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8월 20일 일요일

◆ 미국 남북전쟁과 이후의 (미국)산업발전 이야기 [by 물파스]

[◆ 미국 남북전쟁과 이후의 (미국)산업발전 이야기 ]


(오래전 이슈인에 한 번 올렸던 글입니다. ... 당시 미국의 시대상황과 함께
거대 자본가들의 탐욕이 어느정도였는지, 또 그들은 어떻게 그렇게 거대한 부(富)를
형성할수 있었는지가 글의 중심적 내용입니다. )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미국은, 독립 초기에는 영국의 과잉 생산물을 해소할 하나의 작은 시장으로서
기능했었습니다. 하지만, 1830년대 부터는 미국의 제조업과 해운업은 상당한 발전을 이루게 되었고
몇몇 분야에서는 영국과 경쟁을 할수 있을 정도의 수준높은 발전을 이루게 됩니다 ... 또한 이러한
발전은 미국으로 이민을 왔던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기회이자 희망이 되었습니다 ... 다시말해 특별한
자산이 없어도 성실하게 일한다면 누구나 충분히 성공할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다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미국의 "북부"에서만 가능한 얘기였습니다.

당시 미국의 북부는 공업이 발달했고, 남부는 면화와 담배농사를 짓는 "플랜테이션(plantation)" 이라는
대규모 농장들이 발달했었습니다. 그리고 북부는 노예(흑인)제도 폐지를 주장했었고 ... 많은 일손이
필요한 대규모 농장이 발달했던 남부에서는 노예제도는 계속 유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공업이 발달하고 수많은 자본주의적 공장들이 즐비했던 북부에서도 기계가 쉬지않고 가동되려면
노동력의 자유로운 이동이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 결국 북부의 노예제 폐지 주장은 북부사람들이
인도주의(人道主義)적 가치관이 투철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이면에는 자본주의적 필요가 존재했기
때문입니다.[북부입장에서는 노예제 폐지로 저렴한 (노예)노동력의 공급 증가를 기대할수 있었음]

그리고 북부와 남부는 무역관계에서도 마찰이 있었습니다 ... 북부는 영국으로부터 자신들이 생산한
상품을 보호하기 위해서 보호관세를 주장한 반면, 남부는 면화 등의 원료를 영국으로 수출하면서
고품질의 영국산 공업제품들을 수입하기 위해 자유무역을 주장하게 됩니다 ...

보호관세 정책을 관철 시키려면 주(州) 차원을 넘어선 연방의 강력한 힘이 필요했습니다 ... 그래서
북부의 공화당은 "연방주의(聯邦主義)"를 주장하게 됩니다 ... 그러나 남부의 민주당은 노예제 폐지에
대한 결정과 권한은 각각의 주(州)에서 결정할 문제이기 때문에, 주(州)의 권한을 넓게 해석하고,
연방정부의 권한을 좁게 해석하자는 소위 "주권주의(州權主義)"를 주장하면서 북부와 남부의 대립은
점점더 심해지고 있었습니다.

1860년 노예제 폐지를 주장한 공화당의 링컨이 미국의 16대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그러자 남부의
7개주 대표가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에서 결집해 미연합국(CSA)을 결성해 미합중국(연방)에서
분리와 독립을 선언합니다. 이에 대해 링컨은 어느 주도 연방으로부터 분리.탈퇴할수는 없다고 하며 ...
남부 7개주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 결국 남부와 북부는 전쟁하게 됩니다 [@ 남북전쟁]

해군력에서 압도적인 힘의 우위에 있던 북부연합이 해상을 봉쇄하자 면화수출 및 기타 물자의 수입이
막혀버린 남부연합은 무력해졌고, 결국 1863년 미시시피강 유역의 마지막 요새를 빼앗기고,
1865년 사상자 62만명에 전비 50억 달러($)쓰고 남부연합은 전쟁에 패하게 됩니다.

