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과 프랑스 등의 서유럽 국가들에서는 민주주의와 산업혁명에 의한 공업화가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을때 ... 동유럽의 러시아는 광활한 영토에 다양한 민족이 살고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통치하기 위해서 왕이 다스리는 전제정치가 일찍부터 뿌리내려져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 따라서
자유주의적인 사상과 경쟁에 의한 경제활동 같은 근대적 시민사회의 가치관이 정착되기는 어려웠으며,
대신에 전통과 관습 및 권위와 복종 같은 봉건적 요소들이 중시되고 있었습니다 ... 이렇게 러시아는
로마노프 왕조(차르Tsar)가 다스리는 전제정치가 계속 유지되면서, 당시(19세기) 러시아에는
귀족과 농노라는 두개의 신분을 축으로 하는 매우 엄격한 신분제 사회제도가 유지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분화된(귀족, 농노) 사회구조에서는 당시 서유럽의 제3계급 신분이었던 중산계층(시민)의
출현과 성장을 러시아에서는 전혀 기대할수가 없었던 상황이었습니다. 보통 중산계급은 농업부분에서의
생산력 증가와 공업의 발달로 자본이 축적되면서 출현하는데, 당시의 러시아는 국가가 소수의 대지주와 결탁하여
국민들의 피를 빨.아먹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 중산계급의 성장은 거의 불가능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그래서
러시아는 서유럽처럼 중산계층인 시민들에 의한 소위 “부르주아혁명(Bourgeois Revolution)” 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구원을 받으려면 누구나 고통을 참을수 밖에 없다고만
역설되는 나라 러시아에서, 레닌만큼 심각하고 강력하게
불행과 슬픔과 고통을 저주하고 경멸한 사람은 나는 처음 보았다 !
고통은 인생의 피할수 없는 운명이 아니라 민중의 힘으로 물리쳐야 하고,
또 물리칠수 있는 악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는 위대한 인물이다 !" - 막심고리끼(Maksim Gorkii) . 러시아의 대문호]
제1차 세계대전은 (2차)러시아혁명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 1914년, 러시아 전제군주제의
내무대신 이었던 두르노보(Durnovo)는 러시아가 제1차 세계대전에 개입하게 된다면 국가적 혼란이
올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 먼저 서유럽 국가들에 비해 한참이나 뒤떨어진 산업화와 부족한
철도(수송)문제, 행정조직의 미숙함 등을 이유로 참전에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전쟁 초기에는
일부 사회주의자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국민들은 참전을 지지했었습니다(@ 범슬라브주의) ... 그러나
1916년 중에는 무려 150 여만명의 군인이 전사했고 ... 이 와중에 러시아 국민들의 생활은 지베계급의
횡포와 악덕 상인들의 매점매석에 의한 식료품 및 생활필수품 등의 부족이 심해지면서 민중들의 절망과
분노가 극에 달했습니다 ... 뿐만아니라, 차르(tsar)정부의 너무나도 무능한 행정능력과 부패는 결국
1917년 3월(러시아력 2월)에 식량배급을 기다리던 대규모의 행렬이 폭력적인 시위로 번지게 됩니다.
"차르(tsar) 타도! ~ 빵을 달라! ~ 전쟁 반대!" ... 시위가 격렬해 지자 차르정부는
군대를 동원했으나 군대도 노동자와 합세해 정부에 반기를 들게 되었고, 결국은 300 년간 지속되었던
로마노프 왕조가 붕괴하게 됩니다 ...
