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7년 동아시아 외환위기의 전개과정 ]
경제위기는 흐름의 위기입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개별적 위기의 속성들은 자신의 블록(b.lock) 앞에 마치 도미노처럼 다른 위기의 블록을 배치함으로써 자신의 붕괴는 곧 앞의 다른 위기의 붕괴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흔히 <연쇄효과>라고 하는데, 오늘날 경제위기는 이렇게 서로에게 그물처럼 엮여져 누적되어 쌓이다가 결국은 어느 시점에서 인장력의 한계를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경제위기는 <연속성(흐름)>의 기반위에 <인과성>이 결합하여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 때문에 명확한 <시점(구간)>을 지정해 ~ "위기는 거기서부터 여기까지다!" ~ 라고 규정하기에는 위기 이면에서 과거로부터 작용되어온 원인들이 너무나 다양하고 복잡하다 할 수있습니다.
다만 <1997년 (동아시아)외환위기>라는 시기적.공간적 단일성을 고려해 동아시아 외환위기라는 블록을 쓰러뜨리게 만든 바로 그 앞의 블록(B.lock)에 대한 이야기부터 먼저 시작해볼까 합니다.
1997년 IMF 외환위기에 영향을 미쳤던 앞의 블록(B.lock)은 다름 아닌 1990년 초부터 시작된
<일본의 거품붕괴>입니다. ... 1985년 플라자 합의(Plaza Accord) 이후 1990년 초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일본의 자산거품 붕괴, 즉 부동산과 주가가 하락하면서 개인과 기업의 파산을 증가시켰고 이러한 상황은 곧 바로 금융권(특히 은행들)의 대출손실로 이어졌습니다. ... 물론 경제대국 2위의 명성답게 당시 일본의 실물경제 규모는 여전히 거대했지만, 거품이 붕괴되면서 부터는 실질경제 성장률이 평균 1% 수준을 넘지 못하고 계속적인 침체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부동산 가격의 하락으로 수많은 매물들이 지속적으로 시장에 쏟아지면서 일본 은행들도 위기의식을 느끼게 됩니다. 여기에 주가까지 떨어지니 은행들 입장에서는 이제 자본건전성까지 신경써야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 싸게 돈을 빌려와 비싸게 대출해서 먹고사는 <예대마진> 이라는 상업은행들의 가장 기본적 영업 전략에도 차질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상황이 이쯤되니 당시 일본에 투자했던 많은 글로벌 인덱스펀드들이 하나둘씩 일본을 떠나기 시작했고(@일본 주식 매도) 주식과 부동산이라는 자산가격의 하락은 결국 일본 국민들의 소비패턴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일본국민들은 이제 축소된 부(자산가격 하락)와 불안한 미래에 대비하기 위해 저축비중을 급격히 높여갔습니다. ... 결국 고정된 소득에서 저축비중이 증가하니 소비는 자연적으로 줄어들 수밖에 없었고 소비가 줄어드니 물가는 계속적으로 하락하는 전형적인 디플레이션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파산 증가와 이로 인한 은행 및 기타 여신기관들의 대출손실 규모는 점점 더 증가하는 상황으로 가고 있었는데, (지난번에도 한 번 언급했지만)참 특이하게도 일본국민들은 부실화가 진행되는 은행들의 모습을 바로 코앞에서 지켜보면서도 오히려 예금을 더욱더 증가시켰습니다. ... 당시 일본엔 공식적인 예금보호제도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걸 감안한다면 일본국민들의 은행사랑(?)은 참 특별했다고도 할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은행사랑이 아니라 <정부사랑(?)> 이었을 런지도 모릅니다. ... 한마디로 "은행이 망해도 정부가 모두 책임져 줄거다!" 라는 암묵적 기대가 국민들의 마음속에 크게 자리 잡고 있었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평범한 국민들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부실)기업들 조차도 그런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이것이 당시 일본의 거품붕괴 과정 속에서 나타난 일본국민들과 기업들이 정부와 은행을 보는 보편적 시선이었습니다.
하지만 국민들과 기업들이 아무리 은행에 대한 무한신뢰를 준다고 해도 은행들 입장에서는 그들
나름대로의 생존전략을 심각하게 고민해야 했습니다. ... 그래서 이후 일본은행들은 신규대출에
상당한 신중을 기하게 됩니다. 그동안 담보만 설정되어 있으면 속된말로 돈 떼일 걱정은 안 해도
됐었는데 자산(부동산)의 급격한 가격하락은 담보권 자체의 의미를 상실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집을 담보로 대출을 해주더라도 집값이 대출금액 아래로 폭락해 버리면 이미 담보가치는 상실됩니다.
