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 분들에게 사과말씀 먼저 전합니다.
제가 지금까지 올린 글 중에 분량이 가장 많습니다.
이슈인 분들의 소중한 시간을 빼앗는 것은 아닐지 많이 염려됩니다.
광장의 촛불과 박근혜 파면을 지켜보면서 주제넘게 한국의 법치주의를 생각하다
조금씩 써내려간 글이 이렇게 많은 분량의 사태를 만들었습니다. ~ 죄송합니다. )
[◆ 법의 지배(Rule of Law) - 계열화되는 사실과 사실들의 결합 ]
< 피청구인의 위헌․위법행위는 국민의 신임을 배반한 것으로
헌법수호의 관점에서 용납될 수 없는 중대한 법 위배행위라고 보아야 합니다.
피청구인의 법 위배행위가 헌법질서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과 파급효과가 중대하므로,
피청구인을 파면함으로써 얻는 헌법 수호의 이익이 압도적으로 크다고 할 것입니다.
이에 재판관 전원의 일치된 의견으로 주문을 선고합니다.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 - (탄핵심판 선고 전문 中) >
대한민국 헌정사상 <대통령 파면>이라는 초유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대통령을 지지했던 세력들은 탄식했고, 그 반대편에서 국민의 힘이 살아있음을 기대했던
수많은 이들은 환호하고 기뻐했습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우리 헌법의 첫 인사말이 단순히 야무진 추상어가 아니라 현실에서 실제 실현되며
수많은 국민들의 가슴에 감동을 불어넣은 실천적 명령이었음이 밝혀진 사건이었습니다. 또한
국민들 스스로에게도 대한민국의 주권자는 바로 <국민> 자신이었음을 다시 한 번 확인시키고,
약속받은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이번 대통령 파면으로 우리가 당장 피부로 느낄 수 있었던 감정은 국민주권이 살아있음을
확인했다는 만족감 내지는 안도감. ... 그리고 우리 국민의 힘이 폭력이 아닌, 힘겨웠지만
<민주적 절차>라는 가슴 벅찬 과정을 통해서 국가 권력의 정중앙을 관통했다는 자신감 정도일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결과가 혹시라도 가볍다거나 가치가 없었다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런데 저는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또 하나의 분수령이 될 수 있는 지점에서,
그렇다면 우리 국민은 소위 <법의 지배> 라는 이상적인 정치체제를 완성한 것인가? ~ 하는 질문을
조심스럽게 던져봅니다. 또한 법과 민주적 절차를 통해서 최고 권력까지 파면시켰다면 대한민국의
진정한 주권자인 국민의 앞길엔 더 이상 아무것도 거리낄 것은 없는 것인가? ~ 모여서 합치고
군집을 이루면 이제 대한민국 사회에서 국민의 의지로 관철시키지 못할 일은 그 어떤 것도 없는
것인가? ... 질문과 의심은 계속됩니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 도움 받은 자료들]
@ [ 루소 - 인간 불평등의 발견자/ 리오 담로시/ 교양인]
@ [ 장 자크 루소 - 인간 불평등 기원론/ 주경복.고봉만 옮김/ 책세상]
@ [ 노마디즘 1권/ 이진경/ 휴머니스트 출판]
@ [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 서중석(역사문제연구소 기획)/ 웅진하우스]
@ [ (해방후 정치사 100장면 / 김삼웅 / 가람기획) ]
@ [ 국가범죄 / 이재승 / 도서출판 앨피 ]
@ [ 법원과 검찰의 탄생 / 문준영/ 역사비평사 ]
@ [ 객지(客地) / 황석영 / 창비 ]
@ [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 조지 레이코프 / 외이즈 베리 출판(2015) ]
@ [ 삼성을 생각한다 / 김용철 변호사/ 사회평론 펴냄 ]
왕이 지배하던 중세 시대에는 백성(국민)은 곧 가축이었고, “열등” 그 자체였으며, 그들은 언제나
신의 대리인인 왕과 성직자의 명령에 복종해야만 하는 존재였습니다. ... 국제법의 아버지라 불리는
네덜란드의 법학자 “그로티우스(Hugo Grotius 1583년~1645년)” 는 심지어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히기도 했습니다.
<인류는 여러 가축의 무리와 마찬가지인데, 가축 무리마다 주인이 정해져 있으며
그 주인은 자기 무리를 잡아먹기 위해 지켜주고 있다. - 그로티우스>
그런데 그로티우스의 이런 생각은 그가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이 편협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당시에 왕은 신(神)과 같은 존재였고, 백성은 왕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만 하는 존재였습니다.
한마디로 그 시대에는 그러한 세계관이 당연한 진리였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타인을 함부로 지배할 권리도 없지만, 동시에 그 어느 누구에게도 지배당해야할 이유
또한 없습니다. 한마디로 우리는 <자유인>으로 태어난 존재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자유인으로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완벽히 보호할 수 있다는 보장은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 처해졌을 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대안을 무엇일까?
가장 쉬운 방법은 본인보다 더 강한 자에게 복종하며 자신을 맡기는 방법이 있을 수 있습니다.
노예가 되는 것이지요. ~ 하지만 자유인으로 태어나서 타인의 노예가 될 바엔 차라리 끝까지
저항하며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쪽이 진정한 자유인으로서의 더 나은 가치 있는 삶이
될 것입니다. ~ 그럼 노예 말고 신(神)과 같은 막연한 절대자에게 기대어보는 것은 어떨까?
아쉽지만 신에게 의지하는 것은 심리적 안정을 느낄 수는 있어도 현실적으로 큰 도움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나마 가장 현실적이며 접근성 좋은 대안이라 할 만한 것은 바로 본인의 <가족>에게
생명과 재산을 맡기는 것입니다.
차분히 생각해 보면 <가족>은 가장 작은 단위의 <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큰 어려움에 처해 혼자서 해결하기 힘든 상황에 부딪혔을 때에는 본인이 속한 공동체의 도움을
받는 것이 가장 안전하며 빠르고, 또 합리적인 해결방법이 될 것입니다. 또한 공동체의 크기가
크면 클수록, 더불어 그 공동체가 본인 가족에 준하는 믿음을 준다면 생명과 재산의 안전에 대한
믿음은 따라서 커질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인류는 보편적으로 개인보다 훨씬 더 크고 강한
<공동체(사회)>를 열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공동체의 크기가 크다 할지라도 우리는 어떻게 본인의 가족에 준하는 믿음을
공동체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인가 ~ 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공동체 성립 문제에
대한 해법을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라는 대략 300년 전에 태어난
프랑스의 계몽철학자가 쓴 <사회계약론>에서 찾아보려고 합니다.
<사회계약> 이론들은 루소보다 앞선 시대를 살았던 영국의 홉스(Hobbes)나 로크(Locke) 같은
철학자들도 언급했던 내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소의 사상이 주목받는 이유는 오늘날의
민주주의 국가가 탄생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입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루소가 살았던 시대에는 통치자인 왕과 피치자인 국민들 사이에는 강력한
구속력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 한마디로 왕은 <주권자> 였으며, 국민들은 주권자인
왕 앞에서 충성을 맹세하는 것이 당연한 시대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왕과 2%의 성직자 및 귀족이
98%의 국민들을 지배하던 당시의 프랑스 모습은 루소에게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모순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루소는 <사회계약>을 통해 새로운 공동체를 구상하게 되는데 ... 그 전에 먼저
간략하게 홉스(Hobbes, Thomas)의 견해부터 들어봅니다.
<◆ “국민 모두가 합의(사회계약)해서 (절대)권력을 만들고 국민들은 그렇게 만들어진
권력에게 모든 권리를 양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국민들은 오직 그 강력한 절대 권력에게만
복종함으로써 전쟁 없는 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겁니다.“ - 홉스(Hobbes)>
인간은 사회를 형성하기 이전인 원시적 <자연상태>에 있을 때에는 살기위해 무슨 짓이라도
하게 됩니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법 따위는 필요 없었고 오로지 자기보존과 쾌락추구라는
본능적 욕구에만 충실할 수밖에 없었는데, 홉스는 이것을 <자연권> 이라고 했습니다. 더불어
자연상태에서 인간들은 마땅히 복종해야할 <공통 권력>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며 수시로 싸우게 됩니다.(@ 싸우지 않는다면 본인이 죽거나 다치므로) ... 다시 말해
상시 투쟁(전쟁) 상태에 놓여있게 되는 것입니다. 흔히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이라고 합니다.
결국 이러한 혼란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 홉스는 우선 사람들이 합의(사회계약)해서
아주 강력한 (절대)권력을 만들어야 한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매일 서로가 살기위해 싸움을
할 바엔 차라리 모든 이들의 힘을 뛰어넘는 단 하나의 초월적 권력에게 모든 권리를 양도하고
그 초월적 존재에게 무조건 복종하자는 것인데 ... 대신 자신들의 생명과 안전을 그 절대권력에게
보장받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만들어진 절대권력은 매우 강력한 통치권을 소유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리바이어던(leviathan)>입니다.
<리바이어던(leviathan)>은 성경에(욥기) 나오는 거대한 바다 괴물입니다. ... 요즘 개념으로
<국가(정부)>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는데, 홉스는 이 절대권력(리바이어던)에게 모든 국민들이
완전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언뜻 보면 과거 군주정과 크게 다를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점은 당시 절대권력(왕권)은 신(神)이 부여했지만(@ 왕권신수설),
홉스가 주장한 절대자(통치권자)의 권력은 국민들이 부여한다는 점입니다. 한마디로 사람들에게
더 이상 신에게 기대어 살지 말고, 앞으로는 인간들끼리의 약속으로 절대 주권자를 만들자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국민들이 합의(계약)해서 뽑은 절대권력(통치자)이라고 하더라도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실수가 있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도덕적이든, 무능한 경영이든 ~ 아무튼 절대자는 신이 아니기
때문에 결함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다른 국가의 식민지가 되거나 무정부 상태가 된다면
국민들 입장에서는 오히려 그것이 더 큰 혼란과 고통을 주는 일이 될 것입니다. ... 따라서
무능하거나 도덕적으로 흠결 있는 권력이라고 하더라도 차라리 없는 것 보다는 낫다는 것이
홉스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국민들은 이렇게 만들어진 절대권력(통치권자)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고 했던 것입니다. ... 그런데 여기서 루소는 홉스보다 수준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킵니다.
<◆ “국민이 합의(계약)해서 권력(통치권력. 국가)을 만드는 건 좋은데, 그렇게 만든
권력에 국민이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통치)권력이 국민에게 복종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 루소(Rousseau)>
이처럼 루소는 나라의 실질적인 권력은 모든 인민(국민)들에게 있다며 <인민 주권설>을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주창합니다. 한마디로 인민 전체가 나라의 모든 권력을 소유해야 하는
실질적 <주권자>라는 뜻입니다. ... 루소의 이 주장(인민 주권설)이 가히 혁명적인 이유는
그 누가 통치자가 되더라도 그는(통치자) 단지 인민들의 공복일 뿐이며, 군주정과 공화정 사이에
어떤 개념차이도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통치자가 왕이든, 선출된 대표든 구분하지
않고 국가의 모든 권력은 오로지 전체 국민들 소유라는 것입니다.(@ 무려 300년 전의 생각임 ~ )
그리고 이러한 루소의 (혁명적)생각은 이후 프랑스 대혁명(1789년)으로 이어지며 현실화 됩니다.
더불어 이렇게 국가 권력의 주체가 절대자(왕)가 아닌, 국민으로 바뀌면서 성립된 국가를 우리는
보통 <근대국가> 라고 얘기합니다.
[◆ <사회계약론>의 도전은 바로 시작부터 루소의
찬란한 머리말 가운데서도 가장 유명한 머리말에 예고되어 있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어디서나 사슬에 묶여 있다.”
~ (중략) ~ 루소는 이어서 말한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주인이라고 믿지만 그들보다 더 노예다.
어떤 종류의 사회에서든 불평등과 착취는 항상 있게 마련이다.
이것은 삶의 진실이지 바로잡을 수 있는 실수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 목적은 쇠사슬을 떨쳐버리는 것(그것은 불가능하다)이
될 수 없고, 그 쇠사슬을 외부에서 부과한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받아들인 것으로 만드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
(루소-인간 불평등의 발견자. 497 페이지 / 리오 담로시/ 교양인)]
앞서 얘기했듯이, 인간이 자연 상태에 놓여있었을 때에는 사회를 만들 필요가 없었습니다.
자연 상태의 인간은 가족단위, 아니면 홀로 흩어져 살았음으로 법이나 도덕 따위는 특별히 필요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공동체가 만들어지고 구성원들 사이에서 <사유재산> 개념이 생겨나자
사회는 그것(사유재산)을 보호할 강제력 있는 제도가 필요해 졌습니다. 바로 법을 비롯한 많은
규범들입니다. ... 이후 유산계급은 무산계급에게 법률의 준수를 요구(강요)하게 되었고, 이러한
법률은 사람들을 부당한 방식으로 속박하게 됩니다. ... 그래서 루소는 다음처럼 말했던 것입니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어디서나 사슬에 묶여 있다.” - 루소(Rousseau)>
루소는 인류가 사회를 형성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면, 그 어느 시대가 됐든지 간에
(사회적)불평등은 공동체 내부에서 항상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얘기합니다. ... 다시 말해,
인간의 불평등은 사회의 잘못된 <제도>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슬을 외부에서
누군가 강제로 채운 것이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 전체의 동의하에 채워진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
방법, 즉 이상적 국가(정치체제)를 찾아보자고 했던 것입니다. 쉽게 말해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인정하는 <사슬의 정당성> 확보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방법을 앞서 언급한 <인민 주권설>에
의한 <사회계약>에서 찾으려고 고민했던 것입니다.
루소에 따르면, 모든 개인은 본인들이 가진 모든 권리를 공동체에 반납하고, 백지상태에서
새롭게 시작하기로 약속해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공동체 안의 개인들은 모두가 똑같은 빈털터리
상태가 되기 때문에, 본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힘센)타인에게 보호해 달라며 노예가 될 필요도 없고,
본인 또한 타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려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결국 이것은 각각의 개인들이
오직 공동체에게만 본인을 양도함으로써 그 어느 누구(타인)에게도 본인을 양도하지 않은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모든 권리를 양도한 개인들이 모인 공동체 안에서는 그 어떤 <불평등>도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 여기서 말하는 불평등은 신체장애나 지적상태 같은 자연적
불평등이 아닌, 개인들이 사회(공동체)를 구성하면서부터 생겨난 인위적 불평등을 말하는 것임.]
[◆ 구성원 전체의 (공동의)힘으로 개개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방어하고 보호하며,
각 개인들은 전체에 결합되어 있지만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복종하고 이전과 같이
자유로울 수 있는 하나의 결합 형태를 발견하는 것, 이것이 바로 “사회계약”이
해결해 주는 근본 문제이다. - (사회계약론)]
개인들은 공동체(사회)를 만드는 과정에서 <사회계약> 이라는 하나의 약속을 합니다.
