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 22일 화요일

◆ 제도(구조)가 권력적으로 작동한다는 의미에 대하여 [by. 물파스]

[◆ 제도(구조)가 권력적으로 작동한다는 의미에 대하여]


(@ 오래전 이슈인에서 한 번 얘기했던 내용입니다. 여기에 몇가지 내용을 추가합니다.)

기독교가 지배하던 중세 서양에서는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하면
극형에 처해져 목숨을 잃어야 했습니다.성경이 쉬워지고 누구나 이해할수 있게 되면,
신부등 목회자의 권위가 사라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당시 사제들은 대중에 대해서는
일종의 특권을 가진 권력층 이었고, 이는 오늘날 소수 지배권력층과 다를바 없는 것이었습니다.

중세의 죄수들은 고문에 의해서 몸의 힘을 빼앗겼지만, 근대에 와서는
노동을 함으로써 몸의 힘을 생산하는 효율로 전환하게 됩니다. 즉, 몸에 가해지는 권력이
"고통과 억압의 권력"에서 "생산하는 권력"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프랑스의 세계적인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 이러한 권력 관계를 단순히
수직적으로만 이해하지 않고 더 나아가 현대사회의 <제도(구조)>안에서 횡적으로 분화된
"담론구조"를 밝혀냅니다.

우리는 몸이 아플때 병원을 방문해 의사와 상담을 합니다.
더불어 대부분의 환자들은 의학지식이 부족한 상태입니다. 따라서 의사의 말을 대부분 수용하면서
의사의 지시대로 약도 먹고 음식도 조절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특이한 현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의사는 우리에게 그 어떤 물리적 폭력이나 협박도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행동은 거절할수 없는 어떤 <"권력">에 의해 움직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날 현대 사회에서는 제도가 만들어낸 '권력관계'가 너무나 많이 생산되고 있습니다.
즉, 사법적 권력관계를 넘어서서 사회제도(병원, 금융, 군대, 언론, NGO 등)가 생산한 권력관계는
사회 곳곳에 다양하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 푸코는 이러한 제도영역 안에서 생산되는
전문적 언어양식을 <담론>이라 정의했습니다.

의사가 환자에게 전달하는 의학용어, 경제(금융)전문가의 경제용어, 그리고 법률용어 ... 그래서
의사와 환자와의 관계에서는 <의학담론>이 생성되고, 이 과정에서 의사는 담론(의학담론)의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 ~ ~ 더불어 담론의 주체는 "권력관계"에서 우위에 서게 되고, 이것은 과거 중세시대의
사제들이 소유한 성경해석 능력과 같은 하나의 특권과 같은 의미인 것입니다.

하지만 전문적 지식인으로서의 "담론주체" 들이 위협을 받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전문지식이 보편화 되고 대중화 될때인데, 푸코는 이것을 바로 "권력의 해체"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담론이 생성 됩니다. 담론이 권력을 만들어내고, 권력은 다시 담론을 재생산함으로서
권력관계는 지속성을 갖습니다. ... 이렇게 담론과 권력의 연대는 사라지지 않는 필연의 관계에 있습니다.
문제는 현대 사회에 있어서 담론이 미시화 되는 부분인데 ...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거대 담론이 사라지고
확인할 수 없을 만큼 작아져서 평범한 일상처럼 작동되는 방식입니다. 다시 말해, 담론 자체가
아주 당연시 되어 시민들이 이러한 은폐된 권력관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
오늘날의 권력이 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권력이 은폐되었다>라는 의미는 '권력' 자체가 하나의
사회제도가 되고, 구조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원형 모양의 감옥이 하나 있습니다. ... 중앙에 높은 감시탑이 하나 있는데, 이 감시탑은 늘 어둡습니다.
그리고 죄수의 방은 밝게 해놓았는데, 이러한 구조는 감시탑 안에서는 감방안의 죄수들이 항상 보이므로
언제나 감시가 가능하지만, 감방안의 죄수들은 중앙 감시탑의 교도관이 어두워서 전혀 보이질 않습니다. 따라서
죄수는 교도관이 지금 잠시 자리를 비우거나 잠시 졸더라도 항상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탈옥 같은건 절대로 꿈꾸지 못합니다 ... 이 감옥이 바로 1791년 공리주의자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이
제안한 원형감옥 <판옵티콘(Panopticon)>의 모습입니다.

