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3월 16일 목요일

◆영국 산업혁명 이야기 (by 물파스)

[ 영국 산업혁명 이야기 ]



(말 그대로 이야기 입니다.
편안하게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도움이 되실거라 생각됩니다.) 
산업혁명 시기에 영국은 석탄이 상당히 풍부한 나라였습니다. 그전에는 목재연료를 사용했었는데 
16세기 중반을 넘어서부터 목재연료의 고갈 위기가 다가옵니다. 그래서 이러한 목재연료 고갈에 대한 
대비책으로 영국은 석탄자원을 활용하게 되고, 이것은 곧 석탄산업과 함께 그와 관련된 
다른 여러 산업분야의 발전을 가져오게 됩니다(1550년 ~ 1660년) ... 하지만, 탄광속의 고이는 물을 
밖으로 빼내야 하는 배수처리 문제와 캐낸 석탄을 운반하는 수송문제, 철광석 용해문제 같은 
기술적 문제들도 석탄산업의 발전과정 속에서 함께 생겨나게 됩니다. 

이렇게 영국이 목재연료의 고갈을 석탄연료로 전환하는 시기였던 17세기 중반(1660년)과 
그 이후에도 탄광속의 고인물을 빼내야 하는 배수처리 문제같은 부분에서는 
대부분 사람의 힘을 빌려야 했습니다. ... 다시말해 물을 빼내는 배수펌프의 펌프질은
오직 사람의 근력만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 그러다가 1712년에 철물상 주인이었던 
토마스 뉴커먼이 최초의 증기기관을 발명하게 됩니다. 그리고 뉴커먼의 증기엔진은 
석탄광산의 고인물을 퍼 올리는데 사용하게 되는데 ... 이것은 화력이 사람의 근력을 대체하게 되는
하나의 감동적 사건이었으며 근대기의 태동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뉴커먼의 증기엔진은 연료를 너무 많이 잡아먹어서
석탄 값이 저렴했던 석탄광산 이외에서는 차라리 사람이 펌프질 하는게 
비용측면에서 더 나은 경우가 많았습니다 ... 이후로 뉴커먼의 증기엔진은 거의 사용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최초의 증기기관 이었다는 점과 함께 향후 증기기관 발전을 촉진시켰다는 부분에서는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그리고, 드디어 1760년대에 스코틀랜드 출신의
제임스 와트가 획기적인 증기엔진을 개발하게 되었고, 이것이 면직 방적기에 먼저 활용되면서
이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엄청난 양의 면직물이 생산되어 시장에 나오게 됩니다 ...

원래 영국은 전통적으로 모직물(짐승의 털실로 짠 옷감) 공업이 발달 했었지만, 
당시 인도에서 캘리코(calico) 라는 면직물이 들어오면서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되었습니다. 
이에 영국은 자국의 모직물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인도산 면직물(캘리코) 수입을 금지시켰으나 
워낙 인기가 좋다보니 완벽하게 막을수는 없었습니다. ... 모직물에 비해 값이 싸고, 부드럽고, 튼튼했으며, 
습기를 잘 흡수했던 면직물의 뛰어난 품질은 갈수록 인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면직물의 폭발적 수요만큼 공급은 그렇게 원활하게 뒷받침 되어주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수입제한에 따른 공급부족 해결방안은 예전보다 더 나은 기술을 개발하는것 밖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고 생각하여 기존 면직물 생산기술을 좀더 효율적으로 개선하고 개량하게 됩니다. 
이후 이렇게 개발된 다양한 기술들이 조금씩 축적되어 또 다른 분야(화학 등)의 기술들을 파생시켰고
결국, 1760년대에 들어와 와트의 증기엔진이 면직 방적기와 직조기 등에 먼저 적용되고 개량되면서
영국을 비롯한 유럽 전역에서 면제품의 생산과 수요가 더욱 더 급증하게 되었습니다 ... 더불어 이러한 
면직공업은 본격적인 "산업혁명"을 주도하게 되는데, 이후 19세기초에 최초의 증기엔진을 이용한 
배(증기선,1802년)가 만들어 지면서 물품 운송에 상당한 변화가 생겼으며 ... 1820년대에 비로소 
철도가 등장하게 되면서 수송에 일대 혁명이 일어나게 됩니다.

