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시 공동체의 경우, 농부들을 가만히 내버려 두었더라면 얼마 안 되는 잉여를
전사와 사제들에게 나눠주기 보다는 차라리 잉여가 생기지 않도록 생산을 줄이거나
소비를 늘렸을 것이다. 처음에 전사와 사제들은 힘으로 강제하여 농부들을 생산케 하고
잉여를 내놓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일한 대가의 일부가 놀고 있는
사람들을 부양하는 데로 빠져 나간다 하더라도 열심히 일하는 것이 농부들의 본분이라는
윤리를 받아들이도록 유도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 이 방법을 쓰게 되자
강제력을 쓸 일이 적어지고 따라서 지배에 드는 비용도 줄어들었다 ... 오늘날까지도
왕이 근로자보다 더 많은 수입을 올려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면 영국의 임금 생활자의
99퍼센트가 아마 큰 충격을 받을 것이다. "의무" 라는 개념은 역사적으로 볼 때
권력을 가진 자들이 그렇지 못한 자들에게 자기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주인의 이익"을 위해
살도록 유도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어져 왔다." - ( 게으름에 대한 찬양/ 20 페이지 ) ]
[◆ "만일 사회를 현명하게 조직해서 아주 적정한 양만 생산하고 보통 근로자가 하루 4시간씩만
일한다면 모두에게 충분한 일자리가 생겨날 것이고 실업이란 없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부자들에겐 충격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그렇게 많은 여가가 주어지면 어떻게 사용할지도
모를 것이라 믿고 있기 때문이다." - ( 게으름에 대한 찬양/ 24 페이지 ) ]
[◆ "현대의 생산방식은 우리 모두가 편안하고 안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그런데도 우리는 한쪽 사람들에겐 과로를, 다른 편 사람들에겐 굶주림을 주는 방식을
선택해 왔다. 지금까지도 우리는 기계가 없던 예전과 마찬가지로
계속 정력적으로 일하고 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어리석었다.
그러나 이런 어리석음을 영원히 이어 나갈 이유는 전혀 없다." - ( 게으름에 대한 찬양/ 33 페에지) ]
[▶ 게으름에 대한 찬양. / 버트런드 러셀(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사회평론 ]]
예전에 구청에 볼일이 있어 들린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구청건물 앞에 큰 트럭 한 대가 서 있었고, 그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긴 줄을 서서
무언가 순서를 기다리는 것 같았습니다. 알고 보니 기초생활수급자 같은 형편이 어려운
분들에게 기부 받은 식품을 구청에서 나눠주는 푸드마켓 행사였던 것입니다.
참치 캔과 고.추장, 된장, 조미료 등 일상에서 꼭 필요한 아주 기본적인 식품을 나눠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 광경을 지켜보던 어떤 나이 많은 아주머니 두 분이 "우리는 왜 안주냐?" 고
구청직원에게 따져 물었던 기억이 납니다. 식당일부터 간병인 까지 평생 일만 열심히 하며 살아왔는데,
나라에서 양말 한 켤레 주는 꼴을 못 봤다며, 강한 불만을 드러낸 것입니다.
사회가 분배를 강조하면 극도의 거부감을 드러내며, 그 즉시 "빨갱이"를 소환하던 분들이
정작 분배의 현장을 목격하자 (분배에)거부감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분배받지 못하는
현실에 분하고 억울하다는 듯, 역설적 히스테리 반응을 보였던 것입니다. ~ ~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강요된 희생에 익숙해진 삶에서 그분들에겐 "분배"는 어쩌면 너무나 낯선 단어일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분배의 요구는 "죄"가 아닙니다. ... 이것이 낯설음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그동안 우리에게
"노동"의 진정한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주인의 이익을 위해 살도록 유도하는 수단으로 "의무"라는 개념이
이용되어져 왔다는 러셀의 주장처럼, 인간 삶의 존재이유가 되어버린 우리의 "노동하는 삶" 에서
분배를 요구해 보기도 전에 사회는 이미 "노동자는 요구할 수 없는 자!" ... 라는 명제를 각인시켜
권력(주인)을 위해 살도록 유도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 그래서 저는, 이제 우리사회도
노동의 유연화가 아닌, 보다 쉽게 분배를 요구할 수 있는 "분배의 유연화" 에 대한 사회적 담론이
우선적으로 필요한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 다시 말해 "분배의 유연화"는
무상으로 무엇을 나눠달라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는 당당히 요구할 수 있는 자!" ... 라는
인식의 대중화가 필요할 때라는 뜻입니다.