1790년대에 목화(면화)송이에서 씨만 뽑을수 있는 조면기(繰綿機)가 개발되어 목화의 세척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졌는데 ... 이로 인해 목화공장의 수도 늘어났고, 공장의 수익도 하루가 다르게
늘어갔습니다 ... 하지만 이것이 가능할수 있었던 것은 바로 값싼 노동력의 "노예경제"가 존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남부는 한때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전쟁에서
패한후 거의 모든것을 잃은 남부는 미국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북부는 전국에서 정치적, 경제적 입지가 더욱 견고해졌고, 또한 북부지역에는 해마다
평균 100만명이 넘는 이민자들의 유입이 시작되었습니다. 특히 북부의 산업자본가들은 공화당 정권 아래서
최고의 성장을 이루어가고 있었습니다 ... 1869년에는 북부와 서부를 잇는 "대륙횡단철도"가 개통되면서
어마어마한 시장을 얻게된 미국의 공업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나갔습니다.
[◆ 남북전쟁 당시 북부의 산업자본가들, 즉! 북부의 기업가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부까지 속였습니다. 불량 화약과 포탄, 부실한 식량, 접착제로
대충 만든 전투복과 군화 등을 공급하고 정가의 수배에서 수십까지 받아내기도 했습니다.]

" 배짱만 두둑하면 그 무엇이라도 원하는 값에 정부에 팔수있다! " - 제임스 피스크(사업가, 1835~1872)

끊임없이 유입되는 인구(이민자)와 거대한 시장, 최고수준의 공업 생산능력 및 통제하기 힘들정도로
커져버린 산업자본 등에 의해 ... 펜실베이니아와 오하이오에서는 제철업, 미시간의 자동차산업,
텍사스와 캘리포니아의 석유산업 등이 발전하면서 ... 1890년대가 되자 미국은 영국을 제치고
세계 제일의 공업대국으로 자리잡게 됩니다.(당시에도 자본가와 노동자간의 격차는 매우 심했었음)
하지만, 서부 프론티어(frontier) 소멸로 한계에 직면한 미국은 시선을 조금씩 해외로 돌리게 됩니다.

이렇게 미국이 남북전쟁을 거치면서 거대한 공업대국으로 성장해가던 시기에,
다른 유럽 선진국에서는 서서히 자유무역보다는 보호무역주의가 국제질서로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영국의 산업혁명은 유럽전역은 물론 북미대륙까지 혁신기술 및 산업자본주의를 전파하였고, 이과정에서
선진국들의 과잉생산된 상품은 해외시장 개척의 필연적 동인(動因)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
자본주의의 힘을 알게된 선진국들은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계속 유지되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불황의
위험을 없애야만 했습니다 ... 다시말해 과잉생산품을 해결할 방법과 그동안 축적된 잉여자본의 새로운
투자처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철도와 해운, 그리고 냉동기술의 발달로 미국과 남러시아의 곡물, 북미와 아르헨티나의 육류 등이
상당히 저렴하게 대량으로 유럽에 공급되면서 유럽의 농업은 매우 큰 타격을 입게 됩니다. 또한
산업혁명의 혁신적인 기술과 동력은 공업제품의 과잉생산으로 이어져 1873년부터 1890년 중엽까지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에서는 무려 20 여년(1873~1896)의 장기불황이 진행 되었습니다 ... 따라서
이 시기에는 각국이 자국산업을 지키기위해 보호무역주의를 펼쳐나가게 되었고,
기업들은 합병과 카르텔[Cartel 기업연합] 등으로 위기를 벗어나려고 했습니다 ... 또한 영국은 대표적인
기간산업 중 하나였던 철강산업에서 미국과 독일에게 추월당하자 위기의 해법을 투자금융업과 함께
제국을 확대하는 것에서 찾으려고 했습니다.