다시 말해 이 계약이 체결되는 즉시, 계약자인 개인들보다 상위 범주에 자리한 하나의 거대한
정신적 집합 공동체, 즉 <국가>가 성립하게 되는 것입니다.[@국가는 “계약” 그 자체인 것임!]
그리고 약속대로 공동체에 자신의 모든 권리를 맡김으로써 구성원 모두가 동일한 조건(빈털터리)에
놓이게 되는데, 이것은 결국 그 어느 누구도 우월하거나 열등하지 않은 모두가 평등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 우리는 자신의 모든 권리를 <일반의지(General will)>의
지휘아래 귀속시키며, 하나의 집합체로서 각각의 구성원들을 전체에서
떨어뜨릴 수 없는 일부분으로 인정한다. - (사회계약론)]
여기서 <사회계약론>의 가장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일반의지(General will)>가 언급됩니다.
개인이 사회계약을 맺고 공동체에 모든 권리를 맡긴 무방비 상태에서 그렇다면 이제 개인은
무엇에 의지(복종)해야 하는가? ~ 루소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합니다.
<모든 공동체 구성원은 오직 일반의지(General will)를 믿고 따라야 한다! - 루소>
국민들은 자신들의 모든 권리를 국가에 반납하는 대신 <국가의 주권>, 즉 공동체의 최고 권력인
<국가권력>을 모든 국민들이 똑같은 양으로 분배받습니다(1인 1표) ... 따라서 국가의 주권에는
곧 국민 전체의 의지가 반영되어야 하며, 그 의지는 공공의 이익을 향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루소가 얘기한 <일반의지>는 한마디로 <공동의 의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만약 국가의
부족한 전력에너지를 위해 원자력 발전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면 우리는 이런 견해가
과연 <공동의 의지> 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 일반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방법은 아마도
투표가 될 것입니다.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투표에 참여해 국민의 과반 이상이 찬성했다면,
이제 공동체(국가)는 국가의 에너지 전략을 원자력발전에 맞춰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국민 안전과
환경적 측면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결과는 그 사회의 다수 의지는 될 수 있어도 루소가 말한 공동의
의지, 즉 <일반의지(공공 이익)>라고는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시 말해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동의를 했더라도 그 것이 공동체 전체의 이익(공공의 복지)에
부합되지 않는다면 <일반의지>라고 말할 수 없으며, 그 의지는 그냥 사회의 다수 의지일 뿐인
것입니다. ... 결국 <일반의지>는 국민 개개인들의 의지가 공공의 이익을 향하는 경우에만 해당되는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위한 의지인 것입니다.
루소는 국가와 개인이 맺은 (사회)계약이 합법적이며 모든 이들에게 (공평하게)공통적용 가능한,
즉 <공공의 이익>을 추구하므로 확고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계약만으로는 모든 것이 설명되지
않습니다. 사회계약은 <근대 국가의 성립>에 대해서는 설명해 주지만, 국가가 정치적, 행정적으로
기능하는 모습을 설명하는 데는 부족함이 많습니다.
개인은 자유인으로 태어났지만, <사회계약>과 함께 공동체 안에서 <사회인> 혹은 <시민> 이란
인격체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자유인으로서의 자유(?)를 박탈당하게 되는데
다시 말해, 개인은 (계약)이후부터 공동체 안에서 마음대로 행동할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미워하는 타인이 있다고 해서 마음대로 살인이나 폭력을 행사할 수 없으며, 탐나는 물건이 있다고
해도 마음대로 가져갈 수 없습니다. ... 반면 이러한 (본능적)자유를 잃는 대신에 개인들은 더 많은
이익을 공동체 안에서 얻을 수 있게 됩니다.
경찰과 소방관은 개인의 안전과 위급상황을 위해 봉사하며, 군대는 공동체(국가) 안보를 책임집니다.
정부는 개인의 집과 자동차(재산)를 타인이 빼앗지 못하도록 지켜줍니다.(법적 보장) ... 또한 개인은
공부하고 싶을 때는 언제든지 공부할 수 있으며, 타인과의 다툼이 있을 때는 공동체가 나서서 분쟁
해결을 위해 노력합니다. ... 그런데 이와 같은 공동체(정부)의 현실적 기능이 잘 작동될 수 있으려면
단순히 계약(@공동체에 모든 것을 맡기겠다.)만 가지고는 불가능 합니다. ... 그래서 루소는 정부를
수립하는 행위는 계약이 아니라 바로 <법(法)>이라 주장하며 행정권한을 위임받은 수탁자는
국민의 지배자가 아니라 <관리(官吏)>라고 말했습니다. 더불어 관리는 국민의 의지에 따라 언제든지
임명과 해임이 가능해야 하며, 국민에게 복종함으로써 그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참고로 이번 탄핵심판 선고문과 헌법 제7조 에서도 우리는 루소의 주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헌법 제7조 (공무원의 지위. 책임. 신분, 정치적 중립성)
제1항 - 공무원은 국민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
[◆ 헌법은 공무원을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로 규정하여 공무원의 공익실현의무를
천명하고 있고, 이 의무는 국가공무원법과 공직자윤리법 등을 통해 구체화되고 있습니다.
피청구인의 행위는 최서원의 이익을 위해 대통령의 지위와 권한을 남용한 것으로서
공정한 직무수행이라고 할 수 없으며, 헌법, 국가공무원법, 공직자윤리법 등을
위배한 것입니다. - (탄핵심판 선고 전문 中)]
[◆ 사회 안에서 인간은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 왜냐하면 오로지 욕망의 충동을
따르는 것은 노예적 굴종이지만, 스스로 만든 법을 따르는 것은 자유이기 때문이다. - (사회계약론)]
결론적으로 루소는, 정치가 누군가를 지배한다는 근대적 성격의 개념에서 벗어나 <행정>이라는
현대적 의미 또한 우리에게 심어주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행정기능이 원활히 작동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법(法)>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며, 앞서 언급됐던 <일반의지(공공의 이익)>가 진정으로
실현되기 위해서는 구성원 모두는 법(法)에 구속되어야(법을 따른다) 한다고 주장합니다. ... 따라서
<법(法)>에 충실하면 할수록 그것이 구성원의 진정한 자유를 위한 것이며 일반의지(General will)를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법은 일반의지가 구체화 된 것.]
그렇다면 구성원 전체가 자신들의 모든 권리를 일반의지에 맡겨야 한다면, 그 <일반의지>라는
존재는 구성원들이 미리 올 줄 알고 공동체가 성립되기 이전부터 소파에 앉아 편안하게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인가? ~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공동체 이전의 <일반의지>는 과연 누가 만든 것인가?
지금까지 살펴보셨듯이 <일반의지>의 존립근거는 공동체 구성원에 의해서만 설명이 가능합니다.
따라서 <일반의지>가 명확히 설명되려면 절대로 구성원보다 앞서면 안 됩니다. ~ 그래서 루소는
일반의지의 참된 실현을 위해서는 시민들 스스로가 적극적으로 법의 제정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그 때에 비로소 법(法)의 정당성이 확보된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이상적(Ideal) 법의 지배> 아래서 공동체는 <일반의지(공공 이익)>에 한걸음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주의할 점은 시민들 개개인의 이익의 총합은 공공의 이익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시민 한사람의 (개별적)이익을 <1>이라 했을 때, 100명의 시민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라면 시민의 이익 총합은 <100>이 되겠지만, 공공의 이익은 100이 아닌 <AAA>인 것입니다.
한마디로 공공의 이익, 즉 일반의지는 <층위가 다른> 지향점인 것입니다.
[◆ (시민의 이익 총합) ⧣ (공공의 이익)]
그동안 우리는 <법치주의(法治主義)>라는 익숙하고 또 낯설지 않은 제도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그 <법치(法治)>, 즉 <법의 지배>가 지금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현실과 만났을 때는
항상 무언가 결핍된 존재로서, 그리고 빈번하게 평범한 국민들과는 괴리된 곳에서 이상적으로만
빛나던, 현실 밖의 존재였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 그래서 저는 여기서 잠시 이야기를
멈추고 머릿속으로 하나의 상상을 해보려고 합니다.
지금 눈앞에서 총알 하나가 날아가고 있습니다. ... 그리고 날아가는 총알을 기준으로 앞뒤 상황을
바라보니, 총알 뒤에서 방아쇠를 당기고 있는 사람은 올림픽 금메달 리스트였으며, 총알의 앞에는
과녁이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 상황은 게임(사격)을 의미합니다.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상황을 바라보니 총알 뒤에서 방아쇠를 당기는 사람은 사냥꾼이었으며,
총알 앞에는 야생 멧돼지가 거칠게 뛰어다니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 상황은
(멧돼지)사냥이 됩니다. 그리고 이번엔 날아가는 총알을 기준으로 앞뒤에 각각 군인들이 서로를
향해 총구를 겨누는 장면이 포착됩니다. ... 예상하시겠지만 이 상황은 (절대)일어나서는 안 되는
전쟁 상황인 것입니다.
<총알, 올림픽 메달리스트, 과녁, 사냥꾼, 멧돼지, 군인> ... 이렇게 각각의 사실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어떻게 결합되고 배열(계열화) 되는가에 따라서 그 의미는 다양하게 생성되기도
하며, 또 증폭될 수도 있습니다. ... 더불어 이러한 사실들의 계열화는 우리에게 <사실>과 <사고>와
<사건>을 구별할 수 있게도 만듭니다.
대기업 사원 김철수가 빨간 마티즈(소형차)를 타고가다 마포대교 아래로 추락해 사망했습니다.
이것은 보통의 (교통)사고이며, 또 사실입니다. ... 그런데 김철수는 바로 얼마 전, 유력 정치인과
재벌이 연관된 불법 정치자금 비리를 폭로했던 <내부고발자라는 사실>과 본인 소유의 중형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티즈를 렌트했다는 사실> ... 그리고 하필 우연히도 사고 당일
<블랙박스가 고장나있었다는 사실>이 결합하여 계열화 되면, 이것은 하나의 <사건>이 됩니다.
다시 김철수로 돌아가 봅니다. ~ 이번에도 김철수는 마티즈를 타고가다 마포대교 아래로
추락사 했습니다. ... 그동안 회사의 가장 핵심 부서였던 전략기획실에서 근무하며 (비)자금 관리를
담당했던 김철수는 시간이 흐를수록 죄책감과 스트레스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다 병원 종합검진에서
악성 종양이 발견되었고 본인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게 된 김철수는 고민 끝에 비자금
비리를 폭로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비리 폭로전 마지막 휴가를 위해 혼자서 조용히 여행을
떠나려다 결국은 삶의 의미를 잃고 무기력하게 자살을 선택한 것입니다.
하나의 예를 더 들어봅니다. ... 앞의 두 시례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김철수는 마티즈를 타고가다
마포대교 아래로 떨어져 사망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의 김철수는 결혼을 약속한 자신의 애인 수지가
명동의 한 호텔 앞에서 낯선 남자와 진한 키스를 나누면서 함께 차를 타고 가는 광경을 목격한
것입니다. 자신의 애인인 수지가 분명하다면 수지는 지금쯤 부모님과 함께 제주도에서 유채꽃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불법 정치자금 폭로 문제로 머릿속이 너무나
복잡했는데 ... ... 분노와 절망 등 복잡한 심경에 오늘 만나기로 했던 언론사 기자들과의 약속을
모두 취소하고 흥분상태에서 수지와 그 남자가 함께 탄 차를 무리하게 뒤쫓다 과속(난폭)운전이
원인이 되어 사고가 난 것이었습니다.
위의 세 가지 (교통)사고는 모두 <마티즈를 타고 가던 김철수가 마포대교 아래로 추락사>한
사고입니다. 하지만 ... <내부고발, 악성종양(시한부 삶), 바람난 애인> 이라는 사실들이 김철수와
이웃 항으로 연결되면서 (교통.추락)사고는 <정치적 사건, 자살(생명의 가치), 사랑의 배신> 이라는
전혀 다른 의미(결과)로 계열화(사건화) 되어 생성되고 있습니다.
철학자들도 어려워한다는 프랑스가 낳은 세계적인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는
이렇게 각각의 <사실>들이 이웃 항과 어떻게 연결되고 배열되는가에 따라 드러나는
다양한 계열화의 양상(의미)들을 보여주며 (내부고발자), (시한부 인생), (배신당한 남자) ... 라는
그 <차이의 반복(마포대교 추락)>이 생성하는 <사건의 변이>를 우리에게 안내하고 있습니다.
[◆ 마티즈가 마포대교 아래로 떨어진 교통사고라는 점이 반복되고 있지만, 각각의 사고에는
내부고발과 시한부 인생, 사랑의 배신이라는 <차이(사실)>들이 질료처럼 사용되어 계열화 되면서
그 결과는 각각 다른 의미로 <사건화> 되고 있습니다.]
이제 저는 들뢰즈(Gilles Deleuze)의 시선을 우리가 간절히 염원하고 있는 <일반의지> 혹은
<이상적(Ideal) 법의지배>를 위해 투박하게 걸어가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로 가져오려 합니다.
한마디로 <법의 지배>가 대한민국의 현실과 만났을 때 드러나는 다양한 계열화의 양상들을
살펴봄으로써 그 현실적 법치주의가 그동안 어떤 형태로 우리에게 사건화(생성) 되었는지 살펴볼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계열화의 양상들로 인하여 (진정한)일반의지로의 열망은 점점 더 요원해
지고, 심지어 일반의지의 층위 분립이 더욱 더 심화되는 장면들도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생산(生産)>은 무언가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산에는 반드시 생산(만듦)의 <주체>가
존재합니다. 하지만 <생성(生成)>은 스스로 “생겨나는 것”입니다. ... 다시 말해, 주체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내부에서 자연적으로 <생겨나는 것>이
바로 생성인 것입니다.
루소의 일반의지는 <생산>의 의미가 강합니다. ~ 먼저 핵심 주체인 공동체 구성원의 적극적인
참여의지(사회계약)가 있어야 하며, 공공의 이익(일반의지)은 끊임없이 (개별)의지들을 끌어당기는
중력으로 작용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현실적 삶(체제) 안에서 <일반의지>의 실현가능성은
얼마나 되는 걸까? ~ 일반의지는 과연 실현가능한 명제일까? ~ 시민들의 의지와 열망이 강하게
표출되는 것만으로 과연 루소가 꿈꾸던 (순수)일반의지의 생산은 가능한 것인가? ~ 하는 물음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그래서 이 글의 후반부는 그 일반의지의 <현실성>을
확인하는 작업으로 가득 채우게 될 것입니다.
<층위>가 다르다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는 것과 일맥상통 합니다.
그래서 국민들이 아무리 <일반의지>를 지향한다고 해도 그것은 대개 차원 높은 곳에서
거룩한 <울림>으로만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현실에서는 보려고 해도 잘 보이질 않습니다.