인간에게 쾌락을 가져다주는 행위가 바로 선이며 옳은 것이라는 윤리관이 "공리주의"입니다.
원형감옥 판옵티콘을 설계한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의 주장인데, 공리주의에서는
사회의 행복은 그 사회의 포함된 개인들 각각의 행복(쾌락)을 모두 합한 것입니다.
많이 들어보셨죠? ... "최대 다수의 최대행복" 입니다. 따라서 공리주의 주장대로라면,
사회의 이익(행복)을 최대화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증진시켜야 합니다.
이를 '자본주의적 의미'로 해석해보면 이렇게 표현할수 있습니다. ~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한마디로 <생산성의 극대화>입니다. ... 그런데 판옵티콘은 이러한 자본주의적 의미에 가장 부합하는
구조를 가진 감옥입니다. 수많은 감방을 감시하는데 있어서 중앙의 감시탑 하나만(교도관 1명) 있으면
모든게 해결이 가능하므로, 이것은 감옥의 구조, 즉 <감시체제(제도)> 자체가 최대의 효과(성과)를
올릴수 있는 가장 자본주의적인 산물에 가깝다 할수 있는 것입니다.

(사회)제도나 구조가 권력적으로 작동하는 사례는 사람의 <신체>에도 녹아들어 있습니다.
푸코(Foucault)는 근대사회에서 지식과 권력의 목적이 바로 인간을 "표준화" 하려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표준화 중에서는 인간의 <"신체">에 대한 표준화가 가장 대표적인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신체는 고대나 현대, 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 기능이나 (신체)기관은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습니다.
한마디로 수백년전 사람의 몸이나 오늘날 사람의 몸은 차이가 없다는 것이죠! ... 눈, 코, 입, 손, 발, 내장기관 등
인간의 물리적 "몸" 자체로서는 과거나 현대나 그대로인 것입니다. 하지만 푸코(Foucault)는
<"신체도 하나의 사회제도다!"> 라는 ... 그야말로 푸코(Foucault)식의 정의를 내렸습니다. 무슨말인가 하면,
사람의 신체에는 권력이 주입한 어마어마한 비밀이 일종의 사회제도처럼 어떤 "의미에 엮여 있다" 라는 것입니다.

[@ 18세기 후반에 와서 병사는 만들어질수 있는 어떤 것으로 변했다.
형태가 갖추어지지 않은 진흙, 곧 부적격한 신체가, ...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있는
기계로(인간 기계) 변했다. 자세는 조금씩 교정될수 있는 것이었고, 계획적인 구속이 서서히
신체의 각 부분을 통하여 영위되었고 그것들을 자유롭게 지배하고 신체 전체를 복종시켜
항구적으로 취급 가능하게 만들고, 그리고 자동적인 습관이 되어 암묵리에 남게 되었다.
요컨대 "농민의 요소를 추방하고" ~ 그 대신 "병사의 태도"를 주입시킨 것이다.
- 푸코(Foucault). 감시와 처벌 中 ]

"신체도 하나의 사회제도다!" ... 라는 푸코의 정의는 가까운 일본의 사례를 통해
우리가 좀 더 쉽게 이해할수 있습니다.

1873년 일본에서는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천황의 이름으로 징병제를 도입했는데, 이것은 천황이 직접 지휘하는
군대를 조직화 하는 것으로 ... 농민, 상인, 평민에 관계 없이 만 20세의 남자는 모두 징병 대상이 되어
신체 검사에 합격하면 2년간의 국방 의무를 부담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근대 일본의 군대 제도가 정비되기
시작했고, 군대는 메이지 정부의 근간 무력으로서 국내외의 위기 상황에 상당히 중요한 물리력으로 자리잡게
되었던 것입니다. [@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근대 일본의 군대 창설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고,
수상과 원로로서 정치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때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머릿속에는 <통제(권력)>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두가지 의미가 있는데 ... 하나는 메이지 정부에 반항적이었던 각 번(藩.지역 행정단위)의
사족 병사를 통제하기 위함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까지 무장(武裝)과는 거리가 멀었던 농민이나 상인 같은
평민들의 신체를 <표준화> 하는 것이었습니다. 더불어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는 신체에 권력을 주입하는 일,
즉 <"신체의 정치기술(신체의 제도화)">을 아마도 근대 일본사회에서 가장 푸코(Foucault)적으로
잘 이해했던 인물일 것입니다.