결국 일본은행들의 대출조건(심사)은 예전보다 더 까다로워 졌으며, 은행에서 돈을 빌리려는 기업들은
자신들이 투자하려는 사업에서 확실한 수익성을 확보할 수 있을지를 스스로 점검하게 됩니다. 여기에
일본 국민들 또한 자신이 돈을 빌려 충분히 갚을 수 있다는 확신이 섰을 때만 돈을 빌려야 한다는
인식이 사회 전반에 조금씩 스며들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변화는 예대마진으로 먹고사는 일본은행들 입장에서는 (물론)은행 자체적으로 여신조건을
까다롭게 한 부분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예금은 꾸준히 증가하는데 돈을 빌리려는 개인과 기업들이
오히려 은행들보다 더 신중한 차입자 행태를 보여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 이러한 상황은 결국
거품붕괴 과정과 맞물려 (일본)은행들의 수익성을 악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거품붕괴 이전 일본경제가 최고조에 올랐을 때, 세계 10대 은행 중 무려 7개가 일본은행 이었고,
특히 일본의 최대 투자은행인 노무라의 자본금은 미국의 5대 투자은행 규모를 넘어서기도 했습니다.
당시 넘쳐나는 일본의 자금 유동성은 해외(미국, 영국, 독일, 스위스 등)에 설립된 지사 및 자회사를
통해 해외에 나가있는 일본기업들 뿐만 아니라, 다른 국적의 기업(비일본계)들 에게까지 흘러(대출)들어
갔습니다. ~ 만약 빌려줄 돈이 부족하면 일본은행의 해외 자회사들은 국제 <은행간 시장>을 통해
돈을 차입했고, 이것마저 부족하면 NDF(Non Deliverable Forward) 라는 역외 금융시장에서까지
돈을 빌려와 사업을 확장해 나갔습니다.
하지만 거품이 붕괴되면서 절정에 다다랐던 일본은행들에 대해 외국인 투자자들과 해외 금융기관들의
우려는 점점 더 커져만 갔습니다. ... 외국계 자금들은 일본국민과 기업들처럼 일본 정부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후 외국계 금융기관과 투자자들은 일본은행들에게 돈을 (투자)빌려줄 때
평소보다 더 높은 금리, 즉 일종의 리스크 프리미엄(Risk Premium)을 요구했습니다. 그러자 금융시장의
반응은 즉각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일본 은행들의 수익성은 더 악화되었고, 이를 조금이라도 만회하기 위해 일부 은행들은 자국민들에게
약속했던 평소의 예금금리마저 내리는 방법까지 사용해야 했습니다. ...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시
도쿄의 거의 모든 은행들의 금리가 내려갔습니다. 상황이 여기까지 진행되자 그동안 일본은행들에게
꾸준한 사랑을 보여주었던 수많은 국민들과 기업들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일본은행보다 더 나은
한마디로 <고수익>을 위해 일본을 떠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와중에도 일본의 수출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내수 침체로 수입은 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의 무역수지는 흑자를 이어갔는데 ... 여기서 중요한 점은 당시 꾸준히 증가하던 무역수지 흑자규모가
일본을 이탈하는 자본유출 규모보다 컸기 때문에 이것은 곧 엔화가치를 상승으로 이끄는 요인으로 작용했던
것입니다. ... 그리고 당시 자국의 (장기)경기침체 분위기 속에서 수출에 승부를 걸었던 수많은 일본기업들에게는
엔화가치 상승이 달갑지 않았습니다. ... 그래서 이때부터 상당수의 일본기업들이 경쟁력 확보와 원가절감(노동비용)을
위해 중국과 태국, 말레이시아 등에 본격적인 투자확대를 시작하게 됩니다.
[◆ 당연히 일본의 대규모 자본이 투자된 국가들의 소득 또한 증가하게 됩니다.]
해외에서 자본이 유입되면, 그 나라가 만약 변동환율제 국가라면 그 나라의 통화가치는 상승합니다.