한마디로 존재하되 잡히지 않는, 잡을 수 없는 ... 그래서 마치 북극성처럼 <다른 층위>에서만
신성하게 빛을 내고 있는 일반의지의 속성상 어쩌면 <생산>은 영원히 불가능 할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이유로 저는 안타깝지만 루소의 일반의지를 영원히 실현될 수 없는 <상상속의 관념체>로
정의할까 합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저는 지금부터는 들뢰즈(Gilles Deleuze)의 시선을 빌려,
상상속의 관념체가 아닌 현실적인 측면에서 바라본 일반의지를 생산이 아닌 <생성(生成)>의
관점에서만 바라보고자 합니다. ~ 한마디로 민주적 (정치)체제를 형성한 국가들(우리나라 포함)에서
보여지는 <일반의지로의 열망>이 사실은 그들 구성원들의 상상 속에서만 빛나던 허울뿐인 관념체
였으며,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의 일반의지는 오직 구성원들 각자의 이해관계 <차이>가 계열화되어
<반복>되면서 수많은 양상들, 혹은 다양한 <미시적 일반의지>들의 생성뿐이었음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루소가 꿈꾸던 법(일반의지)이 지배하는 사회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그것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상당히 훌륭한(?) 체제라며 칭찬해 마지않는 (현실적)민주주의라는 체제 안에서는 좀처럼 실현되기
어려워 보입니다. ... 현재 우리 공동체는 시민들이 뽑은 대표들이 의회를 구성하여 국가(정치)운영을
책임지는 <대의제(代議制)>라는 제도를 채택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 그런데 이 제도는 루소가
말했던 모든 시민들이 참여하는 소위 <직접민주제>와는 다른 형태로서, 현실적인 측면에서는 보면
일종의 <귀족정> 혹은 <엘리트 정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사회가 아무리 민주적
절차에 의해 통치 권력을 선출한다고 해도 이들이(입법부, 사법부, 행정부) 법의 제정과 운영 및
집행을 사실상 독과점 하고 있기 때문에 국민과(피치자) 통치 권력과의 위계적 간극은 필연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대의 정치가 결함이 있다거나 잘못된 제도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대의제는 민주적 절차에 따라 선출권력을 생산한 것이므로, 이 제도 안에는 분명
모든 시민들의 암묵적 동의가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선출된 권력은 자신을
지지해준 일정 규모의 시민 군집을 대표하므로 이것은 루소의 일반의지, 즉 공공의 이익이
아닌, 그보다 하위 범주에 속하는 <개별집단>의 이익을 대변하는 기능으로만 작동한다는 점이
아쉬운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각각의 이해관계로 쪼개진 분산된 시민군집(혹은 개인포함 소수)들은
<하나의 법> 아래서 각자 단독성을 갖고 그 법(하나의 법)과 이웃항으로 연결돼 계열화 되면서
<미시적 일반의지> 라는 기형적 형태의 일반의지로 새롭게 생성(生成)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커다란 생수통의 물을 작은 종이컵에 따르면 물이 담긴 용적은 축소되나, 물 고유의 성질은
여전히 변함없이 우리에게 <물> 그 자체입니다. ... 하지만 <미시적 일반의지>는 생수통의 물이
종이컵으로 이동했을 때처럼 용적의 축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의지의 원초적 성질 자체가
아예 변해버린다는 뜻으로 저는 여기서 <미시적>이라는 단어를 축소가 아닌 <기형>의 의미로
대체했습니다.]
이렇게 공동체 내부에서 시민들 각자가 속한 개별 집단들의 외형이 갖춰지기 시작하면, 이후 사회는
그 (개별)집단들 간의 이해관계 충돌과 대립이 빈번해지면서 계층 구분이 점점 더 선명해 집니다.
정부와 시민, 대기업과 중소기업, 건물주와 세입자, 고용주와 피고용인, 부자와 빈자, 다수와 소수 ~
<◆ 법은 만인을 위해 하나의 입으로 말한다 ! >
법이 지배하는 세상!(법의 지배) ~ 이것이 왜 중요한가?
앞서 루소의 얘기(사회계약론)로 다시 돌아가 봅니다. (사회형성 이전의)인간들은 법이나 도덕 같은
그 어떤 제약도 없기 때문에(자연상태) 각 개인들은 살기위해서 서로를 경계하며 불안과 대립이
끊이질 않는 상태를 지속합니다. ... 따라서 모든 구성원들을 통제(통치)할 수 있는 절대권력(국가)을
구성원들간의 계약(합의)으로 창출한 다음, 그 절대권력이 사회를 통치하게 만들어야 하며, 대신
그 절대권력은 오직 국민을 위해서만 복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하려면 강제성이 부여된
(절대적)수단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법(法)>입니다. ~ 정리해보면, 국가는 전체 국민들의
계약(합의)으로 만들어졌고, 그렇게 탄생한 통치 권력은 오직 국민들에게 복종하기 위해서만
작동되어야 합니다. 다만 통치 권력은 시민의 개별 이익이 아닌, 공공이익을 위한 <일반의지>를
지향해야 하는데, 이때는 법이라는 (절대적)강제성이 필요한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과정은 국가의
최고 의사결정 권리인 소위 <주권(主權)>이 바로 국민들에게 있다는 루소의 <인민주권설>에
정확히 부합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민 한 사람의 이익이 아닌, 그리고 개별 집단의 특수이익이 아닌 ~ 오직 공동체
전체 이익을 위한 <법의 지배(일반의지)>가 무난히 작동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정치적 공간을
요구해야 하는가? ~ 또한 그 요구에 부합하는 딱 맞는 공간(체제)이 존재한다면, 그 공간은 과연
우리가 그토록 염원하는 일반의지의 진정한 실천적 공간이 될 수 있을 것인가? ... 이에 대한
해답을 얻으려면 우선적으로 전제되어야 할 요건이 있습니다. 바로 개인 및 집단(기업), 정부 등
사회구성원 전체가 모두 <법 앞에서 평등>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선거권을 가진 집단의 크기가 수백.수천만, 심지어 억 단위 규모로 늘어난
오늘날의 현대 국가에서 법이 만인을 위해 하나의 입으로 말할 수 있으려면, 그리고 그 명제가
안전하게 담보될 수 있으려면 그 사회의 법은 어떤 간섭에도 흔들리지 않는 절대적 원리가
존재해야만 합니다. 따라서 루소의 주장처럼 모든 사회 구성원들은 법의 제정에 적극적으로,
더 나아가 필사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다수의 참여의지는 지금까지는
<민주주의>라는 공간에서 가장 잘 실천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민주주의가 많은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동안 <민주주의>라는
공간을 대체할 만한 더 뛰어난 정치공간의 출현이 부재했기 때문이지, 민주주의가 법의 지배를
“완벽히 실천할 수 있다.” ~ 라고 말하기에는 아직은 자신할 수 없어 보입니다. ... 다시 말해
<법은 만인을 위해 하나의 입으로 말한다.>는 법의 지배가 진정으로 실현되는 세상이 오려면
조금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 왜냐하면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는
서로의 빈곤을 채워주는 보완적 관계로서 양립할 뿐, 섞이지 않으며 다만 각자 독자성을 갖고
서로가 서로에게 이웃항으로 연결돼 계열화되어 지속적으로 <미시적 일반의지>가 생성되는 관계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민주주의가 잘 작동될 때는 <법의 지배>에 근접하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 이를테면
민주적 통치구조보다 독재적(권위적, 억압적) 통치구조가 앞설 경우에는 <법을 앞세운 지배>로
퇴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우리 근대 사법역사의 시작을 간략히 살펴보고, 이어서
과거 한국사회가 <법을 앞세운 지배>로 계열화 되었던 순간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1909년 7월에 한국의 사법권이 일본으로 넘어가고부터 1945년 해방이 되기까지의 기간 동안
우리의 사법제도는 바로 일본의 사법제도가 대신하게 됩니다. 그즈음 우리의 사법제도 현실이
어땠는지 개화파 윤치호(尹致昊)의 일기를 잠깐 들여다보겠습니다.
[◆ 조선은 이제 사실상 무법(無法. lawless) 국가이다. 자신의 고충을 구제받을
길이 전혀 없다. (자기 딴에는 자신이 매우 현명하다고 생각하는)훌륭한 양반 서광범은
공동체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새로운 법을 시행하지도 않고 도적과 불량배에
대해 간이 재판이 가능했던 구법을 폐지해버렸다. 정당한 사유가 있어도 누구도 법정에
가려하지 않는다. 이유는 단순하다. 달팽이처럼 굼뜬 관원들로 하여금 허울뿐인 법을
집행하게 하려고 시간과 돈과 인내심을 낭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 느림보들은
누군가의 주머니에서 돈을 쥐어짜낼 수 있을 때면 뱀처럼 움직인다. 아무도 타인에게
돈을 빌려주거나 타인과 계약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유는 단순하다. 상대방이 지키지 못하는
경우에도 약속을 이행하게 만들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윤치호일기 4권. 국사편찬위원회)
<법원과 검찰의 탄생. - 224 페이지/ 문준영/ 역사비평사> ]
윤치호가 지적한 대로 당시의 한국의 법적 기능은 아예 작동되지 않는 수준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상황이 이정도니 개화파가 추진한 제도의 근대화[@갑오개혁(甲午改革)] 운동에는
사법개혁의 근대화가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1895년) ~ 따라서 당시 재판제도, 형벌제도,
법관양성 등의 사법 근대화 시도는 우리에게 상당히 의미 있는 (사법제도)근대화 역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개화파 정권의 붕괴 이후에도 이때에 만들어진 사법구조 형식의 틀이
(@ 엄밀히 말하면 일본의 틀) 살아남아 계속해서 이어졌습니다.[◆ 1895년 개화파의 사법개혁은
(개화파의)개혁의지와 일본의 후원이 맞물려 시도되면서 우리 사법제도사에 많은 논쟁을 낳았는데,
한마디로 자율인가, 타율인가, 그리고 자주인가, 식민화인가 ~ 하는 논점들을 남겨놓은 것입니다.
또한 자본이 권력화 된 2017년 대한민국 사회에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사실상 우리 사법의
근저에 깔린 강력한 작동원리라는 부분에서는 대다수의 국민들이 통감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많은 이들이 사법개혁을 외치고 있는데, 이렇게 사법과 자본권력이 서로 이웃항으로
연결돼 계열화 되면 <사법정의의 열망>이라는 새로운 사건화가 생성됩니다. ... 물론 여기서
방금 살펴본 자율과 타율, 자주와 식민의 논쟁 또한 <개화파와 일본이라는 사실>들이 이웃항으로
연결돼 생성된 계열화의 한 양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화파가 무너지고 1907년 7월 한국의 사법권이 완전히 일본으로 넘어간 후,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우리의 사법제도는 달라져 갔습니다. 행정과 재판의 분리, 사법기관 설치,
실체법과 절차법 정비, 판사.검사.변호사 및 기타 여러 법률 직종이 생겨나고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제도와 인적, 물적 조건의 측면에서 비로소 본격적인 근대적 사법제도가 작동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물론 내용과 형식면에서는 여전히 일본의 여운이 남아있었습니다.
해방이 되자 사법의 진공상태를 맞이한 한국은 이제 식민지적 사법체계를 해체하고 새로운
한국적 사법체계를 재구축해야하는 목표가 설정되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사법제도를 바꾸는
차원에서 끝나지 않는 새로운 <헌정체제>를 세워야하는 중대한 사명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해방이후) 우리 사법부의 미래를 책임져야할 법률가들 대부분이 일제 식민지 사법체계
아래서 이론과 실전을 경험한 사람들이었는데, 그동안 식민지 치하에서 사법 사다리의 하단에만
머물러 있던 그들에게 해방은 사다리의 상단부로 올라설 절호의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더불어
그때의 법률가들이 쌓았던 법지식과 사법체계 전반의 사유들은 상당부분 일본의 한계 내에서
키워낸 것들이었습니다. 결국 새롭게 구성된 우리 사법조직의 이러한 한계는 해방이후
한국 사법체계가 탈식민화 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는 요인이 됩니다. ~ 다만 이 시기에
미약하나마 한국적 사법개혁의 논의가 처음 시작되었다는 것에 나름의 의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우리의 헌법은 1948년 처음 만들어지고 이후에 이를 기초로
미국과 독일 바이마르 헌법의 원리들을 충실히 따르는 법률들이 만들어졌는데 ... 놀랍게도 이때에
우리는 이미 민주주의적 가치관을 헌법에 담아 천명했던 국가였습니다.(헌법상으로) ~ 그리고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전까지 (헌법 조문상)대한민국은 국민의 기본인권은 물론, 언론과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국가였고, 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등 자유주의 핵심 원리들이 실천되는 매우
수준 높은 법치주의 국가였습니다.(헌법상으로) 이 뿐만이 아니라 공정한 부의 분배와 복지를 위해
일정부분 사유재산권을 제한하는 사민주의(사회민주주의) 원리들까지도 일부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대한민국은 당시 헌법조문으로만 본다면 매우 훌륭하고 모범적인 법치국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사회가 이렇게 훌륭한(?) 법률적 기반을 가지고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법의 지배>로 나아가지 못하고 <법을 앞세운 지배>로 퇴행했던 순간들이 많았던 이유는
보시다시피 우리의 법과 제도의 상당부분이 일제 강점기 일본의 영향과 함께 민주화 이전인
(독재적)권위주의 시기에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민주화 이전, 즉 권위주의시기에
만들어진 법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법이념을 왜곡하거나 특수계층을 위해 편향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 다만 체제(통치구조)가 달랐을 뿐입니다. 또한 법과 법적용에 있어서의 현실적인
간극이 매우 컸다는 점도 우리 사회가 <법의 지배>로 나아가지 못하고 <법을 앞세운 지배>,
이를테면 국가의 안보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만들어진 <국가보안법(옛 반공법)>은 쿠데타로 세워진
정권의 정당성을 위해, 또는 반대세력을 억압하기 위해, 국가와 국민의 안정이 아닌 오로지 독재적
권위주의 정권의 안정에만 기여함으로써 법치(?)국가 대한민국에 수많은 법치의 오류를 낳았습니다.
[◆ 대통령 노무현은 2004년 9월 5일 밤 MBC TV <시사매거진 2580>
500회 기념으로 가진 “대통령에게 듣는다” 프로그램에 출연해 “국가를 보위하기 위해서 필요한
조항이 있으면 형법 몇 조항 고쳐서라도 형법으로 하고 국가보안법을 없애야 대한민국이 드디어
야만의 국가에서 문명국가로 간다고 말할 수 있는 것“ 이라며 국가보안법 폐지 입장을 밝혔다.
