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역사의 흐름을 알게되면 위기의 본질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족하지만 대공황부터 현재까지 핵심적인 내용위주로 몇 가지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아마 이슈인에서 올린 글중 가장 긴 글이 될것 같습니다.
1760년대 제임스 와트의 개량된 증기엔진이 개발된 이후, 약 100 여년의 시간이 흐른 1867년에 파리에서 만국박람회가 열립니다.
이때 재미난 발명품이 하나 전시되었는데 ... 가솔린과 공기를 연소실로 끌어들여 불꽃으로 점화시키는 작은 엔진 이었습니다.
불꽃의 점화로 폭발이 일어나면 그 힘에 의해 피스톤 운동이 일어나고 바퀴를 돌렸던 것입니다 ... 바로 독일의 N.A 오토(N.A Otto)
박사가 발명한 “세계최초의 내연기관” 입니다 ... 당시에 가솔린은 정유공장에서 등유와 경유를 정제하고 나서 나오는
별로 쓰임이 없던 부산물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부산물(가솔린)이 동력엔진에 당당히 하나의 연료로 쓰이게 되면서
산업 전반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농장의 농기계, 가정, 가축사육장, 벌목현장, 가내수공업장 등에서는 실린더 하나짜리 엔진을 사용해서
나무를 베고, 곡식을 빻고, 잔디를 깎는 등 ... 가정부터 산업현장 구석구석의 수많은 곳에서 쓰이게 되었습니다.
(1900년대 초에는 미국전역에서 약 18,500여개의 내연기관 엔진이 사용되었음) ... 또한 1893년 시카고 세계박람회에서 선보였던
가장 강력했던 내연기관 엔진모델은 35마력 수준이었지만, 7년후인 1900년에는 무려 1,000 마력 수준의 엔진들이 시장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896년에 헨리포드(Henry Ford) 라는 32세 기계공은 자신의 첫번째 사륜차[쿼드러사이클(quadricycle)]를 만들어 판매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자동차 산업의 혁명적인 역사가 시작되던 순간 이었습니다.
1905년에 미국의 자동차 공장은 대략 120 여개에 1만명의 노동자를 고용하였고, 1923년이 되면 공장의 숫자는
약 2,500 여개로 늘어나게 되어 미국에서 가장 큰 산업중 하나가 됩니다 ... 더불어 1960년에 자동차산업 노동자에게
지급된 임금총액은 1890년의 미국 전체 국민소득에 근접했었습니다.
자동차 산업은 가죽과 고무, 납, 수은, 강철 등의 수요를 폭발적으로 불러일으키게 되었고,
미국 전체에서 생산되는 라디오의 3분의 1을 흡수했습니다 ... 뿐만 아니라 자동차 산업에서 연간 소비되는 화학제품의 무게는
무려 250억파운드(약 1,134 만톤) 였는데 ... 이것은 압도 할만한 무게 이전에 미국전체 화공학자들의 고용을
두 번째로 많이 하게되는 산업이었다는 것입니다[▶ 1위 국방]
또한 미국 정부가 인정한 특허의 6분의 1이 자동차 산업에서 나왔으며, 소비지출의 10%를 차지하는 산업이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자동차 산업의 엄청난 영향력 뒤에는 노동자들이 가만히 컨베이어(conveyor) 앞에 서있으면 일감이 멈추지 않고
자동적으로 지나가면서 노동자에게는 단 한순간도 쉴 틈을 주지않는 획기적인 (일관)작업시스템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 어셈블리라인(assembly line) : 부품을 컨베이어 체계에서 조립하는 공정 ]
일관작업열은 그 전까지 여러개로 나눠져 있던 부품조립 업무를 연속적인 흐름의 생산체계로 만든, 당시로서는 그야말로
생산방식의 혁명이었던 것입니다. 300미터 길이의 컨베이어 벨트에 많은 노동자들이 길게 늘어서서 350여개의 부품을 쉬지 않고
조립함으로서 T형 자동차가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 참고로 포드는 소, 돼지가 부위별로 도축되는 도살장에서 컨베이어 벨트 아이디어를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
< 포드의 혁신 가운데 하나는 움직이는 조립라인의 설치인데, 이것은 동물들이 움직이는 라인에 따라 부위별로 해체되는
시카고의 도살장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다. 포드의 조립 라인에서 각각의 근로자는 차체가 라인을 따라 움직일 때
왼쪽 문고리를 조립하는 것과 같은 특화된 업무가 부여된다. 1929년 T형 자동차 생산이 중단될 때까지 1천5백만 대
이상의 자동차가 이렇게 생산되었다. - [현대 사회학 (제6판). (753쪽)/ 앤서니 기든스(Anthony Giddens). 을유문화사 ] >
이것이 바로 포드 자동차가 개발한 대량생산의 획기적 계기가 되었던 포디즘(Fordism)입니다.
하지만 포드자동차의 생산라인은 건강한 성인 노동자에게도 오래 버티기 힘든 노동강도가 매우 높은 작업장 이었습니다.
