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현실)를 지옥에 비유한 ‘헬(hell)’ 이라는 단어가 거리의 신호등처럼 흔한 풍경이 되어버린
시대입니다. ... 그러다보니 (종교언어를 빌려 쓰자면)그야말로 도처에서 ‘구원’ 또한 차고 넘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세상이 지옥이라면 그 지옥의 구성원들에게는 반드시 자신을 구원해줄 절대자의 존재, 즉
신(神)이 요구됩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사회는 ‘신’ 자체의 존재보다 구성원 개개인들의 사회적,
심리적 공간좌표가 현재 어디에 위치해 있는가에 따라 마치 무대 위 연극배우처럼 관객의 부름에는
언제든 나타나줘야 하는 신이 더 중요해졌다 할 수 있습니다.(책무로서의 신) ... 한마디로 개개인들
각자가 처한 사정에 따라 신은 각기 다른 모습으로 개인 앞에 신속히 달려와야 하는 현명한
심부름꾼인 것입니다. 때문에 신은 다양한 형태로 우리 앞에 등장합니다. 그것은 개인의 강한
신념체계일수도 있으며, 무지의 망령일수도 있고, 귀신의 장난(살인욕구나 전쟁욕구 등)일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개개인들 각자가 의지하는 신의 형태가 다양하다보니 어느 땐 신들의 경합에서
밀려나 자신이 믿는 신(신념체계)이 한 순간에 붕괴되는 상황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 그러나
신념체계의 처절한 붕괴를 경험하고도 여전히 자신의 승리를 고집하는 우매한 개인들이 존재합니다.
일종의 ‘정신승리’인 것입니다.
루쉰이 1921년에 쓴 <아큐정전(阿Q正傳)>은 청나라 말기를 배경으로 하는 풍자소설입니다.
소설의 주인공 아큐는 가난한 동네 어디에나 한두 명쯤은 있을법한 가장 바보스럽고 멍청한
인물입니다. 아큐는 본인이 맞닥뜨리는 모든 현실상황에 대해서 항상 자신이 승리했다고 여깁니다.
동네 불량배들이 자신을 때리면 아큐는 그 순간 자신을 벌레라고 생각합니다. 불량배들은 야큐를
때리고 놀렸다고 재밌어 하겠지만, 아큐는 그 순간 벌레였기 때문에 불량배들이 때린 것은 야큐가
아니라 벌레인 것입니다. 때문에 아큐는 불량배들과의 다툼에서 승리했다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세상에서 자기를 이길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아큐 자신만 가능하다 생각하기 때문에 아큐는 항상
승리자의 위치에 서있는 존재입니다. 노름판에서 돈을 잃어도 아큐는 승리합니다. 누군가 자신의
머리에 주먹질을 해도 아큐 자신의 머리가 상대의 주먹을 때렸다고 생각합니다. ... 아큐는 언제나
승자입니다. 나중엔 도둑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형장으로 끌려가게 되는데, 형장에서 서명 란에
붓으로 동그라미를 그리면서도 그것이 제대로 그려지지 않았다며 그것을 본인 인생의 최대 오점으로
생각하며 총살형을 당합니다.
아큐정전(阿Q正傳)은 신해혁명 전후 시기의 무기력했던 중국인을 희화화(戱畵化)한 소설입니다.
루쉰은 주인공 아큐를 통해 시대적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오직 대국의 자부심과 자존심만 지키려
했던 중국인의 낡은 사고와 함께 좌절과 모욕적 상황에서도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던 중국인만의
어리석은 <정신승리>를 지적한 것입니다. 아큐는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있는 인물입니다. 진짜 현실
세계에서는 항상 패배자이지만, 자신의 세계 안으로 들어오면 아큐는 언제나 (정신)승리합니다.
우리들 또한 종종 한국의 아큐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이들은 본인들이 구축한 세계가
다른(외부) 세계와 충돌했을 때,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의 세계가 붕괴하는 걸 경험했을 때
이들은 서둘러 아큐가 됩니다. ... 오래전 시골에서는 아이들이 이불에 오줌을 싸면 아이 머리에
키를 씌우고 동네를 돌며 소금을 얻어오게 했습니다. 지금은 미소 짓게 만드는 지나간 과거의
재밌는 풍습쯤으로 생각하겠지만, 이는 <형벌의 본질>을 가장 정확하게 파악하고 내린 징벌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치부와 잘못이 공개적으로 드러나 한낱 웃음거리가 된다면 자아의 일부가 파괴됩니다.