[◆ 참고로 독일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는 당시 유럽에 처음 등장한 기차를 타본 뒤 
극심한 전율과 충격적인 공포를 느꼈다고 말했습니다 ... 당시 기차의 속도는 시속 30~40km 에 불과했었지만, 
이런 속도는 마차보다 무려 3~4배나 빠른 속도였기 때문이었습니다 ... 그래서 주변의 풍경을 편안하고 
여유롭게 감상했던 그동안의 여행과는 다르게 철도의 여행은 그 과정속에서 절대로 예전과 같은 편안함과 
여행의 진정한 의미인 "여유"를 찾을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 결국 철도의 등장으로 
오로지 목적지만 남는 것을 경험한 하이네는 "철도가 공간을 살해했다" 라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다시말해 철도 여행으로 상징되는 속도가 인간의 평범하고 평화롭던 일상과 함께 
의식 및 심리 전반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것을 예견한 것입니다 ... 저는 개인적으로 [철도가 공간을 살해했다] 라는 
하이네의 말은 속도에 매몰된 오늘날 현대사회의 모습에 당장 적용을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너무나 잘 어울리는 탁월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 우리가 시(詩)를 읽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

이렇게 영국에서는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으로 인한 소위 동력혁명(動力革命)으로 ... 더 많은 
증기선과 더 많은 철도와 더 많은 공장들이 생겨나게 되는데 ... 이러한 것들을(배, 철도, 공장 등) 
만들어 내려면 당연히 엄청난 자원이 필요했습니다. 다시말해 더 많은 철과 더 많은 석탄과 더 많은 옷감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더 많은" 이라는 외침을 충족시키려면 방법은 단 하나! 
지금보다 "더 획기적인 기술" 뿐이었던것 입니다. ... 좀더 혁신적인 기술이 필요했던 거죠.

예를들어, 직물공업의 팽창(발전)은 직물을 깨끗이 표백해야 하는 일거리도 함께 늘어났는데, 
그동안의 전통적인 직물표백 방법은 표백장에서 햇빛에 장시간 노출시켜 표백하는 것 이외에는 
특별한 방법이 없었습니다. ... 이렇게 절대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밀려드는 수요만큼 공급을 제때에 맞추기가 
상당히 어려울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필요에 의해 사람들은 조금씩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게 됩니다.

"우리 공장에서 일하는 소위 노동자들아! ~ 잘 들어라 ! 
직물은 소변에 담그고 상한 우유로 세탁하면 눈부시게 표백할수 있으니까 ... 앞으로는 
오줌도 아무대나 싸지마라 ~ ! "

"아! ~ 근데 주문은 밀려드는데, 소변이 부족하다니 ;; ... 그렇다고 
공장 노동자들에게 강제로 오줌을 싸게 할 수는 없잖아! ~ 어떻게 해야 하나? "

이렇게 직물공업 에서는 많은 사람들의 필요와 고민이 더해지면서 좀더 발전된 표백기술 개발을 위한 
노력이 가속화 됩니다. ... 그러다가 드디어 1785년에 베르톨레의 "염소"를 이용한 화학적 표백방법이 개발되면서 
전통적인 표백방법을 대체하게 됩니다.(염소를 가성칼리 용액에 녹이는 기술) 

"여러분! ~ 제가 드디어 합성소변을 개발했어요! ~ 많이 애용해 주세요! - (베르톨레) "

이후 1799년에 글래스고 대학의 테넌트(Tennant)는 염소를 석회석에 흡수시켜서 
요즘 우리가 세탁기를 사용할때 넣는 슈퍼타이 같은 가루세제인 "표백가루"를 개발하게 되어, 
베르톨레 보다 좀더 발전된 화학적 표백 상품을 만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와같이 면직공업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기계공업 및 철의 제련법과 함께 화학산업의 본격적인
출발을 알리는 시기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새로운 기술들이 끊임없이 개발되고, 
산업혁명 이전에는 가질 엄두를 낼수 없었던 각종 상품들이 아주 저렴한 가격에 대량으로 세상에 
쏟아져 나오게 됩니다 ... 이제 평범한 사람들도 누구나 원하는 상품을 소비할수 있을거라 생각하였고
앞으로 더 많이 행복하고 여유로운 생활이 되리라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기계동력의 놀라운 능력은 수공업의 숙련노동을 밀어내면서 임금이 인하되었고 ... 이즈음 
프랑스의 나폴레옹 전쟁으로 영국의 경제는 점점더 불황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그 결과 고용이 감소하면서 
실업자가 늘어나고 임금체불도 늘어나게 되었는데, 사람들은(노동자) 이 모든 것의 원인이 바로 "기계" 때문이었다며 
기계를 파괴하자는 사회운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 바로 "러다이트운동(Luddite Movement)" 입니다! 