1908년에 약 850달러($) 수준이었던 자동차 모델<T>의 주문이 쇄도하면서 생산라인의 노동강도가 더욱더 높아지자
생산라인의 노동자 절반 정도가 매달 그만두기도 했습니다 ... 그러자 헨리 포드(Henry Ford)는 노동자의 급여를 더 높여주었고,
1914년에는 하루 8시간 노동에 일당이 5달러($)로 높아졌습니다.(당시 철강노동자는 12시간 노동에 1달러($)의 급여를 받았음)
헨리 포드가 노동자를 귀하게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라, ‘규모의 경제’의 효과를 헨리 포드는 일찍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포디즘(Fordism) 에 의해 자동차(생산물) 1대당 생산비가 떨어지고, 모델<T>도 300달러($)대 수준까지 가격이
하락하게 되었습니다.
[◆ 규모의 경제는 대량생산으로 단위당 생산비용이 줄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 빵공장의 보통크기의 오븐(Oven)이
하루 100 개의 빵을 구워내고 있을때 ... 이것을 초대형 오븐(Oven)으로 교체한다면 하루 1만개의 빵을 생산할 수 있습니다.
만약 초대형 오븐으로 교체하지 않은 상태에서 빵공장의 직원이 10명이고 인건비로 하루에 50만원(5만×10명)이
지출되고 있었다면, 이 금액을 하루 생산된 빵 100개로 나눠보면 빵 1개에 5천원(50만원/100개)의 비용을
배분할수 있게 됩니다. 즉, 빵(생산물) 1단위당 비용이 5천원이 되는것입니다 ... 그런데 초대형 오븐으로 교체하면
하루 생산량이 1만개가 되므로 빵(생산물) 1단위당 비용은 50원(50만원/1만개)으로 대폭 줄어들게 됩니다 ... 따라서
이처럼 빵생산의 대량생산 체계는 생산비용을 낮춰 경쟁관계의 기업들보다 우위에 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규모의 경제체계를 만들려면 초기에 엄청난 투자(선행투자)비용이 들어가게 됩니다 ... 결국 규모의 경제로
생산비용이 낮아지겠지만, 그만큼 엄청난 선행투자비용이 필요하게 되는 소위 "트레이드오프(Trade Off)" 가 발생하게 됩니다.
[▶ 트레이드오프(Trade Off) - 두 개의 정책 목표 가운데 하나를 달성하려고 하면 다른 목표의 달성이
늦어지거나 희생되는 경우의 양자간의 관계 ] ... 이렇게 규모의 경제체계를 남보다 먼저 갖추게 되면
그 뒤의 후발 기업들은 엄청난 선행투자비용 때문에 시장진입이 매우 힘들어 지게 됩니다. 다시말해 후발 기업들이
규모의 경제체계를 만드는 동안에 선발 기업은 시장을 선점하면서 그 규모를 점점더 키워 나가게 되는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최초의 선행투자로 먼저 규모의 경제를 만들어놓은 기업을 중심으로 시장이 점점 독과점의 형태로 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당시 포드[Ford], 제너럴 모터스[GM: General Motors], 크라이슬러[Chrysler], 세 개의 회사가 미국내 자동차시장의 약 83%를 차지했으며,
더 중요한 사실은 미국 자동차 생산대수가 당시 전세계 자동차 생산대수의 약 80% 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무렵이었던 1914년에 미국의 생산규모는 이미 전세계 총생산의 33% 규모였습니다.) ]
전쟁(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미국은 채무국 이었습니다 ...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은 미국을 세계 최강국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전쟁의 직접적인 피해가 거의 없었던 미국은 전쟁중(1차대전)에 유럽에 돈과 물자를 공급하면서 ... 전쟁이 끝나갈 무렵에는
채권국으로 바뀌었고,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가 되어있었습니다 ... 또한 금융의 중심이 영국 런던에서 미국의 뉴욕으로 이동했고,
금 보유량도 전쟁 전에는 19억 달러($) 수준 이었던것이 전쟁이 끝난 다음에는 약 46억달러($)로 늘어났으며,
몇 년 뒤에는 세계 금 보유량의 절반을 미국이 차지하게 됩니다 ... 화학분야에서는 듀폰(Du Pont)이 셀로판(cellophane)을 생산하기 시작했으며
청소기.세탁기.냉장고 등은 제너럴 일렉트릭[GE: general electric]과 웨스팅하우스[Westinghouse]의 2개 회사가 독점 생산하며
소위 “부엌의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 이밖에도 라디오, 영화(헐리우드), 광고 및 유통산업 등 여러 다양한 분야의 산업이
함께 성장하면서 그야말로 “소비가 미덕”인 사회풍조가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전후 1920년대의 이러한 경제적 번영은
미국민들에게 자본주의 체제가 그 어떤 체제보다도 우월하다는 확신을 심어주게 되었습니다.
