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이 좀 거창한데 너무 신경쓰지 마세여 ~ 글에 포함된 내용을 단순히 제목에 집어넣은 것 뿐입니다.)
긴 얘기가 될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어려운 얘기는 아닙니다.
국민국가와 국민, 그리고 공동체의 일원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평범한 이야기가 될 것이며,
동시에 초국가적 공동체와 그 구성원들 간의 복잡 미묘한 “이해관계”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조금은 생각을 요하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도시를 설계하는 사람들은 헬리콥터뷰(Helicopter view)와 스트리트뷰(Street view) 라는
두 가지 시각에서 도시에 대한 설계를 구상한다고 합니다 ... 다시말해 하늘에서 도시의 전체적인 모습을
조망하면서 땅에서는 거리의 작은 상점과 도로, 주택 같은 디테일(Detail)한 모습과 그들의 조화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 이번 글에서는 무엇보다 헬리콥터뷰(Helicopter view)적인 접근이 필요했지만
스트리트뷰(Street view)적인 시각도 최대한 반영하려 노력 했습니다.
현재 국.내외 수많은 언론에서는 브렉시트(Brexit)에 대한 다양한 분석 기사들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경제적 파급효과, 국제 정치 지형의 변화, 환율, 보호주의 등... 쏟아지는 뉴스와 기사들을 보고 있노라면
모두가 맞는 말 같기도 하고, 또 어떤 기사는 조금은 억지스러운 부분들도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미 언론들이 쏟아낸 부분적, 혹은 선별적 내용 보다는 과거로부터의 큰 흐름을 살펴보고
그 속에서 향후 상황을 각자 스스로 판단해 볼 수 있도록 기초적인 근거 마련에 더 집중하려 했습니다.
브렉시트(Brexit)는 유럽 지역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 그리고 영국이라는 선진 국민국가가
그들 “지역”에서 탈퇴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단순한 “지역적 사건”이 왜 이토록 세계적인 화젯거리가
되고 있는지 정말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본인의 “지역”에 대한 개념 이해가 단순히 지리적 근접성 차원에서만 머물고 있다면 이제는 시선을
넓혀보는 것도 필요한 시점이라 생각됩니다. 또한 그러한 관점의 변경, 혹은 확장은 현재 자신이 살고 있는
공동체와 그 공동체가 속한 세계를 바라보는데도 상당한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에게 “지역”에 대해 물어본다면 영남과 호남, TK(대구.경북), PK(부산.경남) 이라는
용어가 자연스럽게 나올 것입니다. 그런데 비슷한 질문(금융 차원의 지역)을 금융전문가에게 물어본다면
외환시장, 주식시장, 선물.옵션.스왑.NDF(역외선물환시장) 같은 파생상품 시장을 자연스럽게 언급할 것입니다.
또한 호주는 우리나라가 지리적 근접성으로 묶기에는 조금은 무리가 있겠지만, “태평양 경제권역”처럼
경제적으로 함께 연대할 수 있는 “(경제)지역”의 개념으로 묶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더불어 페르시아어(Persian language)를 사용하는 이란과 히브리어와 유대교 국가 이스라엘은
지리적으로는 중동의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지만 아랍어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아랍 국가에는 포함되지
않으며, 아랍연맹에서도 제외 됩니다.
이렇듯 “지역” 이라는 개념은 단순히 지리적 차원에서만 머물러 있지 않고,
경제, 언어, 문화, 종교 등 ... 생각보다 다양한 영역에서 의미의 확장이 일어날 수 있는 개념입니다.
여기에 일종의 공통의 경향성이 가미된 “주의(主義)”를 삽.입한 “지역주의(Regionalism)” 개념을 살펴본다면,
실물경제를 다루는 집단에게는 지역주의가 하나의 경제(무역) 블.록을 의미하는 단어가 될 수 있을 것이고,
정치 집단에게는 “(지역적)정체성”의 발현이나 소멸을 의미하는 단어가 될 것입니다 ... 예를 들면,
냉전시기의 소련과 냉전 종식후의 미국의 존재는 유럽에게 그들만의 지역적 정체성을 강화시켰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1997년 아시아 경제위기(IMF 외환위기)는 이후 아시아 국가들에게 정치.경제적으로
“아시아” 라는 정체성이 강화되는 계기였다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정체성의 강화는 결국
“지역주의”의 또 다른 형태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탈냉전이후 WTO(세계무역기구)의 출범, 그리고 전 세계를 하나의 단일 시장으로 만들려는
소위 세계화라는 “글로벌라이제이션(Globalization)”의 움직임과 함께, 또 하나의 비중 있는 움직임이
바로 “리저널리즘(Regionalism)” 이라는 지역주의(지역통합) 흐름이었습니다.
지역주의는 포괄적 개념이며, 그 아래에는 좀 더 다양한 유형의 지역주의 영역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경제적 지역주의, 정치.군사적 지역주의(군사동맹), 단순한 지역 협의체 ... 그리고
초국가적 성격의 연합체 등이 존재하는데, 유럽연합(European Union)은 초국가적 연합체의
대표적 케이스라 할 수 있습니다.
유럽연합(EU)을 예로 들면, “초국가적(超國家的)” 이라는 의미는 한마디로 유럽연합(EU)에 소속된
개별국가들의 주권보다 연합 공동체(유럽연합)의 주권이 우위에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유럽연합(EU)은
단순한 (개별)국가 간의 협력체 차원을 넘어선 거대한 정치조직의 성격을 갖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역주의가 유럽연합(EU)처럼 초국가적 형태로 통합을 이루게 된다면, 한 분야의 협력이나 정책 조율이
다른 분야로 확산될 확률이 커지게 됩니다. 다시 말해 개별국가들이 자신들의 국가주권을 포기(혹은 일부
양도)할 만큼의 거대한 통합 조직체 안에서는 어느 한 분야만을 선택적으로 떼어내 접점을 찾는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 예를 들면, 사민주의 성격이 강한 북유럽 국가들의 노동기준과
영국처럼 (신)자유주의 성격이 강한 국가들의 노동기준을 유럽연합(EU) 이라는 단일 공동체 안으로
끌고 들어와 통합된 노동기준을 마련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또한 자동차 배기가스에 대한
환경기준도 EU 회원국마다 다를 것이며, 독일 같은 기술 선진국의 기계류 소음기준과 다른 기술 후진국들의
소음기준이 달라, 만약 유럽연합(EU)의 기계류 소음기준이 독일수준으로 정해진다면 이후 소음이 유발되는
잔디 깎기 같은 기계와 각종 건설장비 시장에서는 독일 기업들의 시장 장악력이 커지게 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초국가적 공동체(EU) 내에서의 통합기준은 각 국가들의 이해관계가 그물처럼 상당히 복잡하게
관계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한 분야에서는 자신들의 목적을 관철시킴과 동시에 또 다른 분야에서 하나를
내어주어야 하는 거래가 병행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조금씩 통합기준의 접점을 찾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통합기준 마련을 위한 협상 의제는 자연스럽게 확산되는 것입니다 ... 그래서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납득할만한 통합의 기준이 마련(마무리)되면 종국에는 경제통합과 정치통합 이라는
하나의 완성된(완전체) 지역(지역주의)이 만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경제통합”은 보편적으로 5단계를 거치는데(EU 기준으로 살펴보면) ...
