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 29일 토요일

◆ ‘둘은 하나와 같다’ 라는 주장 [by. 물파스]

[◆ ‘둘은 하나와 같다’ 라는 주장]


(1) '우한폐렴' 걱정 말고 한국관광 즐기세요.
h ttps://www.sedaily.com/NewsView/1YXS8IM1WB

(2) "세금으로 마스크 중국에 전달?"...가짜뉴스 퍼트리는 정치권
h ttps://www.ytn.co.kr/_ln/0101_202002042129109510

(3) 중국서 메르스 치료받은 한국인, 수십억 물었다?
h ttps://news.v.daum.net/v/20200204210605832

(4) 文대통령, 참모들과 떡국 오찬…신종코로나 대응 논의
h ttps://news.nate.com/view/20200127n06814


분노와 혐오가 차고 넘치는 시기입니다. 그러나 그 근저에는 어떤 합당한 근거나 논리가 보이질
않습니다. ... 특히 사회상태의 용적이 분노와 혐오라는 일차원적 감정 배설로만 채워진다면, 사태의
외관은 물론 그 내부까지 모두 감정배설로 가득 차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우리 모두는 시나브로
“사회는 원래 그렇게 바라보는 것” 이라며 시선에 정당성을 부여하게 될 것입니다.

언론이 세팅한 아젠다(agenda)에 의해 사회는 ‘성찰’의 자리를 ‘분노와 혐오’에게 내주며 또 다른
분노와 혐오를 불러오는 사태에까지 다다랐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나타나는 분노와 혐오의 특징은
대상의 다양성이며 때로는 ‘분노와 혐오’ 자체가 목적인 경우도 많습니다. ... 오늘의 분노와 혐오는
오랜 시간이 요구되지 않는 즉흥성과 맹목성을 추종하기 때문에 휘발성이 강하지만, 동시에 출몰의
빈도 또한 높습니다. ~ ‘분노와 혐오’를 표출해야만 사태가 진실로 인정받는 시대. 그래서 우리 사회는
분별없는 분노와 혐오, 그로부터 유발되는 선명한 적(敵), 혹은 악(惡)의 출현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낍니다.
여기서 중요한건 ‘적(敵)’의 진위여부 보다 <신속하게 적(敵.惡)을 규정하는 일입니다.>

이렇게 즉흥성과 맹목성을 띤 휘발성 강한 ‘분노와 혐오’의 표출은 대개는 힘없고 무기력한 자들의
유일한 자신감입니다. 이들은 위기가 확산되고 증폭되어야만 안심이 되는, 아니 심지어 사회가 공황
상태에 빠져야만 새로운 희망이 도출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잃을 것 없는
힘없고 무기력한 자들은 공멸(共滅)에서 공포와 쾌락을 동시에 봅니다. 이들을 프랑스의 사회학자
‘귀스타브 르봉(Gustave Le Bon)’의 견해를 빌려 표현한다면 바로 <군중(Crowd)> 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분노와 혐오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나름의 품격이 있습니다.
분노와 혐오의 원인에 타당한 근거가 있거나 논리를 찾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군중(Crowd)’이 하는 일은
오로지 펄펄 끓어오르는 것이 전부입니다.

중국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세계는 연일 공포와 의심의 농도를 높여가며 많은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언론들은 앞다투어 확진자수와 동선, 사망자수 등을 발표하며 취재 경쟁을
벌이고 있고, 이때다 싶어 정치권은 전염병과 유권자 표심의 상관성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1) 신종 코로나 사태로 세계가 초비상 상황입니다. 우리 언론(서울경제)은 문체부 장관이(박양우)
‘우한폐렴 걱정 말고 한국 관광 즐기세요.’ 라는 발언을 했다며 속보를 내보냈습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고, 기자는 몇 시간 뒤 기사제목을 수정했습니다. ... 그러나 처음의
기사 내용은 이미 SNS와 수많은 블로그, 커뮤니티 등으로 급속히 퍼져나갔고 사람들은 정권의
무능과 무책임을 비난했습니다. ~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거나 굳이 이성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그냥 단순 상식선에서 보면 충분히 의심과 확인(Cross check)을 해야만 했던 기사였습니다. 하지만
대다수 네티즌(군중)들은 즉각적인 분노와 혐오를 표출하며 신속하게 적(敵)을 규정했습니다.

(2) 한국의 제1야당 대표가 직접 기자회견까지 해가며 정부를 비판한 내용입니다.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 ”마스크 대란 공포가 온 국민을 엄습하고 있습니다. 중국에 갖다 준
300만 개 마스크에 이어서 중국인 관광객의 마스크 싹쓸이 그리고 해외 반출에 우리 국민은
분개하고 있습니다.“> ~ ‘마스크 300만개’의 진실은 황교안 대표의 말과는 달랐습니다. 물품(마스크)은
'중국유학총교우회’와 '중국우한대총동문회'가 준비하고, 한국정부는 긴급 공수만 지원한다는 것이
진실이었습니다. 정치권의 가짜뉴스는 야당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이해찬 민주당 대표는 2차 감염자가
보건소 종사자라며 확인되지 않은 정보를 서둘러 발표하다 망신을 당했습니다. (YTN 뉴스 팩트체크)

(3) 2015년 메르스 사태 때 중국에서 치료받은 한국인이 수십억 원의 병원비를 물었다며, 우리도
현재 한국에 입원한 외국인(특히 중국인)에게 당연히 치료비를 받아야 한다며 많은 네티즌(군중)들이
한국 정부의 중국에 대한 태도(저자세)에 분노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가짜뉴스였고, 당시 중국 정부가
한국인 치료비 전액을 부담했다는 것이 사실로 밝혀졌습니다. 외국인 감염자가 치료비 부담 때문에
신고하기를 주저할까봐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국제적 방역공조 차원에서 치료비를 전액 부담한다고
합니다. (SBS 8시뉴스)

(4) 대통령이 설 연휴 마지막 날 참모들과 오찬 떡국을 먹고 신종 코로나 사태를 포함해 시급한
국정 현안에 대해 논의를 한다는 내용입니다. 저는 기사제목을 보자마자 어떤 댓글이 달릴지 충분히
예상이 됐습니다. ~ “이 시국에 떡국이 목에 넘어 가냐!”, “무능한 정부!”, “갈수록 비호감이네!” 등
이 내용은 ‘언론기사’ 라고 언급하는 것 자체가 너무도 부끄러운 대단히 저급한 내용의 기사(?)입니다.
‘떡국’은 식사 메뉴의 한 종류일 뿐입니다. “대통령이 참모들과 점심을 먹고 국정 현안을 논의했다”가
기사의 본질임에도(사실 이것도 기사로써의 가치는 없습니다. 대통령 스케줄의 단순 나열일 뿐이죠.)
언론사는 여기서 ‘점심’을 ‘떡국’으로 바꿈으로써 네티즌(군중)들의 즉각적 반응(분노,혐오)을 유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떡국은 설에 즐기는 대표적 음식으로 화목함, 한가함 등을 상징하는데,
초비상시국(신종코로나 사태)에 ‘떡국’이라는 단어를 기사 제목과 내용에 의도적으로 배치함으로써
군중(Crowd)을 펄펄 끓어오르게 만들려는 목적성이 매우 농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 둘은 하나와 같다. >

(X=Y) => X^2 = XY
=> X^2 - Y^2 = XY - Y^2
=> (X-Y)(X+Y) = Y(X-Y)
=> X+Y = Y
=> X+X = X
=> 2X = X
=> 2 = 1

(2X = X)를 만족하는 유일한 X값은 ‘0’입니다. ... 그리고 양변을 X로 나눠주면 <둘은 하나와 같다(2=1)> 라는
어처구니없는 명제가 성립됩니다. 하지만 수학은 ‘0’으로 나누는 걸 금지하고 있습니다.

