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형 페미니즘이여 지네를 거부하고 칸(Cannes Film Festival)에서 박수를 받아라]
(성은 상품화 하면 안 되는가? - 한국형 페미니즘과 여성가족부, 수많은 여성단체에서 도출되는
상식밖의 여러 문제들의 근본 원인은 바로 경직된 우리의 성문화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따라서
이야기는 그 부분을 중점적으로 다루게 될 것입니다. 물론 모두 저의 주관적 견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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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한국형 페미니즘 운동을 보면 지네가 보입니다.
지네는 절지동물에 속하고, 몸이 가늘고 길며 여러 마디로 이루어져있는데 ... 그 마디마다
한 쌍의 걷는 다리가 있어서 많은 발을 가진 동물로 유명합니다. 그러나 지네의 이동(방향성)은
선두가 결정합니다. 선두가 가자고 하면, 아니 선두가 가는대로 나머지 발들은 따라갈 수밖에
없죠.(맹목적 추종) ... 선택권이 배제된 채 가치 없는 노동을 나머지 발들은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이어가야 합니다. 심지어 꼬리부분에 달린 발은 보행에 쓰이지도 않습니다. 보행과 같은 이동욕구마저
거세된 발은 더 이상 발로서의 의미를 상실하고 오직 존재(소속)감 하나만으로 만족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정말 만족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 ) ~ 그리고 더 중요한건 지네의 눈입니다.
홑눈, 즉 밝거나 어두운 정도만 감지할 수 있는 원시적 형태의 눈만을 지네는 소유하고 있는 것인데,
이렇게 ‘밝다와 어둡다’라는 이분법적 시선이 지네가 세상을 바라보는 한계인 것처럼 한국형 페미니즘
또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지네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그들에게 세상은 오직
“한국형 페미니즘에 좋은(동조) 것과 나쁜 것”으로 이분되어 이해됩니다.
이분법은 사태를 간단명료하게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을 제공합니다. 하지만 독단과 독선에 빠질 위험이
상시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다양한 사고체계가 요구되는 공동체 사회에서는 수시로 경계해야할 위험한
사고방식입니다. 또한 이러한 이분법적 이해, 즉 “좋은 것과 나쁜 것”이라는 시선에는 암묵적 순결강박의
의미도 내포하게 되는데, 한마디로 한국형 페미니즘은 전제부터 무결점상태이므로 누구라도 문제(오류)를
지적하면 그것은 곧 한국형 페미니즘에 “나쁜 것”이 되어버립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태어남은 신의
특혜를 받아 이미 ‘원죄(Original Sin)’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무결점의
순결강박은 선두의 방향성을 합리적 의심이나 논리적 검증 따위가 전혀 필요치 않는 ‘절대선(善)’으로
인식하게 만듭니다. 때문에 선두는(선두의 방향) 항상 옳습니다. 그래서인지 의미 없는 노동을 반복하는
수많은 지네의 발처럼 한국형 페미니즘에 합류한 상당수의 여성들을 마주할 때면 그녀들에게서 알 수 없는
슬픔과 마음의 가난이 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 왜 자꾸만 ‘한국형!’, ‘한국형!’ ... ”한국형 페미니즘“이라고 하는지
궁금해 하실까봐 먼저 해명을 한 후에 계속 이야기를 이어가 보겠습니다.
학계는 오늘날의 페미니즘(Feminism) 운동이 대략적으로 50여 분야로(혹은 그 이상) 그 유형이
상당히 복잡하고 다양화되고 있다면서 그 외연이 현재도 계속해서 확장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소극적 형태의 페미니즘 운동에서부터 상당한 급진적 운동으로까지 그 범주가 넓어지고 다양화되고 있다는 것인데,
예를 들면 ... 정치경제적 평등, 사회적 평등, 남성거부(분리주의), ‘남성과 여성’이라는 시선 자체를 거부하는
퀴어(queer)운동, 페미니즘의 이론적 관심과 실천(행동주의),심지어 사랑하는 연인들 사이의 뜨거운 섹.스(S.ex) 까지도
거침없이 간섭하며 <"삽.입이 이루어지는 모든 섹.스는 강간이다!(앤드리아 드워킨.Andrea Dworkin)"> 라는
주장을 펴는 급진을 넘어 극단에 가까운 페미니즘 운동도 존재합니다. 이처럼 오늘날 페미니즘의 운동 변화는
그 종류와 다양성(복잡성), 급진성 등에서 오랫동안 페미니즘을 연구해온 학자들조차 뭐라 딱히 정의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이것은 페미니즘(Feminism)이다!"라는 선언적 구호만 외치면 페미니즘으로 통용되는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가 우리사회 페미니즘 운동에 굳이 <“한국형”>이라는 수식어를 갖다 붙인 이유는
현재 지구에서 진행 중인 페미니즘의 복잡성과 확장성을 고려했을 때, 그 안에서 한국만의 고유한 속성과 차별성을
구별해내기 위해서입니다.
최근의 (한국형)페미니즘 운동들의 과격한 양상들을 지켜보면서 혁명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지네의 발’ 같았던 그녀들의 수고(?)에 어울리는, 그래서 그녀들이 자칭 ‘여성혁명’이라
스스로 칭송해 마지않는 이 과격한 퍼포먼스를 상징할 만한 적당한 이름을 생각해보았습니다.
바로 <원숭이 정치학!>입니다.
인간에게 무리 짓는 본능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정치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를 도입한 국가에서 정당이 존재하는 이유인데 ... <정당>이라는 의미의 직관적 이해는
생각을 공유하지만 그 저변에는 각자의 이해관계가 끈적하게 결부되어 있는 매우 이기적인 무리들의
집합이 바로 정당이며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그 이해관계로 인하여 정당은
또 다시 <계파, 정파>로 세분화되기도 합니다. 아무튼 정치는 각각의 집단들의 싸움입니다. 수많은
개개인의 생각들이 특정 집단(정당)이라는 한 곳에서 공통된 하나의 정신적 수원(水源)을 생성하고,
그렇게 생성된 집단의 공통정신이 다른 집단의 정신과 치열하게 싸우는 곳이 바로 정치적 공간입니다.
때문에 정치는 필연적으로 <권력투쟁의 공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한국형 페미니즘에
부여한 <원숭이 정치학>은 어떤 의미인가?
정치가 권력투쟁의 공간이라면, 투쟁은 당연히 싸움이며, 싸움은 승리를 목표로 합니다. 더불어
승리를 위해 정치를 극단까지 밀고 올라가다보면 물리적 힘과 만나는데, 그것이 바로 전쟁이며
대개 전쟁은 정치의 최후의 수단이 됩니다. 그래서 정치는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또 사태가 극단적
상황까지(전쟁)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선은 상대를 설득하는 작업을 시도하며 설득은 명분과 논리를
필요로 합니다. 때문에 정치는 치밀하고 정교한 두뇌싸움의 일종이며, 이러한 정치 놀음이 자국 내에서
벌어지면 그것은 정당간의 싸움이고, 자국을 벗어난 국가 간의 싸움이라면 우리는 이것을 <외교(전)>라고
합니다. 그런데 현재 한국형 페미니즘에는 이러한 요건들이 전무합니다. 쉽게 말해 승리를 위한(권력쟁취)
나름의 투쟁은 존재하지만 상대를 설득하기 위한 최소한의 명분과 기본적 논리는 이미 실종된 상태이며,
설사 있다손 치더라도 치밀하고 정교한 부분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으며 그저 억지스럽고 어설픈,
그리고 설득력 없는 굉음만 들릴 뿐입니다. 때문에 정상적, 아니 상식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은 그녀들의
굉음에 이질감을 느끼며 동조나 응원을 해야 할 그 어떤 매력적 조건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녀들의 투쟁은 ‘정치의 부재’, 혹은 ‘정치흉내내기’속에서 벌어지는 흥미로운 일회성 이벤트, 그 이상을
넘어설 수 없는 어떤 한계점에 맞닿아 있다고 생각됩니다.
"아이고! ~ 원통하고, 원통하다! ~ 아이고! ~ 아이고 ~ "
억겁(億劫)의 시간동안 땅을 치고 울분을 토하고 서럽게 노래해야만 딱딱하게 굳어있던 가슴속
시커먼 멍울이 비로소 슬픈 꽃으로 피어난다는 우리 조상들의 한(恨), 특히 <여자의 한(恨)> 입니다.
한(恨)의 깊이가 얼마나 깊었으면 억겁의 세월을 오직 구슬프게 울부짖는 데에만 힘을 쏟아야 하는지,
그래서 우리 선조들의 <열녀관>을 통하여 그동안 무심하게 잊혀지고 파묻혔던 그 처절한 한(恨)을
슬픈 꽃으로 승화시키고 <여자의 한(恨)>의 깊이 또한 미루어 짐작해보기로 합니다.
[◆ 용동 길가에 정각이 하나 있다. 처녀가 목화를 따고 있는데
왜놈들이 올라가면서 유방을 한 번 만지자 처녀가 바로 집으로 달려가서
부엌칼로 유방을 잘라버리고 죽었다. 임금이 친히 사액을 내린 것이
그 열효각이다. - (칠곡면 용동 열부각), 한국구비문학대계(8-10, 59면)]
[◆ 한 남자가 함께 공부하던 친구 여섯 명에게 각자의 집안에는
열녀가 많이 난다는데 그게 사실인지 각각 자신의 집에 가서 시험해보고자
하였다. 이들은 각자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자기 집 담을 넘어 자신들 부인과
동침하고 왔다. 다음날 친구들 부인 모두가 자결했다는 부고가 날아왔다.
- (남편과 자고도 죽은 헛 열녀), 한국구비문학대계(7-17, 323~325면)]
[참고: 강등학 / 한국구비문학의이해. 156페이지/ 월인 출판]
위 두 사례는 극단적 정절관념을 보여줍니다. 특히 ‘열효각’ 사례는 완전무결한 신체적 정결성을
고집하는 열녀관을 보여줌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을 신체의 일부로 치환시키는 가치전도적 양상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 열녀전설은 외적의 침입에 의한 전란이나 국가적 혼란기에 특히 많이 나타났는데
고려후기에 나타났던 신유학자들에 의해 기술된 본격적인 열녀전은 주로 고려말 왜구의 잦은 침입과
몽고란을 배경으로 이루어진 것들이며, 신유학적 이념을 기반으로 세워진 조선은 국초부터 열녀의식의
정착을 위해 꾸준히 시행했던 각종 포상정책의 결과 열관념이 광범위하게 자리잡아감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열녀이야기가 양산되었고 조선후기에는 전 계층에 걸쳐 수많은 열녀들이 배출되었다고 합니다.