◆ 1단계는 “자유무역지대”의 창설입니다.
자유무역지대는 모두가 잘 알다시피 상품교역에서 (주로)관세를 제거하는 단계입니다.
◆ 2단계는 “관세동맹” 인데, 이것은 한마디로 역내(EU 회원국 국가) 국가들끼리의 관세장벽 철폐는
물론이며, 여기에 역외(EU 회원국이 아닌 국가들) 국가들에게 EU 회원국들이 모두 공동의 관세정책을
적용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EU 회원국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관세정책을 모두 포기하는 것입니다.
[@ EU에게 관세주권을 모두 이양]
◆ 3단계는 “공동의 시장”을 구성하는 것입니다.
공동시장은 단순히 상품의 자유로운 교역과 공동 관세정책 뿐만이 아니라, EU 회원국 간의
노동과 자본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어야 하며, 기타 여러 경제적 거래에서도 장벽이 없어야 합니다.
◆ 4단계는 “(포괄적)경제동맹”입니다.
경제통합이 여기까지 왔다면, 이제 공동체에 소속된 국가들은 자신들의 조세정책과 복지정책을 비롯한
여러 주요한 경제, 사회정책을 역내(EU 안에서)에서 조심스럽게 조정해야 합니다.
◆ 마지막 5단계는 “통화동맹”입니다.
공동의 통화(유로화), 공동의 중앙은행[ECB (European Central Bank)]을 만드는 단계입니다.
그리고 현재 유럽연합(EU)은 “경제통합”의 마지막 단계인 5단계까지 도달한 상태이며,
이제 지역주의(Regionalism) 완전체라 할 수 있는 “정치통합”만 남겨두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오늘날의 유럽연합(EU)은 거대한, 그것도 국민국가를 넘어서는 초국가적 지역주의(리저널리즘)의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역주의(Regionalism)는 왜 확산되었는가? ... 하는 물음도 필요해 보입니다.
1991년 소련의 붕괴와 함께 냉전이 종식되자, 전 세계 수많은 국가들 사이에서는
소위 “국가(지역)간 협력”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일어나게 됩니다. ...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적(敵) 이라 생각했던 나라들이 냉전이 종식된 이후로는 더 이상 적이 아닌, 새로운 협력 파트너로서의
가능성으로 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더불어 세상이 바뀐 만큼 이제 국제사회도 새로운 게임규칙이
필요하다는 걸 모두가 인지했다고 할 수 있는데, 만약 냉전시기였다면 국가(지역)간의 특별한 공통의 이익이
없어도 단지 이념의 동지라면 경제적, 군사적 도움을 받기가 쉬웠습니다. 하지만 냉전 이후로는
모든 국가(지역)들이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라 실리를 찾아야만 하는 관계로 재설정 되어버린 것입니다.
더구나 이즈음 세계는 미국 주도하에 전 세계를 하나로 묶는 단일시장,
즉 세계화(글로벌라이제이션 Globalization) 물결 속에서 국가간 경쟁이 점점 더 심화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 어떤 분들은 글로벌리즘(Globalism)이 세계화의 좀 더 정확한 표현이라 주장합니다. 그러나
글로벌리즘, 글로벌라이제이션 ... 그 어떤 표현을 사용하든지간에 저에게는 그저 한여름 밤 수박을
자르다가 실수로 손가락을 칼에 베였을 때 일회용 밴드를 "대일밴드"로 지칭하는 것과 같은 아주 사소한
차이일 뿐입니다. 중요한건 일회용 밴드나 대일밴드는 모두 상처를 위해 소중히 쓰인다는 점이며,
저에게 둘의 의미차이는 없다는 뜻입니다.]
전국에는 동네마다 개성 있는 빵집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빵집은 고로케가 전문이고, 어떤 빵집은 단팥빵 하나만으로 다른 동네까지 소문이 나기도 합니다.
또 어떤 빵집은 대형화, 전문화 되어 직원도 수십명이나 되는 중소기업 수준이며, 어떤 빵집은 특별히
내세울만한 빵도 없고 맛도 별로여서 오직 박리다매를 목표로 하는 빵집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전국의 수많은 빵집들이 이제 다음날부터는 무조건 “광화문 광장” 이라는
하나의 단일한 공간(시장)에 모여서만 빵을 팔아야 된다면, 이후부터 그들에게 경쟁은 그야말로 목숨을 건
생존 그 자체가 될 것입니다. 능력이 모자란 빵집들은 시장에서 도태되어 사라질 것이며, 시장에는
경쟁에서 살아남은 빵집들끼리 계속해서 경쟁을 해나갈 것입니다. ... 또한 “광화문” 이라는 단일시장에
참여한 각각의 빵집들은 광화문 규정[단일시장 룰(rule)]에 어긋나지 않도록 영업을 해야 하며,
그동안 각자의 동네에서 스스로 만든 규정이나 규칙은 더 이상 (광화문에서는)효용가치가 없어지게 됩니다.
한마디로 “광화문 규정” 이라는 새로운 (무역)질서를 준수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미국을 중심으로 세계는 GATT(가트.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와 WTO(세계무역기구)를
세계 무역의 새로운 기준(질서)으로 재설정하여 세계를 하나의 단일 공동체(단일시장)로 만들려는 노력이
있었는데, 흥미롭게도 그 흐름 속에는 “지역주의(리저널리즘)” 라는 예상하지 못했던 또 다른 생태계가
잉태되고 있었습니다.
쉽게 말해, 세계화의 흐름은 (국가간)경쟁을 심화시켰고,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개별 국민국가들 사이에서는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국가들끼리 뭉치려는 리저널리즘(지역주의)이
차츰 대두하게 된 것입니다. 또 여기에 냉전의 종식은 앞서 언급했듯이 이러한 지역주의(리저널리즘)에
새로운 가능성을 부여하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역주의(Regionalism)가 확산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또 하나의 요인은
바로 “정치적 민주화”입니다 ... 민주주의가 성숙하지 못한 비민주적 정권들은 폐쇄적이며,
다른 국가(지역)들과의 협력에도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경우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이에 반해 민주적 정권들은 대체적으로 다른 나라들과의 협력을 중요시하고, 자국민들에게 어느 정도
경제적 성과를 안겨주어 지속적인 지지기반을 마련하는 전략을 취하려 합니다. 또한 이러한 정치적
노력(민주화)들은 국제사회에서도 신뢰를 얻기에 유리합니다. ... 따라서 정치적 민주화와 자유화는
리저널리즘이 확산되는데 기본적인 토양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는데 ... 1991년 브라질,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우루과이, 베네수엘라 등이 모여서 만든 “메르코수르(Mercosur 남미공동시장)”의 출범이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르헨티나 민주화(1983년), 브라질 민주화(1985년) ]
메르코수르(Mercosur)는 앞서 설명한 경제통합의 2단계인 “관세동맹” 단계로서 역내 무역자유화, 관세철폐,
비회원국에게는 공통의 관세 정책을 적용하며, 점진적으로 통합의 단계를 높여가는 리저널리즘입니다.
