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다는 것에 관하여 ]
최초의 순간 ~ '나의 삶' 이라는 발주처로부터 부여받은 첫 번째 임무는
다름 아닌 고독입니다. 그래서 고독은 '본인 삶'이라는 원청이 스스로에게 부여한 영원의 책무입니다.
[◆ 한 번도 젖을 먹어 본 적이 없는 아기를 상상해 보라
배가 고프게 되고 그 아기는 무엇인가를 마음에 그리려 하고 있다.
그 아기는 욕구로부터 만족의 근원을 창조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그 아기가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그 이전의
경험이 없다. 그 순간에 엄마가, 아기가 무엇인가를 기대하려고
하는 곳에 젖가슴을 갖다 놓는다면, 그리고 유아가 오랫동안
입과 손으로 또한 후각으로 볼록한 젖가슴을 느낄 수 있다면,
그 아기는 거기서 발견된 것을 바로 자기가 "창조"한 것으로 경험한다.
- (울타리와 공간. 59페이지 / 마델레인 데이비스/ 한국심리치료연구소) ]
'울타리와 공간'은 세계적인 정신분석학자 도널드 위니캇(Donald W. Winnicott, 1896-1971)의
이론을 설명한 책입니다. 프로이트 이후 가장 사랑받는 정신분석학자라는 위니캇은 한 개인의
삶의 타임라인에서 특히 유아기의 중요성을 많이 강조한 정신분석학자였습니다.
아기는 자신의 욕구와 탐욕이 엄마의 젖가슴이라는 실재와 만나면 냄새와 맛, 촉감 등을
어딘가에 기록함과 동시에 그 욕구와 탐욕의 충족을 아기 자신이 창조한 것이라는 환상을 갖게 됩니다.
이후 아기는 엄마에게서 젖을 떼기 전까지 수천 번 외적 실재에 대한 소개를 받습니다.(젖과 젖가슴의 경험)
이 과정에서 아기는 수천 번 자신이 원하던 것을 창조하고, 그렇게 새로운 창조 때마다
실재(엄마의 젖가슴)가 그곳에 항상 존재한다는 걸 느끼게 됩니다. 한마디로 세상(실제 세계)은
아기 자신이 원하고 필요로 하는 것이 언제나 존재하는 공간임을 자각하게 되는 것이죠. 그 결과 아기는
내적 실재(욕구, 탐욕)와 외적 실재(엄마의 젖가슴) 사이에, 그리고 타고난 근원적 창조성과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는 일반적 세상 사이에는 소위 '살아있는 관계'가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세상(현실)은 여백 없이 타인과의 소통과 교감으로만 가득 채워져 있는 숨 막히는 공간인 것입니다.
이쯤 되면 아기가 인식하는 세상에는 '고독'의 의미가 부여될 수 없습니다. ... 다만 아기가 최초로
엄마의 젖가슴을 경험하기 바로 이전의 상황이 아기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경험하는 고독의 원초적
의미인 것입니다.
성인이 되기 전, 우리는 많은 종류의 어른과 제도로부터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며
배려와 양보라는 긍정의 메시지를 삶의 심연에 단단히 내면화하기를 끊임없이 강요받습니다.
성인이 된 이후로 ... 우리는 다시 수많은 사회로부터 원만한 대인관계와 융통성 같은 처세의 달관을
요구당하며 '정치적 인간되기'를 부지런히 ~ 참으로 부지런히 시도합니다.
'정치적 인간되기'는 사실은 '수직형 인간' 또는 '체제 순응형 인간'의 다른 이름입니다.
그리고 사회는 우리에게 그런 인간형이 바로 어른의 전범(典範)이라 반복하여 강조합니다.
결국 고독을 부여한 최초 삶의 원청은 '현실'이라는 군락에서 우리 모두가 고독을 잊고
체제 순응적으로 아름답게 꽃피우기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에, 그래서 고독은 타인과의 교감과
소통에 의해 시나브로 파괴되어야 할 하청(현실적 삶)의 거친 책무로 재정의 됩니다.