[◆ 옛날에 한 아가씨가 흰가마를 타고 시집을 갔다.
흰가마는 신랑이 죽고 없을 때 타는 가마다. 과부살이를 하러
새 처녀가 시집에 간 것이다. 이 처녀과부는 시집에서 열녀(烈女)가
되기를 강요받는다. 왜냐하면 열녀로 소문나 정문(旌門)이 서면
그 집안에 관역(부역)이 면제되고 조세가 면제되며 병역이 면제되기
때문에 어느 가문이건 어떤 열녀가 될 조건만 구비되면 그것을 강요하게
마련이었다. 이 처녀는 태어나 한 번도 보지 못한 남편의 무덤에 가서
주야로 통곡하게 되어있다. 그렇게 하면 남편이 살아난다고 꾄 것이다.
처녀가 통곡하고 있는 밤중에 무덤이 갈라지고 이 처녀가 그 무덤으로
끌려들어가는 것을 친정에서 처녀를 따라 함께 온 하녀가 보았다.
달려가 저고리섶을 잡고 늘어졌다. 옷섶이 세모꼴로 찢어지더니
찢긴 옷섶은 나비가 되어 하늘로 날아갔다. 이것이 한국의 나비 생성에
관한 설화 가운데 전형적인 하나다.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젖꼭지를
가렸던 세모꼴의 올리브 나무껍질이 나비가 되었다는 희랍의 그것에
비하면 한국의 나비는 슬픈 나비다. <정문(旌門) - 충신, 효자, 열녀 등을
표창하기 위하여 그 사는 집 앞이나 마을 입구에 세우던 붉은 문>
... (한국인의 기속 - 성과 미신. 91페이지/ 이규태/ 기린원)]
<춘향전>을 비롯한 선조들의 열녀관은 비록 이야기에서 그치지만, 당시 우리 여성들에게 가해졌던
억압과 극단적 정조관념의 무게는 이야기의 내용만 들여다봐도 어떠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렇듯 당시의 열녀관은 현대인에게 <여자의 한(恨)>의 깊이를 어느 정도는 가늠케 해줍니다. 더불어
우리 어머니들의, 어머니들의, 어머니들의 ... 어머니들에게 강요된 당시의 시대적, 묵시적 <열녀관>은
<여자의 한(恨)>과 서로 호환 가능한 용어로써 세대를 관통하는 여성억압의 대표적 상징으로 인정해도
큰 무리가 아니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한국형 페미니즘은 자신들의 ‘원숭이 정치학’을 위해서 그리고 자신들의 확장성을 위해서
우리 선조들의 처절한 <열녀관>을 모두의 동정과 연민을 흡수하는 강렬한 페이소스(pathos) 용도로
활용함으로써 시대의 멍울마저 자신들것으로 둔갑시킨 뻔뻔한 절도행각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작태는 결국 진정성을 담아낼 수 없기 때문에 아무리 대중을 향해 처절한 호소를 한다고 해도 그녀들
바깥의 정신들을 더 이상 그녀들 안으로 끌어올 수도 없으며, 끌려들어가지도 않을 것입니다. 결국
외부로의 확장성을 원하는 그녀들의 운동은 그 강도가 강하면 강할수록 실질은 안으로만 점점 더
쪼그라드는, 즉 현실과의 괴리만 더 커지는 모순이 발생하고 한국형 페미니즘 운동을 통한 정치로의
연장은 단순한 염원에서 그치게 될 것입니다. 때문에 현재 진행되고 있는 소란스런 한국형 페미니즘은
한계를 드러낸 하나의 ‘정치흉내내기’이며, 오직 <무리지음> 자체에서 착란적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저는 한국형 페미니즘을 <원숭이 정치학>이라 명명하려 하는 것입니다.
이쯤에서 저는 한국형 페미니즘을 한다는 분들에게 좀 더 솔직해져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특히 <섹스(S.ex)>는 한국사회에서 여전히 무기수에 가깝습니다. ... 최근 들어 "성인지 감수성"이
우리사회 주요 화두가 되고 있습니다. 이 정체불명의 외계어는 유명인들의 미투 운동과 맞물리면서
성폭력,성희롱(추행) 사건에서 상당한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 한마디로 법이 성(性)과 연계된
사건을 바라볼 때는 여성이 피해자인 경우가 많다는 통계적 근거를 들어 여성의 입장을 좀 더 많이
고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때문에 여자는 일관된 진술과 눈물만 준비하면 그 즉시 피해자로
인정받을 수 있는 일종의 법률적 인센티브를 얻게 된 상황입니다. 철저히 합리적이고, 또 형평성에
근거하여 법 적용이 이루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결국 사태가 이 지경까지 된 것은 우리 사회가
아직도 섹스(s.ex)를 무기수로 가둬놓고 자유로운 성(性)담론을 허용하지 않는 경직된 문화를 지속하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우리사회는 너무나 모순입니다. 요정 정치, 룸살롱 공화국이라는
조어가 만들어질 정도로 ... 현실적, 실질적으로 대한민국 사회는 전 세계 그 어느 국가보다 더 화려한
밤문화가 존재하는 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만 뜨면 한국 사회는 소녀 앨리스가 빠졌던
구멍 속의 ‘이상한나라’가 됩니다. 어느 국가보다 엄숙한 성(性)도덕이 강조되며, 과도한 성욕의 표출은
저급하고, 성(性) 상품화에는 극도의 히스테리 반응을 보입니다.
이제는 우리도 서서히 섹스(s.ex)를 가석방 시켜야할 시기가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GDP 1조 6천억 달러($), 세계 경제규모 10위권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성(性)담론이 이렇게
경직되어 유통되고 있는 나라는 아마도 OECD 국가 중 대한민국이 유일할 것입니다. 더불어 이러한
경제적, 문화적인 불편불일치(mismatch)로 인하여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희귀어가 탄생했다고 생각됩니다.
2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안희정 지사의 판결에 대해 김지은씨 측 변호인과 많은 여성단체는 법원이
<성인지 감수성>을 반영한 균형 있는 판결을 내렸다는 소감을 밝혔습니다. ~ 만약 여기서 '안희정'을
익명으로 전환하고 사건(판결)을 바라본다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가장 논리적, 합리적이어야만 하는 법질서에 <감수성(感受性)>이라는 상당한 비논리를 개입시켜
유죄판결을 유도한 작금의 사태에 대해 2019년 한국사회 상당수가 환호하고 있습니다. 양심과 도덕이
살아있는 사회는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바라는 가장 이상적인 사회일 것입니다. 하지만 <도덕재판>이
난립하는 사회는 질서가 붕괴되고 공포가 만연되는 사회로 귀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법치주의가
제대로 작동되는 대부분의 국가가 비논리의 대표적 상징인 도덕재판을 금지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성인지 감수성 재판>은 <도덕 재판>과 등치관계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 저는 안희정 지사를 옹호하거나 비난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 제 의견은 그냥 무관심입니다.)
[◆ 격렬한 섹스(S.ex)가 시작됩니다.
비명 같은 신음과 질펀하게 흘러내린 땀, 살덩어리들의 파도 같은 출렁거림을 오직 시선으로
받아들이지만, 차원을 뛰어 넘는 원시적 물성(物性)이 느껴집니다. 그러는 동안에도 상대의 입속에서
자신의 혀는 미친 듯이 녹아내립니다. 상기된 얼굴과 붉게 물든 귓불은 몽환적 눈빛과 잘 어울립니다.
아직 덜 녹은 혀가 잠시 바깥으로 흘러나와 얼굴과 귓불에 묻은 붉음을 닦아냅니다. 기형적 체위는
사마귀의 교접모습과 닮아있고 신기하다 생각할 때쯤 극한에 다다른 사정은 찰나(刹那)가 됩니다.
평온한 마무리 키스, 침대 위 ... 호흡이 먼지처럼 가라앉습니다. 정적속 전라의 남녀는 죽은 뱀처럼
말없이 똬리를 틀고 엉켜있어 미혹의 살덩어리들은 누가 누구의 것인지 주인을 분간하기
어렵습니다. ... 그렇게 황홀했던 섹스가 끝나자 수많은 사람들이 기립하여 환호와 박수갈채를
보냅니다. - 칸 영화제(Cannes Film Festival) ]
여자가 다리 아래로 많은 걸 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현대사회는 충분히 그렇게 정의될 수 있습니다.
또한 그것이 터부시될 이유도 없습니다. 여자의 몸이 반드시 ‘영화’같은 문화예술 장르에 편입될 때에만
긍정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강제규정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미 실제 현실에서는 여성 본인의 몸을
출세와 욕망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그렇게 드문 일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한국형 페미니즘은 이러한 현실을 애써 외면하며, 설사 그것이 만연된 사회현상이라고 해도 그것은 여성의
자의가 아닌,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남성이 만든)사회 구조적 현실이라며 모든 원인을 여성 외부에서,
특히 남성에게서 찾으려고 합니다.
“내 몸은 내 것이다!”
(한국형)페미니즘이 외칩니다. ... 그녀들은 여성의 몸의 권한을 강력하게 주장하면서도 정작 그 몸의
사용권한이 개인적 출세와 욕망 같은 조금은 속물적 근성과 결탁하여 민낯이 드러날 때면 마치 본인 몸에
다른 피가 섞여 들어오는 것을 완강히 거부하는 순혈주의나 인종주의적 히스테리 반응을 보이는 것이
현재 한국형 페미니즘의 비린내 나는 날것 그대로의 실체입니다. 그래서 그녀들에게 페미니즘의 성공을 위한
더 나은, 더 효율적인 진보된 페미니즘을 소개해주고 싶습니다.
<“차라리 모든 패를 까고 솔직해져라!”> ... 한마디로 실천적 진실성입니다.