그리고 1973년 칠레에서는 독재자 피노체트(Augusto Pinochet)가 살바도르 아옌데 사회주의 정부를
군사 쿠데타로 무너뜨리고 정권을 잡습니다. 이후 피노체트 정권하에서 칠레는 지역주의를 멀리했는데,
1989년 알윈(Alywin) 민주정부가 탄생하고, 1993년 프레이(Frei) (민주)정권으로 이어지면서
칠레는 메르코수르(Mercosur)에 준회원으로 가입하고 APEC(에이펙)에도 적극적 관심을 보이게 됩니다.
[◆ APEC. 에이펙(Asia Pacific Economic Council) 아시아 태평양 경제 협력체.
한국, “미국”, 일본,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와 동남아시아 국가 연합(ASEAN) 6개국이
환태평양 지역의 경제 협력과 무역 증진을 목적으로 결성한 기구. 1989년 11월에
오스트레일리아 캔버라에서 제일 차 회의가 열렸으며, 1991년에 제삼 차 회의가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정치적 민주화와 자유화가 리저널리즘(지역주의)의 강제조건 이거나 필요조건은 아닙니다.
또한 비민주적 국가들도 비슷한 성향들의 국가들과 협력을 이어온 사례들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지역적 통합(리저널리즘)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국가들 대부분이 자유민주주의 국가들 이었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더불어 역으로 리저널리즘(Regionalism)이 지역내 민주화를 촉진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1970년대 유럽 국가들의 민주화는 유럽공동체라는 존재의 도움을 크게 받았습니다.
특히 에스파냐(스페인), 그리스, 포르투갈 등은 유럽공동체의 일원이 되면 경제적으로 얻는 이득이
크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민주적 정치체제의 확립 필요성을 인식했고, 이것은 그들 나라들의 민주화를
촉진시킨 역할을 했습니다." - [제 3의 물결/ 새뮤얼 헌팅턴(Samuel Huntington)]
대공황 시절인 1930년대, 세계는 자국 통화의 평가절하, 관세, 비관세, 보조금 등의 보호무역으로
각자의 경제위기를 극복하려 했습니다 ... 대부분의 국가들이 보호무역 정책을 추진하자 세계경제는
공멸의 분위기로 흘렀고, 제2차 세계대전을 경험하게 됩니다. ... 이러한 처절한 경험을 통해
이후 미국을 비롯한 많은 선진국들은 전쟁의 재발을 막고 세계 경제의 번영을 찾으려면 국제사회에
새로운 경제 질서가 필요하다는 걸 함께 인식하게 됩니다.
[@ 1944년. 브레튼우즈 체제(Bretton Woods system) - 자유무역, 국제통화질서, 국제기구 등]
새로운 경제(무역)질서가 필요하다는 걸 인식한 미국과 많은 선진국들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보편기준 마련에 힘을 씁니다 ... 다시 말해, 수많은 나라들이 참여하는, 거대 시장에 걸 맞는 무역기준과
그 기준을 운영하는 국제적 기구의 창설을 주장한 것입니다.[다자주의(多者主義),]
바로 국제무역기구(ITO. International Trade Organization)입니다.
[@ 다자주의(多者主義) - 여러 나라가 무역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세계 수준의 협의체를 두고
가치 체계나 규범, 절차 따위를 각국이 준수하고 조율하도록 한다는 태도 ]
“수입을 제한하고 자국의 이익만을 위해 철저히 보호무역을 하고 있는 수많은 국가들아!
우리 모두가 보호주의 무역만을 하려고 하니 세계경제가 너무 위축 되었다! ... 그러니 이제는
수입제한 같은 보호무역적인 정책을 완화하고 관세도 서로가 지금보다는 더 낮춰서 자유무역에 한걸음
더 다가갈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힘을 한번 모아보자! ~ 물론 이러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전에 먼저 국제적인 무역기구(ITO)를 만들어야 한다!”
국제무역기구(ITO)는 1947년 11월 쿠바의 하바나(Havana)에서 56개국이 참여하고,
1948년 3월 최종적으로 23개국의 조인으로 일명 하바나헌장(Havana Charter)이 제정되면서
실물경제(실제의 무역거래) 측면에서의 많은 역할을 기대하며 설립됩니다.
그런데, 당시의 미국은 공산권국가들의 참여를 반대하고, 미국에서 재배되는 잉여농산물에 대해서
자신들이 유리한 조건으로 처리할 수 있는 규정을 만들려다가 이에 반대나 수정을 요구하는 다른 국가들과의
협의가 무산되어 ITO 참가에 실패하게 됩니다. 이것은 비단 미국만의 상황이 아니었고 참여국 대부분이
자국의 이해관계를 따지다 보니 민감한 사안들이 중첩되면서 서로의 입장차이가 계속적으로 벌어지는 결과를 낳게 되었고,
결국은 미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참여국들이 자국의 의회비준을 받는데 실패하게 됩니다.
@ 그래서 미국은 하바나헌장에 최종 조인한 23개국에게 얘기합니다. !
"하바나헌장이 조금은 급진적인 자유무역 내용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어쩌면 56개국 모두의
합의를 이끌어 내기가 힘들 수 도 있습니다! ... 그래서 혹시라도 의견차이가 커져서 하바나 헌장 합의가
무산되더라도 우리 23개국은 동요하지 말구 예전부터 추진해 오던 관세협정을 그대로 계속 진행하기로 합시다!"
이때에 미국을 포함한 23개국은 하바나 헌장의 일부원칙들을 포함한 실질적인 관세협정 합의안을
1948년 1월에 발효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예전부터 우리가 그렇게 많이 들어왔던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 이라는 가트[GATT: General Agreement on Tariff and Trade] 입니다.
그리고 제한적이긴 하지만,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국제무역기구(ITO)의 역할을
가트(GATT)가 대신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부터 계속적으로 가맹국을 늘려갔는데, 우리나라는
60년대의 경제개방조치에 따라 무역자유화를 진전시킬 목적으로 1967년 4월 1일에 정식으로 가입합니다.
국제무역기구(ITO) 설립이 무산되고 실질적인 국제무역기구 역할을 맡게 된 가트(GATT)의
몇 가지 기본원칙을 간단히 살펴보면 크게 4가지 원칙으로 나눠집니다.