실질GDP(1인당 GDP포함)와 인구의 증가규모만 보아도 당시 미국은 그야말로 지치지 않는 야생마와 같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경기가 절정을 이루던 1920년대의 미국사회는 백인 및 유색인들의 평균기대수명이 약 10년이 늘었으며, 점점 불어나는 인구와 GDP는
미국이 도시화 되는데 커다란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 당시(1920년대)에 백만이 넘는 도시가 2개가 생겨났으며,
50만이 넘는 도시는 5개, 농촌에서 도시로 분류가 새롭게된 것이 무려 1,500 여개 였습니다 ... 실업률과 평균노동시간도 줄어들었으며,
특히 제조업의 주간노동 시간은 1900년의 평균 60시간에서 44시간으로 떨어졌습니다. 여기에 시간당 소득은 두배이상 올랐으며,
소비자물가는 충분히 감당할 만한 수준으로 높지 않았기 때문에 실질임금은 적게는 10%에서 많게는 20% 수준까지 상승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미국의 엄청난 호황은 당시 미국의 허버트후버 대통령의 입으로 증명됩니다.
"오늘날 미국인들은 빈곤에 대한 최종 승리의 고지에 그 어느 곳, 어느 때 보다도 가까이 와 있습니다.
물론 아직 그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신의 가호가 함께 한다면 우리는 조만간 이 나라에서
빈곤을 영원히 추방할 수 있는 날을 보게 될 것입니다." - 허버트 후버(미국 31대 대통령, 1928년 연설中)
허버트 후버 대통령이 미국사회에서 빈곤을 추방할 날도 멀지 않았다고 말했던 것처럼,
당시(1920년대) 미국의 경제는 엄청난 호황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 그 중에서도 특히 주식시장의 붐은 거의 축제에
가까웠다고 말할수 있는데 ... 대공황 직전인 1929년경에는 거의 1천만명의 사람들이 주식시장을 통해 그 어떤 물리적 노동이나
아무 고통없이 돈이 불어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 그러나 당시 사람들의 주식투자 행태는 상당히 투기적인 매매였습니다 ... 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이것을 투기적 매매라고 인정하지 않았으며 ... 또한 당시의 분위기는 투기매매로 인지(認知) 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이렇게 포디즘, 화학, 내구소비재 등 산업 전반의 호황과 함께 주식시장 과열, 후버 대통령이 미국에서 빈곤을 추방할 날도 멀지 않았다고
말할 정도로 미국의 경제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을때 ... 정작 미국의 어두웠던 또 다른 현실은 뜨거운 경제호황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1862년 홈스테드법(Homestead Act, 자영농지법) 에 의해 미국의 서부는 수많은 농부들의 삶의 터전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홈스테드법은 미시시피강을 기준으로 서쪽지역의 미개척지를 신속하게 개척하기 위해서 5년간 일정한 토지에 거주하여(이민자 포함)
개척을 한 사람들에게는 160에이커(약 20만평)의 토지를 무상으로 제공하기로 했으며, 5년간의 거주가 어렵다면,
대신 6개월을 경과하면 그 토지를 1에이커(1,226평)에 1달러 25센트의 염가로 구입할수있는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홈스테드법(Homestead Act,)의 발효와 함께 사람들은 서부로 모여들었습니다 ... 서부는 그야말로
개척자들[프론티어(Frontier)]의 세상이 되었습니다 ... 더불어 당시에는 철도의 붐이 있었기 때문에 농산물 운송의 염려도 덜게 되었으며,
세계최초로 가솔린 엔진이 발명되면서 이것은 농기계에도 적용되어 농산물의 수확량이 대폭적으로 증가하게 되었고,
JP모건같은 은행가들이 있어 자금융통에 있어서도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 하지만 이러한 기술과 제도의 진보가
농업부분에서는 오히려 독이 되고 말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서부에 정착해서 농사를 짓게되자, 이후에 시장에는 너무나 많은 식량이 공급되게 되었습니다.
식량은 기본적으로 수요가 비탄력적 입니다 ... 회사앞 식당의 1만원짜리 갈비탕이 어느날 5천원으로 내렸다고 해서,
매일 점심때마다 갈비탕을 2그릇을 사먹을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한 그릇에 2만원이 되었다고 매일 점심을 굶거나
편의점에서 싸구려 빵만을 사먹을 수는 없습니다.
홈스테드법과 기술의 진보로 식량 공급이 대폭적으로 증가하여 가격이 떨어졌다면, 농부들에게는
남들보다 농산물을 더 많이 생산하여 더 많이 판매하는 수밖에는 별다른 해법이 없었습니다 ... 그러나
농부들에게는 결과적으로 예전보다 더 많은 부채와 함께 가격이 더 떨어진 농산물만 남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이 과정에서 농기계와 농사자금과, 오일과 식량을 운송하기 위해 이용했던 철도는 모두 당시 산업을 독점하고 있던
거대기업(트러스트)들 에게서 구입하고 이용했기 때문에, 이들(트러스트)만 더욱더 거대해지는 결과를 낳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더해 유럽에서도 다시 식량을 생산하게 됩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총력전의 형태였습니다. 쉽게말해 전쟁에 참여한 국가들의 대부분의 성인 남자들은
모두 전쟁에 참여하였고, 남성들의 빈자리는 여성이나 아이들, 혹은 노인들이 맡았는데 ... 이때에 국가생산의 상당 비중이
전쟁과 관련된 군비지출 이었습니다 ... 당시 영국은 전체생산에서 군비지출 비중이 38%(1916년~1917년) 였으며,
독일은 무려 53%(1917년) 였습니다. 이것은 결국 국가의 대부분의 자원이 전쟁에 동원되었다는 것입니다(전시경제, 명령경제).. 따라서
1차대전 중에는 대부분의 전쟁 참여국들은 농사짓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습니다.(성인남자가 모두 전쟁터에 있었으므로) 그래서
농작물의 대부분을 당시 주요공급자였던 미국, 캐나다, 호주, 아르헨티나 등으로부터 수입했었습니다.
