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 22일 화요일

◆ 제도(구조)가 권력적으로 작동한다는 의미에 대하여 [by. 물파스]

[◆ 제도(구조)가 권력적으로 작동한다는 의미에 대하여]


(@ 오래전 이슈인에서 한 번 얘기했던 내용입니다. 여기에 몇가지 내용을 추가합니다.)

기독교가 지배하던 중세 서양에서는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하면
극형에 처해져 목숨을 잃어야 했습니다.성경이 쉬워지고 누구나 이해할수 있게 되면,
신부등 목회자의 권위가 사라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당시 사제들은 대중에 대해서는
일종의 특권을 가진 권력층 이었고, 이는 오늘날 소수 지배권력층과 다를바 없는 것이었습니다.

중세의 죄수들은 고문에 의해서 몸의 힘을 빼앗겼지만, 근대에 와서는
노동을 함으로써 몸의 힘을 생산하는 효율로 전환하게 됩니다. 즉, 몸에 가해지는 권력이
"고통과 억압의 권력"에서 "생산하는 권력"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프랑스의 세계적인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 이러한 권력 관계를 단순히
수직적으로만 이해하지 않고 더 나아가 현대사회의 <제도(구조)>안에서 횡적으로 분화된
"담론구조"를 밝혀냅니다.

우리는 몸이 아플때 병원을 방문해 의사와 상담을 합니다.
더불어 대부분의 환자들은 의학지식이 부족한 상태입니다. 따라서 의사의 말을 대부분 수용하면서
의사의 지시대로 약도 먹고 음식도 조절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특이한 현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의사는 우리에게 그 어떤 물리적 폭력이나 협박도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행동은 거절할수 없는 어떤 <"권력">에 의해 움직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날 현대 사회에서는 제도가 만들어낸 '권력관계'가 너무나 많이 생산되고 있습니다.
즉, 사법적 권력관계를 넘어서서 사회제도(병원, 금융, 군대, 언론, NGO 등)가 생산한 권력관계는
사회 곳곳에 다양하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 푸코는 이러한 제도영역 안에서 생산되는
전문적 언어양식을 <담론>이라 정의했습니다.

의사가 환자에게 전달하는 의학용어, 경제(금융)전문가의 경제용어, 그리고 법률용어 ... 그래서
의사와 환자와의 관계에서는 <의학담론>이 생성되고, 이 과정에서 의사는 담론(의학담론)의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 ~ ~ 더불어 담론의 주체는 "권력관계"에서 우위에 서게 되고, 이것은 과거 중세시대의
사제들이 소유한 성경해석 능력과 같은 하나의 특권과 같은 의미인 것입니다.

하지만 전문적 지식인으로서의 "담론주체" 들이 위협을 받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전문지식이 보편화 되고 대중화 될때인데, 푸코는 이것을 바로 "권력의 해체"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담론이 생성 됩니다. 담론이 권력을 만들어내고, 권력은 다시 담론을 재생산함으로서
권력관계는 지속성을 갖습니다. ... 이렇게 담론과 권력의 연대는 사라지지 않는 필연의 관계에 있습니다.
문제는 현대 사회에 있어서 담론이 미시화 되는 부분인데 ...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거대 담론이 사라지고
확인할 수 없을 만큼 작아져서 평범한 일상처럼 작동되는 방식입니다. 다시 말해, 담론 자체가
아주 당연시 되어 시민들이 이러한 은폐된 권력관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
오늘날의 권력이 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권력이 은폐되었다>라는 의미는 '권력' 자체가 하나의
사회제도가 되고, 구조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원형 모양의 감옥이 하나 있습니다. ... 중앙에 높은 감시탑이 하나 있는데, 이 감시탑은 늘 어둡습니다.
그리고 죄수의 방은 밝게 해놓았는데, 이러한 구조는 감시탑 안에서는 감방안의 죄수들이 항상 보이므로
언제나 감시가 가능하지만, 감방안의 죄수들은 중앙 감시탑의 교도관이 어두워서 전혀 보이질 않습니다. 따라서
죄수는 교도관이 지금 잠시 자리를 비우거나 잠시 졸더라도 항상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탈옥 같은건 절대로 꿈꾸지 못합니다 ... 이 감옥이 바로 1791년 공리주의자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이
제안한 원형감옥 <판옵티콘(Panopticon)>의 모습입니다.

인간에게 쾌락을 가져다주는 행위가 바로 선이며 옳은 것이라는 윤리관이 "공리주의"입니다.
원형감옥 판옵티콘을 설계한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의 주장인데, 공리주의에서는
사회의 행복은 그 사회의 포함된 개인들 각각의 행복(쾌락)을 모두 합한 것입니다.
많이 들어보셨죠? ... "최대 다수의 최대행복" 입니다. 따라서 공리주의 주장대로라면,
사회의 이익(행복)을 최대화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증진시켜야 합니다.
이를 '자본주의적 의미'로 해석해보면 이렇게 표현할수 있습니다. ~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한마디로 <생산성의 극대화>입니다. ... 그런데 판옵티콘은 이러한 자본주의적 의미에 가장 부합하는
구조를 가진 감옥입니다. 수많은 감방을 감시하는데 있어서 중앙의 감시탑 하나만(교도관 1명) 있으면
모든게 해결이 가능하므로, 이것은 감옥의 구조, 즉 <감시체제(제도)> 자체가 최대의 효과(성과)를
올릴수 있는 가장 자본주의적인 산물에 가깝다 할수 있는 것입니다.

(사회)제도나 구조가 권력적으로 작동하는 사례는 사람의 <신체>에도 녹아들어 있습니다.
푸코(Foucault)는 근대사회에서 지식과 권력의 목적이 바로 인간을 "표준화" 하려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표준화 중에서는 인간의 <"신체">에 대한 표준화가 가장 대표적인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신체는 고대나 현대, 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 기능이나 (신체)기관은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습니다.
한마디로 수백년전 사람의 몸이나 오늘날 사람의 몸은 차이가 없다는 것이죠! ... 눈, 코, 입, 손, 발, 내장기관 등
인간의 물리적 "몸" 자체로서는 과거나 현대나 그대로인 것입니다. 하지만 푸코(Foucault)는
<"신체도 하나의 사회제도다!"> 라는 ... 그야말로 푸코(Foucault)식의 정의를 내렸습니다. 무슨말인가 하면,
사람의 신체에는 권력이 주입한 어마어마한 비밀이 일종의 사회제도처럼 어떤 "의미에 엮여 있다" 라는 것입니다.