장기불황(1873년~1896년) 때문에 여러 열강들에게는 상품과 자본의 해외진출이 상당히 매력적이고 가치있는
일들로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 여기에 기업들과 금융자본가들은 해외에서 그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정부권력에 많은 부분을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 그리고 만약 어떤 지역이 당장의 이익은 없을지라도 인접한 지역
혹은 멀리 떨어진 중요한 지역을 위한 교두보나 전진기지로서의 가치가 충분하다고 판단되면 열강들의 주요한
쟁탈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낙후되고 후진적인 지역들이 열강들에게 제국통합의 유혹적 대상이 될수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경제적인 요인이 컸기 때문이었습니다. [◆ 제국주의, 1차 세계대전 ]

그런데 제국주의 정책에는 경제적인 요인도 중요했지만, 다른 여러 요인들도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
그중에는 뒤늦게 통일을 이룬 독일이나 이탈리아 처럼 식민영토가 국가의 위신을 높여준다는 호전적인
민족주의 의식이나 ... 아니면 미개한 후진사회에 선진문명을 전한다는 인도주의와 함께 기독교 복음을
전파한다는 선교사업 등이 그것입니다.

"유색인종을 지도하고 개화하는 일은 백인의 부담(White man's burden)이다!" - 키플링(kipling 영국시인)
"유럽과 북아메리카는 문명을, 그밖의 지역은 야만을 대표한다!" - (당시 제국주의 가치관)

제국주의가 유럽대륙을 집어삼키고 있을때 ... 식민지 쟁탈경쟁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던 미국은
영국으로부터의 독립과 남북전쟁이 마무리되고, 여기에 대륙횡단철도가 탄생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됩니다. 더불어 이러한 미국은 성장뒤에는 항상 대기업 이라는 존재가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철도사업은 오늘날의 미국경제가 만들어지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 1860년 철도 총연장길이 - 3만마일(약 48,000km)
@ 1910년 철도 총연장길이 - 24만마일(약 38만 4000km)

1910년대에 미국철도의 총길이는 무려 40만km에 가깝습니다 ... 미국 동부에서 서부까지의 길이가
대략 5,000km(뉴욕-로스앤젤레스) 정도인데 ... 아무리 미국 땅이 넓어도 1910년에 40만km의
철도길이는 미국 동.서부 거리의 약 80배에 달하는 길이입니다.(필요이상의 길이인 것은 분명해보임)

당시 미국 연방정부와 주정부에서는 대륙횡단철도를 비롯해 철도건설의 필요성을 충분히 공감하고
있었지만, 사업비용 자체가 워낙 천문학적인 금액이 되다보니 쉽게 나설수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정부는 철도사업에 민간기업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서 각종 혜택을 주게됩니다.

연방정부와 주정부는 철로 주변의 땅을 무상으로 임대해주었고, 민간기업의 자금조달 능력이 떨어지면
대출과 각종 보조금 형태로 수익을 보전해 주기도 했습니다 ... 하지만 연방정부는 민간기업의 사업비가
제대로 철도공사에 사용되었는지는 정확히 확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 더구나 철도사업비 책정에
대해서 정부가 민간기업에게 지급해 주어야하는 조건중 하나가 바로 거리당 비용이었기 때문에,
민간기업 입장에서는 직선코스로 1km면 충분할 지역에 곡선이나 지그재그 처럼, 철로를 최대한
연장하여 5km, 10km 처럼 ... 각종 편법과 불법으로 정상적인 철도사업비의 수배에서 수십배를 부풀려
정부에게서 받아냈습니다 ... 또한 당시의 철도는 지역과 지역간의 노선이 대부분 하나였기 때문에,
기업들은 기차요금을 자신들이 마음대로 정하여 터무니없는 요금을 책정하기도 했습니다(@ 자연독점)