1917년 3월의 러시아혁명은, 이후에 노동자와 농민, 병사가 결합한 "소비에트(Soviet)" 라는
평의회가 조직되었고, 1905년 1차 러시아혁명때 만들어진 두마(Duma) 라는 국회를 중심으로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던 것입니다 ... 다시말해 1917년 3월혁명 이후에 러시아에는
임시정부와 소비에트(Soviet) ... 즉, 2개의 권력이(이중권력) 존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
러시아의 상황이 이렇게 진행되고 있을때
레닌(Lenin)은 스위스에서 인연을 맺은 플레하노프, 자술리치, 엑셀로드 등과 함께
"이스크라(Iskra 불꽃)" 라는 기관지를 발행하고 자신의 혁명 이론과 전술등을 발표하게 됩니다 ... 하지만
플레하노프를 주축으로한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당시 러시아 사회구성원의 대다수를 차지했던
농민을 간과하고, 오히려 소수였던 노동자계급인 프롤레타리아(무산계급)에 집중하며, 만약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게 된다면, 그것은 자본주의의 발달과 함께 도래할 것이며, 지금 당장 농민을 통한 혁명은
무정부 상태를 초래하여 진정한 의미의 사회주의 혁명은 완성될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 다시말해,
마르크스-엥겔스의 과학적 사회주의에 따르면, 자본주의 경제는
[@ 봉건제 => 자본주의 => 사회주의 => 공산주의] ... 라는 커다란 단계를 밟아 나가면서 발전해 가는데
플레하노프 주측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철저하게 이 공식을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 그래서 이들은
당시 인구의 대부분이 농민이었고, 산업화의 초기단계였던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공장 노동자) 계층은
매우적은 소수에 불과했었던 현실을 외면한채, 오직 프롤레타리아(농민이 아닌)에 의한 사회주의 혁명만을
주장했던 것입니다. [@ 마르크스도 사회. 정치. 경제적으로 후진국이었던 러시아에서는 혁명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플레하노프측이 주장한 프롤레타리아(노동자) 혁명과는 달리 ... 러시아의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고, 그에 맞는 변형된 마르크스주의를 생각해낸 사람이 바로 "레닌(Lenin)" 이었던 것입니다.
레닌은 먼저 러시아에서의 혁명은 두 단계를 거쳐서 진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1단계는 국민의 대다수였던 농민과 소수였던 노동자가 동맹을 맺은후, 인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차르(tsar)를 타도하고 민주공화국을 건설하는 것입니다. ... [@ 1단계에서는 노동자에게는 8시간
노동제보장 같은 노동조건 개선과 농민에게는 농촌의 봉건적 잔제를 제거하고 토지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2단계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주도하에 모든 자본주의 요소를 타도하고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수단이 없던 하층의 노동자계급(무산계급)이 사회의 모든 권력을
장악해서 유산계급인 부르주아(자본가)를 무너뜨리고, 동시에 정치적 지배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그리고 이것을 보통 "프롤레타리아 독재" 라고도 합니다.
<<레닌의 2단계 혁명>>
1단계 - 농민과 노동자에 의한 차르(tsar)를 타도(황제정치 타도)
2단계 -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의한 사회주의 혁명
이같은 레닌의 2단계 사회주의 혁명은 대다수 국민이 농민이었던 당시의 러시아 현실을 최대한
반영하려고 했었을뿐만 아니라 ... 자본주의가 서유럽에 비해 많이 뒤쳐졌던 러시아에서는 자본주의가
어느정도 정착되고 프롤레타리아(노동자) 계급이 혁명을 일으킬 만큼 충분한 수가 될때까지 기다리는건
너무나 오랜 세월이 걸리기 때문에 단기간에 혁명을 성공시키려했던 레닌 입장에서는 좀더 공격적인
방법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레닌은 혁명을 성공시키기 위해서 강력한 "중앙집권화된 당조직"과
소수정예의 "직업적 혁명가"들의 활동을 통해서 혁명을 쟁취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앞서 얘기했지만, 당시 러시아는 노동자계급이 너무나 적었습니다 ... 하지만, 자본가 계급은 더욱
취약했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레닌은 이러한 러시아의 현 상황이 낡고 부패한 전제정치를 무너뜨릴
절호의 기회로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 따라서 비록 수가 적더라도 소수정예의 혁명조직이
준비되어 있다면 충분히 차르(tsar) 정부를 붕괴시킬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 이것은 결국
철저하게 훈련되고 준비된 당원들이 당에 충성을 바쳐야 함은 물론이고, 대중속으로 파고들어 혁명의
빛을 밝혀야 했는데 ... 이러한 과업들이 확신을 가지고 성공을 뒷받침 하려면 무엇보다도 중요했던것이
바로 "중앙집권화된 당조직" 이었던 것입니다 ... 이때 앞서 얘기했던 기관지 "이스크라(Iskra 불꽃)"는
당의 이념을 전파하고 혁명의 구체적 전술과 이론적인 문제, 조직체계 등 ... 당의 전반적 과제수행에
분명히 도움이 될수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 결론적으로 레닌에게 러시아의 혁명을 위해서는 강력한
중앙집권화된 정당이 우선적으로 필요했던 것입니다.
