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3월 16일 목요일

◆페미니즘(Feminism)과 혐오에 대한 히틀러의 분석틀 (by 물파스)

어떤 여행객이 길을 걷다가 두 마을로 갈라지는 입구(분기점)에 다다랐습니다. 
그런데 한쪽 마을 사람들은 진실만 말하고, 다른 쪽 마을 사람들은 거짓만 말합니다. 
그리고 이 여행객은 사업상 진실 마을로 가야만 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때마침 갈래 길 앞에
어느 마을 주민인지는 모르지만, 주민 한 사람이 서 있었습니다. 이 여행객은 그 주민에게 
딱 하나의 질문만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행객은 고심 끝에 질문을 했고, 무사히 
진실 마을로 갈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여행객은 과연 어떤 질문을 했을까 ~ ? 

[정답]: "당신 마을로 가려면 어느 쪽으로 가야합니까?"

이미 많이 알려진 진부한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때로는 “질문” 하나가 정답 이상의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저에게 피상적으로만 다가왔었던 "페미니즘(Feminism)" 이라는 
의미에 대해 진지한 질문을 해봄으로써 답을 대신해 보려합니다 ...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먼저 페미니즘에 대한 간략한 정의를 살펴보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 페미니즘(Feminism) - 여성이 불평등하게 억압받고 있다고 생각하여 
여성의 사회, 정치, 법률상의 지위와 역할의 신장을 주장하는 주의.]

국어사전에서 말하고 있는 페미니즘의 정의입니다.
첫 문장에서 보시다시피 페미니즘은 “불평등”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페미니즘은 “여성인 나는 차별받고 있다!”를 전제로 시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후 불평등이 해소된 세계에서의 여성은 다시 “여성의 권리 확장(여권신장)”으로 
자신들 최초의 생각이었던 “불평등”의 외연을 계속해서 확장해 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학계는 오늘날의 페미니즘(Feminism) 운동이 대략적으로 50(혹은 그 이상?)여 분야로 
그 유형이 다양화 되었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지속적으로 확장 중) ... 이 부분은 잠시 후에 
다시 살펴보도록 하고, 그렇다면 페미니즘의 최초 출발점 이었던 “불평등” 이라는 전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나가보겠습니다. 

페미니즘 이론가들은 과거 기록에 근거해 최초의 여성운동을 
고대 그리스의 시인이자 희극작가였던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BC 450]의 희극
"리시스트라테(Lysistrate)" 에서 찾고 있습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전쟁(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장기화되자 
당시 아테네의 젊은 여성이었던 리시스트라테는 아테네와 스파르타 여성들을 규합해 
그녀들의 남편들에게 이렇게 외치라고 말합니다. 

"당장 전쟁을 그만두지 않는다면, 우리는 당신(남편)들과의 섹.스(S.ex)를 거부하겠다!"

그리고 목적을 달성(전쟁 종식)하며 희극은 막을 내립니다. 
이렇게 희극 “리시스트라테”는 최초의 “여성운동” 이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만약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가 희극내용을 단순히 전쟁의 종식에서 멈추지 않고 
가부장제, 여성폭력, 출산 등과 같은 좀 더 다양한 여성 문제를 추가해서 대본을 수정했더라면 
아마도 리시스트라테는 진정한 의미의 페미니즘 시초가 되었을 것입니다.

페미니즘(Feminism) 이라는 말은
프랑스의 사회주의 사상가 샤를 푸리에[Charles Fourier.1772~1837]가 처음 만들어낸 
프랑스어(Feminisme) 라고 합니다.(수학자 푸리에 아님.) ... 또한 자유론(On Liberty)으로 유명한 
존 스튜어트 밀은 자신의 저서 "여성의 종속"에서 여성해방에 대해 다음과 같은 입장을 밝혔습니다. 