그는 국가보안법은 “칼집에 넣어 박물관으로 보내는 것이 좋을 것” 이라고 말했다. 일부 언론은
“야만의 국가” 등 현재의 시각으로 과거를 철저히 부인하는 것은 대통령으로서 바람직한 자세가
아니다는 비판을 제기했다. - h ttp://100.daum.net/encyclopedia/view/54XX72900012 ]
훌륭한 법의 존재가 막상 그 법이 적용되는 현실과 맞닥뜨리게 되면 둘(법&법적용) 사이의
간극의 크기는 오롯이 국민의 부담으로 돌아옵니다. ... 결국 법과 법적용 사이의 간극이 크기는
국민에게 가하는 가혹한 매질로 돌변함으로써 국민들의 육체와 정신을 피폐하게 만든다고 할 수
있습니다.(@특히 권위주의 정권아래서)
그럼 지금부터는 <한국>이라는 국가가 자국민들에게 가했던 가혹한 매질의 (역사적)사례들과
그에 대한 법적 처벌 문제, 즉 법과 법적용에 있어서의 간극의 문제를 살펴보겠습니다. 더불어
다른 국가(@특히 독일)의 사례도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억압적인 독재체제가 무너지고 나면 국가가 국민에게 가했던 폭력과 그 가담자들에 대한
책임 및 처벌 문제가 수면위로 떠오르게 됩니다. 한마디로 <과거청산>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하는 것인데, ~ 그래서 한국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이라 할 수 있는
<5.18 광주민중항쟁>이 있었던 1980년 그때의 긴박했던 순간으로 잠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 ◆ 1979년 =========== >>>
@ 10월 26일 - 궁정동 안가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 살해
@ 10월 27일 - 전국 비상계엄 선포(제주도 제외),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
박정희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유신독재 하에서 분산된 상태로 싸웠던 재야인사와 학생들은
이때까지 그리 탄탄한 결집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음
@ 11월 22일 - 서울대학교 학생들 유신 완전철폐와 조기 개헌을 주장하며 시위
@ 11월 24일 - 400여 명의 민주인사들은 서울 YMCA 강당에 모여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대통령 선출 반대(즉! 체육관선거 반대), 거국중립내각, 조기총선 요구
@ 12월 12일 - 전두환, 노태우, 김복동 등 주로 영남 출신의 육사 11기생 중심의 사조직
“하나회” 출신들(신군부)에 의한 군사 반란이 일어남
@ 12월 21일 - 최규하 “대통령 당선(체육관선거)”, 허수아비 대통령(실권은 신군부가 장악)
이 당시 YMCA 회합에 참가한 민주인사들 중 상당수가 신군부 보안사로 끌려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문과 수모를 당함
===== ◆ 1980년 =========== >>>
@ 2월 29일 - 윤보선, 김대중 등 687명 복권(서울의 봄이 오는 듯함.)
@ 4월 ----- 전두환(@ 중앙정보부장 서리 임명.)
“서울의 봄”은 불안했다. 김영삼과 김대중은 단합하지 못했고, 학생들은 미약했던
학생운동 역량 강화에 주력함.
@ 4월 21일 - 사북사태 발생(어용노조 집행부에 불만이 많았던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
동원탄좌(주) 사북광업소 광부들의 총파업사건)
@ 4월 22일 - 광부 500명이 시위에 합세, 23일에는 3,000 명으로 늘어남.
노동문제를 폭력과 억압 일변도로만 대처하려는 정부에 대해 노동자들의 분노가 폭발!
@ 4월 24일 - 서울소재 14개 대학교수 361명이 학원사태에 대한 성명서 발표(학원민주화 선언!)
@ 5월 10일 - 23개 대학 총학생회장 비상계엄 해제 요구(비폭력 교내시위 원칙 합의)
@ 5월 13일 - 서울지역 총학생회장단 가두투쟁결정, 연세대 등 6개 대학 학생들 가두시위!
@ 5월 14일 - 전국에서 6만여 명이 시위를 벌임.
@ 5월 15일 – 서울역 앞, 학생 약10만 명과 시민이 모여 계엄해제와 조기개헌요구(시위 최고조!)
@ 5월 17일 – 저녁 9시경, 안건 내용이 뭔지 모르는 상황에서 비상 국무회의 소집연락을 받은
국무위원들은 중앙청(정부청사)으로 향함. 이날 중앙청 주위로 평소보다 삼엄한 경비가 펼쳐졌고
국무회의실 복도 양옆으로 착검한 소총을 든 무장군인들이 도열하여 국무위원들의 신분을 일일이
확인한다. 신현확 총리는 9시 42분에 제42회 임시국무회의 개회를 선언하고 국방부에서 제출한
의안 360호 <비상계엄확대 선포안>을 의안으로 상정하고 국무위원들에게 의결해줄 것을 요청한다.
찬반토론 없이 의안은 가결되고 9시 50분, 즉! 정확히 8분 만에 비상계엄확대 선포안이 의결된다.
언론, 출판, 방송 등의 사전검열 및 각 대학 휴교조치 ... 사실 이날 오전 11시부터 이미 전군 주요
지휘관회의가 소집돼 계엄을 준비한 정황이 들어남(계엄확대 강화논의, 국보위설치, 국회해산 논의)
@ 5월 18일 – 봄빛과 봄바람이 평화롭게 흩날리던 날 아침. 휴교령에 반발한 전남대생들이 교내로
들어가려다 총을 든 군인들의 제지를 받자 실랑이를 벌인다. 시위가 확산되자 신군부는 공수부대의
핵심인 7공수여단의 33대대와 35대대를 광주에 투입, 그 중 33대대의 주력이 전남대를 장악한다.
학교에서 계엄군에게 쫓겨난 학생들은 거리로 나와 연좌시위를 벌임. 경찰이 최루탄과 경찰봉으로
시위대 해산을 시도하자 투석전으로 맞선다. 진압에 실패한 신군부는 오후 3시경 공수부대를 투입.
곤봉과 착검한 M16으로 무장한 공수대원들은 남녀학생을 안 가리고 붙잡아 무차별적으로 구타한다.
시민들이 경악하며 지켜보는데도 개의치 않고, 군화발로 짓밟으며 저항이 격렬하면 M16에 꽂은
대검으로 등과 허벅지를 사정없이 찔렀다. ~ 피 흘리던 학생들은 굴비처럼 엮어져 군트럭에 실렸고
귀가하는 학생과 청년들이 통금 9시를 단 1분만 넘겨도 닥치는 대로 난타했고, 말리는 시민들까지
개머리판으로 잔인하게 짓이겼다. ... 당시 어느 해외언론은 광주민중항쟁을 <20세기 마지막 비극>
이라고 표현했다.
@ 5월 19일 - 금남로 일대는 분노한 시민과 학생 5,000여명이 각목 등으로 무장하고 공수부대원과
싸운다! / 군중이 약 2만여 명으로 늘어남! / 장갑차 총구에서 총알이 날아와 고교생이 쓰러졌다!
@ 5월 20일 - 공수부대원이 3,400명으로 증가함, 이날 약 200여대의 택시 기사가 헤드라이트를
켜고 시위를 벌이면서 시위대가 고무된다. / (신현확 내각 총사퇴!)
@ 5월 21일 - 광주 시내는 시민들로 “사람의 물결”을 이룸. / 총성과 함께 5~6명이 쓰러졌다! /
공수부대의 자국민에 대한 “집단사격”이 개시 되면서 금남로 일대는 피바다가 되었다. /
공포와 분노가 교차하면서 시민들은 나주와 목포 등 각지의 무기고를 습격해 무장한다. /
공수부대 외곽으로 철퇴 / 시민들은 도청을 접수.
@ 5월 22일 - (무기 반납시작)/ 관료, 신부, 목사 등으로 시민수습대책위원회 구성(“사태를 수습할
테니 군인을 투입하지 말고 과잉진압을 인정 하시오!")/ 그러나 계엄사령부는 학생시위를 배후조종
했다며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 중간 수사를 발표하여 광주시민이 더욱 분노하게 된다.
[위컴 한미연합군사령관은 20사단(사단장 박준병)의 병력 이동을 승인함.]
@ 5월 23일 - (무기반납)시위대가 타고 있던 소형버스가 주남마을 앞길에서 공수부대의 사격을
받아 탑승자 18명중 17명이 사망함 ~ !
@ 5월 25일 - 시민수습대책위는 정부의 잘못 시인 등의 4개 항 제시, 최규하는 상무대에서
담화문만 발표하고 서울로 돌아감.
@ 5월 27일
(오전 1시) - “상무충정작전 개시” ~ 3공수, 7공수, 11공수여단, 20사단, 31향토사단 등이 동원됨.
(새벽 4시) - 도청 앞에서 “항복 권유 방송!”, 5시 까지 도청 사수대 등과 교전함!
(새벽 5시) - 군은 도청을 장악함!
[@ 참고1. -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한국 현대사 / 서중석(역사문제연구소 기획)/ 웅진하우스]
[@ 참고2. - (해방후 정치사 100장면 / 김삼웅 / 가람기획) ]
============
[◆ “국가범죄”는 법전(法典)에는 없는 말이다. 국가권력에 의한 중대한 인권유린 행위를
설명하는 용어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국가범죄를 설명하기 전에 국가의 존립 이유를
묻는 것이 순서에 맞겠다. 사회계약론에 따르면 국가는 개인들의 행복을 확보하기 위해
만든 방편일 뿐이다. 그러나 역사는 가진 자들의 편에 서서 주변부를 누르는 악몽이
국가라고 가르쳐준다. 국가 이념은 국가가 만인을 평등하게 보호하는 장치라고 미화하지만,
현실은 국가가 사람을 잡아먹는 장치라고 폭로한다. ~ (중략) ~ 국가범죄와 나란히 쓰이는
개념들이 있다. 정부범죄, 인권범죄, 국가에 의해 조종된 범죄, 국제법상의 범죄,
중대한 인권침해 행위 등이 그것이다. - (국가범죄, 17~18페이지/ 이재승/ 도서출판 앨피) ]
5.18 광주민중항쟁은 국가권력이 국민에게 얼마만큼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
그야말로 우리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 국가권력(신군부)의
잔악함에 맹렬히 저항했던 광주의 영혼의 파동은 순식간에 증폭된 신호로 변환되어 대한민국
역사에 <민주주의>를 촉발시킨 기폭제로 작용하였습니다. 또한 광주의 (저항)정신은 한국사회가
1980년대를 통째로 민주주의에 몰입할 수 있도록 만들었던 숭고한 <시대정신>의 역할을
담당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광주의 정신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드디어 한국에도 1987년 민주체제가 들어섰고, 이후
5.18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본격적인 과거청산작업도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구 권력(신군부)의
처벌문제에 대해서는 그들(구 권력)의 정치적, 도덕적, 법적 행위가 어떠한 기준에 의해 평가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처벌할 것인지에 대해 과거청산이 생각보다 쉬운 문제가 아니라는 인식을
하게 됩니다. ... 하지만 다행히도 과거청산과 관련해서는 국제사회가 <제1, 2차 세계대전> 이라는
과거의 역사적 경험을 통해 마련한 <중대한 인권침해 행위>라는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우리도
기초적인 (청산)방향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일부에서는 여전히 과거청산 법정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만들어진 연합국의 군사법정과 독재정권(독재자)을 처단하는
법정 등에서 어김없이 튀어나오는 항변이 그것인데 ... 바로 <승리자 법정(victor's Justice)>입니다.
프랑스 혁명의 빌미를 제공한 루이 16세, 청교도혁명으로 처형된 영국 왕 찰스 1세,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과 칠레의 피노체트, 유고의 전범 밀로셰비치 등은 모두가 하나같이 재판의
불공정성을 주장한 인물들입니다. 한마디로 재판은 승리자들의 자의적인 판단으로 성립된 것이며,
처벌은 억울(?)하지만 실각한 본인들의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공정한 법의 판단이 아니다!)
그래서 제2차 세계대전에서 만약 독일이 승리했다면 영국의 처칠이나 미국의 트루먼이 전범으로
처벌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 실각한 그들의 이러한 주장은 나름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과거에도 정권(체제)이 교체될 때면 실패한 권력의 처벌은 공정하고 합리적인 법 논리보다는
어쩌면 관행적으로 이루어졌던 경우가 많았었고, 또한 그것이 그 시대의 보편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전쟁의 승패와 (잔혹한)전범의 처벌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연합국이 나치의 지휘부를 처벌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나치가 패배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지만 나치가 전쟁범죄와 잔인한 인도에 반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면 형사법정 자체가
구성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문명국을 자부하는 나라들은 대체적으로 인명을 살상하는 파괴적이고 잔혹한 인권침해 행위에
대해서는 예외 없이 범죄로 규정합니다. 그래서 통상적인 절차만으로도 국가범죄나 전쟁범죄에서
드러난 잔혹한 행위를 처벌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때는 그 행위(잔혹한 인권침해 행위)에 대한
정당화 사유가 존재하지 않아야 하며, 공소시효 미도래 같은 처벌에 필요한 법적 요건을 갖춰야
합니다.[@실질은 중대한 인권침해 행위에 대해서 상당수 (문명)국가들은 공소시효를 배제하고 있음.]
그렇다면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해봅니다.
<◆ 승자가 저지른 중대한 인권침해 행위는 과연 처벌할 수 있는가? >
연합국의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원폭투하, 수만 명의 독일 민간인이 희생됐던
드레스덴(Dresden) 폭격과 독일군 포로들을 러시아로 강제이송 하여 사망케 했던 행위는
명백히 승자들(연합국)이 저지른 잔학행위였습니다. 그리고 국제사회는 아직도 이러한 승자들의
(잔혹)행위들에 대해서는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 상황입니다. ~ 얘기가 여기까지 흘렀다면
과거 처칠이 했던 발언이 생각납니다. <“전시에 중도는 없다!”> ... 그런데 여기서가 끝이 아닙니다.
지금도 수많은 선량한 민간인이 희생되고 있는, 심지어 2017년 4월 4일에는 국제사회가
사용을 금지하고 있는 화학무기가 사용돼 생후 9개월 된 쌍둥이 아기들의 목숨까지 앗아갔던
시리아 내전은, 외형은 내전(Internal war) 이라고 하지만 실질은 강대국(미-러)의 대리전 양상으로서
이미 오래전에 승자와 패자라는 이분법이 파괴된, 즉 <중대한 인권침해 행위>의 주체를 규정할 수
없는 (국가)범죄행위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입니다. ...
결국 <연합국, 독일, 일본, 시리아, 중대한 인권침해행위(잔혹행위), 내전, 대리전> 등의
사실들은 서로가 무엇과 이웃항으로 연결되느냐에 따라서 <잔혹행위 주체들과 처벌대상>이
수시로 바뀌게 되는 <혼돈의 계열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 ◆ LA의 소방관 고디는 약속 장소에 늦게 나간 것 때문에 사랑하는 아내와 어린 아들이
폭탄 테러로 죽는 모습을 목격한다. 테러범은 콜럼비아의 반군 지도자인 일명 “울프”라는 인물로
콜럼비아 영사와 미 CIA 간부를 노린 범행으로 무고한 고디의 가족이 희생된 것이다. 고디는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정부가 속히 범인을 검거하기를 기다리지만 수사는 제자리걸음을 면치 못한다.