[@ 18세기 후반에 와서 병사는 만들어질수 있는 어떤 것으로 변했다.
형태가 갖추어지지 않은 진흙, 곧 부적격한 신체가, ...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있는
기계로(인간 기계) 변했다. 자세는 조금씩 교정될수 있는 것이었고, 계획적인 구속이 서서히
신체의 각 부분을 통하여 영위되었고 그것들을 자유롭게 지배하고 신체 전체를 복종시켜
항구적으로 취급 가능하게 만들고, 그리고 자동적인 습관이 되어 암묵리에 남게 되었다.
요컨대 "농민의 요소를 추방하고" ~ 그 대신 "병사의 태도"를 주입시킨 것이다.
- 푸코(Foucault). 감시와 처벌 中 ]

"신체도 하나의 사회제도다!" ... 라는 푸코의 정의는 가까운 일본의 사례를 통해
우리가 좀 더 쉽게 이해할수 있습니다.

1873년 일본에서는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천황의 이름으로 징병제를 도입했는데, 이것은 천황이 직접 지휘하는
군대를 조직화 하는 것으로 ... 농민, 상인, 평민에 관계 없이 만 20세의 남자는 모두 징병 대상이 되어
신체 검사에 합격하면 2년간의 국방 의무를 부담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근대 일본의 군대 제도가 정비되기
시작했고, 군대는 메이지 정부의 근간 무력으로서 국내외의 위기 상황에 상당히 중요한 물리력으로 자리잡게
되었던 것입니다. [@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근대 일본의 군대 창설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고,
수상과 원로로서 정치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때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머릿속에는 <통제(권력)>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두가지 의미가 있는데 ... 하나는 메이지 정부에 반항적이었던 각 번(藩.지역 행정단위)의
사족 병사를 통제하기 위함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까지 무장(武裝)과는 거리가 멀었던 농민이나 상인 같은
평민들의 신체를 <표준화> 하는 것이었습니다. 더불어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는 신체에 권력을 주입하는 일,
즉 <"신체의 정치기술(신체의 제도화)">을 아마도 근대 일본사회에서 가장 푸코(Foucault)적으로
잘 이해했던 인물일 것입니다.

단지 몇 개월의 훈련이면 인간의 신체는 재조립 될 수 있고, 어떻게 하면 공포를 느끼는지, 또 어떻게 하면
죽음도 불사하는 강력한 병사가 되는지 등의 신체조작 기술은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강렬한 전쟁(전투) 경험속에서
몸으로 얻어진 것이며 ... 이것은 야마가타의 고유의 기술이자 하나의 강력한 신념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신체의 정치기술"은 ... 이후 일본에서 <체조>의 도입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메이지 19년(1886년) 문부대신이었던 모리 아리노리는 <군대식 체조>를 학교 교육현장에 도입하는데,
당시 학생들의 신체를 통제하는 것이 "도덕의 향상"과 "근대적인 국가체제 완성" 이라는 과업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 국가주도의 체조 보급은 국민의 건강증진 같은
단순한 목적에 있지 않았습니다. 바로 <"조작가능한 신체"> 혹은 <"순종적인 신체">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 체조는 큰 힘을 기대할수 없는 군대의 신참들을 ... 호령과 함께 일제히 질서정연하게
행동하도록 만드는 훈련입니다. 근대적 군대에서는 병사들이 개인적인 판단이나 능력 및 임기웅변으로
싸우는게 아니고, 집단속에서 사전에 정해진 작은 역할을 부여받고 신호에 따라 그것을 되풀이해서
반복하는 것입니다. ~ (중략) ~ 체조가 집단 질서를 높여주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것은
이 전술상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평범한 능력의 개인들을 기대이상으로
유효하게 활용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 (건강한 일본사 中) ]

근대 국가에서는 예외없이 국민의 신체를 통제하고 표준화하는 작업이 이루어졌습니다.
즉 ... 관리하기 쉽고, 순종적인 신체를 만드는 것이 정치적으로 가장 우선시 되었다고 할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체의 정치기술"은 처음에는 병사들의 신체를 표준화 하였고 ... 이후, 일본에서 모리 아리노리의
군대식 체조가 학교에 보급된 것처럼, 근대 국가에서는 반드시 통제가 필요한 계층과 집단들이 존재 했었는데,
다시말해, <감시와 훈련 및 교정>이 필요한 계층들이었습니다. ... 그들은 바로 광인들과 학교 아이들,
식민지 원주민 등이었고, 나중에는 "생산수단에 구속된 사람들", 즉! ~ <산업사회 노동자들> 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신체를 표준화 하는 작업의 궁극적 목적은 신체의 지배를 통한 정신의 지배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정말로 중요한 점은, 이러한 신체 지배가 강제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통제를 받고있는 대상들은 자신들이 "통제를 받고있다" 라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앞서 의사와 환자와의 담론구조에서 보셨던 것처럼) ~ 이것은 오직 자신의 의지와 자발적 선택에 의한
결과인 것입니다.(@ 최소한 그들의 의식 속에서는) ... 결론적으로 신체의 표준화(신체의 정치기술)는
아무런 의심없이 대상들 스스로가 권력속으로 걸어 들어가도록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정치권력은 인간의 "정신"과 마주하게 됩니다. "장수를 쏘지 말고, 말을 쏘라!" 라는 뜻은
결국 정신의 통제 이전에 신체의 통제를 중요시 하라는 얘기입니다.

1960년대부터 일본의 초.중등 학교에서는 소위 <삼각앉기>, <체육앉기>라는 신체통제가
전국적으로 이루어 졌습니다.[◆ 삼각앉기는 쭈그려 앉은상태에서 두손으로 무릎을 감싸고
머리(고개)를 무릅에 파묻는 모습입니다] ... 물론 "앉기놀이" 라는 건전한 명칭으로 보급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앉기는 ... 우선 두 손으로 무릎을 감싸고 있기 때문에 손장난을 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머리를 숙이고 있기 때문에 고개를 좌우로 돌릴수 없어 주의가 산만해지는 것을 자연스럽게
막을수 있으며, 무릎이 가슴부위를 압박해서 깊은 호흡이 어려워져 큰소리를 낼수 없을뿐만 아니라
친구들과의 대화의 단절이 일어납니다 ... 1958년 일본 문부성(교육부서)은 학생들을 따로 집합시키거나
통제가 필요한 상황에서 이러한 자세를 교육시키라고 공지하였습니다 ... 그런데 당시 학생들에게
주입했던 "삼각앉기"는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들에게는 너무나 편안하고 익숙한 몸의 사용법이 되었던 것입니다.
스스로의 몸(팔, 다리)을 수갑처럼 사용하여 자신을 구속하던 갑갑한 자세가 어느순간 부터는 아이들에게
일상의 편안한 상태가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 이렇게 권력(사회제도)은 우리의 몸과 정신에 매우 자연스럽게
착근(着根)되고 있었습니다.

