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3월 16일 목요일

◆노동을 생각하다(잡설의 성격) (by 물파스)

이번 글의 시작은 제가 예전에 읽었던 '세계화의 덫" 이라는 
책의 한 구절을 인용하는것부터 시작해 보려합니다. 

[◆ 한 세기 반이 지난 지금 리카도의 근본 전제는 완전히 낡은 것이 되어버렸다.
오늘날 자본보다 더 이동력이 뛰어난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현재 국제투자가 
무역의 흐름을 자기 마음대로 바꾸고 있으며, 광속도로 급속히 진행되는 수십억 달러의 
자본 이전이 특정한 나라와 그 나라 화폐의 환시세 및 국제적 구매력을 결정하고 있다.
상대적 비용우위는 이제 더 이상 사업의 추진력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시장, 
모든 국가들에 동시에 적용되는 절대적 우위이다. 초국적기업들은 임금이 가장 헐하고,
사회보장 지출이나 환경보호 비용을 전혀 물지 않는 곳에서 상품을 생산하도록 조직함으로써
그때마다 상품비용의 절대적인 크기를 줄이고 있다. 그리고 이와 함께 상품가격뿐만 아니라
노동력의 가격도 떨어지게 된다. - (세계화의 덫/ 209~210페이지/ 한스 페터 마르틴) ]

[◆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는 3개국 이상에 걸쳐서 사업장을 가지고 있는 
초국적 기업의 수를 4만개 정도라고 헤아리고 있다. 100대 초국적 기업들은 연간 
약 1조 4천억 달러($)에 달하는 판매고를 차지하고 있다. 오늘날 초국적 콘체른(거대 기업연합체)
들은 전세계 무역의 3분2를 점유하고 있으며, 이중 절반은 콘체른 내부 네트워크(계열사 밀어주기)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 (중략) ~ 이제 개별 국가들 및 일국기업들은, 세계무역에 있어서 
상품을 공급하는 주체가 아니며, 무역 결과 획득된 이윤을 국가의 경계선 내에서 분배하는 것을 
둘러싸고 협상 및 투쟁하는 주체도 아니다. 그 대신 이제 만국의 프롤레타리아들은 전세계적으로 
조직된 생산과정 속에서 아직까지 남아 있는 일자리를 두고 피눈물나게 경쟁하게 되었다.
- (세계화의 덫/ 210~211페이지/ 한스 페터 마르틴) ]

2012년 국제결제은행(BIS)에서 나온 보고서를 참고해보면 
2010년 2분기, 일평균 전 세계 외환거래 규모는 약 3조 4천억 달러였다고 합니다.
(1$=1,000원 가정하면 3,400조원) ... 그리고 이 수치를 휴일을 제외한 연중거래일수 250일을 가정하고 
다시 산술 계산을 해본다면 연간 외환거래 규모는 무려 850조 달러($)가 넘는 규모입니다. 
원화로 환산하면(1$=1,000원 가정) ... 무려 85경이 넘는 ~ 입을 다물 수 없게 만드는 수치입니다.
정부가 올해(2016년) 예산안을 386조원으로 발표했는데 ... 우리나라의 2,200년치 예산규모입니다.

각설하고 ... 반면에 2010년 전 세계 무역규모는 약 30조 달러($)였습니다 ... 다시말해 
전 세계가 물건을 만들어 사고팔고 하면서 주고받은 돈은 30조 달러($)였지만, 같은 기간 전 세계에서
거래된 외환거래 규모는 이 수치보다 28배가 더 많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전체 외환거래 중에서 실물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외환은 3.5% 수준이며
나머지 96.5%는 모두 금융부분에서 파생된 거래라는 뜻입니다 ... 이쯤되면 오늘날의 외환시장 구조가
실물과는 얼마나 괴리되어 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흔히 “웩더독'(Wag the Dog)” 이라고, 주로 파생(선물옵션)시장에서 자주 쓰이는 용어가 있습니다. 
개가 꼬리를 흔드는 것이 아니라, 꼬리가 개의 몸통을 흔든다는 뜻입니다. ... 외환시장에서 실물부분이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나도 작기 때문에(아니, 오히려 실물경제규모에 비해 금융부분이 너무나 비대해졌다고
이해하는게 더 빠를 것 같습니다) 금융(외환)부분에서 조금만 변동이 와도 그것은 곧바로 실물부분에 상당한
충격을 줄 수 있는게 오늘날 금융의 진짜 본질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 꼬리가 개(몸통)를 흔드는 것이죠.