결국 울프는 미국을 빠져나가고 분노한 고디는 직접 범인을 잡기 위해 내란이 한창인 콜럼비아에
잠입한다. ]
콜래트럴 데미지[Collateral Damage. 2002] ... 라는 아놀드 슈왈제네거 주연의 헐리웃 영화입니다.
전쟁이 발발하면 아군이든 적군이든 결국 어느 한 쪽은 승리나 패배를 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의 피해가 발생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애꿎은 민간인의 피해를 가리키는
(군사)용어가 바로 콜래트럴 데미지[Collateral Damage] 입니다 ... 우리말로 하면 “부수적 피해”
혹은 "이차적 피해" 라고 번역됩니다.
자유민주주의, 독립, 통일, 민족해방, 테러와의 전쟁, 평화 ... 등
전쟁을 위한 다양한 동기(Motive)는 이렇게 "부수적 피해" 라는 새로운 형태의 고통을 수반합니다.
하지만 수많은 민간인의 피해는[Collateral Damage] 이제 자신들에게 고통을 가한 주체들이 실체가
없다는 것에 혼란만 가중되어 더욱더 괴로워하게 됩니다 ... 다시 말해 전쟁 중에 고통 받은 수많은
민간인들은 자신들에게 피해를 입힌 주체가 바로 "평화와 자유민주주의" 같은 모호함과 난해함
이라는 사실에서 그만 좌절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결론적으로 전쟁범죄를 비롯한 중대한 인권침해행위가 난무하는 국가범죄는 이렇게
현대에 와서는 범죄를 일으킨 실체적 주체와 고통 받는 피해자가 엄연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 참상의 결과가 <자유, 평화, 민주주의, 테러와의 전쟁, 시대적 숙명>같은 극한의 추상적 사실들과
연결돼 계열화 되면 이제는 처벌(과거청산)의 문제를 넘어, 과연 이것이 <죄인가? 죄가 아닌가?>
라는 판단마저 흐리게 만드는 소위 <죄(罪)의 계열화> 까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이제 어떤 사실에 <연결 가능성>만 부여된다면, 설령 그것이 (잔혹한)인권침해
행위라도 범죄행위 주체들과 처벌 대상, 그리고 죄의 여부까지도 명확히 규정할 수 없는 계열화의
양상을 필연적으로 수용해야 하는가? ~ 라는 답답한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 어쩌면 이 글의 중심 주제일수도 있는데, 저는 “계열화”가 인류가 계약으로 사회(국가)를
형성했던 그 순간부터 현재까지 필연적으로 진행되어왔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미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필연적 계열화를 가장 잘 나타내는 현상이 바로 (미시적 일반의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글 마지막에 좀 더 자세한 마무리를 하겠지만 이 부분이 바로 이 글의 핵심적인 문제제기입니다.]
[◆ 얼마 전 독일 아마존 베스트셀러 순위를 보다 깜짝 놀랐다. 1위가 “독일민법”이고
2위가 “독일상법” 이었다. 4위는 “주요 세법 조항”, 7위는 “노동법”이었다. 딱딱한 법전이
“톱10”에 네 권이나 들어 있다니 믿을 수 없었다. 지난해 팔린 책을 모두 합산한
“2014년 종합 베스트셀러”에서도 “독일민법”은 2위, “독일상법”은 10위를 차지했다.
“주요 세법 조항”과 “노동법”이 그 뒤를 이었다. ~ 어떻게 된 일일까. 해외 서적을 담당하는
출판에이전시 대표에게 물어봤다. 마침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에 참가하고 돌아온
그의 첫마디는 “독일이니까!”였다. 최근 바뀐 법들이 많았고, 이를 반영한 개정판이 잇달아
출간됐기 때문이라는데, 그렇다고 종합베스트셀러까지? ~ 독일에서는 일반인이나
기업 경영자나 법 관련 서적을 모두 구비해 놓는다고 한다. 집집마다 법전을 두고
필요할 때마다 관련 조항을 찾아 생활에 적용한다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필요한 생필품이니
책값도 저렴하다. 다른 책이 13~17유로인 반면 법률서는 5~9유로로 거의 50% 수준이다.
h 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5021067991 ]
해마다 종합베스트셀러 목록에 법 관련 서적이 반드시 한두 권은 포함된다는 법률 선진국 독일.
평범한 가정들이 민법이나 법철학 서적을 기본으로 구비해 놓고 수시로 자국의 법과 친해지려
노력한다는 진정한 법률 강국인 독일 사회도 나치청산 과정 중에 (일종의)법률적 계열화가
나타났는데 ... 지금 부터 5.18 광주 비극의 주범이었던 신군부 처벌 문제와 함께 독일의 과거청산
부분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 다음 이야기로 계속 이어가겠습니다.
잔혹한 학살과 폭력 및 인권유린 등이 벌어지는 전쟁범죄와 국가범죄는
그것이 합리적 정치체제든, 독재체제든 결국은 최종적인 책임의 주체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과거청산의 핵심은 곧 <인적청산>이 될 텐데, 그럼 우리의 현실을 어땠을까? ~ 박정희 시대에
자행됐던 수많은 인권유린 행위들과 끔찍했던 광주학살의 주범인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들은
아직도 그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등에 업고 한국사회에서 (정치적)수명을 연장해가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 면면을 들여다보면 육법당(陸法黨) 인사들과 국보위(國保委) 위원들, 수많은 정치적 사건에서
갖은 고문과 조작을 일삼던 자들, 권력에 부역했던 언론과 지식인들 등 ...국가범죄의 핵심인물
뿐만 아니라 그들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모든 인사들이 바로 악마적 장수(長壽)의 주체들입니다.
[◆ 육법당(陸法黨) - 육사와 서울대 법대 출신들이 모여서 만든 정치결합체. 박정희 시대에
만들어져 전두환 정권에서 권력의 정점을 찍는다. 이 시기에 이들 정치검사들이 만든 해괴한
법논리들이 당시에 자행된 수많은 국가폭력을 변호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 국보위(國保委) - 12.12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의 신군부가 1980년 5월 31일
통치권 확립을 위해 설치한 임시 행정기구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말한다. ]
중대한 인권침해행위를 저지른 국가범죄에 대해서 형사책임을 묻지 않는 것을 <불처벌(Impunity)>
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불처벌 상황을 극복하는 것을 <비상적(extraordinary) 정의>라고 하는데,
1987년 체제의 한국사회는(@엄밀히 말하면 한국 사법부) 과거청산 과정에서 이러한 비상적 정의를
실현하는데 너무나 소극적이었습니다.
특히 <전쟁범죄와 인도에 반한 범죄에 대한 공소시효부적용조약> 같은 기본적인 국제규범조차
따르지 않았고, 이탈리아나 프랑스가 국가범죄(전쟁범죄 및 인도에 반한 범죄)에 대한 처벌을 아예
강행 규정이나 국제관습법으로 이해하고 있을 때, 당시의 한국(사법부)은 그런 시도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이후 <5.18 특별법(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에 대한
위헌여부 판단으로 이어집니다.
<5.18 특별법>은 헌법재판소에서 합헌으로 결정 났지만, 보다 중요했던 것은
합헌 과정(예비적 판단)에서 드러난 당시 헌재의 인식을 고스란히 엿볼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주요 쟁점사항은 <공소시효> 였는데 ~ 한마디로 공소시효가 완성된 국가범죄에 대해서 사후에
처벌이 가능하도록 하는 새로운 법(@ 진정소급입법 – 소급입법금지원칙)이 만들어진다면
과연 그 법은 (위헌인가? 합헌인가?)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 그리고 사후처벌을 위해
법(5.18특별법)이 만들어진다면 위헌이라는 견해가 당시에 우세했던 것입니다.
[◆ 당시 5.18 특별법에 대한 위헌심사에서 재판관 9인중 5인이 실질적인 소급입법이기 때문에
위헌이라는 견해를 밝혔고, 4인의 재판관은 법(5.18 특별법)이 시효가 완성된 범죄자들의 신뢰이익과
법적안정성을 물리치고도 남을 만큼 월등히 중대한 공익을 추구하기에 합헌이라고 판단합니다.]
<@ 어쨌든 신하는 군주를 처형할 적법한 권한이 없다! - (찰스 1세)>
권력을 상실한 패자가 승리자의 법정에서 항변했던 대표적 사례입니다.
어디서 한번쯤 들어본 것 같은 익숙한 뉘앙스(nuance)라 생각되지 않습니까?
<@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 - (광주학살의 주범 전두환을 수사했던 1995년 한국 검찰)>
비상적(extraordinary) 정의가 실현되는 것이 많이 불편했던 당시의 신군부와 육법당의 잔재들,
그리고 체제가 붕괴됐음에도 잔혹했던 군부독재의 관성에서 한동안 헤어 나오지 못했던 법원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고 외쳤던 검찰에 뒤질세라 다음과 같은 기막힌 어록을 남기며
전두환과 노태우를 비롯한, 권력에 부역했던 자들의 형(刑)을 감해줍니다.
<@ 항복한 장수는 죽이지 않는다! - (항장불살 降將不殺)>
우리 사법부의 당시의 상황인식과 한계가 그대로 드러난 결과였습니다. ... 그러나
국가범죄에 대한 불처벌에 대해서 정치적, 도덕적으로는 비난할 수 있어도 <법치주의 원칙>으로
따져 묻는다면 아무리 중대한 인권침해행위였다고 하더라도 그 행위가 당시의 국내법상 적법했다면
사후에 처벌할 수 없으며, 그들(국가범죄 주역들)의 불처벌은 현재 승리를 쟁취한 (민주)정권이
감당해야할 일종의 <정치적 대가>라고 생각해야한다는 반론이 있습니다. ... 1987년 체제이후 비록
전두환과 신군부 잔재들에게 (사후에)사면권이 남발되며 처벌 같지 않은 처벌이 내려지긴 했지만,
당시 우리 사법부의 인식이 바로 이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사법부가 이렇게 <중대한 인권침해행위 범죄>에 대한 처벌문제를 놓고 인식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을 때, 프랑스는 리옹의 도살자로 불렸던 나치 정권의 게슈타포(비밀경찰조직) 지도자
<클라우스 바르비(Klaus Barbie)>의 재판에서 인도에 반한 범죄는 아예 공소시효를 배제한다는
법률을 만들어 적용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이 법률이 제정될 당시(1964년)에는 이미 바르비는
공소시효가 완성된 상태였습니다. 그러자 프랑스 최고법원이 가지고 나온 논리가 <국제관습법>
이었던 것입니다. [◆ 국제적십자위원회는 “전쟁범죄에는 공소시효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규칙(160번)을 국제관습법으로 확인하고 있습니다.]
또한 1997년 이탈리아(군사법원)는 로마에서 유대인 335명을 학살한 나치 친위대 <에리히 프립케>
재판에서 전쟁범죄 공소시효 배제 원칙을 (국제사례를 참고로)아예 강행법으로 선언해버렸습니다.
정리해보면 우리 사법부가 <성공한 쿠데타론과 항장불살>같은 어디 무협지에서나 볼법한 판타지를
써내려가고 있을 때,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국내법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국제법(국제관습법)을
포함한 다방면의 해법을 열심히 찾았던 것입니다.
그럼 자국 땅에 나치(Nazi)를 파종한 법률 강국 독일과 독일 국민들의 선택은 어떠했을까?
많이 궁금합니다.
◆ “총통의 의사가 곧 법이다!”
나치 독일에서 히틀러(Adolf Hitler)의 명령은 “법(法)” 그 자체였습니다.
1935년 유대인을 말살하기 위해 나치가 제정한 <뉘른베르크 인종법>과 ... 전선에서 도망치는
병사들은 무차별적으로 사살하라며 당시 나치 친위대장 하인리히 히믈러(Heinrich Himmler)가
내린 <초토화 명령> ... 그리고 정신병자들은 독일에서는 살 가치가 없는 생명으로 규정한
히틀러의 비밀지령 <안락사 명령> 등은 히틀러 시대의 대표적 악법이었습니다.
그래서 독일에게 나치 청산을 위해 가장 시급했던 문제는 <뉘른베르크 인종법>, <초토화 명령>,
<안락사 명령> 같은 악법들의 효력이 부정되는 것이었습니다. ~ 왜냐하면 나치시대의 법이
비록 “악법” 이었다고 하더라도 그 법들은 분명 합법의 외관(형식)을 갖춘 법률이었기 때문에
법(악법)들의 정당화 사유들이 반드시 부정되어야만 나치청산(처벌)이 가능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히틀러와 나치(Nazi)는 당시 국민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으며 민주적으로 선출된 합법적인
정권이었습니다. ... 따라서 그 시대(나치)에 만들어진 법(악법)은 <(법의)형식과 절차>를 중요시하는
<법률실증주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불법이 아닌 분명한 <합법>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히틀러 체제가 붕괴한 후, 과거청산(나치청산)을 위해 독일사회가 만약 새로운 법을 만들어
나치 악법들을 청소하려 했다면 독일은 흔히 얘기하는 <뮌히하우젠(Münchhausen) 백작의 곤경>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이 있었습니다. ... 엄청난 허풍쟁이로 유명한 동화 속 인물 뭔히하우젠 백작은
어느 날 늪에 빠졌다가 자신의 팔로 직접 자기 머리채를 잡아 올려 늪에서 빠져나왔다는 허풍을
칩니다. 그리고 당시 독일의 상황이 바로 늪에 빠진 뮌히하우젠 백작의 상황과 유사했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 다시 말해 (히틀러)체제 붕괴 후, 새로운 법을 만들어 <사후적인 적용(처벌)>을
하려한다면 “법률은 그 법률이 제정되기 전에 발생한 사실에 대해 소급해서 적용되지 않는다!“ 는
소위 <법률 불소급의 원칙(法律不遡及-原則)>을 위배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 법의 형식과 절차를 무시한 “법률실증주의를 위배!”]
결국 독일은 나치청산 과정에서 자신의 팔로 늪에 빠진 본인의 머리채만 붙잡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늪에 빠졌을 때 뮌히하우젠 백작처럼
허풍으로 늪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이 아니라, 더 진지하고 논리적인 그리고 압도적인 법철학적
논법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 그리고 이러한 고민 끝에 등장한 논법이 바로
그 유명한 <라드브루흐 공식(Radbruch formula)> 입니다.
법은 남성의 젖꼭지와 여성의 젖꼭지를 차별 없이 동등하게(평등하게) 취급합니다.
법의 형식과 절차를 중요시하는 법률실증주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당연하며, 또한 오류가 없는
가장 안전한 법의 기능중 하나입니다.(@ 법적안정성) ~ 하지만 사회가 너무 법률실증주의에만
몰두되다 보면, 남성은 그렇지 않지만 여성의 젖꼭지는 아기에게 젖을 먹여 한 생명을 살릴 수
있다는 사실을 그냥 쉽게 지나쳐 외면할 수 있습니다.