노조조직률과 단체협약 적용률이 OECD 꼴찌에 가까운 10% 수준밖에 안 되는 현실에서,
우리 정부와 여당은 노조 때문에 해고가 어렵다며 해고를 쉽게 하는 (노동)개혁안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또한 비정규 노동자가 800만이 넘는 시대에 얼마전 한국의 여당 대표는
"노조의 쇠파이프" 와 "국민소득 3만불" 사이에 교묘한 프레임을 형성해 놓았습니다.
[◆ 어떤 프레임을 부정하면 그 프레임이 활성화 된다 ... 그리고 프레임은
자주 활성화 될수록 더 강해진다. 이 사실이 정치 담론에 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내가 상대편의 언어를 써서 그의 의견을 반박할 때,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의 머릿속에서는
상대편의 프레임이 더 활성화되고 강해지는 한편 나의 관점은 약화된다.
이는 진보주의자들이 보수 세력의 언어와 그 언어가 활성화하는 프레임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들의 언어가 아닌 우리의 언어를 써서 우리의 신념을 말해야 한다는 뜻이다. ]
[▶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 조지 레이코프 / 외이즈 베리 출판. 2015 ]
노조의 쇠파이프를 말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반복하여 말할 때 마다 우리의 관점은 약화되고, 그들의 언어는 강해집니다.
즉! ~ 국민들의 머릿속에는 (노조 = 쇠파이프) 가 공식화 되어
주변에서 이제 "노조" 라는 말만 들려도 조건반사적으로 "쇠파이프" 라는
폭력적 이미지가 자동적으로 떠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 우리는 여기서
정치적 레토릭(Rhetoric) 속에 얼마나 파괴적이고 잔인한 속성이 은폐되어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대한민국 여당의 대표가 노조의 쇠파이프를 얘기할 때
유럽사회는 "노동자는 당당히 요구할 수 있는 자! " ... 라는 담론의 주체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쉬지않고 투쟁하고 있습니다. ... 한마디로 한국이(여당 대표가) 노동의 문제를
정치적 프레임으로 치환하며 과거를 향해가고 있을 때, 유럽사회는 건강한 노동의 미래를 위해
노동자 자신들의 프레임을 스스로가 더욱 더 견고하게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난 35여년의 시간동안 신자유주의의 "경제 성장" 이라는 거시적 담론 무장에
속수무책으로 자신들의 권리를 희생해야만 했던 노동자들은
이제 99% 라는 압도적인 수적 우위를 확보했지만, 힘에 있어서는 압도적인 열위의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열위의 상태가 또 다시 경제위기로 인하여 희생을 강요 당하고 있습니다.
[ ◆ LA의 소방관 고디는 약속 장소에 늦게 나간 것이 화근이 돼
사랑하는 아내와 어린 아들이 폭탄 테러로 죽는 모습을 목격한다.
테러범은 콜럼비아의 반군 지도자인 일명 '울프'라는 인물로
콜럼비아 영사와 미 CIA 간부를 노린 범행으로 무고한 고디의 가족이 희생된 것이다.
고디는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정부가 속히 범인을 검거하기를 기다리지만
수사는 제자리걸음을 면치 못한다 ... 울프는 미국을 빠져나가고 분노한
고디는 직접 범인을 잡기 위해 내란이 한창인 콜럼비아에 잠입한다. ~ ]
콜래트럴 데미지[Collateral Damage] ~ 라는 "아놀드 슈왈제네거" 주연의 헐리웃 영화입니다.