처음 글 시작에서 인용했던 "세계화의 덫" 에도 잘 나와있지만,
오늘날 세계경제는 조세(회피)와 같은 실물 이외의 변수가 자본의 흐름에 상당한 영향을 주는
구조가 점점더 고착화 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이전가격 조작"이 대표적인데 

예를들면, 거대 A기업은 현재 한국의 높은 세금때문에 고민이 많은 상황입니다.
그런데 A기업은 라이베리아에 A1 이라는 같은 계열의 무역회사를 두고있습니다. 그래서 이후부터 
A기업은 자신들이 만든 상품을 A1에게 원가보다 싼 가격으로 수출합니다. 당연히 A의 회계장부에는 
이 거래가 적자로 기록됩니다. 그리고 A1은 다시 A에게 그 상품을 비싸게 수출합니다. ... 더불어 
A는 A1에게서 수입한(원래는 최초 A가 만든 상품이었음) 상품을 자국 시장(내수)에서 
판매합니다. ... 최종적으로 A기업은 라이베리아에 있는 자회사 A1과의 거래로 인한 (-)실적으로 
세금을 안내도 되고(혹은 매우 적게), 라이베리아는 세금이 거의 없는 텍스헤븐 지역이라 
자회사 A1 또한 세금을 거의 납부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 

"이전가격조작"은 하나의 사례일 뿐이며, 초국적 자본들의 힘은 전과는 비교조차 할수 없을 만큼 
매우 강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초국적기업(자본)들은 개별 국민국가를 넘어서 자신들이 국민경제를 
손아귀에 쥐고 흔들 수 있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초국적 기업들이 개별 국민국가(정부)와 
"경쟁관계"의 위치까지 올라섰다는 의미와 다를바 없는 것입니다. (@ 국가가 자본에 서서히 종속됨)

의식이 구조화(structured) 된다는건 어려운 개념이 아닙니다. 
우리가 불합리한 상황을 인지하고도 아무런 반응없이 그냥 그 상황에 점점 익숙함을 느끼게 된다면 
그것이 바로 구조화 되는 것입니다. ... 그래서 제가 이 글의 제목을 [◆ "노동을 생각하다"]로 정한 이유가 
바로 우리에게 "노동"의 의미를 다시 새겨보면서, 평범한 우리들이 지금 하고 있는 "노동"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 일이며, 또한 내가 사는 공동체 안에서 그러한 가치있는 일(노동)에 대한 분배가 
진정으로 정당하게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한번쯤 생각해보기 위함입니다.

(1) (사람이)육체와 정신을 써서 일을 하다
(2) [경제] (사람이)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얻기 위하여 
손, 발, 두뇌 등의 활동으로 이루는 일체의 목적을 가진 의식적 행위를 하다

"노동(Labor)"의 국어사전 정의입니다.

노동을 사전식의 (1)번처럼 정의한다면 아마도 세상에 ‘노동’ 아닌 것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체액을 교환하는 달콤한 키스(Kiss)와 피스톤운동의 반복적 섹.스(S.ex)도 노동이 될 것이며, 
변비에 고생하는 자가 변기에 앉아 힘을 주는 것조차 노동이 될 것입니다. 또한 오성급 호텔에서 
최고급 스테이크를 써는 행위도 노동이 될 수 있으며, 새벽녘 뻥 뚫린 시내도로를 질주하기 위해 
억대 스포츠카의 액셀(accelerator)을 힘껏 밟는 행위도 노동이며, 사랑하는 연인을 위한 멋진 시(詩) 한편도 
노동입니다 ... 이렇듯 자신의 행위에 ‘일의 가치’ 를 부여한다면 ‘노동’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말하고픈 노동의 정의는 당연히 (2)번의 경제적 정의가 될 것입니다.
[◆ 노동[勞動]: 勞(일할 로), 動(움직일 동)]

노동은 무엇인가 "하는 행위" 가 있어야 합니다.
한마디로 [노동] 은 언어적으로는 "명사화" 될 수 있지만, 내포된 속성은 언제나 "동사" 형태를
지니고 있어야만 그 의미가 살아나는 당위적 존재인 것입니다. 