지금까지 보여준 이중적 태도의 페미니즘 정신이 아니라 여성들 그대들 몸을 마음대로, 그리고
주변 시선을 의식하지 말고 당당하게 사용하라는 “여성들 몸은 진짜 여성들 것이다!” 라는 실천적 강령이며,
보다 현실적 메시지의 전달이고, 동시에 메시지의 정당화 노력입니다. 바로 사회(현실)를 칸(Cannes Film)으로
만들라는, 즉 현실과 영화(예술)의 합일인 것입니다.
사회가 칸이 될 수 있도록(칸의 사회화) 여성들 스스로가 각자의 심연에 숨겨진 출세와 욕망에
좀 더 솔직해짐으로써, 그리고 진실성을 담아 온전히 그 모습 그대로를 사회에 노출시켜 마음껏 박수를
받으라는 뜻입니다. ...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한국형 페미니즘은 한국사회 오래된 관습적
성 고정관념(gender stereotype) 및 일반 대중과의 충돌이 발생합니다. 그것은 페미니즘을 외치는
자칭 한국형 페미니스트들이 ‘여성(성)의 순결’ 자체를 바로 한국형 페미니즘의 <도덕적 자산>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페미니즘 입장에서는 한국 여성들은 최소한 도덕적으로 흠결 없는
순수한 처녀성의 결정체로 계속해서 남아있어야 하며, 혹시라도 그녀들의 ‘몸의 사용’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그것은 절대로 한국형 페미니즘이 수용해서도 안 되는 것이며, 설사 수용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오직 남성(남성이 만든 제도나 사회구조)에 의한 결과로 귀결되어야 한다는 조건이
전제될 때에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한국형 페미니즘은 성매매 여성들을 구원의 대상으로 인식합니다.
그럼 이쯤에서 이런 물음이 필요해 보입니다. ... 진정 <성(性)은 상품화하면 안 되는 것인가?>
강제성이 배제된 성(性)은 현대사회에서 이미 많은 국가들에게 하나의 상품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첫 눈에 반해 말을 걸어봅니다.
연락처를 받고, 손을 잡고, 낙엽 길을 걸어보고, 팝콘을 먹으며 영화를 보기도 합니다.
제법 쌀쌀해진 날씨 탓에 차분히 서로를 감싸며 체온을 느껴보기도 합니다. ... 키스(kiss)를 하고,
섹스(S.ex)를 합니다. 상대의 슬픔에 함께 울어주고 기쁜 일엔 함께 행복해 합니다. <사랑>입니다.
여기서 중요한건 이 모든 사랑의 과정은 그 어떤 누구도 대신할 수 없으며 간섭할 수도 없다는 점입니다.
오직 사랑하는 연인들 당사자들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따라서 국가가 한 개인의 <사랑의 과정>까지
책임져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성 상품화>는 설렘과 두근거림, 기쁨과 슬픔의 과정이 모두 생략되고, 오직 쾌락(성욕)만이
화폐 가치로 전환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사랑의 과정>은 개인에게는 일종의 판타지이자
동시에 실존입니다. 평생에 한번(혹은 그 이상) 있을까 말까 한 가장 큰 이벤트이며 ... 더불어 어느
누군가에게는 사랑의 과정이 1년이 되기도 하고, 또 다른 이에게는 그 절반의 시간이면 충분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평생을 서두르지 않고 아껴가며 천천히 과정을 쌓아가는 연인들이 존재할 수도 있을 겁니다.
<사랑의 과정>은 이처럼 개개인마다 허락된 타임라인(timeline)이 모두 다 다릅니다. 때문에 규격화, 표준화가
불가능하며, 이것은 곧 <사랑은 상품화가 불가능하다!>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 그러나 (일회성)쾌락은
다릅니다. ‘과정’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요구되지만, 원초적 쾌락(S.ex)은 돈과 10~30여분 남짓한 시간이면
충분합니다. 화폐는 <가격 기능>의 작동으로 대상, 즉 성(性)을 객관화 하는데 상당히 뛰어난 지표역할을 합니다.
더불어 시간은 언제든지 가격으로 <전환>될 수 있는 참 독특한 개념입니다. 그래서 쾌락은 상품성을 갖습니다.
[◆ 일본은 17세기부터 공창제가 시작됐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남성에 비해 여성의 수가 모자라 은근슬쩍 사창도 생겨나기도 했는데
당시 꽤나 성업 중이던 상황에서 문제는 일시에 많은 사람(이용자)들이 몰려들었을
때였습니다.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면 그들을 받아줄 여성들의 수가 부족하게
됩니다. 시계가 있었다면 정확한 (이용)시간을 다투어 문제를 해결 했었겠지만,
시계도 없었던 상황에서 잠시 짧은 시간을 내서 여자를 사야했기 때문에 그 시간(이용시간)을
측정하는 것이 상당한 고민이 됐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때 일본 사람들이 생각한 방법이
바로 향(香)입니다. 절에서도 향을 피우고 제사를 지낼 때도 향을 피웠던 것이 생각났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향시계>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향은 한번 불을 피우면 다 타는데 보통 15분~20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됐기 때문에, 손님들은 1시간정도를 놀고 싶으면 향 3개를 구입하고, 손님들이
한꺼번에 너무 많이 찾아오면 1인당 향 1개만 판매하는 방법을 써서 시간을 조절했다고 합니다.
성(性)이 가격과 시간(향)에 의해 규격화 및 표준화가 가능해지다보니 성(性)은 말 그대로
<상품>이 되었던 것입니다.
많은 전문가들은 일본의 철저한 시간관념이 이때부터 형성되었고, 이러한 시간 관념이 산업사회로
넘어오면서 일본사회에서 꽃을 피웠다고 합니다. (참고: 일본인과 에로스(18~22쪽). 서현섭) ]
한국형 페미니즘은 여성의 성(性)은 상품화 하면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이 말은 즉, <처녀성(virginity)>은 그 무엇보다 고귀한 가치를 지닌 (여성의)몸과 정신의 결정체인
것입니다. 따라서 처녀성이 훼손되면 고귀한 <가치>가 떨어지는 것입니다. ... 그런데 여기서 역설적으로
그녀들의 주장은 <처녀성(virginity)>은 가장 비싼 값이 매겨져야 하는 또 다른 상품이다! ~ 라고 외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 한마디로 사회가 <처녀성(virginity)>에게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하라는 일종의 강령이며
암묵적, 상업적 가격협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2002년 성매매특별법이 제정되고, 그 즈음에 서울 종암경찰서 김강자 서장이 서울의 대표적 집창촌인
<청량리588>과 <미아리 텍사스>를 집중 단속하면서 ... 이후로 서울의 사실상의 공창은 사라졌습니다.
[@ 당시 청량리588과 미아리 텍사스는 경찰과 구청의 공공연한 관리(?)아래 영업을 지속했었기 때문에
공창에 가까운 사창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 그러나 성매매특별법과 집창촌 단속은 오히려 더 큰
풍선효과만 낳았습니다. 어설픈 도덕의 잣대가 정책의 실효성은 말할 것도 없고, 국가권력이 개인들의
배꼽아래를 무리하게 통제하는 소위 <경찰국가화>를 초래했다는 비난으로 이어졌으며 ... 더불어 훗날
김강자 서장은 집창촌 폐쇄 정책에 대한 실패를 인정하면서 한국사회에 “제한적 공창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성매매와 집창촌 얘기만 나오면 여성단체가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성매매 여성들의
착취의 문제입니다. 선진국 사례를 살펴보면 ... 영국과 프랑스는 집창촌 비즈니스를 금지하는 대신
개인적 매춘은 불법화하지 않습니다. 독일과 네덜란드는 집창촌을 합법화해 성매매 여성들의 노동권을
인정함과 동시에 그들의 인권보호에 정책적 노력을 보탭니다. 심지어 성매매 여성들의 <노조 결성권>
까지 허용하며, 이들에게 의료보험, 연금, 실업수당 등 일반 노동자가 받는 사회보장혜택을 국가가
최대한 보장하려 노력합니다. ... 참고로 성매매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이들이 느끼는
가장 위협적인 인권침해 요소는 다름 아닌 <사회적 시선>이었다고 합니다. 성을 판매한다는 주변의
차가운 시선이 이들을 가장 크게 괴롭힌 요인이었으며, 이로 인한 소외감과 외로움의 감정을 견디는게
가장 힘들었다고 합니다.
사랑이 배제된 쾌락(s.ex)은 비도덕적인가요?
오로지 성적 쾌락만 추구하는 행태는 저급한 겁니까? ... 질문을 바꿔 이렇게 다시 물어봅니다.
<도덕과 비도덕, 저급과 고급의 기준은 과연 누가 정하는 겁니까?>
앞서도 언급했지만,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제 성(s.ex)은 터부시될 하등의 이유가 없으며, 더구나
성인은 주체적 개인으로서 자신의 성적 취향에 관해 국가권력의 간섭과 통제를 받아야할 그 어떤 의무도
없습니다.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은 자신의 저서 <결혼과 도덕>에서 혼전 섹스를
적극적으로 권장했습니다. 한 개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이벤트인 결혼을 육체관계 없이 결정한다는 것은
미래 결혼생활에 불확실성만 높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러셀 또한 사랑이 배제된 쾌락을 완전히 지지하지는
못했습니다. ... 다시 말해, 섹스에 도덕성이 부여되려면 결혼이라는 제도가 아니라 <사랑>이 교감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죠. 결론적으로 러셀은 섹스(sex)가 도덕적이며 고급스런 하나의 완전체가 되려면 사랑이 필요하다
생각했었던 것입니다.
사랑은 현대사회에서도 여전히 섹스(s.ex)에 도덕성을 부여하고 정당화 시켜주는 매우 강력한 조건입니다.
사랑이 포함된 섹스는 성욕에만 집착하는 섹스보다 사회적으로 더 유리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따라서
사랑이 수반된 섹스는 결혼 및 출산과 무관하더라도 나름의 가치를 인정받습니다. ...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사랑이 <쾌락(s.ex)의 가치>를 평가하고 <도덕적 위상>을 부여하는 유일한 척도라 말하기에는 여전히 무언가
근거가 부족합니다.
