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간을 생산하는 시간의 벽(deadline)]
2019년 세밑에 서서 지나온 날들을 되돌아보니 불안과 희망의 실타래가 생각보다 복잡하게
뒤엉켜 있습니다. 불안은 다짐했던 일들이 기대에 못 미쳤기 때문이며, 희망은 또 다른 새로운
다짐을 기대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머니가 마을금고에서 받아온 소날, 뱀날이 인쇄된 새 달력을 바꿔 걸면서 ‘해가 바뀐다’는
의미를 차분히 생각해 봅니다. 시간은 명백히 연속적인 개념이지만 ~ ‘곗날’, ‘병원 가는 날’,
‘미순이 딸 결혼’ 등 올 한해 어머니 당신의 스케줄이 달마다 듬성듬성 정감 있게 기록된
2019년 달력을 아쉬운 마음으로 걷어내고 2020년의 달력을 마주하는 감정은 새로운 공간으로
이사를 하는 것 같은, 마치 불연속적인 물리적 공간을 오고가는 기분입니다. ... ‘해 바뀜’은
분명 시간의 속성인데 해마다 세밑에서 달력을 바꾸는 행위만큼은 공간에서 공간으로 이를테면
버스에서 지하철로, 사무실 책상에서 내방의 침대로 ~ 형언할 수 없는 물리적 공간 변화와
규정되지 않은 어떤 사물의 신비한 물성이 ‘세밑의 달력 바꿈’이라는 행위로부터 느껴진다는 뜻입니다.
벽(경계)은 두 개의 공간을 생산합니다. A라는 공간에 벽이 세워지면 하나였던 A는 두 개의
공간으로 분리됩니다. ~ 그렇다면 시간에도 벽이 존재할까? 만약 벽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시한(deadline)>이 될 것입니다. ... 더불어 시한(deadline)도 관념적으로 공간을 분리(생산)합니다.
특히 국가(정부)나 정치권력이 국민들의 시간에 개입할 때 우리는 관념적 공간들의 과잉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 연속적 개념인 시간에 한계(시한)가 설정되면 시간은 불연속적 속성을 내포하며 각각
독립된 공간으로 변화합니다. 독립된 공간은 <닫힌계(닫힌 공간)>의 다른 이름입니다.
<닫혀있다> 라는 의미는 무엇인가? ~ 예를 들면, 자연수(정수)의 집합은 덧셈과 곱셈에 대하여
‘닫혀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자연수끼리는 아무리 더하고 곱해도 자연수라는 범위 밖의 수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아시다시피 자연수는 사물의 개수를 세는 가장 기본적인 형태의
수입니다. ... 사람은 1, 2, 3명 등으로 표현하고 자동차는 1대, 2대, 3대 등으로 표현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연수끼리는 아무리 더하거나 곱해도 결국 ‘자연수’라는 범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다만
뺄셈과 나눗셈은 예외적으로 자연수 범위 밖의 숫자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 뺄셈은 작은 수에서
큰 수를 뺄 때 음수(-)가 나타나며, 나눗셈은 분자가 분모의 배수가 아닐 경우에 소수가 나타나므로
이럴 경우 자연수 집합은 예외적으로 뺄셈과 나눗셈에 대하여 <열려있다>라고 표현합니다. ~ 결국
<닫혀있다>라는 것은 자신과 동일한 속성을 가진 것들만 받아들인다는 의미이며 ... 이러한 균질의
가치들이 집합적으로 모여 있는 공간이 바로 <닫힌 공간>인 것입니다.