사르트르의 말처럼 우리가 관계 맺기를 시도하는 모든 타인은 언제든 지옥의 조건으로
변할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보편적으로 사람이 무서워지면 관계는 지옥으로 향합니다. 때문에
타인과의 소통과 교감이라는 하청의 책무는 지옥 속에서 차갑게 녹아 흐르는 고독의 증발을
목격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운 좋게 만나는 '고독'이라는 상태는 지옥을 벗어나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를 선물하기도 합니다.
타인을 향해 허리를 90도로 굽혀야 합니다.
타인의 멱살을 잡고 욕설을 퍼붓기도 합니다.
타인의 만족을 위해 노래 부르며 역겨운 춤을 춰야 할 때도 있습니다.
타인의 성공담과 무용담에 기계적 감탄사를 연발하기도 합니다.
타인의 가족이 나의 가족보다 중요할 때가 있습니다.
타인은 소통과 교감의 대상이 아니라 형식과 절차의 대상이 된지 오래입니다.
타인과의 소통과 교감이라는 것들의 정체는 대개는 바로 이런 지옥의 조건 속에서 성립됩니다.
이곳에서 타인들은 구체적 신화를 만듭니다. ... '성공의 신화', '부자의 신화', '정치의 신화',
'아파트 신화', '창업의 신화' ... 이렇게 생산된 군락의 신화들은 지옥의 조건을 강화하고, 그래서
소통과 교감의 장막 아래는 시기와 질투, 증오와 혐오로 점철된 뜨거운 분열이 조용하고 위태롭게 흐릅니다.
이러한 이유로 현실은 우리에게 굴복을 요구하고, 저항을 부추기며, 자신을 위선으로 포장하라
유혹적으로 속삭입니다. 그것만이 현실의 군락에서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가장 합리적 방법이며,
그래야만 소통과 교감에 나름의 명분과 정당성이 확보되기 때문입니다. ... 더불어 마르크스는
<"의식이 존재를 결정하는 게 아니라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 라는 섬뜩한 통찰로 이를 증명합니다.
고독은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혼자 있는 것'과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독방에 갇힌 죄수는 혼자가 되지만, 어쩌면 그는 홀로 있는 걸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즉
'홀수 있을 수 있는 능력'이 부재한 죄수일지도 모릅니다. 이때에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
다시 말해 <고독을 즐길 수 있는 능력>이 힘을 발휘합니다.
체제 순응형 인간은 군락에서의 추방이 두려운 자들입니다. 추방이 두려운 자들은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한 자들입니다. 결국 고독을 즐길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한 자들의 최선은 본인 삶의
대부분을 지옥의 조건 속에서 부지런히 ~ 참으로 부지런히 원만한 대인관계와 처세의 달관을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탐구하는 일 만큼이나 섹스(S.ex)가 중요하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타인과의 소통과 교감만큼이나 <고독을 즐기는 것>이 삶에서 꽤나 의미가 있고, 또한
한번은 본인 인생에서 반드시 필요한 책무라는 사실에는 관심이 덜합니다. ... 우리에게 고독이
필요한 이유는 현실의 군락에서 의무적으로 체제 순응적 꽃을 피우려 노력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 === ===
[◆ 폐암으로 죽은 내 주인 여자는 유언 대신 침을 뱉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싶을 때마다 나는 노랗고 끈적끈적한
그 타액을 떠올린다. ~ (중략) ~ 침은 야성으로 빛나며 자유라고 외쳐댔다.
- 박판식. <서광> (시작, 2005년 여름호) ]
=== === ===
죽어가는 이들은 모두가 외롭습니다. ... 평론가들은 박판식의 시에서 몽환과 허무를 보았지만,
나는 진정한 자유를 품고 있는 고독의 극단을 봅니다. 고독하게 태어나서 고독하게 죽어갈 때
유언이라는 마지막 소통의 창구를 초월하며 여자는 침을 뱉습니다. ... 그리고 시의 마지막 구절
'침은 야성으로 빛나며 자유라고 외쳐댔다'
고독이 ... 그리고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이 극단에 이르면, 단 한 방울의 침으로도 자유를
만끽할 수 있습니다. 침은 날카롭게 이미지화되어 자기를 가둔 세계를 꿰뚫고 앞으로 전진 하려는
역동적 욕망을 그려냅니다. 그리고 이 역동성은 <사유의 전진>으로 이어집니다. ... 이는 마치
헤세의 데미안에서 자신의 세계를 뚫고 나오려는 알속의 새의 몸부림과 유사합니다. 진정한 자유를
얻으려면 알 속의 새는 자신의 껍질(기존의 인식 틀)을 뚫고 나와 새로운 세계와 조우해야 합니다.