혼자 사는 김철수씨가 자신의 집에 애인과 함께 편하게 앉아 쉴수 있는 의자가 없다는걸 알고
산에서 나무를 구해 의자를 만들었다면, 김철수씨는 분명 노동(하는 행위)을 한 것입니다 ... 다시 말해 
김철수씨는 생활에 필요한 물자(의자)를 얻기 위해 자신의 손, 발, 두뇌 등을 사용해서 애인과 함께 
편히 쉴 수 있는(목적의식) 의자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 이렇듯 노동은, 일(의자 만들기)을 하는 
모든 과정을 노동자가 알 수 있으며, 그 과정 또한 스스로 통제가 가능합니다 ... 한마디로 김철수씨는 
자신이 의자를 완성하게 되면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또 (의자를)만드는데 어느 정도의 시간을 투자하고, 
다른 사람에게 판매한다면 가격을 얼마로 정할건지 등 노동의 "총체성" 을 김철수씨 본인이 모두 
관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애인과 함께 앉아 달콤한 사랑을 속삭이든, 김철수씨 본인 혼자 앉아 깊은 사색을 즐기든 ... 어쨌든
완성된 의자는 김철수씨 본인 소유의 생산물입니다. 그런데 만약 김철수씨가 가구 공장에 취직해 의자를
만들게 된다면 이때부터 얘기는 달라지게 됩니다. 바로 고용주와 임금 이 결합하게 되면서 
이제 노동은 본격적으로 "사회적 성격"을 띠게 되는 것입니다. 

[◆ 내가 새알이나 야생딸기를 채취하는 일에 노동을 투입하는 경우에는 알이나 딸기가 
나의 임금이 된다. 이런 경우에는 누구도 임금이 자본으로부터 나온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이 경우 자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가죽으로 구두를 만든다고 해 보자. 구두는 나의 임금 그 자체이다. 
즉 내 노력의 대가이다. 이 구두도 물론, 내 자본이건 남의 자본이건 자본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구두는 내 노동에 의해 생겨났고 내 노동의 대가이다. ~ (중략) ~ 자본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면,
처음에 나의 자본은 가죽과 실 등이다. 나의 노동이 진행됨에 따라서 가치가 계속 부가되며 
구두를 완성할 때에는 나는 자본 이외에 원료와 구두 간의 가치 차이만큼을 더 가지게 된다.
~ (중략) ~ 아담 스미스도 방금 예로 든 단순한 경우에 임금이 노동의 생산물이라는 점을 인정하였다. 
아담 스미스는 노동임금을 논하는 장의 머리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노동생산물은 노동에 대한 자연적인 보수 내지 임금이 된다. 토지의 사유와 자본의 축적이 있기 이전의 
원시상태에서는 노동생산물이 모두 노동자에게 귀속된다. 생산물을 나눠가질 지주나 고용주가 
없기 때문이다. [국부론. 제8장]" - <진보와 빈곤. (47~48쪽)/ 헨리 조지(Henry George). 비봉출판사> ] 

단일토지세를 주장한 미국의 경제학자 헨리 조지(Henry George) 는 
자신의 저서 "진보와 빈곤" 에서 노동에 대한 임금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임금은 자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노동에 의해 생산된다"