“이 글의 목적은 내가 할 수 있는 한 분명하게 두 성 사이에 존재하는 사회적 관계를 
규정하는 원리(한 성의 다른 성에 대한 법적 종속) 자체가 잘못되었으며,
이제는 그것이 인류의 진보를 가로막는 주요 장애물 가운데 하나라는 것. 
따라서 이제는 그것이 완벽한 평등의 원리로 대체되어 한쪽에 어떤 권리나 특권도 
부여하지 않고, 다른 쪽에도 불리한 조건을 부여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설명하는데 있다.
- [여성의 종속 中(The Subjection of Women).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

존 스튜어트 밀은 개인의 자유는 절대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다시 말해 개인의 양심의 자유와 사상과 언론, 행동, 결사 등의 자유는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이상은 그 자유가 절대적으로 보장되어야 하며, 이는 국가권력이나 어떤 도덕적 판단으로도 
제한 받아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개인의 자유가 절대적으로 보장되는 부분에는 
양성평등과 억압받는 여성의 해방도 포함되어야 하며, 이러한 여성해방은 여성들뿐만이 아닌, 
남성들에게도 도움이 된다고 주장했는데 ... 결론적으로 여성해방은 여성들만의 문제가 아닌, 
(남성을 포함한)사회전체의 문제로 인식하여 공동체가 여성해방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공동체 모든 개인들이(남.여) 진정으로 절대적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 여성해방은 궁극적으로 공동체 전체의 자유를 위한 것이다! ]

희극 리시스트라테(Lysistrate)로부터 출발한 여성운동과 
이후 여성해방을 위한 과거로부터의 다양한 사상과 행동(운동)의 진보는
19세기에 도착해서 드디어 여성들에게도 참정권(영국)이 주어졌고, 이후 꾸준한 여성운동은
20세기에 들어와서 드디어 여성들도 일반대학과 의과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서
본격적인 페미니즘 운동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하지만 이러한 성과 이후에도 
여전히 사회에는 여성들에게 승진(유리천장)과, 임금, 일자리 수 등에서 암묵적인 차별과 
넘기 힘든 장벽이 쳐져 있었습니다. 

[◆ “프랑스에서 1889년부터 1893년에 걸쳐 실시한 조사에 의하면 
남자의 취업 시간과 같은 취업시간에 대하여 여성 노동자는 남성 임금의 
절반밖에 받지 못하고 있었다. 1908년 조사에 의하면, 여자 가내 노동자의 
시간당 최고 임금은 20상팀을 초과하지 못했다. 최하급은 5상팀까지 있었다. 
~ (중략) ~ 고용주들은 여자들이 낮은 임금에 만족하고 있기 때문에 여자들을 환영하였지만, 
바로 이 같은 사실이 남성 노동자 측으로부터 저항을 야기시켰다. 
프롤레타리아의 이해(利害.이익과 손해)와 여성의 그것과의 사이에는 
베벨과 엥겔스가 그렇게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직접적인 연대관계는 없었다.
이 문제는 미국에 있어서 흑인의 임금에 관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제기되었다. 
한 사회에서 피압박 소수자들은 그들이 소속되어 있는 계급의 전체에 대한 무기로서 
압박자에 의하여 이용된다. 그 때문에 피압박 소수자들은 처음에는 적(敵)처럼 보인다. 
그래서 흑인과 백인, 여자 노동자와 남자 노동자가 서로 대립하지 않고 협력하는데 성공하기 
위해서는 상황에의 보다 깊은 의식이 필요하다. 남성 노동자들이 처음에 이 싸구려 경쟁자로부터
가공할 위협을 느꼈다는 것과 서로 적의(敵意.적개심)로 보였다는 것이 이해된다. 
여자 노동자들이 자기 자신들의 이익을 옹호하고, 노동계급 전체의 이익을 위태롭게 
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여성들이 조합 생활에 합류되었을 때 비롯된 것이다.” ]
- 제2의 성(性).(상권)[시몬 드 보부아르/ 184~185 페이지/ 을유문화사] 

[@ 상팀(centime) - 프랑스와 스위스의 화폐 단위를 나타내는 말. 1상팀=(1/00 프랑)]
[@ 베벨(Bebel, F.A.) - 독일 사회주의자. 여성 해방이론의 고전으로 평가받는 부인론(婦人論)을 
저술했으며, 여성의 진정한 해방은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함.]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성으로 만들어지는(형성) 것이다" 라는 말로 유명했던
프랑스 작가이자 철학자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는 
20세기 페미니즘의 바이블 이라는 자신의 저서 "제2의 성(性)" 에서 
여성의 생물학적인 성(s.ex)이 아닌 사회적 성(性), 즉 사회.문화적으로 포섭된 여성을 얘기함으로써 
당시 세계에 상당히 무거운 질문을 던졌습니다. 