"삼각앉기"는 아이들의 몸이 자신들도 모르게 권력(신체의 정치기술)에 예속화 된 것과 같습니다.
몸의 기억은 생각보다 강렬합니다 ... 시간이 지나 <일상처럼> 편안한 상태가 되고, 이제 아이들은 선생님의
"집합!" 이라는 명령이 없어도 언제 어디서나 앉아야할 상황이 되면, 하나의 자발적 주체(주체화)로서
자유롭게 스스로 "편안한상태(삼각앉기)"를 선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 또한 이렇게 편안한 상태의 삼각앉기가
스스로 느끼고 선택한 하나의 주체적인 행위로 고착화되면, 그들의 자녀들, 즉 다음 세대들부터는 아무런 의심없이
편한상태(삼각앉기)를 기계적이고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삼각앉기를 사회적 상식처럼 받아들인다!)
다시말해 이 모든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며, 모두가 본인의 자유의지에 따라 선택한 일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작년(2018년) 10월부터 시작된 프랑스 사회의 <노란조끼 시위(Yellow Jackets movement)>가
현재도 우리 언론에 종종 보도되고 있습니다. 시위 역사가 풍부(?)한 프랑스 답게 시위의 '과격성'과 '폭력성'에 대한
지적이 많습니다. ... 더구나 광장에 수백만이 모였음에도 단 한건의 폭력시위도 없이 평화롭게 국가 최고권력까지
무너뜨렸던 경험을 가진 자랑스런 대한민국 국민의 시선으로 보면, 프랑스 국민들의 시위행태는 어쩌면
대단히 미개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 그런데 이 지점에서 푸코의 시선을 대입해보면 전혀 다른 양상이 보입니다.

권력이 시위주체에게 행사하는 (시)공간적 규제는 일본의 삼각앉기 및 푸코의 신체에 가하는 폭력(통제)과
궤를 같이 합니다. 권력은 그러한 공간적 규제를 소위 < 평화적 질서유지>라는 좀더 순화된 표현으로
총괄지어 버립니다. 또한 시위 주체가 아닌, 보편의 시선에서 바라보면 행정권력이 시민들의 불편을 최소화 하려는
노력으로 비춰져 <평화 시위>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시민권리'라는 상위 범주의 보편성을
일종의 도구로 사용하여 공간과 시간을 규제하게 된다면, 그리고 국가(권력) 내에서 일어날 수 있는 ... 이후
모든 시위에 대해 이러한 규제(질서유지)가 반복되어 나타나게 된다면, 두려운 것은 지속적으로 규제의 익숙함만을
요구받게 되면서 시위 주체의 <분노의 이유>가 잊혀지고, 어느 순간부터는 <시위 본질>을 망각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분노의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시위는 질서를 유지하는 평화로운 외침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결국 권력에 대한 저항 의지에 무기력함을 주입하고, 동시에 사회 안에서 시위의 내용(본질) 보다는
<시위의 기준(질서유지의 평화적 외침)>이 더 많이 강조되어 자리잡게 된다는 것입니다. 시청 광장에 버스산성으로
공간을 배분하여 한쪽은 시위주체를, 다른 한쪽은 일반적인 시민들로 분리하게 되면, 즉 시민들의 불편을 최소화 하고
질서유지를 위해 공간을 나누게 된다면 ... 결국 시위주체가 아닌 일반적인 시민들은 광장을 지날때마다
버스가 시위주체들과 자신을 철저히 구분지어 놓았기 때문에 ... 같은 지하철을 타고, 같은 병원을 이용하고,
같은 공공요금을 내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철저히 나와는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버스가 이들을 구분짓지 않았다면 시위자들이 거리로 나오고 일반시민들은 그들과 물리적으로
좀더 근접한 관계안에서 서로 섞이게 되면서 불편과 불만을 하소연 할수도 있습니다.(무질서 양산) ... 하지만 이것은
확실히 "침묵" 보다는 나은 상황이라 생각됩니다. 버스(산성)는 두 개의 세계를 만들었지만, 버스가 없어지면
일반시민들의 불만의 목소리가 나올수는 있어도, 그보다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 시위 주체들과 일반시민들이
같은 공간속에 존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시위 주체들과 시민들이 공간을 공동으로 점유하게 되면
권력에게는 하나의 공간속에 무질서하게 섞여있는 시위자들과 시민들을 솎아내야 하는 골아픈 문제도 발생하겠지만,
그보다는 시민들의 불만과 불편이 <"관심(시위의 본질, 저항하는 이유)">으로 전이될 가능성을 더 크게 염려해야
할 것입니다. 권력은 그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행정을 비롯한 통제 가능한 일부의 영역(ex 언론)은 분명히 존재하겠지만,
광장에 섞여있는 수많은 독립적 의식 덩어리들은 웬만해선 통제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버스산성 같은 공간의 통제는
결국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의식(정신)의 통제와 그 의미가 유사하다고 할 수 있으며 ... 이것은 앞서 살펴본
일본의 삼각앉기와 푸코의 신체 통제 처럼, 통제에 관한 한 모두가 유사한 프로그램이 사용됐다고 말할수 있을것입니다.
또한 '질서(시위규제)'가 보이지 않는 하나의 '폭력'으로 작용한다고도 말할수 있으며, 이러한 공간의 규제가 반복되고
사회안에서 표준적 시위 방식이 합의된다면 ... 이제부터 시위 주체들은
<"시민들의 보행권을 침해하지 않도록(정해진 공간을 벗어나지 않도록)"> 무의식적으로 스스로를 통제하게 될 뿐만 아니라
이러한 권력의 규제 요구에 익숙해 지면서, 배후의 숨은 제도가 권력적으로 작동하는 방식의 실체는 파악하지 못하고,
이 모든 것이 자신들의 자유의지로 결정되어진 것이라며 조금씩 내면화 시키게 된다는 것입니다.
[◆ 평화시위 반대를 주장하는게 아닙니다. ... 우리가 그동안 너무나 당연시해왔던 일들에 대해
한번쯤 고민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다시말해 "사회제도가 암묵적 권력으로 기능하는 방식"에 대해
생각해 보자는 의미라고 봐주시면 되겠습니다.]