더불어 수입이 증가하자 공급자였던 미국과 호주, 캐나다 등의 국가들은 농작물과 축산물의 생산량을
더욱더 증대시키기 위해 은행으로부터의 차입규모를 늘려 토지를 구입했으며(경작면적 확대), 생산설비(각종 농기구 등) 또한 증강 시켰습니다.
[ ▶ 대공황 당시 세계무역의 40%가 농산물이었고, 20%가 광산물 원료였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자 많은 (서유럽)국가들은 산업생산설비와 함께 농업부분도 평시체제로 돌려놓기 위해서 노력했는데
이때에 서유럽 국가들도 농작물 생산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고, 이것은 결국 전세계적으로 농업을 과잉상태로 만들게 되면서
농산물의 가격이 폭락하고, 농업분야가 침체기로 접어들기도 했으며, 특히 미국에서는 농업지역 은행들의 부실채권이
더 크게 늘어나는 상황이 되기도 했습니다 ... 앞서 식량의 수요 비탄력성에 대해서 살펴보았듯이 농산물은 생산과잉으로 가격이
하락(폭락) 하더라도 수요가 갑자기 증가하지는 않습니다 ... 따라서 당시에는 농산물의 가격이 계속적으로 하락함에도 불구하고
재고량은 오히려 늘기만 했습니다.
대공황이 시작된 1929년의 농산물가격을 살펴보면 기록적인 폭락이 있었는데 ... 밀의 도매가격은 약 70%가 폭락했으며,
면화.고무.설탕.커피.양모.소고기 등 주요 농축산물 가격도 약 50%가 떨어졌습니다. 이러한 기록적인 폭락은
운송비조차 감당할수 없게 되면서 그 자리에서 폐기처분 되는 경우가 더 많았으며, 아예 수확을 포기하는 농가들도 생겨났습니다.
미시시피강에 600만 마리의 돼지가 도살되어 버려졌고, 목양업자는 양을 죽여 매가 쪼아먹게 놔두기도 했습니다 ... 이렇게
농업분야의 상황(특히 곡물 부문)이 점점더 피폐해 지면서 매년 자기소유의 땅을 잃고 소작인으로 전락하는 농업인구의 숫자는
늘어만 갔으며, 1929년에는 전체 미국 농업인 10명중 4명은 더 이상 자기 땅에서 농사를 지을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 더불어
당시에는 농업분야 소득이 도시의 공업분야 소득에 많이 뒤쳐져 있던 상황이었는데 ... 1910년에 농장 노동자의 1인당 소득은
도시의 비농업 노동자 소득의 40% 수준이었지만, 1930년이 되면 이 수치가 30% 미만으로 떨어져 농업분야 상황은
더욱더 악화 되었습니다 ... 물론 당시에는 농업부분 뿐만 아니라 기업들의 공업생산품 가격도 하락했습니다 ... 하지만
공업분야는 소위 "셰레(Schere)현상" 이라고 불리는 "협상가격차(鋏狀價格差)"로 인하여 농산물 보다는
가격이 덜 떨어졌던 상황이었습니다 ~
농작물은 보통 기후(비, 바람, 온습도) 같은 자연적 조건 때문에 생산량 조절이 어렵게 되는경우가 많습니다 ... 또한
당시의 농업종사자들 대부분은 모래알처럼 소규모 개인 농업인들이 대다수를 차지했기 때문에 만약 자신들이 생산한 농작물의
가격이 하락한다면 농업인들 서로가 조직적으로 협력체계를 구성해서 생산량을 줄이거나(공급축소) 하는 ... 가격하락에 대한
나름의 신속한 대응을 할 수가 없었던 상황이었습니다 ... 오히려 가격이 하락하게 되면 상황이 더 악화 되기 전에,
더 싸게 더 많이 팔아 치우는것 밖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공업부분은 자연조건 때문에 생산에 차질이 발생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므로 생산량의 조절이 용이했고,
당시의 거대 독점기업(트러스트 Trust)들은 시장을 거의 자신들이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생산(량)은 물론이고,
유통부분에서도 통제가 가능했던 상황이었습니다 ... 따라서 농산물의 가격하락에 비해서 공산품의 가격은 상대적으로
덜 떨어졌던 것입니다[가격의 하방경직성] ... 그래서 시간이 경과될수록 이러한 농산물과 공산품 간에 발생하는 가격의 격차는
점점더 커지게 되는데 ... 이러한 현상을 셰레(schere) 현상이라 말합니다 ... <셰레는 독일어로 "가위"를 뜻합니다.>
[▶ (농산물과 공산품의) 가격 격차를 시계열적(時系列的)으로 그래프화 하였을때 두 선이 교차한 후
가위 모양으로 벌어진 모양과 같이 점점 확대되어 간다는 데서 붙여진 말인데, 결국 셰레(schere)현상은
독점(공산품)과 비독점(농산물)의 가격 차이에서 오는것입니다. 참고로 오늘날의 공산품 생산은 기업들의 치열한 경쟁관계 속에서
기술혁신 및 저임금 국가들로의 생산거점 이동 등으로 인한 과잉생산으로 가격이 떨어진 반면에 ... 온난화 및 친환경 농산물의
선호도가 높아짐으로서 농업생산품의 가격이 상승하는 '역(逆)셰레현상' 도 발생하고 있습니다.]
