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3월 16일 목요일

◆ 병렬적 근친상간의 시대 (by 물파스) [+덧 이슬처럼]

[◆ 병렬적 근친상간의 시대 ]



세계적인 (사회)철학자이자 정신분석가인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자신의 저서 <여성과 남성은 왜 서로 투쟁하는가>에서 근친상간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합니다.

[@ 근친상간의 사랑은 여기서 상징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 사랑은 “이방인”을 사랑할 수 없는 무능력을 상징한다.
다시 말해 우리와 혈연관계나 이전부터 친밀한 관계가 없는
“친하지 않은” 사람들은 사랑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이는 곧
“이방인”에 대한 증오와 불신, 즉 외국인 혐오증(Xenophobia)과
일치한다. ... 근친상간은 태내의 따스함과 안전을 상징하고
성숙한 인간의 독립성과는 상반된 탯줄에의 의존성을 상징한다.
타인의 진정한 마음을 알고 관계를 시작할 수 있을 때에만
스스로를 인간으로서 경험할 수 있고, 자기 자신을 인간 개체로서
경험할 때에만 사람은 “이방인”을 사랑할 수 있다.
제한된 의미에서의 “근친상간”의 단어를 우리는 가족 일원들 간의
성적 관계라는 의미에서 극복했지만, 우리 모두는 아직도
(성적인 의미가 아닌 성격학적 의미에서의)근친상간을 범하고 있다.
“이방인”, 즉 다른 피부색깔이나 상이한 사회적 배경을 가진 사람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종 차별적이고 국수주의적인 편견은
우리 현문화의 근친상간적인 요인들의 증후이다.

우리 모두가 (누구나 할 것 없이)이방인을 우리의 형제로
생각할 뿐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고 받아들일 수 있을 때만
비로소 우리는 근친상간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 ]

<여성과 남성은 왜 서로 투쟁하는가. 188페이지/ 에리히 프롬/ 부북스>


프롬은 책에서 근친상간의 의미를 좁게는 외국인 혐오(Xenophobia)에서
넓게는 인류애로까지 확장하여 이것의(근친상간) 극복을 유도하고 있습니다. ... 그런데
저는 프롬의 견해에 대한민국 현실을 얹혀 근친상간의 외형을 좀 더 넓혀보겠습니다.

우리사회 부와 권력의 대부분을 차지한 소수의 독점적 기득권 세력은 <뜨거운 아이스크림>처럼
형용 모순적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부든 권력이든)어쨌든 많이 가졌지만, 소수입니다.
존재 형태 자체가 모순적이기 때문에 이들은 프롬의 정의처럼 “이방인(?)”을 사랑할 수 없는
그들만의 세계에서 지금까지 자폐적으로 근친상간을 즐기고 있었던 건 아닐까 생각됩니다.

더 절망적인 건 이들은 자신들의 근친상간을 극복할 의지도 없을뿐더러, 그럴 이유 또한 없기 때문에
저들의 근친상간의 유희는 소외된 다수가 이제 그만 멈추도록 유도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사회는 소수의 기득권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를 사방에서 근친상간을 할 수 밖에 없는
구조속으로 점점 더 강하게 밀어 넣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근친상간은 소수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공공재적 성격으로 변질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프롬은 말합니다.
<자유로운 인간은 필연적으로 불안하고, 사고하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불확실하다 – 프롬>

우리는 더 확실한 안정을 원하며, 더 작은 책임을 원하고, 그렇기 때문에 더 강력한 권력에
의지하려 합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을 이루는 방법은 나와 (사회적)피가 다른 타인을 근친상간의 구조에서
쫓아냄으로서 안도감을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 그래서 저는 이러한 우리사회의 왜곡된 구조,
혹은 병리현상을 이렇게 표현해 봅니다.

< 안으로 소수화 되는 다수들의 병렬적 근친상간 ~ ! >

이것은 달리 말하면 사회 구조 조차도 형용 모순으로 치닫고 있다는 뜻입니다.
세계적인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 또한 프롬이 통찰했던 바로 그 근친상간을 발견합니다.

[@ 우리는 현재 학생들의 불만을 철저히 분석하고 연구해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슬프게도
이런 거리 시위가 끝나고 그들의 “새로운 가치”가
더 이상 TV 시청률을 높이지 못한다면 이는 곧바로 잊혀 질 것이다.
무엇인가를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잊어버리는 것은
유동적인 현대사회의 지울 수 없는 흔적이다. 이런 고통 때문에
우리는 대중의 분노가 폭발할 때 이런 문제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이해하기보다 각각의 사건을 사무적으로 다룬다.]