그러나, 철도는 미국경제를 거대한 단일시장으로 만들었고, 열차충돌 없이 수많은 화물들을 전국으로
운송하기 위해서 관리업무와 인력활용에 있어서 상당한 발전을 이루기도 했습니다. 특히 철도사업이
날이갈수록 그 규모가 커지자 자금관리와 회계, 그리고 열차운행의 효율적인 통제를 위한 정보시스템
같은 근대적인 경영기법이 이 시기에 개발 되었습니다 ... 더불어 거대해진 철도사업의 규모만큼이나
소요되는 설비투자 자금도 지속적으로 늘어났는데, 정부의 대여금이나 보조금에도 한계가 다가오자
철도회사들은 주식을 발행하기 시작했습니다 ... 사실 뉴욕증권거래소는 철도회사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겁니다. 사실 초기에는 거래가 미미했으나 1850년대부터 철도가 붐을 일으키자
그 전까지만 해도 백주,천주 단위로 거래되던 주식이, 십만주.백만주 단위로 상승하게 됩니다 ... 그리고
대륙횡단철도(1869년)가 완성된후, 1890년대 까지는 월스트리트는 거의 철도회사의 주식만이 거래되고
있었습니다 ... 물론 이러한 철도열풍 뒤에도 투기와 과잉경쟁에 의한 수많은 기업들의 파산이 있었는데
... 이 시기에(1873년 ~ 1900년) 미국전역에서 거미줄 같은 협력체제로 운영되던 철도회사 중에서
거의 절반에 가까운 700 여개의 철도회사가 부도를 내기도 했습니다.
[◆ 1898년 미국 상장주식의 60%가 철도회사 주식이었음 ... 1914년 40% 수준]

그렇지만, 당시 철도회사의 대주주들은 확실한 경영권 확보를 위해 실질적으로 자금조달의 대부분을
주식이 아닌 차입으로 해결했는데, 이를 증명하듯 1913년말 철도채권 총액은 112억 달러($)였던 반면,
보통주 시가총액은 72억 달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더불어 여기서 보통주 시가총액 72억 달러($)는
큰 의미가 없었습니다. 당시의 철도회사 주식발행 자금의 대부분은 다른 철도회사의 주식을 사는데
사용되었는데 ... 이것은 상당수의 철도회사가 상호출자 관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 따라서 실질적인
필요자금은 대부분 은행을 통한 차입으로 충당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철도회사들의 자금조달이 차입 형태로만 이루어지자, 가뜩이나 주식에 대한 수요기반이 넓지
않았던 상황에서 자금조달에 점점 어려움을 느끼던 철도회사들은 해결방안을 "합병"에서 찾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에 합병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사람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JP모건, 코넬리어스 밴더빌트(C. Vanderbilt), 록펠러(John D. Rockefeller) 였습니다.

특히 큰손들에 의해 합병이 이루어진 후인 1890년대의 철도회사들의 위상과 규모는 실로 어마어마 했습니다.
뉴욕이나 시카고에 전력과 수자원, 난방등을 공급하는 회사들보다 위상이 높아졌고,
1891년 미국의 육군, 해군, 해병대를 포함한 총 병력이 약 4만여명 정도였는데 ...
당시 펜실베이니아 철도주식회사의 직원은 약 11만명 이었습니다 ... 또한 당시 미국의 국가채무 총액이
약 10억 달러($) 규모였는데, 펜실베이니아 철도주식회사의 총자본 규모는 약 8억 4천만 달러($)였습니다.

더불어 규모의 경제로 거대기업이 된것은 철도뿐만이 아니였습니다 ... 통신판매, 철강, 담배, 은행, 도축,
농기계제작 등의 기업들 규모도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이었고 어떤 산업분야는 하나의 기업이
전체를 장악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 그리고 거대 철도기업은 미국 경제의 뼈대를 세우는데 큰 공헌을 했으며,
이어서 철도는 전화와 전신을 확보해 체신사업의 기초를 세웠고, 미국전역을 거미줄처럼 엮어서
물류의 엄청난 발전을 이끌어 냈습니다. 예를들면, 필라델피아에서 시카고로 화물을 보내면
예전에는 20일정도 소요되던 시간이 1880년대에는 2~3일로 단축 되었습니다.