담론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권력관계"에서 영원히 자유롭지 못하게 됩니다.
설령 담론의 주체가 어렵다면 최소한 담론의 구조라도 스스로 알아보려는 노력이 필요하고 ... 그래서
국민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담론질서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무식(無識)과 무지(無知)는 언뜻 비슷한 의미로 생각되지만, 둘은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무식은 지식과 정보의 빈곤입니다. ...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사는 사회는 정보 과잉의 사회입니다.
때문에 무식은 언제든지 극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지는 <알고 싶지 않다> 라는 마음이 지속되는 상태입니다.

푸코의 말대로 (주류)담론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단순한 용어의 정의를 안다고 뽑내기 보다는
그러한 용어가 그 사회안에서 어떠한 맥락으로 사용되고 있는지, 더불어 그런 용어가 생산한 담론이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권력적으로 기능하는지를 파악하는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 급하게 쓰다보니 맞춤법이 틀린 단어가 있을수 있습니다.
혹시라도 있다면 너그럽게 양해 바랍니다. ... 맞춤법을 염려하는 지금 제 모습 또한
어쩌면 제도가 암묵적 권력으로 기능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입니다. ~ 힘찬 한 주 되십시오.]

◆재미로 배워보는 금리(단리)와 은행의 시장성수신 이야기 [by. 물파스]

[ 재미로 배워보는 금리(단리)와 은행의 시장성수신 이야기 ]


이자를 계산하는 방법은 재무계산기나 엑셀을 활용하면 간단히 구할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술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기본원리도 알아두신다면, 이자에 대한 자신감이
지금보다는 더 나아질거라 생각합니다. ... 그래서 먼저 단리이자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 단리 적금이자 공식 = < P(월 납입금) × [n(n+1)/2] × (R/12) >
@ n=개월수, R=연이율

위 공식은 단리 적금의 "이자금액"을 구하는 공식입니다.
그전에 적금과 예금을 먼저 구분하셔야 하는데 ... 적금은 적립저금(積立貯金)의 줄임말입니다.
일정한 기간동안(1년,2년,3년 등) 매월 일정금액을 은행 상품에 불입하는 것입니다.
ex) “철수는 급여일(25일)에 맞춰, 매월25일에 국민은행에 30만원씩 1년동안 돈을 넣기로 했다“

또한 예금은 넓은 의미에서는 은행에 돈을 그냥 넣어두는 것입니다. 여기에 일정 기간동안(1,2,3년 등)
돈을 찾지 않겠다고 계약한다면, 이것을 보통 ‘정기예금(定期預金)’ 이라고 합니다.
ex) "철수는 적금으로 모은 목돈 1,000만원을 국민은행의 정기예금 상품에 1년동안 넣어두기로 했다“

자! ~ 그럼 단리이자공식에 대해서 계속 얘기해 보겠습니다.
은행의 적금상품은 보편적으로 단리이자를 많이 적용합니다. 하지만 가끔은 자금유치를 위해
특판형태로 (월)복리상품을 판매하기도 합니다.

그럼 위 공식대로 한 번 단리이자를 계산해 봐야겠습니다.
위에서 철수는 급여일 25일에 맞춰, 매월 30만원씩 1년(12개월)동안 불입하기로 했습니다.
철수가 가입한 적금상품의 이율은 연5% 라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 <P(월불입금 30만원) × [(12×13)/2] × (0.05/12)> = 97,500원(세전 이자금액임!)
따라서 매월 30만원씩 12개월동안 불입한 원금은 360만원이며, 여기에 이자금액 97,500원을 합하면
1년뒤 원리금(원금+이자)은 3,697,500원이 됩니다. ... 이것은 철수가 국민은행의 5%, 1년 단리적금에
월 30만원을 불입한 결과인 것입니다.

그럼 왜 저런 공식이 도출되었는지 한번 차분하게 살펴봐야 겠습니다.

[◆ 매월1일에, 1만원을 연이율12%, 1년 단리적금상품에 가입 했을때]

@ (1월1일): 은행에 1만원을 납입합니다. 상품의 가입기간이 1년이기 때문에,
1만원은 1월부터 12월까지 12개월동안 통장에 묶여있는것과 같습니다. 즉 1월1일 납입한 1만원은
1년짜리 정기예금상품에 가입한 것과 마찬가지란 뜻입니다. 그래서 연이율이 12% 이므로
이자는 1,200원이 발생합니다.

@ (2월1일): 은행에 1만원을 납입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11개월동안 통장에 머물러 있습니다.
연이율이 12%이므로, 월 1%의 이자금액 100원이 11번 발생해서, 총 이자금액은 1,100원이 발생합니다.

@ 3월1일에 납입하는 1만원에 대한 이자도 동일한 개념으로 총 발생하는 이자는 1,000원입니다.

@ 11월1일과 12월1일에 납입하는 1만원은 각각 통장에 2달과 1달동안 머물러 있습니다.
따라서 이자금액도 각각 200원과 100원 입니다.

자! ~ 그럼 매월1일에 납입했던 1만원이 통장에 머물러 있는 기간만큼 이자가 발생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1월부터 12월까지의 이자금액은 1,200원부터 시작해서 1100, 1000, 900, ...100원이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을 모두 더해보면 7,800원 인데,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법칙을 발견할수
있습니다. 바로 가우스가 발견한 법칙입니다.

이자금액이 1,200원으로 시작해서 100원씩 줄어든다는 것입니다. 그럼 여기에 거꾸로 100원으로
시작해서 개월수가 늘어날 때마다 100원씩 증가하는 모습을 덧붙여 더해 본다면, 1,300원이 12개가 됩니다.
그리고 각각의 이자를 두 번 계산했기 때문에 2로 나눠주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식에서 N은 개월수 이므로, 적금이 1년8개월(20개월), 2년3개월(27개월) 처럼,
굳이 1년,2년 등의 단위가 아니라도 계산이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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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의 시장성수신 이야기]