이탈리아 작가 <조반니 보카치오(Giovani Boccaccio 1313~1375 )>는 근대소설의 선구자로 불리며
단테와 함께 르네상스 시대를 이끌던 대표적 문인입니다.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이 바로
<데카메론(Decameron)>인데, 이 소설집은 당시 가장 많은 국가에서 가장 오랜 시간동안 금서(禁書)로
지정된 소설이었습니다. ... 다만 인간의 심리가 거의 대부분 그렇듯이 ‘금기(taboo)’는 그 강도가
강하면 강할수록 금기를 깨려는 욕망 또한 비례적으로 강해지는 속성을 지닙니다. 그래서 ‘데카메론’은
역설적으로 당시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읽힌 작품이기도 했습니다.
데카메론의 시대적 배경은 기독교와 남성이 지배하던 전형적인 가부장적 세계를 반영합니다.
작품은 10일 동안 100건의 이야기가 전개되고, 작품 속 10명의 화자 중에서 7명이 여자입니다.
사회 여러 계층을 비유적으로 풍자하며 이야기의 대부분은 남녀 간의 사랑과 욕망(치정), 성(s.ex)의
문제가 작품 전체를 관통하며 채워져 있습니다. 또한 여성이 주도적으로 일으킨 섹스(s.ex) 문제는
대부분 여성에게 유리하게 결론지어집니다. ... 대표적으로는 6일째 일어났던 필리파 부인의 이야기가
압권인데, 절세미인 필리파 부인은 간통의 현장을 남편에게 들킵니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당시의
성(s.ex) 개념은 ‘사회적 제도’에 묶여있어, 특히 여성에게는 매춘뿐만 아니라, 남편 이외에 다른 남자에게
(돈을 받지 않고)몸을 허락하는 행위, 즉 간통을 저지른 행위도 사형에 처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법정에서 판사는 부인의 미모에 반해 그녀를 살려주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그녀가 자백하지 않기를
바랐지만 필리파 부인은 당당히 자신의 간통 사실을 인정하며 다음처럼 항변합니다.
[◆ "이 법은 여성을 속박하는 법입니다. 또한 이 법은 남성세계가 자의적 해석에 의해
만든 법이므로 일종의 악법이며, 사건 당사자인 여성의 동의가 배제되었기 때문에 원천적으로
무효입니다. ... 만약 아내가 남편의 성적 욕구를 충족시켜야할 법적 의무가 존재한다면
나는 단 한 순간도 의무를 소홀히 한 적이 없으며 거절한 적도 없습니다. 다만 나는 보통의
아내들 보다 성적 욕구가 강했기 때문에 남편의 욕구가 다 채워지면, 여전히 식지 않고 뜨겁게
남아있던 나의 욕구를 위해 애인과 이용한 것뿐입니다. 다시 말해 나는 애인에게 몸을 준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 애인을 일종의 쾌락의 도구쯤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쾌락의 도구로 삼는다면 아내들 또한 마찬가지로 자신의 필요에 의해 남자를 쾌락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남편이 나를 (계속해서)충족시켜주지 못한다면,
남아 있는 나의 성(性)에너지를 차라리 개에게 주는 것보다 다른 사내를 선택하는 것이
개인(아내)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전체의 효용이라는 측면에서도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
될 것입니다. - (필리파 부인의 항변)]
신(기독교)과 남성이 지배하던 시대에서 놀랍게도 필리파 부인의 이러한 과감한 주장은 판사에게
받아들여졌고 부인은 석방되며 이야기는 마무리 됩니다. 돈을 받고 파는 사랑은(매춘) 형벌의 대상이
되지만, 개인의 만족을 위해 자유롭게 베푸는 사랑(s.ex)은 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 작품은
여성이 성행위의 객체가 아닌, 주체로서 당당히 전면에 나설 때 진정한 <여성해방>을 이룰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집니다.
한국형 페미니즘과 여성단체는 낙태죄를 폐지하라고 주장합니다.
낙태죄 폐지 주장은 '여성 자기결정권'과 '태아 생명권' 중 무엇이 더 중요한가의 문제입니다.
여기서 대다수의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더 우선되어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여성의 <자.기.결.정.권.> ... 여성의 몸은 여성 자신들 것이니, 국가 권력이 간섭하지 말라는 것이죠.
그런데 참 웃깁니다. 국가 권력의 간섭을 운운하며 개인의 (자기)결정권이 헌법상의 권리라 그렇게 강조하던
집단들이 성(性)을 파는 경우에만 몸에 대한 자기결정권에 예외를 둔다는 것입니다. 낙태에 대해 여성단체가
찬성하는 자기결정권이 왜 <성적 자기결정권(性的自己決定權)>만 만나면 히스테리 반응을 보이는지
저는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개인의 성생활(s.ex) 역시 자기책임하에 이루어지는 명백한
개인의 권리(자기결정권)입니다. ... 이쯤되면 무려 600여 전에 발표된 데카메론의 내용과 2019년 광장에 모여
탈코르셋과 낙태죄폐지를 외치는 한국형 페미니즘이 서로 자리가 뒤 바뀐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한국형 페미니즘이 이제는 <발전적 해체>의 과정을 거쳐 변질되고 난립한 기존의 많은
기형적 페미니즘이 아닌, 한국형 페미니즘에 대한 새로운 개념 정립이 우선되어야 하며, 이후에는
진정한 여성해방을 위한 <실천적 통합모델>이 필요하다 생각됩니다. 더불어 사회(남성)를 향한 그녀들의
반복적 스트레스테스트(stress test)는 대중의 지지와 호응 보다는 불신만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앞서도 언급했었지만 오늘날의 페미니즘(Feminism) 운동은 그 유형이 상당히 복잡하고 다양화되고
있으며, 현재도 계속해서 외연이 확장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한국형 페미니즘 또한
자신들의 좌표를 벡터공간 어딘가에 숨겨놓고 이것, 저것 잡다한 사유들을 주인의 허락도 없이 마구 훔쳐다
쓰고 있습니다. ... 세계에 대한 치열한 고뇌와 사유 없이, 단지 머리를 자르고, 남근 사진을 갈기갈기 찢어버리며,
브래지어를 벗어던지는 불꽃 페미쇼를 그녀들은 저항이라 부르고 스스로를 (한국형)페미니즘의 용기 있는 투사로
내면화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운동이 아니며, 그동안 소심했던 본인을 바꿔보고자 집단최면 속에서
즉흥적으로 발흥하는 일종의 담력테스트일 뿐입니다.
‘불편한 용기’는 어느 페미니즘 단체의 이름이라고 합니다.
용기는 무모함과 겁먹음의 중간입니다. 균형을 중요시했던 그리스 철학은 용기를 그렇게 정의했습니다.
그런데 ‘불편한 용기’측은 이 고귀한 가치를 지닌 ‘용기’를 본인들 마음대로 가져다 난도질하려 합니다.
그녀들이 말하는 용기는 무모함과 겁먹음의 경계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녀들의 말하는 용기는
처절한 외로움과 공포에 가까운 소외감속에서 생산된 일종의 바이러스입니다. 아주 치명적인 바이러스 말이죠.
그리고 저는 현재 한국사회에서 진행되고 있는 <페미니즘>이라는 운동이 훗날 이들에게 <향수>가 되는 것이
두렵습니다. 지금 활발히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세대들이 이후 후세대들에게 운동의 바톤을 넘겨주고
기성세대가 되었을 때, 그녀들이 과거를 추억하며 지금의 운동을 아름다운 <향수>로 기억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마치 독재(박정희) 권력이 어떤 세대들에게는 찬양받는 <향수>가 되듯이 말입니다.
어떤 이념이든, 그 이념의 농도가 깊어지면 그것을 따르는 구성원들의 자발적 징집화는 가속화됩니다.
하지만 그 어떤 의문이나 질문을 거부하는 이러한 자발적 징집을 그들은 ‘연대’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현대 한국형 페미니즘은 본인들 할머니, 어머니 세대의 억압을 원래부터 자신들것인양 스스로의 내면에
단단히 착근시켜 자기자본화 시켰습니다. 그렇게 자본화된 ‘(그녀들의)억압’은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투쟁과 운동의 에너지로 전환되고, 그 힘은 증식과 증폭을 반복하며 <여성혐오 없는 세상 만들기>를
꿈꿉니다. ... 그런데 이러한 그녀들의 노력으로 여성혐오가 하나둘씩 사라질 때마다 그녀들은 역설적인
불안을 드러냅니다. 다시 말해 머리로는 ‘여성혐오 부재’를 외치면서도 그녀들의 심장은 ‘여성혐오 존재’에서
오히려 더 많은 안정과 평안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여성혐오의 지속>이 어느 순간부터 격렬한 갈망으로서 그녀들을 전복적(역설적) 인간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회 안에 진정으로 여성혐오가 사라진다면 한국형 페미니즘의 존재이유 또한 함께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도 언급했었지만 한국형 페미니즘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여성에 대한 억압과 혐오가 사라지고 파괴되는것이
아니라, <여성에 대한 억압과 혐오의 지속> 그 자체입니다. 따라서 사회 안에서 여성혐오가 하나둘씩 사라질 때마다
사라진 혐오의 빈 자리를 채워줄 새로운 대체제가 필요하며, 때문에 공동체 그 누구라도 혐오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에
대하여 한국형 페미니즘은 <혐오가 아닌 것을 혐오로 둔갑시키려는 작업>에 더욱 더 매진할 수밖에 없는 사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 결론적으로 이제 그녀들의 핵심적 목표는 여성혐오 반대가 아니라 기업들의 신상품 개발처럼
<새로운 여성혐오 개발 및 생산>을 목표로, 하나둘씩 사라져 가는 여성혐오의 대체제 만들기작업인 것입니다.
그래야만 자신들의 권력이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보다도 여성혐오 반대를 강하게 외치지만,
그 누구보다도 여성혐오가 지속되기를 바라는 것 또한 그녀들입니다. 즉 사회 안에 계속해서 여성혐오가 존재해야만
그녀들은 더 큰 목소리를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순상태가 곧 그녀들이 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이가
기술적 방편이 되는 것입니다.
@ 공동체가 말합니다.
<“알겠습니다! ~ 반드시 여성혐오 없는 세상을 만들겠습니다.”>
@ 그녀들이 말합니다.