철도회사의 합병(규모의 경제)에서 긍정적 효과가 하나둘씩 나타나자, 1880년에서 1900년대 초까지
미국에서는 그야말로 합병바람이 전 산업분야에서 불게되었고, 그 결과 산업전반의 대부분을
약 50 여개의 대기업이 차지하면서 산업을 독점하게 됩니다.

◆ 캘리포니아의 철도왕 릴런드 스탠포드(Leland Stanford) - 스탠포드대학 설립
◆ 시카고의 통신판매업자 리처드 W. 시어스(Richard W. Sears)
◆ 뉴욕의 철도왕 코넬리어스 밴더빌트(C. Vanderbilt)
◆ 노스캐롤라이나의 담배왕 워싱턴 듀크(Washington Duke) - 아메리카담배, 듀크대학 설립
◆ 피츠버그 철강왕 앤두루 카네기(Andrew Carnegie) - 나중에 JP모건과 함께 US스틸설립
◆ 뉴욕 금융가 앤드루 멜런(Andrew Mellon)
◆ 유에스철강 U.S. Steel - 설립당시(1901년) 시장점유율 65% 수준, JP모건, 카네기 참여.
◆ 제너럴일렉트릭 GE - 에디슨 종합전기와 톰슨휴스톤 전기회사가 합병하여 탄생됨
◆ 미국전신전화 AT&T /
◆ 미국농산물 United Fruit
◆ 스탠더드오일(Standard Oil) - 1880년, 미국내 석유 유통의 약 95% 차지

합병의 중심에는 앞서 언급했듯이 JP모건과 밴더빌트, 록펠러가 있었는데 ... 특히 록펠러의
규모의 경제에 대한 생각은 상당히 적극적 이었습니다.

오하이오 주에서 정유사업을 시작하고 얼마되지 않아서 록펠러는 클리브랜드에 있던 50개의 정제소와
피츠버그에 있던 80개의 정제 사업장을 매입합니다. 또한 운반용구를 만들기 위한 목재소와 운송에
필요한 배까지 사들이며, 사업을 대규모로 확장해 나갔습니다 ... 그리고 1870년대(1873~1896) 시작된
세계적인 장기불황의 시기에는 사업을 더욱더 확장하기 위해서 스탠더드오일(Standard Oil) 이라는
주식회사를 설립했고, 1882년에는 스탠더드오일 산하에 있던 군소기업 40여개를 하나로 묶어, 엄청난
규모의 "트러스트(Trust)" 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 [◆ 트러스트(Trust) - 카르텔보다 강력한 기업집중의
형태로서 시장독점을 위하여 각 기업체가 개개의 독립성을 상실하고 합동하는 것을 말함]

뉴욕 브로드웨이 26번가에 본사를 둔 "스탠더드오일트러스트" 는 진정한 의미의 규모의 경제체계를
만들게 되었으며, 이는 곧바로 갤런당 1.5센트의 정제비용이 0.5센트로 떨어지는 효과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스탠더드오일(트러스트)는 시장을 거의 독점하게 됩니다 ...