금융기관중 특히 은행의 자금운영 측면을 살펴본다면, 다를 잘 아시겠지만,
국내은행들에게는 아직도 예금과 대출이율의 차이인 예대율 마진이 가장 중요한 수익원중 하나입니다.
고객들이 은행에 예금을 하면, 그것은 은행입장에서 보면 부채가 됩니다. 또한 당연한 얘기지만,
고객이 돈을 돌려달라고 하면(예금해지) 은행은 지체없이 돈을 돌려줘야 합니다. 더불어
감독당국도 은행의 자금운용(대출)을 수시로 점검해야 합니다. 다시말해 고객의 예금기간과
은행의 대출기간의 조화가 잘 이루어지는지 세심하게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객이 1년짜리 예금에 가입했다면, 은행도 그 돈을 1년짜리 대출에 이용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자금운용 방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보편적으로 은행의 건전성(안정성)을 평가할 때
유동성비율과 예대율을 대표적인 평가지표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 유동성비율 = (유동자산/유동부채)
@ 예대율 = (대출/예금)

먼저 유동자산이 100원이고, 유동부채가 100원 이라면 유동성비율은 100%가 됩니다.
이것은 은행이 자기의 보유자산 만으로도 빚을 모두 상환할수 있다는 뜻입니다.
만약 비율이 50% 라면 자산을 모두 처분해도 빚은 절반 밖에 갚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예대율은 말그대로 고객의 예금으로 대출을 얼마나 했는지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A고객이 100원을 예금했는데, 은행이 그 돈을 전부 B고객에게 대출했다면 예대율은 100%가 됩니다.

부동산 광풍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부동산 시장이 뜨거웠던 2006년 당시
국내 시중은행들의 예대율은 약 125% 수준 이었습니다. ... 고객이 은행에 100원을 맡겼다면
은행은 그 돈으로 약 125원을 대출했다는 것이죠!

2008년 세계금융위기(서브프라임 위기) 이후 미국과 유럽및 한국 등도 어느정도 부동산경기의
과열이 진정되기도 했는데, 그 당시(2011년) 기준으로는 예대율이 약 108% 수준으로 낮아졌습니다.
그리고 금융위원회는 가계부채 연착륙 종합대책의 일환으로 2012년 7월부터 예대율을 100% 이하로
유지하도록 예대율 규제를 공시했습니다.

객관적 수치를 통해 당시 국내 시중은행들의 예대율 수준을 알아보았는데,
여기서 거론하지 않을수 없는 상당히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 은행들은 보편적으로
자금조달구조가 단기인 반면에 자금운용(대출)은 장기로 하는것이 일반적입니다.
즉 고객들은 1년, 3년, 5년 등의 기간으로 은행에 돈을 맡기지만(수시입출금식 통장 포함)
(@사실 5년은 은행에게는 장기에 속합니다)은행의 주택대출 같은 경우만 보아도
보통은 10년이 넘어갑니다. 따라서 은행은 구조적으로 유동성 리스크에 상당히 취약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 고객의 예금이 만기가 다 되었다던지, 아니면 해지를 했을때 바로바로 돈을 돌려줘야 하는데
만약 은행이, 보유하고 있는 자산을 현금화 하기도 쉽지않고, 대출 회수율도 낮아져서 당장 돌려줄 돈이 없는
상황에 처할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통 자산 및 부채의 유동성불일치(mismatch) 라고 하는데 ... 이렇게
은행에게 심각할 정도의 유동성 불일치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면, 은행도 빠른 시간안에 돈을 마련해야 할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은행에게 돈을 빌리기도 하고(@ 여기서 적용되는 이율을 우리는 보통 콜금리라고 합니다)
스왑(swap)을 이용하기도 합니다. ... 아니면 은행 자체의 채권을 발행한다던지, 정말 긴급한 상황에서는
우리가 뉴스에서 자주들었던 CD라는 양도성예금증서를(보통 90일 ~180일짜리) 발행해서 자금을 조달 하게 됩니다.
참고로 은행이 이렇게 고객이 맡긴돈이 아닌 방법으로 조달하는 자금을 흔히 <시장성수신> 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부동산 경기의 활황국면에서 대출수요는 늘어나는데 빌려줄 돈이 부족하게 된다면 보편적으로 가장먼저
<시장성 수신>이 증가하게 됩니다.

2008년 금융위기 이전까지만 해도 국내 감독당국의 유동성비율(원화유동성) 기준은
잔존만기 3개월의 원화유동성 이었습니다. 다시말해 원화로 예금한 고객돈을 돌려주기 위해서
은행이 과연 원화자산을 어느정도 보유하고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었는데. 기준은 100%(원화유동성비율) 이상을
유지하도록 한것입니다. 하지만 금융위기이후인 2008년 10월부터는 잔존만기 기준이 1개월로 바뀌게 됩니다.

예대율은 2008년 금융위기때 정점에 올랐다가, 정부의 예대율 규제와 유동성비율을 잔존만기
1개월로 변경하면서 낮아지기 시작해, 그 이후로는 100% 미만수준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대율을 살펴보면
고객예금의 예금특성(단기,중기,수시,정기 등)이 적절히 반영되지 못해서 위기때 각각의 예금들이 어느정도 속도로
유출될 것인지 파악하기 힘들다는 문제가 남아있었습니다. ... 더불어 유동성비율도 잔존만기를 1개월로 변경하긴 했지만,
은행들이 비율 보고시점인 월말 즈음에 CD(양도성예금증서)나 채권을 새로 발행해서 마련한 자금으로
유동성이 높은 유가증권을 매입 함으로써 유동성 규제인 100% 수준을 편법적으로 충족하는 행태가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감독기관은 좀더 정확한 은행의 유동성리스크를 평가하기 위해
LMI(liquidity mismatch index) 라는, 소위 "유동성불일치 지표"를 평가기준으로 활용하기 시작했습니다.
[@ 자세한 LMI 지표산출은 얘기가 길어지므로 생략하고, LMI 산출에 있어서 보다 중요한 내용인
자산과 부채의 항목별 가중치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언급하겠습니다.]

