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6월 5일 월요일

◆ 일본 거품붕괴 관한 짧은 이야기 [by 물파스]

[◆ 일본 거품붕괴 관한 짧은 이야기 ]

(@ 1990년대 초반에 시작된 일본 거품붕괴의 과정에서부터 1997년 한국 및 동아시아
외환위기까지의 과정에 대해서 전부터 한번쯤 정리해볼 필요가 있겠다 싶어 조금씩 글을 쓰고 있는데,
아직은 글이 완성되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일본의 거품붕괴 이야기만 간략히 얘기해보고,
전체적인 큰 흐름은 재밌게 정리해서 나중에 다시한 번 올려보겠습니다. )



(경제, 금융, 부동산)거품이 발생하는 이유는 뭘까?
사실 답은 간단하면서도 간단치 않습니다. ... 간단한 답은 “돈의 과도한 유입” 니다.
흔히 <과잉 유동성> 이라고도 하는데, 이렇게만 보면 거품의 본질은 거품의 대상이 금융(주식)이
되었든 부동산이 되었든, 어쨌든 돈이 평균을 상회하다 못해 엄청나게 그 곳(주식, 부동산 등)으로
몰려들었기 때문이라는 간단한 사실로 증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왜 그럼 돈은 그곳으로 몰려들었나?"> 라는 좀 더 근본적인 물음을 하게 된다면
이때부터 거품의 본질을 찾는 해답은 상당히 복잡해지기 시작합니다.

보통 자금의 흐름, 즉 (국제적인)자금의 이동이 일어나게 된다면 반드시 자금의 유입과 유출을 경험한
나라들은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자동적인 조정이 일어나게 됩니다. ~ 물론 다들 잘 아시겠지만
자금이 유입되는 나라들에서는 자국의 통화가치가 상승하는 것이고, 반대로 자금 유출이 많은 나라들은
통화가치 하락이 발생하게 됩니다.

여기에 자금유입 국가들은 풍부해진 유동성으로 인하여 경제는 호황을 동반할 가능성이 높아지게 되고
이러한 경제호황은 거의 대부분 자산 가격(주식,부동산)의 상승을 불러오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산가격 상승과 호황은 또 다시 해외 자금의 유입을 유인하고, 금융적인 측면에서도
풍부한 유동성은 저금리로 이어져 기업들의 투자증가라는 연쇄적인 파급효과로 이어지게 됩니다.
[@ 돈 빌리는 비용(금리)이 줄어들고, 주가상승으로 자본비용까지 줄어들면 투자자 입장에서는
투자수익률이 개선됨으로 지속적인 투자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또한 기업입장에서도 다양한 투자를
시도할 수 있게 됨으로 고용이 증가하고, 고용의 증가는 국민들의 소득증가와 소비증가(내수확장)로
이어져 경제는 최고조에 이르게 됩니다. ]

글로벌 인덱스펀드들은 주로 개별 종목보다는 한 국가의 주가지수수준을 보며, 즉 전체적인 면을
고려해 투자하는 펀드입니다. 한마디로 국가단위(그 나라의 종합주가지수)의 장기적인 성장세를 면밀히
분석해 투자하는 형태인데, 1980년대 세계적인 글로벌 인덱스 펀드들의 상당수가 일본증시에
몰려들었습니다. 당연히 엔화의 가치상승과 주가 상승을 동반했습니다. ~ 그렇다면 수많은
투자대상국들 중에 초국적인 자금(인덱스 펀드)들은 왜 일본으로 몰려왔을까?

패전 후, 일본 경제는 한국과 중국의 경제가 막 성장하던 그때처럼, 마찬가지로 유럽과 미국의 기술을
도용하고, 디자인을 베끼며 성장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러다가 1950년대 ~ 1970년 초까지
대략 20여 년간 연평균 10%를 초과하는 기록적인 성장률을 달성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1980년대에
들어서자 일본은 독일까지 넘어서며 세계 2위의 산업 강국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도요타, 혼다, 닛산은 세계 자동차산업을 주도했고, 소니와 마쓰시타, 샤프 등은 전자산업을
니콘과 캐논은 세계 (사진)광학산업을 아예 씹어먹을 정도가 되면서, 전 세계에 이른바 <재팬 붐>을 일으켰습니다.