기계를 사용하면 노동자(직조공) 100명이 할수있는 일을, 한 대의 기계가 대신할수 있었습니다.
기계를 작동할 소수의 인원만 필요하였을뿐 ... 많은 노동자들이 하루아침에 거리로 나오게 되었고,
공장에서 나온 노동자들중 일부는 농촌으로 가거나 미국(식민지)으로 이민을 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하루종일 도시를 돌아 다녔습니다.

이때 기계를 소유하고 있던 공장주가 나타나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얘기합니다.
◆ "나! 공장 주인인데! ~ 기계를 관리하고 공장을 점검할 사람 5명이 필요합니다!"
◆ "제가 할수 있습니다!" ... "저는 최소한의 보수만 받아도 됩니다!" ~ ~ ~
◆ "저는 보수는 필요없고 빵만 주시면 됩니다!"

공장주는 단지 기계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예전에는 상상할수 없는 조건으로 
노동자들을 마음대로 선택할수 있었습니다.

◆ "좋습니다! ~ 그런데 하루에 얼마나 일할수 있습니까?"
◆ "10시간! ~ 12시간! ~ 14시간!" ~ ... 노동자들은 살기위해 불가능한 조건들을 경쟁적으로 
제시하기도 했습니다.(찰스 디킨스의 소설에는 12살 어린이도 공장에서 일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렇게 기계의 출현은 노동자들, 특히 숙련 노동자들이 평생에 걸쳐 배운 것들을 한순간에 빼앗아 갔습니다.
물건들은 예전보다 더 많이 만들어졌지만, 일자리는 점점더 줄어들고 있었습니다.

노동자의 생활이 말할수 없을 정도로 비참해지자, 이런 상황을 불합리한 것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 단순히 기계를 소유하고 있거나, 그 기계를 물려(상속) 받았다고 해서
노동자들을 노예처럼 부리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이죠 ... 그래서 공장이나 기계처럼 
다른사람(노동자)의 운명을 좌지우지 할수있는 물건들은 개인이 아닌 공동의 소유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들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 모두 잘 아시겠지만, 바로 "사회주의" 사상입니다. 

사회주의자 중에서도 인류사의 한 획을 그은 천재 "마르크스"를 빼놓을수는 없습니다.
마르크스는 다른 보통의 사회주의자들과는 약간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 
노동자들이 생산수단(공장, 기계)을 단순하게 공유하는 형태는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공장주가 자발적으로 노동자들에게 공장이나 기계를을 내어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노동자들이
기계를 물리적으로 파괴 한다고 해도 진정한 투쟁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마르크스는 (전세계)모든 노동자들이 단결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만약 100명의 노동자들이 단합하여 근로시간과 임금에 대해서 공장주와 협상을 하려할 때
100명에 포함되지 않은 또 다른 수많은 노동자들이 거리에 존재하고 있다면, 공장주는 여전히 협상하려는 
100명의 노동자들보다는 계속 우위에 서게됩니다(싼 임금의 노동자들이 거리에 넘쳐나므로) ... 따라서 
마르크스는 한사람도 빠짐없이 전세계 모든 노동자들이 일치단결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공장주가 더 이상 우위의 입장에서 협상할 수 없을때까지 노동자들이 단결 하는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노동자들의 단결이 범세계적으로 강해지고 견고해 진다면 ... 나중에는 임금인상의 요구뿐만 아니라 
공장과 기계들마저 노동자들의 소유가 될수도 있다는 것입니다.(결국 이것이 진정한 생산수단의 "공유" 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르크스의 견해는 ... 사람들의 직업관계에도 다른 시선을 제공합니다. 
세상에는 직업이라는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생산수단(공장,기계 등)을 소유한 유산계급과
소유하지 못한 무산계급만 존재할뿐 이라는 것입니다 ... 다시말해, 재산이 있는 부르주아(bourgeois)와
재산이 없는 노동자인 프롤레타리아(proletariat)의 구별만이 있다는 것입니다 ... 그리고 마르크스는
지금까지의 세계역사는 모두 이 두계급의 끊임없는 (계급)투쟁의 역사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 이후에
1848년에 그 유명한 "공산당 선언" 이 세상에 나오게 됩니다.[자본론 1권은 1867년에 출간됨]

[◆ "공산주의자들은 이제까지의 모든 사회질서를 강제력으로 
전복시킴으로서만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을 공공연하게 선언한다. 
지배계급들로 하여금 공산주의 혁명 앞에서 전율케하라. 프롤레타리아들은 
혁명에서 족쇄 말고는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들은 세계를 획득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 ! " <공산당 선언 87쪽> ]

1848년 공산당 선언이 발표되고 난후, 
1864년 런던에서는 최초의 국제적인 노동자들의 조직이 탄생하게 됩니다. 
정식명칭은 "국제노동자협회(International Working Men's Association)" 인데 ...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제1인터내셔널(International)" 입니다! ... 이것은 결과적으로 보면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를 외친 마르크스의 의식이 현실로 변용되어 나타난 결과였던 것입니다. 

