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일본을 지배했던 쇼군[군사 독재자, 막부(군사정부)의 우두머리]은
자신들의 권력에 덴노의 이름을 자주 활용했었습니다. "덴노"는 일본의 천황(天皇)을 의미하지만
더 넓게는 하나 된 일본을 의미하는 통합의 상징이자, 동시에 통합을 넘어서는 어떤 종교적 의미로까지
그 의미가 확장됩니다. [◆ 발음은 天皇(천황)의 한자 음독 てんおう(Ten'ō)의 변형인 てんのう(Tennō).
영어로는 흔히 Emperor of Japan으로 옮긴다.]
1867년 이전까지 일본에서 덴노는 대중과는 멀리 떨어진 신화의 차원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메이지유신과 함께 일본의 정중앙으로 덴노가 등장하게 됩니다.
[◆ 메이지유신(명치유신): 일본의 막부 정치(정권)가 1867년 메이지 천황(덴노)으로 넘어감,
근대일본이 형성되는 계기가 됨]
1866년, 당시 일본의 정치적 상황은 쇼군과 덴노의 지지를 놓고 권력 다툼이 심하게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외세에 반대하는 맹목적 애국주의와 흉작, 대량생산으로 만들어진 외제 수입상품 때문에 금과 은의 유출이
심했었고, 사회적 불안과 함께 지방과 작은 소도시에서 크고 작은 봉기가 끊이질 않았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1867년으로 넘어오자(1867년 초), 주변은 너무나 고요했고 민중의 봉기도
모두 사라진 듯 했습니다. ... 그런데 그해 가을 무렵이 되자 세상은 온통 혼돈의 무아지경으로 빠지게 되는데,
광신적 종교의 출현과 소규모 폭동이 일어나는가 하면, 다른 한 쪽에서는 매일같이 사방이 술판으로 이어지며
길거리는 축제같은 환호와 춤판의 연속이었습니다.
형형색색의 떡과 꽃다발,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두가 길거리에 나와 북과 같은 각종 타악기를 두드리며
현재를 즐기는 듯이 보였습니다. 신발도 벗지 않은 상태에서 남에 집에 마음대로 들어가기도 했고,
유흥가에서는 상상 이상의 난잡한 섹.스와 술, (사이비)종교 등을 찬양하기 바빴습니다.
신토(神道)와 불교의 부적들이 하늘을 메웠으며 남녀가 옷을 바꿔 입기도 했습니다
[◆ 신토(神道): 일본의 민속 신앙 체계로, 일본 고유의 다신교 종교] ... 그리고, 그렇게 에도시대 말기(1867년),
일본 사람들은 자신들의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울화를 모두 하나의 주문에 실어 보냈습니다.
"에에자나이카"(ええじゃないか)"
"좋지 아니한가?" 로 번역되는 혹은 "괜찮치 않나?", "모두 다 잘 될 거야" ... 등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운 "에에자나이카"(ええじゃないか)"는 근대 일본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 이었던 것입니다.
"좋지 아니한가!"의 외침은 쇼군에게서 해방을 알리는 공개적인 선언이자 그동안 억압받던 평민들의
잠재된 욕망의 분출 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난잡한 섹.스와 술, 남에 집에 신발을 신을 채로 들락거리며,
북을 두드리고, 남녀가 옷을 바꿔 입고, 부적을 날리는 행위 ... 이러한 축제같은 혼돈!
그런데 딱 거기까지 였습니다! ~ 일본의 민중들은 그런 (혼돈스런)행위들 그 이상은 갈구하지 않았습니다.
에도 시대 빈번히 일어나던 봉기와 마찬가지로
"좋지 아니한가(에에자나이카)" 운동은 민중들이 그 당시 표출할 수 있었던
그들 나름의 권력에 대한 저항의 방식었으며, 불복의 수줍(?)은 혹은 어설픈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당시 민중들의 이러한 넘치는 성적 에너지는 분명 자신들의 울화가 분출된 현상이었기는 했지만,
목적의식이 불분명한 상태에서 폭발한 개성의 한 표현이었고, 단 한 번도 주체적인 주장을 한 적 없었던
표현 수단이 결여된 민중들의 욕구였던 것입니다.
반항이나 저항이 기존의 형식을 따르지 않았다고 "좋지 아니한가"를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뿌리내릴 토양이 없다고 계몽의 싹을 휴지통에 그냥 버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 중요한 것은
숨막히는 사회구조에 대해서 개인들이 저항하는 현상이 근대 일본의 초창기에도 분명히 존재했었다는
점입니다. ... 그리고 시대와 세계의 민초들은 그 어떠한 형식으로든 자신들의 분노와 저항을
또 다른 "에에자나이카"(ええじゃないか)"로 계속해서 표출할 것입니다.