앞의 사례에서 우리는 김철수씨가 목적의식을 가지고 본인의 노동(력)을 투입해 열심히 의자를 만들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이후 의자가 완성 되었을 때 그 의자를 소유할 수 있는 사람은 김철수씨가 유일합니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의자’ 자체가 바로 김철수씨의 ‘임금(월급)’ 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입니다 ... 더불어
만약 김철수씨가 의자를 만들 목재를 산에서 구하지 않고 인근 목재소에서 구입한 것이라면, 김철수씨의 
최초 자본은 그 목재(원료)가 될 것이며, 노동이 진행될수록 의자는 조금씩 완성된 모습을 갖춰갈 것입니다.
의자가 완성되면 김철수씨의 임금은 (완성된)의자의 가치에서 원료인 목재의 가치를 차감한 만큼을 가져갈
수 있는 것입니다 ... 결론적으로 임금은 자본에서 나오는게 아니라 노동에 의해 생산된다는 것입니다.
[@ 이 논리는 노동(력)이 가치창출의 원천 이라고 말했던 마르크스의 주장과 궤를 같이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 모든 사람이 자가 노동을 할 경우에는 임금의 평준화가 가격의 균등화에 의해 대체로 이루어진다.
또 자가 노동자와 임금 노동자 간에도 평준화 경향이 발생한다. 이 원리와 자유의 조건하에서, 
타인을 고용하려면 임금을 얼마나 지불해야 할까? ~ 분명히 그 임금은 노동자가 자가 노동을 할 때의 
소득과 같게 될 것이다. 고용주가 노동자에게 자가 노동의 소득 이상을 지불할 리가
없고(때로는 노동자에게 직업 전환에 드는 비용을 별도로 지불할 수 있겠지만) 노동자도 그 이하를
받을 리가 없다. 어느 노동자가 이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면 경쟁을 통해 다른 사람이 고용되고 만다. 
고용주가 이보다 더 낮은 임금을 제시한다면 노동자는 자가 노동을 하는 것이 더 유리하므로
아무도 응하지 않을 것이다. 이와같이 고용주가 아무리 적게 주려고 해도, 또 노동자가 아무리 많이
받으려 해도 임금은 자가 노동의 가치에 의해 정해진다. 일시적으로 임금이 이 수준을 초과하거나
미달한다고 해도 그 수준으로 복귀시키려는 경향이 즉시 발생한다. / (진보와 빈곤. 196쪽)

중력법칙을 전혀 모르는 사람도 물체가 땅으로 낙하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듯이 정치경제학과 
무관한 사람들도 단순한 경우의 임금법칙은 알고 있다. 어떤 사람이 스스로 농사지을 땅을 쉽게
구할 수 있다면 자신의 노동이 생산하는 양보다 적게 받고 남 밑에서 일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토지가 독점되어 자연의 기회가 노동으로부터 폐쇄되어 있을 때"에 한해서, 노동자는 일자리를
얻으려고 서로 경쟁하고, 농장주인은 다른 사람을 고용하여 그 사람의 노동이 생산하는 것과 
임금의 차이를 소득으로 취할 수 있다. / 진보와 빈곤. (205쪽)/ 헨리 조지(Henry George). 비봉출판사 ]

저는 앞서 김철수씨가 만약 가구공장에 취직해 의자를 만들게 된다면 상황이 달라질 것이라 얘기했습니다.
바로 고용주와 임금노동이 결합하게 되면서 노동이 본격적으로 사회적 성격을 띠게 된다고 했는데, 그럼
노동의 사회적 성격 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산에서 나무를 구해 의자를 만들었던 김철수씨의 노동은 한마디로 ‘자가노동’ 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노동형태는 거의 대부분 자가노동이 아닌 임금노동으로 바뀌어버린 상황입니다. 
다시말해 김철수씨가 가구공장에 취직을 한다면 ... 이때부터 김철수씨는 (출퇴근 포함)회사에서 정해준
시간표대로 일을 해야 하며, 마음대로 쉴 수도 없습니다. 또한 의자를 만들어서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특별히 고민하지 않아도 됩니다. 왜냐하면 의자는 더 이상 김철수씨의 소유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냥 만들뿐이죠. 목적의식이 사라진 것입니다 ... 더불어 오늘날의 자본주의 경제의 생산방식은 
고도로 분업화 되어있기 때문에 김철수씨는 최종적으로 생산될 의자가 어떤 모양인지 고민할 필요도 없습니다. 
[@ 자가노동 이었다면 의자 디자인은 김철수씨 생각대로 됐을 것입니다. ] ~ 또한 의자가 완성되어도 
누구에게 어떻게 팔려나갈지도 모릅니다 ... 이렇게 김철수씨는 자신의 노동이 자가노동이 아닌 분업화와
임금노동으로 바뀌게 되면서 노동의 "총체성"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 결론적으로 의자를 만드는
모든 과정이 여러 사람에 의해 분업화 되므로 사회적 관계가 형성되고, 완성된 의자 대신 고용주에게
임금(월급)을 받게 되므로 이 또한 사회적 관계가 형성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 물론 여전히 집에서 가내수공으로 무언가 만드는 사람들도 존재하지만, 결국은 그들도 
생산물을 누군가에게 팔아서 생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사회적 이라는 것입니다. ]

이러한 임금노동의 사회적 관계에서는 "착취"가 발생하게 됩니다. 
[@ 헨리 조지(Henry George. 1839~1897) , 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 ] 