<“아니오! ~ 100년, 200년 후에도 여성혐오는 계속 살아있어야 합니다. 그러니 제발 여성혐오를 멈추지 말아주세요!”>
우리 사회 '여성혐오의 존재'는 그 자체로서 한국형 페미니즘 운동의 존립근거가 됩니다.
열정을 쏟아야할 적(敵)이 사라지면 이후에 찾아오는 것은 치명적 무력감뿐이며, 이것은 늙은 퇴직자의
소외감과 같고, 주인에게 버려진 개의 심정과 동일하며, 대중에게 잊혀지는 것이 두려운 스타의 절망감과 동일합니다.
그래서 나는 그녀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대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여성혐오가 사라진 세상인가? ~ 아니면
여성혐오가 사라진 세계에서 더 이상 싸울 상대가 없다는 무력감이 두려운 것인가? ~ 아니면
세상에서 서서히 잊혀지는 것이 두려운 것인가?
[◆ 남자아이는 여성이 자신과 같은 페니스를 소유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이를 쉽게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절대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만약 여성이
거세를 당해 버린 것이라면 자신의 페니스도 위험이 처할지 모른다는 공포감과 불안감이
들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발로서, 혹은 일종의 경계 표시로서 자신의 페니스를
들여다보는 나르시시즘이 생겨나기도 한다. 나중에 성장해서 성인이 되었을 때도 거세 불안을
느낄만한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면, 공포감을 경험하고 비슷한 논리적 결과가 생긴다.
내가 잘못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아마 라포르그(Laforgue) 같은 학자는 이 경우
남자아이가, 여성이 자기처럼 페니스가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을 암소화(暗所化) 하려
한다고 설명할 것이다. 즉, 지각작용 자체를 마치 망막 암점증에 걸린 상태처럼 눈에 보이지
않게 지워버리려 한다고 설명할 것이다. (@ 암소화 - 환자가 자기의 자아와 상충되는 모든 것의
존재를 부정하려고 하는 정신적 암점(暗點)의 발달을 말한다. / 암점(暗點) - 빛깔이나 색을
느끼지 못하는 망막 시신경의 희고 둥근 부분) - (성욕에 관한 세편의 에세이. 29페이지/ 프로이트/ 열린책들) ]
=======
프로이트의 견해에 저 개인의 전복적 생각을 더하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 합니다.
< 생각의 전복 >
[◆ 여자아이는 남성이 자신과는 다르게 페니스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이를 쉽게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절대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만약 남성이
페니스라는 축복을 선물 받은 것이라면 (여성)자신의 페니스 부재에 대한 허탈감과 질투의
감정이 동시적으로 발생한다. 그래서 이에 대한 반발로서, 혹은 일종의 소유욕으로서 페니스를
절도하거나 파괴하여 자신과 동등한 수준으로 남성을 끌어내리려는데 욕망을 내면화 한다. - 물파스 생각 ]
[@ 간혹 므흣한 게시물을 볼 때면 나도 한번쯤은 그 유명한 ‘대인’을 불러보고 싶었지만
그래도 물파스는 진지함과 긴 글로 승부하는 사람인데 ‘내가 어떻게 대인을 부르겠는가?’ ... 라며
어느 샌가 또 어느새 다른 내면에선 ... 잠시 뒤 전문적으로 대인을 외치는 분들이 등장할 것이니
물파스 너는 가만히 앉아 ‘품위를 지키라’며 비겁함과 소심함이 참 꼴값스럽게 교체되곤 했었습니다.
어쩌면 이 또한 경직된 우리 성문화에 대한 영향이 아닐까를 생각해 봅니다. ~ 편안한 주말 보내십시오.]
2019년 2월 18일 월요일
2019년 2월 6일 수요일
페미니즘의 난립 / 결국 그것도 돈, 정치, 권력
지금 페미니즘이 난립하는 이유를 이해하려면
운동권과 시민단체, 진보의 역사를 먼저 알아야해
여기 있는 나이 많으신 형님들은 아시겠지만
혹시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오랜만에 한번 길게 써봅니다
------------------------------------------
80년대 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진보가 내세우는 캐치프레이즈는 단순했어
1.민주화
2.반독재
3.대통령 직선제
이 세가지 기치 아래 모든 진보세력이 다 모여들었고
이것만으로도 시민들의 환호를 받을수 있었지
근데 문제는 90년대에 들어오면서 시작된다
90년대에 대통령 직선제도 결국 받아들여지고
군사정권이 물러나고 YS 로 정권교체도 되면서
그토록 원하던 민주화도 결국 이루어지게돼지
근데 정작 민주화를 외치던 진보세력은 더이상 할게 없어진거야
더이상 욕할 독재자도 없고
더이상 요구할 목표도 없어진거지
한순간에 백수 실업자가 돼버린거야
그나마 정계에 연줄이 있던 운동권 유명 인사나
재야 거물들은 국회의원 보좌관 자리라도 하나 얻어 먹으면서
우르르 정계로 진출할수 있었지만
밑바닥에서 활동하던 다수의 <시다바리>들은
갈곳도 없고 할것도 없는 잉여 인력으로 사회에 내팽개쳐 진거야
아직도 80년대 운동권에서 활동하던 많은 사람들이
가난 속에서 궁핍한 인생을 연명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고
운동권의 변절과 내부 이권 싸움이 지속되는 근본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어
돌 던지면서 투쟁한건 다 똑같은데
나중에 국회의원이나 관료직같은 좋은 자리를 얻어간 인간들은
잘나가는 유명인 몇명 뿐이었기에 내부에 불만이 쌓일수 밖에 없었던거지
이렇듯 민주화 이후에 다수의 진보 세력이 갈 곳을 잃은 백수가 됐고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헤매다가
발견한게 바로 <시민단체> 였어
더이상 민주화같은 관념적인 정치 이념으로는
시민들의 관심을 받을수도 없고
그런 방식의 정치 행위가 필요치도 않은 사회에서
일반인들의 생활에 직접 연결되는 문제를 테마로 삼는 시민단체는
낙오한 운동권에게는 좋은 일자리였던 거지
전국에 온갖 시민단체들이 난립하게 된게 이때부터였고
정치, 경제, 노동 같은 전통적인 분야뿐만 아니라
환경, 문화, 예술, 심지어 아이들 교육 분야까지 시민단체들의 밥그릇으로
비화되기 시작한것도 이때부터였어
지금도 동네에 듣도 보도 못한
XX연대, XX모임, XX연구회, 라면서 허름한 간판 하나 걸어놓고
시민단체 행세하는 애들이 넘처나는 이유를 이제 알수 있을거야
우리나라 시민단체의 가장 큰 문제는
시민단체가 <시민단체의 일>에 관심이 없다는거야
몰락한 운동권과 진보세력이 차린 신사업이 시민단체이다 보니
이 사람들의 궁국적인 목표는 권력을 획득하는 것이지
시민단체의 임무가 아니거든
시민단체가 먹고 사는 방법을 알려줄께
1.사람들이 관심있어 하는 테마를 잡는다
(환경오염, 도시개발, 학원교육, 남녀차별 등등등)
2.사람들의 공포감과 분노감을 극대화시킨다
3.회원을 끌어모으고 조직을 확대한다
4.비대해진 조직과 회원들을 기반으로 정치인에게 접근한다
5.선거기간동안 특정후보를 지지하거나 낙선운동을 펼쳐 정치력을 과시한다
6.정계에 만들어진 연줄을 기반으로 정부사업을 따내거나 수익사업을 획득한다
7.전국 조직이 갖춰지면 이를 기반으로 정당에 공천을 요구하거나 장관직을 요구한다
대형 사건이 터지면
광화문에 평소에 알지도 못했던 온갖 시민단체들이
깃발을 들고 나온다
이 세력이 궁극적으로 원하는건
자신의 정치력을 과시해서 진보 내에 지분을 넓히고
유명세를 이용해 회원들을 끌어모으려는 것이다
광화문이 시민단체의 거대한 영업장소가 돼버리는거지
진보 정치인들은 이 세력들을 이용해 선거에서 이기려하고
권력을 쟁취해야 하기 때문에 절대 시민단체 세력을 무시하지 못한다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이다
이제
권력이 바뀐후로 시민단체들이 유난히 활개치는 이유
그리고
페미 정책이 엄청난 반발을 일으키는 줄 알면서도
끊임없이 반복하는 이유를 조금이나마 이해할수 있을거야
이번 시장에서 돈이 되고, 표가 되고, 권력이 되는
가장 유망한 테마 주식이 바로 "페미니즘" 이기에
정치인과 시민단체 온갖 잡다한 진보세력이
한탕 크게 해먹으려고 분위기를 뛰우고 있는거지
물론 이 한탕주의는 지금까지 진보세력이 늘 그래왔듯이
"민주주의" "정의" "평등"으로 포장되겠지
---------------------------------------
보수가 부패한 만큼
진보 내부에 꽤 추악한 모습이 감춰져 있는걸
멍청한 애들이 잘 모르는것 같아서 한번 써봤습니다
운동권과 시민단체, 진보의 역사를 먼저 알아야해
여기 있는 나이 많으신 형님들은 아시겠지만
혹시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오랜만에 한번 길게 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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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진보가 내세우는 캐치프레이즈는 단순했어
1.민주화
2.반독재
3.대통령 직선제
이 세가지 기치 아래 모든 진보세력이 다 모여들었고
이것만으로도 시민들의 환호를 받을수 있었지
근데 문제는 90년대에 들어오면서 시작된다
90년대에 대통령 직선제도 결국 받아들여지고
군사정권이 물러나고 YS 로 정권교체도 되면서
그토록 원하던 민주화도 결국 이루어지게돼지
근데 정작 민주화를 외치던 진보세력은 더이상 할게 없어진거야
더이상 욕할 독재자도 없고
더이상 요구할 목표도 없어진거지
한순간에 백수 실업자가 돼버린거야
그나마 정계에 연줄이 있던 운동권 유명 인사나
재야 거물들은 국회의원 보좌관 자리라도 하나 얻어 먹으면서
우르르 정계로 진출할수 있었지만
밑바닥에서 활동하던 다수의 <시다바리>들은
갈곳도 없고 할것도 없는 잉여 인력으로 사회에 내팽개쳐 진거야
아직도 80년대 운동권에서 활동하던 많은 사람들이
가난 속에서 궁핍한 인생을 연명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고
운동권의 변절과 내부 이권 싸움이 지속되는 근본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어
돌 던지면서 투쟁한건 다 똑같은데
나중에 국회의원이나 관료직같은 좋은 자리를 얻어간 인간들은
잘나가는 유명인 몇명 뿐이었기에 내부에 불만이 쌓일수 밖에 없었던거지
이렇듯 민주화 이후에 다수의 진보 세력이 갈 곳을 잃은 백수가 됐고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헤매다가
발견한게 바로 <시민단체> 였어
더이상 민주화같은 관념적인 정치 이념으로는
시민들의 관심을 받을수도 없고
그런 방식의 정치 행위가 필요치도 않은 사회에서
일반인들의 생활에 직접 연결되는 문제를 테마로 삼는 시민단체는
낙오한 운동권에게는 좋은 일자리였던 거지
전국에 온갖 시민단체들이 난립하게 된게 이때부터였고
정치, 경제, 노동 같은 전통적인 분야뿐만 아니라