(1) [최혜국대우 원칙 MFN]
가트(GATT) 가맹국인 A, B 라는 두 나라가 만약 협정을 맺고 각각 서로에게만 관세양허 혜택을
주고받고 있었다면, 이들 나라는(A, B) 다른 가트(GATT) 가맹국들(C, D, E, F ... ) 에게도
동등하게 혜택을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두 나라(A, B)만의 특혜조치는 인정하지 않고,
가트(GATT)에 의한 다자간 기본협정에 관한 사항들만을 준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쉽게말해
비가맹국들 에게는 고율관세를 적용해도 되지만, 최소한 가트(GATT) 가맹국들끼리는 서로가 모두
최혜국대우를 해야 한다는 원칙입니다. [ex) 가맹국=5%(최혜국대우), 비가맹국=10%]
(2) [자유무역의 원칙]
관세 이외의 모든 무역제한조치에 대해서는 금지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가트(GATT) 가맹국들은
수입품에 대해서는 관세를 적용할 수는 있지만, 아예 수입을 금지 시킬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트(GATT) 가맹국들은 자국의 산업(상품)에 위협이 될 만한 수입항목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수입 금지를
할 수는 없었지만, 대신에 고율의 관세를 적용해 수입제한조치에 준하는 효과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가트(GATT)는 출범 이후에도 이러한 각국의 고율관세 같은 무역장벽을 완화시키고자 지속적으로
다자간 교역협상을 추진하게 됩니다. 참고로 이렇게 다자간 교역협상이 꾸준히 "돌아가면서" 이루어진다고 해서
흔히 교역라운드(Trade rounds) 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3) [공정경쟁의 원칙]
교역에 있어서 한 국가의 보조금은 자국 산업 보호와 경쟁력을 높이는데 도움이 되겠지만, 이것은 분명
무역을 인위적으로 조절하는 것과 같습니다. ... 한마디로 공정한 경쟁에 방해가 된다는 것이죠.
예를 들면, A국가의 국내산 자동차 1대 가격이 1,000만원에 판매되고 있는데, 어느 날 B국가가
자동차를 800만원에 A국가에 수출 했을때, A국가 입장에서는 가격경쟁력을 잃게 되어 자국의 자동차
산업이 어려워지게 될 겁니다. 이때에 A국가가 B국가의 자동차에 30%의 관세를 적용한다면 B국가의
자동차 판매가격은 1040만원(800×1.3)이 되어 A국가는 예전의 경쟁력을 다시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B국가가 만약 이러한 사실을 인지하고, 자국 자동차 회사의 수출자동차 1대당 185만원의
보조금을 지원하게 된다면 B국가의 자동차 회사는 A국가에 자동차를 615만원(800-185) 이라는
매우 낮은 가격으로 수출하여 관세 30%를 적용받더라도 최초의 수출가격인 800만원(615×1.3) 수준으로
다시 수출한 것과 같은 효과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 그래서 가트(GATT)는 제16조에 일반보조금
지급에 대한 규제와 수출보조금 지급금지 규정을 두어 공정경쟁을 실현하고자 하였습니다.
(4) [개도국 우대원칙]
만약 개도국이 선진국과 교역을 하게 된다면, 이때는 개도국에게 선진국에 대한 최혜국대우 의무를
유보시키게 하자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 예를 들어, A라는 개도국은 가트(GATT) 가맹국
대부분의 국가에게 10%의 관세를 적용하고 있었는데, 유독 B라는 국가와 거래를 할 때만 5%의
저율 관세를 적용(최혜국대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앞에서 살펴본 가트(GATT)의 대표적
원칙중 하나인 최혜국대우(MFN) 원칙에 위반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A개도국은 이 원칙(최혜국대우)
대로라면 다른 국가들에게도 동등하게 5%의 관세를 적용해야 합니다. 하지만 만약 A개도국의
교역상대가 선진국 이라면, 이때는 최혜국대우 원칙을 지키지 않고 10% 관세를 그대로 적용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개도국과 선진국과의 교역에서는 현실적으로 동등한 교역이 힘들기 때문에 개도국이
선진국과 교역 할 때에는 최소한의 우대를 해주자는 것입니다.
[선진국]: “나랑 교역할 때는 그냥 10% 관세 적용해라! ~ 최혜국대우 안 해줘도 괜찮다!”
이렇게 가트(GATT) 체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기본적인 4대원칙을 중심으로 새로운 국가들과 새로운 협상안들이
추가되고 보완 되면서 관세인하 노력과 무역장벽을 허물기 위해 다자간의 꾸준한 협상(라운드)을 계속해서 이어가게 됩니다.
@ 주요 다자간 무역협상들
1차 : 제네바(1947) - 관세인하(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2차 : 아네시(1949) - 관세인하
3차 : 토케이(1950~1951) - 관세인하
4차 : 제네바(1955~1956) - 관세인하
5차 : 딜론라운드(1960~1961) - 관세인하
6차 : 케네디라운드(1963~1967) - 관세일괄인하, 반덤핑, 관세평가 협정
7차 : 도쿄라운드(1973~1979) - 관세인하, 비관세 장벽 관련 조약 협의
8차 : 우루과이라운드(1986~1994) - 관세인하, 농업/섬유, 서비스무역자유화, 지적재산권( => WTO탄생)
가트(GATT)체제 이후 8차의 다자간 협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1차~4차 협상은 단순하고 평이한 일반적인 관세협상 이라서 특별히 “라운드” 라는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다자간 무역(관세,보조금,비관세,반덤핑 등)협상 이라 말할 수 있으며,
가장 중요하고 비중이 컸던 6차(케네디라운드), 7차(도쿄라운드), 8차(우루과이라운드)의 본격적인
‘라운드협상’에 대해서 조금만 살펴보겠습니다.
@ 6차 케네디라운드(1963~1967)
미국 케네디 대통령이 GATT에 참가한 국가들끼리는 5년 동안 관세를 50% 내리자던 주장이었습니다.
미국이 이런 주장을 하게 된 이유는 당시 유럽 국가들이 경제공동체(EEC)를 결성해 자기들끼리의(역내)
무역거래에서는 관세를 인하하면서 유럽경제공동체가 아닌(역외국가) 국가들과의 무역거래에서는
고율관세를 적용했기 때문입니다. 케네디라운드는 5년간 단계적으로 관세를 인하할 것을 합의한 협정으로
5년간 평균 36%의 관세인하가 이루어졌고, 공산품에 대한 관세는 50%가 인하 되었습니다.
@ 7차 도쿄라운드(1973~1979)
먼저 도쿄라운드는 기존의 세계교역체제에 개혁을 시도한 최초의 교역라운드라 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1980년대 세계무역의 헌법이라고 할 만큼 관세인하 이외에 수많은 협상안들을 만들어냈습니다.
102개국 정부가 참여하면서 종전의 협상에 비해 매우 광범위한 분야를 다룬 상당히 포괄적인
무역협상 이었습니다. 102개국 정부가 1979년 제네바에서 ‘가조인’ 하고, 이후 미흡했던 부분에 대해서는
주요 협상참여국들의 계속적인 노력 끝에 ‘제네바의정서’를 수락하면서 1980년 1월부터 발효되었습니다.