단지 몇 개월의 훈련이면 인간의 신체는 재조립 될 수 있고, 어떻게 하면 공포를 느끼는지, 또 어떻게 하면
죽음도 불사하는 강력한 병사가 되는지 등의 신체조작 기술은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강렬한 전쟁(전투) 경험속에서
몸으로 얻어진 것이며 ... 이것은 야마가타의 고유의 기술이자 하나의 강력한 신념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신체의 정치기술"은 ... 이후 일본에서 <체조>의 도입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메이지 19년(1886년) 문부대신이었던 모리 아리노리는 <군대식 체조>를 학교 교육현장에 도입하는데,
당시 학생들의 신체를 통제하는 것이 "도덕의 향상"과 "근대적인 국가체제 완성" 이라는 과업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 국가주도의 체조 보급은 국민의 건강증진 같은
단순한 목적에 있지 않았습니다. 바로 <"조작가능한 신체"> 혹은 <"순종적인 신체">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 체조는 큰 힘을 기대할수 없는 군대의 신참들을 ... 호령과 함께 일제히 질서정연하게
행동하도록 만드는 훈련입니다. 근대적 군대에서는 병사들이 개인적인 판단이나 능력 및 임기웅변으로
싸우는게 아니고, 집단속에서 사전에 정해진 작은 역할을 부여받고 신호에 따라 그것을 되풀이해서
반복하는 것입니다. ~ (중략) ~ 체조가 집단 질서를 높여주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것은
이 전술상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평범한 능력의 개인들을 기대이상으로
유효하게 활용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 (건강한 일본사 中) ]

근대 국가에서는 예외없이 국민의 신체를 통제하고 표준화하는 작업이 이루어졌습니다.
즉 ... 관리하기 쉽고, 순종적인 신체를 만드는 것이 정치적으로 가장 우선시 되었다고 할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체의 정치기술"은 처음에는 병사들의 신체를 표준화 하였고 ... 이후, 일본에서 모리 아리노리의
군대식 체조가 학교에 보급된 것처럼, 근대 국가에서는 반드시 통제가 필요한 계층과 집단들이 존재 했었는데,
다시말해, <감시와 훈련 및 교정>이 필요한 계층들이었습니다. ... 그들은 바로 광인들과 학교 아이들,
식민지 원주민 등이었고, 나중에는 "생산수단에 구속된 사람들", 즉! ~ <산업사회 노동자들> 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신체를 표준화 하는 작업의 궁극적 목적은 신체의 지배를 통한 정신의 지배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정말로 중요한 점은, 이러한 신체 지배가 강제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통제를 받고있는 대상들은 자신들이 "통제를 받고있다" 라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앞서 의사와 환자와의 담론구조에서 보셨던 것처럼) ~ 이것은 오직 자신의 의지와 자발적 선택에 의한
결과인 것입니다.(@ 최소한 그들의 의식 속에서는) ... 결론적으로 신체의 표준화(신체의 정치기술)는
아무런 의심없이 대상들 스스로가 권력속으로 걸어 들어가도록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정치권력은 인간의 "정신"과 마주하게 됩니다. "장수를 쏘지 말고, 말을 쏘라!" 라는 뜻은
결국 정신의 통제 이전에 신체의 통제를 중요시 하라는 얘기입니다.