동시대를 살았던 헨리조지와 마르크스, 그리고 헨리조지가 ‘진보와 빈곤’에서 언급했던 
‘토지의 독점’ 은 결국 마르크스가 주장했던 자본가 계급의 ‘생산수단 독점’ 과 크게 다를게 없습니다. 
다만 마르크스는 생산수단에 토지뿐만 아니라 공장, 기계 같은 불변자본을 포함합니다. 또한 
완성된 노동생산물(의자)의 가치와 직원에게 지급하는 임금(월급)의 가치 차이는 곧 마르크스가 얘기한
잉여가치 와 근본적으로 그 의미는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 (노동생산물가치 – 임금) = 잉여가치 ]

헨리조지의 주장대로라면 노동자는 자가노동(집에서 직접 의자를 만들어 사용, 의자가 월급!) 때보다 
소득이 더 적다면 굳이 남 밑에서 일할 이유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용주도 자가노동 보다 더 많은 
임금을 노동자에게 지불할 이유가 없습니다. 결국 임금 수준은 자가 노동가치 에 의해 결정되며, 일시적인 
임금의 초과나 미달은 곧바로 "자가 노동가치" 수준으로 복귀한다는 것이 헨리조지의 생각인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토지의 독점으로 노동자가 자연의 기회로부터 폐쇄되어 있다면, 즉! ~ 산(山) 소유주가 
따로 있어 김철수씨가 의자를 만들 나무를 자연으로부터 더 이상 구할 수 없게 된다면, 이때부터 김철수씨는 
자가노동이 불가능하므로 일자리(임금노동)를 위해 다른 사람과 경쟁을 하게 되고, 여기서 착취가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르크스적으로 표현해 본다면 자본가 계급의 생산수단[산(山)] 독점으로 인해 착취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 쉽게 말해, 김철수씨는 가구공장에 취직해 의자 2개를 만들 노동력을 투입하고,
월급은 1개 의자만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1개는 가구공장 사장이 가져가게 되는 것입니다.
[◆ (2개 의자 – 1개 의자) = 1개 의자(잉여가치) ]

"임금은 자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노동에 의해 생산된다" 는 헨리조지의 주장은 
최소한 ‘노동’을 바라보는 관점에 있어서만큼은 마르크스와 어느 정도 맥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를 바라보는 둘의 시각차는 컸습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변증법적 모순으로 보았지만
헨리 조지는 토지에 대한 불로소득(지대)을 환수함으로서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더 윤택해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간혹 "마르크스 경제학은 폐기된지 오래된 이론이다" ... 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세계가 공황의 분위기에 휩싸일때마다 사방의 수많은 전문가와 학자들은 
마르크스(공황이론)를 소환합니다.

"지금 우리는 자본주의의 과다가 아닌 부족으로 고통받고 있다!" ... 라고 말한 사람은 바로 마르크스 입니다.
마르크스는 처음부터 중국이나 러시아 같은 나라에서는 사회주의 혁명이 불가능 하다 생각했습니다. 
밀도있는 자본주의 단계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신자유주의를 비롯한 자본주의 단계에서 보여주는
여러 실망스런 징후(양극화, 빈부격차, 초국적 독점자본 등)들 이후에 사회를 변혁시키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한계에 막혀버렸다는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 그것이 정치적이든 사회적이든 ....

지금 세계는 국가가 개입하는 방식이 자본주의 모순을 어느정도 치료하고 있지만 ... 그 전에
인류 역사에 자본주의가 도입되고 나서, 단 한번도 전세계가 동일한 자본주의로 통일된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때 저는 개인적으로 마르크스의 이론은 아직 실행조차 된적이 없는 유보된 상태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지금 여기서 사회주의를 하자고 외치는게 아닙니다. ... (부의 불평등 같은)불합리한 상황에 대해
우리의 의식이 점점 더 구조화 되고 있는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 "입에 풀칠하기 위해 해뜰 때부터 해질 때까지 노동하는 사람들은
불평불만도, 꿈도 키우지 못한다. 중국의 대중이 반항적이지 않는 한가지 이유는
죽자 살자 노력해야 간신히 먹고살수 있기 때문이다. 생존을 위한 사투는 역동적 이기는커녕 
어느면에선 너무나 정적이다" < 맹신자들(The True Believer) / 51페이지/ 에릭 호퍼(Eric Hoffer)/ 궁리 출판>]

샌프란시스코의 부두 노동자 였던 '에릭 호퍼(Eric Hoffer)'가 1951년 발표했던 
"맹신자들(The True Believer)" 이라는 책의 한 구절입니다. 