도쿄라운드는 가트(GATT)체제 출범당시의 40%수준 이었던 공산품 관세율을 4.7%수준으로 끌어내렸지만
농산물교역관련 문제해결에 실패하였고, 긴급수입제한조치(Safeguards 세이프가드)에 관한 협정마련에도
실패하게 됩니다. 하지만 비관세장벽에 대한 협정을 이끌어냄으로서 이후의 세계무역체제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러나 주로 선진국의 입장이 반영돼 개발도상국의 이익이 배려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교섭참가 102개국 중 서명한 국가는 미국·일본 ·EC(유럽공동체) 등 선진 25개국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해결되지 못한 문제는 1986년 시작된 우루과이라운드로 넘어가게 됩니다.
[@ “비관세”는 관세가 아닌 방법으로 자국의 국산품을 보호하기 위한 일반적인 정책들을 말합니다.
보통 수입품의 수량제한("우리는 자동차를 연간 100대 이상은 수입할 수 없다!"),
수출보조금("자동차 한 대 수출 할 때마다 100만원 줄께!") 등이 있습니다. 관세가 아예 없는 "무관세"와 혼동하지 마시길...]
@ 8차 우루과이라운드(1986~1994) - 농업시장 전면개방
도쿄라운드에서 비록 비관세장벽에 대한 협정을 이끌어냈다고는 했지만, 이후에도 상당수의 국가들에서는
여러 가지 비관세장벽을 남용하고 있었습니다. 자유무역을 지지했던 수많은 가트(GATT) 가맹국들 에게는
점진적으로 인하된 (저율)관세만으로는 더 이상 자국 산업을 보호하는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반덤핑정책, 수출장려보조금, 세제지원, 수입상품의 수량제한 같은 다양한 형태의 비관세장벽을
남용하면서 계속적으로 세계무역여건을 악화시키고 있었습니다. 더불어 이러한 비관세조치는 시행국들의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양자 혹은 복수의 몇몇 특정국가들 사이에서만 제한적으로 적용하다보니
다자간협정 체제를 기본으로 하는 가트(GATT)체제를 정면으로 도전하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가트(GATT)체제의 골간을 흔드는 것이었기 때문에, 도쿄라운드에서 해결되지 못했던 농산물교역
부분과 세이프가드(Safeguards) 문제들을 포함해 기존의 GATT 체제를 좀 더 견고하고 강하게 만들어야할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1986년 9월에 우루과이의 푼타델에스테(Punta del Este) 에서 협상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1994년 모로코의 마라케시에서 125개국의 통상 대표는 7년 반 동안이나 진행해온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에
종말을 고하고 '마라케시 선언'을 공동으로 발표함으로써 GATT체제는 발전적 해체를 하고
이를 대신할 WTO(세계무역기구)가 1995년부터 출범함으로써 세계무역체제는 새로운 변화를 맞게 됩니다.
또한 WTO(세계무역기구)는 가트(GATT)의 단순한 연장이 아니라 GATT에서 벗어나 완전히 새롭게 태어난
기구로서 성격을 지니고 있었는데, GATT는 법률적인 성격만 있었지 국제기구적인 성격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WTO(세계무역기구)는 자체의 설립협정에 근거해 법률적 제도로서의 성격뿐만 아니라 완전한 국제기구로서의
성격을 갖추게 됩니다. 이것은 세계무역에 있어서 보다 강력한 구속력을 지니게 되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약간은 지루했을 ;; ... 세계가 무역의 자유화를 위해 노력했던 역사의 중심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중요한건 GATT체제든 WTO체제든 세계화(무역의 자유화)라는 흐름 속에서
향후 세계는 진정으로 하나의 단일시장이 될 수 있을 것인지, 아니면 유럽경제공동체(EEC) 같은
또 다른 리저널리즘(지역주의)이 계속해서 잉태되고 태어날 것인지는 조심스럽게 살펴야 할 것입니다.
가트의 핵심내용에서도 보셨다시피 가트(GATT)는 참여국들이 힘의 논리에 영향을 받지 않고
공정하게 무역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비차별 원칙을 고수합니다.(표면적으로는) ... 다시 말해,
가트(GATT)체제 안에서는 서로가 무역을 함에 있어서는 최대한 어느 한쪽에 유리(불리)한 대우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가트(GATT)에서 WTO(세계무역기구)로 이어지는 국제무역 질서의
안을 들여다보면 겉으로는 차별 없는 원칙을 주장하지만, 실질은 힘의 논리로 작동될 수밖에 없는 구조적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세계 경제질서의 핵심인 국제기구(IMF, WTO, 세계은행)의 의결제도 부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WTO(세계무역기구, 회원국 151개국)의 의결제도는 1회원국 1투표권이 주어지지만, 예산에서
개별 회원국들의 무역규모(세계무역에서 차지하는 비율)에 따라 회원국들의 갹출금이 정해지기 때문에
무역규모가 큰 미국을 비롯한 몇몇 선진국들의 권한이 실질적으로 더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 경제성장, 개발도상국 및 저개발국가에 대한 지원을 목표로 설립된 세계은행(회원국 185개국)은
의결에 있어서 회원국들의 경제규모(GDP)에 따라 투표권이 배분됩니다.
@ 국제통화기금(IMF, 회원국 185개국)의 의결제도는 회원국들이 최초 가입시 납입한
납입금(회비성격) 규모(지분비율)에 따라 투표권이 배분됩니다 ... 예를 들면, IMF에 가입하려는 가맹국은
신청서 작성하고 쿼터(IMF Quota)를 할당받습니다. "가입회비" 정도로 쉽게 생각하시면 될 텐데 ... 아무튼
가맹국에게 할당되는 쿼터는 그 나라의 무역규모 등 경제력에 따라 모두 차이가 납니다 ... 그래서
납입하는 회비(쿼터) 중 25%는 금(Gold)으로, 나머지 75%는 자국통화로 납입 합니다. 그런데 이후에 금으로
납입하던 25% 부분이 특별인출권 이라는 SDR로 대체됩니다 ... SDR은 ... 음 ! ~ 쉽게 말해 그냥 전 세계 어딜 가도
금이나 달러처럼 돈(국제통화)으로 인정해주는 만국 공용 상품권 정도로 생각하시면 편합니다.(제 3의 통화)
또한 IMF는 가장 중요한 핵심 18개 영역에서 결정이 이루어지려면 85% 이상 지분참여국의 찬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미국의 현재 IMF 지분은 17.35%입니다. 따라서 미국은 자신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안건이 있다면 언제든지 단독 거부만으로도 찬성률 85% 미만을 만들 수 있습니다. 또한 미국 다음으로
지분율을 많이 가지고 있는 국가들은 일본(6.22%), 독일(6.08%), 영국(5.02%), 프랑스(5.02%) 인데
이것은 반대로 미국이 찬성하는 안건을 막기 위해서는 위 나라들 중, 최소 3개국 이상은 반대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작년 말 즈음인가요? ... IMF가 중국의 위안화 특별인출권(SDR) 편입을 승인했는데,
이것도 사실상 미국이 반대했으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그런데도 미국은 G2 반열에 오른 중국을
견제하기는커녕 오히려 통화패권의 지분을 (일부)나눠 주었습니다.(@미국의 속내가 조금은 궁금합니다.)