국회의 ‘회기(會期)’는 국회 스스로가 세운 벽(deadline)입니다. 회기 내에 법안이 통과되지 못하면
그 책임과 고통은 오롯이 대의제를 선택한 국민들의 몫입니다. 특히 민생법안들은 국민들의 삶과
직결되기 때문에 고통은 가중됩니다. 따라서 국회가 자신의 시간에 ‘회기(會期)’라는 벽(deadline)을
세우면 국회는 <일하는 국회 vs 노는 국회> 라는 두 개의 공간으로 분리되고 각각의 관념공간은
독립적인 <닫힌 공간>이 됩니다. 국민들로부터 박수 받는 국회, 철저히 자신들의 밥그릇만을 위한
국회 ... 이렇게 두 개의 관념적 공간이 생산되는데, 이러한 예는 우리의 일상에서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구속여부를 결정하는 영장실질심사의 시한(deadline)은 개인을 <구속인 vs 자유인>이라는 공간으로
분리하고, 납세 시한은 납세 충실도(성실도)에 따라 <성실 납세자 vs 고액.상습 체납자>라는 공간으로
분리합니다. 또한 이번 선거법 개정으로 18년 이라는 시간의 벽(deadline)은 <유권자 vs 학생>이라는
공간을 만들어 냈습니다. ~ 입영통지서에 적힌 ‘입영일시’라는 시한(deadline)은 한국의 젊은 청춘들을
<군인 vs 시민> 이라는 공간으로 분리.생산합니다. 이 밖에도 한.일 간 군사정보보호협정을 뜻하는
'지소미아(GSOMIA)' 또한 그 핵심은 (종료)시한(deadline)의 문제였습니다. ~ <1982년(김지영)> 이라는
시간의 벽(deadline)은 소설과 영화를 통해 한국사회에 문제적 젠더공간을 생산해 냈으며, 만14세라는
시한(deadline)은 촉법소년으로 분류돼 <살인해도 처벌받지 않는 인간 vs 살인 범죄자>라는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 이렇듯 정부와 정치권력은 국민들의 시간 속에 수많은 벽(deadline)을 세움으로써
다양하고 새로운 관념공간을 지속적으로 생산하고 있습니다. ~ 뿐만 아니라 자본권력도 소비자의
시간 속에 치밀한 시간의 벽(deadline)을 세워 상품소비를 강렬하게 유혹하기도 하는데, TV 홈쇼핑은
모든 혜택을 받으려면 지금 주문하라고 재촉하면서 ~ “3분! 마지막 기횝니다. 이제 3분 남았습니다!”,
“남은 수량 20개!” 라는 구호를 마법의 주문처럼 연신 외쳐 됩니다. 마트에 가도 이와 유사한 시간의
벽이 확인됩니다. 예를 들면, 아기들이 먹는 치즈에 단계별 시한(deadline)을 설정해 수많은 엄마들의
마음을 자극하는 것입니다.
<@@ 유기농 아기치즈>
1단계 (6개월~12개월) - 면역력 강화 ‘튼튼 설계’
2단계 (13개월~24개월) - ‘영양 균형’
3단계 (25개월 이상) - ‘두뇌 및 성장발달’
국가와 정치권력 그리고 자본권력이 국민들과 소비자의 시간 속에 벽(deadline)을 세워 지속적으로
관념공간을 생산하면, 이후 그 공간들은 동일한 속성 혹은 가치의 균질을 지향하며 점점 더 폐쇄된
닫힌 공간으로 변해갑니다. ... 사이토 준이치 교수는(와세다대 정치경제) 저서 <민주적 공공성>에서
‘공동체와 공공성의 차이’에 대해 이렇게 얘기합니다.
< “공동체가 닫힌 영역을 형성하는데 반해서, 공공성은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공간이다.
공공성은 독일어로 öffentlichkeit 라고 표현되는데, 그 어원은 ‘열려있다’는 의미의 ‘offen’이다.
열려있다는 것, 폐쇄된 영역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 공공성의 조건이다. ‘바깥’을 형상화함으로써
‘안’을 형상화하는 공동체에는 이 조건이 결여되어 있다.“ - (민주적 공공성 中) >
ex).
@ 성실 납세자 집합(공동체),
@ 고액.상습 체납자 집합(공동체),
@ 18세 유권자 집합(공동체)
@ 군인(군사) 공동체
@ 82년생 김지영 지지자 집합(공동체)
@ 촉법소년 집합(공동체)
@ TV홈쇼핑을 보며 3분 내에 주문을 하는 소비자 집합(공동체)
@ 2단계 유기농 아기치즈 소비자 집합(공동체)
그렇다면 이쯤에서 ‘공동체는 왜 닫힌 영역을 형성할 수밖에 없는가?’ 라는 질문을 해 봅니다.
권위 있는 교수(사이토 준이치)의 주장이니 그냥 편하게 받아들이고 동의하면 그만일 텐데,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나름의 설득력 있는 답을 찾고 싶어졌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답을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Sartre, Jean Paul)’의 철학에서 찾아볼까 합니다.