그럼 이쯤에서 마르크스의 얘기는 잠시 접어두고, 시선을 영국의 바깥으로 옮겨가 보겠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영국 안에서 산업혁명의 열기가 점점더 뜨거워지는 동안, 영국의 바깥에서는
식민지 쟁탈전이 뜨겁게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 대표적인 쟁탈전은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의
식민지 쟁탈전 이었습니다 ... 영국과 네덜란드는 1651년에 영국이 제시한 항해조례(Navigation Act) 
때문에 전쟁이 벌어지게 됩니다.(3차례 영-란 전쟁이 벌어짐)

[영국: "이제부터 유럽 이외의 지역에서 생산되거나 수확한 생산물들을 우리 영국이나
영국 식민지로 수입하는 경우에는 무조건 영국선박이나 식민지 선박으로만 수송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영국은 언제든지 다른 유럽 나라의 선박을 검문할수 있다!" ]

당시 유럽에서 상당한 해운국력을 보유하고 있던 네덜란드 에게는 영국의 이러한 항해조례가 
당연히 네덜란드를 무시하는 처사였습니다 ... 하지만, 전쟁에서 네덜란드는 영국에 참패하게 되었고, 
당시에 네덜란드가 지배하고 있던 미국 대륙의 뉴욕(New York - 해운제독 요크공, 오라녜공이 공략한 데서 따옴
... '새로운 요크' 라는 뜻.)을 영국이 넘겨받게 됩니다 ... 그리고 이때에 미국대륙에서 영국이 확보한 식민지 영토는 
대서양 연안에 한정된 토지였습니다 ... 바로 엘리자베스(Virgin Queen) 여왕에서 따온 버지니아(Virginia), 
새로운 잉글랜드 라는 뜻의 뉴잉글랜드(New England), 원주민 언어로 '큰 언덕' 이라는 뜻의 
매사추세츠(massachusetts) 등으로 뉴욕을 합하여 모두 13개 농업식민지 였습니다.
(@ 영국인의 식민은 농업이 주목적 이었기 때문에 동부해안의 좁은 토지에만 집중하였음) ... 이렇게 
영국은 미대륙에서 나름의 식민영토(토지)를 확보하긴 했지만, 면적면에서는 스페인과 프랑스에 
많이 뒤지고 있었습니다. 

영국과의 3차례 전쟁에서 모두 패한 네덜란드는 17세기 말이 되자 해상 주도권을 거의 잃어버리게 되었고, 
무역 또한 쇠퇴하게 됩니다 ... 이렇게 네덜란드가 유럽대륙에서 쇠퇴한 뒤로는 프랑스가 영국의 경쟁자로 
부상하게 되었는데 ... 프랑스는 모든 권력이 왕에게 집중된 ... 소위 "절대주의"가 성장하기 시작한 
앙리4세[프랑스의 왕(1589년~1610년)]때 적극적인 해외 영토확장이 이루어지면서 
북아메리카의 뉴펀들랜드(New Foundland)와 캐나다의 동부지방에 식민지를 확보하게 됩니다.