[◆ LMI 유동성 가중치 비교]

<자산항목 - 가중치>
(1.00) - 현금, 지급준비금, CD, CP, 콜론
(0.95) - 국채, 통안채, 정부보증회사채 등
(0.50) - 회사채(정부보증 아닌것), 금융채, 주식
(0.35) - 주택담보대출 등
(0.15) - 잔존만기 1년 이내 대출(주택담보대출 제외)
(0.00) - 기타자산

<부채항목 - 가중치>
(1.00) - 잔존만기 1년 이내 시장성수신 및 차입금
(0.50) - 기업예금, 정부 예금
(0.15) - 가계예금
(0.00) - 자본, 잔존만기 1년 초과하는 은행채 및 차입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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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 고객이 은행에 맡긴돈, 즉 예.적금 등은 은행의 입장에서 보면 부채가 됩니다.
따라서 은행의 유동성 측면에서는(은행경영 측면에서는) 고객에게 빨리 돌려줘야 하는 돈(단기예.적금 등)은
안정성이 떨어집니다. 더불어 예.적금 같은 고객이 맡긴돈이 아닌 은행 자체에서 조달한 자금인
CD(양도성예금증서), 은행채, 콜머니(다른은행에게 빌린돈) 같은 시장성수신 항목 중에서도
잔존만기가 짧은 것은(1년 이내) 안정성이 떨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 한마디로 은행 입장에서는
빨리 돌려줘야(갚아야) 하는 상품일수록 안정성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동성을 평가할 때, 은행이 보유한 많은 자산항목 중에서는 무엇보다도 빚을 갚기위해
자산을 당장 현금으로 만들기 쉬운 자산들이 우수한 자산이라고 할수 있을 것입니다. 즉
"현금화 가능성이 높은 자산"일수록 좋은 평가를 받을수 있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LMI 자료에서 가중치가 가장 높은 자산항목 중에서 콜론이 보입니다. 이것은 예를들면,
우리은행이 국민은행에게 오늘(2019년 1월16일) 하루동안 1억원을 빌려주었다면,
우리은행 입장에서는 국민은행에게 내일(1월17일) 받을 돈인 대출채권, 즉 자산인 것입니다.
하지만 국민은행 입장에서는 내일(1월17일) 우리은행에게 반드시 갚아야할 돈(부채)인 것입니다.
이렇게 금융기관끼리의 자금거래를 콜거래 라고 하는데, 보통은 1일물(하루) 거래가 대부분입니다.
참고로 돈을 빌려주는 우리은행을 콜론[call loan] 이라고 하고, 돈을 빌리게 되는 국민은행을
콜머니[call money] 라고 합니다. ... 그리고 콜거래에 적용하는 금리를 바로 "콜금리"라고 합니다.
콜거래는 대부분 1일물(하루짜리거래) 거래이기 때문에 위 자료에서도 자산항목(콜론)에서는
거의 현금과 같은 가중치를 부여하고 있고, 부채항목(콜머니)에서도 당장 갚아야할 돈이기 때문에
가장높은 가중치가 부여되고 있습니다.

상식적으로도 빚(부채)은 적으면 적을수록 좋은 것이고, 자산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겁니다.
그래서 부채항목 중에서는 안정성이 떨어지는 항목들에게 좀더 많은 가중치를 부여하고,
자산은 현금화 가능성이 높은 항목들에게 높은 가중치를 부여해서 기존의 단순했던
유동성비율(유동자산/유동부채)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LMI(유동성불일치 지표)를 활용하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은행들의 자산과 부채항목에서 개별 항목들이 어떤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만
잘 살펴보아도 현재의 금융시장 상황(특히 돈의 장단기 흐름)의 감을 잡을수 있습니다. 예를들면,
2008년 금융위기 이전까지는 부동산 시장의 활황으로 CD나 은행채, 1년미만의 RP(환매조건부채권) 등의
시장성수신 등은 꾸준히 증가했으나 위기이후 증가세(비중)는 둔화되었습니다. ...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은행들이 시장성수신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위기상황에서는 대응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진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 따라서 은행들의 시장성수신 규모(비중)가 증가세를 나타낸다면
가계는 되도록이면 현금 보유 비중을 늘리는 것이 좋습니다. ~ 왜냐하면 은행들의 시장성수신에는
위기시 은행의 유동성 위기를 가속화시키는 내부적 요인이 숨어있기 때문입니다.

일반 국민들의 저축과는 달리 시장성수신에는 금리 외에 "유동성프리미엄"이 포함됩니다.
2008년 금융위기때 이 '유동성 프리미엄'이 급격히 상승하는 모습을 보여줬는데 ... 예를들면 이런 것입니다.

@ 은행(은행채 발행): "우리가 지금 돈이 조금 필요한데, 이자 5% 줄테니 1억원만 빌려줘라!"
@ 투자자: "야! ~니들은 고객이 맡긴 돈으로 이자놀이 하면 되지, 뭔 돈이 또 필요하냐?"
@ 은행: "고객돈 말고, 따로 돈이 조금더 필요해서 그래! ~ 우리 채권좀 매입해줘라!"
@ 투자자: "니들 소문이 안좋던데 ... 그럼 이자 5% 이외에 추가로 2% 더 줘라(유동성프리미엄)"

이렇게 시장성수신에는 금리 이외에 유동성 프리미엄이 포함되기 때문에, 위기 상황이 발생한다면
유동성 프리미엄은 점점 높아지게 됩니다. 이것은 은행의 자금 재조달위험(refinancing risk)이 수반되어
위기대응 능력이 떨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위 사례에서 투자자는 금리5%와 유동성프리미엄 2%를
추가로 요구하면서 총 7%의 금리를 원하고 있는데, 만약 채권만기가 도래할 즈음에 서브프라임같은 갑작스런
위기상황이 발생하게 된다면, 은행은 투자자에게 7%이자를 포함해 투자원금을 돌려줘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이때 은행자금사정이 어려워 채권을 신규발행해서 상환하려 한다면, 이때에는 위기상황 이므로
금리도 5% 수준에서 조금더 올라가겠지만, 무엇보다도 유동성 프리미엄이 더 급격하게 상승해 기존 2% 수준이 아닌,
4%, 5%가 될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 이것은 결국 은행의 자금 재조달위험(refinancing risk)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위기의 징후가 보인다면, 은행 입장에서는 디레버리징(Deleveraging 부채축소)이나
자금 재조달리스크를 낮추기 위해 가장 먼저 LMI 지표 조정에 들어갑니다. 쉽게 말해 현금화 하기 어려운,
즉 LMI 자산항목 지표상에서 가중치가 낮은 항목 위주로 정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국채, 콜론 등은 금융시장에서
거의 현금과 동등한 대우를 받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지만(@ 손해 안보고 원금 회수 가능),
주식이나 주택담보대출 같은 경우는 주가하락, 고객의 연체나 담보가치 하락 등의 리스크가 존재하기 떄문에
은행 입장에서는 하루라도 빨리 현금화 시도를 하기 때문입니다. ... 흔히 "은행이 시중의 돈 줄을 죈다!"는 의미에는
바로 이런 메커니즘이 숨어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 그리고 만약 은행 자체적으로 해결이 어렵다면
정부가 나서는데 ... 이때에 가장 고전적이고 대표적인 수법(유인정책)이 바로 가계부문의 돈을
은행에 장기로 예치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 기술적으로는 특정 상품에 비과세 혜택을 주는 대신
의무예치기간 설정 하는 제약을 두고(@ 은행에 장기로 돈 예금하면 비과세 혜택줄께!),
은행에게는 그 특정상품에 대한 지준율을 낮춰주는 것입니다. ... 그러면 시장에 돈이 풀리면서
조금은 숨통이 트입니다!