[@ SDR은 현재 달러, 유로, 파운드, 엔 등 4개 바스켓 통화의 시세를 가중 평균해 가치를 평가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위안화가 포함된 것이죠 ... 위안화 위상이 그 만큼 올라간 것입니다 ... 더불어
위안화 SDR 편입결정으로 중국은 자국통화에 대한 자부심이 더욱 더 커졌습니다. 하지만 위안화의
국제화도가 가속화 될수록 중국의 자본시장 개방 압력도 더욱 더 커져갈 것입니다.]
이렇듯 현존하는 국제 경제질서에서 미국의 영향력은 아직도 상당한 힘을 발휘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 주도의 세계화(글로벌라이제이션)는 유럽연합(EU)라는 리저널리즘을 잉태하였고,
지금도 경제적으로는 세계 수많은 곳에서 크고 작은 리저널리즘이 잉태되고 있다고 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WTO 체제를 중심으로 세계화를 지향했던 미국은 다른 한편에서는
가장 적극적인 리저널리즘을 선도하고 있었습니다 ... 바로 나프타(NAFTA) 라는 "북미자유무역협정" 입니다.
[@ (NAFTA. north american free trade agreements ): 캐나다, 미국, 멕시코 3국이 관세와 무역 장벽을 없앤 자유 무역권]
여기에 미국은 에이펙(APEC)과 최근 화제가 되고있는 TP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 그리고
TTIP[(미국-EU). 환대서양경제동반자협정] 등에 적극 참여하면서 WTO 체제에 역행하는
(경제적)지역주의 행보를 계속해서 보여주고 있는 상황입니다.
EU를 비롯한 나프타(NAFTA), 에이펙, TPP, RCEP(중국 주도) 등 ... 현재 수많은 지역주의 사례들이
자신들의 (경제)통합의 단계를 높여갈수록 리저널리즘의 독자적 관성은 그 선명도를 높여갈 것입니다.
예측 불허인거죠 ... 쉽게 말해, 개별 국민국가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뭉쳤던 지역통합의 공동체가
어느 순간부터는 개별 국가들의 힘을 넘어서는 공동체 자신만의 독자적인 힘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사상가 에른스트 르낭(Ernest Renan)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 민족의 기본적 요소는 민족내의 모든 개인들이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많은 것들을 잊어야 한다. 민족은 구성원 모두가 알기에는 너무나 크기 때문에
"상상 속의 공동체(imagined community)" 라고 불리기도 하며, 이때 상상은 아주 큰 역할을 한다 - 르낭 ]
저는 르낭이 말한 "상상속의 공동체" 라는 말이 참 좋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생각해보았는데 ... 현재 EU를 비롯한 수많은 리저널리즘의 사례에 등장하는
공동체 또한 "상상속의 공동체" 가 아닐까 생각되며, 그 공동체(EU)는 구성원(EU 회원국)이 모두 알기에는
상당한 힘의 크기로 불어난 상태가 아닐까 생각된다는 것입니다. ... 이번 브렉시트가 EU 내에서 독일의 힘을 더욱 더
키워주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대다수 전문가들의 중론입니다. ... 그러나 저는 여기에 더해
EU(상상속의 공동체)가 독일을 넘어서는 EU 자체만의 또 다른 관성의 힘을 더 크게 확보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강경한 입장에서서 영국의 답을 요구하고 있지만, 영국이 다시 턴한다고 했을때 받아줄지, 아니면
세계를 향한 새로운 전략 모델을 개발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상상속의 공동체로서 관성으로 갈 가능성이 높다는 뜻입니다.
(이건 사견이므로 그냥 무시하셔도 좋습니다 ;;)
이제 마무리를 해야할 것 같은데 ... 브렉시트 이후 세계는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른 주판알 두드리기에 바쁜 상황입니다.
브렉시트 이후, 중국은 러시아와 일주일도 안되는 시간동안 벌써 두 번의 만남을 가졌고,
계속적인 회담을 이어갈 예정입니다. ... 미국은 브렉시트 이후 영국과 EU에 집중하다보면
아시아의 패권을 중국과 러시아에 내어줄지도 모른다는 고민을 할 수도 있습니다.
기울어진 시소 위에서는 아무리 균형을 잘 잡아도 역시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기울어진 시소의 본질은 "이미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입니다 ... 이번 브렉시트는
세계 시소의 균형을 기울여 놓은 것과 같습니다. ... 물론 저의 호들갑 일수도 있습니다.
다만 변치 않는 사실은 세계는 지금도 계속적으로 리저널리즘이 진행중이라는 사실입니다.
[@ 글이 길어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지난번 브렉시트 이후 급하게 써놓고 타이밍을 놓쳐버린 글입니다.
게시물 내용인 미국의 주제와 조금은 벗어난 얘기지만, 나름 상관성이 있겠다 싶어 정리해서 올립니다. ]
물파스님께 개인적으로 궁금한 게 있습니다.
과거에 영국이 파운드화에서 유로로 전환하지 못한 게,
1) ERM(European Exchange Rate Mechanism)에 연동된 상태에서 발견된 취약점을 소로스에게 공격당해
유로 전환 기준을 맞추지 못해 전환 실패했다는 설과,
2) 영국이 파운드화를 포기할 경우 금융시장이 런던에 남아있을 이유가 줄어들고 프랑크푸르트로 이동할 수 있다는 공포감과
자존심 때문에 유로 전환을 의도적으로 거부했다는 설이,
각각 있는데 어떤 설이 더 공신력있는지 / 둘 다 맞는건지 혹시 사실관계를 아시는지 여쭤봅니다.
오지랖 일수도 있겠는데 ... ERM과 조지 소로스의 영란은행 공격과 관련된 내용에 대해
사전지식이 없는 분들도 있을거라 생각되어, 다른 분들도 보시라구
답변을 좀 길게 합니다.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1971년 브레튼우즈 체제가 무너지면서 유럽경제공동체(EEC) 국가들 사이에서는
유럽내에서도 안정된 통화제도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래서 환율의 변동폭을 2.25%로 제한하자는
일명 "스네이크 체제(숫자 2.25%가 마치 터널속을 기어가는 뱀 모양과 비슷하다는 의미)"를
만들자는 의견이 오고갑니다. 하지만 이것은 접점을 찾지 못하고 흐지부지 되었고,
경제는 혼란속에 방황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접점을 찾지 못한 혼란의 상황속에서 유럽국가들은 자국 경제상황에 따라
자국화폐의 평가절상.절하를 반복하였고, 그 와중에 1차 오일 쇼크(1974년)가 발생하여
혼란은 가중됩니다. 하지만 모범생 독일은 철저한 재정관리로 마르크화의 가치를 지켰습니다.
그러자 유럽은 자연스럽게 마르크화 연합이 되어갑니다.
하지만 이런한 현상이 수출중심 경제였던 독일 입장에서도 마냥 반가울 수만은 없었습니다.