과거 역사를 보면 세상의 주체는 언제나 남성이었으며, 여성은 객체이자 타자(他者)로서만 
존재했었습니다. 한마디로 보부아르는 남성 중심사회에서의 여성을 "남성(男性)"도 아니면서,
"여성(女性)"도 아닌, 바로 "제2의 성(性)" 이라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신선한 주장을 했는데, 
남성의 맞은편에 서서 남성과 동등한 입장으로서의 여성이 아니라 과거 역사로부터 
여자는 항상 주체였던 남자의 소유물 정도로 취급받아 왔기 때문에 여자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사회가 여자를 사회의 억압구조 속에 가둬놓고 "너는 남자의 복종과 만족을 위해서만 존재해야 한다!" 라는
"억압적 속성"을 부여하여 암묵적으로 여성을 길들였다는, 그래서 여성은 한계에 갇혀버려 
사회가 생산한 "만든 성(性)" 이라는 것이 당시 보부아르의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여성성을 
보부아르는 "제2의 성" 으로 명명한 것입니다.

한 겨울 펑펑 눈이 내리던 날 ... 
학교 도서관 앞에서 마셨던 300원짜리 자판기 커피 맛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동전을 자판기 투입구에 넣으면, 밀크커피, 설탕커피, 블랙커피 등 여러 종류의 커피 버튼에 
붉은색의 불이 들어옵니다. 이어서 버튼을 누르면 먼저 아래로 종이컵이 떨어지는데 ... 그 순간 
몇 초 후에 떨어질 커피를 기다리는 종이컵의 운명에 대해 잠시 진지한 생각을 해보려고 합니다.

종이컵은 당연히 종이 재질로 만듭니다. 그리고 사람 손이 아닌, 공장(자동화)에서 만들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회용)종이컵은 공장에서 만들어지기 전에 이미 그 용도(커피 자판기 등)가 정해져 
있습니다. 즉, 종이컵의 본질(용도)은 존재하기도 전에(만들어지기도 전에) 이미 그 운명이
정해져 있다는 뜻입니다 ... 이것은 결국 본질(용도)이 실존에 앞서는 경우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먼저 태어나고(존재하고) 그 이후에 본인 스스로가 인생을 어떻게 개척해 나아가느냐에 따라서 
삶과 운명이 결정되어집니다. 다시말해 자신의 삶의 본질은 종이컵처럼 태어나기 전에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자유(개척)의지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 그래서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Sartre)는 이러한 인간 모습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그런데 누가 실존주의 철학의 선구자 사르트르의 연인이 아니랄까봐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는 여성을 "실존주의"적으로 입장에서 분석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여성은 종이컵처럼 존재하기도 전에(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그 본질(여성성의 규정)이 
정해져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죠! ~ 쉽게 말해, "여자는 남자를 떠받들어야 한다.",
"여자는 남자의 소유물이다", "여자는 가정과 육아에만 충실해야 한다", 
"여자는 남자보다 적은 임금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 ... 처럼 지금까지의 사회가 남자와 여자의 
신체 구조적 차이 이외에도, "원래 여자란 이런 것이다!" 라고 미리 규정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규정이 주로 남성 중심사회에서 남자로 인하여 규정된 것이었기 때문에, 
당시의 여자는 사회가 규정한(사회가 길들인) 여성이라는 의미로 보부아르는 여성을 "제2의 성"이라 
명명했던 것입니다. [@ 보부아르는 소르본대학교 재학 중 3세 연상의 사르트르와 "계약 결혼"을 합니다.]