구스타프 라드브루흐(Gustav Radbruch)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대표적 법철학자 였습니다.
법철학을 한다면 누구나 한 번쯤은 거쳐야 한다는 독일 법학계의 거장 라드브루흐(Radbruch)
잠시 그의 필모(Filmography)를 살펴보면 ~ ~ ~
@ 1902년 라이프치히 대학과 베를린 대학(박사)에서 법학을 공부
@ 1903년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교수자격 취득, 제1차 세계대전 간호병으로 참전,
@ 전쟁이 끝난 후, 1919년 킬 대학 정교수, 1920년 국회의원 선출
@ 법무장관(1921~1923년) 제직시절 억압적이고 봉건적인 법제를 사민주의(사회민주주의)적인
법제로 전환시키는 작업을 진행, 1926년 정계를 떠나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복귀(교수),
이 시기에도 친(親) 바이마르 성향 교수로써 저술 활동을 지속함.
@ 1933년 나치 집권 후 사상이 의심스럽다는 이유로 대학에서 해직됨.
@ 영국에 머물던 1년을 제외하고 나치체제 하에서 모든 사회활동(정치, 강연 등)을 금지 당함.
@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복귀하여 “법치국가” 재건을 위해 헌신.
이 당시 <법률적 불법과 초법률적 법>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그의 핵심 주장이라 할 수 있는,
그리고 수많은 법철학적 논쟁을 불러일으킨 <라드브루흐 공식(Radbruch formula)>이 탄생함.
@ 이후 <라드브루흐 형법초안>, <법철학> 등 무려 스무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함.
제가 굳이 라드브루흐의 필모그래피, 즉 인생궤적을 언급한 이유가 있습니다.
20세기 천재 철학자라는 비트겐슈타인이 인생 전반기와 후반기에 (본인)사상의 변화를 겪었던
것처럼 라드브루흐도 본인의 법가치관의 뚜렷한 변화(입장변화)를 겪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변곡점은 <1933년 나치 집권>입니다.
라드브루흐는 철저히 법적 안정성을 추구하는 <법률실증주의자> 였습니다.
우리는 다양한 사회구성원들이 모인 <국가>라는 틀 속에서 매일매일 다툼하며, 불안과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는 너무나 나약한 존재들입니다. 따라서 다툼과 불안과 두려움을 해소하여 평화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모든 사회구성원들이 동의하는 절대적인 규칙이나 규범이 존재해야만
가능합니다. ... 한마디로 <법(法)>의 존재이며, 그 법은 어떤 외적 간섭이나 압력에도 흔들리지
않는, 즉 공동체를 뛰어넘는 암묵적 절대성을 내포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회의 법(法)은
철저한 형식과 절차를 통해야만 절대성, 다시 말해 <법적 안정성>이 보장됩니다.(@ 법질서 확보)
그리고 초창기 라드브루흐는 이러한 생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1933년 나치 집권 후 제정된 수많은 악법들과 그 법 체제하에서 자행된 끔찍한
학살과 폭력 등을 지켜보면서 라드브루흐는 큰 혼란에 빠집니다. 또한 그는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 전쟁(제2차 대전)이 끝나고 (전후의)라드브루흐는 <법률적 불법과 초법률적 법>
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는데, 이 논문은 독일 사회가 나치를 청산 하는데 상당한 영향을 주게 됩니다.
우리는 앞에서 법이 남성과 여성의 젖꼭지를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 짧게 살펴보았습니다.
남성과 여성의 젖꼭지를 모두 동등(평등)하게 취급한다면 이것은 실정법에서 바라본 생각입니다.
하지만 여성의 젖꼭지가 아기에게 젖을 물려 생명을 살릴 수 있다는 사실은 산과 바다가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류에게는 보편이자 <자연> 그 자체입니다. 따라서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여성이 아기에게 젖을 물리는 행위에 대해서는 편견 없이 모두가 같은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그래서
국가와 같은 정치공동체가 법이라는 인위적인 힘으로써 <여성이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행위>, 즉
자연법칙과 같은 행위를 제한하거나 억압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인류가 누려야할
당연한 권리나 정의(혹은 불변의 법칙)를 <자연법(natural law)> 이라고 합니다. ~ 더불어 자연법은
우리 현실의 실제 삶에 적용되는 일반적인 법(실정법)의 개념과는 다른, 좀 더 포괄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 자연법은 주로 실정법의 비교개념으로 사용됨.)
하지만 법적 안정성(형식과 절차)을 중요시 했던 라드브루흐에게는 자연법적 가치관이
근거가 부족하고 오래된 관습적 경향과 비슷하다 생각해서 다툼이 생결을 때는 합리적(이성적)
해결방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때로는 감정적(정치적) 판단으로 오히려 법질서(법적안정)에 방해되는
낡은 생각으로 비춰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라드브루흐는 자연법론자들과 자주 대립각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합법적으로 선출된 나치와 그 체제에서 만들어진 악법의 야만적 만행을
지켜보던 라드브루흐는 큰 충격과 함께 자기모순에 빠져버립니다. ~ 나치의 법도 철저한 형식과
절차위에서 분명 적법하게 만들어진 합목적성(合目的性)을 갖춘 법이었기 때문입니다. ~ 그러던
라드브루흐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나치의 법은 법이 아니라, 법률의 탈을 쓴 불법이다!” - 라드브루흐(Gustav Radbruch)>
거의 180도로 바뀐 입장변화입니다. ... 충실히 법의 외관(형식과 절차)을 지켰던
나치의 법(실정법)에 대해 <자연법에 반하는 실정법은 법이 아니다.> 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이것이 전후의 라드브루흐가 주장한 <법률적 불법과 초법률적 법>에 들어있는 생각이며,
여기서 바로 그 유명한 <라드브루흐 공식(Radbruch formula)>이 탄생합니다.
[◆ ~ ~ “실증주의의 사울(Saul)에서 자연법의 바울(Paul)로!” ~ ~ 일부 학자들은
라드브루흐의 법철학 일관성을 놓고 법률실증주의자였던 라드브루흐가 자연법론자로
전향했다고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라드브루흐 공식(Radbruch formula)>은 자연법에 가까운 <실질적 자연법>입니다.
이것은 실정법(나치법)이 극도로 부정의 하다면 법이 표면적으로 합법적인 행위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법적 효력을 가질 수 없으며, 그래서 앞서 살펴본 히틀러 체제하에서 실행된
<뉘른베르크 인종법>, <초토화 명령>, <안락사 명령> 같은 악법(명령)들은 인류의 당연한
정의라고 할 수 있는 자유와 인권, 평등의 원칙을 위반했기 때문에 불법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참고 - 라드브루흐의 부정의한 법의 3등급>
(1) 명백하게 부정의해서 처음부터 법의 영역에 포함되지 않는 경우
(2) 법적안정성을 무시하고 효력을 박탈할 정도로 법의 내용이 부정의한 경우
(3) 법의 내용이 정의롭지 못하지만 법적안정성을 위해 효력을 인정해야 하는 경우
라드브루흐 공식은 나치청산 과정에서 중요한 <(청산)기준>으로서 자주 원용되었습니다.
한마디로 나치 시대의 악법의 효력을 부정함으로써 합법적인 행위를 불법으로 규정할 수 있었는데
이는 <법률 불소급의 원칙>을 위배하지 않고서도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기 때문에 허풍쟁이
뮌히하우젠 백작에게 일격을 가한 셈이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여기서도 라드브루흐의 법철학의 계열화를 목격할 수 있습니다. ... 다시 말해
<법률실증주의>, <1933년 나치 집권>, <자연법적 시선> 이라는 각각의 사실들이 이웃항으로
서로에게 연결돼 계열화됨으로서 자신의 머리채를 잡지 않고서도 늪에서 빠져나 올수 있는
<라드브루흐 공식(Radbruch formula)> 이라는 새로운 계열화가 생성된 것입니다.
그럼 저는 여기서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다른 몇 가지 사실들을 추가로 제시하고
또 다른 계열화의 양상을 예측해 보라고 문제를 하나 드릴까 합니다. 먼저 추가적 사실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 <@ 종전과 연합국, 나치(Nazi), 공산화, 라드브루흐 공식, 독일 통일>
생각하시는 동안 <라드브루흐 공식(Radbruch formula)>이 담긴 라드브루흐의 명문장을 소개합니다.
[◆ 정의와 법적안정성의 갈등은 다음과 같이 해결할 수도 있겠다.
실정적인, 즉 규정과 힘을 통해 정립된 법은 비록 그 내용이 정의롭지 못하고
목적에 부합하지 않더라도 우선성을 갖는다. 그러나 정의에 대한 실정법의 모순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에 이르러 법률이 <“부정의한 법”> 으로서 정의 앞에서 물러나야
하는 때에는 그러하지 않다. 법률적 불법과 내용상 정의롭지 못하지만 그래도 효력이
있는 법률 사이에 더 예리한 경계선을 긋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경우에는 아주 분명하게 경계를 확정할 수 있다. 정의를 전혀 추구하지 않는 경우,
법률을 제정할 때 정의의 핵심인 평등을 의도적으로 부인하는 경우, 그때 법률은 한갓
악법에 그치지 않고 아예 법적인 성격을 갖지 못한다. 왜냐하면 법, 즉 실정적인 법도
의미상 정의에 봉사하는 규율과 규정이라고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준에
비추어 보면 나치법은 전부 효력 있는 법의 품격에 이르지 못했다. ... 히틀러 인격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 즉 히틀러로부터 유래하여 나치의 모든 “법”의 본질로 귀결되었던
특성은 바로 진실에 대한 감각과 법에 대한 감각의 총체적 결핍이다. ...
정당이 당파적인 성격을 가질 뿐이라는 점을 무시하고 나치당을 국가 전체와
동일시했던 법률도 법적인 성격을 갖지 못한다. 즉흥적인 위하(힘과 위엄)의 필요에
이끌려 범죄의 경중에 대한 고려 없이 죄질이 다른 범죄에 같은 형벌을 부과하고,
빈번히 사형을 부과하는 온갖 형벌법규도 법적인 성격을 갖지 못한다. 이 모든 것들이
법률적 불법의 사례들일 뿐이다. - (국가범죄, 461~462 페이지/ 이재승/ 도서출판 앨피)]
라드브루흐는 자신의 이 명문장에서 <“실정적인 법도 의미상 정의에 봉사하는 규율과 규정”>
이라며 형식과 절차위에, 즉 법적안정성을 무엇보다 우선시했던 본인의 기존 법철학위에
<정의> 라는 자연법적 가치관을 올려놓습니다. 그리고 부정의한 법의 3등급 중에서 (2)와 (3)의
구별은 정도나 형량의 문제이므로 둘 사이의 (예리한)경계선을 긋는 것은 불가능 하다고 했지만,
(1)과 (3)의 경계는 “(1)” 자체가 아예 처음부터 법의 영역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이 둘 사이의
경계는 선명하게 그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라드브루흐의 명문장을 음미해 보셨다면 이제 제가 드렸던 문제를 한번 풀어보겠습니다. ...
앞서 제시된 추가적 사실, 즉 <@ 종전과 연합국, 나치(Nazi), 공산화, 라드브루흐 공식, 독일 통일>
이라는 사실들이 각각 서로에게 어떻게 이웃항으로 연결되었고, 또 그러한 연결이 현실에서는
어떤 계열화로 나타났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나치청산 과정에서 <라드브루흐 공식(Radbruch formula)>은 몇 차례 판결에 원용되긴 했지만
형사적 책임보다는 주로 배상책임과 관련해서 원용된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한마디로 실질적
청산효과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는 것인데, 이는 라드브루흐 공식이 (나치)체제 청산의 논리로는
전혀 작동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 왜냐하면 종전 후 나치청산 과정의 상당부분을 연합국
군정청이 주도하면서, 그리고 나치청산 작업을 빠른 시간 안에 마무리하기 위해서 핵심전범의
(청산)처리만 연합국 군정청이 도맡았고 나머지 인적청산 문제는 그냥 독일에게 넘겼는데 ~ 당시
세계질서가 재편되는 상황 속에서 미국은 서독의 재건을 동구권의 사회주의 물결이 확산되는 것을
막는 하나의 방어벽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나치청산을 조기에 마무리하려했던 결과였습니다.
상황이 이러했으니 당시에 라드브루흐 공식을 활용할 여지는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나치에 부역했던 상당수 공무원들이 다시 복직되기도 했는데,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독일이 <탈나치화에서 재나치화>로 향하고 있다며 거센 비난을 쏟기도 했습니다.
<◆ 권위주의 정권에서 저질러진 범죄는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국가에 대한 범죄(쿠데타), 둘째는 인권 범죄, 셋째는 부역(附逆)입니다.
과거청산 국면에서는 둘째 유형의 범죄가 주로 처벌되고, 셋째 유형은 도덕적 비난은
받아도 좀처럼 범죄로 분류되지 않습니다. - 새뮤얼 헌팅턴(Samuel Huntington) >
독일의 과거청산(나치청산) 작업은 통일과정에서도 계속되었습니다.
그런데 히틀러 체제하에서 수많은 사법살인을 저질렀던, 다시 말해 나치에 부역했던 그 많던
서독 출신 법조인들은 거의 대부분 살아남아 현직으로 복귀했습니다. 하지만 통일독일에서
동독 출신 법조인들에게는 상황이 많이 달랐습니다. 종전 후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했던
<라드브루흐 공식(Radbruch formula)>이 나치 전력이 있던 동독 법조인들을 단죄할 때는 상당한
힘을 발휘한 것입니다. 동독 법조인 보다 더 심했던 서독의 광신적 나치 법조인들은 거의 대부분
무죄로 현직에 복귀시켰던 독일이, 통일 후 동독 출신들에게는 <법률적 불법과 초법률적 법>의
잣대를 준엄하게 들이대며 <승리자 법정(victor's Justice)>을 재현한 것입니다.
독일의 나치청산은
여러 <사실과 사실들의 결합>에 의해 우리의 예측영역 밖에서 이렇게 또 다른 새로운
계열화를 생성했습니다. 종전과 연합국, 나치(Nazi), 공산화, 라드브루흐 공식, 독일 통일 ... 이라는
각각의 사실들은 혼돈의 행렬로서 수학적 예측범주를 벗어났고, 이로 인해 생성된 새로운
계열화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연법의 바울(Paul)로 변신한 라드브루흐가 그렇게 애타게 부르짖던
<정의>를 위해 정의의 바깥에서 <부정의>하게 진행되었던 것입니다. ... 그래도 우리가 독일의
과거청산 사례를 의미 있게 바라봐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에게 비록 (나치)청산 과정에서
동서독이 구분되는 법률적 계열화가 생성되긴 했지만 <라드브루흐 공식(Radbruch formula)>
이라는 치열한 법철학적 고민이 있었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 반면 한국은
<항장불살(降將不殺)>, <성공한 쿠데타론> 같은 천박한 판타지의 고민만 있었을 뿐입니다.