수학에서 ‘나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를 들어, <사과 4개를 2로 나누다(4/2)> 라는 것은, 먼저 2개의 바구니(분모)를 준비하고
4개의 사과를 각각의 바구니에 2개씩 균등하게 배분하여 담는다는 뜻입니다. ~ 바구니 하나당
동일한 개수의 사과가 담겨지게 됩니다. <사과 10개를 5로 나누다(10/5)> 이 또한 마찬가지로
먼저 바구니(분모) 5개를 준비하고 각각의 바구니에 사과 2개씩을 균등하게 담으면 됩니다.
<사과 1개를 2로 나누다(1/2)> 마찬가지로 2개의 바구니를 준비합니다. 그리고 각각의 바구니에
균등하게 배분한 ‘반쪽(0.5)’ 짜리 사과를 담는다는 의미입니다. ... 그렇다면 <‘0’으로 나누다>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

@ 2로 나누다 = “사과를 균등하게 배분할 테니 바구니 2개를 준비하라”
@ 5로 나누다 = “사과를 균등하게 배분할 테니 바구니 5개를 준비하라”
@ 0으로 나누다 = “사과를 균등하게 배분할 테니 바구니를 준비하지 마라!”

결국 수학에서 ‘나눈다(÷)’는 의미는 “균등하게 배분 하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며, 그렇게
균등하게 배분된 각각의 몫을 준비된 바구니에 담는 행위인 것입니다. ... 그런데 ‘0’으로 나눈다는 것은
<“균등하게 배분한 각각의 몫을 담아야겠으니 바구니는 준비하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균등하게 배분은 하는데 바구니는 준비하기 싫다!”, 아니 <“바구니는 준비할 수 없다”>가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모순>이라 하며, 모순은 두 가지 사실, 즉 <균등한 배분행위>와 <바구니 준비하지 않기>라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사실이 공존하게 되는 것입니다. ... 따라서 수학은 ‘0’으로 나누는 걸 금지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2X = X)를 만족하는 유일한 X값인 ‘0’으로 양변을 나누는 것은 불가능하며(불능)
따라서 (2 = 1) 이라는 명제도 성립될 수 없는 것입니다.

언론은 X값이 ‘0’이라는 사실을 절대로 말해주지 않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침착하고 차분히 사태를
바라보며 ‘분노와 혐오’의 타당성을 스스로 찾아야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언론이 세팅해
놓은 아젠다, 즉 <2X = X>에서 양변을 X로 나눠서 (2 = 1) 된다는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둘은 하나와 같다”>는 어처구니없는 결론을 맹목적으로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 “시민은 뉴스가 자신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생각을 강화해주길 기대하지 말고
뉴스를 열린 마음으로 접근할 의무가 있다.“ - (저널리즘의 기본원칙 中/ 빌 코바치)

기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거치게 된다는 저널리즘의 대부 ‘빌 코바치(Bill Kovach)’는 언론 보도의
투명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뉴스를 접하는 시민에게도 일정부분 의무를 부여합니다. 기자들은 시민들이
궁금해 하는 정보를 단순 제공하는데 그치지 말고, 자신들이 어떤 원칙에 의해 일하는지도 시민들에게
반드시 이해시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반면 시민들 또한 편견을 버리고 사회의 지적 구성원이 되기 위한 능력을
스스로 갖춰야 한다고 하면서 언론(기자)이 어떤 방식으로 일하는지 꾸준히 살펴봐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론 보도가 정직하게(투명성) 이루어졌는지, 뉴스가 어떻게, 또 어떠한 이유로
그러한 결론에 도달했는지를 반드시 확인하는 것이 시민의 의무라고 말합니다. 더불어 언론에게 명백한
근거제시를 동시에 요구할 수 있는 시민의 권리를 성실히 행사하라고 주장합니다.

[ ◆ “기사는 정보의 취재원과 지식의 근거를 투명하게 밝혀야 한다.
기사의 독자 관련성과 함의는 기사가 제시되는 방식에 의해 명백히 드러나야 한다.
답을 찾지 못한 중요한 질문도 언급해야 한다. 사용된 다른 쪽 입장들은 각자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도록 기회가 보장되어야 한다. 지지를 덜 받는 쪽도 마찬가지다. 기사가 논쟁을
유발하게 된다면, 후속 보도를 해야 한다. 다른 기사들이 시간을 두고 공적인 토론을
지속하게 되면 진실이 드러날 수도 있다. ... 뉴스는 우리의 흥미를 끄는 데서 나아가
더 생각하게 해야 한다.“ - (저널리즘의 기본원칙. 398페이지/ 빌 코바치/ 한국언론진흥재단) ]

현대 언론의 속성 중 가장 큰 특징이 바로 ‘진실’ 보다는 ‘방향’을 설정한다는 점입니다.
진실을 말하는 언론보다 방향을 제시하는 언론이 많아지면, ‘분노와 혐오’에 타당한 근거와 논리가
부족해지며 즉흥성과 맹목성을 추종하게 됩니다. ~ 여기서 잠시 남성에게만 해당되는 질문을 하나 해봅니다.

“본인은 페니스(penis)를 주로 어느 쪽 방향에 놓습니까?”

남자들의 인생에서는 한 번 정도 있을까 말까한 매우 희귀한 질문이지만, 답은 의외로 ‘좌.우’ 라는
가장 흔한 패턴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물론 ‘정중앙’ 이라는 희귀한 답이 존재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대개는 좌.우 어느 한쪽에 편안하게 자리한 경우가 대부분일 것입니다. 아무튼 지금
이러한 질문은 굉장히 쓸모없는 질문 같지만, 공간을 맞춤 양복점으로 이동한다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영국의 전통 있는 테일러샵(Tailorshop)에서는 고객의 페니스 위치를 묻는 것이 당연하고도 일반화된
질문이라고 합니다. ... 재단사 입장에서는 자신의 기술력과 상품력을 높일 수 있는 효과적인 마케팅
전략이며, 고객은 ‘페니스의 부풀림까지 계산에 넣는 매우 정교하고 섬세한 서비스를 받고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국에는 시민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페니스(penis)가 위치할 공간을 자신들이 마음대로 규정하는
언론들이 상당수 존재합니다. 때문에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페니스는 이미 그들이
설정한 위치에 놓여있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 물론 언론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맞춤 정장을
차려입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페니스를 그들(언론)이 설정한 공간에 쉽게 가져다 놓아서도 안 되지만,
평생을 한 방향에만 페니스를 놓아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SNS, 1인 미디어, (파워)블로그, 공동커뮤니티 등 ... 이제는 전 국민 누구나가 정보의 생산자가
될 수 있는, 그야말로 언론의 대변혁기라 생각됩니다. 따라서 지금까지 진실과 정보를 독점했던
기존의 언론들은 더 이상 게이트키퍼(gatekeeper)로서의 언론권력을 향유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언론사가 자신들의 저울을 사용해 독단적으로 진실의 무게를 측정하고 그 가치를 판별하는 시대가
아니라는 거죠. 이제 언론은 더 이상 진실을 독점할 수없는 시대가 됐습니다.