사르트르는 우리가 무엇을 <소유>했는지 관찰해보면 우리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구체적 사물의 경우 직접 만들거나 획득하면 소유했다고 말할 수 있는데, 다시 말해 능동적으로
사물을 제작하거나 획득하는 것이 소유 개념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 그런데 여기서 사르트르는
소유의 개념을 좀 더 확장합니다. ‘구체적 사물’뿐만이 아니라 무형의 대상, 즉 정보나 지식 같은
‘앎’이나 ‘숙련된 기술’까지도 소유의 개념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무형의 대상에 정통하면
우리는 그것을 자신의 ‘소유’로 인식한다는 것이 사르트르의 주장입니다. ... 예를 들어, 10년 넘게
매일 아침 북한산 백운대를 등반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느 누구보다 더 등반코스를 잘 안다고
자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등반코스는 이제 본인이 <소유하고 있다>는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 닫힌 공간에 폐쇄적으로 모여 가치의 균질을 지향하는 공동체는 닫힌 영역의 바깥에
존재하는 이질적 존재들에 비해 스스로를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사르트르의 관점에서 <잘 안다>는 것은
결국 공동체 성원 모두가 닫힌 공간을 함께 <소유하고 있다>가 됩니다. ~ 누구나 소유할 수 있다면
그것은 ‘열린 공간’이 되기 때문에 공동체는 자신들의 (관념적)소유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닫힌 영역>을 형성하게 되는 것 입니다.
시간의 벽(deadline)이 생산하는 수많은 관념의 공간들은 쉽게 접근할 수 없는 폐쇄된 공동체를
형성하며, 그들 공동체는 스스로를 가장 잘 아는 작은 파편이자 동시에 전체를 <소유하는> 주인으로써
기능하게 됩니다. 특히 닫힌 영역 안에서는 <더 많이 알수록 더 많이 소유하기> 때문에 소유가 정점에
달하면 공동체 성원들의 연대는 강화됩니다. ~ 이를테면 <82년생 김지영>에 대해 많이 안다는 것은
82년생 김지영의 삶이 바로 자신의 삶으로 치환될 수 있는 것입니다. ... 이는 나이에 상관없이 오직
<82년생 김지영>을 많이 안다는 조건 하나만 충족하면 성립됩니다. 결국 공간은 <82년생 김지영>을
잘 아는(소유하는) 공간과 잘 모르는(소유하지 않은) 공간으로 분리(생산) 되는 것이며, 각각의 공간은
서로에 대해 폐쇄성 높은 닫힌 공간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인간을 미워한 신이 앙심을 품고 인간을 혹사시키기 위해 만든 것이 바로 노동이다!” - 호메로스 >
고대 그리스의 장편 서사시 ‘오디세이아(Odysseia)’의 작가 호메로스는 ‘노동’을 정의하면서
신이 인간을 고생시키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노동을 야만적이며
저주받은 행동으로 규정한 것은 당시 그리스가 <노예제> 사회였기 때문입니다. 노예제 사회에서
노동은 전적으로 노예의 몫입니다. 따라서 노예가 아닌 자가 노동을 하는 것은 야만적인 행위였으며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었습니다.(참고: 조안B 시울라, ‘일의 발견’) ~ 심지어 고대 그리스인들은
노동이 사람을 노예로 만들어 타인의 의지에 종속시키며 영혼까지 타락시킨다고 보았습니다. 이처럼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일을 한다는 것’은 자유로운 신분이 아니라는 것, 단지 ‘말할 줄 아는 짐승‘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 결국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인간다움’이란 ‘노동하지 않음’과 동의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현대사회에서 바쁘게 일한다는 것은 나름의 능력을 인정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반면
일하지 않는 실업 상태의 사람들은 속칭 ‘백수’로 격하되어 무능력을 상징하는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앞서 언급한 고대 그리스 말고도 근대 이전의 사회에서는 일하지 않는 한가함이 바로 <귀족>을