자! ~ 여기까지 참 힘든 걸음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좀 다른 얘기를 해볼까 하는데,
머리도 식힐 겸해서 우선 우리의 훌륭한 문학작품 한 대목 감상해 보시죠. ~ ~
[◆ 소장은 건의서 뒷면의 연서장들을 들쳐보고 나서 고개를 들었다.
“투쟁이란 건 파업을 의미하는 건가?” ~
동혁이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말한다. “파업도 포함됩니다.” ~ (중략)
“어쩌면 자네들은 혜택을 못 받게 될지도 모를 텐데? 돈이 생겨, 술이 생기는가?
도대체 뭘 바라구 이런 짓을 벌이나? 덮어놓고 불평, 불만을 터뜨려 보자는 식이로군.“
“우리가 못 받으면, 뒤에 오는 사람 누군가 개선된 노동 조건의 혜택을 받게 될 거요.”
“우리 노사 관계를 떠나 인간 대 인간으로 이야기해 봄세. 자네들 의견을 존중해서
터놓구 얘기하구 싶군. 노가다는 솔직하랬다구. 얼마를 요구할 텐가? 자네들 심정을
다 알지. 우리 바꾸는 게 어떤가?“
“그 따위 말에는 대답하고 싶지 않소. 최소한 두 가지의 조건만이라도 확답을 하고
각서를 써 주시오. 두 가지 사항은 노임과 감독조에 관한 것 말입니다.“
동혁의 옆에 묵묵히 서 있던 3함바 고참 인부가 소장에게 달려들 태세로 말했다.
“당신에게 일러두겠는데, 10분 내로 감독조 새끼들을 우리한테 인도하라구.
안 되면 우리가 사무실로 밀구 들어가겠소!“ - (객지 中. 황석영. 1971) ]
훌륭한 문학 작품은 시대를 반영합니다.
이 작품은 황석영 선생님의 <객지(客地). 1971년> 라는 소설의 한 대목입니다.
1970년대 “아세아 건설”이라는 건설회사가 추진한 “운지 간척 공사장”이 배경입니다.
당시 우리의 노동현실과 노동자들의 투쟁과정을 너무나 생생하게 사실적으로 그려내서
한국의 대표적인 <노동소설>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소설에서 비인간적 생존(노동) 현실을 감당하지 못한 노동자들은 사측과 첨예한 대결구도로
발전하는데, 이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타협파와 투쟁파로 갈립니다. 사측은 폭력배가 주축이 된
감독조와 경찰력을 이용해서 노동자들의 저항에 대응합니다. ... 이후 명문화되지 않은 사측의
회유책과 공작에 흔들린 많은 노동자들은 투쟁의 현장을 이탈합니다. 결국 동혁이 주도한 쟁의는
실패로 돌아가지만, 동혁은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위 대목에서 동혁은 현장소장에게 내일의 빛을 담아 얘기합니다.
< “우리가 못 받으면, 뒤에 오는 사람 누군가 개선된 노동 조건의 혜택을 받게 될 거요.” >
이것은 작가(황석영)가 동혁을 통해 미래 한국노동에 대한 희망을 얘기한 것입니다.
하지만 작가가 희망한 미래한국, 즉 2017년 한국의 노동현실은 여전히 어렵습니다.
[◆ 존경하는 ‘아세아 건설’ 회장님 귀하. 저희들은 운지 간척 공사장의 일용 인부로 고용된
사람들입니다. 애초에 우리는 이것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 생각하고 말없이 일만 해왔습니다만.
그냥 참고 견디기엔 너무도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어 궐기하기로 하면서 몇 가지 건의 말씀을
드립니다. 노임을 법정 임금에 미달된 액수로 받으면서 게다가 간조가 보름 간격인지라,
현금 없는 대부분의 우리 부랑 인부들은 전표를 헐값에 팔아 일용품을 사든지 전표를
본 가격보다 싸게 함바의 숙식대로 치르고 있습니다. 서기들은 전표로 부당한 이윤을 취하고,
함바는 거기대로 노임을 착취합니다. 대부분의 객지 인부들은 함바와 서기, 그리고 그들이
경영하는 매점에 이삼천 원 정도의 빚을 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다른 일터를
찾아 뜨고 싶어도 마음대로 갈 수가 없어서 묶여버린 것입니다. ~ (중략) ~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의 네 가지 문제를 시정해 주십사 건의하는 바입니다. ~ 첫째, 노임을 현재의
도급 임금과 같은 액수로 올려 줄 것. 단, 노동량에 상관없이 날품일 때에도 적용할 것.
둘째, 정확한 시간 노동제를 확립할 것. 셋째, 감독조를 해산시키는 대신 인부들이 교대로
자치 담당하게 할 것. 넷째, 함바를 개선하고 식당을 통합하여 회사가 운영할 것. 그래서
일일 전표를 식권과 직결시키고 나머지는 현금으로 지불해 줄 것. ~ 위와 같은 우리의 요구가
실현될 때까지는 다음의 서명자들은 여하한 투쟁이라도 불사하겠음을 알려드립니다.
- 운지 간척공사 일용인부 일동 .... (객지 中. 황석영. 1971) ]
한국에서 노동운동은 곧 진보운동의 다른 이름이었습니다. ~ 그리고 한국 노동이
2017년까지 걸어왔던 길은 말로는 다 표현 못할 고달픔과 처절함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래서 한때 권위주의적 정권은 한국 노동운동에 과도할 정도의 <이데올로기>를 덮어씌웠습니다.
국가와 회사(자본가)에 대한 노동자의 정당한 요구는 빨갱이로 덧칠됐고, 헌법에 보장된 노동자의
쟁의 행위는 대부분 <불법>으로 규정되었으며, 불법은 다시 <폭력>이란 이름으로 명찰을 바꿔달고
대중에게 재생산 되었습니다.
◆ 그럼 여기서 잠시 질문을 하나 드려보겠습니다. ~ ~ ~ <“누가 빨갱이인가?”>
분단 이후 한국사회가 군사독재라는 잿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을 때 <반공주의 이데올로기>는
독재 권력의 강요와 선동으로 <악(惡)의 범용성>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집단(개인) 이라면 먼저 <공산주의는 무엇인가?> 라는 접근 방식을 사용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공산주의는 생산수단을 공유하자는 사상이며, 반면 이러한 문제가 있군!”> ... 질문은 이렇게
대상에 대한 다면적 평가로부터 시작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는 <반공 이데올로기>라는
틀 속에서 이미 <빨갱이 = 악(惡)> 으로 규정해 버립니다. ... 따라서 이제 독재 권력은
<“누가 빨갱이인가?“> 라며 의심하고 대상만 선정하면 자신들의 앞길에 걸림돌이 될 만한
모든 것들은 순식간에 악(惡)으로 규정되어 처참하게 찢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 그리고 이때
(무지한)대중들의 자발적이며 열광적인 참여까지 이루어진다면 이것은 사회가 파시즘의 징후에
매우 가깝게 다가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마녀사냥(빨갱이 사냥)이 강압이 아닌
흥분과 최면(선동)에 의한 대중의 자발성을 유도하는 형태를 취했다면 이것은 파시즘의 대표적
특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 아무튼 군사독재 시절 한국 노동의 외피에는 그렇게
빨갱이가 덧칠되었던 것입니다. ... 더불어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작동방식에 대해서 슬로베니아의
천재 철학자라는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은 <이데올로기적 전도효과> 라고 설명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가 가진 것은 <노동력> 뿐입니다. ~ 따라서 노동자들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바로 <노동력 제공거부(파업)> 뿐입니다. 한마디로
노동자가 자신의 현재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 파업을 하는 것은 정당한 행위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실정법은 파업의 조건과 절차를 엄격하게 따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파업)조건을 위반하면 노동자의 파업행위를 모두 불법으로 규정하고 그에 대한 책임도 과도하게
묻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의 실정법은 노동자 파업행위를 <형법상 범죄구성요건에 해당하지만,
정당화 사유를 갖춘 때에만 위법성이 조각된다>는 논법을 구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파업은 범죄라는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인데, 이것이 현재 한국의 실정법이 한국의 노동을
바라보는 현실이며, 이렇게 범죄로 규정된 파업에는 다시 <폭력>의 이미지가 덧칠되어 대중을 향해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 것입니다.
[◆ 어떤 프레임을 부정하면 그 프레임이 활성화 된다 ... 그리고 프레임은
자주 활성화 될수록 더 강해진다. 이 사실이 정치 담론에 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내가 상대편의 언어를 써서 그의 의견을 반박할 때,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의 머릿속에서는
상대편의 프레임이 더 활성화되고 강해지는 한편 나의 관점은 약화된다. 이는 진보주의자들이
보수 세력의 언어와 그 언어가 활성화하는 프레임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들의 언어가 아닌 우리의 언어를 써서 우리의 신념을 말해야 한다는 뜻이다. ]
-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 조지 레이코프 / 외이즈 베리 출판. 2015) ]
예전에 여당의 유력 정치인이 우리가 국민소득 3만 불을 넘지 못하는 것은 바로
<노조의 쇠파이프> 때문이라는 발언을 해서 수많은 노동자들의 공분을 샀던 적이 있었습니다.
비정규 노동자가 800만 이라는 현실이 증명하듯 현재의 우리 노동현실을 외면한 여당 인사의
당시 발언은 <노조의 쇠파이프와 국민소득 3만불> 사이에 교묘한 프레임을 형성해 놓았습니다.
다시 말해 이러한 프레임은 우리가 반복하여 <노조>를 말할 때마다 국민들의 머릿속에서는
<노조 = 쇠파이프>가 계속 되새김질되어 폭력적 이미지가 자동적으로 떠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정치적 수사(Rhetoric)속에 얼마나 파괴적이고 잔인한 속성이 은폐되어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과거 권위주의 시대에 <이념>으로 덧칠되었던 노조는 오늘날 민주화된 시대에는
<폭력>으로 덧칠되어 이미지의 교체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 더불어 대학에서 공부하는
경제학 서적들은 어느새 1천 페이지라는 육중한 무게를 넘어서며 우리에게 조용히 다가와
수요와 공급을 얘기하고, 생산과 소비, 시장과 정부를 얘기하며 소득과 분배, 상품과 기업을
얘기 합니다. 또 성장과 경쟁을 얘기하고 무역과 환율, 은행과 화폐 ... 여기에 환경과 게임이론,
인간의 행동(경제) 까지 ... 이렇게 오늘날의 경제학은 한계를 모르는 암세포처럼 지속적으로
자기영역을 확장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경제(활동)의 불변의 근간은 바로 사람의
<일(노동)> 입니다. ...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그 두꺼운 경제학에서 일(노동)을 언급할 때는
오직 딱 한 번, 바로 일(Labor)이 없는 상태인 <실업>을 논할 때 빼고는 거의 없습니다. 과거에는
빨갱이라는 <이념>으로 덧칠되었고, 그나마 민주화가 많이 진행된 시대에도 한국의 노동운동은
<폭력(적)>이라는 프레임 속에서 결백을 증명하느라 많이 바쁩니다. 그런데 이제는 1천 페이지
분량의 경제학 교재에서조차 한 자리를 차지하려면 눈치를 봐야하는 신세입니다. ~ 한마디로
(경제)영역 확장의 가장 큰 공헌을 했던 <노동(일)>이 정작 자신을 알리기 위해 배분받는 활자는
가장 적은 양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도 <노조(노동운동), 권위주의, 민주주의, 이념,
쇠파이프, 프레임> 이라는 각각의 사실들이 생성하는 서글픈 노동의 계열화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실 대한민국의 노동법(노동관계법)은 놀랍게도 1953년 한국전쟁(6.25) 중에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이때 제정된 <노동관계법>은 미국의 와그너법과 일본 노동법을 모태로 만들어졌는데,
이 법은 당시 여야의 초당적 합의에 의해 탄생된 것입니다. 하지만 (1950년 ~1960년대)의 한국은
아직 산업화 이전의 국가였습니다. 결국은 당시 제정된 노동관계법은 현실적인 실천과는 무관하게
<“한국에도 근대적 노동법이 존재한다!”>라고 국제사회에 보여주기 위한 일종의 장식효과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당시의 법(노동관계법)이 한국의 노동현실을 제대로 반영하고 기능했으려면
우리는 좀 더 많은 시간을 인내하며 차분히 미래를 기다리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이후의 한국 상황은 군사독재라는 더 깊은 어둠속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 와그너법(Wagner Act.) - 1935년에 미국에서 뉴딜 정책의 일환으로 정해진 노동관계의 법.
노동자의 단결권과 단체 교섭권 및 단체 협약을 인정하고, 부당 노동 행위를 금지하였다. 1947년에
태프트하틀리법(Taft-Hartley法)에 의하여 수정됨.]
[◆ "공산주의자들은 이제까지의 모든 사회질서를 강제력으로
전복시킴으로서만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을 공공연하게 선언한다.
지배계급들로 하여금 공산주의 혁명 앞에서 전율케하라. 프롤레타리아들은 혁명에서
족쇄 말고는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들은 세계를 획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 " <공산당 선언 87쪽> ]
1864년 런던에서는 최초의 국제적인 노동자 조직이 탄생합니다. 조직의 정식명칭은
<국제노동자협회(International Working Men's Association)>인데, 바로 그 유명한
<제1인터내셔널(First International)>입니다. ~ 이러한 국제적 노동조직이 만들어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모두가 잘 아시겠지만 바로 <칼 마르크스(Karl Marx)> 입니다.
2017년 기준으로 대략 170여년 전(@1848년 공산당 선언),
<노동자들이 잃을 건 족쇄뿐이며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에게 단결하라>는 마르크스의
이 전율적인 외침은 단순한 외침이 아니라 세계에 <노동의 담론>을 투척한 것입니다. 즉 세계는
마르크스 이후부터 노동을 바라보는 <시선의 전복>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한국에게는 그로부터
100년도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산업화가 한창 진행되던 박정희 (개발)독재체제시기. ~
특히 1970년은 한국 <노동운동 역사의> 첫 출발점 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70년은 바로 청계천 평화시장 봉제공장에서 일하던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 해입니다.
하루 평균 14~15시간의 노동과 한 달에 28일을 근무했던 도저히 인간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마치 고문과 같았던 노동조건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평화시장 노동자들은 만성 질병에 시달릴 수
밖에 없었고, 이러한 사정 때문에 <“평화시장 여공은 시집가도 3년밖에 못 써먹는다!“>는 말까지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 앞서 살펴봤듯이 산업화 이전에 만들어진 <노동관계법>에서 보장하는
자율적인 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은 서슬 퍼런 유신독재체제에서는 전혀 행사되지 못했습니다.