'맹신자들'은 대중운동의 본질에 관한 고전 입니다.
위에서 빈민해석에 대해 빌려온 구절중에 마지막 부분이 저에게 상당한 울림을 주었습니다. 

"생존을 위한 사투는 역동적 이기는커녕 어느면에선 너무나 정적이다!"

위 게시물에서도 자세히 보여주고 있지만, 
영국이나 한국을 비롯해 (신자유주의를 도입한)전세계 수많은 국가들의 부의 불평등 문제는 
이제 단순한 불평등 문제 차원을 넘어서, 체제(자본주의)를 위협하는 수준에 다가서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상황 또한 역사 변증법의 한 과정일수도 있겠지만, 중요한건 
우리의 대중들이(특히 한국) 여전히 너무나 "정적" 이라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그렇다고 거리로 나가 세상을 전복(顚覆)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에릭 호퍼가 빈민들의 생존사투를 '정적이다' 라고 표현했던 것은 대중의 정체성 이전에, 
분명한 사회구조적 문제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구조적 문제는 과연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바로 우리들 모두가 스스로의 "노동"의 가치를 단 한번도 환기시켜본적이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 저는 그런 생각이 많이 든다는 것입니다..

전에 인터넷에서 "노동"에 대한 30분이 채 안되는 짧은 동영상 강의를 본적이 있습니다. 
그때 강사분께서 수배전단을 보여주는데, 내용을 보니 본적과 주소, 그리고 인상착의가 나왔었습니다. 

신장과, 몸무게, 말씨 ... ... 그리고 놀라웠던게 수배전단 하단 마지막줄에 써있던 "노동자 풍 !" 

공공기관(경찰)에서 조차 "노동자(노동)"는 수배전단의 한쪽 귀퉁이를 차지하며 
범죄자의 한 의미로 전락했던 것입니다. (@ 사실은 경찰 자신들도 노동자 신분인데도 말이죠 ... )

내가 하는 일(노동)의 가치와 그에 대한 (경제적, 사회적)대가가 누구나 납득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사회 안에서 정당하게 분배되고 있는지 우리는 지금까지 너무나 "정적(조용히)"으로 대응한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많이 든다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도 기억하시겠지만, 
2008년 미국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이후, 오큐파이(occupy) 라는 월가 점령시위가 있었습니다. 
99% 들의 행동이었습니다 ... 그런데 당시 오큐파이와 함께 진행된 또 다른 시위가 있었는데 
바로 "계좌 이동 캠페인(Move your money)" 이었습니다. 유명한 대형은행들의 계좌를 해지하고 
다른 곳으로 옮기자는 운동 이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계좌이동 캠페인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최저임금 1만원이 화두가 되고 있습니다. 
찬반 의견이 팽팽한데, 여기서 중요한건 모두가 숫자에 매몰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쉽게말해, 자영업의 소득(숫자)과 근로자(알바)의 소득(숫자)만이 부각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특별한 규제없이, 사회적으로도 공감하기 힘들 정도로 폭등한 건물주의 임대료 상승분과
대기업 프랜차이즈 본사들의 폭리는 뒤편으로 물러나 "(영세)자영업자 Vs 알바"의 대결구도만 
부각되고 있는 것입니다. 

GDP규모가 증가할수록, 선진국일수록 ... 그 사회의 서비스의 가격은 높아집니다. 
다시말해 사람이 직접 몸을 움직이는 일에대한 서비스 가격은 높아진다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인건비가 높아진다는 것인데, 자유무역이 높은수준으로 이루어진다고 해도 
서비스 부분의 교역은 일반적인 상품만큼 잘 교역되지 않는 특성이 있습니다.