환경, 문화, 예술, 심지어 아이들 교육 분야까지 시민단체들의 밥그릇으로
비화되기 시작한것도 이때부터였어
지금도 동네에 듣도 보도 못한
XX연대, XX모임, XX연구회, 라면서 허름한 간판 하나 걸어놓고
시민단체 행세하는 애들이 넘처나는 이유를 이제 알수 있을거야
우리나라 시민단체의 가장 큰 문제는
시민단체가 <시민단체의 일>에 관심이 없다는거야
몰락한 운동권과 진보세력이 차린 신사업이 시민단체이다 보니
이 사람들의 궁국적인 목표는 권력을 획득하는 것이지
시민단체의 임무가 아니거든
시민단체가 먹고 사는 방법을 알려줄께
1.사람들이 관심있어 하는 테마를 잡는다
(환경오염, 도시개발, 학원교육, 남녀차별 등등등)
2.사람들의 공포감과 분노감을 극대화시킨다
3.회원을 끌어모으고 조직을 확대한다
4.비대해진 조직과 회원들을 기반으로 정치인에게 접근한다
5.선거기간동안 특정후보를 지지하거나 낙선운동을 펼쳐 정치력을 과시한다
6.정계에 만들어진 연줄을 기반으로 정부사업을 따내거나 수익사업을 획득한다
7.전국 조직이 갖춰지면 이를 기반으로 정당에 공천을 요구하거나 장관직을 요구한다
대형 사건이 터지면
광화문에 평소에 알지도 못했던 온갖 시민단체들이
깃발을 들고 나온다
이 세력이 궁극적으로 원하는건
자신의 정치력을 과시해서 진보 내에 지분을 넓히고
유명세를 이용해 회원들을 끌어모으려는 것이다
광화문이 시민단체의 거대한 영업장소가 돼버리는거지
진보 정치인들은 이 세력들을 이용해 선거에서 이기려하고
권력을 쟁취해야 하기 때문에 절대 시민단체 세력을 무시하지 못한다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이다
이제
권력이 바뀐후로 시민단체들이 유난히 활개치는 이유
그리고
페미 정책이 엄청난 반발을 일으키는 줄 알면서도
끊임없이 반복하는 이유를 조금이나마 이해할수 있을거야
이번 시장에서 돈이 되고, 표가 되고, 권력이 되는
가장 유망한 테마 주식이 바로 "페미니즘" 이기에
정치인과 시민단체 온갖 잡다한 진보세력이
한탕 크게 해먹으려고 분위기를 뛰우고 있는거지
물론 이 한탕주의는 지금까지 진보세력이 늘 그래왔듯이
"민주주의" "정의" "평등"으로 포장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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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가 부패한 만큼
진보 내부에 꽤 추악한 모습이 감춰져 있는걸
멍청한 애들이 잘 모르는것 같아서 한번 써봤습니다
◆ 칸트의 정언명령 [by. 물파스]
[◆ 칸트의 정언명령]
(@ 오래전 박근혜와 최순실 관계에 대해 상당히 긴 글을 올렸었는데, 그때 글의 일부내용입니다.)
모두가 그 어떤 배려나 양보 없이 오로지 각자의 이익을 위해서만 행동한다면
세계는 그야말로 하루가 멀다고 온통 대립과 분쟁에 휩싸여 혼란스런 세상의 연속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분쟁의 해결을 위해서는 흔히 “이성적으로 판단하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감정에 휘둘려
사리를 분별하지 못해 편향된 사고나 성급한 판단을 내리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서는 이성을 힘을
빌려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인간들의 이기적이고 비양심적인 본성이 수시로 나타난다면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즉
혼란을 막을 수 있는일에는 무엇이 있을까를 생각해보면, 공동체의 이성으로 만든 <법과 제도>라는
합의된 강제성을 활용한다면 문제가 비교적 쉽게 해결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이성적인 결과인 거죠.
하지만 인간 사회라는 것이 그렇게 간단치만은 않다는 걸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너무나 많이 배워 왔고,
또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혼란스러운 사회 상태에 대해서 법과 제도로도 어찌해볼 수 없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교통사고를 당해 피를 흘리며 도로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고도 그냥 지나친다거나,
하루종일 굶었다며 거리에서 배고픔을 호소하며 돈이나 빵을 구걸하는 걸인을 보고도 그냥 모른 채 하며
지나가는 사람이 있다 해도, 그들은(무관심한 사람들) 사회가 만든 법과 제도로 제재를 가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닌 것입니다. ... 그래서 이러한 이기심과 무관심이 공동체 내에 만연하게 된다면 이성으로 만든, 아무리 훌륭한
법이 존재한다고 해도 사회는 그야말로 극단적인 삭막함 속에 놓이게 되어 공동체라는 말이 무색해 질 정도의
말 그대로 껍데기만 공동체인 사회가 될 가능성이 매우 커질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아무리 공동체의 선과 평화를 위한다 해도 인간의 <도덕적 양심>까지
우리 공동체가 강제할 수단은 없다는 것입니다. ... 한마디로 인간의 "도덕"은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는
이성적 사고만으로는 어찌해볼 방법이 없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좀 더 근원적인 해결 방법은
없는 것인가? ~ 하는 물음이 생길 것입니다. 그래서 300년 전에 태어난 독일의 대철학자 칸트(Immanuel Kant)의
견해를 들어볼까 합니다.
등산객이 비탈진 등산로에서 아래로 굴러 떨어져서 다쳤다 해도 우리는 산(山) 에게 책임을 물을 수가 없습니다.
이는 단지 중력이라는 과학적 <인과법칙>에 따라 그러한 사고가 발생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윤리적, 도덕적 양심은 어떨까?
과학(법칙)같은 지식적 측면의 이성은 우리 인간이 얼마든지 사유가 가능한 영역입니다.(이론적 접근 가능)
한마디로 과학은 충분히 이성으로 사유가 가능한 대상인 것입니다. ... 하지만 신, 영혼, 자유, 도덕 같은 영역은
유의미 하지만 이성으로 사유(검증)하기에는 불완전, 혹은 불가능 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각자의 양심에 따른
도덕적 행동을 왜 해야만 하는지는 과학적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며, 대신 신과 종교가 과학적 질문을 허용하지 않듯이,
인간의 도덕적 행동에도 그 어떤 질문이나 이유를 묻지 않아야 한다고 칸트는 주장했습니다. ... 한마디로
인간의 도덕적 행동은 그 어떤 이유나 이해 없이 무조건 양심이 시키는 명령에 따라 <"의무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칸트의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칸트는, 과학은 이론적인 이성으로는 접근이 가능했지만 ... 신과 영혼, 도덕 등은
이론적으로는 접근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러한 형이상학적 개념들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이성의 지식적 측면이 아닌,
다른 측면의 이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으며, 인간의 도덕적 행동은 직접적인 <"실천(행동)">으로, 즉
아무 조건을 달지 말고 그냥 <의무적>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리고 칸트는 이렇게 우리 내면에
우리를 도덕적으로 행동(실천)하게 만드는 "의무적인 의식"이 존재한다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실천이성">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까지만 살펴보면, 칸트가 규정한 "도덕"은 너무나 막연한 것 같습니다. ... 또한
<"의무적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부분도 조금은 억지스럽고 이해하기도 힘듭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좀 더 확실히 이해하려면 너무나 유명한 칸트의 발언을 살펴봐야 합니다.
◆ "너의 의지의 준칙이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 타당하도록 행동하라." - 칸트(Immanuel Kant)
인간의 도덕은 지식적인(이론적인) 이성으로는 사유가 불가능 합니다. 그런데 칸트는 이러한
형이상학적(신, 영혼, 도덕 등) 영역을 과감히 이성의 영역 안으로 끌고 들어옵니다. ... 그리고
인간의 도덕(도덕적 행동)에도 과연 과학법칙(중력) 같은 "보편적인 원리"가 있을 수 있겠는가? ~ 를
끊임없이 사유하며 고뇌한 끝에 내 놓은 결론이 바로 위의 원칙입니다.
등산객이 넘어져 산 아래로 굴러 떨어지거나 밤나무에서 밤송이가 떨어지거나 ... 그리고
타자가 친 홈런 볼이 하늘을 향해 힘차게 날아가다가 결국은 외야 관중석으로 떨어지는 것은
모두가 '중력법칙' 이라는 보편적인 과학 원리에 따른 결과인 것입니다. ... 그렇다면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인류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보편적인 도덕의 원리가 있을 수 있을까? ... 여기에 칸트는
<"보편적 도덕법칙(원리)">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칸트의 주장처럼 모든 인간에게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도덕법칙(원리)을
찾아보는 것은 너무나 어렵습니다. ... 예를 들어, 거리에서 구걸하는 걸인에게 천 원짜리 한 장을 건넨 행위를
어떤 이는 매우 도덕적인 행동이라 생각하고 있는 반면, 이와는 반대로 그러한 행위(적선)는 오히려 걸인의 자활의지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별로 좋은 행동이 아니라는 의견도 많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실제 인간사회의 현실에서는
"도덕적 행동"에 대한 기준이 개개인 마다 주관적이며 편차가 있기 때문에 칸트의 주장은 쉽게 받아들이기가
어렵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칸트가 주장한 것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가? ... 그래서 칸트를(칸트의 발언)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기서 한 발짝 더 깊게 들어가서 ... 먼저 법(法)과 선(善)에 대한 그동안의 인식을 전환시켜야 합니다.