이는 특히 정치영역에서부터 변화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대통령 및 국회의원, 자치단체장들은 거의
대부분 자신의 개인 SNS 계정이 존재하는 시대입니다. 미국 대통령 트럼프는 자신의 견해와 의지를
기자를 통해 국민들에게 간접적으로 전하기보다, 트윗을 통해 본인이 직접 국민들에게 배달을 하는
사례가 더 많습니다. 이는 미국만의 현상이 아니며 이미 전 세계 모든 정치영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보편적 흐름입니다. 심지어 이슬람 급진 테러단체인 IS 마저도 자신들의 사상과 신념을 퍼뜨리는데
소셜미디어를 활용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쌍방향 직접적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는 시대입니다. 언론이 진실을 독점하는 시대는
서서히 저물고 있으며, 디지털 미디어 시대를 맞이하여 누구나 저널리스트가 될 수 있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언론사 홈페이지에서 기사를 읽는 사람보다 포털, 페이스북, 트위터, 커뮤니티 등에 공유된
기사를 클릭하는 사례가 더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 그렇다 하더라도 기존의 언론 권력은 계속해서
<“둘은 하나와 같다”>를 주장하고 있고, 이에 대해 상당수 시민들은 여전히 파블로프의 개처럼 즉각적으로
반응합니다.

다양한 장치를 동원하여 <게이트키퍼(gatekeeper.편집권력)>로서의 힘을 영구적으로 유지하고픈
기존의 언론권력은 시민들이 조금이라도 방심할라치면 어느새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시민들의 페니스 위치를
자신들 마음대로 설정하려 합니다. ... 결국 우리는 앞서 빌 코바치(Bill Kovach)의 명령대로 시민의 의무와
성실한 권리행사를 통해 언론을 바로 보는 능력을 스스로 키워야 합니다.




[@ 신종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이 하루가 다르게 무섭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 와중에 확인되지 않은 정보들의 유통은 시민들의 불안과 스트레스를 가중시키고 있습니다.
~ 건강들 잘 챙기시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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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

2번 ㅡ 민간업체라는 이름의 관변단체임.
단체장은 박정이라는 파주 국회의원이며
우한대학교 졸업자 대표이며
6.25때 적군이었던 인민군의 넋을 기리는 행사에
참여하여 논란이 되었음.

1번의 상황은 내가 잘 모르나,
1번과 비슷한 상황이 있었음.
후베이성 입국 금지 발표한 후 얼마되지않아
정부는 입국 금지를 입국 금지 검토로 말바꿈 함.

물파스님 진실은 가린다고 가려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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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

님의 지적처럼 ~ 2번은 논쟁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다.
다만 박정 의원이 여당 출신이라서 그가 속한 단체를 관변으로 단정짓는건
비약이라 생각됩니다. 또한 2번 내용은 최초 언론 보도이후 YTN이 다시 후속보도 형식으로
팩트체크를 했던 상황이므로, 나름 검증과정(Cross check)을 거쳤다고 저 스스로 판단했습니다.

'중국우한대총동문회'는 정부의 공식발표로만 보면 민간의 외관을 갖춘 단체지만
정황상으로 보면 단체의 본질이 님 지적대로 관(官)의 느낌이 농후하다 생각되네요.
만약 저 단체의 진짜 정체가 '관변'이라면 저 역시 쉽게 펄펄 끓어오르는 '군중'의 하나였음이
증명되는 것일 겁니다. ~ 그리고 이 글이 전하는 핵심 메시지를 저 물파스가 실증하는 셈이 되겠군요.

참고로 각자 언론을 바라볼때 즉흥적 반응보다는 좀 더 중심을 잡고 균형있게 바라보자는 취지에서
이 글을 올린 것입니다. ~ 조국 사태때 '인간 동일성'을 얘기하면서, 저는 조국이 원래부터
동일한 정체성(말과 행동이 다른 인간)을 가진 인물이라고 비판했었습니다. ~ 트위터를 통해
조국이 보여준 정의롭던 말과 실제 삶에서 드러난 그의 행동의 괴리와 간극이 너무나 컸음에도
여전히 그를 추종하는 집단들의 맹목성을 보면서 ... 우리가 무엇을 가장 크게 염려하고 경계해야 하는지를
이 글을 통해 알리고 싶었습니다.

저는 대깨문이나 일베같은 '극단'을 매우 싫어하는 사람이며,
'비상식'을 경계하고 '상식'을 추종하는 굉장히 단순한 인간임을 다시한번 강조합니다.

좋은 지적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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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에관한생각

참 동감하는 이야기입니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단순한 결론을 내려버리면 편해서 그런걸까요? 때로는 스스로도 짐짓 그런 생각을 갖고 있어서 놀랄때가 많습니다.
이제는 기사제목만 봐도 댓글 내용이 예상됩니다 온통 극단적인 의견(독사) 속에서 바로 보고 생각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맛이 너무 순해서 잘 먹혀들지도 않구요. 윗 댓글만해도 나름 네임드이신 물파스님에게도 단순한 편가르기로 결론 내려버리는 모습을 보이는게 안타깝습니다. 그래도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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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진  
       
물파스님, 먼저 항상 좋은 글 공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수학적 검증을 통해 대중은 매체를 통해 자기 생각을
강화시키는 것이아니라 중간의 입장에서 열린마음으로
받아드린다는건 정말 좋은 말씀입니다.
오늘도 또 하나 배우고 갑니다.
허나, 2번 항목은 황교안 대표가 자극적으로 선동한 감은
분명 있지만 마스크를 배포한 해당 단체의 수장의
인물됨과 과거행동의 결과를 보고도 정부가 긴급상황이란
명목하에 자국민이 우선이 아니라 중국으로 제품 출하승인
을 한다는건 오히려 황대표의 가짜뉴스보다 더 가짜뉴스
처럼 와 닿네요. 현정부를 비판하고 있는 입장에서 다른 항목에 대해서 무지했던 부분은 이제야 알게되었고 스스로
비판하게 됩니다. 배움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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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물파스님 좋은 글, 항상 감사합니다.
OECD 국가중 실질문맹률 최고인 대한민국에서 몇몇 사람들로 마음 상하지 마시고 힘내세요!
물파스님의 글을 보고, 아무 말없이 생각의 폭을 넓혀 가시는 분이 대다수라 생각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민중은 위정자의 일들은 잘 모르지만,
웃음을 가지고 긴 시간속에서 조금씩 변화해 가며 살아 왔습니다 (바흐친).
'상식'을 갖고 있는 우리 민중은 앞으로도 그렇게 변화와 새로운 생성을 하며 살아가리라 믿습니다.
옛날 보다 좋은 건, 과학기술의 발달로,
물파스님 말씀과 같이,
누구나 정보에 접근 할 수 있고 정보를 생산한다는 것이 겠지요.
그만큼 매개체를 통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다가가,
본질에 대한 정확한 생각과 판단할 기회가 많아졌다고 생각합니다 (들뢰즈).