1960년대부터 일본의 초.중등 학교에서는 소위 <삼각앉기>, <체육앉기>라는 신체통제가
전국적으로 이루어 졌습니다.[◆ 삼각앉기는 쭈그려 앉은상태에서 두손으로 무릎을 감싸고
머리(고개)를 무릅에 파묻는 모습입니다] ... 물론 "앉기놀이" 라는 건전한 명칭으로 보급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앉기는 ... 우선 두 손으로 무릎을 감싸고 있기 때문에 손장난을 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머리를 숙이고 있기 때문에 고개를 좌우로 돌릴수 없어 주의가 산만해지는 것을 자연스럽게
막을수 있으며, 무릎이 가슴부위를 압박해서 깊은 호흡이 어려워져 큰소리를 낼수 없을뿐만 아니라
친구들과의 대화의 단절이 일어납니다 ... 1958년 일본 문부성(교육부서)은 학생들을 따로 집합시키거나
통제가 필요한 상황에서 이러한 자세를 교육시키라고 공지하였습니다 ... 그런데 당시 학생들에게
주입했던 "삼각앉기"는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들에게는 너무나 편안하고 익숙한 몸의 사용법이 되었던 것입니다.
스스로의 몸(팔, 다리)을 수갑처럼 사용하여 자신을 구속하던 갑갑한 자세가 어느순간 부터는 아이들에게
일상의 편안한 상태가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 이렇게 권력(사회제도)은 우리의 몸과 정신에 매우 자연스럽게
착근(着根)되고 있었습니다.

"삼각앉기"는 아이들의 몸이 자신들도 모르게 권력(신체의 정치기술)에 예속화 된 것과 같습니다.
몸의 기억은 생각보다 강렬합니다 ... 시간이 지나 <일상처럼> 편안한 상태가 되고, 이제 아이들은 선생님의
"집합!" 이라는 명령이 없어도 언제 어디서나 앉아야할 상황이 되면, 하나의 자발적 주체(주체화)로서
자유롭게 스스로 "편안한상태(삼각앉기)"를 선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 또한 이렇게 편안한 상태의 삼각앉기가
스스로 느끼고 선택한 하나의 주체적인 행위로 고착화되면, 그들의 자녀들, 즉 다음 세대들부터는 아무런 의심없이
편한상태(삼각앉기)를 기계적이고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삼각앉기를 사회적 상식처럼 받아들인다!)
다시말해 이 모든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며, 모두가 본인의 자유의지에 따라 선택한 일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작년(2018년) 10월부터 시작된 프랑스 사회의 <노란조끼 시위(Yellow Jackets movement)>가
현재도 우리 언론에 종종 보도되고 있습니다. 시위 역사가 풍부(?)한 프랑스 답게 시위의 '과격성'과 '폭력성'에 대한
지적이 많습니다. ... 더구나 광장에 수백만이 모였음에도 단 한건의 폭력시위도 없이 평화롭게 국가 최고권력까지
무너뜨렸던 경험을 가진 자랑스런 대한민국 국민의 시선으로 보면, 프랑스 국민들의 시위행태는 어쩌면
대단히 미개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 그런데 이 지점에서 푸코의 시선을 대입해보면 전혀 다른 양상이 보입니다.