만약 고정환율제 국가라면 해외로부터 들어온 돈은 대외 (준비)자산의 증가와 함께 통화 공급량을
증가시키게 됩니다. ... 예를 들어, 뉴욕의 A라는 투자자가 100만 달러($)를 한국 주식에 투자한다면
한국에 들어온 100만 달러($)는 우선 외환시장에서 원화 10억 원으로 바꿔야 합니다.[1$=1,000원 가정]
100만 달러($)를 팔고 원화 10억을 사는 교환(매매)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 결국 원화 수요가
증가하기 때문에 원화의 가치는 상승하게 됩니다. 그리고 10억 원이라는 원화가 시중에 바로 풀리게
되는데, 이는 <달러($)>라는 외환이 없었다면 애초에 시중에 풀리지 않았을 돈이었습니다.
결국 해외로부터 유입된 자금은 어떠한 형태로든 그 나라의 통화량을 증가시키게 됩니다.
이렇게 해외로부터 투자되는 자금유입과 무역수지 흑자로 벌어들이는 외환이 증가하면 할수록
그 나라의 통화 공급량은 증가하고 이것이 대규모화 된다면 이제 그 나라의 풍부한 통화 유동성은
서서히 부동산과 주식 같은 자산 가격을 끌어올리게 됩니다.
1990년 초에 시작된 일본의 자산거품 붕괴는 일본국민들의 저축비중을 증가시켰고,
부동산과 주가 하락은 일본은행들의 수익성 악화를 초래했으며, 영업 전략도 보수적으로 변화하면서
일본은행들의 자금조달비용을 높이는 결과(@ 리스크 프리미엄)로까지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상당수의 수출 지향적 일본기업들이 본격적으로 해외로 진출하기 시작했으며, 일본 기업이 투자한
국가들은 고용이 증대되면서 국민들의 소득 증가와 함께 통화량 증가로 서서히 자국의 자산가격에
거품을 형성하게 됩니다.
특히 태국과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는 일본기업들이 진출 하면서부터 제조업 생산 증가와 함께
주가가 급격히 상승하게 되었고(@ 일본 진출 이전보다 대략 400~500% 상승), 이 여파는 한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동아시아 국가들의 주가 수준이 큰 폭으로 상승하는데 상당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또한 일본 기업들은 해외에 투자할 때, 납품업체와 은행을 일본에서 함께 묶어서 세트로 진출했습니다.
수출에 올인 하기로 단단히 마음먹었던 상당수의 일본 기업들은 태국과 인도네시아 같은 국가들의
통화가치가 낮다는 것에 은근한 기대를 많이 했었기 때문입니다. [@ 본사는 당연히 일본에 있음.]
반면 일본기업들의 생산기지로 낙점된 태국과 인도네시아 같은 나라들은 상황이 마냥 좋았던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 일본 기업들은 기술유출이 우려되는 핵심부품들은 모두 일본땅에서 만들어서
해외 생산기지로 보내고 그 곳에서는 단순 조립만하는 형태로 제품을 만들었는데 태국과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같은 나라들은 그때까지도 여전히 단순한 생산기지 그 이상의 역할은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생산이 늘어나니 GDP는 크게 증가합니다.)
한국과 대만 싱가포르처럼 기술발전을 위해 끊임없는 노력과 열정을 쏟아 부어 개발도상국 상태를
벗어나려는 의지가 있는 국가들과는 달리 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의 나라들은 당시까지도
국제적 채무국 상태조차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대규모 자금을 보유한
일본 기업들의 해외진출은 해당 국가의 내적 경제상황을 무시한채 점진적으로 그 나라들의 자산가격에
거품을 형성하는 주요한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위기의 블록(B.lock)은 1996년 겨울 태국의 소비자금융회사들에게 직격탄을 날리게 됩니다.
이들 회사들에게서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대출손실이 발생한 것입니다.... 결국 당시 태국에 투자되었던
외국 자금과 태국으로 들어오려고 계획을 세웠던 다른 외국자금들의 발길을 돌리게 만들었습니다.
리스크에 민감했던 해외 자금들은 순식간에 태국을 떠났고, 아직 떠나지 못한 돈들도 서둘러 떠날
준비를 하는 상황까지 가게 되는데 ... 해외로부터 태국으로 유입되는 돈($)의 규모는 점점 더 줄어드는
추세 속에서 서둘러 태국을 이탈하려는 돈($)의 크기(규모)가 이탈속도와 함께 급격히 커지자
태국 중앙은행은 더 이상 바트화를 지켜낼 수 없는 지경까지 가게 됩니다. ... 그리고 이듬해인 1997년
여름을 지나면서 바트화의 가치는 대폭락하게 됩니다.
