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무화과를 사가는 손님이 드물다. 그 때문일까.
할머니는 무화과 파는 일은 뒷전이고 양동이 가득 물을 떠 놓고
약초 씻는 데에 몰두해 있다.
"지금 씻는 것이 무슨 약촌가요?"
"임금님이 사약 내릴때 쓰던 '초오' 라는 약초지요 ~ "
초오(草烏) ... ... ...
예부터 비상과 함께 사약 재료로 사용되던 미나리아재비과 식물인 투구꽃의 뿌리다.
단방으로 먹으면 위장 안에서 점막 출혈이 일어나 피를 토하며 죽게되는 무서운 독초다.
"근데 그걸 어디에 쓰려고요? ... 사약이라도 내릴 사람 있으세요?"
할머니는 방긋 웃으면서 말한다.
"치매 걸리면 묵고 죽을라고 그라요"
나그네가 살던 섬 보길도 노인들은 환갑만 지나면 다들 '시안(청산가리)'을 몰래 지니고 살았다.
노인들이 그 맹독의 화공약품을 지닌 것은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함이었다.
노인들은 혼자 밥해 먹을 기력마저 잃게 되면 자식들한테 피해를 주기 싫어서
약을 준비한다고들 했다. 그리고 실제로도 마지막 순간이 오면 약을 먹고 목숨을
끊는 일이 흔했다 ... ... ... 스스로 치르는 고려장.
그런데 오늘 목포에서 자신의 고려장을 준비하는 할머니를 만났다.
설마 농담이지 싶으면서도 말에서 진심이 묻어나니 웃을수 만은 없다.
"초오가 독약으로만 쓰여요? ... 다른 약으로는 안 쓰고요?"
"관절에도 좋다 안 하요. 다리 아프고 삭신이 쑤실 때,
오리나 마른 명태에다 넣고 끓여 먹는디요 ... 이것만 묵으면 죽응께."
독은 약이고 약은 독이다.
잘 쓰면 독도 약이 되고 잘못 쓰면 약도 독이 된다.
무릎관절 약으로 쓰려는 걸까 ... 할머니는 해남의 산에서 약초를 캐서 팔러 다니는
늙은 약초꾼에게 초오 오천원어치를 샀다 ... 저 만큼의 초오 독이 목숨을 끊을 정도라면
사람 목숨 값은 참으로 헐하다. 한 목숨 살리기는 억만금으로도 어려운데
목숨 하나 죽이는데는 단돈 오천원 으로도 부족함이 없다.
할머니는 초오를 깨끗이 씻어서 말린 뒤 빻아서 하얀 가루로 만들어 놓을 거라 한다.
"풍 오고 치매 오고 그런거 나도 모른 순간에 와 빌더라고. 그럴때는
얼릉 먹고 죽어 버려야제 ... 그래야 자식 안 성가시제 ~ "
간난신고를 견디며 목숨을 부지하고 살아온 이유도 자식을 위해서 였는데.
이제 목숨을 버리는 이유도 자식을 위해서다.
어머니 ! ~ 그 이름이 한없이 따뜻하면서도 잔혹하다 ... (강제윤) 어머니전 中 ◆
@@@@@@
몇년전 읽었던 강제윤 시인의 "어머니전" 이라는 책속의 한 대목입니다.
현실에 암묵적 긍정으로 대처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부모님들은
삶 자체가 저항이자, 가족의 더 나은 형편을 위해 살아가는 진정한 철학자이자
진보주의자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많이 듭니다.
우리가 철학이 가장 추상성이 높은 학문이라 목에 힘주어 말할 때
자식들 때문에 시민적 지위를 부여받지 못하고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부모님들에게는 우리가 몰랐던 위대한 '철학함'이 존재합니다.
'농부철학' '운전철학' '어부철학' '구두닦이 철학' '약초꾼 철학' '노가다철학'... 이렇듯 철학은
추상성과 함께 대중성도 가장 넓다는 사실을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가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철학자의 자식들인 것입니다.
[@ 책을 좋아해서 경제나 금융 이외의 분야라도 좋은 구절이 있으면 소개하고 싶은데
주제넘은 일이 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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