언제나 그랬듯이,
빠른 과학기술의 발달로, 그에 맞는 에티켓(문화)가 따라오지 못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쫒아 오리라 믿습니다.

힘내세요! 응원합니다.!
다시한번 좋은 글, 감사합니다.
 

◆ 우리가 시선을 받아내는 방식, 또는 우리에게 시선이 접근하는 방식 [by. 물파스]

[◆ 우리가 시선을 받아내는 방식, 또는 우리에게 시선이 접근하는 방식 ]


필립스 전기면도기가 2개나 있음에도 자주 손 면도를 하는데, 어중간하게 수염이 자란경우에는
부러 하루를 더 기다립니다. 하루면 충분합니다. 적당하다 싶은 길이의 수염을 깎을 때에는 면도하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어떤 손맛이 느껴집니다. ... 특히 의장대처럼 정직한 간격으로 겹겹이 쌓여있는
작은 6중 날이 스노보더가 눈발을 헤치며 내려오듯, 하얀 거품을 헤치며 볼에서 턱밑으로 내려올 때
속삭이는 ‘사각 사각!’ 거리는 그 느낌이 참 좋습니다. 하지만 그런 손맛도 잠시, 꽤나 오랜 시간의
손 면도 경력이 있는 사람들도 가끔은 살을 베일 때가 있습니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에는 ~ 그런 날에는 빠른 사정의 섹스(Sex)처럼 남성을 삽입하듯 면도날이
턱밑 적당한 곳을 찾아 자연스럽게 들곤 합니다. 면도 거품과 수염, 그리고 면도날의 바쁜 조우에서도
면도날의 외도는 피부세포가 눈치 채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감각적 섬세함을 지녔습니다. ... 그러나
빠른 사정처럼 살을 베이는 그 순간만큼은 이상하게도 그 섬세함이 너무나 쉽게 느껴집니다. 또한
그 찰나의 순간은 목덜미 아래로 서늘한 냉기가 스며들며 마음 한구석을 꽤나 불편하게 만듭니다.

솔직히 면도날의 외도는 물리적 고통은 거의 느낄 수 없을 만큼의 아주 작은 상처입니다.
그럼에도 마음이 불편한 이유는, 곧 내게 닥쳐올 붉은 피의 부조화 때문일 것입니다. ... 하얀 거품과
창백한 얼굴 사이로 흐르는 붉은 피의 선명함. 이 사태에 좀처럼 적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물리적 고통보다는 <시각적 불편함>이 인간에게는 더 큰 불안과 위협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이번에는 시각적 불편함이 아니라 <시각적 아름다움>으로 시선을 돌려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물속에 담겨있습니다. 물속에 담긴 예수는 스스로 광원(光源)이 되어 공간을
황금빛으로 물들입니다. 예수 주위에 떠있는 수많은 황금빛 미세 공기방울은 예수를 무한 우주속의
중심으로 옮겨놓았습니다. ~ 이 광경을 마주하는 누구라도 성스러움과 아름다움의 극치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 이 작품은 ‘안드레 세라노(Andres Serrano 미국)’라는 작가의 사진작품입니다. 여기서
중요한건 작품의 이름입니다.

<오줌 예수 Piss Christ. 1987>
h ttps://ameliadobson.wordpress.com/gallery/andres-serrano-piss-christ-1987-cibachrome-silicone-plexiglass-152x102cm-p156/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는 물이 아니라 <오줌(Piss)>에 담겨있었습니다.
작품 이름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작품을 접한다면 아마 대부분은 조금 전 제가 서술한 감정과 비슷한
느낌으로 작품을 이해했을 겁니다. 가장 높은 곳에 있어야할 신성한 존재가 가장 낮은 곳으로 흐르는
인간의 노폐물 속에 담겨있다는 이 환상적인 부조화! ... 불편하지만 작품의 이름을 알고 난 이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작품에서 <시각적 아름다움>을 느낍니다.

대상이 어떤 매체(시선)를 통하여 우리에게 다가오는가?
다시 말해, 시선이 전달되는 과정과 방식(조작), 더불어 참여(경험)의 여부에 따라 우리한테 접근하는
미적 효과(시각적 효과)는 사유의 증폭과 사유의 전복을 동시에 진행시킵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중을 향해 힘차게 달려오는 시선은 대중에게는 일종의 부역입니다.
대중과 함께하지 않는 대중은 대중을 배반한 반역자의 범주에 속하며 ~ 따라서 대중의 속성을 초월해
어찌됐든 대중은 쉬지 않고(사유하지 않고) 범람하는 시선에 의무적으로 반응해야 하는 부역의 팔자를
타고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 오늘은 미세먼지가 많다고 합니다. 건강 잘 챙기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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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항상 좋은 글 감사합니다.

마지막 문장에

대중과 함께하지 않는 대중은 대중을 배반한 반역자의 범주에 속하며 ~ 따라서 대중의 속성을 초월해
어찌됐든 대중은 쉬지 않고(사유하지 않고) 범람하는 시선에 의무적으로 반응해야 하는 부역의 팔자를
타고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대중의 뜻에 반하는 대중은 대중의 속성을 초월한 대중이며
대중은 대중의 시선에 끝없이 맞춰야하는 팔자다.
이렇게 밖에 해석이 안되는데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머리좋은 형님들 알기쉽게 설명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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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군중은 잠자는 사람과 유사하다. 잠을 자는 동안에는 이성을 발휘할 수 없어
강렬한 이미지가 그의 머릿속에 출현한다. 만일 성찰로만 이어질 수 있다면 그 이미지는
순식간에 사라져버릴 것이다. 하지만 군중은 성찰이나 추론할 능력이 없으므로
사실 같지 않은 일을 체험하지 못한다. 그런데 군중에게 가장 큰 인상을 주는 것 역시
도저히 일어날 법하지 않은 일이다. ~ (중략) ~ 오직 이미지를 통해서만 생각할 수 있는 군중은
오직 이미지에 의해서만 감동한다. 그들을 공포로 몰아넣거나 매혹하여 행동하게 하는 것은
오직 이미지뿐이다. - (군중심리. 81~82페이지/ 귀스타브 르봉/ 문예출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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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소비의 비중이 커지면 커질수록 생각하는 능력, 즉 사유는 파편화되고 단순화되기 쉽습니다.
또한 많은 메시지를 내포하면서도 간결함을 잃지 않은 이미지는 그 강렬함의 농도가 매우 짙기 때문에
단 한 번의 소비만으로도 각인효과는 극대화되어 이미지를 접촉한 군중에게는 이미지 부정을 거부함과 동시에
그 이미지를 진실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커지게 됩니다. ... 결국 <군중의 맹목성>은 이미지 소비와,
소비되는 이미지의 순도가 얼마나 높은가에 따라서 결정되게 됩니다.(간결한 선동 문구의 중요성!)