우리는 보통 독과점을 얘기할 때, 흔히 공급(판매자)의 독점을 말하곤 합니다.
그런데 스탠더드오일은 달랐습니다 ... 원유를 사다가 정제하여 등유, 경유 등으로 판매할 때,
록펠러는 판매자(공급자)의 독점적 지위를 활용하여 가격을 맘대로 정했을뿐만 아니라,
원유를 구매할때도 그 원유를 사줄 구매업자가 록펠러의 스탠더드오일이 거의 유일했기 때문에,
스탠더드오일은 한마디로 <"공급의 독점"인 동시에 "수요의 독점"> 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19세기말 미국의 합병(트러스트)의 바람은 록펠러의 석유와 밴더빌트의 철도 뿐만아니라
뉴욕 월스트리트의 거대 은행가였던 JP모건도 합병의 바람에 올라탔었는데 ... 이것은 금융(은행)자본이
본격적으로 산업과 결합하여 트러스트를 탄생시켰던 것입니다. 당시 모건이 만들었던 초대형 기업들중
대표적 기업들이 바로 유에스철강, 제너럴일렉트릭, 뉴욕센트럴철도 였습니다 ... 이중에 특히
유에스철강(U.S. Steel)은 약 200 여개의 소형철강회사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것인데 ... 설립당시(1901년)
시장에서의 회사가치는 약 14억달러($)로 평가되었고 ... 이 수치는(14억달러) 당시의 미국 통화량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규모였으며 ... 14억달러($)를 GNP기준으로 오늘날의 현재가치로
환산해보면 무려 5,000억달러($) 달하는 금액이 되며, 종업원수는 약 25만명 정도였습니다.
[◆ 참고로 당시의 미국에는 중앙은행이 없었기 때문에 JP모건 같은 일부 은행가들의
영향력이 엄청났던 시기였습니다 ...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는 1913년 12월에 만들어짐]

거대기업(트러스트)에 의한 대량생산과 거대기업에 의한 통제가 혼합된 경제체제는 ... 거대기업이
말 그대로 엄청나게 거대한 기업으로 성장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 또한 거대기업이 이룬
부의 크기는 숫자가 증명하고 있었습니다 ... 1877년 철도왕 밴더빌트가 사망할 당시의 재산은
무려 1억달러($)가 넘었었고, 비슷한 시기에 록펠러도 억만장자 반열에 올라서게 됩니다 ... 이 수치가
어느정도로 큰 금액 이었는지는 1889년에 메사추세츠 주가 걷어들인 세금이 고작 700만달러($)
였다는걸 감안하면 잘 알수 있습니다 ...

이러한 엄청난 부와 권력은 경제권력이 정치권력(정부)과 손을 맞잡았기 때문이기도 했었지만,
무엇보다도 기업의 독점적인 영향력과 통제권한, 그리고 수많은 노동자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 그래서 당시의 사람들은 부와 권력이 이렇게 소수(집단) 에게만 집중되고
세습되던 것을 비난하며 이들에게 소위 "강도 귀족(Robber Barons)" 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더불어 남북전쟁 이후에 미국의 경제가 농업에서 본격적인 산업자본주의 경제로 변해가는 과정에서
사회가 모두 물질의 탐욕에 사로잡혀 부패와 불합리가 만연하던 시대를 빗대어 ... 우리에게
<톰소여의 모험> 으로 유명한 작가 마크 트웨인(Mark Twain) 이 1873년 발표한 풍자소설
"도금시대(The Gilded Ag-A Tale of Today)" 에서 마치 금빛으로 도금한 덕분에 겉만 번지르르한
허황된 시대라고 비판하며 "도금시대" 라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었습니다 ... 그리고
이후에 도금시대를 미국 현대문학의 정점에 올려놓았다는 평가를 받았던 작품이 바로 그 유명한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 였습니다.