[@ 통계와 자료는 한국은행을 참조했습니다.
짧게 얘기하려 했는데 또 길어졌습니다. 죄송합니다.
오늘도 미세먼지가 많다고 하는데 ~ 다들 건강 잘 챙기십시오]

2019년 1월 8일 화요일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다는 것에 관하여 [by 물파스]

[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다는 것에 관하여 ]


최초의 순간 ~ '나의 삶' 이라는 발주처로부터 부여받은 첫 번째 임무는
다름 아닌 고독입니다. 그래서 고독은 '본인 삶'이라는 원청이 스스로에게 부여한 영원의 책무입니다.

[◆ 한 번도 젖을 먹어 본 적이 없는 아기를 상상해 보라
배가 고프게 되고 그 아기는 무엇인가를 마음에 그리려 하고 있다.
그 아기는 욕구로부터 만족의 근원을 창조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그 아기가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그 이전의
경험이 없다. 그 순간에 엄마가, 아기가 무엇인가를 기대하려고
하는 곳에 젖가슴을 갖다 놓는다면, 그리고 유아가 오랫동안
입과 손으로 또한 후각으로 볼록한 젖가슴을 느낄 수 있다면,
그 아기는 거기서 발견된 것을 바로 자기가 "창조"한 것으로 경험한다.
- (울타리와 공간. 59페이지 / 마델레인 데이비스/ 한국심리치료연구소) ]

'울타리와 공간'은 세계적인 정신분석학자 도널드 위니캇(Donald W. Winnicott, 1896-1971)의
이론을 설명한 책입니다. 프로이트 이후 가장 사랑받는 정신분석학자라는 위니캇은 한 개인의
삶의 타임라인에서 특히 유아기의 중요성을 많이 강조한 정신분석학자였습니다.

아기는 자신의 욕구와 탐욕이 엄마의 젖가슴이라는 실재와 만나면 냄새와 맛, 촉감 등을
어딘가에 기록함과 동시에 그 욕구와 탐욕의 충족을 아기 자신이 창조한 것이라는 환상을 갖게 됩니다.
이후 아기는 엄마에게서 젖을 떼기 전까지 수천 번 외적 실재에 대한 소개를 받습니다.(젖과 젖가슴의 경험)
이 과정에서 아기는 수천 번 자신이 원하던 것을 창조하고, 그렇게 새로운 창조 때마다
실재(엄마의 젖가슴)가 그곳에 항상 존재한다는 걸 느끼게 됩니다. 한마디로 세상(실제 세계)은
아기 자신이 원하고 필요로 하는 것이 언제나 존재하는 공간임을 자각하게 되는 것이죠. 그 결과 아기는
내적 실재(욕구, 탐욕)와 외적 실재(엄마의 젖가슴) 사이에, 그리고 타고난 근원적 창조성과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는 일반적 세상 사이에는 소위 '살아있는 관계'가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세상(현실)은 여백 없이 타인과의 소통과 교감으로만 가득 채워져 있는 숨 막히는 공간인 것입니다.
이쯤 되면 아기가 인식하는 세상에는 '고독'의 의미가 부여될 수 없습니다. ... 다만 아기가 최초로
엄마의 젖가슴을 경험하기 바로 이전의 상황이 아기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경험하는 고독의 원초적
의미인 것입니다.

성인이 되기 전, 우리는 많은 종류의 어른과 제도로부터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며
배려와 양보라는 긍정의 메시지를 삶의 심연에 단단히 내면화하기를 끊임없이 강요받습니다.
성인이 된 이후로 ... 우리는 다시 수많은 사회로부터 원만한 대인관계와 융통성 같은 처세의 달관을
요구당하며 '정치적 인간되기'를 부지런히 ~ 참으로 부지런히 시도합니다.

'정치적 인간되기'는 사실은 '수직형 인간' 또는 '체제 순응형 인간'의 다른 이름입니다.
그리고 사회는 우리에게 그런 인간형이 바로 어른의 전범(典範)이라 반복하여 강조합니다.
결국 고독을 부여한 최초 삶의 원청은 '현실'이라는 군락에서 우리 모두가 고독을 잊고
체제 순응적으로 아름답게 꽃피우기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에, 그래서 고독은 타인과의 교감과
소통에 의해 시나브로 파괴되어야 할 하청(현실적 삶)의 거친 책무로 재정의 됩니다.

사르트르의 말처럼 우리가 관계 맺기를 시도하는 모든 타인은 언제든 지옥의 조건으로
변할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보편적으로 사람이 무서워지면 관계는 지옥으로 향합니다. 때문에
타인과의 소통과 교감이라는 하청의 책무는 지옥 속에서 차갑게 녹아 흐르는 고독의 증발을
목격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운 좋게 만나는 '고독'이라는 상태는 지옥을 벗어나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를 선물하기도 합니다.

타인을 향해 허리를 90도로 굽혀야 합니다.
타인의 멱살을 잡고 욕설을 퍼붓기도 합니다.
타인의 만족을 위해 노래 부르며 역겨운 춤을 춰야 할 때도 있습니다.
타인의 성공담과 무용담에 기계적 감탄사를 연발하기도 합니다.
타인의 가족이 나의 가족보다 중요할 때가 있습니다.
타인은 소통과 교감의 대상이 아니라 형식과 절차의 대상이 된지 오래입니다.

타인과의 소통과 교감이라는 것들의 정체는 대개는 바로 이런 지옥의 조건 속에서 성립됩니다.
이곳에서 타인들은 구체적 신화를 만듭니다. ... '성공의 신화', '부자의 신화', '정치의 신화',
'아파트 신화', '창업의 신화' ... 이렇게 생산된 군락의 신화들은 지옥의 조건을 강화하고, 그래서
소통과 교감의 장막 아래는 시기와 질투, 증오와 혐오로 점철된 뜨거운 분열이 조용하고 위태롭게 흐릅니다.
이러한 이유로 현실은 우리에게 굴복을 요구하고, 저항을 부추기며, 자신을 위선으로 포장하라
유혹적으로 속삭입니다. 그것만이 현실의 군락에서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가장 합리적 방법이며,
그래야만 소통과 교감에 나름의 명분과 정당성이 확보되기 때문입니다. ... 더불어 마르크스는
<"의식이 존재를 결정하는 게 아니라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 라는 섬뜩한 통찰로 이를 증명합니다.