남자가 밖에서 사냥(돈을 버는)을 하는 동안, 
여자는 가정에서 육아를 책임지며, 고생하는 남편과 가족을 위해 요리를 준비합니다. 그래서 
섬세한 감각이 필요한 육아와 요리는 과거 역사를 보더라도 항상 여자가 도맡아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 
그렇다면 여성이 남성보다 더 섬세하다는 부분은 과학적으로 증명되었거나 여성이기 때문에 섬세하다라는 
인과성은 과연 타당한 것인가? ~ 라는 물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 결론적으로
"여자는 남자보다 섬세하다" 라는 견해(고정관념)는 그동안 인류가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누적해서
형성한 인위적 개념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유년시절은 "남자다움"과 "여자다움" 이라는 도그마(Dogma) 속에서 양육되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남자는 부엌에 들어가면 안 된다!", "여자가 감히 어딜 제사를 주관하느냐!"
"남편 뒷바라지와 애나 잘 키우지 여자가 무슨 밖에서 일을 한다고 하느냐!" ... 이 같은 차별과 금기는
점차 남성과 여성의 영역을 이분화 시키게 되었고, 따라서 남성의 영역은 가정을 벗어난 공적인 공간 확대로
그 영역이 넓어졌고, 여성은 가정이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만 영역의 변화가 있었을 뿐입니다. 더구나
생물학적으로 출산을 담당할 수밖에 없었던 여성은 육아와 취사가 당연시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세계는 1995년 제4차 세계여성대회를 열면서 이러한 남녀 간의 차별(혹은 차이)되는 성적구분에 
대해서 섹.스(S.ex) 라는 단어 대신에 젠더(gender)를 사용하자고 결정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남녀를 섹.스(S.ex)로 구분하는 것은 결국 "남자다움"이나 "여자다움"처럼 사회 안에서
암묵적 차별을 양산하기 때문에 이러한 남녀간의 모든 차별을 없앤 개념으로 젠더(gender) 사용을 
주장하며, 남자와 여자는 신체구조상으로는 차이가 있지만 사회적으로는 전혀 차별받아서는 안 되는
대등한 관계라는 것을 젠더의 속성 속에 넣어 사용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보부아르 이렇게 사회적, 역사적으로 길들여진 여성이 남성과 대등한 관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그녀의 저서 제목처럼 "제2의 성(性)" 으로서 존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 하나를 여성들의 부족했던 
저항정신과 조직화의 미숙함. 그리고 연대할 줄 몰랐던 (여성들의)집단의식의 결여로 보았습니다. 

[◆ “조합 노동자 총수 3,076,585명 중 조합에 가입한 여자 노동자는 292,000 명이다. 
여성들이 자신들에게 열려진 새로운 가능성 앞에서 무기력했던 것은 체념과 복종의 전통, 그리고 
연대 책임과 집단의식 결여 때문이었다. ~ (중략) ~ 여자가 노동에 의하여 해방되려고 노력하는 것은
부부 공동체가 존속하는 사회 안에서라는 것을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버지나 자기 남편의
가정에 매여 있는 여자는 집안 살림에 잔돈을 보태는 것으로서 대개는 만족하고 있다. 
여자는 가정 밖에서 일을 하지만, 가정을 위하여 일을 한다. 그리고 여자 노동자는 자기의 필요 전부를
조달할 수입이 없어도 되기 때문에 남자가 요구하는 보수보다도 훨씬 낮은 보수를 수락하게 된다.]
- 제2의 性.(상권)[시몬 드 보부아르/ 183~184 페이지/ 을유문화사] 

여성의 복종과 체념은 가족구조의 전통에 의해 무기력을 양산했으며, 이러한 무기력은 
다시 여성들이 조직화하고 연대하는 추동력을 빼앗아 갔습니다 ... 남자(아버지, 남편) 앞에서 
보여지는 여성의 복종과 체념은 대신 여성에게 적극적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즉 가족을 위해 
특별히 돈을 벌지 않아도 된다는 편의를 제공해 주었던 것입니다. ... 때문에 수많은 여성들은 
남성에 비해 너무나 낮은 수준의 임금도 감수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구조적 타협은 여성 자신들의 
연대의식을 약화시켰다고 보부아르는 보았던 것입니다. ... 그리고 이러한 구조가 고착화되면 
여성은 영구적인 객체(타자)로서, 즉 남성에게는 항상 헌신적이어야만 하는 "어머니" 혹은 "아내", "딸"로서
남성 중심적 틀 안에서만 존재해야하기 때문에, 그 갇힌 "제2의 성"에서 벗어나 남성과 대등한 위치로 
올라서서 당당한 "여성(女性)"으로 거듭나라는 것이 보부아르의 외침이었던 것입니다.
[◆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본인이 남성이든, 여성이든 성별에 상관없이 사회에서 언제나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앞에서 이미 언급했었지만)역사적으로 보면 여성은 항상 남성의 보조자로서만
존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보부아르는 이제는 남성과 대등한 위치로 올라서라고 얘기합니다 (남성 = 여성)]