"시대마다 그 시대의 고유한 질병이 있다. 그래서
이를테면 박테리아적이라고 할 수 있는 시대도 있는 것이다" - 피로사회(한병철/ 문학과 지성사)
신자유주의 아래, 오늘날의 성과사회는
개인들 스스로가 스스로를 착취하며,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라고
독일의 카를스루 조형예술대 한국인 한병철 교수의 저서 "피로사회"는 말합니다.
주체(개인,노동자)가 본인 스스로를 착취하는 자기착취는 "자유"라는 부담없는 조건하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타자착취 보다는 더 효과적이며 많은 성과를 올린다고 합니다 ... 다시말해
사람들은 완전 연소할때까지 자기 자신을 자발적으로 착취한다는 것입니다.
노동에 지쳐 탈진한 사람들과 그에 따른 스트레스와 다양한 정신적 위험군(우울증, 소진증후군 등)을
경고하는 책들도 상당수가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 [노동을 그만두라, 정말 중요한 일들을 해라 - 안야 푀르스터, 페터 크로이츠]
@ [365일의 자유(노동으로 소모해버리기엔 당신의 삶이 너무 소중하다) - 키츠]
@ [데드 맨 워킹 - 칼 세더스트룀, 피터 플레밍]
노동에 가치를 부여하는 차원을 넘어서 독일을 비롯한 많은 유럽 선진국가들에서는
삶의 안정과 균형을 찾는일에 시선이 이동하고 있습니다.
[◆ Initiative Neue Qualität der Arbeit - 노동의 질을 높이는 것을 목적으로
연방, 주, 사회보험, 노동조합, 고용단체, 등이 협력하여 만든 독일의 사회협력기구 ]
위의 기구는 "노동의 새로운 질을 위한 운동" 이라는 소위 좋은 노동이라 무엇인가? ... 라는
연구를 진행하면서 7,444명의 근로자에게 일자리의 어떤 부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물었습니다.
가장 많은 답변을 한 수서로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고정적인 소득(92%)
2) 직장의 안정성(88%)
3) 재미있는 노동(85%)
4) 의미있게 느껴지는 노동(73%)
그 뒤를 이은 답변은 ... 동료들과 협력을 촉진할수 있는 노동,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느낄수있는 노동, 자신의 능력을 발전시킬수 있는 노동 등이었습니다.
만약 한국에서 설문을 진행 했더라도 독일 사람들의 답변과 그렇게 큰 차이는 나지 않았을 거라 생각됩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위의 설문조사와 "노동의 새로운 질을 위한 운동" 이라는 독일의 범사회적 운동이
현재가 아닌, 12년전인 2004년에 있었던 일이라는 것입니다.
노동에 가치를 부여하는 차원을 넘어 한 개인의 일과 삶의 조화로운 균형에 대한 담론이 오고가는
독일사회에 대한 부러운 시선을 우리 현실과 비교해 조금은 네거티브하게 표현해 본다면
"팔자 좋은 독일" 이라 외치며 격한 부러움을 대신하고 싶습니다 ... 그들(독일)이 이제는 쉬어야 할 때를
얘기할 때 우리 한국은 제대로된 노동을 해볼 수조차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 그들(독일)은
이미 12년전에 "(더) 좋은 노동" 을 찾아보자며 사회가 협력하고 움직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더 좋은 노동을 찾아보기는커녕 노동이 사회를 부식시키는 제거해야할 하나의 녹으로 규정하려 하는것 같습니다.
저 같은 평범한 필부(匹夫)에게도 너무나 쉽게 보여지는 작금의 현실이
그것을 전문으로 하는 정부와 정치(인)에게는 보여지지 않는 것일까요?
분명 어딘가 잘못되고 있음을 감지하고 있지만, 사회는 요지부동(搖之不動) 입니다.
한병철 교수는 자신의 저서 피로사회에서
"시대마다 그 시대의 고유한 질병이 있다" ~ 라고 말합니다.
성과주의에 매몰된 신자유주의적 자기착취형 인간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정의는 최소한 한국사회에서는 적용하기 힘들것 같습니다
한국사회에서는 자기착취를 할만큼의 제대로된 노동조차 찾아보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산다(Life)는 것"은 어쩌면 그 자체로서 하나의 "노동"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개인을 삶을 오롯이 "노동" 이라는 하나의 범주속에만 가두기에는 우리의 삶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술판과 섹.스(s.ex)와 외제차와 고성과 불륜과 학점과, 여행과 파티와 무너지는 교육과 부의 축적과 ... 그리고
은퇴와 서러운 눈물 처럼 새롭게 추가되는 나와 당신의 "사는 방법"이 혹시나 과거 일본의 "에에자나이카"(ええじゃないか)"
처럼 어설프고 수줍게 시대에 저항하는 병든(혹은 변형된) 욕망(에에자나이카)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나와 당신의 이러한 병든 저항(에에자나이카 ええじゃないか)이 표출하는 거리의 혼돈을
너무나 천박하다고 나무라지 마십시요 ... 그렇게라도 울분을 표현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지금 박테리아적 시대의 고유한 질병을 이겨낼 방법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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