이러한 일본의 급격한 성장 배경에는 일본정부[@특히 대장성(우리의 기획재정부 성격)]의
독특한 정책이 뒤받침 되었기 때문인데, 당시 일본의 정치와 대장성 관료들은 일종의 종합계획을
수립하게 됩니다. ... 다양한 산업분야에서 <승자와 패자>를 구분하여 한마디로 승자독식적 정책지원을
하게 되는데, 먼저 세계 시장에서 살아남을 만한 산업부문을 선별했고, 그렇게 선택된 산업부문에 속한
기업들에게는 저금리의 자금지원과 각종 정책 및 법률지원을 통해 급격한 성장을 촉진했습니다.

정부구매를 몰아주고, 해외 경쟁자들을 관세로부터 보호하고, 대신 기업들에게는 (완벽한)품질로
보답하라며 철저한 기술적 완성도를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정부의 다방면의 지원과 혜택은
(일본)기업들의 완벽한 기술력과 합쳐져 세계 시장에서 일본 제품은 품질과 가격경쟁력으로 승부하게 되면서
시장 점유율을 높여갔습니다.

또한 해외 기업들은 일본의 까다로운 (법, 행정)규제로 인해 일본 시장에서 제품을 판매하거나 자회사를
설립하는 것조차 상당히 어려웠습니다. 실례로 당시 미국과 유럽기업들은 도쿄증권거래소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인 “회원권”조차 구입하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주목할만한 점은, 당시 대장성이 예금 및 대출금리 상한선을 낮게 유지하도록 했었는데
이는 결국 예금금리 수준이 물가상승률 보다 낮은 수준으로까지 떨어지게 만들었습니다. 한마디로
실질금리 수준이 마이너스(-)가 된 상황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국민들의 종특인지는 모르겠지만
오히려 일본국민들의 저축률은 더 높아지는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 이렇게 낮은 금리에 유동성마저
풍부해지니 (일본)기업들은 소위 “돈 걱정 없이” 투자 할 수 있는 최상의 여건이 조성된 것이었습니다.
더불어 일본은행들 입장에서도 그냥 땅 짚고 헤엄치는 격으로 거져 이익을 남겼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발맞춰 대장성 관료들은 승자독식 기업들 중에서도 더 국제경쟁력이 있는 승자에게
더 낮은 금리로 대출해 줄 수 있도록 은행들에게 공공연한 비밀(?) 지시를 내리는 경우가 비일비재 했습니다.

은행예금 및 금융상품의 수익률이 마이너스(-) 수준까지 왔음에도 이 당시 한 가지 다른 예외적
상품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동산”> 입니다.[@ 주식도 예외적인 상품에 포함할 수 있습니다.]

1980년대가 넘어가면서 일본에서는 소위 <금융자유화>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일본기업들은 뉴욕이나 런던 등지에서 별다른 제재 없이 기업 활동을 할 수 있는데,
미국 및 유럽 기업들은 일본시장에서 자유롭게 기업 활동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역차별이라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도쿄의 금융시장을 개방하라는 세계의 압력이(@실질은 미국의 압력) 시작된 것입니다.
결국 이 문제제기는 일본 국민들도 인정하면서 예금금리와 대출 금리가 상향조정되었고
일본 관료(대장성)들의 특혜성 지시 또한 많이 축소되었습니다.

이 당시 미국의 압력이 바로 <플라자 합의>입니다.
[@ 왜 미국이 압력을 행사했나를 따져보려면 그 이전의 오일쇼크와 함께 당시 미국의 정치 경제적인 부분까지
살펴봐야 함으로 그 부분은 다음에 기회있으면 다시 얘기하기로 하겠습니다. ]

<플라자 합의>는 간단히 말하면 미국이 일본과의 무역에서 너무나 많은 적자를 보고 있었기 때문에
엔화를 절상하라는 압력이었습니다. 결국 엔화 절상(엔고)으로 일본 기업들의 수출 부진이 예상되었고
이를 막기 위해 일본 정부는 저금리 정책을 실행해 내수침체에 대비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저금리는
엄청난 통화량 증가로 이어지며, 부동산 시장의 과열로 이어지게 되엇던 것입니다.

금융규제가 (일본)자국시장에서 맴돌던 수준에서 점차 국제화 수준으로 개방되자
이를 계기로 일본 금융기관(특히 은행들)들은 자국시장에서의 땅 짚고 헤엄치기 식의 경영에서 벗어나
해외시장에서 좀 더 넓은 기회를 찾아보고자 해외지사와 자회사 설립에 박차를 가하게 됩니다.