페미니즘 운동은 이후, 피임약과 개방적 성(性)해방 같은 진보적 운동으로 쉬지 않고,
앞으로 달려나갔으며, 이러한 여성운동은 1973년 미국에서 "로 대 웨이드(Roe v. Wade)" 판결이후
여성들 스스로가 "낙태"에 관한 선택권을 갖게 되면서 한층 더 진보하게 됩니다. 
[◆ 로 대 웨이드(Roe v. Wade) 판결 – 1973년 미국 대법원이 내린 판결로 낙태를 처벌했던 당시의
주와 연방법에 대해서 미국 수정헌법 제14조에 의거, 낙태를 처벌하는 법률은 개인의 사생활의 
헌법적 권리를 침해한다고 판결함으로서 낙태금지에 대한 모든 주와 연방의 법률이 폐지된 사건임.
미국 역사상 가장 논쟁적이며, 정치적인 판례 중 하나였음. ]

이러한 여성들의 투쟁의 결과는 오늘날 소극적 형태의 페미니즘 운동에서부터 
상당히 급진적인 운동으로까지 그 범주가 넓어지고 다양화 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경제적 평등, 
사회적 평등, 남성거부(분리주의), 페미니즘의 이론적 관심과 실천(행동주의),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시선 자체를 거부하는 퀴어(queer) 운동 ... 심지어 사랑하는 연인들 사이에서의 섹.스(S.ex)에 까지도
간섭하며 "삽.입이 이루어지는 모든 섹.스는 강간이다!(앤드리아 드워킨.Andrea Dworkin)" 라는 주장을 펴는 
급진을 넘어 "극단"에 가까운 페미니즘 운동도 존재합니다. 이처럼 현재의 페미니즘 운동은 그 종류와 다양성,
급진적 형태 등에서 무어라 딱히 정의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이것은 페미니즘(Feminism)이다!" 라는
레테르(letter)만 가져다 붙이면 통용되는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오늘날의 
페미니즘 운동에 대해서 (여성들을 향해)이렇게 표현해 보려 합니다. 

"오늘날의 페미니즘은 그대들의 '수다' 만큼이나 종류가 다양해졌지만, 
그 가치는 전보다 훨씬 더 가벼워졌다. 그래서 이제는 그 '수다'의 종류가 아닌
무게를 늘리는 방안을 모색해서 수다를 진정한 페미니즘적 '담론'으로 재생산 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 수다의 담론 전환]

전 세계에는 아직도 글을 읽고, 쓸 줄 모르는 여성이 50%를 넘는 나라들도 존재하며
초등 교육도 못 받는 아동들뿐만 아니라 아동(여아) 성폭력, 심지어 8세 미만의 아동 노동과 착취가 
버젓이 이루어지는 나라들도 존재합니다. 아프리카 어린 여성들은 아직도 할례의 위험과 공포에 노출되어 
있으며, 이러한 제3세계 및 개발도상국 등의 낙후된 여성 현실에 대해서 그나마 깨어있는 진정한 
페미니즘 운동가들은 지금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남자를 넘어 세계를 상대로 투쟁하고 있습니다. 

시몬 드 보부아르나 케이트 밀렛 같은 진정한 페미니즘을 위해 투쟁했던 많은 선배 운동가들은 
단순 남성혐오가 아니라, 철저한 역사의 고증과 함께 자기 검증을 통해 여성의 억압을 고발하고
동시에 남성과 동등해지려는 노력을 했습니다.(양성 평등) 

주차장의 여성전용 주차공간이나 지하철의 여성 전용 칸은 여성들이 스스로 느끼는 불편함이지 
그것은 불평등이 아닙니다. 세계의 페미니즘 운동은 여성들 생활의 불편함을 개선하자는 운동이 아닙니다.

페미니즘은 결국 남녀 간의 차별 없는 "평등함"을 주장합니다. 
인류의 절반이 각각 남자와 여자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들 주체들의 사회.문화적 평등을 주장하는 것은 
어찌보면 페미니즘의 본질이 가장 급진적인 사회주의적 속성을 지니고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아무리 페미니즘 운동이 다양화 되었다고 해서, 여성만을 위한 전용지하철 칸과 
여성전용 주차장, 여성전용 엘리베이터를 요구하는 것은 그동안 과거 훌륭한 선배 페미니즘 운동가들이 
쌓아온 숭고한 정신과 페미니즘의 순수성을 훼손하는 것에 다름이 아닌 것입니다. 