또한 그 잘못이 본인이 오랜 시간동안 믿고 의지하던 ‘신(神)’, 즉 신념체계였다면 그 충격은 배가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아 파괴에 대한 불안 때문에 많은 이들은 아큐를 선택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처음부터 ‘잘못(오류)’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이러한 오류의 부정은 기독교의
<부정신학(否定神學)>과 닮아 있습니다.
부정신학은 우선적으로 신을 부정하는데서 출발합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내 컴퓨터는 신이 아닙니다. 마우스도 신이 아닙니다. 좋은 향이 나는
뜨거운 커피도 신이 아닙니다. 집 밖을 나가보면 주차장에 주차된 자동차가 많은데 이것들도 신이
아닙니다. 거리의 신호등도 신이 아니며, 맥도날드 햄버거도 당연히 신이 아닙니다. 길을 걷다보니
어느 건물 2층에 교회가 있습니다. 그 교회의 담임목사도 신이 아닙니다. 3층에는 수학학원이
있습니다. 수학 선생님 또한 신이 아닙니다. .... 세상의 모든 이가 <그럼 저것이 신이냐?“>라고
묻는다면 이렇게 부정신학은 모든 걸 부정합니다. ~ 왜 그럴까? 애초에 신은 확인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부정신학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에 대해 <신이 아니다!>라는,
즉 부정(否定)하는 방법으로만 신을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신이 아닌 것을 하나하나
제거하다 보면 결국 최종적으로 남는 것은 ‘신(神)’ 뿐이라는 것입니다.(그것이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 )
결국 어느 사회에나 존재하는(존재할 수 있는) 아큐들은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자신의 오류에 대한 외부(현실) 세계의 지적을 부정함으로써 언제나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한마디로 자신의 신념체계는 언제나 정당하며, 이것은 만물을 부정함으로써
신은 존재를 규명하고자 하는 <부정신학(否定神學)>의 논리와 같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미래학자 버그민스터 풀러(Buckminster Fuller)는 '지식두배증가곡선(Knowledge Doubling Curve)’에서
인류의 지식총량이 100년마다 2배씩 증가해 왔다고 했습니다. 이런 흐름은 1990년대에 25년으로,
현재는 그 주기가 13개월로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 그리고 2030년쯤이 되면 인류의 지식총량은
3일마다 2배씩 늘어나게 된다고 합니다. ... 그야말로 지식의 빅뱅입니다.
지식이 범람하는 차원을 넘어, 우리가 우리의 지식을 감당할 수 없는 미래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답을 찾는 일은 이제는 의미가 점점 더 사라질 거라 생각됩니다. 자판을 몇 번 두드리거나
몇 마디 말만으로도 답은 초단위로 찾아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젠 우리에게 진정으로 무엇이 중요한지 정확히 찾아야 할 시대가 온 것 같습니다.
‘과연 신은 존재하는가?’, ‘인간에게 진정으로 신이 필요한가?’와 같은 해묵은 질문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물음이 필요해 보입니다. ... 바로 <나는 인간으로 대접받고 있는가?>입니다.
신에게 기도하는 건 <사람>입니다. 따라서 자기 자신이 우선 공동체 안에서 ‘사람’, 즉 하나의
진정한 인격체로서 대접받고 있어야만 기도하는 행위(신념체계를 정립하는 행위)가 가능해집니다.
<‘인간으로 대접받고 있는가?’ ~ ‘개 취급을 당하고 있는가?’> ...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먼저 찾아야만 우리는 우리만의 신(神), 즉 신념체계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가능하다 생각됩니다.
[@ "인간으로 대접받고 있는가?"에 대한 답을 찾아보기 위해
오래전부터 아주 긴글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계획대로라면 어제나 오늘쯤에
가능하다 싶었는데 결국 추석이후로 미뤄야할것 같습니다. 더불어 분량이 너무나 많아졌습니다.
다루는 주제가 많아서인데 ... 자본주의, 사회주의(마르크스주의), 민족(주의), 68혁명, 페미니즘 등
보기에도 혼란스러울거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이 주제들을 일관된 하나의 이야기로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소요됩니다. 또한 지금까지 제가 이슈인에 올린
글중에서 아마 가장 많은 분량의 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글이 마무리 되면 3~4편으로 나눠서
올려볼 예정입니다. ~ 물파스는 어차피 긴 글 쓰는 사람이니 모두 이해해주실줄 믿고
아무튼 정성을 다해 보겠습니다. ... 편안한 추석연휴 보내시기 바랍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