1608년 세인트로렌스 강가에 퀘벡(Quebec)시를 건설한 프랑스는 17세기 말에는 미시시피강 유역의 
루이지애나(Louisiana)도 확보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프랑스의 식민지가 
영국의 식민지를 포위하는 형태를 보이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북미 대륙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잦은 충돌은 지정학적으로도 피할수 없는 운명이었던 것입니다. 
[◆ 퀘벡 - 원주민 언어로 '강이 좁아지는 곳 이라는 뜻]
[◆ 몬트리올(Montreal) - 프랑스어로 '왕의 산' 이라는 뜻]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영국과 프랑스의 북미의 식민지수가 점점 늘어나자 ... 식민지 경계선을 둘러싼 
양국(영국, 프랑스)의 분쟁은 점점더 잦아지게 됩니다. 그리고 본국에서 전쟁이 벌어질 때마다
식민지(북미)에서도 본국과 연동된 전쟁이 자주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 그중에서 1754년에서 1763년
사이에 벌어진 프렌치-인디언전쟁(French and Indian War) 은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영국의 북미대륙에서의 식민지는 동부연안에 그치고 있었지만, 더 많은 식민지를 확보하기 위해서 
서부로 점차 영토 확장을 계획해 가고 있었습니다 ... 그리고, 영국의 식민지인들이 오하이오강(江) 유역에 
진출하기 시작하자 서부 일대에서 인디언과 모피(毛皮) 거래를 하고 있던 프랑스 식민지인들과 
이해(利害)관계가 대립하면서 전쟁의 위기감이 고조되었고, 이에 따라 영국은 식민지보호를 위해 해군을, 
이어 캐나다 정복을 위해 정규군을 파견했고, 프랑스는 인디언과 제휴하면서 전쟁이 발발하게됩니다 ... 그리고 
영국군은 1759년에 프랑스 본대가 결집한 퀘벡을 함락시키게 되고, 1760년에는 몬트리올 마저 함락시키면서 
전쟁(프렌치-인디언 전쟁)을 종결시킵니다. 프렌치-인디언전쟁(French and Indian War)에서 승리한 영국은 
1763년 '파리조약'을 체결하면서 북미대륙에서 그동안 프랑스가 차지하고 있던 식민지 영토를 전부 차지하게 됩니다. 
더불어 인도에 남아있던 프랑스 잔재들도 모두 쫓아내면서 ... 영국은 명실상부 미국대륙과 인도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점하게 됩니다.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가 신대륙 아메리카를 발견(1492년)하고, 이후에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의 많은 유럽국가들이 앞을 다투어 아메리카 대륙으로 진출하여 
자신들만의 식민지를 건설했습니다 ... 그런데, 대부분의 유럽국가들은 식민영토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본국의 제도와 관습 등을 그대로 식민지로 가져가서 운영하게 됩니다 ... 귀족, 장원(봉건적 토지소유형태),
부역 같은 봉건적 요소들이 대표적 이었는데, 이들 식민지들은 본국의 엄격한 통제와 함께 
식민지 이익 또한 본국에 귀속되었으므로 식민지들의 독립적인 발전은 기대하기가 힘든 상황 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유럽국가들 중에서 영국만은 예외적으로 북미대륙의 식민지들에게 자치권을 허용했으며, 
본국의 통제도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북미대륙에서 영국의 식민지인들은 일찍부터 자유와 평등주의적 
가치관이 형성되었고, 특히 토지를 얻기가 쉬워서 흑인노예나 하인들을 제와하면 대부분의 식민지인들은 
자영농민 이었습니다 ... 다시말해 북미대륙에서의 영국 식민지인들은 대다수가 이미 "유산계급"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 이렇게 북미대륙의 식민지인들에게 형성된 유산계급적 요소들은 
곧바로 식민사회의 중심적 평가기준이 되었습니다. 즉! ... 토지나 노예 같은 재산이
그 사회의(식민지) 중심적 풍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본국 이었던 영국에서는 사회적인 평가기준이 혈통이나 가문, 학식 등 이었던것에 비해 
북미대륙의 식민지에서는 그 사람의 재산이 바로 사회적 평가기준이 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학위 논문이 토지로 치환(置換)되는 순간입니다) ~ 재산을 많이 모을수록 사회적 신분이나 지위가
상승되었기 때문에 계급의 유동성이 컸으며, 계층구조 또한 엄격하지 않고 단순했습니다. ~ 다시말해
왕이나 귀족신분이 존재하지 않았던 식민지 사회는 구성원의 대부분이 중산계급(중산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영국이 바깥에서 식민지를 확보하며 힘의 크기를 키워가는 것과 맞물려 영국 안에서는 
앞서 살펴보았던 산업혁명의 기술적 발전으로 인한 대량의 상품들이 시장에 쏟아져 나오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영국은 식민지(북미대륙)의 주도권 싸움이었던 프렌치-인디언전쟁(French and Indian War)과
식민지가 아닌 유럽대륙에서 일어난 7년전쟁 등으로 (비록 전쟁에서 승리는 했지만)심각한 재정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 그래서 재정난 타개목적으로 식민지에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게 됩니다 ...

1764년 설탕법을 제정하여 설탕, 포도주, 커피 등의 수입에 관세를 부과하고, 1765년에는 인지세법을
만들어 법정문서, 신문, 광고 팜플렛 등 대부분의 종이인쇄물에 인지를 붙이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식민지인들은 과세권한은 오직 각 식민지 의회에만 있다는 것을 강조하며, 자신들은 본국(영국) 의회에
식민지의 대표(의회)를 보낸적이 없다며 본국의 강제적인 과세에 불만을 드러냈습니다.

"대표없는 과세는 존재할수 없다!"