넘쳐나는 일본의 자금 유동성은 해외(미국, 영구, 독일, 스위스 등)에 설립된 지사 및 자회사를 통해
해외에 나가있는 일본기업들 뿐만 아니라, 다른 국적의 기업(비일본계)들 에게까지 흘러(대출)들어
갔습니다. ~ 만약 빌려줄 돈이 부족하면 국제 <은행간 시장>을 통해 일본은행의 해외 자회사들은
돈을 차입했고, 이것마저 부족하면 NDF(Non Deliverable Forward) 라는 역외 금융시장에서까지
돈을 빌려와 사업을 확장해 나갔습니다.

이 시기에 세계 10대 은행 중 무려 7개가 일본은행 이었고, 특히 일본의 최대 투자은행인 노무라의
자본금은 당시 미국의 5대 투자은행 규모를 넘어서기도 했습니다.

저금리에 넘치는 자금력, 일본 기업들의 제품 경쟁력(품질과 가격) 등은 당연히 기업들의 주가를
끌어올렸고, 주가상승은 자연스럽게 자본비용 하락과 투자증가로 이어졌습니다. 여기에 일본기업들은
자사 주식을 특정 수량으로 교환할 수 있는 달러($)화 표시 전환사채를 발행하여 해외 (투자)자금을
지속적으로 끌어들였고, 이렇게 모인 자금은 일본기업들이 설비투자 및 미국. 유럽 등의 해외 기업을
인수하는데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 이렇게 보면 당시 글로벌 인덱스 펀드 자금이 일본으로 몰려들었던것은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고 할수 있습니다.)

이를 증명하듯 미쓰이 부동산은 당시 약 3억달러 수준이었던 뉴욕시 6번가의 엑손빌딩을
무려 두 배가 넘는 6억 3천만 달러에 사들였고, 이에 뒤질세라 다른 일본 기업들도 미국의 상징적
건물과 기업들을 마구 사들였습니다. 미쓰비시 부동산의 록펠러 센터 50% 지분매입, 스미모토은행 계열은
캘리포니아 페블리치 골프장을 매입, 소니는 콜럼비아 레코드 및 콜럼비아 영화사 인수,
마쓰시타는 MGM 유니버셜 인수 등

19세기 서양에 문호를 개방한 일본은 서구 여러 나라에 <신사유람단>을 파견해
정부의 행정과 공공서비스, 은행 시스템, 중앙은행의 역할과 교통체계 등을 견학하며 향후
일본의 경제를 어떻게 발전시켜야 하는지 많은 고민을 하게 됩니다.

도쿄 중앙역은 암스테르담의 센트럴 스테이션을 본떠 만들었고, 일본 은행은 벨기에 국립은행을
기초해 만들었습니다. 또한 공공서비스는 프랑스, 도로와 철도시스템은 영국을 주로 참고했는데
일본사람이 도로의 좌측으로 운전하는 것은 바로 이때에 영국의 영향을 받은 탓입니다.

일본의 기업들(산업)은 과거 봉건 가문을 중심으로 발달했었는데,
미쓰이, 미쓰비시, 스미모토 같은 (고전적)명칭들은 현대까지 이어져오며 상사, 은행, 제조업 이름에
그대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 가문 기업들은 하나의 은행지주사가 상사와 조선, 제철 등의
여러 계열회사의 지분을 대량으로 소유하면서 요즘말로 흔히 말하는 <계열사 밀어주기> 방식으로
장기자본, 대출 등을 공급해 주는 체계였습니다. 다시말해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한국 <재벌>의
모체가 바로 일본식 모델이었으며, 이러한 일본의 가문 경영은 초창기 독일 모델에 기초해 있었습니다.