부와 권력을 독차지한 소수(집단)들이 사회적 책임을 느끼지 않았던건 아닙니다 ... 학교 및 도서관,
종교단체 등에 상당한 기부를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전에 부를 거머쥔 이들 소수의 강도귀족들은
자신들이 강도처럼 쌓아올린 부와 권력에 대한 정당성과 일종의 명분(?) 꺼리를 당시(1880년대)에 유행 했으며
또 미국에 막 수입되었던 소위 "사회진화론(Social Darwinism 소셜 다윈이즘)" 에서 찾게 됩니다.
[◆ 제국주의 시대, 유럽 열강들의 식민지 정복에 대한 정당성도 대부분은 "사회진화론" 에서 찾게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사회진화론(Social Darwinism 소셜 다윈이즘), 혹은 "사회적 다윈주의"로 명명되는 이 사상은
한마디로 1859년 찰스다윈이 주장한 "진화론" 에서 아이디어를 차용한 것입니다 ... 다윈 생물학의 핵심은
바로 "적자생존(適者生存)" 입니다 ... 다윈의 진화론에 의하면 모든 동.식물은 실제로 살아남을수 있는 숫자보다
훨씬 더 많은 자손들을 생산합니다(자연의 다산성) ... 그러나 어른의 모집단의 크기는 일정하기 때문에
자손들은 생존을 위해 서로가 경쟁을 하게 됩니다(생존경쟁) ... 여기서 생존에 필요한 조건에 맞게 적응하기 위해서
동일한 종(種)에 속하는 개체들 간에도 조금씩 차이가 생겨납니다(@ 종의 변이)

그래서 최종적으로는 환경에 맞게 가장 잘 적응하고 변화(변이)된 개체만이 살아남아 보존되는 것입니다(@ 자연선택)
[◆ 후일 사회학자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가 다윈의 자연선택 이라는 용어 대신에 "적자생존" 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게 됩니다.]

이렇게 스펜서 같은 사회학자들은 다윈의 진화론을 "사회의 진보(진화)" 를 증명하는 하나의
과학적 근거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 당시 유럽열강들의 제국주의 시대는 바로 사회진화론에 대한 담론이
절정에 달한 시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월한 인종이 열등한 인종(식민지)을 대체할 것이며, 우수한 문명이 후진적 사회를 개선시킬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진화론은 자본주의 사회를 정당화 시키는데도 한 몫을 하게됩니다.
인간 사회에 불평등은 사회의 체제나 제도 때문이 아니라, 바로 "자연의 속성"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가난한 노동자는 자본가(부자)의 착취 때문이 아니라 노동자들 자체가 열등한 개체들이며
부자들은 그러한 환경(자본주의)에서 가장 완벽하게 적응한 사람들 이라는 것입니다(적자생존)
결국 부(富)와 가난은 자연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 바로 <"사회진화론(Social Darwinism)">의 논리입니다.

한 때 빨간색 스트라이프 무늬의 티셔츠를 입은 '월리(Wally)>'라는 청년을 찾는것이 유행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 대도시, 대학, 놀이공원, 해변가 등 여러 다양한 국가와 장소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며
자신의 (평범한)일상을 즐기는 월리를 찾는 일은 그렇게 쉬운일이 아니었습니다.

왜? '월리'를 찾는것이 그렇게 힘들었을까? .... ... 지금 생각해보면
이유는 너무나 단순합니다. 바로 < "월리가 아닌 사람들이 너무 많다!" >는 것입니다.

마르크스는 혁명 초창기에 급진적 혁명론을 주장했던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다음처럼 말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자본주의 과다가 아닌 부족에 처해있기 때문에 고통스럽다" - 마르크스>

마르크스가 분석했던 사회역사의 이행단계, 즉
[(노예제) => (봉건제) => (자본주의) => (사회주의) => (공산주의)] 에서
러시아와 중국은 자본주의 단계를 충실히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주의 혁명'이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2017년을 살아가는 오늘날의 대부분의 세계인들은 이제는 '자본주의의 과다' 정도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자본주의의 포만> 정도는 느끼고 있을거라 생각됩니다. ... 월리가 아닌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것처럼
핵심은 <자본주의가 충분히 많다.>에 저는 방점을 찍고싶습니다.




[@ 우리는 모두가 자유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당당히 주장할 수 있는
시대에서 살아간다고 얘기하지만, 어쩌면 인종을 초월한 변형된 "소셜 다윈이즘"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 편안한 주말 되십시요 ]

-

댓글 없음:

댓글 쓰기

부동산과 경제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