<이것은 일기가 아니다. 127페이지/ 지그문트 바우만/ 자음과 모음>

학생들의 불안이 거리로 쏟아져 나올 때, 방송은 자사의 광고 매출과 연계해 주파수를 할당합니다.
방송은 시청률이라는 그들만의 안정된 탯줄을 위태롭게 부여잡고 근친상간을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저의 예전의 경험을 통해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 2년 전, 구청에 볼일이 있어 잠시 들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구청건물 앞에 큰 트럭 한 대가 서 있었고, 그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긴 줄을 서서
무언가 순서를 기다리는 것 같았습니다. 알고 보니 기초생활수급자 같은 형편이 어려운
분들에게 구청이 사회단체로부터 기부 받은 식품을 나눠주는 푸드마켓 행사였던 것입니다.
참치 캔과 고 추장, 된장, 조미료 등 일상에서 꼭 필요한 아주 기본적인 식품을 나눠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 광경을 지켜보던 어떤 나이 많은 아주머니 두 분이 "우리는 왜 안주냐?" 고
구청직원에게 따져 물었던 기억이 납니다. 식당일부터 간병인 까지 평생 일만 열심히 하며
살아왔는데 나라에서 양말 한 켤레 주는 꼴을 못 봤다며, 강한 불만을 드러낸 것입니다.
사회가 분배를 강조하면 극도의 거부감을 드러내며, 그 즉시 "빨갱이"를 소환하던 분들이
정작 분배의 현장을 목격하자 (분배에)거부감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분배받지 못하는
현실에 분하고 억울하다는 듯, 역설적 히스테리 반응을 보였던 것입니다. ~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강요된 희생에 익숙해진 삶에서 그분들에겐 "분배"는 어쩌면 너무나 낯선 단어일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

그때 구청에서 목격했던 두 분의 아주머니에게는 나눔의 혜택을 받던 기초생활수급자 분들이
역겨운 이방인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즐겨야 할 근친상간의 유희에 이방인들이 거침없이
침범한 것이었을 겁니다.

간신히 정규직으로 승격된 노동자는 이후 자신들(정규직)만의 근친상간 유희에 빠져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이방인으로 취급하기 시작합니다.

반드시 소방서 필요한 지역주민들은 <집값> 이라는 근친상간적 자본논리에 굴복해 소방서 건립을
이방인 취급해 버립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가 함께 모여 화합하며 살면서 사회적 평화를 도모하자는 소셜믹스(social mix) 라는
주거정책에 극렬히 반대하며, 임대아파트 주민들을 자신들의 근친상간에 방해되는 또 하나의
이방인으로 취급하기도 합니다.

시대는 좌.우로 나뉘고, 지역으로 나뉘며, 남.여로 나뉘고 있습니다.
더 이상 나뉠게 없을 때까지 우리는 시나브로 소수화 되고, 자폐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독일 카를스루 조형예술대학의 한국인 한병철 교수는 자신의 저서
<피로사회/(문학과 지성사)>의 첫 장 첫줄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시대마다 그 시대의 고유한 질병이 있다. 그래서 이를테면 박테리아적이라고 할 수 있는 시대도 있는 것이다"

저는 한병철 교수가 말한 우리 시대 <고유한 질병>이 바로 프롬이 말한 <근친상간>과 궤를 같이
한다고 생각됩니다. ... 현재 각자의 위치에서 점점 더 자폐화 되어가며 소수화 되어가는 현상은
어쩌면 가장 뚜렷한 <박테리아적 현상>일 것입니다. ... 병든 것이죠! ~ 수많은 다수가 연대하지
못하고 점점 더 소수화, 아니 점점 더 고독을 지향한다는 뜻입니다. 결국 우리는 더 이상 근친상간에
방해되는 이방인들이 없어질 때까지 안으로 자폐화 되어가다 천만(수십, 수백만) 인구가 사는
사막 같은 도시에 홀로 남겨지게 될 것입니다.