또한 "여성 전용" 이라는 요구는 
어느 한 쪽 일방에게 특권을 부여하자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여성 전용"에 대한 주장은
어처구니없게도 평등에서 가장 멀어진 전형적인 자본주의적 갑(甲)질에 다름이 아니며, 앞서 언급했던 
존 스튜어트 밀이 주장했던 여성해방과 절대적 자유 입장에도 가장 반하는 주장인 것입니다.

남성혐오와 여성혐오, 정치의 혐오와 정부에 대한 혐오 ... 등 
그렇다면 이 "혐오(嫌惡)"의 실체는 무엇일까? ~ 또 다시 질문을 던져봅니다. 
그리고 "혐오"라는 관념적 속성을 실천적 명제로 전환했던 대표적 인물인 히틀러(Adolf Hitler)를 소환해 
그가 가졌던 유대인 혐오에 대한 생각을 "타자(남성, 여성, 메갈, 일베 등)" 대한 혐오 분석틀로 
사용해 보고자 합니다. 

[◆ (@@@)의 희생정신은 개인의 노출된 자기보존 충동을 초월하지 못하고 있다. 
얼핏 강해 보이는 동료에 대한 감정은 이 세계의 다른 많은 생물처럼 대단히 원시적인 
군거(群居)본능에 기인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 군거 충동은 언제나 공통의 위험에 의해 
그것이 목적에 합당하든가 혹은 피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일 때 한해서만 
상호부조에까지 도달한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이 순간 목표물을 공동으로 습격하는 이리 떼는
주린 배를 채운 뒤에는 다시 제각기 흩어져 버린다. 말도 마찬가지다. 
습격자에 대해서는 단결해서 방어하지만, 위험을 극복하고 나면 다시 뿔뿔이 흩어진다. 

이와 같이 (@@@)은 공통의 위험이 닥치거나 공통의 먹이가 유혹할 때에는 일치단결하고, 
이 두 가지 이유가 없어져 버리면 심한 에고이즘 본성을 나타내며, 단결한 집단에서 손바닥을 뒤집듯이 
상호간에 처절한 투쟁을 하는 쥐의 무리로 변한다. 이 세상에 (@@@)만 존재한다면, 
그들은 진흙탕이나 오물에 질식할 지경이 되면서도 증오에 가득 찬 투쟁 속에서 
서로 속이고 뿌리째 뽑아 버리려고 할 것이 틀림없다.

(@@@)의 투쟁 과정, 혹은 그들이 이웃에게서 강탈하는 경우에 보이는 단결심을 보고 
그들에게 어떤 종류의 전형적인 희생이 존재한다고 추론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이다. 
그런 경우에도 [@@@]을 이끄는 것은 역시 개개의 노골적인 에고이즘이다. ]
- [ 나의 투쟁 179 페이지/ A. 히틀러/ 홍신문화사 ]

[◆ (@@@)의 존재는 연극분야에 있어 두드러진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그들은 실상
"어릿광대" 이며, 남의 흉내를 내는 데 불과하다. 거기에서마저 그들은 창작자가 아니고 
피상적인 모방자이며, 그런 경우에 거기서 사용되는 모든 광대놀음이나 속임수도 
그들의 창작 능력의 내면적 생명이 결여되어 있다는 증거에 불과한 것이다. ]
- [ 나의 투쟁 180 페이지/ A. 히틀러/ 홍신문화사 ]

<위 글은 히틀러의 "나의 투쟁" 이라는 책의 한 대목이며, (@@@)는 원래 (유대인) 입니다.>
"1924년 4월 1일, 나는 뮌헨 국민재판소에서의 재판 결과 금고형을 선고받고 레히 강변에 있는
란츠베르크의 요새감옥 에서 옥살이를 해야 했다. -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나의 투쟁"은 1924년 히틀러가 감옥 생활을 시작하면서 당시의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내용입니다.
독재와 반민주적, 반유대주의 등의 세계관을 들여다보기가 조금은 찜찜하지만, 세계를 흔든 
한 개인의 역사관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나름 가치가 있다고 평가되는 책입니다. 

그리고 저는 여기서 히틀러가 유대인을 바라보는(규정한) 분석틀을 빌려와 현재 우리사회 난무하는
수많은 타자 혐오관에 대해서 각자 취향별 타자를 대입해보면서 생각의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 다만 
히틀러는 (@@@) 자리에 (유대인)을 "상수"로 놓았지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변수로 놓고,
그 분석틀이 생산하는 여러 타자를 바라봐야 하는 한계가 있다는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 (@@@) => 메갈, 거짓 페미니스트 ... 등]

이번 글도 긴 글이 되었는데,
글을 마무리 하는 찰나에 저는 위험한(?) 생각을 하나 합니다.