개도국을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던 한국은 동아시아라는 동일한 공간 안에 갇혀 1997년 겨울 바트화가
감염되었던 <통화가치 하락>이라는 전염병에 감염되게 됩니다.... 물론 당시의 전염병(통화가치 하락)은
한국만 감염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미국 달러($)에 환율이 고정된 중국 위안화와 홍콩 달러를 제외하면
당시 아시아 대부분의 국가들 통화가치가 적게는 30%에서 40%(혹은 그 이상) 까지 가치를 상실한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글로벌 자금들은 부랴부랴 아시아를 탈출했고, 이 과정에서 주가 폭락과 함께 통화가치가 하락하기 전에
달러($)나 엔화를 빌려썼던 수많은 기업들과 은행들이 파산하는 사태가 상당수 아시아 국가들에서
공통적으로 발생했습니다.
외환위기가 발생했던 1997년 당시의 한국의 총 대외채무는 1,600억 달러가 넘었으며,
단기외채는 600억 달러 수준이었는데, 결정적으로 1997년 말까지 상환해야하는 외채가 220억 달러
수준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한국의 외환보유고 통계를 살펴보면 ~ 1997년 말쯤되면
우리나라는 보유외환이 [금(gold)을 포함해도]고작 200억 달러($)를 간신히 넘었기 때문에 ... 온 나라가
달러($)를 구하기 위한 비상사태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당시 정부에게는 "외환관리" 라는
개념 자체가 아예 없었다고 봐야합니다. [1997년 12월, 금(Gold)을 포함한 외환보유고 204억 달러($)]
결국 한국은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게 됩니다 ... 그리고
대마불사라 생각했던 재벌을 상대로 대출영업을 해왔던 금융기관들은 외환위기 이후부터는
기업대출 보다는 가계대출에 더 많은 역량을 집중하며 공격적인 영업을 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100억을 하나의 기업에 빌려주는 것보다, 1,000만원을 1,000명의 개인에게 빌려주는 것이 위험을
분산하는데 훨씬 더 안전하고 효율적이라는 것을 이때부터 직접적으로 느끼기 시작합니다.
사실 한국의 IMF 외환위기의 직접적 원인은 <유동성부족>, 즉 달러($)가 부족했기 때문이었지만,
내적인 측면에서 보면 그 이면에는 정부(정치), 기업, 금융 등의 암묵적인 그들만의 카르텔(관치금융) 같은
좀 더 복잡하고 다양한 요인들이 누증되어온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얼마전 '일본의 거품붕괴'에 관한 글을 올렸었습니다.
이번 글은 그때 글의 속편에 해당한다고도 할수 있는데 ... 사실 여기에
오래전에 얘기했던 '실물적팽창과 금융적 팽창' 까지 함께 보신다면
어쩌면 3부작 될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 하지만 분량이 너무나 많아
나중에 재업할 기회가 있다면 그때 다시 한번 올려보겠습니다.
사실 IMF외환위기 관련해서는 이미 이슈인에서 한국의 내부적 상황만 고려한
내용으로 여러번 얘기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엔 외부 요인에 대해서 얘기해 본것입니다.
엊그제 삼성관련 이야기를 썼다가 많은 분들이 분량도 많고 글이 샛길로 샌다고
질타를 하셨습니다. ... 새겨듣겠습니다. 다만 제가 올리는 글은 경제나 금융분야를
전공하신 분들이 아닌, 일반적인 분들의 시선에 최대한 맞추려고 하는것입니다.
그러다보면 전공자 분들이 보시기에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부분까지
언급하게 되어 샛길로 새는 것처럼 보일수도 있을 겁니다. ... 충분히 공감하고 새겨듣겠습니다.
장문의 글 임에도 항상 이해해주시는 운영자님과 여러 이슈인 분들에게
항상 감사한 마음입니다. 더불어 부족한 내용이라도 응원주시는 분들이 있어서
제가 이슈인에서 계속 글을 올릴수 있는 동력이 되고 있습니다.
부족한게 많지만, 하나의 글을 올리때마다 언제나 정성을 다한다는 점만 알아주신다면
더이상 바랄게 없을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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