결국 독일과 여러 유럽국가들과은 협상과 결렬을 반복하면서 드디어 1979년 유럽통화제도(EMS)을 출범시킵니다.
이 제도는 회원국 통화간의 환율을 고정시키는 환율조정장치(ERM)를 만들었고,
회원국간의 환율변동폭을 상.하 2.25%로 고정시켜 놓게 됩니다. ... 이후 유럽은 1992년 2월 네덜란드의 마스트리히트에서
하나의 거대하고 대담한 실험인 "마스트리히트(Maastricht Treaty) 조약"을 체결합니다.
마스트리히트 조약은
유럽공동체의 정치와 경제, 통화연맹 등 ... 진정한 "하나의 유럽"으로 가는 새로운 뼈대가 됩니다.
특히 조약에 가입할 국가들은 까다론운 기준을 따라야 했는데 그 중 통화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조약 가입국들은 유럽통화제도의 환율조정장치(ERM)를 따라야 하며
연맹 가입에 선행하는 2년 동안 가입국의 통화가 평가 절하를 겪은 적이 없어야 한다."
독일이 이러한 까다로운 조건을 마련한 이유는 마스트리히트 조약의 최종 목표인 "정치통합" 때문 이었습니다.
다시말해 당장 정치통합이 어렵다면 최소한 경제와 예산정책의 통합만이라도 이루어 낸다면
이것이 곧 정치통합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아무리 통합된 경제라도
안정을 최우선적으로 생각하는 독일의 원칙이 어느정도 반영된 결과라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이렇게 깐깐한 가입조건과 조항들을 만들어 놓고도 유럽의 통화제도는 점점 더 불안해 지기 시작합니다
그 대표적 이유중 하나가 바로 1990년의 독일 통일 이었던 것입니다.
독일 통일로 부유한 서독의 돈이 가난한 동독으로 흘러들어 갔는데, 사실 그 당시 서독 마르크화와 동독 마르크화의
적절한 교환비율은 1(서독): 4(동독) 정도 였는데, 실제로는 1:1 비율로 교환해 주었습니다.
이는 실물경제의 생산량과는 상관없이 통화량 공급이 엄청나게 늘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분데스방크는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고금리"를 유발하는 금융긴축 정책을 실시합니다.
즉! ~ (독일)정부는 통일 때문에 돈을 계속해서 풀게되는 재정확대 정책을 실행하지만
중앙은행인 분데스방크는 본연의 업무이자 독일의 중요한 원칙중 하나인 물가상승을 막기위해
금융긴축 정책을 실행하게 된 것입니다. (재정확대 + 금융긴축) ... 그리고 통일이 되면서 독일이 실행한
고금리 정책은 유럽에 큰 혼란을 초래 합니다.
<유럽국가들>
"오 ~ 우! 독일이 통일 되더니 금리가 장난 아니게 높아졌네!
어차피 환율조정장치로 환율도 제한적(2.25%)으로 고정되어 있으니 유럽의 시중 은행들에서
낮은 금리로 돈 빌려서 독일 은행에 투자하면 대박 이겠구나! "
유럽국가들의 이러한 움직임을 금융 용어로 말한다면 아비트러지(Arbitrage), 즉, 무위험 차일거래라 말할수 있습니다.
이러한 독일의 고금리는 유럽의 돈을 흡수하기 시작하고 나머지 국가들은 가만히 앉아서 자국의 자본유출을 보게 됩니다.
그러자 이를 방어하기 위해 나머지 국가들도 어쩔수 없이 고금리 정책을 실행합니다 ... 이것은 결국
국내투자 위축과 실업을 양산했고 불황을 유발하게 되었습니다. ... 이러한 자본의 급격한 이동은 결과로 증명되는데
1992년 가을에는 프랑스와 영국의 실업률은 무려 10%를 넘어서기도 했습니다.
참고로 IMF(1993년 보고서) 자료에 따르면 독일이 통일되던 1990년부터 1992년 후반까지
무려 3,000 억달러 규모의 자본이 아비트러지 게임을 했던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 ~ ~ (1달러=1,000원) 일때
미국의 심슨이 미국 골드만 은행에서 5% 이자율로 1,000달러를 빌려(1년) 한국의 국민은행에
100만원(1,000$)을 이자율 10%로 예금(1년)을 했다면, 1년뒤 국민은행에서 110만원을 받아 미국에 돌아가서
1,100달러로 환전하고 골드만 은행에 이자 포함 1,050달러를 갚고 나면, 심슨은 아무런 위험없이 앉아서
50달러(5만원)의 수익을 얻을수 있습니다. 이것은 (1달러=1,000원) 이라는 환율이
변하지 않고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만약 심슨이 1년뒤 국민은행에서 예금을 찾을때 그동안 환율이 변해서 (1달러=1050원) 으로
달러가치가 상승(고환율) 했다면, 심슨이 국민은행에서 찾은 110만원은 미국에서 달러로 환전하면
약 1,048달러가 됩니다. ... 하지만 이 금액은 심슨이 골드만 은행에 갚아야할 1,050달러에 2달러 부족한 액수가 됩니다.
이처럼 환율이 고정되어 있지 않으면, 지역간(한국, 미국) 이자율 차이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위험이(환위험. 환차손) 존재하는 거래가 됩니다.
그런데 마스트리히트 조약의 환율조정장치(ERM)는, 바로 이러한 고정환율에 대한 믿음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쉽게 말해, 각국의 중앙은행들은 영국의(파운드화), 이탈리아(리라화), 스페인(페세타화) 같은 화폐들을
언제라도 고정된 가격으로 독일 마르크화로 교환해 주어야 했기때문에
[위의 심슨 사례에서 (1달러=1,000원)에 고정되어 있던 것처럼] ... 항상 적절한 양의 외환보유고(마르크화)를
보유하고 있어야 했습니다.
@ 여기서 기회를 포착한 조지 소로스(George Soros)팀은 곧 바로 영국의 파운드화 공격에 들어갑니다.
[ => 소로스 팀: 소로스와 스텐리 드루켄밀러(퀀텀펀드 책임자)]
<< 조지 소로스(George Soros)의 퀀텀펀드 & 스텐리 드루켄밀러(퀀텀펀드 책임자) >>
(◆ 1992년 8월 첫째주)
" 유럽국가들 대부부의 재무장관들이 한결같이 고정환율제도(환율조정장치)는
큰 문제가 없다고 얘기하고 있군! ... 근데 이상하다! 시장참여자들은 많은 변화를 느끼고 있는데
저들은 시간이 지나도 계속 모두 같은말만 되풀이 하고있어! "
(◆ 1992년 8월 둘째주)
"우리 정보팀에서 올라오는 보고서를 보면 약세 통화를 가진 나라들의 중앙은행들이 최근 들어
독일 마르크화가 모자라 보유고를 채워넣기 위해 마르크화 대출을 받으려고 정신이 없다고 하던데 ...