설상가상으로 1773년에 동인도회사(東印度會社)가 홍차(紅茶)를 너무 많이 매입해서 파산위기에 몰리자 
영국정부는 이것이 주주들과 은행의 연쇄적 위기로 연결될까봐 남아돌던 차(茶)를 동인도회사가
북미식민지(미국)에 독점적으로 판매할수 있는 권리를 주었습니다 ... 그러나 북미 식민지에도 그동안
나름대로 차(茶)를 독자적으로 거래하던 식민지(미국) 상인들이 있었는데, 이제는 본토(영국)의 명령에 
따라 오직 동인도회사가 판매하는 차(茶) 만을 수입해야 했던 것입니다 ... 또한 예상대로 동인도회사가 
판매하는 차(茶)에는 높은 세금이 따라 붙었습니다 ... 상황이 이렇게 되자 식민지인들의 불만이 
점점더 쌓여가게 됩니다. 

[◆ 식민지 미국] - "나는 직접 중국에서 차(茶)를 수입해 사먹겠습니다!"
[◆ 영국 ] - "화가 나겠지만, 동인도회사 이외에는 그 누구도 차(茶) 거래를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본국(영국)과 동인도회사의 일방적이고 강제적인 정책이 계속되던 중에, 
1773년 12월 보스턴 항에 차(茶)를 실은 3척의 선박이 입항하게 됩니다. 그리고 인디언으로 분장한 
약 60명의 급진파가 습격해 홍차(紅茶) 342상자[약 7만 5천달러($)상당]를 바다에 던져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보스턴 차(茶) 사건" 입니다.

"보스턴 차(茶) 사건" 이후 화가 난 영국(본국)정부는 보스턴 주민과 함께 다른 식민지인들에게도 
경고를 하는 의미에서 보스턴 식민지의 자유를 제한하게 됩니다 ... 그리고, 1775년 보스턴 교외에서
식민지 민병과 영국군이 교전을 벌였는데, 이때 민병 8명이 숨지는 사건이 벌어지고, 이어서 
영국(본국)과 식민지의 무력충돌이 시작됩니다 ... "식민지의 지배완화"를 요구하며 미국은 
워싱턴의 지휘아래 약 1만 5천여명의 군을 조직하게 됩니다 ... 그리고 당시 프랑스는 미국을 도왔는데
이미 살펴보았듯이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 쟁탈전에서 프랑스는 영국에게 자신들의 북미대륙 식민지를 
모두 내어준 뼈아픈 과거가 있었습니다 ... 당연히 영국에 대한 원한이 쌓여있었고, 
또한 비대해진 영국의 영향력을 견제하려는 목적도 있었던 것입니다. 

@ 1776년 - 독립선언서[7월4일, 토머스 제퍼슨(Jefferson, Thomas)] 
@ 1777년 - 연합규약체결(13개주로 구성된 “미합중국”의 탄생)
@ 1783년 - 영국의 미국 독립승인(미국과 프랑스의 동맹)

이렇게 미국이 식민지에서 독립국가로 비교적 쉽게 옮겨갈수 있었던 것은 ... 우리가 이미 앞서서 
살펴보았듯이 모국에 의존하고 있던 다른 많은 식민지들과는 다르게 미국은 미국만의 자치권이 비교적
빠르게 성숙했으며, 본국(영국)의 통제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식민 초기부터 누릴수 있었던 자유와 
평등적 가치관이 일찍부터 형성되어 있었고 ... 사회구성원 대다수가 유산계급의 중산층 이었던 
미국만의 토착적인 경제구조 등과 같은 부분이 미국독립에 많은 영향을 미쳤던 것입니다 ... 따라서 
이러한 미국만의 사회.경제적 풍토에서 영국의 과도한 과세와 동인도회사의 독점적 무역은 
미국인들에게는 자신들의 자유가 침해당하는 것과 크게 다를바 없었던 것입니다 ...

이제 시선을 다시 산업혁명으로 돌려보겠습니다. 
기계동력과 함께 혁신적인 기술들이 맞물리면서 시장에는 엄청난 상품들이 쏟아져 나오게 됩니다.
이에 따라 산업 전반에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 바로 "호황" 입니다!

하지만 호황은 지속될 수가 없습니다. 언젠가부터는 물건들이 팔리지 않고 창고에 쌓이는 시기가 
다가옵니다 ... 수요가 부족해진 것입니다. "불황"입니다. 사람들이 물건들을 만족할 만큼 구매해서 
이제는 더 이상 물건들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차고 넘쳐도 사람들은 항상 더 많은 것을 원합니다 ... 다만, 산업혁명이 한창 진행되던 시기인 
19세기에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을 사고 싶어도 돈이 없어 살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가난했다는 얘기가 아니라 시중의 돈의 유통량, 즉! "통화량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19세기 중엽부터 제1차 세계대전발발 전까지는(1870년 ~ 1913년) 
금본위제도(Gold standard)가 절정을 이루던 시기였습니다. 다시말해 정부가 통화량을 늘리려면 
그만큼의 금(Gold)이 있어야만 했습니다 ... 예를들어, 철수라는 사람이 금(gold) 한덩어리를 은행의 
금고에 보관합니다. 그러면 은행은 다음과 같은 증서를 철수에게 써줍니다.