권력이 시위주체에게 행사하는 (시)공간적 규제는 일본의 삼각앉기 및 푸코의 신체에 가하는 폭력(통제)과
궤를 같이 합니다. 권력은 그러한 공간적 규제를 소위 < 평화적 질서유지>라는 좀더 순화된 표현으로
총괄지어 버립니다. 또한 시위 주체가 아닌, 보편의 시선에서 바라보면 행정권력이 시민들의 불편을 최소화 하려는
노력으로 비춰져 <평화 시위>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시민권리'라는 상위 범주의 보편성을
일종의 도구로 사용하여 공간과 시간을 규제하게 된다면, 그리고 국가(권력) 내에서 일어날 수 있는 ... 이후
모든 시위에 대해 이러한 규제(질서유지)가 반복되어 나타나게 된다면, 두려운 것은 지속적으로 규제의 익숙함만을
요구받게 되면서 시위 주체의 <분노의 이유>가 잊혀지고, 어느 순간부터는 <시위 본질>을 망각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분노의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시위는 질서를 유지하는 평화로운 외침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결국 권력에 대한 저항 의지에 무기력함을 주입하고, 동시에 사회 안에서 시위의 내용(본질) 보다는
<시위의 기준(질서유지의 평화적 외침)>이 더 많이 강조되어 자리잡게 된다는 것입니다. 시청 광장에 버스산성으로
공간을 배분하여 한쪽은 시위주체를, 다른 한쪽은 일반적인 시민들로 분리하게 되면, 즉 시민들의 불편을 최소화 하고
질서유지를 위해 공간을 나누게 된다면 ... 결국 시위주체가 아닌 일반적인 시민들은 광장을 지날때마다
버스가 시위주체들과 자신을 철저히 구분지어 놓았기 때문에 ... 같은 지하철을 타고, 같은 병원을 이용하고,
같은 공공요금을 내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철저히 나와는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버스가 이들을 구분짓지 않았다면 시위자들이 거리로 나오고 일반시민들은 그들과 물리적으로
좀더 근접한 관계안에서 서로 섞이게 되면서 불편과 불만을 하소연 할수도 있습니다.(무질서 양산) ... 하지만 이것은
확실히 "침묵" 보다는 나은 상황이라 생각됩니다. 버스(산성)는 두 개의 세계를 만들었지만, 버스가 없어지면
일반시민들의 불만의 목소리가 나올수는 있어도, 그보다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 시위 주체들과 일반시민들이
같은 공간속에 존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시위 주체들과 시민들이 공간을 공동으로 점유하게 되면
권력에게는 하나의 공간속에 무질서하게 섞여있는 시위자들과 시민들을 솎아내야 하는 골아픈 문제도 발생하겠지만,
그보다는 시민들의 불만과 불편이 <"관심(시위의 본질, 저항하는 이유)">으로 전이될 가능성을 더 크게 염려해야
할 것입니다. 권력은 그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행정을 비롯한 통제 가능한 일부의 영역(ex 언론)은 분명히 존재하겠지만,
광장에 섞여있는 수많은 독립적 의식 덩어리들은 웬만해선 통제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버스산성 같은 공간의 통제는
결국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의식(정신)의 통제와 그 의미가 유사하다고 할 수 있으며 ... 이것은 앞서 살펴본
일본의 삼각앉기와 푸코의 신체 통제 처럼, 통제에 관한 한 모두가 유사한 프로그램이 사용됐다고 말할수 있을것입니다.
또한 '질서(시위규제)'가 보이지 않는 하나의 '폭력'으로 작용한다고도 말할수 있으며, 이러한 공간의 규제가 반복되고
사회안에서 표준적 시위 방식이 합의된다면 ... 이제부터 시위 주체들은
<"시민들의 보행권을 침해하지 않도록(정해진 공간을 벗어나지 않도록)"> 무의식적으로 스스로를 통제하게 될 뿐만 아니라
이러한 권력의 규제 요구에 익숙해 지면서, 배후의 숨은 제도가 권력적으로 작동하는 방식의 실체는 파악하지 못하고,
이 모든 것이 자신들의 자유의지로 결정되어진 것이라며 조금씩 내면화 시키게 된다는 것입니다.
[◆ 평화시위 반대를 주장하는게 아닙니다. ... 우리가 그동안 너무나 당연시해왔던 일들에 대해
한번쯤 고민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다시말해 "사회제도가 암묵적 권력으로 기능하는 방식"에 대해
생각해 보자는 의미라고 봐주시면 되겠습니다.]


담론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권력관계"에서 영원히 자유롭지 못하게 됩니다.
설령 담론의 주체가 어렵다면 최소한 담론의 구조라도 스스로 알아보려는 노력이 필요하고 ... 그래서
국민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담론질서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무식(無識)과 무지(無知)는 언뜻 비슷한 의미로 생각되지만, 둘은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무식은 지식과 정보의 빈곤입니다. ...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사는 사회는 정보 과잉의 사회입니다.
때문에 무식은 언제든지 극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지는 <알고 싶지 않다> 라는 마음이 지속되는 상태입니다.

푸코의 말대로 (주류)담론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단순한 용어의 정의를 안다고 뽑내기 보다는
그러한 용어가 그 사회안에서 어떠한 맥락으로 사용되고 있는지, 더불어 그런 용어가 생산한 담론이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권력적으로 기능하는지를 파악하는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 급하게 쓰다보니 맞춤법이 틀린 단어가 있을수 있습니다.
혹시라도 있다면 너그럽게 양해 바랍니다. ... 맞춤법을 염려하는 지금 제 모습 또한
어쩌면 제도가 암묵적 권력으로 기능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입니다. ~ 힘찬 한 주 되십시오.]

댓글 없음:

댓글 쓰기

부동산과 경제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