이에 전태일은 홀로 외로운 싸움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습니다.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실태를 언론에
호소해 보기도 했고, 유럽이 19세기 중반에 국제적인 노동조직 <제1인터내셔널>을 조직했을 때,
한국에서는 100년보다 더 많은 시간이 더 흘러서야 겨우겨우 전태일이 평화시장 재단사 모임인
<바보회>를 만들어 계속해서 투쟁을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소설 <객지(客地)>의 주인공 동혁이
실패했던 것처럼, 전태일의 투쟁은 국가를 상대로 그것도 군사독재 권력을 상대하기에는 너무나
역부족 이었습니다. 결국 전태일은 죽음으로 항거를 다짐합니다. ~ 그리고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은 자신의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성냥불을 붙입니다.
불길은 삽시간에 전태일의 온몸을 감싸며 타올랐고, 그렇게 불길에 휩싸인 채
전태일이 외쳤던 비장한 한마디는, 마르크스의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같은
거창한 담론이 아니라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일요일은 쉬게 하라!“> 같은
처절함과 절박함 그 자체였습니다. 이때가 그의 나이 불과 스물두 살이었습니다.
병원에 실려간 전태일 열사는 울먹이는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어머니 담대해지세요. ~ 내가 못 다 이룬 일 어머니가 꼭 이루어주세요 ~”> 하고
마지막 유언을 남기며 그렇게 생을 마감합니다.
국가권력이 법과 (현실적)법적용의 벌어진 간극을 적극적으로 메우려 노력하지 않는다면
사회계약으로 그 법(일반의지)에 의지하기 위해 모든 권리를 내놓은 시민들의 육체와 정신은
결국 전태일 열사의 몸처럼 다 타서 재가 될 것입니다.
박정희 시대에 한국이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룩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지만,
이는 전태일 열사와 같은 수많은 평범한 국민들의 희생이 가장 낮은 곳에서 든든한 토대가
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와 더불어 박정희 정권이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한 것
또한 명백한 사실이며, 이는 국가의 가장 상위법인 <헌법>을 위반한 것입니다. ...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 국민들은 <수단이 결과에 의해 정당화>되는 또 하나의 <혼돈의 계열화>를
목격하게 됩니다. ~ 다시 말해 한국과 박정희에 <군사쿠데타>라는 사실이 이웃항으로 연결돼
계열화되면 그는 헌정질서를 파괴한 독재자가 되지만, <고도의 경제성장> 이라는 사실이
이웃항으로 연결돼 계열화되면 박정희는 주식회사 한국을 성공적으로 이끈 존경받는 CEO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독재자 박정희>라는 사실과 <주식회사 한국의 존경받는 CEO>
라는 사실이 다시 이웃항으로 연결돼 계열화되면 이는 <국민적 딜레마>라는 이중화된 계열화의
양상이 새롭게 생성되어 쌓이게 됩니다.
화가(painter)는 자신과 함께하던 개가 아프면 가족애를 느끼며 개의 고통에 마음아파 합니다.
하지만 개의 자리에 닭이 온다면 그 순간부터 화가는 <생산>을 염려하는 <자본가>로 둔갑합니다.
라드브루흐가 사울(Saul)과 바울(Paul)을 맞교환 한 것처럼, 화가도 자본가와 맞교환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계열화는 단순한 양상의 변화를 넘어 우리의 예측영역 바깥에서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1970년 전태일 열사의 분신이후 본격적으로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는 시작됩니다.
그러나 무려 47년 이라는, 반세기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노조조직률과
단체협약 적용률은 OECD 꼴찌에 가까운 10% 수준밖에 안 되며, 비정규 노동자가 800만 가까운
현실에서 정부와 여당은 노조 때문에 해고가 어렵다며, 그래서 <노동 유연화>라는 세계적 추세를
따라야만 경제가 살아난다며 (노동)개혁안을 국민들에게 들이밀고 있습니다. ...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무리 모든 경제주체들이 수긍하는 훌륭한, 또는 상당히 합리적인 대안이 나온다고
하더라도 악어의 입처럼 법(노동)과 법적용 사이의 (현실적)간극이 계속해서 벌어져만 있다면,
서글픈 <노동의 계열화>는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계속해서 생성될 것입니다. ... 그리고 이러한
우려는 최근에 현실로 더 빠르게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 끝내 비정규직 우산 빼앗은 기아차노조
h ttp://news.nate.com/view/20170428n34492?modit=1493388399
기아차 노조가 끝내 분리 투표를 통해 비정규직의 우산을 빼앗았다.
조합의 정규직 근로자들이 “연대”보다는 “각자도생”을 택하면서 기아차 노조의
<1사 1노조>는 9년 만에 막을 내렸다. 기아차 비정규직의 처우는 더욱 열악해질
위기에 놓였다. ~ (중략) ~ 금속노조는 2006년 산별노조를 실현하고 정규직, 비정규직
연대를 강화하기 위해 <1사 1노조> 원칙을 담은 규약을 채택했다. 기아차지부는
2008년 완성차 정규직노조 가운데 처음으로 사내하청지회를 흡수하는 방식으로
1사1노조를 건설하며 <연대 투쟁>의 모범이라는 평가를 노동계에서 받았다.
하지만 지난해 10월 기아차 노사가 사내하청 비정규직 1,049명을 정규직으로
신규채용하기로 합의한 것과 관련해 사내하청분회가 “나머지 2,000여명은 평생
비정규직으로 살라는 것”이라고 반발하며 독자 파업을 실시하는 등 지부와 갈등을 빚었다.
갈등이 봉합되지 않자 지난 6일 지부 대의원회의에서 한 정규직 대의원이 1사1노조 유지에
대해 조합원 의견을 묻는 총투표를 하자는 안건을 내면서 총투표로 이어졌다. ]
현대 자본주의의 가장 최적화된 작동원리는 바로 <수직적 복종과 수평적 경쟁>입니다.
그리고 그 (수평적)경쟁의 진짜 본질은 바로 <없는 놈들끼리!> ~ 라는 식은땀 나는 구호입니다.
<99% 들의 경쟁!> ... 그래서 노조에게 연대는 바로 생명입니다. 그런데 (정규직)노조가 업고가도
모자를 판에 자기 자식(비정규직)을 거리에 그냥 내다버린 사건이 2017년 4월 28일 한국의 대표
노조인 기아자동차에서 일어났습니다.
정규직, 비정규직, 귀족 노조, 산별 노조 ... 명칭과 구분은 무엇이든 좋습니다.
결국 문제는 (노동)법과 그 법이 현실에서 적용될 때의 간극의 크기를 더 이상 좁히지 못했기
때문에 이러한 허탈한 <노동의 계열화>가 생성된 것입니다. 전태일 열사의 분신이후 우리에게는
반세기에 가까운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7년 한국의 노동운동은 주어진
시간을 다시 반납하고 있습니다.
◆ 그럼 여기서 잠시 <대한민국 헌법 제32조 1항, 3항>을 살펴보겠습니다.
h ttp://www.law.go.kr/lsEfInfoP.do?lsiSeq=61603#
[1] - 모든 국민은 근로의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사회적.경제적 방법으로 근로자의 고용의 증진과
적정임금의 보장에 노력하여야 하며,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최저임금제를 시행하여야 한다.
[3] - 근로조건의 기준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도록 법률로 정한다.
<비정규직> 이라는 말속에는 이미 술어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특별한 수식어는 필요치 않지만,
그들(비정규직)이 명문화된 법과 현실적 법적용의 괴리 안에서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고 있는지는
상당한 설명과 시간이 필요합니다. ... 우리 헌법은 국가가 노동자들이 적정임금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라고 명시합니다. 또한 노동자는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받아야 한다고도 말합니다. ~ 하지만
비정규직은 정규직과 동일노동을 하고서도 거의 절반 수준의 임금밖에 받지 못하는 것이 지금의
(노동)현실입니다. 더불어 원청과 하청의 노동구조에서는 애초부터 인간의 존엄성은 제외하고
시작합니다.
2017년 5월 1일 삼성중공업에서 크레인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이 사고로 6명의 근로자가
생명을 잃었고 25명의 근로자가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이날은 바로 <근로자의 날>이었습니다.
또한 사상자 전원 모두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 이었습니다. 삼성중공업 소속 정규직들은 대부분
가족들과 휴일을 만끽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죽음은 국민들에게 더욱 안타까운 소식으로
전해졌습니다. ... 정규직들은 노동절이나 공휴일에 쉬어도 임금이 지급되며, 만약 일을 하더라도
가산임금이 지급됩니다. ~ 하지만 하청 노동자들에게는 <근로자의 날>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결국 문제는 법과 그 법이 적용되는 현실적 간극의 크기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간극이 좁혀지지
않는다면 <노동의 퇴행적 계열화>, 혹은 <노동의 음(-)의 계열화>는 지속적으로 생성될 것입니다.
마르크스는 <"나는 인류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만을 제기해 왔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곧 <문제의 발견>이 해결이라는 뜻인데, 그렇다면 <법과 법적용의 간극> 이라는
문제의 발견은 마르크스의 말대로 우리도 곧 희망을 찾을 수 있다는 의미일까요?
한국 사법조직의 본바탕에는 <관료제>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 따라서 판사나 검사의 권한이
아무리 막강해도 그들이 <공무원>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결국 관료화된 법조인, 즉
관료주의 한계 안에서 그들의 생존이유는 오직 단 하나 ... <가장 높은 곳을 향하여 ! > 입니다.
검찰총장, (대)법원장, 헌법재판소장 등... 법조인들의 최고를 향하려는 목표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들이 최고를 목표로 삼는 순간부터는 전형적인 <관료주의> 모습이 드러나게 되는데,
획일적이며 인사권을 쥔 권력에 순응적인 태도가 당위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 또한
그러한 태도는 계급(직급)이 상승할 때마다 강화됩니다. 결국 이러한 양태는 우리의 사법체계에
<인사권>을 쥔 자가 최종적으로 승리하게 되는 하나의 <경향성>을 주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에 이르러 이러한 핵심을 가장 잘 이해한 집단이 바로 자본(재벌) 권력인 것입니다.
[◆ 공무원 사회에서 통하는 말이 있다
"인사에는 장사가 없다" 라는 말이다. 공무원은 일을 잘한다고 해서
월급을 더 받는 게 아니다. 조직 바깥에서 명성을 얻는 것도 아니다.
공무원에 대한 보상은 오직 인사(人事)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자존심 강한 공무원일수록 인사에 민감한 것은, 그래서 당연한 일이다.
검사들 역시 마찬가지다. 어느 선배 검사는 암으로 죽어가면서도
다음 보직을 걱정했다. 대학 입시, 사법시험 등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모인 곳이 검찰이다. 그래서 동기가 자기보다
좋은 보직으로 가는 것을 못 견디는 이들이 많다. 어떤 경우에는
자신의 보직보다 동기들의 보직에 더 신경을 쓴다. 동기에 뒤쳐질 수
없다는 자존심 때문이다. 아무리 강단 있는 검사라도 인사 문제 앞에서는
약해질 수밖에 없다. 검찰 간부는 해마다 보직 인사를 받는데,
연거푸 두 번만 한직으로 발령이 나면 회생 불가능 상태가 된다.
삼성은 이런 약점을 이용해 공무원 사회를 장악했다.
인사권을 쥔 수뇌부에게 집중적인 로비를 퍼부은 것이다.
- ( 삼성을 생각한다. 72~73쪽 / 김용철 변호사/ 사회평론 펴냄) ]
경험적으로 살펴본다면, 그동안 한국의 사법부가 자본(경제) 권력에게 적용했던 처벌(양형) 기준은
일반 국민들을 상대로 한 기준과는 전혀 다른 것처럼 느껴졌던 경우가 많았습니다. 마치 경제인을
위한 법이 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특히 (매우)관대한 양형 선고 이유를 들어보면 대개는
<“한국 경제발전에 대한 공로가 크다.”>, <“신규 고용창출에 노력했다.”>, <피고는 존경받는 가장의
역할에 충실했고, 주변인들로부터 존경받은 훌륭한 성품을 지녔다.”>, <사회적, 도덕적 비난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실정법을 위반한 것은 아니다. 한국 경제발전을 위해 계속 노력해 달라“>
판타지 <항장불살과 성공한 쿠데타론>으로 전두환을 단죄하던 때로부터, 대략 20년이 조금 넘게
흘렀지만, 대한민국 사법부의 법 논리는 자본 권력을 상대할 때면 여전히 판타지에 가깝습니다.
결론적으로 경제발전의 공로가 적거나, 최선을 다해 돈은 벌어다 주지만 아내와 자식들로부터
소외된 아버지이거나, 성격(성품)이 약간 지랄 맞아 주변 사람들에게 존경을 못 받는다면
관대한 양형 혜택을 받을 수 없다는 논리가 됩니다.
법의 형식과 절차, 즉 <법적안정성>을 법치주의의 가장 최우선으로 생각했던 라드브루흐는
나치의 잔인한 학살과 폭력을 지켜보며 <법적안정성> 위에 <정의>를 올려놓았습니다.
하지만 한국은 관료사회 인사권을 자본권력에 헌납하고 마치 전립선비대증 환자의 그 곳처럼
<사법정의>가 잔뇨 나오듯 줄~줄 누수 되고 있는데도 지금까지 계속 지켜만 보고 있었습니다.
이글을 쓰면서 저는 개인적으로는 느낀바가 상당히 많았습니다.
그리고 느낀 점을 라드브루흐 공식을 차용해 표현해 본다면 바로 다음과 같습니다.
◆ 이념적 불법과 초이념적 계열화 !
가짜 진보가 판치고, 명백히 보수가 아님에도 보수의 이념을 절도한 퇴행적 계열화의 양상! ~
사회구조의 중심에 무엇을 대입하든, 즉 계급, 보수, 진보, 자본, 노동, 사법 등
대입된 주제가 자기영역 안에서 사회만 형성할 수 있다면, 그 곳에는 반드시 그 곳만의
<미시적 일반의지>가 나타납니다. 다시 말해 <계열화>가 생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평소 생각하던 예측 가능한 범주 내에 몇 가지 새로운 <사실>들이 추가되어 결합된다면
예측영역 바깥에서 <계열화>가 생성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계열화는 우리에게 진실이
비틀어진 것과 같은 착시를 제공합니다. ... 쉽게 말해, 우리에게 다가오는 사실과 진실은
왜곡된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다만 그것이 각각 서로에게 혼돈스럽게 연결되고, 그래서 법치사회
스크린에 투사되어 생성된 계열화의 양상이 우리에게 왜곡으로 다가오는 것뿐입니다. ... 결론적으로
세상이 작동되는 원리는 <“끊임없이 생성되는 계열화의 연속이다!“> 라고 저는 그렇게 정의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이 글 초반부에 말씀드렸던 <미시적 일반의지>의 진정한 의미이며
이 글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인 것입니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원한다면 선거는 정답이 될수 없다고 얘기했습니다.
선거를 통해서는 권력을 과점하는 집단만이 양산되기 때문에, 차라리 추첨을 통해서 관료를
뽑는것이 훨씬 더 현명한 선택이 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 하지만 저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반기를 들고
한 표를 행사하는 어리석은 시민이 될까 합니다. ]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