기득권을 비판하면서도 기득권을 지향하는 형용 모순의 시대! ~
세대와 지역, 학벌, 성별, 직업, 외모, 정치성향 등 나의 삶과 맞닿은 모든 요소를 횡단하는
도처에 산재한 병렬적 근친상간의 광경을 하루도 빠짐없이 우리는 지켜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넘치는 근친상간의 인플레는 자본주의 논리와 맞물려 프롬이 규정한
제노포비아(Xenophobia)적 근친상간의 한계가 변증법적으로 다양한 근친상간을 유형을 양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과거부터 근친상간은 조용히 진행돼오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한때 드라마 미생이 전국적인 화제가 됐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드라마는 주인공 장그래에게 오늘날 한국사회가 생산한 모순되고 휘발성 높은 ‘청춘’의 모습을
그대로 투사시켰습니다. ... 2017년 한국의 청춘들은 스스로 청춘의 옷을 입었다고 생각한 순간
그 옷은 모두 허공속으로 사라져버립니다. 청춘인건 분명하지만 청춘을 즐기기엔 한국사회에
더 이상 낭만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 그래서 스스로 청춘이라 느끼는 순간 이미 청춘이
아닌 것입니다. ... 휘발성에 의해 남은 건 오직 병렬적 근친상간뿐. ~ ~

장그래가 생산되는 사회 구조보다 <몇 개의 장그래>처럼, 숫자가 더 부각되는 사회 ... 그래서
진짜 장그래는 휘발성 높은 청춘처럼 모순되게 사라지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입니다.

청년들의 행복한 미래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정치인이 있다면
둘 중 하나는 거짓말입니다. 청년들의 행복이 아니든지, 행복한 미래가 아니든지 ~

사회는 둔탁한 쇠몽둥이에 양각으로 "위로"라는 글자를 새겨 넣고
청년을 힘껏 내리칩니다. 그렇게 "위로" 라는 글자는 청년에 몸에 시퍼렇게 멍으로 그려집니다.

이것은 위로일까?

뜨거운 혈관의 고요한 장막아래서
시퍼런 멍으로 청년의 몸에 위로가 각인되어야만 비로소 안도하며 성취감에 도취되는 사회가
상상의 세계가 아니라, 지금 내가 사는 현실이라 생각하니 혹시나 내 손에도 쇠몽둥이가 들려있지는
않은지 살펴봅니다.

며칠전 대림산업 협력업체 창고에서 19세 청년이 자살을 선택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누군가에겐 부를 축적하는 공간이
청년에게는 삶을 내려놓은 공간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창고는 그렇게 청년에게 병렬적 위선으로 존재한 공간이자 암묵적 근친상간의 공간이었던 것입니다.

법을 공부하시는 분들에게는 이런 말이 있다고 합니다.

< 최고의 재판 보다는 최악의 합의가 낫다! >

우리에게는 지금 완벽한 제도 보다 불만 섞인 <합의>가 더욱 간절한 시점입니다.
하지만, 점점 더 안으로 소수화 되어가는 다수들의 병렬적 근친상간이 난무하는 시대에
<합의> 라는 수사는 어쩌면 또 다른 이방인 취급을 받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대안을 제시하지 못함은 저만의 근친상간 유희일수도 있겠지만,
대신 그람시의 위로를 대안으로 전합니다.

< 이성으로 비관하되 의지로서 낙관하라! -- 안토니오 그람시 Antonio Gramsci >



[@ 막바지 추위입니다. ~ 다들 건강 잘 챙기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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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처럼


"근친상간"이 '이방인을 사랑할 수 없는 무능력(없는, 무능력; '무'능력)'을 상징 한다고 했는데,
근친상간이 통상적으로 금기를 상징한다는 것에 비추어볼 때,
일반인들이 에히리 프롬의 주장이 합리적이라고 볼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따라서 근친상간의 외형을 넓히시려는 시도는 큰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니체가 부르짖은 관계사유구조 속에서 '아모르파티'의 상태를 도달하기 위해 사용하신 듯 해 보입니다만,)

또한 '뜨거운 아이스크림'이라는 비유를 사용하셨는데,
1:99=99:1의 관계는 이러한 형용모순적 형용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소수의 독점권력은 현 시스템 내에서 모순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덧붙여 현대성과 유동성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다룬 대사회학자 바우만(1925~2017)은
근친상간적 프레임으로 사회를 읽지 않았습니다. 특히 인용문과 근친상간적 프레임의 연관성을 발견하기가 어렵군요.

"청년들의 행복한 미래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정치인이 있다면 둘 중 하나는 거짓말입니다."
"최고의 재판 보다는 최악의 합의가 낫다."

등의 주장은 단편적 주장일 뿐, 일반적으로 맥락 내에서도 승인되기 힘든 주장들입니다.

정리하면,
"병렬적 근친상간의 시대"라는 글(?)에 추종자들이 이어지는 것에, 의문이 듭니다.