영화를 보지 못했으니 작품성과 평점에 대해서는 특별히 할 말이 없습니다 ... 그런데 여기서 뜬금없이
헐리웃 영화를 언급한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영화제목 "콜래트럴 데미지" 때문입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아군이든 적군이든 결국 누군가는 승리를 하고, 그 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의
피해가 발생하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애꿎은 민간인의 피해를 가리키는 (군사)용어가 바로
콜래트럴 데미지[Collateral Damage] 입니다 ... 더불어 우리말로는 "부수적 피해" 혹은
"이차적 피해" 라고 번역됩니다.
자유민주주의, 독립, 통일, 민족해방, 테러와의 전쟁, 평화 등 ... 전쟁을 위한 다양한 동기(Motive)는
"부수적 피해" 라는 새로운 형태의 고통을 수반합니다. 하지만 수많은 민간인의 피해는[Collateral Damage]
이제 자신들에게 고통을 가한 주체들이 실체가 없다는 것에 혼란만 가중되어 더욱더 괴로워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전쟁 중에 고통 받은 수많은 민간인들은 자신들에게 피해를 입힌 주체가 바로
"평화와 자유민주주의" 같은 모호함과 난해함 이라는 사실에서 그만 좌절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누군가는 생명을 잃었고, 누군가는 살던 곳을 떠나야 합니다 ... 이렇듯 고통의 실체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의 고통은 가해자인 "평화와 자유민주주의" 에 가려져 소리 없이 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모티브(Motive)가 부수적 피해를 생산하는 방식입니다. ... 그럼 이쯤에서 우리는 새로운 모티브(Motive)를
하나 더 추가해 볼 수 있습니다. 바로 "노동 유연화" 입니다.
속도와 경쟁의 시대 !
세계는 경직된 노동시장이 국가와 기업의 경쟁력을 떨어뜨려 성장을 저해한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저임금, 비정규직, 파견근로, 고용불안 처럼 ... 예상되는 수많은 콜래트럴 데미지[Collateral Damage] 를
조용히 삭제해줄 참신한 동기(Motive)가 필요해진 것입니다. ... 더불어 노동 유연화는
더 나은, 더 부유한 국가가 될 것이라는 "희망"을 주입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경우
"희망" 또한 부수적 피해의 다른 이름이 될 수 있습니다 ... 왜냐하면 달성될 수 없는 희망은
"절망과 상실"을 동반하기 때문입니다 ... 결론적으로 상처 입은 수많은 "부수적 피해"는
(마찬가지로)모호함과 난해함속에 존재하는 "노동의 유연화" 라는 가해자(Motive)에 가려져
결국은 조금씩 사라져 가게 될 것입니다.
모티브(Motive)는 "익명성"과 닮아 있습니다.
존재하되 실체가 없어 가해의 흔적은 남지만 책임의 무게는
공기처럼 언제든지 공중에서 분산될 수 있습니다 ... 우리는 여기서 "노동 유연화" 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것이 아니라 "분산되는 책임"에 위기의식을 느껴야 합니다.
현재 진행되는 프랑스 파업의 주류가 20~40대라고 합니다.
심지어 10대(고등학생)들도 시위에 동참해 스스로가 미래에 노동의 담론 객체가 되지 않기 위해 싸운다고 합니다.
정치는 프레임의 좌.우를 횡단할 수 있습니다. ... 하지만 "노동"은 한결같이 고정된 위치에 서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것 외엔 아무런 대안이 없습니다.
[ ◆ 한 노동자는 10년 가까이 현대차에서 일했는데, 그 사이 자신을 고용한 인력회사가
일곱 번이나 바뀌었다고 말한다. 어느날 문득 "내가 지금 회사를 다니는 건가" ... 하고
자문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말에서 나는 존재감을 상실한 채 헤매는, 카프카의 소설 속
소외된 인간의 모습을 떠올렸다 -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와의 대화 中 ]
<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 (28쪽) - 최장집 고려대 교수 >
노동자가 당당히 요구할 수 있는 사회가 된다면 과연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을 것인가?
모두에게 만족스런 분배가 실현되면 우리는 진정으로 "노동"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인가?
물론 저는 해답을 모릅니다. ... 다만, 유럽 노동 운동의 넓은 스펙트럼이 부러울 뿐입니다.
[@ 간단히 댓글 몇마디 한다는게 길어졌습니다.
개인적 견해이므로 그냥 지나치듯 읽고 버리십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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