1929년 10월 29일 ... (다우)주식의 폭락은 사람들에게 미래의 불안과 불확실성을 주입하면서
내구 소비재의 수요를 급감시켰습니다 ... 더불어 (주식)시장이 불안해지자 대출받아 투자했던 수많은
투자자들은 은행들의 상환요구에 주식을 팔아야 했고, 이것은 또다시 주식시장에 악영향을 끼쳤습니다.
하지만, 당시 주식시장은 마비에 가까운 상태였기 때문에 팔고 싶어도 팔리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았으며
이것은 결국 사람들의 자산유동성을 감소시켜(주식이 팔리지 않아 현금확보가 어려움) .. 당장의 소비할
여력이 줄어들었던 것입니다 ... 대공황이 한창 진행되던 1932년 7월의 미국의 공업생산은
3년전인 1929년 7월(다우지수 폭락전)에 절반수준으로 하락했고, 생산자 물가는 40%나 떨어졌습니다.
또한 실업률은 1933년이 되면 무려 37.6%로 상당히 심각했었습니다 ... 이렇게 사태가 심각해졌던 이유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은행공황(Banking Panics) 이었습니다.
먼저 그 당시 미국에는 소규모 단일점포 형태의 단점은행(Unit Banking System) 들이 난립하고 있었는데 ...
당시에는 거대기업(트러스트)과 거대금융자본(J.P 모건)들의 폐해가 상당히 심했었습니다.
산업적 측면이든, 금융이든 ... 규모의 경제로 산업을 거의 독점했기 때문에 소비자 입장에서는 그들의(독점트러스트) 일방적 가격을
수용해야만 했었던 것입니다 ... 따라서 지자체 입장에서는 지역사회 사업자들과 농민, 금융소비자 들에게
좀더 신속하고 편리한 금융서비스를 지원할수 있다는 부분에서 단점은행들을 환영했지만, 규모가 작다보니 업무처리가 원활하지 못했고
소규모의 독립적 형태였기 때문에 (금융)산업측면에서 규모의 경제를 이룰수 없었으며, 다른 지역의 은행들과의 협조체제도
취약하다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국지적이고 지역적인 작은 규모의 은행공황에도 상당히 취약할수밖에 없었던
구조적 문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 이러한 단점은행들의 문제점은 곧바로 이미 살펴본 1920년대의 농업공황과
1929년 시작된 대공황에 의해 무참히 쓰러졌던 것입니다 ... 특히 은행공황은 산업과 금융중심지였던 동부가 아니라 ... 내륙부터
공황의 조짐이 싹트고 있었는데 ... 농산물 수요가 급증했던 전쟁(1차 세계대전)중에 지역 농촌에 많은 자본을 대출해줬던 은행들이
전쟁 종료후 농업분야의 과잉생산에 의한 몰락(농산물가격하락)과 함께 부실(채권)을 떠안고 버티고 있었던 것입니다.
1929년 10월, 다우지수의 폭락으로 시작된 대공황은 ... 은행공황(Banking Panics) 에 의해 그 정도가 심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은행의 공황은 실물부분의 공황을 초래했고, 특히 기업들의 영업활동을 위축시켜 또다시 은행들에 부실채권이 쌓이면서
은행들을 도산시켰습니다 ... 결국 은행의 위기가 공황의 과정을 심화시켰고, 또 그것이 결과로 귀결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은행들의 보수적 경영(신용좋은 기업.사람만 상대하겠다!)과 은행을 믿지 못했던 소비자들의 현금선호 현상이 맞물리면서
신용창조 기능을 떨어뜨렸습니다 ... 다시말해 은행들이 신용좋은 고객들만 선별적으로 상대하다보니 평소보다 대출 규모가 줄어들었고,
고객들도 은행을 믿지못해 현금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났으며, 은행입장에서도 대출에 활용할 자금이 줄어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 이것은
결국 통화량을 감소시켜 이자율을 높이고, 높아진 이자율은 기업들의 투자나 영업활동을 더욱 더 위축시켰다는 것입니다 ... 특히
당시 주식이나 채권발행이 어려웠던 중소기업들은 오로지 은행의 차입형태로만 자금을 조달했었는데 ... 은행들의 보수적 경영과 도산 등으로
투자및 영업활동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은행공황 등은 실물경제의 위축으로 이어졌고, 당시 빚(Debt) 때문에 고통받던 수많은 경제주체들에게 채무부담을 가중시켰습니다.