꾸준히 사회적 이슈로 많이 거론되고 있는 보복운전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대부분의 구성원(국민)들이 보기에는 보복운전은 분명히
잘못된 행동이라고 얘기할 것입니다. 한마디로 보복운전은 "선(善)한 행동이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공동체는 보복운전을 하게 될 경우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공동체의 보편성이 담긴 법(法)을 만들어
적용하게 됩니다. ... 한마디로 우리는 보복운전을 하지 않는 것이 선(善) 이라는 보편적 시선을 갖기 때문에
이후에 법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선한 판단이 먼저 존재한 후에, 그 뒤를
법이 따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입법원리(법이 만들어지는 과정)는 선한 판단 뒤에 법을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칸트는 우리에게 익숙한 이러한 입법의 원리를 전복시킵니다.
근대철학 이전까지만 해도 신(God)은 그 자체로서 진리였습니다.
때문에 신의 계율(말씀, 명령) 또한 묻고 따지지 말아야 할 엄격한 법(法) 이라고 할 수 있었으며,
그러한 신의 말씀(명령)을 따르는 것은 당연한 선이라 생각했습니다. ... 한마디로 법(신의 계율)이 먼저 존재한 후에,
그것을 따르는 것이(신의 말씀을 따르는 삶) 바로 선(善) 이라는 것입니다. ... 그리고 칸트는 여기서 힌트를 얻어,
인간의 <보편적 도덕법칙>또한 신의 계율처럼 그 자체로서 하나의 법(法)이며, 그것을 지키는 것이 선(善)이라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선한 판단 같은 건 따지지 말자는 거죠. 그냥 (보편적)도덕법칙대로 행동하는 것! ~ 이 자체가
바로 선한 행동(도덕적 행동) 이라는 뜻입니다. 결론적으로 칸트가 주장한 <보편적 도덕법칙>이란
아무 조건도 따지지 말고 <“의무적”>으로 행동해야 하는( ~ 해야만 한다!) 규칙(원칙)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원칙(규칙)에 따라 사는 것이 바로 진정한 선이며, 도덕적 행동 이라고 했습니다.[◆ 의무에 따르는 삶!]
결국 앞의 사례에서 걸인에게 천원을 건넨 행위는 잘했다는 칭찬을 받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칸트의 도덕법칙에 따르면 도덕적 행동은 아닌 것입니다. ... 우리가 그동안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도덕적 행동과 칸트가 생각하는 도덕적 행동과는 괴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 아무튼 마음속 깊은 곳에서
타인을 불쌍하게 생각하는, 즉 동정심이 마구마구 샘솟아 자선을 베풀었다고 해도 칸트는 그것이 아무조건 없이
<“의무적(해야만 한다)”>으로 행동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진정한 도덕적 행동이 아니라고 했던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칸트의 도덕적 행동은 <“천원을 주고 싶다!”>가 아니라 <“천원을 줘야 한다!”>가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 "너의 의지의 준칙이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 타당하도록 행동하라." 라는 칸트(Kant)의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 당신이 하려는 어떤 도덕적인 행동이(의지가) 모든 사람이 보기에
법으로 만들어져도 전혀 이상할 것 없을 정도로 보편성을 내포하고 있다면, 그렇게 행동하라!> ~ 라는 뜻입니다.
좀 더 쉽게 풀어보면, 당신이 지금 하는 행동에 대해서,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똑같이 본인을 따라 해도 괜찮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 행동은 보편성(일반원칙)을 가진 도덕적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거리에서 구걸하는 걸인을 볼 때 마다 나는 그에게 의지박약한 놈이라며 주먹질을 할 것이다!"
이러한 행동을 과연 다른 모든 사람에게 따라하도록 얘기할 수 있을까? ~ 당연히 이것은 칸트가 얘기한
도덕적 행동이 아닐 것입니다. ... 칸트에게 도덕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자 의무>였습니다.
이미 앞에서도 언급했었지만, 모든 인간이 개인의 이기심과 비양심적인 행동만을 추구하게 된다면
종국에는 모두의 자유가 박탈당하게 되는 상황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결국 참된 도덕은 이성에서 나오며,
도덕은 의무적인 법칙으로 규정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럼 정리하는 의미에서 윤리학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조지아 주립대학 로버트 L. 애링턴 교수의
얘기를 들어보겠습니다.
[◆ 동정심이라는 동기는 "도덕적 내용이 부족하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동정심이라는
동기로부터 행위하는 사람은 진정으로 옳은 것을 행하는데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단지 동정심이라는 경향성을 만족시키는데 관심을 쏟을 뿐이다. 그리고 자신이 행하는 바의
도덕성에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는 사람은 분명히 “도덕적 가치”를 갖는 방식으로 행위 하는데
실패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칸트는 오직 의무라는 동기만이 행위에 도덕적 가치를
부여한다고 주장한다. ~ (중략) ~ 칸트는 도덕적 가치가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어떤 사람이
자신의 의무를 행하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무에 따라
행위하는 경우라고(@ 이러한 경우에는 행위의 동기가 오직 의무감뿐이기 때문에) 주장한다.
- 서양 윤리학사. (414~415 페이지)/ 로버트 L. 애링턴/ 서광사 ]
칸트는 개인의 동정심의 성취욕구나 타인을 도와줌으로써 칭찬받고 싶다는 마음 같은 것을
“경향성” 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도덕적 행동은 이러한 경향성이 도덕적 행동의 동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으며, 인간에게 의무적으로 도덕적 행동을 유발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실천하는 능력”>밖에는 없으며 인간의 이성은 이러한 실천 능력에 쉬지 말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앞서 이미 언급했듯이 이러한 이성을 바로 칸트의 <"실천 이성">이라고 합니다.
더불어 도덕(도덕적 행동)이 “의무”라면 그것은 곳 명령이 됩니다.(@ 신의 말씀이 곧 명령인 것처럼)
그래서 칸트의 보편적 도덕원리(법칙)를 <"정언명령(定言命令)">이라고 부르며, 정언 명령은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상관하지 말고 행위 자체가 선이기 때문에 무조건적으로 따라야할
도덕적 명령을 말합니다. ... 이와는 반대로 조건을 달고 행동하는 것을 <"가언명령(假言命令)"> 이라고 하는데,
예를 들면 "칭찬받고 싶다면 거지에게 천원을 주어라!" ... 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동은 결국 목적이 칭찬받는 것이기 때문에 가짜 도덕인 것입니다. 따라서 가언명령이 됩니다.
그래서 ... <"너의 의지의 준칙이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 타당하도록 행동하라."> ~ 라는 명령은
칸트의 대표적인 정언 명령이 되는 것이며, 인간(타인)을 위해 행하는 도덕에는 그 어떤 조건도 달지 말고,
그냥 의무감으로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 그 자체로서 대하라 뜻입니다.
[@ 의무감에서 남을 돕는 행위가 동정심보다는 더 도덕적인 것입니다!]
(@ 오래전 박근혜와 최순실 관계에 대해 상당히 긴 글을 올렸었는데, 그때 글의 일부내용입니다.)
모두가 그 어떤 배려나 양보 없이 오로지 각자의 이익을 위해서만 행동한다면
세계는 그야말로 하루가 멀다고 온통 대립과 분쟁에 휩싸여 혼란스런 세상의 연속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분쟁의 해결을 위해서는 흔히 “이성적으로 판단하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감정에 휘둘려
사리를 분별하지 못해 편향된 사고나 성급한 판단을 내리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서는 이성을 힘을
빌려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인간들의 이기적이고 비양심적인 본성이 수시로 나타난다면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즉
혼란을 막을 수 있는일에는 무엇이 있을까를 생각해보면, 공동체의 이성으로 만든 <법과 제도>라는
합의된 강제성을 활용한다면 문제가 비교적 쉽게 해결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이성적인 결과인 거죠.
하지만 인간 사회라는 것이 그렇게 간단치만은 않다는 걸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너무나 많이 배워 왔고,
또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혼란스러운 사회 상태에 대해서 법과 제도로도 어찌해볼 수 없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교통사고를 당해 피를 흘리며 도로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고도 그냥 지나친다거나,
하루종일 굶었다며 거리에서 배고픔을 호소하며 돈이나 빵을 구걸하는 걸인을 보고도 그냥 모른 채 하며
지나가는 사람이 있다 해도, 그들은(무관심한 사람들) 사회가 만든 법과 제도로 제재를 가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닌 것입니다. ... 그래서 이러한 이기심과 무관심이 공동체 내에 만연하게 된다면 이성으로 만든, 아무리 훌륭한
법이 존재한다고 해도 사회는 그야말로 극단적인 삭막함 속에 놓이게 되어 공동체라는 말이 무색해 질 정도의
말 그대로 껍데기만 공동체인 사회가 될 가능성이 매우 커질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아무리 공동체의 선과 평화를 위한다 해도 인간의 <도덕적 양심>까지
우리 공동체가 강제할 수단은 없다는 것입니다. ... 한마디로 인간의 "도덕"은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는
이성적 사고만으로는 어찌해볼 방법이 없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좀 더 근원적인 해결 방법은
없는 것인가? ~ 하는 물음이 생길 것입니다. 그래서 300년 전에 태어난 독일의 대철학자 칸트(Immanuel Kant)의
견해를 들어볼까 합니다.
등산객이 비탈진 등산로에서 아래로 굴러 떨어져서 다쳤다 해도 우리는 산(山) 에게 책임을 물을 수가 없습니다.
이는 단지 중력이라는 과학적 <인과법칙>에 따라 그러한 사고가 발생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윤리적, 도덕적 양심은 어떨까?