'이미지'는 결국 <시선>입니다.
시선이란 어떤 대상이나 사태에 대해 주의나 관심을 갖고 바라본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대상(혹은 사태,현상)을 바라보는 주체는 언제나 '나(개인)'로부터 시작됩니다. 여기서 '나(개인)'는
능동적 행위의 주체로써 <시선의 주관자>로 해석할수 있는데, 언제부턴가 사회가 생성하는 수많은
시선들(이미지)에 대해서 '능동적 행위의 나(개인)'는 사라지고, 대중이 만든 이미지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데
너무나 익숙해져 버린 상태입니다. ... 결국 시선(이미지)을 각자의 고유한 사유능력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대중) 이미 만들어놓은 이미지만을 간편하게 소비하는데 만족하고 있는 것입니다. ~ 이쯤되면
능동적 주체로써의 나(개인)에게 '시선'의 의미는 바라보는(사유하는) 사태(대상)가 아니라, 나(개인)를 향해
거침없이 돌진하는 <타자적 속성>을 지닌, 즉 '시선(이미지)' 자체가 주체(스스로 행위하는)가 되어
나(개인)를 주관하는 형국으로 ... <시선 주관자의 전복>이 일어난 것입니다.

개인(자신)을 향해 강박적으로 달려드는 시선은 외칩니다. ~ "나(시선)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본문에서 예를 든 <오줌 예수 Piss Christ. 1987>를 바라봄(사유)에 있어서 남녀와 세대와 좌.우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시선(이미지)은 쉬지않고 대중의 속성을 초월할 것을 요구합니다.

정보가 빛의 속도로 오고가는 시대입니다.
때문에 오랜 시간 머리를 쥐어짜며 자발적으로 사유의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무게감이 가득 실린 담론꺼리는
점점 더 외면 받는 현실입니다. 이는 결국 단시간에 소화 가능한 (편향된)이미지의 선택적 소비만 증가하게 될 것이며,
동시에 우리 모두는 언제든 우매한 군중으로의 변태를 예비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어느 인터넷 스타강사의 문제적 발언보다, 그 발언 자체가 사회가 생성한 하나의 시선으로 이미지화되어
대중은 남녀, 좌우, 세대라는 (개별)속성을 초월해 모두가 쉬지않고(사유하지 않고) 의무적으로 반응하고 있는 모습이
저에게는 마치 죽으면 비로소 끝나는 죄수 또는 노예가 짊어진 부역의 모습으로 비춰졌습니다.

질) 자본주의. 공산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 [by. 물파스]

때야

물파스같은 형 있으면 설명 좀.

상식을 위해.

자본주의. 공산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
에 대해서.

어렴풋이 알고는 있는데
위키백과읽으면 더 헷갈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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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야//

마르크스는 '사회(인류 역사변화의 근본적 동력)'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무엇보다 '경제'를 확실히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또한 인류가 거쳐 온
사회의 역사단계를 단순화시켜 사회 구조와 그 본질을 파악하는 방법으로
'생산양식 이라는 것을 생각해 냈습니다.

<노예제 => 봉건제 => 자본주의 => 사회주의 => 공산주의>

이것이 마르크스가 생각한 인류역사를 '생산양식' 중심으로 분류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얘기를 하자면 상당한 배경지식이 요구됩니다. ... 다시말해
우리가 마르크스를 이해하려면 헤겔을, 또 헤겔을 이해하려면 칸트를 ~ 또 칸트가 서있는
지점에서는 대륙 합리론, 독일 관념론, 영국 경험론을 이해해야 합니다. ...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해서 과거로 회귀하다 보면 우리는 어느 지점에 이르러 어쩔 수없이
탈레스, 데모크리토스, 헤라클레이토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과 같은
기원전(before Christ) 그리스 시대의 철학자들과 한 번쯤은 차를 마셔야 될 상황에까지 가게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은 조만간 명쾌하게 정리하여 시리즈 글로 올려볼까 생각중입니다.

"너 빨갱이 새끼지?"

저는 네이버,다음,네이트 같은 여러 포털과 SNS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너무나도 가볍게 '빨갱이'를 언급할때마다 아쉽고 답답한 마음이 참 많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물어야할 외침은 "빨갱이란 무엇인가?"가 되어야 합니다.

"쟤가 바로 빨갱이 새끼다!" 라고 외치는 순간 진리를 추구하는 우리의 물음은 상대적 가치로 주저앉게 됩니다.

"섹스란 무엇인가?"를 물었을때 우리는 번식, 쾌락, 사랑 등으로 사유가 확장됩니다.
그리고 다시 "사랑, 쾌락, 번식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으로 이어집니다. ~ 하지만
"누구와 섹스 했는가?" 라고 묻는다면, 그 순간 섹스는 잃어버린 주인 찾기처럼 상대적 가치에 갇혀버려
사유의 확장은 거기서 멈추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대상에 대해 소유주(누가 빨갱이인가?)를 찾는 물음보다
진리추구적(빨갱이란 무엇인가?) 물음은 엄청난 사유의 결과물을 요구하게 되는
대단히 무거운 질문인 것입니다. ... 더불어 님의 질문은 진리추구적 물음이라
편리한 검색이나 사전적 정의 차원으로 단순하게 답하기에는 엄청난 에너지가 응집된
물음이기 때문에 시간이 걸리더라도 제대로 정리해서 답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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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ㄹ~

물파스 피셜) 빨갱이란 단어 툭하면 입에오르는 머저리들 보면 피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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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ㄹ~//

아니오 ~ 맥락을 잘못 짚으셨습니다.

툭하면 빨갱이라는 단어를 입에담는 사람들이 피곤한게 아니라
툭하면 빨갱이라는 단어를 입에담는 사람들 대다수가 역설적으로 빨갱이의 정확한 의미를
모르고 사용한다는 점이 답답하다는 거죠. ~ 이는 마치 '정당제도'를 모르는 사람들이
자한당과 민주당을 (맹목적으로)추종하는 사태와 유사하며, 인권과 정의를 외치는 사람들이
'삼청교육대'의 부활을 꿈꾸는 사태와 궤를 같이 하는 것입니다.