경기침체로 물가가 하락하자(디플레이션) 대출을 통해 집이나 주식을 사고, 자동차를 구입했던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디플레이션 상황에서는
부채의 상환부담이 더욱더 가중되는 ... 소위 "부채-디플레이션(Debt-deflation)" 이라는 악순환에 빠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부채디플레이션은 미국의 경제학자 어빙피셔(Irving Fisher)가 대공황을 설명하면서 만든개념인데 ... 물가가 하락하면
실질금리(명목금리 – 물가상승률)가 상승하고 이로인해 부채상환에 부담이 가중된 경제주체들이 빚(대출)을 갚기위해
서둘러 자산을(부동산) 매각하고 ... 이것은 결국 다시 자산가치를 떨어뜨려 경제전체가 디플레이션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예를들어, 김철수가 2억짜리 아파트를 모두 은행대출을 받아 구입했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첫해에 김철수는 열심히 일해서 대출원금 2천만원을 상환했는데 ... 그해에 물가가 20% 하락해서 아파트 가격이 1억 6천만원이 되었다면
그 시점에 김철수는 은행대출금(부채) 2천만원을 상환했음에도 불구하고, 집을 팔아(1억 6천)도 대출금 갚는데 오히려 2천만원이 부족하게 되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 이것은 결국 물가하락의 영향으로 부채상환 부담이 더 늘어나서 소비를 위축시키고, 위축된 소비는 실물경제에
타격을 주게된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빚을 갚기위해 집(아파트)을 서둘러 팔게되면 집값 하락이 더 가속화 된다는 것입니다.
[▶ 첫해는 집값(자산)도 2억이고, 부채(은행대출)도 2억 이기 때문에 김철수의 부채의 실질가치는 100%(2억)입니다 ... 하지만
1년뒤 물가가 20% 하락해서 보니, 내집은 1억6천이고, 은행대출(부채)은 1억8천이라서 김철수가 갚아야 하는 부채의 실질가치가
오히려 12.5% 더 늘어난 것입니다.]
이러한 부채디플레이션(Debt-deflation)으로 인해 은행들의 담보가치와 자기자본이 감소해 ... 이것은 결국
금융위기와 신용경색을 더욱더 심화시키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대공황의 신음속에서 모두가 고통받고 있을때 ... 세계각국들은
자국산업을 보호하기 위해서 관세율을 인상하고 수입할당제 같은 수입제한 조치를 취하게 됩니다(@보호주의 정책) ... 특히 미국은
1930년 6월 스무트-홀리 관세(Smoot-Hawley Tariff)법을 도입하면서 관세율을 대폭 인상하자 ... 본격적으로 전세계가
보호무역주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 이후 루즈벨트의 뉴딜정책으로 대공황은 어느정도 해소가 됩니다.
미국 다우지수붕괴, 은행공황, 공황속에서 계속되는 각국의 긴축정책, 부채디플레이션(Debt-deflation),
여기에 각국의 보호무역주의 등 ... 모두가 대공황의 상황속에서 헤엄치기 너무나 알맞은 조건들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1929년 ~ 1933년) 동안에 세계공업생산은 36%, 세계무역량은 25%가 감소했습니다.
세계 대공황의 직접적인 원인은 보편적으로 1929년 10월 미국 주식시장(다우지수) 붕괴가 원인 이라는 견해들이 많지만,
결국 이러한 주식시장 붕괴는 1928년 여름부터 시작된 미국의 통화긴축(금리인상) 때문이라는 얘기도 많습니다 ... 그러나 이부분도
조금더 인과관계를 살펴보게 된다면 제1차 세계대전이후 고전적 금본위제 복귀를 시도했던 세계 각국들의 긴축정책 이었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원인을 환원하고 환원하며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과거 역사 자체가 모두 원인이 될수 있을 것입니다 ... 아무튼
"보이지 않는 손" 이라는 18~19세기 자유 방임주의는 1929년 대공황으로 그 영향력을 잃게 됩니다. ... 그리고 이때 등장한 대안이
바로 다들 잘 아시는 "수정자본주의(케인즈주의)" 입니다.
수정자본주의는 정부가 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소득 평준화와 완전고용을 이루는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것입니다.
1929년 대공황 이전에는 아담 스미스의 자유주의 이론에 따라 경제가 운용되었습니다. ... 당시의 정부는 균형예산을
따르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대공황인 상황에서도 세입이 줄어들면 세출도 그에 맞게 균형을 유지하려다 보니
경제는 더욱 더 악화되었는데, 당시 미국의 실업률은 20% 까지 치솟았고, 실업자도 대략 2천만명까지 증가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은 후버 대통령의 재선 실패와 프랭클린 루스벨트(32대 대통령) 당선으로 이어졌고 ... 인연인지,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거의 비슷한 시기에 독일은 히틀러가 등장하는데 ... 히틀러는 엄청난 돈을 풀어(재정지출)경제를 회복시키게 됩니다.