이것은 결국 돈이 마르크화로 몰리고 있다는 신호다! ... 오~케! 바로 이거야! ~ 굿 ! "
(◆ 1992년 8월 셋째주)
"1팀!, 2팀!, 3팀! ~ 니들 잘들어! ... 오늘부터 영국 파운드화 무조건 끌어모아(빌려와)
그 다음, 끌어모은 파운드화를 영국의 여러 시중은행에 가서 독일 마르크화로 모두 바꿔!(파운드화 팔아) ~ 알았나! "
(◆ 1992년 8월 넷째주)
"팀장님! ~ 우리가 엄청난 양의 마르크화를 계속해서 사니까
영국 은행들이 마르크화가 다 떨어졌나 봅니다!(외환보유고 바닥) 걔들이 이젠 지들 중앙은행(영란은행)에
마르크화 좀 달라고 난리치고 있습니다 "
(◆ 1992년 8월 넷째주) - 또 다른 투자팀들
" 야! ~ 소로스 애들이 큰거 하나 터뜨리려고 하는것 같다!
우리도 똑똑한 얘들로 팀 하나 만들어서 똑같이 따라해! "
(◆ 1992년 9월 첫째주)
"팀장님 말대로 저희들 전략을 모방하는 팀들이 계속해서 늘고 있습니다!
결국 영란은행(중앙은행)이 시장에서 마르크화를 사기위해 파운드화를 대량으로 쏟아낼 것이 분명 합니다!
그렇게 되면, 파운드화는 폭락할 것이고 우리는 그동안 바꿔놓은 비싼 마르크화로
헐값의 파운드화를 되사서 최초에 빌려온 곳에 갚으면 대박 일 겁니다! ~ 크 크! "
(◆ 1992년 9월 15일)
(1992년 9월 15일 - 독일 분데스방크 총재 헬무트 슐레징어 기자회견 에서)
"유럽통화제도도 이제는 어느정도 환경변화에 '적응' 해야 합니다! "
"독일 중앙은행 총재가 영국을 버렸구나! 크 크 크 ... 당연한 결과다!
독일이 영국을 돕기위해 마르크화를 계속해서 빌려 주었다면
마르크화의 공급이 늘어나 인플레 유발을 우려할 것이기 때문에, 영국을 돕는 것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
(◆ 1992년 9월 16일 - 오전 11시)
"팀장님! 영국이 독일의 도움이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재무장관인 노먼 레이먼트를 시켜 금리를 2% 인상 했습니다!
영국 파운드화를 싸게 빌릴수 없게 만들겠다는 전략 입니다! ~ 금리를 인상하니 파운화 가치도 조금은 오르는것 같구요!
어떻게 하죠? ~ 우리 모방하던 애들도 주저하고 있습니다! "
(◆ 1992년 9월 16일 - 오후 3시 - 소로스)
"그래서 니들은 아직 멀었다고 하는거야! ~ 왜 이렇게 새가슴들이야 ~ ! !
걱정하지 말고, 계속해서 무조건 마르크화 사 모아라! ~ 걱정하지 말고 시장(외환시장)에서
영국 파운드화 있는대로 팔고 마르크화로 바꿔라! ~ 금리가 높아졌다고(2% 인상) 하더라도 괜찮으니까
계속해서 파운드 빌려서 시장에 내다 팔고 마르크화 사 모아라! 알았냐! "
(◆ 1992년 9월16일 - 또 다른 투자팀들)
"야! 소로스 얘네들은 영국 금리인상은 신경도 안쓰고 예전보다 더 격렬하게 파운드화 팔고 있네!
소로스 애들이 미치지 않고서야 저럴리 없는데 ! ... 맞아! 이건 필시 파운드화가 무조건 떨어진(가치하락)다는 신호다!
아마도 금리인상 2% 했던것 모두 감안 하더라도 남는 장사(환차익) 일거다!
얘들아! 우리도 가지고 있는 파운드 모두 팔아 버려라! 빨리! "
(◆ 1992년 9월 16일 - 오후 4시)
"팀장님! 영국 중앙은행이 외환보유고 절반을 써버렸답니다! 그리고 환율조정장치에서 탈퇴 한답니다!
우리는 대략 10억달러(1조원) 조금 넘게 벌어 들인것 같습니다! ~ 와 ~ 우! "
소로스의 과감한 베팅으로, 주저하던 다른 투자자 들은 확신을 하게 됩니다.
소로스같은 외환투자(투기)자들이 이렇게 막대한 수익을 올리며 성공할수 있었던 것은
유럽통화제도에 그만큼 허점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 급기야 1993년 8월에는 유럽통화제도 내의
환율변동 폭이 ±15%로 높아집니다.
이것은 고정환율을 지향했던 유럽통화제도(환율조정장치)가 무너지는 순간 이었습니다!
이후 독일도 고집을 꺾고 통화정책을 완화하며 금리를 낮추기 시작합니다. 금리수준은
1993년 8월에 6.75%, 1994년 5월에 4.5%, 1995년 8월에 3.5% 수준으로 떨어집니다.
독일통일, 그 외 환투기와 아비트러지(Arbitrage)게임 등의 여러변수들 때문에
마스트리히트 조약의 핵심 이었던 "유럽통화제도(환율조정장치)"는 상당한 혼란을 겪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유럽국가들은 이러한 시행착오를 경험 하므로서 "단일화폐(유로화)"의 중요성과 당위적 필요성을
더욱더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환율조정장치가 아무리 고정환율에 대한 믿음을 충분히 제공 할수있다 하더라도
결국은 이번에 독일 통일같은 변수에 의해 허점이 드러났었고, 이러한 문제점을 완벽히 보완할 방법은
역시 오직 "단일화폐(유로화)" 밖엔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영국이 유로화를 선택하지 않았던 이유로
님의 후자쪽 의견에 무게를 두고 싶습니다. ... 만약 당시 영국이 ERM의 취약점에 대해 고민했었다면
취약점이 존재하지 않는, 즉 '환율조정장치'가 필요없는 완전한 단일통화(유로화)를 거부할 이유가 없는 것이죠.
영국은 전세계 국제금융시장에서
금리파생상품의 50%, 외환거래의 40%의 비중을 차지하는 금융서비스 최강국 중 한 국가입니다.
또한 EU 내에서만도 외환거래의 비중이 80% 수준에 가깝고, 장외 이자율 상품거래 또한 70%가 넘습니다.
금융서비스 부분은 영국 GDP의 7% 수준을 점하고 있는데, 2015년 영국 GDP가 대략 2조 7천억 달러($) 수준임을 감안하면
금융서비스 부분만 대략 2,000억 달러($)에 가까운 엄청난 규모라고 할수 있습니다. ... 이렇듯
금융(파운드) 주권에 대한 자부심과 그 영향력이 대단했던 영국에게 유로화는 거부감이 들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 조지 소로스 스토리에서 1992년에 파운드화 공격이 이루어진것은 맞지만,
이해를 돕기위해 날짜와 시간은 제가 극적 요소를 넣어서 임의로 설정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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