2020년 1월 12일 일요일

◆ 공간을 생산하는 시간의 벽(deadline) [by. 물파스]

[◆ 공간을 생산하는 시간의 벽(deadline)]



2019년 세밑에 서서 지나온 날들을 되돌아보니 불안과 희망의 실타래가 생각보다 복잡하게
뒤엉켜 있습니다. 불안은 다짐했던 일들이 기대에 못 미쳤기 때문이며, 희망은 또 다른 새로운
다짐을 기대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머니가 마을금고에서 받아온 소날, 뱀날이 인쇄된 새 달력을 바꿔 걸면서 ‘해가 바뀐다’는
의미를 차분히 생각해 봅니다. 시간은 명백히 연속적인 개념이지만 ~ ‘곗날’, ‘병원 가는 날’,
‘미순이 딸 결혼’ 등 올 한해 어머니 당신의 스케줄이 달마다 듬성듬성 정감 있게 기록된
2019년 달력을 아쉬운 마음으로 걷어내고 2020년의 달력을 마주하는 감정은 새로운 공간으로
이사를 하는 것 같은, 마치 불연속적인 물리적 공간을 오고가는 기분입니다. ... ‘해 바뀜’은
분명 시간의 속성인데 해마다 세밑에서 달력을 바꾸는 행위만큼은 공간에서 공간으로 이를테면
버스에서 지하철로, 사무실 책상에서 내방의 침대로 ~ 형언할 수 없는 물리적 공간 변화와
규정되지 않은 어떤 사물의 신비한 물성이 ‘세밑의 달력 바꿈’이라는 행위로부터 느껴진다는 뜻입니다.

벽(경계)은 두 개의 공간을 생산합니다. A라는 공간에 벽이 세워지면 하나였던 A는 두 개의
공간으로 분리됩니다. ~ 그렇다면 시간에도 벽이 존재할까? 만약 벽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시한(deadline)>이 될 것입니다. ... 더불어 시한(deadline)도 관념적으로 공간을 분리(생산)합니다.
특히 국가(정부)나 정치권력이 국민들의 시간에 개입할 때 우리는 관념적 공간들의 과잉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 연속적 개념인 시간에 한계(시한)가 설정되면 시간은 불연속적 속성을 내포하며 각각
독립된 공간으로 변화합니다. 독립된 공간은 <닫힌계(닫힌 공간)>의 다른 이름입니다.

<닫혀있다> 라는 의미는 무엇인가? ~ 예를 들면, 자연수(정수)의 집합은 덧셈과 곱셈에 대하여
‘닫혀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자연수끼리는 아무리 더하고 곱해도 자연수라는 범위 밖의 수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아시다시피 자연수는 사물의 개수를 세는 가장 기본적인 형태의
수입니다. ... 사람은 1, 2, 3명 등으로 표현하고 자동차는 1대, 2대, 3대 등으로 표현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연수끼리는 아무리 더하거나 곱해도 결국 ‘자연수’라는 범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다만
뺄셈과 나눗셈은 예외적으로 자연수 범위 밖의 숫자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 뺄셈은 작은 수에서
큰 수를 뺄 때 음수(-)가 나타나며, 나눗셈은 분자가 분모의 배수가 아닐 경우에 소수가 나타나므로
이럴 경우 자연수 집합은 예외적으로 뺄셈과 나눗셈에 대하여 <열려있다>라고 표현합니다. ~ 결국
<닫혀있다>라는 것은 자신과 동일한 속성을 가진 것들만 받아들인다는 의미이며 ... 이러한 균질의
가치들이 집합적으로 모여 있는 공간이 바로 <닫힌 공간>인 것입니다.

국회의 ‘회기(會期)’는 국회 스스로가 세운 벽(deadline)입니다. 회기 내에 법안이 통과되지 못하면
그 책임과 고통은 오롯이 대의제를 선택한 국민들의 몫입니다. 특히 민생법안들은 국민들의 삶과
직결되기 때문에 고통은 가중됩니다. 따라서 국회가 자신의 시간에 ‘회기(會期)’라는 벽(deadline)을
세우면 국회는 <일하는 국회 vs 노는 국회> 라는 두 개의 공간으로 분리되고 각각의 관념공간은
독립적인 <닫힌 공간>이 됩니다. 국민들로부터 박수 받는 국회, 철저히 자신들의 밥그릇만을 위한
국회 ... 이렇게 두 개의 관념적 공간이 생산되는데, 이러한 예는 우리의 일상에서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구속여부를 결정하는 영장실질심사의 시한(deadline)은 개인을 <구속인 vs 자유인>이라는 공간으로
분리하고, 납세 시한은 납세 충실도(성실도)에 따라 <성실 납세자 vs 고액.상습 체납자>라는 공간으로
분리합니다. 또한 이번 선거법 개정으로 18년 이라는 시간의 벽(deadline)은 <유권자 vs 학생>이라는
공간을 만들어 냈습니다. ~ 입영통지서에 적힌 ‘입영일시’라는 시한(deadline)은 한국의 젊은 청춘들을
<군인 vs 시민> 이라는 공간으로 분리.생산합니다. 이 밖에도 한.일 간 군사정보보호협정을 뜻하는
'지소미아(GSOMIA)' 또한 그 핵심은 (종료)시한(deadline)의 문제였습니다. ~ <1982년(김지영)> 이라는
시간의 벽(deadline)은 소설과 영화를 통해 한국사회에 문제적 젠더공간을 생산해 냈으며, 만14세라는
시한(deadline)은 촉법소년으로 분류돼 <살인해도 처벌받지 않는 인간 vs 살인 범죄자>라는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 이렇듯 정부와 정치권력은 국민들의 시간 속에 수많은 벽(deadline)을 세움으로써
다양하고 새로운 관념공간을 지속적으로 생산하고 있습니다. ~ 뿐만 아니라 자본권력도 소비자의
시간 속에 치밀한 시간의 벽(deadline)을 세워 상품소비를 강렬하게 유혹하기도 하는데, TV 홈쇼핑은
모든 혜택을 받으려면 지금 주문하라고 재촉하면서 ~ “3분! 마지막 기횝니다. 이제 3분 남았습니다!”,
“남은 수량 20개!” 라는 구호를 마법의 주문처럼 연신 외쳐 됩니다. 마트에 가도 이와 유사한 시간의
벽이 확인됩니다. 예를 들면, 아기들이 먹는 치즈에 단계별 시한(deadline)을 설정해 수많은 엄마들의
마음을 자극하는 것입니다.

<@@ 유기농 아기치즈>
1단계 (6개월~12개월) - 면역력 강화 ‘튼튼 설계’
2단계 (13개월~24개월) - ‘영양 균형’
3단계 (25개월 이상) - ‘두뇌 및 성장발달’

국가와 정치권력 그리고 자본권력이 국민들과 소비자의 시간 속에 벽(deadline)을 세워 지속적으로
관념공간을 생산하면, 이후 그 공간들은 동일한 속성 혹은 가치의 균질을 지향하며 점점 더 폐쇄된
닫힌 공간으로 변해갑니다. ... 사이토 준이치 교수는(와세다대 정치경제) 저서 <민주적 공공성>에서
‘공동체와 공공성의 차이’에 대해 이렇게 얘기합니다.

