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 29일 토요일

◆ 우리가 시선을 받아내는 방식, 또는 우리에게 시선이 접근하는 방식 [by. 물파스]

[◆ 우리가 시선을 받아내는 방식, 또는 우리에게 시선이 접근하는 방식 ]


필립스 전기면도기가 2개나 있음에도 자주 손 면도를 하는데, 어중간하게 수염이 자란경우에는
부러 하루를 더 기다립니다. 하루면 충분합니다. 적당하다 싶은 길이의 수염을 깎을 때에는 면도하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어떤 손맛이 느껴집니다. ... 특히 의장대처럼 정직한 간격으로 겹겹이 쌓여있는
작은 6중 날이 스노보더가 눈발을 헤치며 내려오듯, 하얀 거품을 헤치며 볼에서 턱밑으로 내려올 때
속삭이는 ‘사각 사각!’ 거리는 그 느낌이 참 좋습니다. 하지만 그런 손맛도 잠시, 꽤나 오랜 시간의
손 면도 경력이 있는 사람들도 가끔은 살을 베일 때가 있습니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에는 ~ 그런 날에는 빠른 사정의 섹스(Sex)처럼 남성을 삽입하듯 면도날이
턱밑 적당한 곳을 찾아 자연스럽게 들곤 합니다. 면도 거품과 수염, 그리고 면도날의 바쁜 조우에서도
면도날의 외도는 피부세포가 눈치 채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감각적 섬세함을 지녔습니다. ... 그러나
빠른 사정처럼 살을 베이는 그 순간만큼은 이상하게도 그 섬세함이 너무나 쉽게 느껴집니다. 또한
그 찰나의 순간은 목덜미 아래로 서늘한 냉기가 스며들며 마음 한구석을 꽤나 불편하게 만듭니다.

솔직히 면도날의 외도는 물리적 고통은 거의 느낄 수 없을 만큼의 아주 작은 상처입니다.
그럼에도 마음이 불편한 이유는, 곧 내게 닥쳐올 붉은 피의 부조화 때문일 것입니다. ... 하얀 거품과
창백한 얼굴 사이로 흐르는 붉은 피의 선명함. 이 사태에 좀처럼 적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물리적 고통보다는 <시각적 불편함>이 인간에게는 더 큰 불안과 위협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이번에는 시각적 불편함이 아니라 <시각적 아름다움>으로 시선을 돌려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물속에 담겨있습니다. 물속에 담긴 예수는 스스로 광원(光源)이 되어 공간을
황금빛으로 물들입니다. 예수 주위에 떠있는 수많은 황금빛 미세 공기방울은 예수를 무한 우주속의
중심으로 옮겨놓았습니다. ~ 이 광경을 마주하는 누구라도 성스러움과 아름다움의 극치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 이 작품은 ‘안드레 세라노(Andres Serrano 미국)’라는 작가의 사진작품입니다. 여기서
중요한건 작품의 이름입니다.

<오줌 예수 Piss Christ. 1987>
h ttps://ameliadobson.wordpress.com/gallery/andres-serrano-piss-christ-1987-cibachrome-silicone-plexiglass-152x102cm-p156/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는 물이 아니라 <오줌(Piss)>에 담겨있었습니다.
작품 이름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작품을 접한다면 아마 대부분은 조금 전 제가 서술한 감정과 비슷한
느낌으로 작품을 이해했을 겁니다. 가장 높은 곳에 있어야할 신성한 존재가 가장 낮은 곳으로 흐르는
인간의 노폐물 속에 담겨있다는 이 환상적인 부조화! ... 불편하지만 작품의 이름을 알고 난 이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작품에서 <시각적 아름다움>을 느낍니다.

대상이 어떤 매체(시선)를 통하여 우리에게 다가오는가?
다시 말해, 시선이 전달되는 과정과 방식(조작), 더불어 참여(경험)의 여부에 따라 우리한테 접근하는
미적 효과(시각적 효과)는 사유의 증폭과 사유의 전복을 동시에 진행시킵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중을 향해 힘차게 달려오는 시선은 대중에게는 일종의 부역입니다.
대중과 함께하지 않는 대중은 대중을 배반한 반역자의 범주에 속하며 ~ 따라서 대중의 속성을 초월해
어찌됐든 대중은 쉬지 않고(사유하지 않고) 범람하는 시선에 의무적으로 반응해야 하는 부역의 팔자를
타고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 오늘은 미세먼지가 많다고 합니다. 건강 잘 챙기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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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좋은 글 감사합니다.