혹시 네러티브 추종자이시거나, 일반적으로 어법이
문학, 즉 내러티브가 최고의 정치적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을 함의하고 있다면,
이해하겠습니다.
다만, 이를 이해 할 늙병필들이 많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의아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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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파스




저는 프롬의 주장을 합리적이라 말한적이 없으며
프롬의 사유에서 새로운 시선을 얻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바우만의 사유를 프롬과 같은 근친상간의 사유로 해석한 이유는
미분되고 있는 우리사회 수많은 "근친상간" 덩어리들에서
저는 출렁이는 "유동성"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 낡은 철제 통안에
아주 작은 수많은 유리구슬이 들어있는 모습이 마치 물이 들어있는 모습과 유사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유동성=근친상간>이라는 등치관계를 발견했다는 뜻이며,
그러한 이유로 바우만을 인용한 것입니다.

더불어 1:99가 모순적이지 않다는 주장은 전적으로 님의 주장이며,
저는 그 반대의 생각을 가지고 있기때문에, 그 지점에서 형용모순을 발견한 것이며
모순적이지 않다는 님의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 왜냐하면
<모순>없는 세상은 대립이 없는 평화로운 사회일텐데, 인류는 지금까지
이 모순을 제거하기 위한 투쟁의 연속이었기 때문입니다. ... 2008년 세계금융위기가 발생했을때,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는 99가 거리로 나와 오큐파이를 외쳤으며,
현재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최순실 사태만 보아도 이미 모순을 증명하고 있는것 아닌가 생각됩니다.

독일은 패전후 발터오이켄의 질서자유주의를 기반으로
그들만의 경제체제인 사회적 시장경제를 구축함으로써 세계에 자신들의 건강성을 증명하고 있으며
그 안에는 철저히 독점을 경계했기 때문입니다. ... 1930년대 대공황기 미국에서 만들어진
글래스-스티걸법과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만들어진 도드 프랭크법안 또한
독점을 경계한 금융규제법안 이었습니다. ~ 이것은 달리 말하면 세계는 여전히
1:99의 모순성을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반증이며,
<1:99가 현 시스템 내에서 모순적이지 않다> 라는 님의 주장은 이미 모순적입니다.
세계가 그것을 제도와 법안으로써 증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수화 되는 다수의 병렬적 근친상간> 이라는 표현은
프롬과 바우만의 사유에서 제가 개인적으로 도출한 저만의 결과물 입니다.
프롬과 바우만의 생각이 그랬기 때문에 저의 개인적 사유물 까지 프롬과 바우만의 한계안에서
규정지으려는건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 누구나 생각의 자유는 있는 법이니까요 ~

첨언하면 ... 님의 반론또한 저 개인적 생각으로는 이미 소수화된 <병렬적 근친상간>의
한 종류라 생각됩니다. ~ 상당히 유동적으로 말이죠

고견 잘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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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처럼






'소수화 되는 다수의 병렬적 근친상간'이라는 표현이 물파스님의 것이 아니라고도,
그것을 프롬과 바우만의 한계 내에서 규정지으려고도 의도하지 않았습니다.
(단, 근친상간=유동성이라면, 바우만의 한계를 벗어나기는 어렵겠죠.)

다만, 프롬이 말하는 '근친상간'의 의미가 '성적인' 것에서 '성격적인(뭐, 문화적 요소가 발견될 수 있다는 말이겠죠?)' 것으로
확장된 것을 토대로 '병렬적 근친상간의 시대'라고 명명한 것이 직접적으로 와 닿지 않는 다는 점과
그에 따라 제공되는 별도의 해석도 설득력이 좋지 않다는 점을 언급했습니다.
(남의 댓글에 그냥 비난을 하려는 의도는 없었으나, '대단히 뛰어난' 평가들을 보고 약간 의아스러웠습니다.)

문학적인 서술에 사회과학자들의 용어를 하나씩 교체 투입하는 방식,
이를테면, '철체 통' '유리구슬' '근친상간' '상징' '혐오' '이방인' ...
등은 각기의 의미를 왜곡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것을 '일상용어'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응?"하는 생각을 지울 수는 없습니다.

'1:99가 모순적이지 않다.'는 주장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단순히 인정받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람시를 인용하셨으니, 이는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체제가 모순적이기 때문에, 모순된 존재의 발견은 당연한 것 아닐까요?
따라서 모순이 아니라고 말 한 것입니다.

