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부분의 사람은 사물이나 상황 그 자체를 보지 않는다.
그것에 사로잡힌 자신의 생각이나 집착, 고집, 그 상황에 대한
자신의 감정 또는 머릿속에 멋대로 떠올린 상상을 본다.
결국 자신을 이용하여 사물이나 상황 자체를 감추고 있다. - 니체 >>
[◆ <다음은 코미디언 론 화이트(Ron White)가
자신의 사촌 레이(Ray)와 나누었다는 대화 내용이다.>
먼저 제가 말했죠. “이봐! 알고 보면 우리는 모두 게이라니까.”
그러자 레이가 받아쳤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자네 포르노 좋아해?”
“그럼, 포르노야 얼마든지 좋아하지”
“여자들 둘이 하는 장면만 골라서 보나?”
“아니, 남자랑 여자가 하는 장면을 보.지”
“그 남자가 힘없이 축 늘어진 페니스를 가지고 있으면 좋은가?”
“무슨 소리! 나는 커다랗고, 단단하고, 활기 넘치는 놈이 좋아”
“내가 뭐랬나? 자네도 커다란 자.지 보는 거 좋아한다니까.”
- <포르노 보는 남자, 로맨스 읽는 여자. (90 페이지)/
오기 오가스(Ogi Ogas), 사이 가담(Sai Gaddam) / 웅진지식하우스> ]
그녀(?)들의 말처럼,
남자들이 여성들에게 시선의 강.간을 보낼 때(@ 나는 그 시선 강.간에 동의하지 않지만 ~ )
동시에 남자들은 다른 남자들의 페니스에도 상당한(?) 시선을 보냅니다. 물론 게이가 아님에도 말입니다.
책에서는 이를 통계적으로도 확인해 줍니다.
[◆ 판타스티닷시시(Fantasti.cc)는 동호회 기반의 성인 콘텐츠 집합소이자 소셜 네트워크
사이트인데, 남자 사용자들이 100만개가 넘는 이미지와 동영상에 점수를 매기고 코멘트를
다는 것이 주된 활동이다. 이 판타스티닷시시에서 최상위 랭크된 이미지 100개 중에서 21개가
페니스를 클로즈업한 장면이었다. 도그파일의 검색내용을 봐도 “보.지”의 검색 횟수(109만 6,614회)는
“자.지”의 검색 횟수(93만 8,134회)를 간신히 앞섰다 - <포르노 보는 남자, 로맨스 읽는 여자. (91 페이지)> ]
남성들의 시선이 불편하다며 사회를 향해 거친 고함을 지르던 여성들 중 상당수는
자신의 집 현관문을 들어서자마자 너무나 과감하게, 또는 적나라하게 자신의 벗은 몸을 작가의
열정으로 찍고 나서 마치 두 개의 인격을 가진 사람처럼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같은 본인의
SNS 계정에 서둘러 올려놓고 사회를 향해 두 번째 고함을 칩니다.
“어서 빨리 내 몸을 강.간(평가)해줘요 ~ ”
주술적! ~ 너무도 주술적입니다.
마치 의식을 치르는 주술사처럼 3차원 몸의 왜곡을 0과 1의 디지털 조각칼로 조각하듯
조심스럽게 깎고 다듬고 수정하여 2차원 평면에 배설하는 여성들의 이 성스러운 전복된 관음증에 대하여
<광신적 노출가즘> 또는 <자기 주술적인 행위>라고 저는 그렇게 정의하고 싶습니다. ... 다시 말해
타인(남자)의 시선이 물리적 공간에서 만난다면 그것은 “강.간”이 되지만, 디지털 공간에서 만난다면
이때의 남성들의 시선은 여성들에게는 사랑하는 연인의 남근으로 변환돼 여성 자신을 애무하고 삽.입하는,
또 그것을 너그럽게 쾌감으로 받아들이는 여성 자신의 오르가즘으로 치환됩니다. 그런데
물리적 공간과 인터넷 공간에서 일어나는 이런 빈번한 시선들은 본질적으로 동일합니다.
“지구” 라는 별에 존재하는 모든 남성들의 염색체에 아무리 <XY> 라는 단일성이 부여됐다고 해도
그 남성들의 생각(시선)에까지 단일성이 부여된 염색체가 존재한다고 규정하면 안 됩니다.