상징하는 징표였습니다. 근대 이전의 사회도 바쁘게 일하는 건 역시 노예나 머슴으로 불리는 하층계급
뿐이었던 것입니다. ... 문헌에 따르면 고대 이집트인들은 1년에 고작 70일 정도만 일을 했으며, 고대
아테네인들은 연간 50~60회 정도 여러 날에 걸쳐 축제를 즐겼다고 합니다. 고대 그리스 달력에는
1년 중 109일은 재판이나 정치적인 일을 하지 않도록 법에 의해 강력히 금지됐다고 합니다. 고대의
이러한 관습은 교회권력이 지배하던 중세까지 이어졌는데 ~ 중세에는 주일, 크리스마스, 부활절 같은
수많은 날들이 종교관련 축제로 채워졌고 이러한 상징적 축제일 사이사이에도 각종 계절 축제와
정치적 축제일 등이 넘쳐났습니다. ... 이러한 시대적 배경으로 중세 영국은 연간 3분의 1 정도가
여가 시간이었고, 프랑스의 경우 대혁명(1789) 이전의 노동자들은 1년 중 거의 절반에 가까운 시간을
휴일로 보장받았습니다.(참고: 알지니, ‘일이란 무엇인가’)
< “구체제에서 교회법은 노동자들에게 90일의 휴일, 52일의 일요일과 38일의 공휴일을
보장했는데, 이 기간의 노동은 엄격히 금지되었다.“ - (폴 라파르그, ‘게으를 수 있는 권리’) >
폴 라파르그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근대 이전 사회의 노동자들은 ‘게으름’을 제도적으로 보장받았던
것입니다. ... 시대가 인간의 노동에 어떤 시간의 벽(deadline)을 세웠는지에 따라 <노예의 공간>,
<귀족의 공간>, <게으름을 보장받을 수 있는 공간> 등을 생산했던 것입니다. ~ 더불어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는 노동시간에 세워진 시간의 벽(deadline)에 따라 이전처럼 <백수 vs 근로자> 라는
단순한 공간에서 <백수 vs 근로자 vs 불로소득자(자산가) vs 연예인 vs 스포츠선수 vs 유튜버>와 같은,
노동의 속성이 전혀 다른 다원적 공간이 생산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책을 읽다보면 러시아의 나무인형 ‘마트료시카(Matryoshka)’처럼 책 속에서 언급하는 또 다른 책을
만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 오래전 하루키의 에세이를 읽다가 알게 된 ‘존 업다이크(John Updike)’라는
미국의 작가가 있습니다. 그가 쓴 소설 ‘달려라, 토끼’에는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 “밧줄을 계속해서 비틀면 밧줄은 직선 형태를 잃고 갑자기 꼬이며 고리가 나타난다.
에클스의 말을 다 듣고 난 뒤 해리의 내부에서 그런 단단한 고리가 생긴다.“ - (존 업다이크/ ‘달려라, 토끼’ 382p) >
시간의 벽(deadline)은 국가, 정치, 자본권력에만 권한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평범한 개인들도
각자의 내면에 불안과 희망을 섞어 다양한 시간의 벽(deadline)을 세우고 그것을 비틀면 직선 형태를 잃고
갑자기 꼬이면서 단단한 내면의 고리가 나타납니다. ~ 반지하 월세방에 살면서도 과도한 집값을 잡기위한
정부의 부동산 정책에는 신랄한 비판을 하는 것은, 본인 미래의 어느 지점에 시간의 벽(deadline)을 세워두고
세상을 집주인의 시각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또한 <1% vs 99%>에서 지금은 99%에 해당하지만 미래에 세워둔
시간의 벽(deadline)에 가까워지면 본인은 분명 1%에 서있을 거라는 확신(다짐)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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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남 영광군 낙월면 안마도 ~
이집도 빈집일까. 인기척 없는 집 마당에 들어섰다 돌아서려는데 사람소리가 들린다.
“가지 마시오. 나는 사람 구경 못하고 사요. 어서 들어오시오.”
백발성성한 할머니 한 분이 방문을 열고 나그네를 부른다. 할머니는 거동이 불편한지
다리를 끌며 마루로 나온다.
“서러워 죽겄소. 이라고 살믄 뭐한다우. 아들 죽고 울고 다니다가 한 다리가 부러져 버렸소.”
관절염에 시달인 할머니의 손가락도 모두 비틀려 있다.