이렇게 질적, 양적 두 부문에서 엄청난 성장을 지속하던 일본 경제는
특히 은행에서부터 조금씩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금융 자유화 바람에 힘입어
일본 은행들은 자체적으로 수익성 부동산을 매입하거나 다른 건설업체들의 부동산 (건설)자금을
대출해 주었는데, 이로 인해 투자자들은 금융 상품에서의 마이너스 수익률에서 부동산 분야의
플러스 수익률에 조금씩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1929년 대공황 직전 미국 증시의 상당부분을 철도 관련 기업들이 점유하고 있었던 것처럼
당시 도쿄 증시에는 부동산과 관련된 기업들의 비중이 상당히 높았습니다. ... 부동산 가격 상승은
도쿄증시에 상장된 부동산 기업들의 주가를 끌어올렸고, 이들 기업들의 주가상승은 다시 현물(부동산)
시세를 끌어올리는 일종의 사이클을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 여기에 한 발 더 나아가
자금 대여자였던 은행들 또한 자산의 상당비중이 부동산이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단순영업(예대영업)
보다 더 높은 수익률이 부동산보유에서 창출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 (영업이익 < 부동산 이익) ]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은행의 자본여력을 여유롭게 만들어 다시 부동산 대출을 증가시켰던 것입니다.

당시 일본의 한 저명한 금융관계자는 일본은행들은 영업이익이 절대로 마르지 않는
영구적인 기계를 발명했다고까지 얘기하기도 했습니다. 상황이 이쯤 되니 자신들이 힘들게 상품을 만들어
수출해 버는 돈보다 부동산 가격상승과 주가상승으로 버는 돈이 더 많아지는걸 직접 눈으로 목격한
일반 제조업체들까지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이들 기업들은 은행에서 대출 받은 돈으로
투자를 늘리기 보다는 너도 나도 현물(부동산)과 부동산 관련 주식들을 매입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모든 분들도 잘 아시겠지만 부동산, 즉 그것이 아파트가 되었건, 빌딩이 되었건 간에 부동산은
그 현물적인 특성상 폭발적인 (부동산)수요에 맞춰 공급되기 어려운 투자대상입니다. 부동산을
건설하는데는 당연히 절대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화폐 속도에 맞춰 부동산이 공급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 합니다. 결론적으로 부동산 시장에서의 수요움직임(특히 돈의 움직임)이 공급을
약간만이라도 초과하게 된다면 부동산은 쉽게 과열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당시 일본의 상황에서 일본은행들이 꺼려했던 주택융자 사업을 위해 일본정부는
일명 <주센(住專)> 이라는 주택융자만 전문으로 하는 은행 설립을 허가해 줍니다. 2008년 미국에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터졌을 때, 당시 수많은 군소 모기지 전문은행이 파산했는데, 이와 유사한
개념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 그리고 여기에 더해 일본 정부도 자체적으로 미국의
패니 메이(Fanny Mae)와 프레디 맥(Freddy Mac)과 같은 국책성격의 모기지(주택융자) 전문 기관을 설립합니다.

이렇게 형성된 일본의 (부동산)거품은 결국은 1990년대에 들어와 평범한 시민들이 집값이 너무 비싸
주거의 어려움을 겪게 만들었고, 일본사회에 전체에 사회적 갈등을 유발하게 됩니다.
그래서 일본정부는 과열된 부동산 시장을 진정시키고자 우선 부동산 대출 규제에 들어갑니다.
그중 대표적 규제는 은행들의 <부동산 대출증가율>이 <대출 총액 증가율>을 넘어설 수 없도록
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은행의 전체 여신에서 부동산 대출 비중을 줄이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대출규제는 그동안 부동산을 담보로 언제든지 대출이 가능했던 투자자들의 현금유동성을
막아버렸습니다. 쉽게 말해, 대출 원리금 상환 부담이 있더라도 부동산가격은 계속 상승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 번 대출을 받은 뒤에라도 상승한 부동산 가격에(담보가치 상승) 대출한도는 또 자연스럽게
늘어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부분이 규제로 막혀버리니 당장 대출 원리금을 상환할 현금을
구하지 못한 투자자들은 소유했던 부동산을 급매로 내놓는 일이 조금씩 많아졌던 것입니다.

대출 규제로 인한 신규 매수세가 실종되고, (급)매물이 추세를 타면서 그 수도 증가하고
결국 어느 지점에서 수요보다는 공급이 초과하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본격적인 거품의 붕괴로 이어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 그리고 이러한 흐름은 상당수의 주센은행과 중견 은행들의 연쇄적 파산으로
이어졌습니다.



[@ 경제는 <흐름>이기 때문에, 어느 한 구간을 설정해 설명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급하게 올리느라 오타가 있더라도 양해 바라며, 이 부분은 다시 깔끔하고 재밌게 정리해서
우리의 1997년 외환위기까지, 혹은 이후 2008년 서브프라임 사태까지 하나의 큰 흐름을 볼수 있도록
정리해서 다시 올려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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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과 경제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