고독은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혼자 있는 것'과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독방에 갇힌 죄수는 혼자가 되지만, 어쩌면 그는 홀로 있는 걸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즉
'홀수 있을 수 있는 능력'이 부재한 죄수일지도 모릅니다. 이때에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
다시 말해 <고독을 즐길 수 있는 능력>이 힘을 발휘합니다.

체제 순응형 인간은 군락에서의 추방이 두려운 자들입니다. 추방이 두려운 자들은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한 자들입니다. 결국 고독을 즐길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한 자들의 최선은 본인 삶의
대부분을 지옥의 조건 속에서 부지런히 ~ 참으로 부지런히 원만한 대인관계와 처세의 달관을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탐구하는 일 만큼이나 섹스(S.ex)가 중요하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타인과의 소통과 교감만큼이나 <고독을 즐기는 것>이 삶에서 꽤나 의미가 있고, 또한
한번은 본인 인생에서 반드시 필요한 책무라는 사실에는 관심이 덜합니다. ... 우리에게 고독이
필요한 이유는 현실의 군락에서 의무적으로 체제 순응적 꽃을 피우려 노력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 === ===

[◆ 폐암으로 죽은 내 주인 여자는 유언 대신 침을 뱉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싶을 때마다 나는 노랗고 끈적끈적한
그 타액을 떠올린다. ~ (중략) ~ 침은 야성으로 빛나며 자유라고 외쳐댔다.
- 박판식. <서광> (시작, 2005년 여름호) ]

=== === ===

죽어가는 이들은 모두가 외롭습니다. ... 평론가들은 박판식의 시에서 몽환과 허무를 보았지만,
나는 진정한 자유를 품고 있는 고독의 극단을 봅니다. 고독하게 태어나서 고독하게 죽어갈 때
유언이라는 마지막 소통의 창구를 초월하며 여자는 침을 뱉습니다. ... 그리고 시의 마지막 구절
'침은 야성으로 빛나며 자유라고 외쳐댔다'

고독이 ... 그리고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이 극단에 이르면, 단 한 방울의 침으로도 자유를
만끽할 수 있습니다. 침은 날카롭게 이미지화되어 자기를 가둔 세계를 꿰뚫고 앞으로 전진 하려는
역동적 욕망을 그려냅니다. 그리고 이 역동성은 <사유의 전진>으로 이어집니다. ... 이는 마치
헤세의 데미안에서 자신의 세계를 뚫고 나오려는 알속의 새의 몸부림과 유사합니다. 진정한 자유를
얻으려면 알 속의 새는 자신의 껍질(기존의 인식 틀)을 뚫고 나와 새로운 세계와 조우해야 합니다.
설령 그것이 죽어가는 순간일지라도 말이죠. 그래서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다는 건,
군락에서 꽃을 피우는 것보다 더 가치 있고 빛나고 또 의미 있는 일입니다.

[◆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 – (데미안. 123페이지/ 헤르만 헤세/ 민음사) ]

타인과의 소통과 교감의 풍요는 간혹 잘 된 민주주의를 평가하는 잣대로 사용됩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민주주의의 끄트머리에서 고독은 자신의 농도를 더해갑니다. 때문에 한편으로
잘 된 민주주의는 고독이라는 소외된 공신에게 큰 빚을 졌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군락에서 체제 순응적으로 꽃을 피우기 위해 ... 그리고 잘 된 민주주의를 위해
2018년 마지막 공간에서 나는 소용이 없는 몇 개의 전화번호를 지우고 있습니다.
이렇게 세밑이 바뀔 때마다 계속해서 몇 개의 번호를 지우다보면, 어떤 세밑 즈음에 다다르면
더 이상 지울 번호가 없는 순간이 찾아올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 그럼 그때엔 나는 진정으로
완벽히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 인간이 되어있을까 참으로 궁금합니다. ... 물론 이러한
물리적이며 자발적인 망각의 행위가 '자유'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나를 포함, 모두는 서툴게 지쳐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말하고 싶습니다.

< 타인이 곧 지옥이다 – 사르트르(Jean-Paul Sartre) >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건, 그래서 고독을 즐길 수 있다는 건
타인과의 소통과 교감 능력이 부족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당연히 소통과 교감을 부정하지도 않습니다.
소통과 교감 능력이 부족한 자는 단순히 공감의 수치가 낮은 자들일 뿐입니다. ... 때문에
사르트르의 말이 진리라면 ~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 즉 고독을 소유할 수 있다는 건
한 개인에게는 아주 큰 축복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독은 타인과의 소통과 교감을 진즉이 초월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고독은 상시적으로 지옥을 견디는 힘이 내재된 상태인 것입니다.
위니캇의 설명처럼 한 번도 엄마 젖을 경험한 적이 없는 아기는 <원초적 고독상태>에 놓여있는 것입니다.
아기의 고독상태는 모든 외적 실재(타인)와의 관계를 새롭게 창조할 수 있습니다. 교감과 소통을 넘고,
타인을 초월해 이 모든 것을 아기 자신의 주관대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것입니다.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은 바로 이러한 아기의 <원초적 고독상태>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어느새 나는 2018년 마지막 공간에 서있는 신세입니다. ... 또한 <원초적 고독상태>를 추구할 만한
처지가 안 되다보니, 그래서 죽는 순간 유언 대신 야성으로 침 뱉기를 통해 자유를 갈구하는 꿈을 꿔 봅니다.
삶에서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다는 것이 비록 쉬운 일은 아니지만, 소통과 교감능력을 배양하는
현실의 삶(군락의 삶)이 수고스럽고 또 꾸준하게 우리 내면을 통해 삶의 민낯을 지옥의 메시지로 바꿔 전해주는
사려 깊은 친절함을 외면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체제 순응형 인간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2018년 한 해 동안, <원초적 고독상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삶의 공백을
이슈인이라는 풍요로운 군락에서 놀다가는 것도 하청의 큰 복이라 생각됩니다. ~ 아무튼 잘 놀다 갑니다!

2019년 기해년(己亥年)은 ~ 이 곳을 스쳐가는 모든 인연들에게
주체할수 없는 행복이 넘치는 한 해가 되기를 간절히 기원해 봅니다. 더불어
모두가 '홀로 있을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는 한 해가 되기를 추가로 기원해 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부동산과 경제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