[▶ 당시 히틀러는 중앙은행 역할을 무시한채 돈을 풀어 고속도로 아우토반도 건설했고, 청년들에게는 결혼자금을 지원해서 내수증가를
꾀했습니다. 그 결과 700만명에 가까웠던 실업자 문제가 어느정도는 해소되었고, 1936년에 베를린 올림픽도 성공적으로 치르게 됩니다.]
아이러니 하지만, 1936년은 케인즈의 <고용.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이 출간된 해였습니다. 이것은 다시말해 케인즈 이론이
나오기 전에 히틀러가 이미 실증적으로 케인즈 이론을 증명한 셈이 된 것입니다. ]
1929년의 대공황은 이전까지의 (자유주의)경제학이 물러가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한마디로 자유주의 경제학은 대공황 같은 세계적 규모의 공황을 설명하고 대안을 찾는데 한계가 있었음을 드러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케인즈 이론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의 이론적 지침이 됩니다. 그리고
케인즈는 마샬을 포함한 고전파와의 결별을 선언했고, 당시 상당수의 경제학자들이 케인즈 이론에 동참하면서
소위 "케인즈 학파"가 만들어 집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시기에는 미국 사회가 큰 변화를 겪게 됩니다.
대공황을 해결해 나아가야 하는 어려운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고소득계층의 과세를 강화했고,
저소득 계층의 세금부담은 줄였습니다. 한마디로 부자증세, 저소득 감세 정책을 추진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노동조합 활동을 정부차원에서 보장했는데, 미국사회에서 노동조합이 하나의 경제주체로서
인정받고 등장하게 된 것이 바로 이 시기였습니다. ... "노동조합"을 정부차원에서 인정한다는 것은
그 의미가 상당히 중요합니다. ... 기본적인 소득분배는 노동시장에서 1차적으로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독과점에 가까웠던 거대 트러스트와 같은 기업들은 물론이고 규모가 작은 기업들도
노동자들 보다는 우월적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임금인상이 현실적으로는 상당히 어려운게 당시 현실이었습니다.
노동자의 임금협상은 당시 기업들이 자율적으로 결정해 왔었는데, 노동조합 활동이 보장되자 임금협상이 과거보다는
훨씬 더 유리하게 작용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소득분배에도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여기에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1935년에 사회안전망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되는데 ... 이때 등장한 것이
바로 연금과 의료보험 입니다. 하지만 대통령 서명까지 끝낸상황에서 의료보험은 위헌 판결을 받으면서 시행되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 때의 실패가 오늘날 까지 이어져 미국사회에서 의료보험 제도는 지금도 가장 핫한 이슈중에 하나가 된 것입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정책과 여러 개혁작업은 이후 후임 대통령까지 계속해서 이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케인즈 이론은 1965년에 이르러 미국사회에서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 심지어 밀턴 프리드먼도(통화주의 학파의 거두)
자신도 케인지언 이라고 할 정도로 당시에는 케인즈주의가 대세였습니다. ... 또한 이 당시 미국 경제상황도 중산층이
상당히 두텁게 형성되었으며(미국 경제 황금기) ... 이러한 분위기는 1973년 1차 오일쇼크가 오기전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1973년 1차 오일쇼크가 터지자 성장이 둔화하면서 물가는 치솟는 소위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 상황속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 케인즈 이론이 작동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정부가 아무리 재정지출을 늘려도 고용은 늘지 않았고
경기가 회복되지 않는 상황에서 물가는 계속 오르기만 했던 것입니다.
이후 미국은 카터 대통령 이후, 1980년 공화당의 레이건이 대통령을 이어받게 되는데 ... 이는
네오리버럴리즘(Neoliberalism) ! ... 즉, 현재까지 이어져 오는 본격적인 "신자유주의"의 등장이었던 것입니다.
@ "정부는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가 아니라, '정부' 자체가 문제다! - 레이건"
@ "사회 같은 것은 없다 -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
1979년(대처), 1980년(레이건) ... 영국과 미국의 최고 통치권자가 바뀌면서 이때부터 신자유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게 됩니다.
사실 신자유주의는 독일에서 먼저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독일은 무조건적인 시장 제일주의가 아니라, 시장도 실패할수 있기 때문에
시장이 하지 못할때는 정부가 나서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 이것이 바로 "사회적 시장경제" 입니다.
[◆ 독일 얘기를 하자면 '질서자유주의' 같은 좀더 깊은 사상적 기반을 얘기해야 하므로 여기서 생략하고 다음 기회에 ~ ]
레이건 행정부때 정부는 무조건 작아져야 한다며, 모든 것을 민간(시장)에게 맡겨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논리에서 시작된 것이 감세정책 입니다. ... 결국 1970년대 까지 이어져온 누진세율 구조를 바꾸었고
(실질적으로는 부자감세), 이 결과 미국의 분배 상황을 상당히 심각해 졌습니다.