여성(아내)과 자식들을 위해 사회라는 날것의 겨울에서 하루 종일 자신을 불태웠던
<가장(家長)>이라는 막대기 같은 남성의 퇴근길 ... 그리고 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매끈한 다리에
형이상학적 모양의 검은색 스타킹과 미니스커트, 여기에 굽 높은 힐을 신은 어느 젊은 여성의
시끄러운 전화통화를 마주한 그 타다 만 막대가 같은 가장에게 그녀는 <질병>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여성의류 쇼핑몰을 운영하는 남자 A의 시선은 그녀에게서 신상 스타킹의 <디자인>이 보입니다.
그리고 의대생(정형외과) 남자 B는 그녀의 높은 힐을 보며 얼마 전 공부했던 <족부질환>을 떠올려 봅니다.
남성이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은 상황에 따라 이렇게 다양한 시선으로 분리될 수 있습니다.
단순히 “매끄러운 다리” 라는 관능적, 혹은 육감적인 <물성>의 개념을 넘어,
일에 지친 가장의 시선은 시끄럽게 떠드는 그녀를 <질병>으로 보이게 만들며,
매출을 신경 써야하는 쇼핑몰 사장에게는 <디자인>이라는 시선이, 그리고 의대생에게는 <족부질환> 이라는
학문적 시선으로 전환됩니다. 한마디로 남성의 시선은 갇힌 시선이 아니라 장미꽃과 썩은 생선을
동시에 바라볼 수 있는 하나의 자유로운 바람인 것입니다.
여성들, 특히 (한국에서)페미니즘을 한다는 여성들은 분재를 가꾸듯이 남성들의 시선을 오직
<여성의 몸> 하나에만 가둬놓고 자신들이 원하는 모양과 크기로만 자라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남성들의 시선이 올곧게 위로만 솟을라치면 그 옆에 다른 탐욕적 시선과 함께 묶어 옆으로 뻗는 시선의 가지를
인위적으로 생산합니다. 사실 분재는 자유를 억압하는 권력의 축소판과 다름없습니다. 따라서
페미니즘으로 재해석되는 남자들의 여성에 대한 소위 <시 선 강 간>은 여성들이 남성들에게 행사하는
변태적 폭력이자 동시에 권력의 단맛인 것입니다.
“젊고 탱탱한, 파릇파릇한 어린 계집년들만 바라보지 말고, 조금은 늙고 주름졌지만
그래도 아직은, 그리고 여전히 쓸 만한 우리 낡은 계집들도 어서 빨리 (시선)강.간해랏! ~ “
사랑하는 남녀의 섹.스(s.ex)에서 상당수의 여성들이 단지 애인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거짓 오르가즘을 연출한다고 합니다. ~ 진심을 다한 남자의 사랑에 여자는 가짜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소위 한국적 페미니즘을 한다는 (늙은, 낡은)여성들은 한국 남성들의 시선이 자신들보다
더 젊고 탱탱한 여성에게만 작동되는 것이 매우 불쾌하고 못마땅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저는
(낡은)그녀들의 고함에서 초라하고 소외된 개체로 한참이나 머물고 있는 일종의 <고독>을 봅니다.
한마디로 <“시선 강.간 하지마라!”>가 아닌, <“제발 좀 나도 (시선)강.간을 해주세요!”>라는
조급한 위선이 보인다는 뜻입니다.
프로이트(Freud)를 새로 썼다는 프랑스가 낳은 세계적 지성 자크 라캉(Jacques Lacan)은
인간의 욕망(Desire)의 개념을 탁월하게 설명합니다. ... 먼저 라캉의 욕망의 개념을 공식화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욕망(Desire) = 요구(demand) - 욕구(need) ]
라캉의 욕망이론은 요구와 욕구가 합류되면서 좀 더 구체화 됩니다.
욕구는 인간의 몸의 본능으로 쉽게 설명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배가 고프면 칼로리를 원합니다.