과학(법칙)같은 지식적 측면의 이성은 우리 인간이 얼마든지 사유가 가능한 영역입니다.(이론적 접근 가능)
한마디로 과학은 충분히 이성으로 사유가 가능한 대상인 것입니다. ... 하지만 신, 영혼, 자유, 도덕 같은 영역은
유의미 하지만 이성으로 사유(검증)하기에는 불완전, 혹은 불가능 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각자의 양심에 따른
도덕적 행동을 왜 해야만 하는지는 과학적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며, 대신 신과 종교가 과학적 질문을 허용하지 않듯이,
인간의 도덕적 행동에도 그 어떤 질문이나 이유를 묻지 않아야 한다고 칸트는 주장했습니다. ... 한마디로
인간의 도덕적 행동은 그 어떤 이유나 이해 없이 무조건 양심이 시키는 명령에 따라 <"의무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칸트의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칸트는, 과학은 이론적인 이성으로는 접근이 가능했지만 ... 신과 영혼, 도덕 등은
이론적으로는 접근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러한 형이상학적 개념들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이성의 지식적 측면이 아닌,
다른 측면의 이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으며, 인간의 도덕적 행동은 직접적인 <"실천(행동)">으로, 즉
아무 조건을 달지 말고 그냥 <의무적>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리고 칸트는 이렇게 우리 내면에
우리를 도덕적으로 행동(실천)하게 만드는 "의무적인 의식"이 존재한다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실천이성">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까지만 살펴보면, 칸트가 규정한 "도덕"은 너무나 막연한 것 같습니다. ... 또한
<"의무적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부분도 조금은 억지스럽고 이해하기도 힘듭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좀 더 확실히 이해하려면 너무나 유명한 칸트의 발언을 살펴봐야 합니다.
◆ "너의 의지의 준칙이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 타당하도록 행동하라." - 칸트(Immanuel Kant)
인간의 도덕은 지식적인(이론적인) 이성으로는 사유가 불가능 합니다. 그런데 칸트는 이러한
형이상학적(신, 영혼, 도덕 등) 영역을 과감히 이성의 영역 안으로 끌고 들어옵니다. ... 그리고
인간의 도덕(도덕적 행동)에도 과연 과학법칙(중력) 같은 "보편적인 원리"가 있을 수 있겠는가? ~ 를
끊임없이 사유하며 고뇌한 끝에 내 놓은 결론이 바로 위의 원칙입니다.
등산객이 넘어져 산 아래로 굴러 떨어지거나 밤나무에서 밤송이가 떨어지거나 ... 그리고
타자가 친 홈런 볼이 하늘을 향해 힘차게 날아가다가 결국은 외야 관중석으로 떨어지는 것은
모두가 '중력법칙' 이라는 보편적인 과학 원리에 따른 결과인 것입니다. ... 그렇다면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인류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보편적인 도덕의 원리가 있을 수 있을까? ... 여기에 칸트는
<"보편적 도덕법칙(원리)">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칸트의 주장처럼 모든 인간에게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도덕법칙(원리)을
찾아보는 것은 너무나 어렵습니다. ... 예를 들어, 거리에서 구걸하는 걸인에게 천 원짜리 한 장을 건넨 행위를
어떤 이는 매우 도덕적인 행동이라 생각하고 있는 반면, 이와는 반대로 그러한 행위(적선)는 오히려 걸인의 자활의지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별로 좋은 행동이 아니라는 의견도 많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실제 인간사회의 현실에서는
"도덕적 행동"에 대한 기준이 개개인 마다 주관적이며 편차가 있기 때문에 칸트의 주장은 쉽게 받아들이기가
어렵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칸트가 주장한 것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가? ... 그래서 칸트를(칸트의 발언)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기서 한 발짝 더 깊게 들어가서 ... 먼저 법(法)과 선(善)에 대한 그동안의 인식을 전환시켜야 합니다.
꾸준히 사회적 이슈로 많이 거론되고 있는 보복운전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대부분의 구성원(국민)들이 보기에는 보복운전은 분명히
잘못된 행동이라고 얘기할 것입니다. 한마디로 보복운전은 "선(善)한 행동이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공동체는 보복운전을 하게 될 경우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공동체의 보편성이 담긴 법(法)을 만들어
적용하게 됩니다. ... 한마디로 우리는 보복운전을 하지 않는 것이 선(善) 이라는 보편적 시선을 갖기 때문에
이후에 법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선한 판단이 먼저 존재한 후에, 그 뒤를
법이 따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입법원리(법이 만들어지는 과정)는 선한 판단 뒤에 법을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칸트는 우리에게 익숙한 이러한 입법의 원리를 전복시킵니다.
근대철학 이전까지만 해도 신(God)은 그 자체로서 진리였습니다.
때문에 신의 계율(말씀, 명령) 또한 묻고 따지지 말아야 할 엄격한 법(法) 이라고 할 수 있었으며,
그러한 신의 말씀(명령)을 따르는 것은 당연한 선이라 생각했습니다. ... 한마디로 법(신의 계율)이 먼저 존재한 후에,
그것을 따르는 것이(신의 말씀을 따르는 삶) 바로 선(善) 이라는 것입니다. ... 그리고 칸트는 여기서 힌트를 얻어,
인간의 <보편적 도덕법칙>또한 신의 계율처럼 그 자체로서 하나의 법(法)이며, 그것을 지키는 것이 선(善)이라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선한 판단 같은 건 따지지 말자는 거죠. 그냥 (보편적)도덕법칙대로 행동하는 것! ~ 이 자체가
바로 선한 행동(도덕적 행동) 이라는 뜻입니다. 결론적으로 칸트가 주장한 <보편적 도덕법칙>이란
아무 조건도 따지지 말고 <“의무적”>으로 행동해야 하는( ~ 해야만 한다!) 규칙(원칙)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원칙(규칙)에 따라 사는 것이 바로 진정한 선이며, 도덕적 행동 이라고 했습니다.[◆ 의무에 따르는 삶!]
결국 앞의 사례에서 걸인에게 천원을 건넨 행위는 잘했다는 칭찬을 받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칸트의 도덕법칙에 따르면 도덕적 행동은 아닌 것입니다. ... 우리가 그동안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도덕적 행동과 칸트가 생각하는 도덕적 행동과는 괴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 아무튼 마음속 깊은 곳에서
타인을 불쌍하게 생각하는, 즉 동정심이 마구마구 샘솟아 자선을 베풀었다고 해도 칸트는 그것이 아무조건 없이
<“의무적(해야만 한다)”>으로 행동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진정한 도덕적 행동이 아니라고 했던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칸트의 도덕적 행동은 <“천원을 주고 싶다!”>가 아니라 <“천원을 줘야 한다!”>가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 "너의 의지의 준칙이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 타당하도록 행동하라." 라는 칸트(Kant)의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 당신이 하려는 어떤 도덕적인 행동이(의지가) 모든 사람이 보기에
법으로 만들어져도 전혀 이상할 것 없을 정도로 보편성을 내포하고 있다면, 그렇게 행동하라!> ~ 라는 뜻입니다.
좀 더 쉽게 풀어보면, 당신이 지금 하는 행동에 대해서,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똑같이 본인을 따라 해도 괜찮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 행동은 보편성(일반원칙)을 가진 도덕적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거리에서 구걸하는 걸인을 볼 때 마다 나는 그에게 의지박약한 놈이라며 주먹질을 할 것이다!"
이러한 행동을 과연 다른 모든 사람에게 따라하도록 얘기할 수 있을까? ~ 당연히 이것은 칸트가 얘기한
도덕적 행동이 아닐 것입니다. ... 칸트에게 도덕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자 의무>였습니다.
이미 앞에서도 언급했었지만, 모든 인간이 개인의 이기심과 비양심적인 행동만을 추구하게 된다면
종국에는 모두의 자유가 박탈당하게 되는 상황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결국 참된 도덕은 이성에서 나오며,
도덕은 의무적인 법칙으로 규정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럼 정리하는 의미에서 윤리학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조지아 주립대학 로버트 L. 애링턴 교수의
얘기를 들어보겠습니다.
[◆ 동정심이라는 동기는 "도덕적 내용이 부족하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동정심이라는
동기로부터 행위하는 사람은 진정으로 옳은 것을 행하는데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단지 동정심이라는 경향성을 만족시키는데 관심을 쏟을 뿐이다. 그리고 자신이 행하는 바의
도덕성에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는 사람은 분명히 “도덕적 가치”를 갖는 방식으로 행위 하는데
실패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칸트는 오직 의무라는 동기만이 행위에 도덕적 가치를
부여한다고 주장한다. ~ (중략) ~ 칸트는 도덕적 가치가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어떤 사람이
자신의 의무를 행하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무에 따라
행위하는 경우라고(@ 이러한 경우에는 행위의 동기가 오직 의무감뿐이기 때문에) 주장한다.
- 서양 윤리학사. (414~415 페이지)/ 로버트 L. 애링턴/ 서광사 ]
칸트는 개인의 동정심의 성취욕구나 타인을 도와줌으로써 칭찬받고 싶다는 마음 같은 것을
“경향성” 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도덕적 행동은 이러한 경향성이 도덕적 행동의 동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으며, 인간에게 의무적으로 도덕적 행동을 유발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실천하는 능력”>밖에는 없으며 인간의 이성은 이러한 실천 능력에 쉬지 말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앞서 이미 언급했듯이 이러한 이성을 바로 칸트의 <"실천 이성">이라고 합니다.
더불어 도덕(도덕적 행동)이 “의무”라면 그것은 곳 명령이 됩니다.(@ 신의 말씀이 곧 명령인 것처럼)
그래서 칸트의 보편적 도덕원리(법칙)를 <"정언명령(定言命令)">이라고 부르며, 정언 명령은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상관하지 말고 행위 자체가 선이기 때문에 무조건적으로 따라야할
도덕적 명령을 말합니다. ... 이와는 반대로 조건을 달고 행동하는 것을 <"가언명령(假言命令)"> 이라고 하는데,
예를 들면 "칭찬받고 싶다면 거지에게 천원을 주어라!" ... 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동은 결국 목적이 칭찬받는 것이기 때문에 가짜 도덕인 것입니다. 따라서 가언명령이 됩니다.
그래서 ... <"너의 의지의 준칙이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 타당하도록 행동하라."> ~ 라는 명령은
칸트의 대표적인 정언 명령이 되는 것이며, 인간(타인)을 위해 행하는 도덕에는 그 어떤 조건도 달지 말고,
그냥 의무감으로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 그 자체로서 대하라 뜻입니다.
[@ 의무감에서 남을 돕는 행위가 동정심보다는 더 도덕적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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