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3월 16일 목요일

◆소수 의견과 약자는 왜 보호받아야 하는가? (by 물파스)

(이 글은 전적으로 저의 개인적 견해입니다.)
예를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어느 A마트의 경영원칙은 고객들에게 가장 잘 팔리는 하나의(한 종류) 과일만 
판매대에 올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 그런데 A마트는 
사과, 레몬, 키위, 포도, 바나나, 수박, 딸기 등 ... 이렇게 일곱 종류의 과일만을 취급하고 있습니다. 

◆ [첫째 날] - 마트는 판매대에 사과, 레몬, 키위 3 종류의 과일이 올렸습니다.
그리고 그날 가장 많이 팔린 과일은 바로 사과였습니다. 따라서 사과를 제외한 
나머지 레몬과 키위는 판매대에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 [둘째 날] - 판매대에는 어제 가장 많이 팔린 사과와 함께 포도, 바나나를 추가해 
어제와 마찬가지로 3종류의 과일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이 날도 사과가 가장 많이 팔렸습니다. 
그래서 사과를 제외한 나머지 포도와 바나나도 내일부터는 판매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 [셋째 날] - 이제 판매대에는 사과를 포함한 나머지 수박, 딸기 3종류의 과일을 최종적으로 올렸습니다.
그리고 셋째 날도 역시 사과가 가장 많이 팔렸습니다. 따라서 수박, 딸기는 판매대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이제 넷째 날 부터는 A마트의 과일 판매대에 오직 사과만이 (계속해서)올라올 것입니다.
그리고 고객들은 사과를 제외한 나머지 6종류의 과일은 더 이상 선택할 기회조차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민주적 시민사회라면 소수의견, 혹은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더불어 그것이 민주사회의 당연한 책무라고 합니다 ... 그렇다면 민주주의 사회는 
왜 하필 소수의견과 약자를 보호해야 할까요?

"책무감"에 반박을 불허하는 어떤 암묵적 당위성이 부여 됐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그 '책무감' 이라는 명제의 정당성은 또 어떻게 확보할 수 있을까? ... 결론을 내지 않는다면 
질문과 의문은 한 동안 계속될 것 같습니다. 

불쌍하니까, 약자라서, 안타까워서 ... 소수의견과 약자에게 페이소스(pathos) 같은 감정적 접근은
성선설(性善說)과 인간의 이타심을 존중한다면 충분히 이해가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소수이거나 약하다는 근거만으로는 이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정당성을 확보하기에는 
무언가 논리가 빈약해 보입니다. .... 그래서 이렇게 한번 생각해보려 합니다. 

첫째 날, 마트에서 사과를 샀던 김철수라는 고객이 집에 도착했더니 친척분이 와 계셨던 겁니다. 
그리고 친척분께서 선물로 레몬과 키위를 사오셨는데 ... 먹어보니 생각보다 맛이 괜찮은 겁니다. 
그래서 김철수씨는 다음날은 마트에서 사과가 아닌 레몬과 키위를 구매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하지만, 둘째 날은 마트의 판매대에서 레몬과 키위가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건, 첫째 날 사과를 사갔던 손님들 중 과반이상이 모두 본인들 집에서 김철수씨처럼
레몬과 키위를 먹어보았던 겁니다. 그래서 그들도 모두 레몬과 키위를 사기위해 마트를 방문한 것입니다. 
하지만 마트는 이제 더 이상 레몬과 키위를 판매하지 않는 상황입니다. 

이것은 결론적으로 사과에 비해 소수 입장이었던 레몬과 키위가 
둘째 날 "다수가 될 수 있었던 기회"를 박탈당한 것과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정치의 독재와 경제의 독점은 보시다시피 소수가 다수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합니다. 
소수(약자)는 다양성과 연결됩니다. 민주주의 사회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로 흘러간다면
그 사회는 결국 독재나 파시적 형태로 흘러가게 될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우리는 소수와 약자를 단순히 불쌍하고 약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만으로 보호하는 것이 아닙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언제든지 소수가 다수로, 또는 다수가 소수로 전향할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들을 보호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보호기반 위에서 사회는 다양성의 풍요를 
맛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 하지만 이러한 경로가 막혀버린다면, 사회는 유연성을 잃고 점점더 
경직된 사회로 흐르게 될 것입니다. 

동성애든 이성애든 ... 대상에 대한 직접적인 혐오나 공격으로 피로감을 느끼기 보다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사회속에서 사고의 풍요로움을 맛보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수천.수만 갈래로 뻗어나아 가야 할 우리의 사고가 오직 하나의 생각에 갇혀 버린다는 건 공포입니다.

다수의 선택이 힘의 논리에서 강할 수는 있어도 그것이 반드시 정의롭고 옳은 선택이라고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선택한 생각에서 우리는 언제든지 소수의 생각으로도 이동이 자유로워야 합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소수(약자)는 애처로워야할 대상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가 인정되어야할 대상인 것입니다.
개인의 취향은 존중하자면서도 나와 "다름"이 (사회에)발현될 때에는 극도의 거부감을 드러내는 것은 
진진한 성찰보다는 그 "다름"을 사무적으로만 접근하기 때문입니다. 본인에게 익숙하지 않은 메뉴얼이기 때문에 
편리하게 취소나 삭제 버튼을 누르면 예전과 같이 편안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소수(약자)는 혐오의 대상이 아니라 바로 "다양성"의 다른 이름 입니다. 



[@ 저는 남자이며, 상당히 건강한 이성애자 입니다. 
그렇다고 동성애를 혐오하거나 반대하지도 않습니다. 또한 찬성하는 입장도 아닙니다. 
오직 동성애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 뿐입니다 ... 그들도 우리사회에서 
충분히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대상이라는걸 인정하자는 것 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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