마지막 문장에

대중과 함께하지 않는 대중은 대중을 배반한 반역자의 범주에 속하며 ~ 따라서 대중의 속성을 초월해
어찌됐든 대중은 쉬지 않고(사유하지 않고) 범람하는 시선에 의무적으로 반응해야 하는 부역의 팔자를
타고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대중의 뜻에 반하는 대중은 대중의 속성을 초월한 대중이며
대중은 대중의 시선에 끝없이 맞춰야하는 팔자다.
이렇게 밖에 해석이 안되는데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머리좋은 형님들 알기쉽게 설명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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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중은 잠자는 사람과 유사하다. 잠을 자는 동안에는 이성을 발휘할 수 없어
강렬한 이미지가 그의 머릿속에 출현한다. 만일 성찰로만 이어질 수 있다면 그 이미지는
순식간에 사라져버릴 것이다. 하지만 군중은 성찰이나 추론할 능력이 없으므로
사실 같지 않은 일을 체험하지 못한다. 그런데 군중에게 가장 큰 인상을 주는 것 역시
도저히 일어날 법하지 않은 일이다. ~ (중략) ~ 오직 이미지를 통해서만 생각할 수 있는 군중은
오직 이미지에 의해서만 감동한다. 그들을 공포로 몰아넣거나 매혹하여 행동하게 하는 것은
오직 이미지뿐이다. - (군중심리. 81~82페이지/ 귀스타브 르봉/ 문예출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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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소비의 비중이 커지면 커질수록 생각하는 능력, 즉 사유는 파편화되고 단순화되기 쉽습니다.
또한 많은 메시지를 내포하면서도 간결함을 잃지 않은 이미지는 그 강렬함의 농도가 매우 짙기 때문에
단 한 번의 소비만으로도 각인효과는 극대화되어 이미지를 접촉한 군중에게는 이미지 부정을 거부함과 동시에
그 이미지를 진실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커지게 됩니다. ... 결국 <군중의 맹목성>은 이미지 소비와,
소비되는 이미지의 순도가 얼마나 높은가에 따라서 결정되게 됩니다.(간결한 선동 문구의 중요성!)

'이미지'는 결국 <시선>입니다.
시선이란 어떤 대상이나 사태에 대해 주의나 관심을 갖고 바라본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대상(혹은 사태,현상)을 바라보는 주체는 언제나 '나(개인)'로부터 시작됩니다. 여기서 '나(개인)'는
능동적 행위의 주체로써 <시선의 주관자>로 해석할수 있는데, 언제부턴가 사회가 생성하는 수많은
시선들(이미지)에 대해서 '능동적 행위의 나(개인)'는 사라지고, 대중이 만든 이미지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데
너무나 익숙해져 버린 상태입니다. ... 결국 시선(이미지)을 각자의 고유한 사유능력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대중) 이미 만들어놓은 이미지만을 간편하게 소비하는데 만족하고 있는 것입니다. ~ 이쯤되면
능동적 주체로써의 나(개인)에게 '시선'의 의미는 바라보는(사유하는) 사태(대상)가 아니라, 나(개인)를 향해
거침없이 돌진하는 <타자적 속성>을 지닌, 즉 '시선(이미지)' 자체가 주체(스스로 행위하는)가 되어
나(개인)를 주관하는 형국으로 ... <시선 주관자의 전복>이 일어난 것입니다.

개인(자신)을 향해 강박적으로 달려드는 시선은 외칩니다. ~ "나(시선)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본문에서 예를 든 <오줌 예수 Piss Christ. 1987>를 바라봄(사유)에 있어서 남녀와 세대와 좌.우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시선(이미지)은 쉬지않고 대중의 속성을 초월할 것을 요구합니다.

정보가 빛의 속도로 오고가는 시대입니다.
때문에 오랜 시간 머리를 쥐어짜며 자발적으로 사유의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무게감이 가득 실린 담론꺼리는
점점 더 외면 받는 현실입니다. 이는 결국 단시간에 소화 가능한 (편향된)이미지의 선택적 소비만 증가하게 될 것이며,
동시에 우리 모두는 언제든 우매한 군중으로의 변태를 예비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어느 인터넷 스타강사의 문제적 발언보다, 그 발언 자체가 사회가 생성한 하나의 시선으로 이미지화되어
대중은 남녀, 좌우, 세대라는 (개별)속성을 초월해 모두가 쉬지않고(사유하지 않고) 의무적으로 반응하고 있는 모습이
저에게는 마치 죽으면 비로소 끝나는 죄수 또는 노예가 짊어진 부역의 모습으로 비춰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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