음식을 먹고 싶은 것 입니다. 또한 배가 부르면, 즉 포만감에 이르면 곧 배설을 원하는 시기가
찾아오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몸이 원하는 것을 충족(만족) 시켜야만 하는 것입니다. ... 그리고
프로이트는 이것을 <소망 충족> 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몸의 원함>을 충족시키기 위해 자기 자신이나 다른 누군가에게 언어로서
<몸이 원한다>는 것을 표현하는데 이것이 바로 <요구(need)>입니다. 그리고 “배고픔” 같은
<원함>을 충족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적 충족 뒤에도 인간에게는 무언가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 또는 부족함 같은 게 여전히 남습니다. ... 예를 들면, 학원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집으로 돌아온
예쁜 딸 수지가 엄마에게 배가 고프다고 말하자 엄마는 바쁘다며 대신 짜장면을 시켜먹으라고
수지에게 만 원짜리 한 장을 쥐어주고는 급하게 외출을 합니다. 집에 홀로 남은 수지는 짜장면을
맛있게 시켜먹고, 디저트로 냉장고에서 참외를 하나 깎아먹기 시작합니다. 참외 하나를 다 먹을 때쯤
수지는 갑자기 찾아온 공허함과 외로움에 설움이 복받쳐 올라옵니다. 허기진 배도 채웠고, 신선한
참외도 먹었는데, 그래서 몸은 포만감까지 느끼고 있는데도 수지는 결국 눈물을 터뜨리고야 맙니다.
수지는 배고픔의 욕구를 풀어달라며 엄마에게 언어로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현실적으로)충족됐음에도 수지에게는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계속 남아있습니다. 다른 엄마들처럼
수지 옆에서 수다도 떨어주고, 수지가 싫어하는 멸치반찬도 먹어보라며 숟가락에 얹어주는
지금 당장 수지 옆에 있어야만 하는 “엄마의 존재”, 즉 엄마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래서 라캉은 모든 요구의 근본에는 바로 <사랑에 대한 요구>가 숨어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엄마가 수지에게 만원이 아닌, 십만 원을 주고 외출했다고 해서 수지가 그 돈으로
짜장면을 열 그릇을 시켜먹는다 해도 수지에게는 계속해서 채워지지 않는 빈 공간이 남게 됩니다.
그리고 그 빈 공간을 라캉은 <욕망(Desire)>으로 정의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인간의 욕망은 <결핍>의 다른 이름인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적 페미니즘이 고함치는 <시선의 강.간>을 라캉식으로 해석하면 그 속에는
남성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그녀들의 처절하고 비통한, 그리고 결핍된 욕망이 숨어있는 것입니다.
<“제발 좀 나도 (시선)강.간을 해주세요!”>
보편적으로 위기의 외적 징후는 <팽창>으로 나타납니다.
경제 버블은 통화의 팽창으로 시작된 것이며, 공급과잉으로 인한 (경제)공황 또한 생산의 팽창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 그렇다면 남성의 시선은? 남성들의 시선은 과거에나 지금이나 또 미래 그 어느
지점에서나 항상 같은 자리에 머물고 있습니다. 다만 페미니즘이 자신들의 공간을 확장할 때마다
남성들의 시선도 함께 끄집어내고 있을 뿐입니다. 결국 남성들의 시선을 없어진 맷돌의 손잡이처럼
어처구니없게 “강.간”으로 확대 재생산하여 사회적 담론으로 팽창시키고 있는 짓거리는
<한국적 페미녀들> 자신들의 심각한 위기의 징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녀들에게 이렇게 고함쳐 볼까 합니다.
“니네들 지금 상당한 위기야!”
<< 폭력적인 성질을 지녔기 때문에 공격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를 해치거나 괴롭히기 위해 공격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자신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어디까지 자신의 힘이 미치는지 알고 싶어 공격하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공격하기도 한다. 이것은 개인은 물론 국가 또한 그러하다.
- 니체(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
[@ 최근 한국적 페미녀들의 사고를 엿볼수 있는 게시물을 자주 보았습니다.
그때마다 답답함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단순히 제가 남성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페미니즘(feminism)" 이라는 말처럼 최소한 이즘(~ ism) 이라면, 뼈대나 구조처럼
자신들을 관통하는 중심적 사유들이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은 오로지 (한국)남성에 대한
혐오나 과격한 감정배설만을 쏟아내고 있는것 같습니다. ~ 전에 페미니즘에 관련된 긴 글을 한 번 올렸었는데
다시 중복해서 올리기도 뭐하고 해서 답답한 마음에 그냥 짧은 글 하나 던지고 갑니다.
제 글이 불편한 여성 이슈인 분들이 계시다면 막 욕하셔도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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