몇몇 여성들은 자신의 몸을 마치 대차대조표(B/S) 차변의 자산항목에 산입하여
스스로의 가치를 너무나 자본주의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글 처음에서 이야기했던 그리스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의 희극
"리시스트라테(Lysistrate)"에서 여성들은 자신들의 "몸의 사용권한(S.ex)"으로 
전쟁을 종식시켰습니다. ... 그런데 오늘날에도 공공연하게 전 세계 수많은 직업여성들은 본인의 몸을 
이미 능력자본화 하여 많은 부가가치(?)를 산출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푸코(Michel Foucault) 식으로 
표현해본다면 몸을 활용한 "자기경영인" 인 것입니다 ... 그런데 이러한 생각들은 어쩌면 
인류 역사 속에서 수많은 남성들에 의해 만들어진 결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거의 남성(어쩌면 현재의 남성들도 포함해서) ... 즉, 남자들은 여전히 결혼과 동시에
여자들의 성(性)을 남자 자신만의 자산(Asset)으로 인식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남자들에게 여자의 존재는 언제든지 원할 때 쾌락(S.ex)을 제공해 주는 일종의 값어치 나가는
훌륭한 자산(Asset)이라는 인식이 강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 틀 안에서 
"나는 남자들의 자산(Asset)이 아니다!" 라며 스스로 깨어난 여성들이 
오늘날의 페미니즘을 이끌었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페미니즘을 자산(Asset)의 속성 하나로만 규정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일부 (여자)집단에서는 남자들의 소중한 남근(penis)에 대해서 과거 남성들이 여성에 대해 
보여주었던 왜곡된 자산(Asset)의 시선을 우려스럽게도 똑같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 그리고
그것을 마치 최신 유행하는 페미니즘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주의(~ ism)" 라는 용어가 다 그렇듯이 페미니즘(feminism) 또한 (정치적)이데올로기입니다. 
즉, 하나의 "사상"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민족주의, 사회주의 같은 다른 형태의 주의(ism)처럼
페미니즘에서 보여주는 주의(ism)는 왠지 그 무게감에서 다른 주의(ism)보다는 가볍다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페미니즘의 보폭은 점점 더 커져만 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인류의 "절반"이 
여자라는 양적요소의 개입이 크게 작용한 결과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 다시 말해, 
남성에 대한 "여성 불평등"이라는 테제만으로는 그 사상적 기반이 약하기 때문에, 
페미니즘에 대한 주변의 혹시모를 의문부호가 발생할 때마다 "이 문제는 세계 모든 여성의 문제다!" ... 처럼 
(과도로 사과의 절반을 자르듯이)간편히 양적 함수관계로 정리하게 된다면 이후부터는 감히 그 어떤 
주의(ism)와도 상대할 수 있는 큰 힘을 갖게된다는 뜻입니다.[@ 사견이므로 동의 안하셔도 됩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세계의 페미니즘 운동가들이 제 3세계와 후진국 여성 현실에 대해서 
유엔(UN)과 세계를 상대로 투쟁하고 있을때, 동아시아 끄트머리에 자리한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의 
자칭 페미니즘 운동을 한다는 어느 여성 집단들은 남근(penis)을 가지고 희화하 하고, 
심지어는 4~5세 정도 되는 남아의 성기를 들먹거리며 희희낙락거리고 있습니다. 

아무리 현대의 페미니즘 운동이 다양한 갈래로 뻗어나가고 있다고 해도 
그것을 어떻게 페미니즘이라 할 수 있는지 응원해 주기가 참 많이 당황스럽습니다. ... 이에 대해 일부에서는
몇몇 몰지각한 그녀(?)들의 행태를 전체 집단으로 일반화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와 유사한 
모습들이 사라지지 않고 지속적으로 보여지고 있는 상황에서는 "자정능력"을 상실한 집단에게
몇몇은 없고 이미 모두가 일반화 되었다고 반박해 봅니다.




[@ 관련 분야를 전공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족함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과거 페미니즘 역사와 함께 저의 주관적 견해가 많이 섞여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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