뉴욕 미용실에서 머리를 하던 사람이 서울의 어느 동네 미용실 가격이 무척 저렴하다고 
다음 날부터 서울로 비행기 타고 날아오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뉴욕 미용실 디자이너의 솜씨가 
동네 미용실 보다 월등히 나은 수준으로 머리를 잘 자른다고 보장할수도 없습니다(생산성) 

한국 사회에서 평범한 서민들이 낮은 소득으로 살아갈수 있는 이유중 하나가 
바로 이 낮은 서비스 가격 때문입니다. 저렴한 서비스 가격은 곧바로 낮은 임금과 열악한 근로조건 등으로 
연결됩니다 ... 그리고 임금근로자의 낮은 소득은 다시 주변의 낮은 서비스 가격 때문에 
다행스럽게(?) 생활을 해 나갈수가 있습니다.(@ 양날의 칼) ... 안정되고 높은 임금이 보장되는 일자리가 
부족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영업의 세계로 자의반 타의반 떠밀려 들어와
극도의 경쟁상황 속에서 또 다시 낮은 서비스 가격으로 승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영업자들의 서비스가 일반적 상품처럼 교역이 자유롭다면 
가격 경쟁력으로 세계에 수출이라도 해볼텐데 ... 서울의 미용실 비용이 아무리 싸다고 해도 
뉴욕의 스칼렛은 서울로 오지 않습니다. (올 마음이 없습니다.) 

대안 없는 비판은 의미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수많은 99% 의 비판들이 모여서 대안의 초석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노동의 대가가 앞서 헨리 조지가 얘기했던 것처럼 "자가노동" 수준의
바로 그 노동인지, 진지하게 한번쯤 고민해 보면서 "노동"에 새로운 환기가 되었기를 하는 바람입니다. ... 더불어 
최소한 정적인 대중은 되지 말자는 것입니다. 



[@ 급하게 작성하느라 글이 매끄럽지 못할수도 있습니다. 
또한 맞춤법이 틀린것이 있더라도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









어차피 자본주의 세계화 속에서 북한처럼 자급자족 독고다이로 갈 거 아니면 부가가치 싸움을 할 수 밖에 없는데

독점이거나 공정거래에 위반되는 탈법 불법적인 사업을 벌이는 것이 아닌 이상 프렌차이즈나 기업의 이윤 추구 자체를 죄악시하는 건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말씀하신 내용 중에 "서비스 가격"에 대한 부분은 상당히 동의를 하는데요

저는 국내에 열악함 임금이나 서비스 이용료가 단순히 착취의 개념이 아닌 서비스 질의 하향평준화 때문이라고 봅니다

지나치게 영세 자영업자가 많아서 서로 제살 깎아먹기를 하고 있어 저급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저급 노동자들이 너무 많아서 경쟁력이 없어요

그게 바로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라고 봅니다 이건 정부가 나서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죠

규제를 완화하고 치열한 경쟁을 통해 서비스 질을 향상시키려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아니면 유럽이나 북미처럼 시장 파이 자체가 커지고 이민자가 물밀들이 밀려오는 개방 국가를 만들던지요.

지금의 상황을 정부가 나서서 분배해주고 편 갈라주고 경기에 개입하는 방식으로 풀어서는 곤란합니다

정부는 심판을 정확하게 봐야하는 것이지 경기에 개입하면 경기 자체가 망가지고 끝나버릴 수 있다고 봅니다.

지금 인터넷 일각에서 불고 있는 홍위병 인민재판류의 감정적 분노는 전혀 문제 해결이 도움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긴글 쓰느라 피곤해서 짧게 답변드리겠습니다.

저는 프랜차이즈나 기업의 이윤추구 자체를 죄악시 한다고 말한적이 없으며 
그걸 죄악시 할 이유도 없습니다. "이윤추구"는 기업의 존재 이유니까요 ~ 

다만 국내 프랜차이즈의 물량 밀어내기 같은 강제성이 부여된 갑질을 지적한거였으며,
자영업자들의 매출익 중에서 과도한 임대료 부분에는 어느정도 정부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하는겁니다 ... 더불어 정부가 심판을 정확하게 봐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지금까지 한국 정부가 과연 공정한 심판자의 역할을 하고 있었는지 의문이 많이 듭니다. 
또한 님께서는 규제를 완화하고, 치열한 경쟁을 통한 서비스 질 향상을 해야 한다고 언급하셨는데
세계가 70년대 말부터 지금까지 무려 35년간 그렇게 해온 결과를 바로 지금 게시물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세 자영업자가 많아서 서비스 질이 하향 된다는 걱정을 하기보다는 
영세 자영업자가 많아질수밖에 없는 우리 사회의 작금의 구조적 문제에 대해 
한 번쯤 진지한 고민을 해보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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