6월 3일 토요일

스페인 최고급 하몽 세르도 이베리코 데 베요타


세르도 이베리코 데 베요타라고하는데 원래는 스페인 지명인 하몽을 붙여서 하몽 이베리코 데 베요타라고 함

세르도는 흑돼지 품종이고 베요타는 도토리란 뜻

보통은 걍 하몽 이베리코라고 부르지만

등급이 따로 있어서 데 베요타가 도토리만으로 먹이는 최고등급

데 레세보가 도토리+곡물로 키우는 중간등급

데 세보가 곡물사료로 키우는 하등급임

하몽 세라노라고 품종이 다른 흰 돼지로 만드는 것도 있지만 아무튼 협회에서 보증하는 정품 하몽 이베리코는 이정도임

워낙 값이 비싸서 숙성중 품질저하로 생산과정에서 탈락한 돼지고기나 짝퉁 돼지도 하몽 이베리코라고 파는 경우가 많으니 주의 해야됨

 목살 항정살 어쩌구하는데 그것도 먹을만한것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저 짤에서처럼 최고의 돼지고기로 칭송받는 부위는 뒷다리뿐임

도축한 뒷다리를 장인들이 치즈만들듯 소금 발라서 말리고 다시 발라서 말리고..그와중에 품질 떨어진건 제외하고...

이런 반복작업하면서 최고 3년을 숙성시킨다

그래서 드럽게 비싼거임

애네들이 특별한 품종의 돼지를 키우는 방식은 도토리 안 열리는 시즌에 목숨만 붙어있게 극단적으로 굶기고 도토리 열리면 풀어서 도토리만 엄청 먹임

그렇게 사육된 돼지는 인간 체온이하에서 녹아내리는 지방을 갖게되는데 라드를 그냥 빵에 발라먹을정도로 특별한 지방을 가지고 있음

걍 지방을 손으로 비비면 부드럽게 녹아없어짐

짤에서도 보이듯이 기름 발라놓은것처럼 반짝반짝한게 숙성하면서 맛성분인 아미노산이 다 배어나와 응고되어 저렇게 된거라

맛도 맛이지만 입에 넣으면 사르르 녹는 식감이 특별하다

품종도 품종이지만 그냥 일반사료 먹여가지곤 이렇게 나오질않음

상술이라고 정신승리하면 편하겠지만 세계 미식가들이 괜히 비싼 돈주고 찾아먹는게 아님..




국내에서 먹으려면 까리뇨란 업체에서 스페인 퍼민사 하몽 이베리코 데 베요타를 직수입해서 팜

50그람에 3만5천원돈 하는데 레스토랑에서 먹는거보다 더 저렴하게 먹을수 있음


by ㅁㄴㅇ

부동산과 경제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