< “공동체가 닫힌 영역을 형성하는데 반해서, 공공성은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공간이다.
공공성은 독일어로 öffentlichkeit 라고 표현되는데, 그 어원은 ‘열려있다’는 의미의 ‘offen’이다.
열려있다는 것, 폐쇄된 영역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 공공성의 조건이다. ‘바깥’을 형상화함으로써
‘안’을 형상화하는 공동체에는 이 조건이 결여되어 있다.“ - (민주적 공공성 中) >

ex).
@ 성실 납세자 집합(공동체),
@ 고액.상습 체납자 집합(공동체),
@ 18세 유권자 집합(공동체)
@ 군인(군사) 공동체
@ 82년생 김지영 지지자 집합(공동체)
@ 촉법소년 집합(공동체)
@ TV홈쇼핑을 보며 3분 내에 주문을 하는 소비자 집합(공동체)
@ 2단계 유기농 아기치즈 소비자 집합(공동체)

그렇다면 이쯤에서 ‘공동체는 왜 닫힌 영역을 형성할 수밖에 없는가?’ 라는 질문을 해 봅니다.
권위 있는 교수(사이토 준이치)의 주장이니 그냥 편하게 받아들이고 동의하면 그만일 텐데,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나름의 설득력 있는 답을 찾고 싶어졌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답을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Sartre, Jean Paul)’의 철학에서 찾아볼까 합니다.

사르트르는 우리가 무엇을 <소유>했는지 관찰해보면 우리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구체적 사물의 경우 직접 만들거나 획득하면 소유했다고 말할 수 있는데, 다시 말해 능동적으로
사물을 제작하거나 획득하는 것이 소유 개념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 그런데 여기서 사르트르는
소유의 개념을 좀 더 확장합니다. ‘구체적 사물’뿐만이 아니라 무형의 대상, 즉 정보나 지식 같은
‘앎’이나 ‘숙련된 기술’까지도 소유의 개념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무형의 대상에 정통하면
우리는 그것을 자신의 ‘소유’로 인식한다는 것이 사르트르의 주장입니다. ... 예를 들어, 10년 넘게
매일 아침 북한산 백운대를 등반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느 누구보다 더 등반코스를 잘 안다고
자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등반코스는 이제 본인이 <소유하고 있다>는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 닫힌 공간에 폐쇄적으로 모여 가치의 균질을 지향하는 공동체는 닫힌 영역의 바깥에
존재하는 이질적 존재들에 비해 스스로를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사르트르의 관점에서 <잘 안다>는 것은
결국 공동체 성원 모두가 닫힌 공간을 함께 <소유하고 있다>가 됩니다. ~ 누구나 소유할 수 있다면
그것은 ‘열린 공간’이 되기 때문에 공동체는 자신들의 (관념적)소유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닫힌 영역>을 형성하게 되는 것 입니다.

시간의 벽(deadline)이 생산하는 수많은 관념의 공간들은 쉽게 접근할 수 없는 폐쇄된 공동체를
형성하며, 그들 공동체는 스스로를 가장 잘 아는 작은 파편이자 동시에 전체를 <소유하는> 주인으로써
기능하게 됩니다. 특히 닫힌 영역 안에서는 <더 많이 알수록 더 많이 소유하기> 때문에 소유가 정점에
달하면 공동체 성원들의 연대는 강화됩니다. ~ 이를테면 <82년생 김지영>에 대해 많이 안다는 것은
82년생 김지영의 삶이 바로 자신의 삶으로 치환될 수 있는 것입니다. ... 이는 나이에 상관없이 오직
<82년생 김지영>을 많이 안다는 조건 하나만 충족하면 성립됩니다. 결국 공간은 <82년생 김지영>을
잘 아는(소유하는) 공간과 잘 모르는(소유하지 않은) 공간으로 분리(생산) 되는 것이며, 각각의 공간은
서로에 대해 폐쇄성 높은 닫힌 공간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인간을 미워한 신이 앙심을 품고 인간을 혹사시키기 위해 만든 것이 바로 노동이다!” - 호메로스 >

고대 그리스의 장편 서사시 ‘오디세이아(Odysseia)’의 작가 호메로스는 ‘노동’을 정의하면서
신이 인간을 고생시키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노동을 야만적이며
저주받은 행동으로 규정한 것은 당시 그리스가 <노예제> 사회였기 때문입니다. 노예제 사회에서
노동은 전적으로 노예의 몫입니다. 따라서 노예가 아닌 자가 노동을 하는 것은 야만적인 행위였으며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었습니다.(참고: 조안B 시울라, ‘일의 발견’) ~ 심지어 고대 그리스인들은
노동이 사람을 노예로 만들어 타인의 의지에 종속시키며 영혼까지 타락시킨다고 보았습니다. 이처럼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일을 한다는 것’은 자유로운 신분이 아니라는 것, 단지 ‘말할 줄 아는 짐승‘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 결국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인간다움’이란 ‘노동하지 않음’과 동의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현대사회에서 바쁘게 일한다는 것은 나름의 능력을 인정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반면
일하지 않는 실업 상태의 사람들은 속칭 ‘백수’로 격하되어 무능력을 상징하는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앞서 언급한 고대 그리스 말고도 근대 이전의 사회에서는 일하지 않는 한가함이 바로 <귀족>을
상징하는 징표였습니다. 근대 이전의 사회도 바쁘게 일하는 건 역시 노예나 머슴으로 불리는 하층계급
뿐이었던 것입니다. ... 문헌에 따르면 고대 이집트인들은 1년에 고작 70일 정도만 일을 했으며, 고대
아테네인들은 연간 50~60회 정도 여러 날에 걸쳐 축제를 즐겼다고 합니다. 고대 그리스 달력에는
1년 중 109일은 재판이나 정치적인 일을 하지 않도록 법에 의해 강력히 금지됐다고 합니다. 고대의
이러한 관습은 교회권력이 지배하던 중세까지 이어졌는데 ~ 중세에는 주일, 크리스마스, 부활절 같은
수많은 날들이 종교관련 축제로 채워졌고 이러한 상징적 축제일 사이사이에도 각종 계절 축제와
정치적 축제일 등이 넘쳐났습니다. ... 이러한 시대적 배경으로 중세 영국은 연간 3분의 1 정도가
여가 시간이었고, 프랑스의 경우 대혁명(1789) 이전의 노동자들은 1년 중 거의 절반에 가까운 시간을
휴일로 보장받았습니다.(참고: 알지니, ‘일이란 무엇인가’)

< “구체제에서 교회법은 노동자들에게 90일의 휴일, 52일의 일요일과 38일의 공휴일을
보장했는데, 이 기간의 노동은 엄격히 금지되었다.“ - (폴 라파르그, ‘게으를 수 있는 권리’) >