“날마다 일만 하고 살았응께 손도 발도 이라고 오그라졌소.
어서 가야할 틴디, 안 강께 걱정이오.“
할머니는 광주에 살던 아들을 잃고 벌써 여섯 해째 상심에 빠져 허깨비처럼 살아왔다.
작년에는 딸마저 유방암으로 앞세워 보냈다.
“나 혼자 엎어져 있응께 사람도 아녀요. 날마다 눈물만 흘리며 살고 있소.
밤낮 앉아서 땅굴만 파고 있소. 며칠씩 잠도 안와 헛굴만 파고 앉았소.
자식 먼저 보내놓고 놈 부끄러워 집 밖으로도 못 나가고 담 안에서만 사요.“
할아버지는 일흔 넷에 돌아가셨다.
“아들이 참 잘났었는디, 마흔아홉에 가 버렸어. 내 아들 가 버링께
나 찾아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그랑께 분하고 짠하제. ~ 영감은 자식들
하나도 안 앞세우고 갔어. 빙(병)나 갖고 여드레 만에 가 버렸제. 드러눕자
물 한 방울 안 마시고 여덟 날 누워있다 그냥 갔소. 험한 꼴 안 보고,
팔자가 좋은 양반 아니오. 참 복도 많은 영감이요.“
남은 자식들이 모시겠다고 해도 안 가고, 병원에 입원하라 해도 안 하고 섬에 혼자 사는 할머니.
“내가 뭐하러 병원에 간다우. 얼마나 더 살라고.
벌써 춥소. 추우면 뼉다구 오그라징께 불 넣고 사요.“
백발성성한 할머니는 여든 넷.
“내 나이 다 먹고 남의 나이 넷이요.”
지금은 덤으로 사는 중이다. 할머니는 벌써 선산에 묘지도 잡아 놓았다. 왔던 곳으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린다. ~ 할머니는 거동도 못 하지만, 누구 눈치도 안 보며 울고 싶을 때 맘껏 울고
배고플 때 라면이라도 끓여 먹을 수 있는 당신 집이 가장 좋다. 그래도 혼자 문밖출입을 하지
않고 틀어박혀 살아가니 더러 교회 사람들이 교회에 나가자고 찾아오기도 한다.
“교회 다니라 하면 나가 그라요. 하느님 아부지가 누구는 차별하것소.
교회 다니나 안 다니나 아부지 아들이제. 어떤 자식은 자식 아니요.
하늘에서 내려다보믄 다 같은 자식이제. 교회 안 댕긴다고 자식이 아니겄소.
바람만 불어도 아부지 살려주쇼. 그라고 사는 세상 아니요. 그라요 내가.“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소설이다. 어머니전. 221~224 페이지. / 강제윤 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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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영광군 낙월면 안마도에 사는 여든넷의 할머니는 아들과 딸을 먼저 앞세워 보냈습니다.
할머니 당신 삶이 세워놓은 시간의 벽(deadline)은 ‘여든’이었지만 ~ 4년이라는 시간이 더해져
할머니의 삶의 벽은 처음보다 더 두꺼워졌습니다.
“가지 마시오. 나는 사람 구경 못하고 사요. 어서 들어오시오.”
자신이 세운 시간의 벽(deadline)을 초월해 사는 할머니의 공간은 비록 다리가 불편할지언정
지나가는 이름 모를 나그네조차 반길 정도로 활짝 <열린 공간>이었습니다. 또한 사이토 준이치
교수의 말대로 할머니의 공간은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열려있는 <공공성>을 상징합니다.
실수를 반복한다는 것은 사람이 항상 같은 자리에서 넘어진다는 의미와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폐쇄적인 닫힌 공간에 자주 머무르는 이유는, 대개 비슷한 시점에 벽(deadline)을 세우기
때문입니다. ... 시간의 벽(deadline)은 관념의 공간을 생산하고, 생산된 공간은 독립적.폐쇄적인
닫힌 공간으로써 타자를 부정하는 분열의 씨앗이 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 이는 열린 공간인
공공성 확장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입니다.
2020년 한 해는 시간의 벽(deadline)에 가로막혀 방황하지 않고,
모두가 열린 공간으로 힘차게 뻗어나갈 수 있는 희망찬 한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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