"철수가 은행에 금 한덩어리를 맡겼다! ... 그래서 우리는 철수가 이 보관증을 가져오면 
다시 금을 내어 줄 것이다!" ... 여기서 보관증은 바로 오늘날의 지폐가 되는 것이고,
지폐의 가치가 결정되는 본위(本位)는 금(gold) 한덩어리가 되는것입니다. 그리고 금본위제하에서 지폐(보관증)는 
언제든지 금과 교환(태환)할수 있었습니다. 더불어 지폐(보관증)를 많이 유통시키려면(통화증가), 
그 만큼 금(gold)의 양도 함께 늘어나야 합니다. 결국 금본위제에서 시중의 유동성(통화량)은 
본위인 금(gold)의 양에 구속되어 있다고 할 수 있는것입니다. 

공장과 창고에는 물건들이 점점더 늘어가고 또 쌓여가고 있는데, 돈이 부족해서(통화량 부족) 
팔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자 사람들은 금(Gold)의 양을 늘리지 않고서도 시중의 통화량을 
늘릴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게 됩니다 ... 바로 "부분지급준비금" 제도입니다. 

예금자가 은행에 돈을 맡기면(예금하다), 뱅크런(Bank run 대량예금인출사태) 같은 비상 상황에 대비해 
일부를 은행에 남겨두고 나머지를 대출에 활용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은행에 남겨두어야 하는 일부의 
돈을 "지급준비금" 이라고 하며, 그 비율을 "지급준비율" 이라고 합니다 ... 사람들이 한날한시에
모두 돈을 찾아가는 경우는 거의 드물기 때문에 약간의 돈만 은행에 남겨두고 나머지를 대출에 
활용하면서 은행은 돈을 벌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지준율 10% 가정), 
최초 예금자가 A은행에 1,000달러($)를 예금합니다. 그럼 A은행은 다른 누군가에게
대출을 하기 전에 지준율(지급준비율) 10%에 해당하는 100달러($)를 은행에 남겨두고, 
900달러($)를 다른 누군가에게 대출해 줄수가 있습니다. 그럼 다시 900달러($)를 대출받은 사람은 
그 돈으로 필요한 소비를 하게 되고(누군가는 상품을 팔겠죠), 그 돈(상품을 판 돈)은 
다시 은행(B)에 예금됩니다.(어느 은행이든 상관없음) ... 그리고 은행(B)은 다시 지준율 10%에 해당하는 
90달러($)를 남겨두고, 다른 누군가에게 810달러($)를 대출해 줄수가 있는 것입니다 ... 이렇게 
시중의 돈은 지준율(10%)에 의해서 대출가능 금액이 점점 줄어들게 되는데 ... 이러한 
예금과 대출의 반복은 더 이상 대출을 해줄수가 없을 때까지 계속되어 갑니다. 

그리고 반복이 멈추었을때, 시중에 유통되는 돈의 양은 최초에 A은행에 예금된 1,000달러($)의 10배인
1만달러($)가 됩니다 ... 실제로 만질 수 있고, 지갑에 넣고 다닐수 있는돈, 즉! 시중에 유통되는 돈은
1,000달러($) 뿐이지만, 나머지 9,000달러($)는 수많은 사람들의 예금잔액과 대출잔액이 각자의 통장에
기록만 되있을 뿐입니다. [◆ 참고로 지준율의 역수를 계산하면 통화량이 얼마만큼 늘어나는지 
알 수 있습니다 ... 위 사례에서 지준율이 10% 였으므로, 역수를 구해보면 (1/0.1 = 10배)가 됩니다.
다시말해 지준율이 10% 일때는 최초 예금액의 10배가 된다는 것입니다 ... (1천달러($) => 1만달러($)]

이렇게 부분지급준비금 제도는 금본위제도에서 금(Gold)의 양을 늘리지 않고서도 통화량을 늘릴수 
있었던 괜찮은 방법이었지만 ... 증가된 통화량의 본질은 결국 사람들의 빚(debt) 이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또한 지급준비금 제도로 아무리 통화량이 늘어날수 있었다고 해도 아직까지는 금본위제였기
때문에 통화량 증가에는 어느정도 제한이 있었고[@ 금(Gold)의 증가도 필요했으므로 ~]
무엇보다 산업혁명 시기의 엄청나게 생산되던 물건들이 모두 팔릴수는 없었습니다 ... 그래서 영국은 
산업혁명이 절정을 이루던 19세기에는 쌓여가던 물건들을 팔기위해 해외시장 개척에 좀더 많은 
집중을 하게됩니다 ... 소위 "자유무역"을 밀어붙였던 것입니다.