[◆ "우리에게는 광범위한 노동자들의 대중 정당이 아니라,
강철같은 규율을 가진 혁명적 전위 정당이 필요한 것입니다! " - 레닌 ]
(@ 전위정당 - 계급투쟁에서, 노동자 계급의 앞에 서서 그들을 지도하는 집단이나 부대.
레닌에 의하여 마르크스주의 정당의 조직 원천이 되었다. )
레닌의 사상은 ... 플레하노프를 주측으로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생각과는
투쟁의 시기와 당조직론에 있어서 큰 차이를 보이게 됩니다 ... 즉, 플레하노프는
러시아에서 자본주의가 좀 더 발전한 다음에 마르크스 이론에 따라 혁명을 전개하자는 것인데 반해
레닌은 지금같은 상황에서는 오직 강력한 중앙집권화된 전위정당 으로만 혁명이 가능하리라 보았던 것입니다.
[◆ (레닌): "플레하노프 ! ~ 당신의 말대로 러시아에서 자본주의가
어느정도 정착될때까지 기다리게 된다면, 그것은 결국 러시아 정부에게 더욱더
안전한 기반을 마련해 주는것과 크게 다르지 않소! ~ 따라서 그때가 되면
사회적 혼란도 약화되고 혁명의 명분이나 구실도 찾기 힘들게 될것이오! 그러니 이쯤에서
우리 볼셰비키(Bolshevik)에 들어오시오!" ]
[◆ (플레하노프): "러시아에서 자본주의가 발달하고 ... 그래서 대다수의 인구가
노동자계급(프롤레타리아)이 되어 진정한 사회주의 혁명을 이룩할 힘과 지식이 축적될때까지
프롤레타리아의 임무는 부르주아를 지원하여 차르(tsar) 정부를 무너뜨리고, 그 대가로
노동자 계급을 위한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받아야 합니다! ~ 이렇게 함으로써 광범위한 노동자 정당을
조직하고, 진정한 사회주의혁명을 이룩할수있는 것입니다! ~ 레닌(Lenin) ! ~ 당신이야말로 이쯤에서
우리 멘셰비키(Mensheviki)에 들어오는게 어떻겠소? " ]
결국 레닌과 플레하노프의 혁명에 대한 방법론과 시기에 대한 차이는 1903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제2차 당대회에서 사회주의자들이 볼셰비키(Bolshevik)와 멘셰비키(Mensheviki 온건파)로 분열하게 되는 원인이 됩니다.
또한 레닌은 혁명의 주도권을 쟁취하는 과정에서 멘셰비키가 주장했던 것처럼 부르주아가 개입하게 된다면
그것은 또 다른 소수의 독재를 의미하는 것이라 생각했었고 ... 그래서 혁명의 주체는 당연히
노동자 계급과 농민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 그리고 레닌의 볼셰비키는 1917년 10월,
드디어 혁명에 성공하게 됩니다. - (@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 !)