폴 라파르그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근대 이전 사회의 노동자들은 ‘게으름’을 제도적으로 보장받았던
것입니다. ... 시대가 인간의 노동에 어떤 시간의 벽(deadline)을 세웠는지에 따라 <노예의 공간>,
<귀족의 공간>, <게으름을 보장받을 수 있는 공간> 등을 생산했던 것입니다. ~ 더불어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는 노동시간에 세워진 시간의 벽(deadline)에 따라 이전처럼 <백수 vs 근로자> 라는
단순한 공간에서 <백수 vs 근로자 vs 불로소득자(자산가) vs 연예인 vs 스포츠선수 vs 유튜버>와 같은,
노동의 속성이 전혀 다른 다원적 공간이 생산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책을 읽다보면 러시아의 나무인형 ‘마트료시카(Matryoshka)’처럼 책 속에서 언급하는 또 다른 책을
만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 오래전 하루키의 에세이를 읽다가 알게 된 ‘존 업다이크(John Updike)’라는
미국의 작가가 있습니다. 그가 쓴 소설 ‘달려라, 토끼’에는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 “밧줄을 계속해서 비틀면 밧줄은 직선 형태를 잃고 갑자기 꼬이며 고리가 나타난다.
에클스의 말을 다 듣고 난 뒤 해리의 내부에서 그런 단단한 고리가 생긴다.“ - (존 업다이크/ ‘달려라, 토끼’ 382p) >

시간의 벽(deadline)은 국가, 정치, 자본권력에만 권한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평범한 개인들도
각자의 내면에 불안과 희망을 섞어 다양한 시간의 벽(deadline)을 세우고 그것을 비틀면 직선 형태를 잃고
갑자기 꼬이면서 단단한 내면의 고리가 나타납니다. ~ 반지하 월세방에 살면서도 과도한 집값을 잡기위한
정부의 부동산 정책에는 신랄한 비판을 하는 것은, 본인 미래의 어느 지점에 시간의 벽(deadline)을 세워두고
세상을 집주인의 시각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또한 <1% vs 99%>에서 지금은 99%에 해당하지만 미래에 세워둔
시간의 벽(deadline)에 가까워지면 본인은 분명 1%에 서있을 거라는 확신(다짐)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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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남 영광군 낙월면 안마도 ~

이집도 빈집일까. 인기척 없는 집 마당에 들어섰다 돌아서려는데 사람소리가 들린다.

“가지 마시오. 나는 사람 구경 못하고 사요. 어서 들어오시오.”

백발성성한 할머니 한 분이 방문을 열고 나그네를 부른다. 할머니는 거동이 불편한지
다리를 끌며 마루로 나온다.

“서러워 죽겄소. 이라고 살믄 뭐한다우. 아들 죽고 울고 다니다가 한 다리가 부러져 버렸소.”

관절염에 시달인 할머니의 손가락도 모두 비틀려 있다.

“날마다 일만 하고 살았응께 손도 발도 이라고 오그라졌소.
어서 가야할 틴디, 안 강께 걱정이오.“

할머니는 광주에 살던 아들을 잃고 벌써 여섯 해째 상심에 빠져 허깨비처럼 살아왔다.
작년에는 딸마저 유방암으로 앞세워 보냈다.

“나 혼자 엎어져 있응께 사람도 아녀요. 날마다 눈물만 흘리며 살고 있소.
밤낮 앉아서 땅굴만 파고 있소. 며칠씩 잠도 안와 헛굴만 파고 앉았소.
자식 먼저 보내놓고 놈 부끄러워 집 밖으로도 못 나가고 담 안에서만 사요.“

할아버지는 일흔 넷에 돌아가셨다.

“아들이 참 잘났었는디, 마흔아홉에 가 버렸어. 내 아들 가 버링께
나 찾아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그랑께 분하고 짠하제. ~ 영감은 자식들
하나도 안 앞세우고 갔어. 빙(병)나 갖고 여드레 만에 가 버렸제. 드러눕자
물 한 방울 안 마시고 여덟 날 누워있다 그냥 갔소. 험한 꼴 안 보고,
팔자가 좋은 양반 아니오. 참 복도 많은 영감이요.“

남은 자식들이 모시겠다고 해도 안 가고, 병원에 입원하라 해도 안 하고 섬에 혼자 사는 할머니.

“내가 뭐하러 병원에 간다우. 얼마나 더 살라고.
벌써 춥소. 추우면 뼉다구 오그라징께 불 넣고 사요.“

백발성성한 할머니는 여든 넷.

“내 나이 다 먹고 남의 나이 넷이요.”

지금은 덤으로 사는 중이다. 할머니는 벌써 선산에 묘지도 잡아 놓았다. 왔던 곳으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린다. ~ 할머니는 거동도 못 하지만, 누구 눈치도 안 보며 울고 싶을 때 맘껏 울고
배고플 때 라면이라도 끓여 먹을 수 있는 당신 집이 가장 좋다. 그래도 혼자 문밖출입을 하지
않고 틀어박혀 살아가니 더러 교회 사람들이 교회에 나가자고 찾아오기도 한다.

“교회 다니라 하면 나가 그라요. 하느님 아부지가 누구는 차별하것소.
교회 다니나 안 다니나 아부지 아들이제. 어떤 자식은 자식 아니요.
하늘에서 내려다보믄 다 같은 자식이제. 교회 안 댕긴다고 자식이 아니겄소.
바람만 불어도 아부지 살려주쇼. 그라고 사는 세상 아니요. 그라요 내가.“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소설이다. 어머니전. 221~224 페이지. / 강제윤 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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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영광군 낙월면 안마도에 사는 여든넷의 할머니는 아들과 딸을 먼저 앞세워 보냈습니다.
할머니 당신 삶이 세워놓은 시간의 벽(deadline)은 ‘여든’이었지만 ~ 4년이라는 시간이 더해져
할머니의 삶의 벽은 처음보다 더 두꺼워졌습니다.

“가지 마시오. 나는 사람 구경 못하고 사요. 어서 들어오시오.”

자신이 세운 시간의 벽(deadline)을 초월해 사는 할머니의 공간은 비록 다리가 불편할지언정
지나가는 이름 모를 나그네조차 반길 정도로 활짝 <열린 공간>이었습니다. 또한 사이토 준이치
교수의 말대로 할머니의 공간은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열려있는 <공공성>을 상징합니다.

실수를 반복한다는 것은 사람이 항상 같은 자리에서 넘어진다는 의미와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폐쇄적인 닫힌 공간에 자주 머무르는 이유는, 대개 비슷한 시점에 벽(deadline)을 세우기
때문입니다. ... 시간의 벽(deadline)은 관념의 공간을 생산하고, 생산된 공간은 독립적.폐쇄적인
닫힌 공간으로써 타자를 부정하는 분열의 씨앗이 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 이는 열린 공간인
공공성 확장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입니다.


2020년 한 해는 시간의 벽(deadline)에 가로막혀 방황하지 않고,
모두가 열린 공간으로 힘차게 뻗어나갈 수 있는 희망찬 한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부동산과 경제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