19세기초 인도를 장악했던 영국은 인도에서 생산되던 상품이 만약 영국의 상품과 경쟁하게 되면
인도 상품들의 생산을 금지 시켰습니다(자유무역의 취지가 무색해 집니다 ;;) ... 더불어 당시의 영국은 
프랑스의 와인이나 독일의 맥주와 비교하면 특별히 내세울 만한 국민적 음료가 없었습니다. 여기에 
수질도 좋지 않았는데 ... 런던 템즈 강물로 만든 음료수에는 세균이 수백만 마리가 있을 정도로 
오염이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차(茶)를 끓여마시게 되었는데 ... 알코올이 아니었으므로 
일에 대한 지장도 없었고 무엇보다도 끓인 차(茶)는 물에 대한 오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즈음 서인도제도(북미와 남미대륙 사이에 있는 크고 작은 많은 섬들)에서 설탕이 들어오면서
끓인 차(茶)에 설탕을 타서 마시는 홍차(紅茶) 문화가 발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차(茶)는 대부분 중국에서 수입을 했었는데, 앞에서도 살펴보았지만 당시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웬만한 무역은 거의 독점을 하고 있었던 상황이었고, ... 마찬가지로 중국과의 무역도 동인도회사가 
독점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영국은 중국의 차(茶) 처럼, 중국에게 수출할 마땅한 영국 상품들이 없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수출보다는 수입이 월등이 많았음] ... 차(茶)값을 당시에 외국과의 교역에서 자주 쓰이던 
은(silver)으로 지불하게 됩니다. 이렇게 중국과의 차(茶) 무역이 점점 늘어감에 따라 
영국의 은(silver)의 유출이 심각해지자 ... 영국은 인도에서 아편을 들여와 중국으로 밀수출해서 
차(茶) 값으로 유출되었던 은을 다시 회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당시 동인도회사의 무역 독점권한에 대해 불만이 많았던 산업자본가들은
1832년 1차 선거법 개정으로 자신들에게도 선거권이 생기자 자신들의 대표자를 의회에 보내 
동인도회사의 무역독점권한을 폐지시키게 됩니다. ... 동인도회사의 독점무역이 폐지되자 본격적으로 
수많은 자본가들에게 "자유무역"의 기회가 주어지게 되었고, 이러한 변화로 중국과의 아편무역은 
그 규모가 계속적으로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중국은 아편으로 인한 국민들의 아편중독 문제와 함께, 당시 중국의 세금은 은(silver)으로 징수하는 
지정은(地丁銀) 제도를 시행하고 있었는데, 막대한 은(silver)이 해외로 유출되자 은(silver)의 양도 줄었고 
가격도 치솟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재정난에 처하게 된 중국은 영국 상인들의 아편을 몰수해
태워버리고 무역을 금지 시켰습니다. 이에 분개한 영국은 중국을 공격하게 됩니다.(◆ 아편전쟁) 

◆ (1840년~1842년) - 제1차 아편전쟁, 난징조약(홍콩 영국령, 시장개방)
◆ (1856년~1860년) - 제2차 아편전쟁(애로전쟁), 톈진조약, 베이징조약(11개항 추가 개항)

이렇게 중국은 아편전쟁 끝에 영국에게 교역의 문을 활짝 열게 되었고, 
또한 산업혁명의 여파가 1820년대부터는 유럽대륙은 물론 북미 전역으로 확산되어 
최신식 공장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 대량생산의 풍요를 잠시나마 느낄수있던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1845년에서 1849년 사이에 아일랜드에서 감자기근이 발생하면서 
당시 아일랜드 인구의 13% 수준이었던 약 100만명의 농민이 굶어죽게 됩니다 ... 더불어 
농촌이 아닌 산업지역의 노동자들 사정도 비참하긴 마찬가지 였습니다 ... 결국 유럽에서
더 이상 희망을 찾을수 없었던 많은 사람들은 점차 신대륙(미국)으로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 오래전 써놨던 글인데, 다시 매끄럽게 정리해 올리는 글입니다.
새로운 글을 쓰거나 혹은 예전에 썼던 글을 다시 재업할때나 모두 저에게는
많은 공부가 됩니다. ... 그리고 이슈인에서 얻는것도 많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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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과 경제성장