레닌이 권력을 잡은 러시아는 마냥 희망적인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혁명파와 반혁명파의 내전이 일어났고, 러시아혁명이 자본주의 국가를 비롯한 세계 여러곳으로
확산되는것이 우려됐던 다른 열강(미국, 영국, 프랑스 등 14개국)들이 반혁명파를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위기에 처한 볼셰비키 정부는 비밀경찰을 만들고 군병력을 증가하면서 위기상황을 정리해 갔으며,
위기는 1920년대 들어서도 지속되었습니다. ~ 그리고 1920년대 말 즈음이 되어서야
대내외적으로 어느정도 기반을 잡게 됩니다 ... 하지만 러시아 밖에서는 아직은 민주주의가 사회주의보다
강했으며, 자본주의 열강들은 계속적으로 사회주의가 확산되는걸 적극적으로 저지하고 있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반대파를 제거함으로써 러시아의 국내문제는 어느정도 해결이 되었지만,
새로운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내전과 함께 급속한 공산화에 따른 너무나 피폐해진 경제상황 이었습니다.
반혁명파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 반혁명파의 군대와 반혁명파를 지원했던 외국의 군대에 대항하게 위해
볼셰비키 정부는 전시경제(명령경제) 체제를 유지했었고, 이러한 전시경제하에서 농민들이 생산한 농산물과
노동자들의 산업생산물들은 모두 국가가 가져가 버렸습니다 ... 결국 농민과 노동자 입장에서는 아이러니 하지만
성공한 레닌의 사회주의 혁명으로 더욱 더 굶주리고 비참한 생활만이 남겨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 이로인해
농민들의 폭동과 함께 식량난으로 고통을 당하던 도시의 노동자들의 연이은 파업들이 곳곳에서 발생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은 러시아 혁명정부 입장에서는 하나의 체제위기였으며 급속하고 과격했던 공산화 정책을
일부 완화할 필요성을 느끼게 해주었던 것이었습니다.
원칙을 현실에 맞게 적용하는데 탁월했던 레닌은 1921년 고민 끝에 대책을 마련하게 됩니다.
국가는 소규모 상공업자의 개인적인 경영을 허용하였고, 외국자본 도입을 계획하였으며,
농민들에게는 직접 기른 작물을 자율적으로 시장에 내다팔수있게 하였습니다 ... 하지만 국가의 기간산업인
철도와 중공업 및 광산, 은행 같은 영역은 여전히 국가가 관리하기로 했습니다 ... 일종의 혼합경제체제를 선택한
레닌의 이러한 신경제정책을 소위 "네프(Nep: New Economical Policy)" 라고 부릅니다.
네프(Nep)는 사회주의로의 점진적인 이행을 위해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일시적으로 도입하려는 시도였습니다.
당시의 러시아 상황을 고려한다면 네프(1921년 ~ 1927년) 는 매우 실용적인 접근방식 이었다고 말할수 있을뿐 만
아니라, 상당한 효과를 발휘하기도 했습니다.
더불어 신경제정책(네프)은 외국과의 협력 및 외국자본과 기술 도입이 불가피 했기 때문에 국제적인 협조를
표방하게 되었고 당시 유럽국가들도 전후(1차세계대전) 경제불황 타개를 위해 러시아 시장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그래서 독일이 제일먼저 러시아를 공식 승인하고 이어서 영국, 이탈리아 및 여러 국가들이 러시아를 승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소비에트(Soviet)" 정부는 러시아뿐만 아니라 인접한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등에도 수립되었고,
1924년 헌법이 개정되면서 이들 소비에트 공화국을 하나로 묶는
소위 "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연방[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 : USSR]" ... 이라는 약칭 "소련" 이
탄생하게 되는것입니다 ... 그런데 소련이 탄생되던 그해, 1924년에는 레닌이 사망하고
스탈린(Stalin) 이 레닌의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 혼란스런 정국입니다. ... 집회도 참가해보고, 지인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개인적으로 느꼈던 감정들을 조금씩 글로 써놨었는데, 최근 그 파편된 글들을
하나의 쾌로 엮고 보니, 분량이 너무나 많아 이슈인에 올려볼까를 많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분량은 지금 올린 "소련" 이야기의 대략 8~10배 정도 되는것 같습니다.
글 내용은 박근혜가 최순실의 꼭두각시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나름 인문학적 시선에서 분석해 본 것입니다. 기회가 되면 오늘, 내일 중으로
올려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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