2010년 기준으로, 미국의 최상위 1% 가 보유한 (미국내)사유재산은 전체 사유재산의 거의 40%에 육박하고
그 이하 80% 미국인이 미국내 사유재산의 12% 수준만 보유하고 있습니다. ... 신자유주의가 시작된 이후
현재까지 거의 30여년 동안미국 최상위 1%의 자산은 거의 120% 증가했으나, 하위 40%의 자산은 오히려 60% 가 감소했습니다.
오늘날 미국 사회의 양극화는 더이상 많은 설명이 필요 없듯이 상당히 심각한 수준에 와 있으며, 비단 미국만의 상황이 아니라
이러한 상황은 영.미식 신자유주의를 도입한 대부분의 국가들에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시장원리를 중시한다며, 케인즈 이론은 이제 한물간 이론이라며 신자유주의를 도입했는데 ... 이후 미국은
2008년 금융위기(서브프라임 모기지, 리먼사태)가 발발하자 모순되게도 천문학적인 돈을 풀었습니다(양적완화)
시장 기능을 최고로 중시하면서도, 오히려 정부가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것입니다.
[@ 사실 2008년 서브프라임 사태는 "(파생)금융" 차원의 성격이 강합니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적 접근으로 설명하기에는 약간은 부족합니다.(다른 차원의 얘기라는 뜻임) ... ]
케네디 대통령은 경제정책은 현재 당면한 문제를 풀기위해 여러 다양한 이론을 적용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당위적인 논리(Dogma)에 빠져 정책을 실행해서는 안된다고 얘기했습니다.
서독은 1966년 공산당 창당을 허용했습니다. ... 공산당이 등장해도 서독은 당시의 (서독)사회안전망(주거,의료,교육 등)에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크게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후 의회 선거에서 공산당의 득표율은 2% 수준에 그쳤습니다.
하지만, 2016년 현재 유럽은 극우정당들의 인기몰이가 시작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
@ 독일 : [독일을 위한 대안]
@ 덴마크 : [국민당]
@ 핀란드 : [핀란드인당]
@ 프랑스 : [국민전선]
@ 스위스 : [국민당]
@ 폴란드 : [법과 정의당]
@ 헝가리 : [피데스당]
유럽의 (무슬림)테러와 난민, 그리고 여전히 어려운 경제상황 등이 유럽사회에서 극우 바람몰이를 하고있는데
나름 사회적 안전망이 갖춰진 유럽사회에서도 경기침체는 사상(이념)의 이동욕구의 기제로 작동되는 것이
오늘날 "경제"라는 것의 실체적 모습인 것입니다. ... 결론적으로 오늘날의 세계화된 경제는 어느 (좌.우)한가지 이론만으로는
해결하기가 도저히 불가능한 상당히 버거운 모습으로 변태되었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 그리고 약극화와 함께
자국의 중산층 붕괴는 이러한 경제의 파괴적 속성을 강화하여 종국에는 치료가 불가능한 상황까지 몰고갈수 있는
매우 위험한 현상이라 할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포퓰리즘(populism)이 가장 왕성할 때 나타나는 특징이 있는데 ... 그것은 다름아닌
그 나라의 중산층이 붕괴될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 케인즈 주의, 신자유주의, 사회적 시장경제 등
수많은 다양한 (경제)실험에서 자국이 선택한 이론이 그 무엇이 됐건간에 저는 개인적으로
"중산층 붕괴"는 거의 "자국경제의 암"과 같은 치명적 질병이라 명명하고 싶습니다. ... 오늘날 (세계)경제는
정치, 기업, 노동조합, 조세, 인구(이민), 금융, 환경 등 다양하고 복잡한 수많은 변수들에 의에 영향을 받는 구조입니다.
대공황의 상황에서 오일쇼크를 거치며, 80년대 신자유주의 시대를 (지금까지)살아오면서 단 한순간도 세계경제는
동일한 자본주의 시대였던 적이 없었습니다. ... 매 순간 순간마다 항상 변화의 연속이었으며, 최근엔 자본주의 도입이후
유래를 찾아볼수 없는 "마이너스 금리"를 도입한 국가들도 등장하고 있을 정도로 자본주의 역사는 항상 변화의 흐름속에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 역사가 다시 반복될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역사가 시작될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현재로서는 과거를 반추하며 미래를 생각하는 것이 평범한 경제 주체들에겐 가장 효율적인(경제적인) 행위일것 이라 생각되어
주제넘게 긴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 게시물을 좀 늦게 봤습니다. ... 주량이 많이 약함에도 불구하고,
금,토일 이틀간 감내하기 힘들 정도의 술을 마시고, 여파로 하루 종일 누워있다가
2시간 넘게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타이밍이 좀 늦었습니다. ... 글이 길어 읽기가 부담스러운 분들에겐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 웃음이나 감동 처럼 이슈인에서 얻어가는게 많아서
글을 쓰면 최대한 정성을 다하려고 하는데 가끔 글이 너무 길다고 안좋게 보시는 분들도 계셔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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