미국과 독일을 하나의 행위자로 간주할 때, 이들은 강력한 독점 행위자들이라 분류할 수 있습니다.
미국과 독일은 '세계'가 될 수 없으며, 그들이 제도와 법률로써 체제의 모순성을 인정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입니다.

이로써 "1:99가 현 시스템 내에서 모순적이지 않다"는 주장은 방증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저도 첨언하면, 물파스님의 말도 이미 소수화된 (님의 표현에 따르면) '병렬적 근친상간'의 한 종류가 되겠네요.

그러나 전술하신 대로 현 시대가 '합의 부재의 시대'라는 표현을 수긍하며,
물파스님과 같은 분이라면 '최악의 합의' 보다는 훨씬 좋은 합의를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고견 잘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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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파스


님의 주장이 동어 반복적이라
저의 생각과 간극을 좁힐수 없을것 같아 첫 댓글의 답으로 갈음하겠으며
다만, < 체제가 모순적이기 때문에, 모순된 존재의 발견은 당연한 것 아닐까요?
따라서 모순이 아니라고 말 한 것입니다. > ~ 라고 했던 부분은 님께서 어떤 의도로
얘기하고 있는지 충분히 알겠습니다만, 굳이 그것을 한 번 더 꼬와서 얘기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입니다. 그냥 에너지 낭비 같다는 생각입니다.

결국 <체제가 모순적 이기때문에 ... > 라는 님의 주장은
암환자의 고통을 이미 암세포가 몸속에 있기 때문에 고통은 당연한거다 라고 말하는거와
크게 달라보이지 않습니다. 조금은 비약이 보이네여 ~

더불어 님께서 사용한 용어들(행위자, 시스템 등) 또한 본인 주장을 당위적으로 이끌기 위한
무리한 차용이라고 봅니다.(제 개인적 생각으로는요 ~)

그리고 미국, 독일을 하나의 행위자로 간주할때 이들을 강력한 독점 행위자들로 분류하신다고 했는데
<행위>가 있다면 <대상>이 존재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부분이 빠져있네여 ~

"국가란 주어진 영토 내에서 물리적 힘의 정당한 사용에 대한 독점권을 주장하는 인간 공동체"
- 막스 베버(Weber, Max)

베버의 견해를 다른다면, 전세계 국가적 형식을 갖춘 모든 나라들 또한 독점적 행위자가 될 수 있을 겁니다.
미국과 독일 뿐만이 아니라는 것이죠 ~ 따라서 미국과 독일이 자신들의 모순성을 인정한다는 것이
당연하다는 님의 주장은 결국 선택적 편향이라 생각됩니다. (모순을 세계로 확대 적용할수 있다는 뜻입니다)

마지막에서 님은 저 또한 <병렬적 근친상간>의 한 종류가 될수 있다고 말하셨는데
맞습니다! ~ 이건 본문에 이미 저도 병렬적 근친상간의 범주에 포함되어 있음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합의>를 강조한 것이구여 ~


더 많은 얘기를 나누고 싶은데,
잠시 짬을 내서 댓글을 하는지라 이정도에서 마무리 짓습니다. ~ 고견 잘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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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처럼




저는 혁명정부를 꿈꾸는 사람도 무정부 아나키스트도 아닙니다.
개념이 아닌 단어로서의 "체제"의 수용도와 '모순'에 대한 접근 방법론에 차이가 있는 듯 한 데,

'모순' 없는 평화로운 사회는 결코 건설될 수 없다. 는 울타리 내에서
모순은 피할 수 없는 필연으로, 이를 인정하고, 평화로운 사회가 건설되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강조점을 두었습니다.
모순을 피하거나 제거하기 보다는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 즉 "비계약적 요소들"을 승인하는 것이 합의를 위한 첫걸음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번 더 꼬인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논쟁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입구는 달라도 출구는 공유할 수 있는 법이죠.

님께서 언급한 "우리 모두를 사방에서 근친상간을 할 수 밖에 없는 구조속으로..."라는 진단과
"근친상간의 유희는 소외된 다수가 이제 그만 멈추도록 유도해야 한다는 점..."라는 해결에서, 저는 '합의' 지점이 마련될 수 있을 것으로 봤습니다.

뭐 합의가 안되면 또 어떻겠습니까? '이해'할 수 있다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물파스'님의 글이 칭.찬.을 받는 이유가 있더군요.

'꾸준히' 의미있는 댓글을 달고자 노력하는 분으로 이해했습니다.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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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과 경제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