설령 그것이 죽어가는 순간일지라도 말이죠. 그래서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다는 건,
군락에서 꽃을 피우는 것보다 더 가치 있고 빛나고 또 의미 있는 일입니다.
[◆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 – (데미안. 123페이지/ 헤르만 헤세/ 민음사) ]
타인과의 소통과 교감의 풍요는 간혹 잘 된 민주주의를 평가하는 잣대로 사용됩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민주주의의 끄트머리에서 고독은 자신의 농도를 더해갑니다. 때문에 한편으로
잘 된 민주주의는 고독이라는 소외된 공신에게 큰 빚을 졌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군락에서 체제 순응적으로 꽃을 피우기 위해 ... 그리고 잘 된 민주주의를 위해
2018년 마지막 공간에서 나는 소용이 없는 몇 개의 전화번호를 지우고 있습니다.
이렇게 세밑이 바뀔 때마다 계속해서 몇 개의 번호를 지우다보면, 어떤 세밑 즈음에 다다르면
더 이상 지울 번호가 없는 순간이 찾아올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 그럼 그때엔 나는 진정으로
완벽히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 인간이 되어있을까 참으로 궁금합니다. ... 물론 이러한
물리적이며 자발적인 망각의 행위가 '자유'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나를 포함, 모두는 서툴게 지쳐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말하고 싶습니다.
< 타인이 곧 지옥이다 – 사르트르(Jean-Paul Sartre) >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건, 그래서 고독을 즐길 수 있다는 건
타인과의 소통과 교감 능력이 부족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당연히 소통과 교감을 부정하지도 않습니다.
소통과 교감 능력이 부족한 자는 단순히 공감의 수치가 낮은 자들일 뿐입니다. ... 때문에
사르트르의 말이 진리라면 ~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 즉 고독을 소유할 수 있다는 건
한 개인에게는 아주 큰 축복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독은 타인과의 소통과 교감을 진즉이 초월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고독은 상시적으로 지옥을 견디는 힘이 내재된 상태인 것입니다.
위니캇의 설명처럼 한 번도 엄마 젖을 경험한 적이 없는 아기는 <원초적 고독상태>에 놓여있는 것입니다.
아기의 고독상태는 모든 외적 실재(타인)와의 관계를 새롭게 창조할 수 있습니다. 교감과 소통을 넘고,
타인을 초월해 이 모든 것을 아기 자신의 주관대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것입니다.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은 바로 이러한 아기의 <원초적 고독상태>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어느새 나는 2018년 마지막 공간에 서있는 신세입니다. ... 또한 <원초적 고독상태>를 추구할 만한
처지가 안 되다보니, 그래서 죽는 순간 유언 대신 야성으로 침 뱉기를 통해 자유를 갈구하는 꿈을 꿔 봅니다.
삶에서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다는 것이 비록 쉬운 일은 아니지만, 소통과 교감능력을 배양하는
현실의 삶(군락의 삶)이 수고스럽고 또 꾸준하게 우리 내면을 통해 삶의 민낯을 지옥의 메시지로 바꿔 전해주는
사려 깊은 친절함을 외면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체제 순응형 인간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2018년 한 해 동안, <원초적 고독상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삶의 공백을
이슈인이라는 풍요로운 군락에서 놀다가는 것도 하청의 큰 복이라 생각됩니다. ~ 아무튼 잘 놀다 갑니다!
2019년 기해년(己亥年)은 ~ 이 곳을 스쳐가는 모든 인연들에게
주체할수 없는 행복이 넘치는 한 해가 되기를 간절히 기원해 봅니다. 더불어
모두가 '홀로 있을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는 한 해가 되기를 추가로 기원해 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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